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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진 만남, '청년과 멘토' 진짜 멋진 만남, ‘청년과 멘토’ 멘토는 삶으로 보여주는 스승, 경험을 나눠주는 아버지 멘토,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로 쓰이는 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이 꼭 듣고 싶어하는 말이 있다.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이다. 그만큼 살아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 청년들은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으려고 그들의 강의를 찾아보기도 하고, 서적을 구입해서 읽기도 한다. 그렇게 만난 인생 선배들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봐 빼곡하게 메모도 해놓는다. 그런데 여기, 청년들이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인생 선배들과 정기적으로 그것도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대학청년부에서 활발하게 실시하고 있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 홍하영 기자 hh0@onnuri.org 살아있는 인생 경험을 주고받는 멘토와 청년들 (위 박일환 장로와 김창식 형제, 아래 신현우 집사와 안선명 형제). ‘멘토’라는 단어는 <오디세이(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절친한 친구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친구 멘토에게 자신의 집안과 아들 텔레마코스를 부탁한다.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친구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친구이자 스승,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줬다. 전쟁에 나간 친구 오디세우스 대신 텔레마코스 왕자를 지혜롭고 현명한 왕으로 키워냈다. 텔레마코스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 멘토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때마다 멘토는 그의 곁에서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멘토라는 이름이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현명한 지도자(충실한 조언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멘토를 만나고 싶어 한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있는 청년들은 더욱 그렇다. 수많은 청년들이 인생 선배들에게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선배들의 인생 경험 그 자체가 그들이 찾아 헤매는 문제의 해답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을 먼저 산 선배들의 경험과 진심어린 조언이 청년들에게 정말 큰 도전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도 청년들에게 도전과 위로, 사랑을 선물하는 사람들이 있다. 멘토들이다. 청년들이 멘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멘토들과의 대화에서 신앙과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가 그랬듯이 대청 멘토들도 청년들의 스승이자 부모, 상담사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나도 멘토님처럼 살아야겠다” 안선명 형제(부천드림플러스공동체)는 신앙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멘토 신현우 집사(부천드림플러스공동체 멘토)를 만났다. 안선명 형제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앙적인 어려움과 마주했다. 이 무렵 성경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는데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었다. 교회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신현우 집사를 만났다. 안선명 형제와 신현우 집사는 7개월 동안 식탁교제를 나누면서 대화했다. 신현우 집사는 안선명 형제와 만나는 시간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살아오면서 실수한 경험을 나누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7개월 동안의 만남이 안선명 형제의 신앙을 성장시켰다.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던 안선명 형제가 지금은 부천 온누리교회 찬양팀을 섬기고 있다. 그룹홈 사역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다.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터를 ‘능력에 맞게 들어가 돈을 버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우회를 만들어서 동료들과 말씀을 나누고, 섬기는 신현우 집사를 보면서 일터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또한 신현우 집사의 연애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방법을 배웠다. 매일 함께 QT하면서 교제했다는 신현우 집사 부부의 이야기가 안선명 형제가 가지고 있던 연애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신현우 집사가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이 도전이 됐다. “멘토님 덕분에 제 신앙과 삶이 많이 변화 됐어요. 멘토님이 제게 해주셨던 조언들을 삶으로 직접 보여주시니까 더 와 닿고 도전이 되더라고요. 항상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시는 멘토님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멘토’ 부모는 자녀가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미리 길을 닦아준다. 먼저 걸어온 그 길에 대한 경험을 아낌없이 들려준다. 멘토도 멘티에게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김창식 형제(요셉공동체)는 요셉공동체에서 자신의 인생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든든한 아버지 같은 멘토를 만났다. 요셉공동체 대표멘토 박일환 장로다. 김창식 형제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올바른 신앙관과 재물관, 인격을 갖춘 크리스천 CEO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CEO 출신 박일환 장로에게 도움을 받고자 찾아갔다. 박일환 장로는 김창식 형제를 너무나 따뜻하게 맞아줬다. 크리스천으로서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도 알려 줬다. 얼마 전에는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웠다. 김창식 형제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번번이 잘 풀리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이 찾아왔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운 마음도 밀려왔다. 박일환 장로는 김창식 형제에게 본인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기다리다보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조언했다. “조급하다 보면 꼭 봐야할 다른 부분을 놓치게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박일환 장로의 조언대로 김창식 형제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선택 앞에서 어떻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박일환 장로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인생은 의사결정의 연속’이라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제 선택으로 인해 결정된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제 삶에 적용해 보니까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더라고요.” 