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참된 회개(6) 상한 영혼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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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참된 회개(6) 상한 영혼의 제사

 2019-10-20      제12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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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6) 상한 영혼의 제사
 
시 51:1~19 
/ 이재훈 목사 
 
성경을 신앙 인물들의 위인전으로 생각하고 읽는 분들은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삶을 영웅시하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연약함, 허물,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했던 죄를 드러내고, 그 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 다윗의 죄도 있습니다. 그의 무섭고 끔찍한 죄를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아를 죽을 수밖에 없는 전장으로 의도적으로 보내 죽게 만드는 살인죄도 범했습니다. 다윗의 죄를 성경에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신 이유는 다윗 같은 인물도 쓰러질 수 있을 만큼 죄가 무섭고 강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다윗도 끔찍한 죄를 범할 수 있었다면 우리 삶 속에서도 죄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죄와 싸워 이기며 믿음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죄의 끔찍함을 아직 깨닫지 못했거나 죄 가운데 빠져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고발하기까지 적어도 1년 가까이 양심을 잠재우며 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왕이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당시 사회에서 다윗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만든 이후 자신의 죄는 완전범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의 죄를 드러내셨고, 징계하셨고, 책망하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다윗의 양심이 깨어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숨기고 있던 다윗의 죄를 고발하신 것은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와 탐욕 가운데 여전히 살아가면서도 아무런 갈등이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 때  부끄러움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드러내시고 책망하신다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회초리요, 손길인 것입니다. 
 
죄를 철저히 자백하고 용서 구하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시로 남겨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시편 51편은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회개의 가장 중요한 시입니다. 이 시만 몇 번 읽으면 회개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시는 모든 세대가 참된 회개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시편 51편에는 참된 회개에 담겨 있어야 할 중요한 고백들이 있습니다. 한 문장, 한 단어도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고백들입니다. 이 많은 고백과 간구들을 세 가지 중요한 회개의 요소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철저히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크신 자비로 내 죄과를 지워 주소서. 내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시고 내 죄를 없애 나를 깨끗이 하소서”(1~2절). 
“우슬초로 나를 깨끗하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소서. 그러면 내가 눈보다 희게 될 것입니다”(7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가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9절). 
우리는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과거의 죄를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죄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워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어 주십시오”라는 간구로부터 시작하는 회개는 우리의 결단이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심지어 스스로의 고백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고백하고 뉘우친들 하나님께서 씻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그 죄를 지워 주시지 않으면 자백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씻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회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죄와 죄인 됨을 인정하기
 
“내가 내 죄과를 압니다. 내 죄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고 주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주의 말씀이 옳으시고 주께서 순전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3~4절). 
이 고백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신의 죄악 된 행동을 인정하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잘못을 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회개란 무엇을 잘못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잘못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문제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떠나지 않는 죄가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자신이 죄에 온통 오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깨닫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온갖 쾌락, 유혹, 때로는 지식과 문화로 포장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기 위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첫째 죄악(iniquity)입니다. “뒤틀리거나 구부러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자체가 뒤틀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자체가 죄로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말을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의 주장만이 반복될 뿐입니다. 둘째, 죄과(transgression)입니다.  “권위자의 뜻을 어기고, 그 권위를 거슬러 도전하고,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선은 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죄(sin)입니다. “과녁에서 벗어나다”,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죄인 됨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뒤틀려있고, 구부러져 있고, 귄위에 도전하고, 선을 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있어야 할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죄악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런 고백을 더합니다. “이 모든 죄가 주께만, 주 앞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범죄입니다. 
“나는 분명히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 나를 잉태한 것입니다”(5절). 
흔히 모태신앙이라고 합니다. 저도 과거에 저를 소개할 때 모태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개설교를 하면서 깨달아보니까 모태신앙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태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태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죄를 범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죄를 범할 마음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이 모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원망하거나 조상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뿌리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는 것도 좋지만, 모태로부터 내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성령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영
 
