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주의 일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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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주의 일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

 2021-07-03      제13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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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3:1~16

이재훈 목사 
 
‘하박국’은 ‘끌어안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은 그 이름 뜻대로 역사의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끌어안은 선지자입니다.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끌어안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심판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뜻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때로 재난을 허락하시고, 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하시기도 합니다. 재난과 심판은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하박국처럼 반항하듯 질문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듯 질문했지만 그 태도 이면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받아들이려는 몸부림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적인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적인 뜻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순종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감사하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시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구원입니다. 축복입니다. 회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와 불순종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때로 재난과 심판을 허용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구체적인 지시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하박국에게는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구원을 바라보도록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박국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 믿음만이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눈이 되어서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인 심판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구원을 소망하는 능력이 주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소망을 낳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해할 수 없는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끌어안으면서 믿음으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떠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깨달으면…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명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을 이 시대에 다시 새롭게 하셔서 이 시대에 알려지게 하소서.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소서”(2절). 
하박국이 주의 명성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함입니다. 단지 무서움은 떠나고 싶은 마음을 만들지만, 경외함은 더 가까이 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하박국이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 무서워 도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성’이라는 단어는 ‘주님의 복음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 이사야가 “우리가 들은 이 소식을 누가 곧이 믿겠느냐”고 고백했습니다. ‘소식’이라는 단어가 ‘명성’과 같습니다. 이사야 53장 소식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종으로 보내시고, 그 종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 같이 고난받고 죽임당함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 놀랍고 엄청난 소식을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기 어려워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사야도 “누가 곧이 믿겠느냐?”고 했습니다. 놀라운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우리가 그 소식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뜻을 깨닫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경외함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자신이 얼마나 입이 부정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계시 가운데 체험하고 그 발아래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게 되면 경외함을 갖게 됩니다.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분의 임재 앞에 압도됩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언제나 구원
“…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을 이 시대에 다시 새롭게 하셔서 이 시대에 알려지게 하소서.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소서”(2절b). 
하박국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은 한마디로 진노 가운데에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진노와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와 악과 악인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분노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스럽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더 사랑스럽기 위해서는 죄가 사라져야 합니다. 죄를 끊어야 합니다. 악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겪지 않고는 죄와 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같은 진노’라고 합니다. ‘맹렬히 태우시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합니다. 불은 가장 순수합니다. 물과 불은 가장 순수합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불은 가장 순수하기 때문에 순수한 것만 남깁니다. 그것이 태우는 일입니다. 불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순수하게 만드려고 우리를 태우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는 사랑입니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의 자비를 ‘잔인한 자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진노와 심판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심판과 구원, 진노와 자비하심이 함께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결코 심판과 진노로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용적인 뜻일 뿐입니다.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언제나 구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류를 심판하십니까? 소멸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지구가 요동치는 이유,
인간의 불순종과 연동
하박국 시대는 심판이 임박한 시대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그 백성들이 멸망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다시 새롭게 되기를 구했습니다. 하박국은 역사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늘 심판하시지만, 그 가운데 늘 새로운 구원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교만한 애굽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도구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한 광야시절과 가나안 정복의 시절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만물까지 함께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고 땅에는 그분께 대한 찬송이 가득합니다. 그분의 광채가 햇빛과 같았고 두 줄기의 빛줄기가 그분의 손에서 번쩍이니 그 안에 그분의 권능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재앙이 그분 앞서서 나아갔고 전염병이 그분의 뒤를 따라 나아갑니다. 그분께서 멈춰 땅을 측량하시며 그분께서 바라보니 나라들이 떱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산들이 무너지고 오랜 세월을 거친 언덕들이 무너져 버립니다”(3b~7절).
하나님께서 교만한 인간을 심판할 때마다 자연 만물도 함께 무너지고 변화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하박국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말을 타시고 바다를 짓밟으시고 물을 크게 휘저으십니다”(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물줄기를 바위에서 터뜨리신 사건을 강으로 땅을 쪼갠 것으로 비유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영원할 것 같은 산들이 무너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이 질서에 의해서 스스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시기에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자연 만물이 함께 요동칩니다.
여러분, 지구의 요동치는 모습은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과 별개가 아닙니다. 맞물려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타락할 때 땅이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최후의 심판 이전에는 해와 달과 별들과 모든 자연이 질서 있게 유지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이 일반 은혜도 끝이 있습니다. 서서히 하나님이 자연 만물을 통해서 베푸신 은혜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종말을 예언하실 때 “지진이 도처에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학자도, 지질학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2천 년 전에 말씀하셨을까요?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지진 빈도와 그 이전 200년 동안 일어난 지진 빈도를 한번 조회해보십시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증하고 있습니다. 땅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늘과 땅은 하박국이 찬양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분에 대한 찬송을 자아내는 만물로 창조되었는데,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재앙과 전염병과 수많은 재난이 일어나는 자연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연동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인간을 낮추시기 위해서 자연 만물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 12절에 “주께서 는 진노로 땅을 점령하셨고 분노로 민족들을 짓밟으셨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문명을 보면 화산, 지진, 해일로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교만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증거입니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시면 앞뒤가 맞지 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랜드 캐니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작할 때 수많은 세월 동안 축적된 데이터라고 설명합니다. 지층을 보면 수많은 세월 동안 그 계곡이 형성되었다고 말하는데 결론 부분에서는 “모든 과학자들이 엄청난 대격변의 증거라고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하나님 심판의 증거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한쪽으로 밀렸던 물이 요동치고 그 땅을 휩쓸고 내려갔기 때문에 그랜드 캐니언에 있던 큰 돌들이 라스베이거스까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증거입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 심판의 증거가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인간을 심판하신 증거입니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구의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있고, 허용적인 뜻이 있습니다. 지시적인 뜻이 있습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어진 삶에 책임을, 지구에 대한 책임을, 자연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적인 뜻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재난과 심판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보며 날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과 재난을 허용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은 주의 일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죄와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징조로 임박한 심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뿐만이 아닙니다. 심각한 생태계 변화로 산과 바다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연과 함께 인간의 불순종을 연동시키실까요? 하나님은 인간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함께 구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영화롭게 되는 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무너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변화될 때 모든 만물이 함께 구속될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셨습니다. 주께서 악한 사람의 집 우두머리를 쳐부수셨고 발에서부터 머리까지 발가벗기셨습니다”(13절).
십자가를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악한 사람의 집 우두머리를 쳐부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발에서부터 머리까지 발가벗기심으로 모든 심판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있을 수밖에 없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셨고, 모든 악한 자의 우두머리를 부수시고, 모든 악을 벌거벗기시고, 모든 심판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비와 긍휼을 진노 가운데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내 뱃속이 뒤틀립니다. 그 소리에 내 입술이 떨립니다. 내 뼈가 썩어 들어가고 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하려고 오는 백성들에게 닥칠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릴 것입니다”(16절). 
역사에 대한 진실을 알면,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깨달으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 가운데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지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가올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하박국은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재앙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앙보다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심판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박국은 재앙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역사에 있을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복음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심판을 통과하는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찾아오게 될 최후의 심판과 재앙 앞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을 우리만 갖지 말고 수많은 영혼이 믿음의 은혜와 축복, 진노 가운데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우리는 언젠가 찾아오게 될 최후의 심판과 재앙 앞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작성자   김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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