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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용서 , 악을 선으로 바꾸다

[주일 강단] 용서 , 악을 선으로 바꾸다

2023-12-23 제1472호

용서 , 악을 선으로 바꾸다

창세기 45:1-8, 50:15-21
/ 이재훈 위임목사
 
스페인의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결국 아들이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려고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신문 광고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파코. 정오에 신문사 정문 앞에서 만나자. 아버지가 모든 것을 용서한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 이런 광고를 했습니다. 다음 날 정오 신문사 앞에 800명의 파코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름이 비슷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 속에 살고, 치유 받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요셉은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가장 건강하게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용서로 상처를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이 야곱의 유언에 잘 나타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창 49:22~24).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는 말이 요셉의 인생을 잘 표현했습니다. 담을 타고 뛰어넘는 가지처럼, 요셉은 많은 인생의 장애물을 뛰어넘었습니다. 또 23~24절에서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라고 했습니다. 형들이 그를 미워하고, 미움과 질투의 화살을 그에게 쏘았지만, 요셉은 활을 쏘지 않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화살을 쏘지 않고, 도리어 강건하게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능자 하나님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복수를 맡기고, 자기 스스로 복수의 화살을 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상처’라는 담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용서의 힘이었습니다. 
 
요셉의 용서와 하나님
 
오늘 본문은 그 땅에 기근이 와서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형들을 요셉이 만나고, 용서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이후 형들이 두려워서 요셉에게 간청했을 때 그들을 용서해주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종살이를 했고, 억울하게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셉은 애굽의 총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애굽과 그 주변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 위상과 권세를 가진 요셉이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요셉에게 힘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용서의 말을 전하기 전에 밖에 나가서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고, 그 울음소리가 궁중의 바로에게까지 들렸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큰 아픔과 상처, 분노가 쌓여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큰 울음소리와 함께 상처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힘들고 큰 고통을 가져옵니다. 용서는 분노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4~5절). 
요셉의 용서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총리가 된 지 7년 정도 흘렀습니다. 종살이를 하고,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한 시간이 13년 정도 흘렀습니다. 그 13년 동안 요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총리가 된 직후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형들을 불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수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과 접촉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형들을 용서하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가 이루어지기까지 적어도 7년, 어쩌면 그보다 오랜 세월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결단은 짧은 순간에 할 수 있지만, 감정이 풀려서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까지는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완전히 용서했습니다. 그 용서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요셉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 동안 이 땅에 흉년이 들었지만 앞으로도 5년 동안 밭을 갈지도 못하고 추수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형님들의 자손들을 보존하시고 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여기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로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의 주인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5~8절). 
요셉이 종으로 팔려 온 불행한 고난 이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형들의 미움과 행동도 결국 하나님이 요셉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었다고 해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다는 것이 형들의 잘못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 용서란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잊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요셉은 분명하게 형들이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창 50:20).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4절).
요셉이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용서란 가해자가 행한 잘못을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악을 행했고, 자신을 팔아 넘겼다고 분명하게 그들의 잘못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용서는 자신에게 가해진 상처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이 요셉에게 어떠한 상처를 줬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힘들었으며, 그로 인한 분노를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억눌렸던 분노가 큰 울음으로 터져 나오면서 씻겨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분노를 감추고 외면하는 게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상처까지 치유하시는 그분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용서는 스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경험할 때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용서의 황금률이 있습니다. ‘황금률’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행하신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용서의 황금률입니다. 데이빗 A. 씨맨즈라는 상담치유 전문 목회자가 오랫동안 상담해 오면서 사람들에게 있는 모든 문제의 공통점이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과 그 용서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문제의 공통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받는 용서와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용서를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마 6:12).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를 연결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주기도문이 끝난 이후 해설을 붙여서 예수님이 다시 해설을 해 주십니다.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 6:14~15).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는다는 은혜의 복음과 배치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의 복음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 믿고 체험했는지 물으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지식으로는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 깊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히 용서하셨다는 것을 잘 믿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그것을 거부합니다. 내가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데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체험 속에 거한다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용서하셨는지를 체험하고, 용서의 복음을 체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가 시금석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인 만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을 통과하는 통로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무서운 대리권을 맡기셨다는 의미도 됩니다. 만일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을 때 그를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사람으로 규정짓는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 누군가에게 용서 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용서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잘못을 가장 많이 범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부모들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그 자녀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겠구나. 부모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부모로부터 용서를 체험하는 사람은 ‘우리 부모님도 나를 용서하셨으니까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시겠구나’를 체험하며 삽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인을 할 때 우리는 짐승같이 되고, 심판을 할 때 인간처럼 되고, 용서를 할 때 하나님같이 된다.” 용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게 더 힘든 일
 
용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용서할지라도 가해자는 반성하지 않을 수 있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나를 가두고, 고통을 주고, 용서하지 않는 한 언제나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용서는 힘든 일입니다.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게 더 힘든 일입니다. 용서보다 힘든 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움과 복수심이 우리에게 가득할 때 결코 미움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미움은 분노를 일으키고, 더 큰 분노를 일으키고, 계속해서 그 미움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습니다. 미움이 가득 차 있을 때 사단이 좋아하고, 분노가 가득할 때 사단이 우리에게 침투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조지 허버트라는 분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도 건너야만 하는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요셉이 형들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했다면 그것은 인간다운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복수가 많이 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통쾌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복수를 오래할 때 드라마의 인기가 오래 갑니다. 드라마가 시작되는 1~2회에서 용서를 해버리면 아마 인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작가들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복수를 끝까지 이어갑니다. 사람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키면서 인기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답지 못합니다.
 
용서의 복음을 선포,
악을 선으로 바꾸다!

 
용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용서를 믿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랬습니다. 요셉의 용서가 정말 완전히 용서인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17년 후에 야곱이 죽었습니다. 그때 형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복수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부탁한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정말 간절히 부탁한다. 비록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했어도 너는 네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어라’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우님 아버지의 종들, 하나님의 종들이 지은 죄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16~17절).
야곱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면 요셉을 불러서 하지 왜 형들에게 말했겠습니까? 저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형들은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에서도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줘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요셉이 막 울었다고 하는데, 저는 요셉이 어이가 없어서 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이가 없고, 안타까워 운 것입니다. 자신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계속 의심하며 17년을 살았습니다.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또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해도 형들이 죄책감 속에 살고 있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형들이 불쌍해서 우는 것입니다. 다 시 한번 요셉이 형제들에게 용서를 선포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19~20절). 
요셉이 다 시 한번 용서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실 때 요셉의 용서를 사용하셨습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고 복수했다면, 그냥 인간다운 삶입니다. 복수는 인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을 용서했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악이 선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루신 역사,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 우리가 쓰임 받기 위해서는 용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고 사는 삶이 더 어렵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체험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는 귀한 축복, 십자가를 통해 주신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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