일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 신앙적인 고민, 결혼,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박일환 장로가 떠오를 정도다. 웃음 가득한 멘토들의 고백 “청년들과 소통할 때 가장 행복하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멘토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신현우 집사는 “청년들과 삶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라며 “청년들을 더 섬기고, 그들을 돕기 위해 더 노력하는 멘토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신현우 집사는 청년들과 더 가까워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청년부 공동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일을 맞은 청년들을 챙기고 있다. SNS 카카오톡에 생일을 맞은 청년의 이름이 뜨면 잊지 않고 간단한 선물을 전달하고 마음을 표현한다. 순모임 단체 채팅방에서 은혜 받은 말씀을 나누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청년부 리더십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윷놀이를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청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박일환 장로 역시 청년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공부하고, 순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박일환 장로는 “청년들과 소통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박일환 장로가 이 시대 청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좋은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도 여러분을 보시기에 좋은 걸작으로 빚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걸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인생을 소중하게 살아가십시오.” 박일환 장로와 신현우 집사 외에도 대학청년부에는 수많은 멘토들이 있다. 청년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일대일 멘토링도 해주고 있다. 인생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한 청년이 있다면 주저 없이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2019-07-14 제1254호
캠퍼스 전도집회‘희망노트’4월 30일 시작 대학 신입생 수련회 ‘Be The Man’도 실시 대학부가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를 개최한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오전 11시와 정오에 45분씩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 60주년 채플관에서 열린다.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는 말씀영상, 찬양 및 간증,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강사는 최성민 목사(온누리교회)이며 특별게스트는 가수 이미쉘, 가수 김신의(그룹 Monni), 가수 홍이삭이다. 최성민 목사(온누리교회)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에 참석해서 교회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캠퍼스 전도집회 ‘ 희망노트’ 는 매년 열리고 있다. 한편 허브공동체와 Pole2공동체는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수련회 ‘ Be The Man’ 을 개최한다. 허브공동체는 4월 28일 토요일오후 3시 양재 온누리교회 비전홀, Pole2공동체는 5월 12일부터 5월 13일까지 1박2일 동안 경기도 가평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하늘공동체는 지난 4월 7일 홍익대학교 프리스타일 스페이스 이벤트홀에서 수련회를 실시했다. / 권찬송 기자 kcs123@onnuri.org
2018-04-24 제1192호
[멘토가 멘티에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적 군사’ 멘토가 멘티에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적 군사’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늘 현실의 벽에 부딪혀 회개하고 낙담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소망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주일마다 고개를 떨구는 절망의 시간을 경험한다. “왜 나는 그때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다이어트에 성공하려면 열량 높은 음식을 피하고 운동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지엽(枝葉)적인 것보다 우선인 것은 기본적인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식사량, 운동 시간, 스트레스, 수면시간 등)을 건강한 패턴으로 바꾸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균형 잡힌 몸이 만들어진다. 신앙생활도 다이어트와 똑같다. 삶이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의 신앙 패턴을 바꾸는 변혁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변혁 과정을 제안한다. 첫째, 예배 집중을 위해 기록을 하는 것이다. 왜 그런지 예배 시간만 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생각나고, 졸음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매번 결단 해보지만 결국 작심삼일이 되고 만다. 필자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10년 전부터 설교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보고, 듣고, 적는 것이 말씀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설교 내용 이해를 도와준다. 더 중요한 것은 주중에 이 노트를 읽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된다. 둘째, QT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필자는 10년 넘게 <생명의 삶>을 숙제하듯 해 오다가 최근 3년 전부터 “아하, QT가 이렇게 중요하고 유익하구나”를 깨달았다. QT가 성경 공부와 함께 하나님이 매일 나에게 주시는 짧은 말씀 속에서 그분의 뜻을 알아가고, 나를 향한 계획을 깨닫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창 1:4).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마귀에게 공중 권세가 넘겨지므로(눅 4:6) 끊임없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을 내려고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마귀에게 ‘틈(Foothold)’을 주지 말라는 경고와 그 방법을 주고 있다(엡 4:27). 여기서 ‘틈(Foothold)’이란 산에 오르고 내려갈 때 반드시 밟고 가야 하는 곳이다. 