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속히 오시리라
<요한계시록> 22:12~21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도 무엇인가 마음에서 빠져있거나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마련입니다. 지구상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좋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만, 그 이면에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고, 자살률이 높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북유럽을 예로들 수 있습니다. 북유럽은 해마다 UN에서 발표하는 행복지수가 거의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고, 자살률도 높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환경에 거하는 사람들도 무엇인가 빠져있는 것 같은 갈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만 했고, 누릴 수 있었던 낙원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었고, 누려야만 했던 낙원에 대한 향수는 이 세상을 아무리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최초의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에게는 그 향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 개의 나무입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요, 또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금지된 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발전시키고 성숙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나무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그 실과를 먹음으로써 육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로 점점 변화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영원히 존재케 하고, 더 높은 수준의 생명력으로 존재하게 하는 특별한 나무를 창조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지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금지된 명령을 지키는 반응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먹지 말라”는 말씀 앞에 서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의지적으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로서 영원히 성장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먹음으로써, 하나는 먹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단계에서 죄를 지을 수 없는 단계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단계에서 타락할 수 없는 단계로 성숙하고, 영생을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두 나무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먹지 말라”는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만일 생명나무의 실과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상태에서 먹으면 생명력이 악을 향하여 강화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동산에서 쫓아냄으로써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차단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한 인간은 점점 그 생명이 소멸되는 유한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고,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서 타락해서 죽음에 이르렀던 모든 인류가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린 양 되신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온전한 구원과 회복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의 풍요로운 축복 속에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세상의 악이 가득한 한복판에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생명나무 취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는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낙원이 회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있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없는 게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금지되었던 생명나무는 다시 나타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라진 이유는 시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저주가 없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주가 없다는 것은 불순종이 없다는 것이고, 모든 인생의 고통과 불안, 아픔의 원인이 되었던 죄와 불순종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저주가 없는 동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만 존재하는 동산이 나타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며, 타락 이전의 상태보다 높은 수준으로 변화된 동산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나타난 동산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시작되어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동산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이루어진 낙원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모든 경배가 드려지고, 그분이 그 보좌에서 통치하시며, 심판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앉으신 보좌가 <계시록>의 중심입니다. 이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는 통치의 보좌이며, 심판의 보좌이며,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보좌입니다. 우리에게 예비된 동산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갈 곳,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하는 동산을 잃어버렸지만, 다시 그 동산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동산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계시록> 22장 14절에서 “생명나무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문들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자기의 옷을 빠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명나무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옷을 빨았다’는 것은 희게 되었다, 의의 옷, 그리스도의 옷,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긴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로부터 어떤 것이라도 없애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그의 몫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19절).
생명나무를 취하지 못하고, 거룩한 도성에서 쫓겨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생명나무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행하는 일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또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도성에 있고 그의 종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계 22:3).
그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직접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양의 보좌 앞에 누구든지 직접 나아가 섬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섬김’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또 하나는 활동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보좌 앞에서 예배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한 활동이 있습니다. 천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활동이 있습니다. 섬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일할수록 기쁨이요, 은혜요, 감사요, 찬양입니다.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천국에서는 예배와 일이 분리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영원한 천상에서의 섬김은 어떠한 상처도 없고, 섬길수록 더 깊은 감사와 생명의 능력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린다
둘째,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며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4절).
이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게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대면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깊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게 됩니다.
“다시는 밤이 없겠고 그들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므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통치할 것입니다”(5절).
보좌에 앉으신 분이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과 함께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종으로 쓰는 것에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데까지 참여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통치에 참여합니다. 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와 인간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동산을 요한이 보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을 보여준 천사에게 경배를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렇게 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과 함께 섬기는 종 된 자이니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야단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자 죄성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만 경배해야 하는데, 그 통로가 된 존재를 자꾸 경배하려 합니다. 요한에게는 천사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예배는 오직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속히 다시 오십니다”
마지막 교훈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속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갈 것이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7절).
“‘보라. 내가 속히 갈 것이다. 내가 줄 상급이 내게 있으니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12절).
“이 모든 것을 증언하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내가 속히 갈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우리 편에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내가 다시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속히 오신다고 했습니다. 긴급성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급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긴급한 것을 깨달으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조급한 삶은 도리어 긴급하고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조급하게 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에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긴급성을 깨달으려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조급한 인생을 살면 크로노스에 휩쓸려갑니다. 그러나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를 바라보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있어야 될 카이로스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입니다. 카이로스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될 때 크로노스에 휩쓸리지 않고, 조급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지 못하면 반드시 이 시대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긴급성과 함께 또 하나의 긴급성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 영혼들을 초청해야 하는 긴급성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오라’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십시오”(17절).
또 하나의 ‘오라’는 초청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는 소망으로 그분의 오심을 바라며 소망하고, 영혼들을 향해서는 “목마른 자들이여 오십시오”라는 초청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고,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소망하는 영혼은 반드시 생명수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의 신랑 되신 그분을 맞이해야 할 영혼들을 향해 “주님이 속히 오실 것이니 당신들도 속히 오십시오”라고 초청하는 선교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과 마지막 동산에 함께 들어가야 할 영혼들을 향한 구원의 초청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순종하며 사는 이 시대의 삶입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 다시 오심을 사모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