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가 멘티에게
무너질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오랜 시간 이어지는 시련과 고난에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이 듭니다. 더는 이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집트 룩소르에서 온누리신문 <멘토가 멘티에게> 코너 원고를 부탁받았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이집트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졌다.
이집트 나일강은 비 한 방울 오지 않아도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한다. 나일강 상류인 에티오피아 수단 고원에 매년 같은 시기에 폭우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람기가 끝나고 물이 빠지면, 땅을 깊게 갈거나 거름을 주지 않더라도 씨를 뿌리기만 하면 풍년이다. 그래서 당시 이집트는 지상 천국처럼 여겨졌다. 이집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서 간 곳,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간 곳, 야곱과 아들들이 기근 때문에 간 곳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의 후손들은 기근이 끝난 후에도 이집트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나 왕조가 바뀌자 히브리인들은 노예가 되어야 했다. 부족함 없는 현재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상황이 바뀌면서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은 그제야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친절하게도 모세를 준비시켜 놓으셨다.
모세는 파라오의 궁정에서 자라 지적 능력과 리더십이 있었지만, 혈기를 다스릴 줄 몰랐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내몰아 자신을 낮추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어져 “제가 도대체 누구라고 바로에게 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히브리인들을 탈출시켰다.
그들은 이집트를 벗어나면 당장이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눈 앞에 펼쳐질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메마른 광야와 싸움닭 같은 이방인들이었다. 히브리인들은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냈고, 그 결과 40년을 광야에서 살아야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생을 마쳤다. 가나안을 원했지만, 광야에 마음을 빼앗겨 그곳에 갇히고 말았다. 광야는 시련이요, 시련은 광야다. 그러나 시련의 끝에는 가나안이 있다. 중요한 것은 ‘광야와 같은 시련에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할 것인가?’이다.
나는 이집트에서 광야를 보았다. 아스완에서 아부심벨로 가는 길, 룩소르, 후루가다, 카이로를 가는 길이 온통 광야였다. 눈 닿는 데까지 이어지는 모래 언덕과 바위산에 초록색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이 있어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달리던 차를 세워 근처 낮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낙타와 양 떼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몇몇 목동들이 기다란 막대기를 휘두르며 양 떼를 몰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 황량한 곳에서 양을 먹이겠다며 몰고 다니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들에게 달려가 “풀 한 포기 없는데 양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들은 친절하게 “아침이슬만으로도 자라는 작은 풀이 있으며, 양들은 그것을 먹는다”고 대답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 메마른 곳에 이슬이 내리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샘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곳에 무언가 있다고 했다.
그곳 광야에 무언가 있다. 내 인생이 광야 같다고 생각될 때, 또는 내 삶이 사막처럼 버려졌다고 여겨졌을 때 그곳에 무언가 있다. 작은 풀에 생명이 되는 이슬처럼, 거친 바위를 뚫고 솟아나는 샘처럼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어느 날은 안토니오 수도원을 보기 위해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맞이한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는 80이 넘은 연세에도 눈빛이 여전히 형형했으며, 말투에는 여유가 넘쳤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기도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표정과 말에서 진실과 사랑이 묻어났다. 거칠고 메마른 환경에서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인품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쳤던 곳,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곳, 회심한 바울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난 곳 모두 광야였다. 사랑 깊은 수도사처럼 하나님과 일대일 대면할 수 있는 곳이 광야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가장 소중한 게 있다. 지금 같은 고민을 하는 그대들에게 광야는 시련이 아니라 축복이기를 바란다.
/ 임찬웅 멘토(남양주B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