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참된 회개(4)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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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참된 회개(4)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2019-09-22      제1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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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4)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욜 2:12~18 
이재훈 목사 
 
 
회개는 “돌이키고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라 명하지 않으시고, 또 돌이킬 수 있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 있는 길,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허락하셨다 할지라도 인간은 자유의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타락한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인간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마음껏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 명하시니 저에게 회개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강력한 믿음입니다. 헛된 우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돌이켜서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내가 믿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참되신 하나님인지 아니면 헛된 우상인지를 분별하는 지성적인 돌이킴을 포함합니다. 또한 참된 회개는 마음을 찢는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는 것으로 회개를 표시했습니다. 옷이란 연약함을 덮는 것도 있지만, 우리의 정체를 속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음으로 진실을 표시하고, 회개를 표시했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옷을 찢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이 참된 회개의 징표가 될 수는 없다. 옷을 찢었다고 해서 참된 회개의 징표가 될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마음을 속이고 숨기는 기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외적인 형식이나 표현으로 자신의 진실 된 마음을 감추는 교묘한 죄악의 기술이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로 나가기보다는 우리의 계획, 결심, 외적인 형식, 의식적인 표현으로 참된 회개의 마음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회하는 마음 대신 다른 어떤 것들로 포장하는 기술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을 찢는 것
 
 
참된 회개는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감정적인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의 슬픔은 언제나 얼굴에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얼굴만 흉하게 합니다. 마음의 슬픔이 아니라 겉모양의 슬픔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위선자들의 슬픔을 보십시오. 바로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사울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아합왕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모두 겉모양의 슬픔이었을 뿐입니다. 진정 마음을 찢는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왜 마음을 찢어야 합니까? 위선을 내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으로 만족하기를 원하고, 진정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이 찢어져야 위선을 내ㅤ쫓을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찢어진 마음 사이로 깊은 슬픔의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로 강퍅한 마음과 단단한 마음이 깨어지면 그 속에서 눈물의 강수가 솟구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가 금식하고 슬퍼하며 통곡하면서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해 내게 돌아오라.’ 너희의 옷이 아닌 너희의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화를 내는 데는 더디시고 사랑이 풍부하시며 마음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시는 분이시다”(12~13절). 
 
 
참된 회개의 슬픔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원치 않는 실패로 인한 절망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둘째,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으로 고통스러워 흘리는 눈물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참된 회개의 슬픔은 내가 받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슬픔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그 자체에 대한 슬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선하심과 풍성하신 인자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것이 참된 회개의 슬픔입니다. 이 슬픔만이 죄를 사랑하던 우리의 감정을 내쫓습니다. 우리 마음에 숨어 있는 죄가 씻어는 것입니다. 목사이자 시인인 임병곤이라는 분이 쓴 ‘눈물 예찬’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눈물은 보약입니다. 
눈물은 그냥 물이지만 흘리고 나면 
몸에 면역력이 생기는 종합비타민입니다. 
눈물은 해독제입니다. 
해일처럼 밀려와 깊은 마음속을 뒤집고 
우울과 절망을 밀어내는 살균수입니다.      
눈물은 신비한 액체입니다. 
쇳물도 못 녹이는 꽁꽁 얼어붙은 
원수의 마음도 봄 눈 녹듯이 녹입니다. 
눈물은 하늘 씨앗입니다. 
마음껏 울고 나면 웃음꽃이 피어나고 
눈물을 뿌리면 기쁨을 추수합니다. 
눈물은 약속입니다. 
비 갠 후 희망의 무지개가 피어나듯 
눈물 후 언약의 무지개가 떠오릅니다. 
눈물은 은혜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수증기 되어 올라가면 
은혜의 단비가 되어 촉촉이 내립니다. 
아! 눈물 흘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참된 회개의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은혜의 단비가 되어 내려옵니다. 다윗이 회개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렸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죄를 슬퍼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병에 담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로 내려주십니다. 이 눈물은 억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심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눈물이 솟구쳐 오를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어떤 마음으로 인하여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유일한 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내가 다윗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위에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부어 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찔러서 상처를 입은 나를 보고 슬피 울 것이다. 마치 외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 듯이 슬피 울 것이며 맏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 듯이 슬피 울 것이다”(슥 12:10). 
마음이 찢어지는 통회의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허리에 창을 찔리시고, 온 몸에 채찍질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부어질 때 슬피 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신지 알게 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섭고 무겁고 끔찍한 죄인지를 깨달을 때 내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게 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우리 마음속에 큰 슬픔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마음은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임할 때 우리의 단단해진 마음을 깨뜨립니다. 강퍅한 마음을 찢게 합니다. 그 찢어진 마음에서 슬픔의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고통이 있지만 가장 큰 고통은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냈을 때의 슬픔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까닭은 우리 모두를 죄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결정, 주권, 사랑의 능력이시기에 그 슬픔을 품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아버지의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느낄 때 우리는 그 통곡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때 나에게 조금도 감정적인 슬픔, 통회, 마음을 찢는 느낌이 없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슬픔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그만큼 중한 것이고, 우리는 아주 가볍게 여겼던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그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끔찍한 죄악의 삶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슬퍼하며 그 죄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슬픔을 느끼게 합니까? 그래야 우리가 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한 지를 깨달아야 죄를 다시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상실한 하나님의 슬픔을 우리 가운데 일부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이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이 마음을 부어주시는 사역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이런 슬픔이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참된 회개의 눈물
 