그곳 말고는 밟아서도 안 되고, 밟을 수도 없는 자리를 말한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바로 그 틈(우리가 반드시 밟아야 할 그 자리)을 마귀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적 가치관이 마치 뜨거운 물 속 개구리처럼 아주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적 가치관(요일 2:16)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거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매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묵상하고, 선포하며, 적용하는 QT를 생활화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를 비유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신부’라고 말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OO만을 사랑하겠습니다”라는 혼인 서약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가 “OO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혼인 서약을 하면 결혼식장이 갑자기 썰렁해지지 않을까? 우리의 분주함과 나태로 “하나님도 좋고, 세상이 주는 기쁨은 더 좋습니다”라고 한다면 아무리 삶이 예배가 되기를 원해도 원함 그 자체로 끝나 버릴 것이다. 주일예배 2시간은 일주일 동안 우리 삶의 연장이며, 일주일 동안의 우리 삶은 주일예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매일 QT하면서 우리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적 군사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예배일 것이다. / 이호진 멘토(부천드림플러스공동체)
2024-12-14 제1520호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사춘기 자녀와 잦은 갈등으로 너무 힘이 듭니다. 사춘기 자녀 양육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사춘기 자녀와 잦은 갈등으로 너무 힘이 듭니다. 사춘기 자녀 양육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이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존 방식으로 대처하려다 보니 갈등이 심화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부모들에게 필자는 일단 ‘자녀를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 놓으라’고 말하고 싶다. 부모의 관점에서 자녀를 잘 키우려고 하면 오히려 부모가 만지는 만큼 자녀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자녀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모는 자녀가 ‘행복저축통장’에 행복을 많이 채우도록 도와야 한다. 그 행복이 자녀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힘이 되기 때문이다. 갑자기 금전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저축을 해 놓았다면 그 상황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더라도 행복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행복했던 때를 떠올린다. 그 행복이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그 어려움을 이겨나간다. 그러나 행복한 경험이 적은 사람은 어려움을 뚫고 나갈 힘이 없어서 늪에 빠져버린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가 ‘행복저축통장’에 행복을 많이 채우도록 도와야 한다. 둘째, 자녀의 실수를 안아주고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실수나 엇나가는 것을 못 견딘다. 하지만 아이들은 충분히 실수를 경험해야 한다. 실수를 많이 해야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가 실수를 통해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녀가 실수하더라도 “실수해도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격려해야 한다. 또한 사춘기는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의사소통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에게 알맞은 격려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격려와 응원을 통해 용기를 얻고, 더욱 강해질 수 있다. 그 자녀가 자라서 청년이 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꾸준히 자녀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 자녀들이 사춘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교회를 떠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믿음의 기반이 자리잡혀 있지 않은 자녀는 세상의 물결에 요동치게 된다. 부모는 꾸준히 자녀에게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는 선명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사춘기 자녀에게 신앙생활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신 자녀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그들이 삶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갈등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부모, 자녀 간의 관계가 잘 성립 되어있는 자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받는다.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부모에게 느꼈던 것처럼 인자하고 따뜻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대화에서도 자녀들의 고민에 답을 주려고 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고민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춘기와 청년기 자녀들이 겪는 혼란이 절대 작지 않다. 그들이 겪는 고뇌와 갈등을 부모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가 힘들어하는 마음을 받아주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자녀가 조언을 구하면 “나도 이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이겨냈다”면서 “우리는 더 잘 분별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고 알려줘야 한다. 자녀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힘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 줘야 한다. 물론 자녀들이 세상의 물결에 흔들릴 때 부모의 이야기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부모의 꾸준한 기도와 사랑, 진리를 전하는 노력이 자녀가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다시금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 경험이 자녀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강미향 목사(가정사역공동체)
2024-12-07 제1519호
