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9)
잃어버림으로 찾는 목숨
<마태복음> 16:24~26
/ 이재훈 위임목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우리는 귀에 익도록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익숙한 것이 곧 그 말씀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나 지식으로 아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체험과 실천으로써 그 의미를 명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주인께 다시 돌려드리는 ‘자기 부인’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라는 것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수 사람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에게 입학 자격과 같은 것입니다. 졸업 자격이 아니라 입학 자격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할 때 ‘따라오려거든’은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신 ‘내 뒤로’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 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등을 보고 따라가야 할 우리가 앞에서 이끌고 가려는 모습을 배경으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다’라는 단어가 정확히 같이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가 사용한 단어입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세 번째로 한 말에 담겨 있습니다(마 26:74).
여기서 ‘모른다’라는 단어가 ‘부인한다’는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그 단어입니다.
“그를 전혀 모른다”라고 부인했던 말을 방향을 바꿔 자신에 대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을 향해서 ‘나는 당신을 모른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내 뜻과 권리와 방식을 고집하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등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개선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잘 관리하고 다듬으라고, 나쁜 부분을 고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하라, 절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너 자신을 부인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학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금욕이나 자존감을 파괴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다스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자아만큼 고약한 것이 없습니다. 괴롭힐수록 더 강해지고, 또 잘해줄수록 더 망가집니다. 도대체 우리의 자아는 스스로 개선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육으로도, 어떤 수행으로도 우리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라, 자신을 향하여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입니다. 내 인생의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의지를 반납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내 것이라고 우길 수 있는 의지를 주인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고전 3:23).
베드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말린 것은 애정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보면 예수님 앞을 막아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24절에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은 “내 뒤에 서라”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설 자리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21절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성도들이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의 일이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일을 구하는 행동이 사도 바울의 사역 현장에서도 나타났다면, 우리 가운데서는 얼마나 더 자주 일어나겠습니까? 자기 부인이 없는 봉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은 자기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영적 훈련은 할수록 자아가 더 단단해지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끝까지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다음 걸음을 말씀합니다. 자신의 주권을 내려놓은 손에 들어야 할 것이 있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24절 후반부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친숙합니다. 이제 십자가는 두려운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친숙해지면서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에게 떠오르는 십자가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되돌아오지 못하는 발걸음입니다.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라고 할 때 흔히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생스러운 일들이라고 해석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문제를 만들어 놓고 자기 십자가라고 하는 것도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자기 십자가는 단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감수하는 대가’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감수하게 되는 손해와 오해, 좁아지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두시는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종양, 영혼의 문제를 수술하시려고 깊이 칼을 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내 길에 놓인 십자가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선언,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
<누가복음> 9장 23절에는 ‘날마다’라는 단어가 덧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자기 십자가에 붙들어 매는 것은 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순종을 통해서 날마다 몸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도 ‘날마다’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체험으로 자아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갓난아기가 하룻밤 자고 나면 30대 청년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질서처럼 씨앗이 뿌려지고 서서히 자라듯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날마다’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는 한 번 은혜를 체험했다고 자아가 완전히 부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죽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죽음을 우리 옛사람의 죽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롬 6:6).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바로 이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 선언 위에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 수 있지, 자신을 죽이려고 몸부림치며 수고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우리의 신앙은 무거운 짐이 되고 율법주의가 됩니다. 복음의 은혜 없이 자기를 부인하려고 하면 율법주의가 되고, 자기를 짓누르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 부인이 없는 은혜를 추구하는 것은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잃어버림이 아니라 맡겨지는 것
25~26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를 예수님이 한 문장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잃는 것은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림이 아니라 맡겨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간다면 다시 찾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찾는 것입니다. 온 천하, 온 세상과 비교해도 우리의 영혼이 더 가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나라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자는 다시 찾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내가 이 길을 가봤소. 그러므로 나를 따라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부인이란 자신에 대하여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앞에 두신 순종의 길을 날마다 못 박힌 자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잃게 되는 자리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앞서가시는 예수님이 “이 길은 내가 가본 길이다. 이 길 끝에는 생명이 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