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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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

 2021-06-26      제13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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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앞에서 잠잠하라
 
합 2:5~20
/이재훈 목사 
 
우리는 하박국서를 통해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서가 다른 예언서와 다른 점은 하박국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예언의 내용이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고, 이해는 질문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없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요, 믿음이 없기에 기대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실망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실망이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삶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지만, 그 실망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는 불의한 악이 횡횡하고, 불법적인 지도자들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악한 흐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고, 악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박국은 유다 백성의 악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심판의 도구가 바벨론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바벨론이 훨씬 악하고 잔인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유다 백성보다 악한 민족일 수 있습니까?” 선한 사람들을 일으켜서 개혁을 일으키고, 세상을 순화시키는 응답이었다면 하박국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악한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은 흐름은 잘못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두 번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질문에도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의 내용이 하박국 2장입니다. 
 
악행 안에 멸망의 씨앗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악함을 열거하시고 그 악함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 저주와 심판의 내용을 보면 바벨론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너무 단순한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가 그것을 믿고 사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박국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체험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 어떤 악을 행했고, 그들에게 어떤 벌을 행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하박국의 오해가 풀렸을 것입니다. 의문이 풀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머리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실제 삶에서 믿음으로 체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만 믿고 살아도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악행을 열거하시는 말씀의 내용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악행 안에 멸망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거두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악행을 벌하십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갈 6:7~8).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셔야 가능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반 법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 저주와 심판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악행에 대해 다섯 가지 저주와 심판을 말씀합니다. 6절, 9절, 12절, 15절, 19절을 보면 ‘화 있을 것’이라는 단어로 예언합니다. ‘화 있을 것’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호이’라는 감탄사입니다. 장례식에서 죽음에 대한 슬픔의 탄식으로 나오는 단어입니다. 탄식의 언어, 슬픔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해서 멸망 받아 마땅한 이들을 심판하실 때도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많이 행하는 자가 망했거나 역사의 심판을 받으면 박수하며 환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받아 마땅한 이의 멸망에도 슬퍼하십니다. 탄식하십니다. 그들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저주의 내용은 ‘바벨론의 끝없는 탐욕’에 대한 심판입니다.  
“포도주는 사람을 속인다. 거만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무덤처럼 목구멍을 넓게 열고 있는 그는 마치 죽음과 같아서 결코 만족함을 모른다. 그는 모든 나라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모든 백성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만 이들 모두가 그를 속담거리로 삼고 그에 대해 풍자와 비유를 말하지 않겠느냐? ‘화 있을 것이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으로 부유하게 된 사람아! 이런 일이 얼마나 더 계속되겠는가?’”(5~6절).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가 아닌 것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탐욕을 만족시키는 바벨론의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악한 고리대금업자가 빌려준 돈에 대하여 부채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해서 불법적으로 재산을 갈취하는 모습처럼, 바벨론이 이웃 나라에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폭력과 강포로 짓밟고 끝없이 탐욕을 만족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두 번째 저주의 내용은 ‘거짓된 안전에 대한 심판’입니다. 
“화 있을 것이다. 부당하게 취한 것으로 자기 집을 축재하는 사람아! 높은 곳에 자기 둥지를 틀어 재난으로부터 모면하려고 하는구나. 네가 여러 나라들을 멸망시키려고 계획한 것이 네 집안에 수치를 불렀고 네 영혼에 죄가 됐다”(9~10절). 
거짓된 안전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폭력과 강포로 제물과 권력을 취한 이들은 불안합니다. 누군가 보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전에 대한 지나친 의식을 갖습니다. 악한 독재자일수록 이러한 위협을 두려워하고, 경호와 치안을 최고로 여깁니다. 어디에서 자고 어디서 사는지도 모르게 합니다. 바벨론 제국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높은 곳에 둥지를 튼 독수리처럼 자신의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바빌론 제국 느부갓네살 시대에 세 개의 궁전을 지었는데 그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인공산을 만들어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매달려 있는 정원’이라고 부르는 불가사의한 정원을 만들고, 자신의 집을 그곳에 두어서 안전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권력과 힘으로 안전을 추구해도 거짓된 안전은 결코 안전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리 안전을 추구해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면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불의한 권력과 부정한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줄 피난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스스로 만든 지도자들의 안전처도 심판하십니다. 
 
