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5)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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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5) 탐욕 

 2019-08-04      제12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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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치명적인 죄(5) 탐욕 
왕상 21:1~16 
이재훈 목사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돈과 소유에 대한 지나치고 왜곡된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구두쇠, 수전노라는 뜻의 영어 단어는 마이저(miser)’와 연결되는 ‘비참한(miserable)’입니다. 이 두 단어가 서로 연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구두쇠, 수전노의 삶은 결국 비참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탐욕은 서서히 우리의 목을 조여 오며 삶을 파괴시킵니다. 
 
 
탐욕의 다섯 단계
 
 
탐욕은 다섯 단계로 자라납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단순한 소유물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소유 행위 자체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필요하지 않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좋아하게 될 때부터 탐욕은 시작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소유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이 곧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소유가 자신의 신분,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에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해서 자신이 소유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과 소유물에 의해서 소유되는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소유물에 의해서 자신이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물건처럼 비인간화, 비인격화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 같은 낙심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자신의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필요와 문제에 대해서 무정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탐욕에 집중해서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부터 점점 분리되고, 담을 쌓게 됩니다. 타인의 필요를 점점 무시하면 고독하게 됩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소유까지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무정함은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와 존재는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고, 결국 무서운 악을 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의 중요한 구조를 형성하면 사회체계 자체를 탐욕스러운 악이 지배합니다. 사회체계 자체가 거대한 도적질이 됩니다. 이러한 탐욕은 점점 자라나 우리 인생과 사회의 목을 졸라 파멸시키고 맙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의 탐욕
 
 
탐욕의 다섯 단계의 악이 주전 856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왕 시대에 일어납니다.  아합왕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인물입니다. 그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시돈왕 엣바알은 바알과 에스다롯의 제사장을 겸한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인데, 자신의 딸 이세벨을 아합왕과 결혼시킴으로써 이스라엘까지 바알을 숭배하도록 전염시키고자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결혼할 때 바알 신상과 아세라 신상을 갖고 왔고, 남편 아합을 시작으로 북왕국 이스라엘 전체에 우상숭배가 물들게 했습니다.
아합왕이 어느 날, 자신의 궁 가까이에 있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미 아합왕에게는 풍성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합왕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였고,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땅의 경계는 다른 사람에게 매매할 수 없는 법이 있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했기에 왕의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합왕은 악했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낙심했습니다. 탐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될 때 깊은 절망과 낙심에 빠지게 합니다. 소유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아내 이세벨이 남편을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당신이 그게 뭡니까? 일어나 먹을 것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겠습니다.”(7절) 
빼앗아 준다는 것입니다. 왕이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탐욕의 세 번째 단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소유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면 어떤 탐욕이든 합리화해버립니다. 이세벨은 왕이 원하는 포도원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음모를 꾸밉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거짓 증인들을 세워 그를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타인의 필요를 무시하고, 거짓과 악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탈했습니다. 이것이 탐욕의 네 번째, 다섯 번째 단계입니다. 
 
 
탐욕을 이기는 승리의 삶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조심해서 모든 탐욕을 삼가라! 사람의 생명이 그 재산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눅 12:14~15). 
탐욕은 생명이 재산의 넉넉함에 있는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소유의식, 지나치게 왜곡된 소유의식이 탐욕입니다. 어느 부자가 수확이 잘 되어서 곡식을 쌓을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창고를 더 크게, 더 많이 지어서 물건과 곡식을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창고가 많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의 의식 속에 있는 잘못된 소유의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나’입니다. 내 곡식, 내 물건, 내 창고, 심지어 영혼도 내 영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순종하고 경배해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하나님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자체가 영적 전쟁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사탄이 성공한 것입니다. 사탄이 왜곡된 소유의식을 이용해서 탐욕이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원하게 하고, 소유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소유물에 의해 소유되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정하게 되고, 심지어 악을 행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유의식을 만족해 가는 탐욕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다. 돈을 사모하는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렀다”(딤전 6:10). 
돈이 악이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고, 돈을 사모하게 될 때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고통으로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왜곡된 소유의식, 지나친 사랑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소유는 많은 위험 속에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자만 그런 위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돈을 사랑하게 될 위험은 동일합니다. 가난해도 부해도 탐욕은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다섯 단계를 뒤집어 적용하면 됩니다. 첫째,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 소유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셋째, 소유의식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청지기 의식을 가진다.  넷째, 이웃의 필요에 대하여 민감해지고 필요를 채워준다. 다섯째, 선을 베풀기를 즐기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남을 섬긴다. 이것이 탐욕을 이기는 승리의 삶입니다. 
 
 
탐욕의 시대에 경종 울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
 
 
“거저 주는 사람은 더 많이 얻게 되지만 지나치게 아끼는 사람은 가난에 이른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남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도 목이 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잠 11:24~25). 
저는 이 말씀을 실천하는 분을 작년에 만났습니다. 지난해 4월 초, 고 김영길 장로님의 부인이신 김영애 권사님께서 두 분의 권사님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한 분은 85세 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그분의 사촌동생으로 72세 된 분입니다. 두 분은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봉제공장에서 도시락 하나로 하루 식사를 해결하고, 허기를 물로 달래며,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죽기 살기로 일하셨습니다.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너는 재봉틀만 돌리다 왔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두 자매는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선교하기가 어려워서 다시 한국에 와서 선교사로 살기로 했습니다. 어떤 분은 “무슨 한국에 선교사로 가느냐?”고 했지만 그분들은 여수 애향원에서 18년 동안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허락하신 기한이 되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얼마 전 시청에 넣은 노인복지 아파트가 승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기도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두 분이 평생 모든 돈, 한국 돈 6억5천만 원, 미화로 29만5천 불을 한동대학교에 기부하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걱정이 되어서 “앞으로 어떻게 사시려고 전 재산을 기부하십니까?”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희는 노후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우리 둘 합쳐서 1,200불 정도니 노인아파트 값 내고 절약하면 충분히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두 분은 사진찍히는 것 조차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한 탐욕을 이기고 승리하신 하나님의 청지기들이요, 과부의 두 렙돈이요, 옥합을 깨뜨린 귀한 분들입니다.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고, 소유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소유에 의해서 소유당하는 인생, 타인의 필요에 무감각하고, 때로는 악을 범하면서까지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에 무너지지 않고, 탐욕의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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