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과 크리스천] 6월의 비목(碑木)
호국보훈과 크리스천
6월의 비목(碑木)
여고 시절 음악 선생님은 바리톤이었다. 베토벤같이 장발 곱슬머리를 이마 뒤로 넘긴 총각 선생님이었는데, 우리 앞에서 피아노를 치며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잘 불러주셨다. 음악실 너머 교정으로 울려 퍼지는 선생님의 노래는 수험생들의 스트레스를 날려주었고, 풍부한 상상력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그중에 ‘비목(碑木)’이라는 가곡이 있었는데, 비목의 뜻을 모르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을 해주셨다.
“여러분 또래이거나 몇 살 위인 학도병들이 6.25 당시 징집되어 이름 모를 땅에서 전사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는 전쟁 중 전사한 전우를 그 자리에 대충 묻고 나뭇가지를 십자가 모양으로 세워 그 위에 전사자의 철모를 씌워놓고 짧은 묵념 후 급히 이동하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었던 처참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어린 시절 추억이 살아있듯이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라는 가사는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서 지친 비목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함께 부르면 좋겠어요.”
매년 6월 열리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 정기연주회에 올해도 참석했는데, ‘비목’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주제로 연주된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의 군가와 ‘전우야 잘 자라’, ‘진짜 사나이’, ‘팔각모 사나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 다양한 레퍼토리가 우렁찬 합창의 화음으로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이 군가들이 장병들의 군인정신을 함양하고, 충성심과 전우애를 키워줬을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여고 시절 교실에서 처음 접했던 ‘비목’을 들으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마 두 아들을 군대에 보냈던 나의 심정과 아직도 아들의 비목을 가슴에 품고 사는 엄마들의 심정이 만났기 때문 아닐까.
주일예배 때 자모실에서 아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복되는 공통적 특징이 하나 있다. 다른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거나 과자를 주는 사람한테 잠시 갔다가도 자신들의 엄마 아빠에게 이내 돌아와 안기는 모습이다. 6.25 당시 전투에 참여한 한국군과 유엔 16개국 참전 용사들의 부모들도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나의 이모님은 새댁 때부터 하늘나라 갈 때까지 한 번도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으셨다. 그런데 새벽이슬 같은 두 아들이 6.25 때 징집돼 나간 이후 전사 통지서로 돌아왔을 때 실신하셨다. 두 아들의 유품으로 뒷산에 묘를 만든 이모님은 매일 올라가 그리운 모정으로 오열하며 기도하셨다. 수십 년이 지나고 내가 다행히 한 예비역 장성을 통해 절차를 밟아 얼굴도 모르는 두 오빠의 유품을 수습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물론 연세 많은 이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신 뒤였지만, 남은 형제자매들이 감격했다.
요즈음에도 자녀를 군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마찬가지다. 동작동 국립묘지와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본 적이 있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유족들은 오열한다. 부모들은 전사한 자녀가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아장아장 걸어오던 모습, 청소년기 모습까지 스크린처럼 기억 속에 스쳐 가며 더욱 아픔 가슴을 부여잡는다.
안타까운 죽음, 사무치는 그리움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나라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기적같이 유엔 결의를 통해 인류 전쟁 역사상 최다 참전국을 파병하게 해주셨다.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뉴질랜드, 필리핀, 튀르키예, 태국, 남아공,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등 16개국은 병력지원국으로,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서독 등 6개국은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했다. 1953년 휴전을 맺을 때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미군이 341,000명, 연합군이 39,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전사, 부상, 실종으로 희생된 한국군 피해자는 621,479명에 이른다. 유엔군의 희생자도 154,881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들은 누군가의 귀한 가족들이다. 안타까운 죽음이고,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2,328명 중에는 결혼 8일 만에 한국으로 떠난 아버지도 있고, 약혼자와 이별하고 한국전에 참가한 오빠도 있다. 아버지가 한국전에서 전사하고 어머니와 네 남매가 뿔뿔이 흩어진 사연도 있다. 유엔기념공원에도 무연고 전사자들이 있는 걸 생각하면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들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6월에는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면 좋겠다. 지난 2000년 시작돼 수습된 국군 전사자 유해가 모두 1만 1,000여 구다. 신원이 확인된 분들은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 국립제주호국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비목으로 서 있는 아니, 비목의 흔적조차 없는 영혼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의 지도자를 뽑을 때 자녀의 병역의무 기피는 용서할 수 없는 쟁점이 되곤 한다. 병역기피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현행법에도 불구하고 매년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병역기피자가 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본(本)을 보여야 하는 기독교인
기독교인의 국가관은 다양한 신학적, 사회적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정부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해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정부에 순종하고, 법을 지키며, 권위자들을 존중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는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크리스천들이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위함이다(벧전 2:13~17). 그러면서도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조한다. 이는 교회가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신앙 활동을 유지하고, 정부가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금이나 병역의무에서도 크리스천들이 본을 보이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마 22:21)에서 비롯된 원칙이다.
특히 교회와 기독교인은 나라의 흥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왔기에 더욱 국가 안보와 부국강병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목회자들이 많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지도자급 인물들도 기독교인이 많았다. 특히 ‘제암리교회’는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1919년 3월 31일 정오, 발안 장터에 모인 주민 천여 명이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칼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시위는 계속되었다. 당시 제암리교회에서는 문맹 퇴치와 신문화운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간의 과잉 진압에 대해 사과하겠다며 4월 15일 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교회로 15세 이상 남자를 모이게 하고, 교회 밖에서 포위하고 집중사격을 한 뒤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교회를 불태웠다. 민가에도 방화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일제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제암리교회는 이후에도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는데, 1960년대 교회 건물이 재건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명
한국 역사에서 기독교인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과 사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민족의 미래를 위해 세워진 미션스쿨과 병원은 선교사들과 기독교인 지도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신앙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6.25 전쟁 중 북한에서는 많은 교회가 파괴되었고, 예배가 금지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였던 한경직 목사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남한으로 탈출했으나 그의 많은 동료는 체포되어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했다. 유물론 공산주의와 유신론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기에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많은 성직자와 성도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하지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켰고, 지하 교회가 형성되었다. 남한 역시 전쟁 중 많은 교회가 파괴되었지만, 천막을 치고 예배를 이어갔다. 다음 세대를 위해 주일학교를 열었다. 남한에서도 기독교는 피난민들을 돕고 사회적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교회는 교육, 의료, 구호 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큰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신앙의 깊이와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희생과 핍박 속에서도 애국심과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신앙 선진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의 비목이 십자가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라도 잊으면 안 되겠다. 이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는 우리의 시대적 도리임을 되새기자.
/ 김수민 권사(동대문중랑공동체, 칼럼니스트)
2024-06-22
제14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