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참된 회개는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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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참된 회개는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2020-11-15      제13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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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는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느 9:1~6; 32~38
/ 이재훈 목사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성벽을 재건했던 백성들이 일곱째 날에 있는 절기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심령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일곱째 달에 있는 초막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초막 절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 같이 모여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공동체적인 회개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지시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성벽은 지시와 관리와 리더십을 통해서 재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지도자의 지시나 리더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것에 도취되어 자신들의 성공을 축하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마음, 하나님 앞에 엎드린 갈급한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대로,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아야겠다는 갈급한 마음 위에 성령께서 불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낮 시간의 4분의 1은 율법책을 읽기 원했고, 또 4분의 1은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율법을 전달한 레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성령의 깊은 감동을 따라 통회하고 회개했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때로 우리의 목소리는 신앙의 깊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큰 소리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최고의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때 나타나는 회개와 부흥이 진정한 성벽 재건입니다. 그들의 회개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충만해졌습니다.

 

그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입니다

 

느헤미야 9장은 회개의 장입니다. 역사를 회고하며 역사를 압축해서 드리는 회개입니다. 시편 78편, 105편, 106편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역사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9장에 나타난 회개는 역사 속에서 그들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역사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회개기도의 결론이 33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했지만 주께서는 성실히 행하셨습니다”(33절).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역사지만, 하나님은 도망치려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찾아오시고, 추적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죄의 역사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죄를 범하는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으셔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을 보면 인간들의 죄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맞물리면서 세 번의 사이클이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죄의 역사를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끊고, 또 끊고 또 끊으셨습니다. 인간은 또다시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만 결국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이깁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며,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맞아줬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가 돌아왔을 때 달려가 안아주고 기뻐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은 두 팔 벌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용서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릴 뿐만 아니라 찾고 계십니다. 찾을 뿐만 아니라 추적하십니다. 추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돌이키려고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자신들의 역사를 회고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했다”고 할 때 반드시 과거의 삶을 되짚어 보게 돼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의 사건만이 아니라 출생 이후부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기억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 과수원에서 훔쳐 먹은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그가 <참회록> 후반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을 주신 것은 기억 속에서 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회개의 주제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기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역사는 기억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입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념은 몇몇 사건만을 선택해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 누군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용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주신 축복 속에서 죄를 지었다

 

역사를 회고하며 회개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속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굳건한 성들과 비옥한 땅을 점령하고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한 집들과 파 놓은 우물과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숲과 풍성한 과일나무들을 다 차지했으며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님께서 주신 큰 복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했고 주를 거역했습니다. 주의 율법을 뒤로 제쳐 두고,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려고 타이르는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25~26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 광야의 역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없는 순간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들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게 해주셨고, 그들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많이 임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축복을 받은 이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떠나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축복의 때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가져오는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복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곤란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면 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사라집니다. 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범한 곳은 광야가 아니라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축복의 동산이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신 그 명령 외에 모든 것이 자유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축복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때 사단이 우리를 시험했고, 인간은 그때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축복된 환경에서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의 원죄가 축복된 에덴동산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아무것도 없는 광야는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수없이 광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손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근원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축복을 누리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축복의 조건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조건을 지키기 싫어서 무시했을 때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까요? 순종이 없는 축복은 그 축복을 받은 만큼 재앙이 되고, 저주가 되고, 도리어 타락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안전한 그릇’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했다면 모든 축복이 안전한데, 불순종으로 축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된 환경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기 쉬운 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시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긴장해야 합니다.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쁜 일 가운데서는 속삭이신다. 고난 가운데서는 외치신다.”

 

징계와 심판을 받고도 반복해서 죄를 짓다

 

둘째, 그들이 역사를 회고하며 회개하는 내용의 핵심은 징계와 심판을 받고도 반복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는 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를 해결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반복되는 그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안해지면 또다시 주 앞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그냥 내버려 둬 그들을 원수의 지배 아래에 두셨습니다. 그러다가도 그들이 다시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면 주께서 하늘에서 듣고 주의 긍휼로 그들을 때마다 구해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주의 율법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교만해 주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 사람이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주의 율법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주께 등을 돌려 대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는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28~29절).
또 다시 주께 등을 돌리고 불순종하지만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또 다시 범죄 한 인간의 모습을 사단이 잘 알고 이용합니다. 어떻게 하면 또 다시 죄로 돌아오게 할 것인지 늘 전략을 세웁니다. 사단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쓰인 책이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네 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다. 성인이 되어 회심한 이들 중에는 잠시 원수(하나님)의 진영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지내는 사람이 수백 명도 넘는다. 네 환자의 몸에 있는 습관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직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단다.”
기분 나쁘지만 사실입니다. 회개한 이후에도 언제든지 다시 죄악의 습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탄이 바로 그것을 노린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징계와 심판을 받고도 또 다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형벌만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연합하지 않으면 형벌만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것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과의 연합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또 다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분의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죄악을 다 끊으시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죄악을 끊는 은혜의 역사

 

백성들이 죄악의 사이클을 끊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심으로 죄를 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다’ 혹은 ‘공의롭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무섭게 처벌하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의 자유의지로 심판을 피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수년 동안 그들을 참아주셨고 주의 예언자를 통해 주의 영으로 그들을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주는 그들을 이웃 민족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30절).
수년 동안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수백 년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인내하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서에서 사람들이 바울에게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오시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은 천 년을 하루같이 인내하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처럼 여길 만큼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마치 심판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오래 참으심을 이용해서 범죄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시되 끝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충분히 인내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여건과 상황과 말씀과 노력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우리는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진실히 행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은혜와 긍휼이 많은 하나님께서는 그 큰 긍휼로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버리지 않으셨습니다”(31절).
반복되는 죄악의 사이클을 끊는 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제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행하신 분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시는 사랑은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부어진 사랑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합니다. 그 십자가에 나오는 이들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받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다른 이들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그대로 살겠습니까?”(롬 6:1~2).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시는 은혜의 힘이 우리를 죄에 대해 죽게 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징벌 그 자체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게 합니다. 죄의 대가는 치르지만 죄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시고, 죄를 끊을 수 있는 용서의 은혜를 통해 우리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우리가 언약을 굳게 세웁니다. 이것을 문서로 남기고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레위 사람들과 우리 제사장들이 서명을 합니다”(38절).
회개의 마지막은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문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느헤미야, 제사장, 관료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자기 이름으로 도장을 찍고 서약을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회개 이후 서약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참된 회개 이후 일어나는 서약이 우리에게 은혜의 축복이 됩니다. 우리의 죄를 처리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로 다시 시작하고, 서약을 맺는 모습이 진짜 성벽이 재건된 것입니다. 말씀의 부흥과 회개가 나타난 백성들의 모습이 진정한 성벽 재건입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 재건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예전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깊은 회개를 통하여 죄의 사슬을 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때 부흥의 역사를 또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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