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
사도행전 27:9~26
/이재훈 위임목사
인생의 폭풍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사회적 지위나 전문적인 지식, 재물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폭풍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당황하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소망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폭풍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시인 조지 허버트가 “기도를 배우기 원하면 바다로 가라”고 했습니다. 바다 속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만나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폭풍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항의하는 인생들에게 그분의 주권을 깨닫게 해주는 방법입니다.
욥은 많은 고난 속에서 호소하며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폭풍 속에서 나타나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친구들의 많은 권면에도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주장했던 그가 하나님이 폭풍 속에 나타나셔서 질문 하시자 비로소 회개했습니다. 욥은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폭풍은 불순종하는 인생들을 하나님 뜻대로 되돌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뜻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가던 요나에게 하나님이 폭풍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 가운데 순종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요나도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폭풍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제자들도 폭풍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불어 닥친 폭풍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시니까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폭풍 속에서 찾아오셨습니까? 폭풍이 끝나고 잠잠해 질 때 찾아오신 게 아니라 왜 폭풍 한가운데 찾아오셨습니까? 휘몰아치는 폭풍 한 가운데서도 평안히 걸어오실 수 있는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기 원해서입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게 잠잠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배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모든 상황을 잠잠케 하시자 그분께 경배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봤지만, 경배 드렸다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병자를 고치셨을 때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킬 때도, 군중에게 설교하실 때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드렸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폭풍 속에서 걸어오셨을 때, 그 폭풍을 잠잠케 하신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폭풍 가운데 모든 소망이 끊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매우 근거 있는 충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태운 배가 로마로 가는 중에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납니다. 그 폭풍 가운데 예수님이 바울을 다시 한 번 만나 주셨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통독, 베스도 총독, 헤롯 아그립바 2세 등 로마 통치자들의 심문을 받은 이후에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가는 여정은 매우 깁니다. 3,200km나 됩니다. 오늘날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배를 타거나 육지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지로 가면 바다가 중간 중간에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가야만 했습니다. 그 중간에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호’라는 큰 곡물선으로 갈아타게 됩니다. 계속 역풍이 불어와서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항구, 미항이라는 곳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이때 바울이 충고를 합니다.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금식하는 절기도 지났기 때문에 항해가 위험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충고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보니 우리가 이렇게 계속 항해하다가는 재난에 빠지고 배와 짐이 큰 손실을 입을 뿐 아니라 우리 목숨도 위태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따랐습니다”(9~11절).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바다가 친숙하지 않습니다. 바다에 친숙한 민족은 남쪽 애굽 사람들, 북쪽으로 페니키아,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항해에는 친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인데 특이하게 바다 여행 경험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세 번이나 난파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하루 밤낮 나무 기둥을 붙잡고 바다를 떠다닌 적도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경험보다 바울에게 주어진 이 시기에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인해서 다가올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절기적으로도 바울은 근거 있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금식하는 절기도 지났기 때문에 항해가 위험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다는 것은 그 시기가 언제인지를 설명해 주는데, 양력으로 10월 초순경입니다. 당시 지중해는 9월 중순 경부터 11월 중순까지 항해하기가 위험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매우 근거 있는 충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항해하다가는 재난을 만나고,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따랐습니다”라고 합니다.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피고인의 신분으로 호송되고 있는 바울의 충고보다 선장과 선주가 훨씬 전문가이기에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합당할 경우가 언제입니까? 전문가가 진실할 경우입니다. 전문가가 올바르고 정직한 경우에는 그 말을 따르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진실과 공의를 버리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대다수 사람이 모르는 영역, 소수의 전문가만 아는 영역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만 알기에 우리만 모른척하면 진실은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작이 일어나고, 진실이 가려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전문가들이 진실할 때만 그 전문성이 합당합니다.
폭풍이 부는 바로 그 때,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바울이 보기에는 시기적으로 항해가 위험한 시기라고 판단했는데, 그 배를 운영하는 선장과 선주는 계절적인 위험을 몰랐을까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계속 항해하기로 결정했습니까?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호는 큰 곡물선입니다. 이 배는 하루라도 빨리 이탈리아로 가야 경제적인 이득이 주어집니다. 욕심과 조급함이 큰 사고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런 일 아닙니까?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면서 진실하지 못 할 때 큰 사고가 나지 않습니까? 더 빨리 가서 조금 더 이익을 보려는 욕심이 위험을 불러오지 않습니까?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릴 때 더 큰 위험이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따랐습니다. 결국은 그 계절이 가져오는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폭풍을 만났을 때 그들은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했습니다. 구명정을 붙들어 매고, 밧줄로 선체를 묶고, 닻을 내리고, 배에 있는 짐들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까지 버렸습니다. 소망까지 버렸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도 나타나지 않고 폭풍만 계속 불어 닥치자 결국 우리는 구조될 모든 소망을 포기했습니다”(20절).
