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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작은 야고보: 이름 없는 헌신 

[주일강단] 작은 야고보: 이름 없는 헌신 

2026-03-14 제1580호

작은 야고보: 이름 없는 헌신 
<마가복음> 3:13~19, 15:40~41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서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지만,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생활하게 함으로써 제자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개인주의 신앙, 나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예수님이 공동체로 제자들을 모으고 함께 생활하게 함으로써 관계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셨는데,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의 역사, 그리고 복음을 이 땅에 증거하는 제자의 삶은 항상 공동체 안에서 깨닫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사회적 배경과 성격, 기질이 매우 다양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가진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무엇을 이루도록 하신 것일까요? 서로의 차이와 문제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함께 닮아가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있지만, 묵묵히 뒤에서 조용히 따랐던 이들도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은 신약 성경의 여러 사건 주인공이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일어난 많은 일이 있어서 잘 기억되고 있지만, 그 밖의 제자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사람
 
오늘 살펴볼 제자는 ‘작은 야고보’라고 불렸던 사람입니다. 작은 야고보라 불렸던 사람의 이름과 그의 부모와 형제에 대한 정보 외에는 다른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사람이 등장하기에 잘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야고보의 형제는 요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벳새다 출신 어부로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에 의해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했고,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12사도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도자였고, <야고보서>를 기록한 저자입니다.
세 번째 인물은 오늘 살펴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알패오의 또 다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태입니다. 세리 출신 마태도 알패오의 아들입니다. 알패오라는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면 두 사람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5장과 <요한복음> 19장이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똑같이 다루고 있는데, <마가복음> 15장에서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요한복음> 19장 25절에는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글로바가 알패오의 다른 이름일 수 있고, 두세 가지 이름을 가졌던 그 시대 상황을 놓고 볼 때 글로바와 알패오가 동일 인물이라면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가 마리아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통해 밝혔고, <요한복음>에서는 남편의 이름을 통해서 마리아의 정체를 드러냈다면, 글로바가 곧 알패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야고보의 어머니가 사별한 이후에 글로바와 재혼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예수님의 처형 장면에 남아있던 사람이 다섯 명인데, 네 명의 여인 중에 세 명은 정체가 분명한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서로 다른 마리아를 말하고 있어서 이 둘은 같은 마리아일 것이고, 그렇다면 알패오의 또 다른 이름이 글로바일 거라고 충분히 추정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야고보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고, 아버지의 이름은 알패오 혹은 글로바라고 불렸고, 그의 형제 가운데서 마태가 있었고,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유대 사회의 ‘네 개 종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위치가 아홉 번째 사도입니다. 명단 뒷부분으로 온 것입니다. 마지막 그룹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알패오의 아들이고, 그다음 다대오, 그다음 시몬, 그다음 가룟 유다입니다. 이 네 사람을 뒷부분에 묶어서 기록한 것은 활동이 저조했다거나 예수님과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공통적인 특징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마지막에 기록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시몬은 ‘열심당원’이라고 했습니다. 다대오도 ‘열심당원’이라는 증거가 고대 사본들에 나옵니다. 시몬은 다른 사본에서는 ‘열심당원 유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는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이상과 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셨는데, 뒷부분에 기록된 제자들의 배경과 그들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 로마의 지배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해줄 메시아를 찾았던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 실망감 때문에 결국 돈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가룟 유다, 시몬, 다대오는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성경학자는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열심당원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열심당원’은 유대 사회를 이루었던 네 개 종파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 사회를 형성하던 네 종파 첫 번째는 바리새파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 중심의 근본주의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사두개파입니다. 성전 중심의 자유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활도 안 믿고, 초월적인 것도 믿지 않고 그저 현실에 묶여 사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취했던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에세네파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세상을 떠나서 광야로 돌아가 현실을 차단한 금욕주의자들입니다. 네 번째가 열심당원입니다. 그들은 에세네파와 정반대 극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당시에 유대 사회를 주로 지배했던 권력층이라면, 그들이 보기 싫어서 광야로 뛰쳐나가 금욕 생활했던 사람들이 에세네파이고, 그들과 정반대인 사람들이 열심당원들입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로마에 협조하고 앞잡이 역할을 하는 세리와 같은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을 소명으로 생각했던 극단주의자들입니다. 극단주의 행동대원들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유대인들을 통치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와 민족도 유대인들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대인들을 통치할 수 있기에 로마인들이나 로마 제국과는 싸워야 하고, 그들과 협조하는 세리 같은 사람들은 테러도 해야 한다며 암살조도 운영했습니다. 그 활동을 한 사람들이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열심당원 가운데 여러 명이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 야고보는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 명단을 보면 초기에 부름을 받았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등은 어부 출신이고, 중간에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같은 제자들이 있었고, 마지막 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열심당원적인 시각과 활동을 했거나 그 입장에 서 있었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면, 알패오의 아들 마태는 세리였고, 또 다른 아들은 열심당이었습니다. 형제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정치적인 시각이 전혀 다르면 형제간의 관계도 깨지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마태와 야고보의 관계는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함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와 같은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고, 열심당원 시몬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중간에 있었던 야고보도 마태와 같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부 형제가 부름을 받았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부름을 받은 사람도 있고, 서로 다른 사람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실 때 여러 번 ‘누가 더 큰 자냐?’라는 갈등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누가 예수님 옆에 앉느냐는 어린아이 같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 있었던 매우 심각한 갈등이었습니다. 도저히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은 갈등이 예수님의 12제자 안에 들어왔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겸손하게 충성하고 헌신한 제자
 
