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성육신2. 자신을 비우신 하나님의 겸손
<빌립보서> 2:5~11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 바울이 여러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증거했던 사도 요한 같이, 사도 바울은 또 다른 표현과 언어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성육신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다툼과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서는 어떻게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 될 것인지를 교훈하는데, 성육신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툼과 분열로 얼룩진 상황의 해결책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 문제를 만나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언제나 마음에 초점이 있습니다. 타락한 우리의 옛 마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새 마음을 품는 것이 인생의 많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사람은 법과 제도를 통해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보고, 사람들을 찾으며 해결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새 마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 우리 바깥에 있는 것,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마음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와 축복은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을 입을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놀라운 게 아닙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창조의 신비와 능력에 비하면 놀라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기를 비우시고 겸손하게 낮아지신 그 마음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자기를 비우신 그 겸손한 마음이 놀라운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분, 온전히 영광을 가지신 그분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신 그 마음이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면 분노합니다. 인격이 모독 받을 때는 더욱 분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는 일에 매우 서툽니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분이 자신을 비우시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놀라워해야 합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 마음, 하나님의 겸손을 더 놀라워해야 합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바울은 간단하게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본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 왜 ‘하나님의 본체시다’라는 문장을 덧붙였을까요? 바울이나 빌립보 성도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은 분명히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자신을 비우셨다’는 표현으로 연결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포기하신 것을 강조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나 편지를 받는 빌립보 성도들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비우신 겸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본체’라고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비우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
그렇다면 무엇을 비우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되심은 비울 수가 없습니다. 본성은 버리거나 비울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을 비웠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탈취하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 타락의 본질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권리를 탈취하고자 했던 사건이 바로 인간의 타락입니다. 바울은 태초에 인간의 타락과 예수님의 모습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다가 타락 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분은 아담처럼 취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심으로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시고, 주님으로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탈취하려다가 추락한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과 동등 된 그분이 아담이 탈취하려고 했던 것을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자신을 비우심으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두 갈래 인생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했다가 끊임없이 추락하는 인생과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심으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그 본성은 비워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이라고 표현해도 좋고, 권리라고 표현해도 좋은데, 그것을 전혀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한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리를 왜 주장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신적인 권리와 기적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영광을 나타내면 될 텐데,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냐?”며 유혹한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네가 왜 고난을 받느냐, 불필요한 것 아니냐”는 게 사단의 유혹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리, 받으셔야 되는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본성이 사라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가지신 분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셨는데, 하나님 아니면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 없이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툼과 분열, 많은 죄악의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취하신 세 가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된 분으로 자신을 비우시고 취하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종의 형체’라는 단어를 육체적인 모습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종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관점과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권리만 가지고 의무가 없으신 하나님이 권리는 없고 의무가 있는 종으로 자신을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자신을 종의 형체로 간주하시고 여기셨습니다.
둘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되셨다'입니다. 단순 과거입니다. 단회적 사건이 취소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믿기 어려워서 잠시 육체가 되셨다가 다시 돌아가셨다는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성육신은 잠시 사람이 되셨다가 되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성육신하신 존재로 계속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몸으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몸으로 죽게 되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변질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셋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취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원래 하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이 되셨기에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신 분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죽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자신을 비우시고,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시고 인내하시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셨을 때,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낮아지는 겸손한 마음이었다는 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의식적,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헌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umility’와 모욕 혹은 굴욕을 의미하는 ‘humiliation’이 같은 단어는 라틴어 ‘humilitas’에서 나왔습니다. 왜 같은 단어에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을까요? 이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자발성에 있습니다. 힘든 일을, 고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한 것은 겸손이지만, 원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 그 고난의 깊이만큼 굴욕을 느끼게 됩니다. 똑같은 일임에도 하나는 겸손이 될 수 있고, 하나는 굴욕이 될 수 있습니다.
‘humilitas’라는 라틴어는 ‘humus’라는 흙, 먼지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할 때 겸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굴욕을 느끼게 됩니다. 아담이라는 단어도 ‘아다마’라는 히브리어, 흙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모든 미네랄 성분이 흙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을 취해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지속적인 헌신
“누가 내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놓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또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 계명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요 10:18).
그분의 자발적인 헌신은 ‘후회하지 않는 헌신’입니다. 돌이킬 마음이 없는 지속적인 헌신입니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비우게 한 힘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왔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 들은 대로만 심판하기 때문에 내 심판은 공정하다. 이는 내가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기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요 5:30).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는 것은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의지와 능력이 아버지하나님의 뜻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군중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경외할 따름이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게 동기라면, 반드시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또 아무 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예수님의 겸손과 낮아짐이 있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신 겸손으로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그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술로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Savior)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Lord)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심으로 자기를 비우신 겸손으로 죽기까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으니, 그분이 곧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을 주님으로 온전히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온전히 고백하고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온전히, 철저히, 꾸준히 삶 속에서 인정할 때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겸손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