‘해와 별도 나타나지 않고’라는 말은 방향을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같이 GPS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해와 별을 보고 항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폭풍이 계속 불어 닥치자 구조될 소망까지 포기했습니다.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소망까지 버리게 된 인생입니다. 방향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소망까지 잃어버린 인생입니다. 배의 닻을 내려도 소망의 닻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들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소망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진실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속은 이유가 있는데 처음에 부드럽게 바람이 순풍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드러운 남풍이 불어오니까 ‘선장과 선주가 한 말이 맞나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순풍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순풍을 따르겠습니까? 폭풍을 따르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느 편을 선택 할까요? 순풍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순풍이 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위험한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도 하나님 뜻 가운데 있다면 그 폭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폭풍은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소망까지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빠서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바쁜 게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악함이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풍에 잘 속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순풍이 불어오면 정신 바싹 차리고 경계해야 됩니다. ‘이 순풍을 따라가다가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폭풍이 다가옵니까? 그러면 우리는 두렵고, 떨며 ‘과연 내가 이 폭풍을 만나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고 계신 것입니다. 오직 바울만이 폭풍 속에서 흔들림 없이 사람들 안심시키고, 당부하며 그들을 이끕니다.
‘인생의 주인’과 ‘영적 주도권’
“그러나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고 배만 손상될 것이니 안심하기 바랍니다. 어젯밤 내 하나님,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 마라. 네가 마땅히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네게 맡겨 주셨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내게 말씀하신 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밀려서 어느 섬에 닿게 될 것입니다”(22~26절).
바울은 이 위기 상황에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둘째, ‘네가 가이사 앞에 설 것’이라는 하나님이 바울을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음성입니다. 셋째, ‘너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네게 맡겼다’는 음성입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바울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폭풍 속에서 표류하는 배의 영적 선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진 지도력은 폭풍 속에서 드러납니다. 폭풍이 오면 진정한 지도자가 누구인지가 드러납니다. 인생의 폭풍이 올 때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였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인생의 주인이었던 사람은 폭풍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사람은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배는 폭풍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배의 영적 주도권을 가져가야 합니다. 한 나라와 민족이 폭풍을 만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사람들을 권면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수호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낙태가 자유롭게 용인되는 일이 법으로 제정되면 얼마나 많은 아기가 죽겠습니까? 그 생명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교회가 영적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생명을 해치는 수많은 폭풍이 불어올 때 영적 선장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이 세상의 거센 폭풍 속에 사람들이 휩쓸려 갑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폭풍들이 유럽과 북미를 휩쓴 것입니다. 거기에 교회가 없어서 그런 법이 제정되었습니까? 그런 문화가 일반 문화가 되었겠습니까? 이제야 각성하고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상황에서 영적 주도권을 발휘합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어젯밤 하나님의 천사가 나에게 나타나서 ‘두려워 마라. 네가 마땅히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생명을 네게 맡겼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내게 말씀하신 대로 이뤄질 것입니다”(22~25절).
바울은 재판을 받을 때도 영적 주도권을 가졌습니다. 그가 피고인 신분이었고, 법에 의해 제한받는 인생이었지만 양심을 따라, 성령의 감동을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영적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그는 영적 주도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선원들은 자기들만 살려고 구명정을 띄워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보겠다고 해서는 결코 살지 못합니다. 이 구명정이 여러분들을 살려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을 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여러분은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구명정이 살 길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명정을 타면 폭풍이 피해갑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라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칠 때 영적 주도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폭풍 속에서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평안하게 감사하며 식사했습니다. 폭풍이 치는 가운데 평안히 식사 모습에서 누가 떠오릅니까?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이 있었는데 평안히 잠을 자시던 예수님입니다.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위험한 상황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영적 리더십,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을 통해서 바울에게 임하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항해 했던 이들 모두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여러 명은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자신도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풍랑 속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폭풍이 다가왔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욥을 찾아오신 것처럼, 요나를 찾아오신 것처럼,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바울을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 인생의 배가 폭풍을 만날 때, 스스로 힘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때로 소망까지 잃어버릴 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폭풍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폭풍을 타고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폭풍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