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특집
“목사님 다시 뵈면 또 안아주세요”
사형수였던 그가 기억하는 하용조 목사
해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하용조 목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이 많다. 하나 같이 하용조 목사를 만나 제대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김신실(가명) 형제는 하용조 목사가 전도한 사람이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사형수였다. 일명 ‘서산 룸싸롱 사건’에 연루되어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난해 가석방 됐다. 예수 믿고 완전히 달라진 그를 위하여 하용조 목사와 온누리교회가 구명활동을 했다. 구명활동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두 번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옥중결혼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하용조 목사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했을까.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1980년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25년 동안 대한민국 10대 강력범죄로 기록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서진 룸싸롱 살인사건’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 사건이다. 김신실 형제는 그 사건 가해자다. 31년이나 지난 사건인데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긴장이 됐다. ‘혹시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 어쩌지’, ‘과연 인터뷰를 잘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됐다.
강서구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그를 본 순간 그동안의 염려가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작은 예수를 꼭 닮아 있었다. 선한 인상과 소탈한 웃음소리가 매력적인 옆집 아저씨 같았다.
사형수를 찾아온 유일한 사람
“하용조 목사님은 제게 부모님이나 다름없어요. 제게 남은 건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소개시켜 주셨어요.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를 꽉 안아 주셨는데 그때 그 온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져요.”
김신실 형제와 하용조 목사의 첫 만남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신실 형제는 죽을날 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서진 룸싸롱 사건 가해자로 체포되어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상태였다. 항소해도 감형을 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언론이나 사회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강력범죄를 일으킨 사형수 편을 들어줄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사회‧정서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외면하는 그를 유일하게 하용조 목사가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경찰관이나 교도관들이 제 눈조차 쳐다보지 못했어요. 제 인상이 정말 흉악하고 징그러웠나보더라고요. 그런데 하용조 목사님은 저를 만나자마자 아무 말씀 없이 꽉 끌어안아 주셨어요. 진짜 천사 같았어요. 그 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몰라요. 그리고는 제게 살고 싶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이걸 잃어보라며 성경책을 주고 가셨어요.”
하용조 목사는 한 주에 한 번씩 김신실 형제를 찾아왔다. 찾아올 때마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려줬다.
“성경책 읽어 봤어요?”
“네 읽어 봤습니다. 목사님.”
“어때요 살길을 찾았어요?”
“아니요 아직 못 찾았습니다.”
“그럼 더 읽어봐요”
그렇게 세 번의 만남 끝에 하용조 목사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제가 만약 살아서 감옥에서 나가면 고향집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말씀 한 구절을 알려주시더라고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이었어요.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고향인 천국에 가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사형당하면 지옥 갈게 뻔한데 천국에 갈수 있다는 목사님 말씀에 귀가 솔깃해지더라고요.”
그날부터 예수를 믿었다. 2심 재판을 기다리며 일주일에 성경을 한 두 번씩 통독했다.
“그랬더니 살겠더라고요. 하용조 목사님이 매주 오셔서 기도해주시고 예수님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하용조 목사는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모범수였던 김신실 형제의 탄원운동에 앞장섰다. 그 덕분에 김신실 형제는 2심에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 받았다. 간신히 사형을 면하게 됐다.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무작정 구명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김신실 형제가 예수 믿으면서부터 완전히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매서웠던 눈빛이 몰라보게 부드러워졌다. 수형생활도 모범적이었다. 그는 재소자들과 교도관들 사이에서 성실하고 바른 재소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단 한 번의 사건사고도 없이 31년 동안 복역하며 죗값을 치렀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슬프고 아팠다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이 너무 많지만 김신실 형제는 조금 더 특별한 복을 받았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기적 같은 일의 주인공이 됐다. 김신실 형제는 2002년 교도소에서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던 박마리아 자매와 옥중결혼을 했다. 결혼예배는 온누리교회에서 드렸고, 주례는 당연히 하용조 목사가 했다. 일주일 정도 주어진 신혼여행에서 생긴 딸이 벌써 고등학생이 됐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라고 축복해주시고 권면해 주셨어요. 그 덕분에 17년 동안 떨어져 살았는데도 결혼생활에 흔들림이 없었어요. 저는 모범수였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씩 휴가를 주는데 그때마다 온 가족이 함께 하용조 목사님을 찾아 뵀어요. 그때마다 얼마나 반겨주셨는지 몰라요.”
옆에 있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도 하용조 목사를 아주 특별하고 귀한 목사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용조 목사님은 정말 우리 가족 같았어요. 남편이 없을 때 집안에 고민거리가 있으면 하 목사님을 찾아 뵀어요. 제가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면 정성껏 조언을 해주시곤 했어요. 아버지처럼 정말 따뜻하셨어요. 딸도 어렸을 때 하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문득문득 목사님이 그립다고 말하곤 해요.”
2011년, 하용조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은 김신실 형제는 그 자리에 쓰러져 펑펑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슬픔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아팠다.
“저는 교도소에 있어서 하용조 목사님이 소천하신 것도 몰랐어요. 강찬석 장로님께서 오셔서 소식을 전해주셨는데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정말 펑펑 울었어요. 출소하면 하용조 목사님을 부모님처럼 모시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가시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한 게 한스럽더라고요.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3일을 굶었어요. 그나마 아내와 딸이 장례예배에 다녀와서 다행이라고 위안 삼았어요.”
하용조 목사가 소천 한 이후에도 온누리교회는 김신실 형제 구명활동을 이어갔다. 이재훈 담임목사와 장로, 새사람사역팀 등 300여 명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26번의 탄원 끝에 지난해 가석방 승인을 받았다. 그 덕분에 지금은 세 식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석방 받고 나와서 가장 먼저 하용조 목사님 성묘를 갔어요. ‘목사님 저 왔습니다”라고 인사드리면 환한 미소로 반겨주실 것 같았거든요.”
김신실 형제는 자신은 지금 1살이라고 소개한다. 31년 동안이나 교도소에 있었던 그에게 지금 세상은 별천지다. 배울 것도 많고 적응할 것도 많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과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는 푯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 푯대는 다름 아닌 복음이다.
“하용조 목사님이 전해주신 복음이 제 삶의 기준이에요. 하 목사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어요.”
김신실 형제 부부가 하용조 목사에게 전하지 못한 인사를 이제야 했다.
“목사님 잘 계시죠? 늘 보고 싶고 사랑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예수님 만나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목사님 다시 뵈면 또 안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