헛된 영광에 대한 심판
 
세 번째 저주의 내용은 ‘헛된 영광에 대한 심판’입니다.  
“화 있을 것이다. 피로 성을 짓고 죄악으로 도시를 세우는 사람아! 보아라. 수고한 것이 불에 타 버리고 힘들게 한 일이 헛수고가 될 것인데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아니냐? 마치 물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 찰 것이다”(12~14절). 
헛된 영광을 취하는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힘과 폭력으로 지배하는 나라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와 그들이 피를 흘리고, 인권을 유린당하고,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명을 경시당하는 모습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나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바벨론을 방문했을 때 그 규모와 화려함에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알렉산더대왕도 바벨론을 자신이 세운 제국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주 화려하고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 성벽 위로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가 빠르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성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포로로 잡아 온 이들의 피 값으로 세운 성이었습니다. 헛된 영광을 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름을 내고 영광을 얻으려는 모든 행동을 심판하십니다. 그 헛된 영광에 대해 심판하시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십니다.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만이 세상을 가득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묵상해 보십시오. ‘물이 바다 덮음같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바다가 바다로 여겨지려면 물이 있어야 합니다. 마땅히 바다라고 불리는 모든 곳은 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이 세상이 참된 세상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가 지켜져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때 인간다울 수 있습니다. 물이 바다에 가득 차야 바다일 수 있듯이, 모든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인간다울 수 있습니다. 물 없는 바다는 바다일 수 없듯이, 하나님 없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이 세상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가득 찰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뿐입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모함입니다. 
여러분, 타락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까? 참된 예배와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물이 가득 차듯이, 물이 바다 덮음처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바벨론의 방탕함에 대한 심판
 
네 번째 저주의 내용은 ‘바벨론의 방탕함에 대한 심판’입니다.   
“화 있을 것이다. 자기 이웃에게 술을 통째로 마시게 해 술에 취해서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 보이도록 하는 사람아! 네가 영광 대신에 수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너 또한 마시고 몸을 드러내어라! 여호와께서 오른손에 들고 계신 잔을 네게 돌리실 것이며 수치스러움이 네 영광을 가릴 것이다. 레바논에게 행한 폭력이 너를 압도하고 동물들에게 행한 폐해가 너를 공포에 떨게 할 것이다. 네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고 땅과 도시와 그 안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했기 때문이다”(15~17절). 
바벨론은 방탕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방탕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자신만 방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방탕하게 하고, 수치를 드러내게 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고 즐겼습니다. 자신만 방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방탕하게 하고, 수치에 처하게 하고, 그것을 즐기는 방탕함입니다. 비열한 방탕함입니다. 그들은 술만이 아니라 권력에 취해 이웃과 자연 세계에 무자비한 폭력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레바논에게 행한 폭력’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들은 성을 짓고 집을 짓기 위해 그 아름다운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모두 베어갔습니다. 그 안에 있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사람도 죽였습니다. 레바논의 숲을 황폐케 한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모든 죄악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셨습니다.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다섯 번째 저주의 내용은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입니다. 저는 이것을 ‘어리석은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를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탄식하며, 심판하십니다. 인간 스스로 만든 것, 생명이 없는 것, 도움을 줄 수 없는 것, 거짓된 것을 만들어 놓고 인간 스스로 숭배하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왜 인간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까요? 역사 이래로 우상 숭배가 끊어졌던 적이 없습니다. 모든 역사에 우상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장 갈벵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만일 섬김을 받아야 할, 예배를 받아야 할 하나님을 배제하면 다른 무엇인가를 그 자리에 놓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것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배합니까?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큰 나무를 보고, 큰 바위를 보고, 넓은 바다를 보고, 하늘과 태양과 달을 붙잡고 거기에 말하는 것입니다. 비는 것입니다. 우상에 도와달라고 하고, 그것을 섬깁니다.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과학 기술 시대에도 첨단 과학 기술 시설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도움을 구합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간이 추락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존재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인간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비참함을 경험합니다. 다른 생물들도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불안과 염려 정도가 아닙니다. 비참함을 느낍니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위치에서 떨어지면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 비참함을 메우려고 우상을 숭배하는데 메워지지 않습니다.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도 인간의 비참함을 메꿔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참되신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거룩한 성전에 있다.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20절).
‘잠잠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우상이 무너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이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통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무너집니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상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박국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고,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예배하고, 그분의 통치가 우리를 통해 온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에도 바벨론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임한 심판이 임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주와 심판을 피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잠잠해지는 변화가 이 땅 가운데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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