 
“‘그러므로 이스라엘 모든 집은 확실하게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행 2:36~37). 
그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참된 회개의 영이 그들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슬피 우는 참된 회개의 애통함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참된 회개의 눈물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요, 죄를 사하시는 구세주임이 선포될 때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방인, 헬라의 많은 사람들, 갈라디아 사람들, 고린도 사람들, 데살로니가 사람들, 빌립보 사람들, 헬라 지역의 수많은 사람에게 마음을 찢는 회개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온 슬픈 통곡의 역사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찢는 회개의 역사가 우리 마음에서 사라졌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이 조금이라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마음을 찢는 통곡과 참회의 슬픔의 눈물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슬픔은 누군가 대신 흘려주는 눈물이 아닙니다. 각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슬퍼할 때를 정서적 공명이라고 합니다. 이 슬픔은 다른 사람이 우는 것을 보면 나도 괜히 슬퍼지는 슬픔이 아닙니다. 각자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생명력을 주는 슬픔입니다.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다줍니다.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의 넋을 빼앗고,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고, 자신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슬픔은 생명력을 줍니다. 능력을 줍니다. 소망을 주고, 삶에 의욕을 가져다주고,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죄를 떠나게 하고,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이 슬픔은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슬퍼합니다. 한 가지 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의 죄,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끌어안는 슬픔입니다. 이 시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우리가 슬퍼하고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이 슬픔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내 눈에서 눈물이 쉬지도 그치지도 않고 흘러내립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바라보실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애 3:49~50).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만성 질병입니다. 그래서 번번이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참회와 회개의 눈물로 씻어내야 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파낼 정도로 깊이 임하는 슬픔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토양은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슬픔이 깊이 임하지 않으면 마음의 토양이 기경되지 않는 것입니다. 묵은 땅과 같은 우리의 마음, 죄에 오염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깊이 파헤쳐야 좋은 흙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찢고 깊은 슬픔으로 죄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파해 쳐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은 축복입니다. 이 슬픔은 우리에게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마 5:4). 
왜 슬퍼하는 사람들이 복됩니까? 하늘의 위로, 성령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며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죄까지 슬퍼하며 마음을 찢고 애통해 하는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위로하심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웃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체 가운데 계실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해 응답을 받으셨습니다”(히 5:7).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통곡과 눈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한 눈물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마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한 슬픔으로 기도하셨듯이 그렇게 슬퍼하고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늘의 위로와 평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위로의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이키십니다. 우리를 향한 분노를 돌이키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로 다시 향합니다. 그 얼굴을 드시며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친밀한 친구로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행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이 찢어지고, 참된 회개의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삶이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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