온누리 신문 - 25년 만에 온누리교회 방문한 리안 목사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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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에 온누리교회 방문한 리안 목사의 간증

 2020-01-19      제1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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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
25년 만에 온누리교회 방문한 리안 목사의 간증

“고향에는 언제 돌아갈거니?”
故 김사무엘 목사의 질문을 피하던 한 미얀마인 청년이 있었다. 한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비전을 얻고 망명했던 인도로 돌아갔던 청년이 2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것도 목회자가 되어서 말이다. 그 주인공은 리안 목사다. 리안 목사는 현재 호주 멜버른에서 성도 1천3백 명이 모이는 빅토리아친교회를 섬기고 있다. 리안 목사는 온누리교회와 함께 미얀마 선교를 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호주에서 중국을 경유해서 19시간 만에 한국에 왔다. 한국은 25년 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부시게 성장해 있었다. 온누리교회부터 찾았다. 리안 목사에게 온누리교회는 고향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는 제가 몹시 그리워했던 그대로 늘 포근한 곳이에요. 작은예수 40일 새벽예배에서 짧게나마 온누리교회 성도님께 인사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얀마민주화운동, 망명…
우여곡절 끝에 오게 된 한국

 

리안 목사가 청년시절일 때 고국 미얀마는 격동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미얀마 군부정권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교사였던 리안 목사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열심히 민주화운동을 하던 리안 목사는 군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인도에 망명했다 그리고 1994년 한국에 왔다.
“미얀마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인도로 피신했는데 인도에서도 미얀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인도에서 머무는 것도 위험할 것 같아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굉장히 헌신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온누리교회에 와보니까 정말 그렇더군요. 온누리교회에서 보낸 시간은 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어요.”
당시 온누리교회 미얀마예배는 뚬재우 목사가 섬기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연이 닿아 온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리안 목사는 서울근교 공장에서 일했다.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주일에 쉬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얀마에서의 민주화운동, 인도로의 망명, 보장되지 않은 신분 등 불안한 삶 속에서 리안 목사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그토록 예배를 사모하는 이유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이 오직 교회뿐이었거든요. 당시 구로에서 온누리M미션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를 드리고 나서 서빙고 온누리교회에 다시 와서 성경훈련을 받기도 했어요. 그만큼 갈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리안 목사는 故김사무엘 목사에게 일대일제자양육과 Bee성경공부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꾸준히 훈련을 받았는데 리안 목사의 삶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것 같았다. 변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시작됐다. 공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리안 목사는 선임근로자 대우를 받았다. 동료들에게 자신의 보너스까지 나눠주며 생산량을 높이자 공장 사장이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리안 목사는 미얀마예배에서도 리더로 쓰임 받으면서 온누리교회 선교의 비전을 보고 배웠다.
“故김사무엘 목사님이 저만 보면 ‘고향에 언제 갈 거야? 리안 너도 결혼하고 하나님 나라 위해서 일해야지’라고 물으셨어요. 그때마다 ‘언젠간 가겠죠’라며 넘기곤 했는데 어느 날 김사무엘 목사님의 바람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비전이 생겼어요. 미얀마에 돌아가면 죽는 거나 다름없으니 인도로 갔어요.”

 

또 다른 사역지 호주를 가다

 

1997년 한국을 떠나 인도에서 생활하던 리안 목사는 2000년 호주로 향했다. 호주에는 인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망명한 미얀마인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당시 리안 목사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결심보다는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미얀마인들을 보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두 아이를 둔 리안 목사 가족은 작은집을 임대해서 살았는데 그 집은 미얀마인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나 다름없었다.
리안 목사는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근로자들 13명과 작은 가정예배를 먼저 개척했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틈 날 때마다 미얀마인들의 정착을 도왔는데 그 일에 너무 매진한 나머지 정작 본인 일에 소홀해서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호주를 잘 아니까 미얀마인들이 집구하고, 학교 등록하는 등의 일들을 도와줘야지요. 도울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휴가를 쓰면서까지 도왔어요.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서 아프다고 거짓말까지 했어요. 그러다 농장주에게 들켜서 해고를 당했어요, 어떻게 살지 막막해하고 있었는데 성도들이 이참에 신학교에 가서 목회를 하라고 제안하더라고요. 자기들이 지원해 주겠다면서요.”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리안 목사의 고생이 배가됐다.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신학교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무조건 일했다. 리안 목사의 차에는 늘 작업복과 공구가 준비돼 있었다. 오죽했으면 교수들이 리안 목사의 안색을 보고 꼭 병원에 가보라고 당부할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오전에 수업이 있으면 오후에 일하고, 오후에 수업이 있으면 오전에 일했어요. 집에는 미얀마인들이 가득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늘 아침에 일찍 나오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집근처 쇼핑몰 바닥에 앉아서 공부했어요.
하루는 일하다가 수업에 늦어서 눈에 띄는 화장실에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화장실이었어요. 그 모습을 본 한 교수님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시면서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더라고요. 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펑펑 우시면서 자기 연구실에서 공부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어요.”

 

미얀마 복음화 위한 선교를 꿈꾼다

 

2006년 리안 목사는 우여곡절 끝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리안 목사의 소문난 섬김이 입소문을 탔다. 그 덕분인지 빅토리아친교회가 나날이 부흥했다. 지금은 성도 1천3백여 명의 출석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빅토리아친교회는 선교를 매우 열심히 하고 있다. 미얀마, 인도, 말레이시아, 호주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을 섬기고 있고, 미얀마 복음화를 위해서 8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서 6개 지역을 섬기고 있다. 신학생 18명도 후원하고 있다. 리안 목사는 온누리교회와 함께 미얀마 복음화를 위한 선교를 했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온누리교회가 가진 선교에 대한 비전과 열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미얀마에 복음을 전하고, 열방에 흩어져 있는 미얀마인들을 섬기는 선교를 한다면 분명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일대일제자양육도 저희 교회에 접목해보고 싶습니다.”
리안 목사가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다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고 했다.
“온누리교회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터닝포인트예요. 제가 온누리교회 성도님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을 거예요. 온누리교회가 저처럼 한국을 찾은 수많은 이주민들을 섬겨주십시오. 그들이 돈 대신 생명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섬겨주십시오.”

 작성자   김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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