[멘토가 멘티에게 ] 그 DNA, 그 이름은 ‘RUN’ 멘토가 멘티에게 그 DNA, 그 이름은 ‘RUN’ (RUN to The World, RUN to The Heaven) Q. ‘선교’를 생각하면 부담부터 앞섭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선교에 대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요? 상반기 CGN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바울로부터’를 보고 우리 삶과 신앙의 교집합에 늘 ‘선교’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증인 된 한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그에게 깃든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열심을 크게 체화할 수 있었다. 세상에 명언이나 격언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향기’,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예수의 흔적’,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처럼 큰 감동과 위로, 도전을 우리에게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학술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날 것 그대로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말들이 또 있을까? 놀라운 것은 이 어록이 바울, 그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라는 점이다. 물론 바울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고백은 하늘에 흩어지고 바위에 부서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었다. 행동으로 그 말을 확증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으로 복음의 소식이 얼마나 아름답고 생생한지를 보여주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금수저였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흔적을 새기기로 예정하셨다. 하나님은 ‘다메섹 프로젝트’를 계획하시고 바울을 하나님의 금수저로 세워주셨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기독교 최대 탄압자를 기독교 최고 실천가로 만든 하나님의 그 한 수로 한 사람이 전환됐고, 온 열방이 전환되는 성령의 역사를 목도할 수 있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전환’은 다메섹이라는 외부 요인뿐만 아니라 이미 바울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의 또 무엇이 그를 이방의 빛이자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었을까? 바울의 내부에는 하나님께 새김 받은 DNA가 있었다.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게 만든 하나님의 DNA가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단번에 바울을 사도가 되게 한 그 DNA의 이름은 ‘RUN’이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본 적 있는가? 불편한 다리, 남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가진 ‘포레스트 검프’는 여느 날 같이 또래의 괴롭힘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다 소년은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달리는 삶을 살아간다. 바울은 성경의 포레스트 검프와 같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성경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빌 2:16, 3:14 달음질, 달려가노라, 딤후 4:7 달려갈 길, 히 12:1 우리 앞에 당한 경주, 고전 9:24~26 달음질). 그가 달려 지나간 자리에는 복음의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 소리가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항상 역동적이었던 사도 바울의 육체적 결승점은 로마였고, 영적 결승점은 하나님 나라였다. ‘이젠 되었겠지’라고 생각한 순간 바울은 배에 올라타 있었다. 팀을 꾸려 N차 선교여행을 진행했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있었으면서도 여러 편의 서신을 집필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바울이었기에 그의 달음박질을 멈추는 게 하는 것은 세상에 그 무엇도 없었다. 다시 하나님의 DAN로 넘어가 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빌 1:8), 보혈의 피(히 9:22)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신앙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핏속까지 완전한 새사람이 된다. 겉과 속이 동시에 뒤집히는 일이 필요하다. CGN 다큐멘터리 <바울로부터>를 보면서 ‘신의 설계도’라 불리는 DNA에 하나님은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RUN’을 박아놓으셨음을 깨달았다. 부활의 신앙(Resurrection), 항상 유기적으로 행하는 신앙(Underw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Nevertheless)과 이 DNA는 수천 년을 지나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항상 승리하며 살고 있는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증인인가? 스스로 시험해 보고 확증해 보라. 사도 바울은 이 명령적인 호격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딤전 4:15~16). RUN! 뛰어라!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 / 조호동 멘토(W공동체)
2024-11-30 제1518호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크리스천 부모의 역할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크리스천 부모의 역할 “크리스천들은 자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크리스천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올바른 자녀관을 형성해야 한다. 자녀관을 제대로 확립하지 않으면 자녀를 키우는 일이 뒤죽박죽되기 때문이다. <시편> 139편 13절에서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통로’라는 의미다. 또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이유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이다. 자녀를 내 육신의 자녀로 보느냐, 하나님의 자녀로 보느냐에 따라 자녀관이 완전히 달라진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올바른 자녀관을 가지고, 청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자녀가 많은 경험을 해보고,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미술이나 음악 등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시켰더니 얼마 안가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그때 부모가 자녀를 인내심이 없다며 다그치거나 실망하면 안 된다.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재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가 재능을 발견하도록 계속 장(場)을 열어주고, 도와주는 게 부모 역할이다. 자녀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겠는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 각자의 색깔대로 살도록, 그것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많은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고 기도해야 한다. 둘째,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해 본 자녀는 그렇지 않은 자녀와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자녀가 부모를 통해 공급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담는 큰 그릇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녀가 가정에서 느낀 행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해야 한다. 