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7)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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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7가지 치명적인 죄(7) 탐색 

 2019-08-18      제12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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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치명적인 죄(7) 탐색 
마태복음 5장 27~30절 
이재훈 목사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마지막 죄는 ‘탐색’입니다. 영어로는 ‘lust’입니다. 탐색은 성에 대한 지나치고 왜곡된 욕구입니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의 대부분은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 왜곡되어 지나치게 변화된 것들입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악에 대하여 대항할 수 있는 정의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곡된 정의감이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분노, 겉으로는 정의감이지만 그 속에 이기심을 품고 표출하는 잘못된 정의감이 분노입니다. 허영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은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칭찬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정과 칭찬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면 허영이 됩니다. 그래서 자랑하게 되고, 위선에 빠지고,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탐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성에 집착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할 때 끔찍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탐색의 죄로 인하여 짙은 어둠에 빠져 있습니다. 대중문화는 선정적인 성적노출을 평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윤리와 도덕적인 장치마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면 편협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인권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보호하려 하고 있습니다. 헛된 이념으로 인간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사회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순간의 쾌락으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은 결코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불을 품었는데 그 옷이 타지 않겠느냐? 뜨거운 숯불 위를 걷는데 발이 데지 않겠느냐?”(잠 6:27~28). 
불을 품는 것은 엄청난 화상의 피해를 받게 됩니다. 불은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때만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이 하나님의 질서를 뛰어넘으면 우리를 불태우는 무서운 불이 되고, 엄청난 화상 피해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곡된 성의 문제, 탐색의 문제를 피해가시지 않고 정면으로 지적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옛사람들의 말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음란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27~28).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계명 중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몸의 문제, 외형적인 문제로 해석했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문제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이 사회의 문화를 환경이나 상황, 사람들의 문제 이전에 마음의 문제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탐색이란 마음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성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심리적 증상 용어 가운데 ‘동반의존성’(codependency)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하고, 받아야 할 사랑과 돌봄이 부족한 경우에 생깁니다. 그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되는 경우에 중독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적인 대상으로 전환되면 성중독자로 변하기도 합니다. 모든 동반의존자가 성중독자는 아니지만, 성중독자의 대부분이 동반의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공허함을 성적 욕구로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적 가정,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성중독자가 나오기 쉽습니다. 
성은 무섭게 우리 마음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한 감정, 상처와 죄 가운데 있을 때 성에 무섭게 몰입하게 해서 악순환에 빠지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의 뜻 안에 거할 때만 만족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성적인 욕구로 대체되면 우상숭배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이방신, 바알, 아스다롯 등이 성적인 죄악과 결부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은 결코 우리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성적인 탐닉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영원을 망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됩니다. 영원한 기쁨, 영원한 만족, 영원한 나라, 영원한 세상, 그 영원한 의미, 영원한 관계를 생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순간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입니까, 욥입니까? 
 
 
예수님은 먼저 남자들을 겨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여성들을 쳐다보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지 않고, 음란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남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시각적 자극에 민감하고 약하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눈을 통한 성적만족은 탐색의 길로 들어가는 초기 증상입니다. 눈이 마음을 끌고 가고, 눈이 마음의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탐색의 죄, 성적 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란이 되고, 간음이 됩니다. 눈을 통제하지 못해서 멸망한 사람이 바로 구약의 사사였던 삼손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라는 책임 있는 자리에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탐색에 빠져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눈을 다스리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삼손과 정반대로 성결했던 구약의 인물이 있습니다. 욥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순전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자랑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적으로 순결한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욥 31:1, 7). 
‘내 눈과 언약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눈을 바르게 지킴으로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적 성적 자극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이 경전을 지켰던 비밀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TV나 영화 등 온갖 세상의 문화를 보면 성적인 노출이 일상화되고 당연해졌습니다. 왜 자동차를 파는데 옆에 여자가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지면서 남성들의 눈이 점점 성적인 탐닉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남성 중 10%는 욥처럼 성적 유혹을 잘 극복하지만, 10%는 정반대로 삼손의 길로 가는, 문제가 심각한 중독자들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삼손입니까, 욥입니까? 혹 주일에는 욥, 평일에는 삼손, 많은 사람들이 볼 때는 욥, 혼자 있을 때는 삼손 아닙니까? 모든 남자 성도들이 욥처럼 눈과 언약을 맺고, 눈을 통해 성적인 탐닉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네 오른쪽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 눈을 뽑아 내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더 낫다”(29절).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눈을 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쪽 눈을 빼더라도 또 다른 기능이 그러한 욕구를 대신할 것입니다.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 손을 잘라 내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더 낫다”(30절).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칙은 어떤 구절의 문자적 의미와 다른 구절의 문자적 의미가 서로 반대될 때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과 손을 빼라는 것은 그 정도로 동일한 결단, 결심,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없는 것처럼 보지 않고, 손이 없는 것처럼 행하지 않는다면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의미가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죽이는데 고통스럽다거나, 유혹을 이기는 것이 어렵다면 지옥에서 영원히 겪을 고통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탐색의 유혹을 끊는 방법
 
