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말씀 앞에서 울고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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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말씀 앞에서 울고 웃다

 2020-11-08      제13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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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앞에서 울고 웃다


느 8:1~10
/ 이재훈 목사

 

역사 속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영혼들이 회개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오고, 말씀을 붙잡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 큰 충격이 그 영혼에 임하고, 그 충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갈망으로 변화됩니다. 그 갈망은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만들어냅니다. 그 회개의 눈물을 통과한 이후에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그 영혼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할 때 하나님 앞에 무너져 내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붙잡아 주시므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히 역사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 부흥이 오늘 우리의 삶과 한국 교회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인 줄 믿습니다.
부흥의 역사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에 불을 붙여 주셔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벵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의 불을 붙여 주신 사건입니다. 존 녹스와 요한 웨슬레를 통하여 그 불이 유럽 전역에서 불타올랐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를 통하여 전 미국에서 불타올랐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사경회에서 말씀의 불이 붙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여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갔던 것이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다시 부흥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단지 ‘부흥회’라는 간판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에 나타난 모습이 우리가 경험했던 부흥이요, 사모해야 할 부흥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 모였을 때 일어나야 할 모습입니다.
느헤미야가 보이는 성벽을 백성들과 함께 완공했습니다. 더 중요한 일은 보이지 않는 성벽 재건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백성들에게 부어주시고,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에 대한 갈망을 백성들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말씀에 대한 갈망’

 

“그러고 나서 일곱째 달이 됐고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백성들이 ‘물 문’ 앞 광장에 일제히 모였습니다. 그러고는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일곱째 달 1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남녀 회중과 알아들을 만한 모든 백성들 앞에 율법책을 들고 나왔습니다”(1~2절).
성벽 재건 공사와 인구조사가 끝나고 일곱째 달이 되었습니다. 유대 월력은 순서에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니산월, 기슬르월 등은 바벨론의 월력입니다. 후에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유대 달력은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첫째 달, 둘째 달, 셋째 달이라는 이름만 있습니다. 일곱째 달은 아주 중요한 절기인데 우리의 기후로 말하면 9~10월 가을입니다. 유대 월력에서 우리의 신정과 같은 날이 일곱째 달 1일입니다. ‘나팔절’이라고 합니다. 나팔을 하루 종일 길게 붑니다. 이것은 장차 일곱째 달 10일에 대속죄일이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 경건한 유대인들은 금식하며 대속죄일을 기다립니다. 대속죄일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속 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 백성들의 새해는 죄를 대속 받는 대속죄일로 시작합니다. 나팔절에 나팔을 불면서 대속죄일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고,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죄사함을 받고 새해를 시작합니다. 대속죄일 직후에 오는 첫 번째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15일부터 일주일 동안입니다. 광야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얼마나 힘들고 고된 생활을 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 모두 초막에서 지내게 하는 것입니다. 거주하는 집에서 나와서 들판이든 어디든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게 합니다. 이 시대에도 이스라엘에서는 초막절이 되면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베란다에 초막을 짓고 거기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문화로만 남아 있지만 그 정신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곱째 달에는 중요한 절기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함께 모인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읽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2차 포로 귀환을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백성들의 말씀에 대한 갈망은 느헤미야의 지시와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의 리더십으로 백성들이 힘을 합쳐 이룰 수 있었지만, 말씀에 대한 갈망은 지도자가 지시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시작, 말씀에 귀 기울이기

 

“주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보라. 그날이 곧 올 것이다. 내가 땅을 심하게 주리게 할 것인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고 목마를 것이다’”(암 8:1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굶주림의 시대입니다. 말씀에 대한 권위가 무너지고, 말씀이 고전으로만 여겨지는 시대, 말씀을 듣지 못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시대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부흥을 주십니다. 부흥의 시작은 백성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물 문’ 앞 광장에서 남녀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율법을 큰 소리로 낭독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3절).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적어도 6~7시간 정도 됐을 것입니다. 그 시간동안 율법을 경청했습니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려지는 말씀 자체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읽는 것은 자꾸 내 생각으로 해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려지는 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자리에서는 오랜 시간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는 자리는 몇 분도 지겹고 답답하기 마련입니다. 성령님께서 주관하신 이 때 백성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낭독되는 율법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지루함이 없다는 것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순종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음성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듣는 귀’에 대한 말씀을 여러 번 하신 까닭은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듣는 귀는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준비하셨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2차 포로 귀환을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강단에 서고 좌우에 13명의 레위인들이 섰습니다. 에스라는 사람을 키웠습니다.
“에스라는 이전부터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스 7:10).
에스라가 부흥회 도구로 쓰임 받은 이유는 율법 지식이 정통할 뿐만 아니라 연구하고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8절까지를 보면 6~7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율법을 통한 부흥이 어떤 순서와 내용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까지 내용을 반복하며 설명하는 일종의 문학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뒤에 보충을 해 가듯이 부흥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나무 강단에 서고 좌우에 13명의 레위인들이 서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부흥의 중심, ‘경배’와 ‘강해’