자녀가 언제 어디서나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야 한다. 셋째, 믿음의 유산을 남겨야 한다. 자녀에게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지를 알게 해야 한다. 삶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고난과 풍파가 있다, 그때 무릎 꿇는 만큼 인생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부모를 통해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자녀에게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면 자녀들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마음에 스며든 하나님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붙잡으면 된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지키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올바른 자녀관을 가지면 내 자녀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자녀만 생각하면 안 된다. 크리스천은 내 자녀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모두 잘 자라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모든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자라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서로 사랑하며 선한 영향력을 주도록 돕는 것이 크리스천 부모의 역할이다. /강미향 목사(가정사역공동체)
2024-11-23 제1517호
[멘토가 멘티에게] 갈등과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 멘토가 멘티에게 갈등과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 Q. 공동체에 다퉈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하나요? 그냥 이대로 지내면 안 되나요? 공동체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해결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게 가능한 선택일까 싶다. 많이들 갈등 상황을 피하거나 방치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고, 장기적으로 자기 자신과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갈등을 무시하면 감정을 억압해서 ‘감정 누적’을 초래할 수 있다. 감정은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억눌린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Freud)는 억압을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했다. 그는 개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나 충동을 무의식 속으로 억누르면 억압된 감정이 나중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인관계에서 갈등과 분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밝혔다. 갈등을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불만과 상처가 쌓여서 장기적으로 더 큰 폭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 갈등을 방치하면 관계의 질이 점차 악화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다. 서로 관계 안에서 사랑하며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상호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공동체에서 이런 상황은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공동체의 신뢰마저 흔들릴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개인의 정신 건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계속 갈등 상황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경험할 가능성이 커진다. 부정적 정서를 보상하기 위한 중독에 빠지거나 우울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해결하지 않은 지속적인 갈등 상황은 개인의 자존감에도 악영향을 미쳐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사회적 관계에 불안감을 높여 적절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은둔형 외톨이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부분을 알고 계시기에 “그러므로 네가 만약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네 형제가 너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두고 우선 가서 그 사람과 화해하여라. 예물은 그다음에 돌아와 드려라”(마 5:23~24)고 말씀하셨다. 왜 갈등을 해결해야 할까? 긍정적인 갈등 해결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문제를 잘 해결할 때 더 깊은 신뢰가 형성되고, 관계가 더욱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않았느냐? 강하고 담대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 여호와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할 것”(수 1:9)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갈등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위로와 힘을 주신다. 공동체에서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면 문제를 더 키우는 선택이 될 뿐이다. 갈등과 문제는 피하기보다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가 더욱 단단해지고, 개인 역시 성장할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갈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더욱 친밀해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충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최숙영 멘토(인천WEB대학청년부)
2024-11-16 제1516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내 ‘마음의 전부’를 보시는 하나님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내 ‘마음의 전부’를 보시는 하나님 “직장에 다닌 지 꽤 됐는데도 어려운 형편에 십일조를 내는 것이 힘이 들고 부담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명기> 14장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규례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마땅히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 14:22~23). 성경은 십일조를 내는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가 십일조를 구별해서 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구별하셨기에, 우리도 자격 없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께 경외함을 드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십일조를 드린 이가 아브라함이다. 그는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찾아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다(창 14:17~20). 