<마가복음> 15장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작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설명합니다. 그를 왜 ‘작은 야고보’라고 불렀을까요? ‘그가 신체적으로 키가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부르심을 받았을 것이다’ 등 여러 해설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신체적인 특징이나 나이로 ‘작은’이라는 단어를 붙였을까?’라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해설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큰 야고보로 여기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그와 구분하기 위해서 작은 야고보로 불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책망하실 내용 아니겠습니까? ‘누가 큰 자냐?’를 두고 늘 다투던 그들인데, 한 야고보를 더 크게 여기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멸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가가 12제자의 명칭을 사용했을 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작은 야고보’라는 단어를 마가가 썼을 때는 예수님이 늘 사용하셨던 ‘작은’이라는 단어를 베드로가 사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 마가가 ‘작은 야고보’라는 호칭을 썼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주로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떠한 용어 속에서 ‘작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작은’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미크로스(Micros)’입니다. 여기에서 영어의 마이크로(micro)가 나온 것입니다. 영어에서 마이크로는 작은 것을 분명히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한 번도 ‘작은’이란 단어를 신체의 크기나 나이를 가지고 사용하신 적이 없고, 다른 의미로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라는 이유로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마 10:42). 
‘예수님의 제자 중 작은 사람들’이라고 했을 때는 키가 작거나 신체적인 특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작다는 ‘덜 알려지거나 두드러지지 않거나 미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사람이다”(눅 9:48). 
여기서 사용되는 ‘작은’이라는 단어도 분명 신체적 크기나 나이를 가리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작은’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지극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작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용례들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작은’이라는 단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겸손하게 충성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했을 때는 어떤 신체의 특징이나 나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교훈을 주실 때 사용하신 ‘작은’이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그 기준으로 해석하면 작은 야고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겸손하게 충성하고 헌신한 제자’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의 충성된 기록
 
작은 야고보는 성경 어디에도 그 행적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설교했고 지도자로 쓰임 받았고,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했고, 바울은 많은 곳을 다니며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야고보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기록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삶이라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으나 조용히 헌신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참된 제자는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많이 알려진 것이 곧 헌신의 크기가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더 주목해 보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들이 앞부분에 나옵니다. 중반까지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인물들이 나오는데, <히브리서> 11장의 하이라이트는 뒷부분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했으며 심지어 결박되고 투옥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았고 톱질을 당했고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녔으며 그들은 가난했고 고난을 당했고 학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 등에서 떠돌며 살았습니다”(히 11:36~38).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의 충성된 기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지극히 작은 자로 여기는 사람들이었으나 세상이 감당치 못했고, 세상을 가치 없게 여겼던 사람들입니다.한국 선교의 역사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선교사님들보다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님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국 선교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선교사 한 분이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선교사님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의 뒤를 이어서 중국내지선교회를 30년 이상 이끌고 발전시킨 분이 있습니다.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D.E. Hoste)입니다. 그분은 20대 초반 영국의 D.L. 무디(D.L. Moody) 집회에서 말씀을 듣고 회심했고,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선교의 필요성에 감동해서 글을 읽고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중국내지선교회가 지금의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입니다. 제가 이분에 관한 이야기를 안 것은 OMF 총재였던 싱가포르의 패트릭 펑(Patrick Fung)이라는 분이 쓴 작은 책자 덕분입니다. 그분에 대한 책자였습니다. 그분이 OMF 역사를 정리하면서 글을 쓰려는데 훨씬 짧게 사역했던 허드슨 테일러에 대한 자료는 너무 많은데, 30년 이상 사역한 분에 대한 자료는 너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왜 이렇게 자료가 없을까?’ 그런데 그분은 의도적으로 자신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짧은 소책자만 쓸 수 있었습니다. 패트릭 펑이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D.E. Hoste)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분을 기억하는 동료들에게 평가를 받았는데 이 문장으로 표현됐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잊히도록 살았습니다.”
D.E. 호스트 선교사님은 오늘날 OMF가 되기까지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지만,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숨겨진 작은 야고보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게 또 있는데 캠브리지 7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C.T. 스터드(C.T. Studd)를 비롯해서 여러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캠브리지 대학 출신은 아닙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집회할 때 당시 엘리트였던 영국 캠브리지 출신의 일곱 명의 청년들이 중국 선교에 헌신했는데 이 사건이 1885년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유명한 크리켓 국가대표 선수였던 C.T. 스터드도 있었고, 조정 선수, 귀족, 군 장교 출신 등 영국에서 소위 큰 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엘리트 청년들이 허드슨 테일러의 말씀을 듣고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인으로 살면서 선교사로 헌신한 것입니다. 캠브리지 7인을 통해서 많은 영국의 젊은이도 헌신했습니다. C.T. 스터드는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했는데 현재 가치로 수십억 원 이상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은 너무 큰 것이 아니다.” 
C.T. 스터드도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여러분, 역사는 언제나 큰 자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작은 자의 충성을 기억합니다. 12제자 명단에 있지만 기록이 없다고 아무런 헌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로 헌신했을 뿐입니다. 작은 야고보라는 이름 속에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복음 역사에서 작은 것으로 뿌려진 씨앗 같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열매, 큰 상으로 축복받았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작은 자가 되는 제자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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