 
그렇다면 남성들이 어떻게 탐색의 유혹을 끊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첫째, 그 문을 먼저 막아야 합니다. 눈을 철저히 굶기는 것입니다. 눈은 갈수록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눈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이 강화됩니다. 눈이 통제되지 않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닙니다. 훈련부족과 습관일 뿐입니다. 눈은 순전하게 통제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문화에 휩쓸려 가는 것보다 영적 순결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 다른 남성들과 더불어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든 멕도널드 목사님이 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를 보면, 남자가 성적 유혹을 통제하는 능력을 얻는 중요한 요인은 다른 남성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우정관계를 말합니다. 성적 타락에 빠진 사람과 우정을 나누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 사람들이 비교적 유혹에 덜 빠진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우정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성적 유혹에서 자신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 중인 병사들과 함께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을 때 유혹에 빠졌습니다. 
남자가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눠야 할 존재는 아버지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호, 안정, 위안을 가져다줍니다. 생존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머니의 품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남자 됨을 경험하고,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유혹을 이길 힘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올바르지 않은 관계에 있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그만큼 유혹에 많이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신의 아버지와 좋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영원한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 교회 안에 성도들 가운데 건강한 믿음의 아버지들, 욥과 같이 자신을 지키는 건강한 아버지와 같은 분들과의 교제를 통해 유혹을 이길 수 있고, 건강한 영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모임이나 관계가 중요합니다. 젊은 커플들이 순모임에서 연세가 있으신 분들과 대화가 잘 안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어르신들과 젊은 부부가 함께 대회를 나눌 때 육신의 부모로부터 경험하지 못한 사랑, 육신의 부모님이 줄 수 없었던 영적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성들의 친밀함에 대한 굶주림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여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하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남자를 떠올리며 욕망을 품는 여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기서 ‘떠올리며’라는 단어가 중요한데, 남자는 육체적인 눈에 약하지만 여자는 마음의 눈에 약합니다. 남자는 보는 것에 자극을 받지만, 여자는 듣는 것에 자극을 받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안목의 정욕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적 범죄로 확대되지만, 여자는 생각, 상상, 공상, 정신적 외도를 통해 성적 죄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는 순결을 지키려면 눈을 지켜야 하지만, 여자는 생각, 정서, 상상을 지켜야 합니다. 남자가 눈을 굶겨야 한다면, 여자는 상상, 공상, 불필요한 상상을 굶겨야 합니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껴주고 돌봐줄 사람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아버지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 마음속에 깊은 굶주림이 있습니다. 그 친밀함에 대한 굶주림을 성적인 욕구로 채우려고 할 때 무서운 성적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인정과 칭찬에 굶주린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그것을 채우려고 할 때 성적 죄에 빠집니다.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임신의 수고로움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네가 괴로움 속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 3:16). 
타락으로 말미암아 여성에게 주어진 괴로움은 임신과 해산의 괴로움이 더할 뿐만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에서의 갈등입니다. 후반부 말씀에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배하려 하나’라는 문장이 오래된 개역번역에서는 “남편을 사모하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남편을 사모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기 때문에 개역개정에서는 조금 더 명확하게 “원한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테쉬카’라는 단어는 매우 강렬한 왜곡된 갈망, 욕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지배하려 하나”로 번역한 것입니다. 단순히 원하거나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갈망이기에 아내가 남편을 지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호락호락 지배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오히려 다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포로, 힘으로, 무력으로, 재력으로, 이 세상의 힘으로 아내를 제압한다는 것입니다. 어긋난 관계입니다. 부부간에 정말 영혼과 영혼을 나누는 친밀함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고 복종하는 갈등관계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기는 정서적 공허함, 남편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관심이나 대접을 받지 못하면 여자는 상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자신을 알아주는 소리가 들릴 때 정서적 외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음란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이 간음이라면, 여자가 남성과 정서적 친밀감의 외도를 하는 것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과 결단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문장이 있습니다. “두 불의가 만나서는 절대 의를 이루지 못한다”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디서 찾느냐입니다. 만일 추구할수록 더 갈급하고, 채운다 해도 더 외롭다면 이미 잘못된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적인 부도덕함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요, 습관입니다. 어떤 생각도 우리의 허락 없이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생각도 우리의 동의와 선택 없이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죄는 나의 선택이요, 동의입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새가 머리 위에 앉아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능력이 아니라 간절함과 절박함과 결단입니다. 내 눈을 뽑고, 손과 발을 자르는 것 같은 결단이 있다면 능히 이길 수 있는 유혹입니다. 
거룩함이란 바른 선택이 모아진 바른 습관입니다. 우리에게 바른 습관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남자는 눈을 굶기는 것부터, 여자는 불필요한 공상을 굶기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마음의 굶주림을 사람, 물질이나 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야합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이요, 승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회개하고, 결단하고, 선포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결코 성적 유혹이 무너뜨릴 수 없는 인생이 되리라 결단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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