이는 하나님이 그돌라오멜과 싸우셨으며 승리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일조의 참된 의미는 내 삶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헌금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씀이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다. 부자들이 성전으로 나아와 헌금함에 많은 돈을 넣었다. 잠시 뒤 가난한 과부가 다가와 렙돈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었다. 예수님은 이 과부가 그 누구보다 많은 헌금을 드렸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녀가 가난한 가운데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 곧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3~44). 하나님의 시선과 세상의 시선은 다르다. 세상은 부자들이 넣은 큰돈을 보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가 드린 마음의 전부를 바라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분에게 드리는 돈의 가치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는 모습으로 말씀을 따라 순종하였는가’, 둘째, ‘나의 마음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는가’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바르게 점검한다면 내 형편이 아닌 순종의 삶에 집중하게 된다. 십일조를 내는 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는 게 힘이 드는 이유는 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만 한다는 자기 부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부담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순종과 예배에 집중할 때 하나님이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 기쁨과 감사가 가득하게 하실 것이다. / 전진 목사(CHPLUS공동체)
2024-11-09 제1515호
[멘토가 멘티에게] 구별, 선포, 동행 멘토가 멘티에게 구별, 선포, 동행 Q. 말씀처럼 선하게 살고 싶지만 가끔은 나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나요? 이 질문은 청년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겪고 있는 동일한 고민이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우리에게 나쁜 마음, 생각이 언제든지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쓰여있다. 우리의 나쁜 마음과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갈 수 있으나, 머리에 앉아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했던 루터에게도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유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득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나쁜 마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 생각을 묵상하고, 머물러 행동으로 이어지는 죄의 패턴을 루터는 없애기를 원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모든 결과의 시작점이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열매도 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로 지금 시대가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근래 다양한 인터넷 매체로 인한 악한 모습과 생각들이 우리 청년들의 생각 속에 수없이 스며들고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성경의 말씀처럼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삶이 될 것이다. <잠언> 4장 23절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한다. 그러한 환경에 노출을 의식적으로 피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악한 생각들로부터 지켜야 한다. 세 번째 우리의 생각을 내버려두면 안 된다. 자연 과학 법칙에 열역학 2법칙이 있다. 그냥 놔두면 자연계도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법칙이다. 성경에 가롯 유다의 모습을 보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붙잡지 못한 유다는 결국 배반과 무질서 방향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우리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대, 그리고 진리가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마음과 생각을 그냥 흘러가도록 놔두면 안 된다. 내 안에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 오는 생각인지 아닌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나쁜 마음과 생각이 우리 안에 있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선포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신 것처럼 입술로 대적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을 가만히 두면 변질된다.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는 정렬하는 반복적인 연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주님과 24시간 동행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컵 속에 들어있는 작은 이물질을 제거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깨끗한 물을 계속 부을 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은혜의 생수가 계속 우리 삶과 모든 영역에서 흘러가도록 주님과 친밀한 동행의 삶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동행 연습>이라는 책에 로렌스 형제는 우리에게 유혹과 고난이 가득한 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열망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나쁜 마음과 생각을 이기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선포의 고백으로 우리의 삶을 매일 걸어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마틴 루터의 습관처럼 “우리도 가끔 새가 머리에 둥지를 틀지 않도록 머리를 가끔 좌, 우로 흔들고 살면 좋겠다. / 범석훈 멘토 (대전GLS공동체)
