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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모세의 기도

주일강단- 모세의 기도

2019-03-03 제12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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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기도 
출 32:9~14 
이재훈 목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두 가지 채널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자 역사요, 분명한 지식입니다. 객관적 진리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지만 기도를 통한 개인적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지식과 정보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교만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체험하는 지식,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체험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더 큰 교만이요, 큰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게 되는 것이고, 헛된 상상 속의 하나님을 만드는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언제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에 나타난 진리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는 언제나 기도를 향해야 하고, 기도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채널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거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능동적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가장 능동적인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동역자로 초청하십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점점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요, 파트너가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헬라어에는 다른 언어에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문법이 있습니다. ‘중간태’입니다.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중간태는 다른 이에 의해 시작되거나 결정된 뜻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중간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능동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중간태입니다.  
 
 
중간에 서 있는 사람 ‘모세’
 
 
모세는 구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지도자이기 전에 기도자였습니다. 모세가 나오는 성경 구절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가라사대”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모세도 하나님 앞에 말씀드렸습니다. 모세의 리더십은 인간적인 리더십 원리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리더십은 단순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아니었다면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 수 없었습니다. 기도가 아니었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에게 다른 별명을 붙인다면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보호 받기 위해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던져졌고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의 태생은 히브리인이지만 유년 시절에는 애굽인으로 자랐습니다.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 자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인지 애굽인인지 중간에 서서 갈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모세는 삶의 중간에 서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하나님과 백성들 중간에 서서 중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위해 기도하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반드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은 모두 중보자가 됩니다. 하나님과 또 다른 영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민족, 하나님과 교회, 하나님과 내가 아는 많은 사람, 하나님과 가정, 하나님과 내가 맡은 사명 등을 기도하게 됩니다. 중간에 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모세의 기도  
 
 
오늘 본문은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고, 우리가 모세의 기도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 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눈 직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빨리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다급했고 불안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하면 무언가를 찾습니다. 성령 안에 있을 때 불안하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기도합니다. 말씀을 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있지 않을 때 불안하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찾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해지자 속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찾았습니다. 아론에게 요청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보며 한탄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한 명령을 그토록 빨리 저버리고 스스로 송아지 모양의 틀에 우상을 부어 만들고는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이스라엘아, 이것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신이다’라고 했다”(출 32:8절). 
세상에 많은 사건이 있지만 가장 끔찍한 사건은 인간이 만든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을 반드시 경배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도 섬기지 않지만 우상도 섬기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경배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경배하든, 다른 것을 경배하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백성들과의 관계를 끊고 그들을 진멸하시겠다는 계획을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들을 보니 참으로 목이 곧은 백성들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나를 두고 가거라. 저들 때문에 내 진노가 부글부글 끓는구나. 내가 저들을 진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다’”(9~10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모세에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때 사탄이 틀림없이 모세에게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모세야. 지금이 기회다. 그동안 백성들 때문에 고생 많았지? 이제 너는 아브라함보다 훌륭한 민족의 시조가 되는 거야. 얼마나 좋니? 네가 먼저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겠다고 하셨으니 너는 그저 ‘네’라고만 하면 돼.” 
하나님께서 진멸 받아 마땅한 백성들을 진멸하시는 것은 의로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에 누가 감히 반대하겠습니까? 반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모세였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낮추시는 하나님께는 잘 순종하지 않는데,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께는 순종을 잘합니다. 
여기서 모세의 기도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모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래야만 이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 빌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왜 주의 백성들 때문에 노여워하십니까? 그들은 주께서 큰 능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사람들이 아닙니까? 왜 이집트 사람들이 ‘그가 그들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쓸어버릴 생각으로 끌고 나갔구나’ 하게 하십니까? 주의 무서운 진노를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께서 친히 주를 두고 그들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니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11~13절).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어떤 대상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둬달라고 기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질투했을 때 하나님께서 문둥병을 주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마라에 이르러 물이 너무 쓰다고, 맛이 없다며 물맛까지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셨을 때 모세가 용서를 구해 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멈춰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지만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모든 민족이 진멸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진노를 거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간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율법을 받았던 사람이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엄정하시고, 죄를 미워하시고, 의로우신 분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진멸되어야 마땅하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진멸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일한 원리를 붙잡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거둬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긍휼을  
첫째, 모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판단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모세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도리어 자신이 죽고 민족을 살리는 심정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가 말했습니다. ‘오, 이 백성이 엄청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하지 않으시려거든 부디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 이름을 지워 버리십시오’”(31~32절).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받아야 하는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서 마땅히 임할 진노가 면제되는 것이 긍휼입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정반대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가 있더라도, 마땅히 징벌 받아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하나님께 가장 먼저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구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야 하지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정하지 않고도 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희망을 발견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대로 두라”(10절, 개역개정)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석가 젠센이는 이 말씀을 “이것은 모세의 기도에 대한 초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에 숨어있는 작은 희망의 틈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여러분, 누군가 화가 나서 여러분에게 “나 말리지 말라고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 자체가 말려달라는 뜻입니다. 작은 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무런 계획을 말씀하시지 않고 실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실 수 있는 작은 틈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의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고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둘째,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구하며 호소했습니다.  
“왜 이집트 사람들이 ‘그가 그들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쓸어버릴 생각으로 끌고 나갔구나’하게 하십니까? 주의 무서운 진노를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12절). 
모세의 기도가 더 깊어졌습니다. 백성들의 운명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이나 필요를 구하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왜 돌아오게 했습니까? 그 백성들이 온전히 회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으로 인해 여러 이방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옴으로써 그들에게 내 자신을 나타내 보였고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했다”(겔 20:9).
출애굽시키신 것, 바벨론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시 23:3).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이 진멸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과 자녀, 민족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높여드리기 원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깃발을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품어질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다
셋째,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께서 친히 주를 두고 그들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니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13절).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붙잡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의로우시기에 약속하신 것을 새로운 약속으로 바꾸셔도 의로우심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붙잡을 때 그 약속 가운데 들어오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놀라운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삭과 야곱을 축복하셨습니까? 그들의 개인적인 위대함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일부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이라 할지라도, 역사에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라 할지라도 거둘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역사의 운명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운명은 믿는 이들의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충분한 기도는 역사를 바꿉니다. 충분한 기도 속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 없는 행동은 역사에 휘말려갈 뿐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던 마음을 접으셨습니다”(14절).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 영광,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로운 기도에 설득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가 우리를 통해 드려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이 희망을 붙잡고 기도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가 
우리를 통해 드려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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