둘째, 더 나아가 다윗은 자신 안에 성령님께서 새로운 영을 창조해달라고 간주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 
창조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정결한 마음, 정직한 마음, 진실한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마음을 원하시는데 우리 안에는 신실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를 씻어달라는 단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내안에 본성 자체가 뒤틀리고, 왜곡되고, 잘못되고, 반역적이기 때문에 내 안에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본성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 정직한 영, 진실한 마음은 성령으로 다시 창조될 때만 우리 안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모태로부터 죄인 된 영혼, 뼛속까지 죄가 스며있는 영혼에 새로운 영을 창조하시는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지 못하면 참된 회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어떤 행실을 고치는 것 이상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영이 내 안에 창조되는 것입니다. 원죄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가 아무리 정직해도 그 정직은 100% 아닙니다. 정결도 100% 아닙니다. 진실도 100%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이 내 안에 창조되지 않으면 진정한 진실, 정직, 성결을 우리 안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님, 내 안에 새로운 영을 창조해 주십시오. 나의 옛 생명으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직과 진실과 성결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창조해 주십시오. 정결한 영을 창조해 주십시오. 내 안에 진실한 영을 창조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을 내 안에 창조해 달라는 것이 회개에 있어서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회복
 
셋째, 다윗은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과 교제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내게 기쁘고 즐거운 소리를 듣게 하소서. 주께서 부러뜨리신 뼈들도 즐거워할 것입니다”(8절).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붙들어 주소서”(12절). 
참된 회개란 죄를 슬퍼하고 통곡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참된 회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죄를 용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로 나아가게 합니다.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교제 속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고, 거짓을 행하던 다윗이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회개는 우리가 통곡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회개는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의 경험에는 반드시 기쁨과 즐거움이 따라옵니다. 
8절에서 “주께서 부러뜨리신 뼈들로 즐거워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뼈가 부러진 경험이 있는 분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실 것입니다. 뼈가 다치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뼈들이 다 부서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뼈가 부서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고, 거짓을 숨기고,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과 교제의 기쁨과 즐거움이 상실되었을 때를 마치 뼈가 부러진 것 같은 상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부러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뼈들이 다 부서졌다고 고백했을까요? 매우 심각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이 지옥 가까이 가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뼈들이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이 뼈들을 부러뜨리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뼈들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던 이가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상한 영혼의 제사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니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번제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사는 상한 영혼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상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16~17절). 
마지막 회개 시의 결론으로 제사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구약에서 제사란 하나님 앞으로 인간이 나아갈 때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와 의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란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역할이 정반대입니다. 다윗은 참된 회개를 경험하면서 참된 제사의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제정하신 목적은 형식적, 종교적, 피상적, 행위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땅히 있어야 할 마음의 태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상한 영혼 그 자체입니다. 상한 영혼(broken heart)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껍데기가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자기기만, 포장, 숨겨진 것, 자신의 깊은 마음의 죄악을 숨겼던 모든 껍데기가 깨어져서 영혼 속에 있는 중심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옥합이 깨어졌을 때 안에 있는 향유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상한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려 하지 않고,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 영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두 드러나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내용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서 더 이상 은폐가 불가능한 영혼입니다. 뉴스에 나와서 많은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 사람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는 감추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그 사람은 감추는 데 실패했을 뿐입니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세상에는 감옥에 간 죄인과 가지 않은 죄인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영혼의 껍데기가 다 깨어져서 우리 안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것들이 모두 흘러나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포장이 아닙니다. 문화생활,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겉을 페인트로 칠하듯 포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상한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영혼의 제사입니다. 참된 회개가 담겨있는 영혼의 고백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꽃은 상할 때만 향기가 나는 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드러나고, 뼈가 꺾어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고, 내 안에 새로운 영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과의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상한 영혼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바라시고, 기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언제였는지 돌이켜 보십시오. 가장 크게 웃었을 때가 아니라 가장 깊이 애통하고 슬퍼했을 때 아닙니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죄를 포장하고 세상의 즐거움과 성공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가 밑바닥까지 드러나서 더 낮아질 수 없을 데까지 낮아져서 하나님 품에 안길 때 아니었습니까? 참된 회개만이 우리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회복시켜 줍니다. 다윗처럼 끔찍한 죄가 있을지라도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주어져 있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회개를 기뻐해야 하고, 시편 51편의 회개의 여정을 밟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통회하고, 내 안에 새로운 영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하며, 상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깨어진 영혼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치유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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