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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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2024-11-09      제1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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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사도행전> 25:1~12
/이재훈 위임목사
 
바울은 죽음을 각오한 그리스도의 증인 여정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유대와 로마 권력의 한복판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신분을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스스로 착각한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모든 여정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
 
첫째, 바울이 억울한 재판을 받는 모든 여정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 최고 권력 기구인 산헤드린이 로마 법정에 고소한 죄수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압박이 실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했습니다. 법 앞에서나 양심 앞에서 죄가 될 만한 일이 절대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재판 과정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바울이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사형 받을 만한 죄를 지었다면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11절).
“만일 죄가 있다면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말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 바울의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설사 억울하게 죽음이 내려지더라도 달게 받고자 하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권력자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모든 상황이 기회가 됩니다. 비록 억울한 죽음일지라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달게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위기도 기회가 되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우리는 쉽게 이용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 앞에 조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 뜻대로 부름을 받은 여정을 걷고 있었기에 주저함 없이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그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일본 러브소나타 사역을 시작한 이유는 하용조 목사님이 치료 때문에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에게는 단지 치료가 아니라, 생명 연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일본에 선교사로 보내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러브소나타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도시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믿음은 치료 받고 있는 환자가 할 생각은 아닙니다.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기회가 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러브소나타 사역이 일본열도를 깨우는 귀한 통로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고, 이것이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거센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둘째,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거센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고위 권력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회를 얻게 된 이유는 유대 산헤드린이 그를 죽이려고 계속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대 지도자들의 끈질긴 고소와 압력이 없었다면 로마 총독들이 바울을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바울을 재판했던 벨릭스 총독은 그의 무죄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2년이나 감옥에 두었습니다. 바울을 풀어 주면 유대인들을 자극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년 뒤 총독으로 임명된 베스도 총독도 부임하자마자 다가온 가장 골치 아픈 과제가 바울이라는 죄수의 처리 문제였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 하자마자 3일 만에 예루살렘부터 방문합니다. 유대를 통치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권력 기구인 산헤드린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총독이 그들과 불편한 관계라면 유대를 통치하는 일이 악몽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임 인사를 하러 온 베스도에게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송하는 도중에 바울을 암살하려고 했던 2년 전 계획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산헤드린 공회의 끈질기고 거센 고소와 압력이 도리어 바울을 영향력 있는 증인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했지만, 그의 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고소는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증거의 내용을 보면 총독들이 이해하기 힘든 종교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벨릭스 총독이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무죄함을 알고도 풀어 주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게 세 번씩이나 무죄하다고 선언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십자가에 넘겨 준 정치가의 비겁함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겁한 권력자들에 의해 바울이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받고 2년 동안 있었고, 베스도 총독에게도 얽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기에도 참 답답한 상황인데 바울은 어떻게 이 상황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이 상황을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으로 보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 있고, 더 많은 권력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기회가 더 많아지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무고하게 가해지는 공격이 자신을 더욱 견고하게 세우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깊은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를 보십시오. 바다에는 수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견고한 철판으로 만든 잠수함도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바다에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다닙니다. 수압이 물고기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그 엄청난 수압을 이기는 것입니다. 수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수압이 있어도 그것을 상쇄시키는 신비한 생명의 힘이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압력과 힘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세상의 압력을 상쇄시키는 내적인 능력을 하나님이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에게까지 
 
셋째, 증인의 사명은 최후의 한 사람에게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활용해서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사형 받을 만한 죄를 지었다면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유대 사람들이 나를 고소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11절).
‘가이사’는 영어로 ‘Caesar(시저)’입니다. 시저는 이름이 아니라 ‘황제’ 혹은 ‘대통령’ 같은 직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시저는 내로였습니다. 모든 로마 시민에게 주어진 특권은 자신의 법적 문제를 가이사에게까지 상소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는 이 한마디로 총독이 관할하는 사법권을 벗어나 로마에 있는 황제의 최고 법원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배심원들과 상의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베스도 총독이 바울이 상소했을 때 배심원과 의논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니 가이사에게로 가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면 바울이 무죄함을 증명하고, 호소하고, 풀려나기 위해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이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라고 한 말이 이렇게 들립니다. “나는 가이사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풀려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최후의 한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목표였기에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라는 말 한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 관점에서 볼 때 “가이사에게까지 나는 증인이 되리라”는 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죄수의 신분에 있는, 로마법에 구속되어 있는 바울에게 최후의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가이사입니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를 역설적으로 죄수이기에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수이기에 만날 수 있는 최후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가이사를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에게 고소당해서 총독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죄수였기에 가이사를 만날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다 만나고, 당시 최고 권력자 가이사까지 만나는 것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혀 다른 해석의 관점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이사를 만나기 위해서 총독이 고소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기하는 상소문을 써야하는데 참 난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높은 위치의 사람을 만나고
 
아그립바 왕은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복음서부터 <사도행전>까지 헤롯 가문이 통치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헤롯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헤롯대왕은 형제가 여럿인데 가족들도 모두 죽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안 들거나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모두 숙청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빌립 2세가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분봉왕이고, 안티파스가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갈릴리의 분봉왕입니다.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분봉왕입니다. 이 세 사람이 통치를 했고, 빌립1세가 통치자 역할을 받지 못했습니다. 살아남긴 했지만 통치자 역할은 인정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에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했던 그 왕입니다. 아그립바 2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잔인했고, 그의 할아버지 헤롯대왕도 가족들을 모두 숙청할 정도로 매우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의 모든 아기를 죽이라 명령했던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가족도 죽인 사람이 누구를 못 죽이겠습니까? 그래서 모두 죽이고 숙청하고 네 명 정도의 후손에게 지역을 물려줬습니다. 그의 증손자가 아그립바 2세입니다. 
아그립바 2세가 통치하던 지역이 팔레스타인입니다. 그 지역과 오늘날은 다르지만, 그가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함에도 불구하고 로마 황제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을 주었고, 대제사장 임명권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해 밝히 안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아그립바 왕이 찾아와서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2세가 심문해 보겠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5장 19절에서 베스도가 아그립바 2세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논쟁거리는 그저 그들의 종교와 예수라고 하는 죽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19절). 
“죽은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증거하는 게 문제가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베스도가 보기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자꾸 산헤드린이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치가 아픈데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니 이제 홀가분해 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근거를 써야 하니까 상소문 쓰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2세에게 부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그립바 2세도 비록 잔인한 헤롯대왕의 후손이지만 그 시대 통치자로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지연되면 지연될수록 바울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공격이 더 심할수록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모든 상황이 기회, 
모든 사람이 대상자
 
바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였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대상자였습니다. 죄수라는 신분이 도리어 로마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더 많은 사람,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더 강한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죽음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가 있었기에 세상이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고,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사도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네로 황제로부터 엄청난 핍박이 자행됐을 때 인내와 용기와 기쁨으로 죽음을 달게 맞이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였던 서머나 주교 폴리 캅은 AD 155년 화형당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86년 동안 예수님을 섬기며 살아왔는데, 예수님은 한 번도 나를 부인하거나 힘들게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부인하겠는가?” 
그는 기쁘게 화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세상에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많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처럼 기쁘게, 죽음을 달게 맞이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억울한 죽음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기쁘게, 죽음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기회라면 어떠한 상황도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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