 

부흥의 중심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말씀을 설명하는 강해가 있습니다. 이 시대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첫째, 율법을 읽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이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백성들 위에 서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책을 펼쳤습니다. 그가 책을 펴자 백성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자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대답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5~6절).
백성들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 책을 펼칠 때 모두 일어나고, 하나님을 찬양했고, “아멘, 아멘”하며 말씀에 응답했고, 땅에 바짝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때로는 바짝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경배와 찬양이 말씀을 듣기 전에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주인이시고,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 가운데 말씀을 들을 때 참된 순종의 자세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 큐티시간에도 말씀을 읽으려고만 하면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때 내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순종의 마음이 형성이 됩니다. 
둘째, 율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책, 곧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그 읽은 것을 백성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8절).
율법을 알아듣도록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문화와 언어에 있어서 이방인과 같습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세대들에게 율법책은 외국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말씀을 그들이 늘 쓰고 있는 이방 언어 혹은 아람어로 통역해서 설명해줘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깨닫게 해줘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에스라가 양육한 13명의 레위인들이 그 일을 나누어서 했습니다. 이것이 부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과 말씀을 깨닫는 일이 우리 예배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부흥의 절정, 회개하고, 기뻐하기

 

부흥의 절정은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말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학사인 에스라와 백성들을 가르치던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날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9절).
온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어떤 눈물이든지 이유가 있습니다. 인생이 서글프고 힘들어서 우는 눈물이 있습니다.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은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닫고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 눈물이 부흥의 절정입니다.
여러분,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왜 포로 기간이 있는지, 왜  코로나19 기간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마음껏 친구들과 장난치고, 서로 부대끼며 공동체를 경험해야 할 우리 자녀들이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는데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왜 이러한 일들이 있는지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들의 패역함을 놓고 슬피 울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참된 회개를 경험해야 그 이후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통회하며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좋은 음식과 단것을 마시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다’”(10절).
회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확신하고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돌이키는 자에게는 반드시 용서가 임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질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와 함께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참된 부흥의 절정은 말씀 앞에서 울고, 말씀 앞에서 웃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과 기쁨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을 때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뻐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복입니다.

 

부흥의 열매, 말씀 실천과 사회의 변화

 

마지막 부흥의 열매가 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고 사회에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날 수문 앞 광장에서 이른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을 듣고 회개의 눈물 흘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경험을 한 그 이튿날 리더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함께 특별성경공부를 또다시 했습니다. 
“그 이튿날 온 백성들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모여 율법의 말씀을 들으려고 학사 에스라를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으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달 절기 동안에 초막에서 살라는 것과”(13~14절). 
그들이 잃어버린 중요한 절기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일곱째 달 즉시 실천해야 할 것은 초막절을 깨닫고, 모든 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지키도록 지시하는 일입니다. 즉각적인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 가운데 임하게 되면 예전에는 지키지 않았던 말씀을 지키게 되고, 예전에 끊지 못했던 것을 끊게 되고,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을 실천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기억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감격이 우리에게 회복될 것입니다. 초막절이 의미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사회가 개혁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중요한 교훈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회의 변화이자 사회의 정화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과거 역사에서 왜 아픔을 겪어야 했는지를 깨닫는 것이 사회의 변화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이 사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설 때 사회도 든든하게 서가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는 백성들이 느헤미야 8장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고, 변화되고 흩어져 사회에 나갈 때 그 사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법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사회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들이 사회 곳곳에서 리더십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때 사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다시 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참된 부흥을 사모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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