2024-11-02 제1514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지 결코 사람의 손이 아니다!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지 결코 사람의 손이 아니다! “지인들을 전도하고 싶은데 제가 그럴만한 사람인지 스스로 의문이 들고 부끄럽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둑은 9개의 화점을 포함해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약 360일을 1년으로 보는 것을 기반한다. 총 361곳에서 흰 돌과 백 돌이 접점을 보이며 변화무쌍한 수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바둑에 우주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고 칭송했다. 바둑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놀이로 그동안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난 2016년 3월 9일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D-day 충격의 알파고, AI가 인간을 이긴 날’. 바로 이날은 딥마인드라는 회사가 개발한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가 인간 대표로 출전한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쥔 날이었다. 이 알파고와의 대국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에 관심과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두려움과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해서 당시 알파고보다 훨씬 뛰어난 인공지능 컴퓨터가 개발될 것이다. 사람과 컴퓨터 간의 격차가 더욱 선명하게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보게 되었다. “과연 과학의 발전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이 컴퓨터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지표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모른다’를 인정하는 반응 속도일 것이다. 가령 우주여행을 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당신은 우주여행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그 답을 우리가 연산하고 결괏값을 도출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아마 질문을 다 듣기도 전에 연산을 끝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기계보다 유일하게 빠르고 낫다고 인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아마도 ‘모른다를 인정하는 반응 속도’일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철학이 시작되었고, 신학도 생겨났다.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성경도 인간의 모름, 할 수 없음, 무기력함에 대한 자기성찰의 결과를 소망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사순절도 ‘재의 수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는 말 그대로 물건을 태우고 남은 재, 가루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창 3:19)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선 자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갈망할 수 있고, 그분이 주시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바울의 선고가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선고인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있는 가능성으로 성공적인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죄인 중에 괴수 같은 나조차 자녀로 부르시고, 구원을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전하는 것이다.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Not I but Christ’ 나의 나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가 묵상했던 <호세아서>의 키워드가 무엇인가? <호세아> 6장 6절에 담긴 메시지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더러워진 고멜의 삶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지 결코 사람의 손으로 드려지는 그럴싸한 제사나 거룩한 선지자 호세아가 아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이 말씀처럼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우리를 고쳐 주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전하면 된다. /최대흥 목사 (요셉청년부)
2024-10-26 제1513호
[멘토가 멘티에게] 거룩한 부자의 꿈 멘토가 멘티에게 거룩한 부자의 꿈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려고 하면 안 되나요? 돈을 많이 벌려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일까요?” 성경에서 ‘부자’하면 생각나는 말씀이 ‘낙타의 바늘귀 통과’ 비유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 나라 가기가 매우 힘든 그룹으로 부자를 꼽은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의 지혜서라 불리는 <잠언>에서는 부자의 유익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부지런하고 정직하며 성실한 자와 의로운 자의 부자 됨을 축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2008년 당시 40일 새벽기도회에서 하용조 목사님이 “돈은 중립적인 가치이고, (쓰기에 따라) 축복이자 저주이다”라고 설교하셔서 부에 대한 큰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청년들에게 부자 되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지만, 꼭 ‘거부’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거부’란 거룩한 부자이다. 돈에는 유용성과 위험성의 양면이 있듯이, 부자도 ‘거룩한 부자’와 ‘세상적 부자’로 나눌 수 있다. 평생 모은 100억대 재산을 한동대에 기부한 故 장응복 장로님은 거룩한 부자이다. 이런 부자가 되어야 한다. 인색한 부자나 자신의 만족과 과시를 즐기는 세상적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 참된 크리스천 부자의 모습은 거룩한 부자, 의로운 부자이다. <잠언>에서는 부(富)보다 귀한 게 지혜와 명철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지혜와 명철을 갖춘 사람의 부유함은 큰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잠언>에서는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은 번영하고”(잠 11:25), “거저 주는 사람은 더 많이 얻게 된다”(잠 11:24)고 구제와 나눔이 부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한다. 부의 결과로 구제와 나눔을 하는 것도 좋지만, 부의 형성 과정이 구제와 나눔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부자라면 세상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세리이자 부자인 삭개오가 “소유물의 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겠다”고 하자 예수님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다. 이처럼 부자의 돈 씀씀이에 따라 하늘나라의 보화를 쌓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화를 쌓기도 한다. 세상 부자의 착각은 자신이 소유한 재물이 영원하리라는 것이다(시 49:9~10). <잠언> 23장 4절에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리라”고 교훈한다. 부에 대한 정말 중요한 교훈이다. 이 교훈의 핵심은 돈의 주권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노력한다고 모두 부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부는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동방의 거부(巨富)이자 거부(거룩한 부자)인 욥의 일생을 자세히 보라. 그는 부자가 되려고 애쓴 적이 없고, 열심히 구제와 나눔과 사랑을 실천했다. 부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거룩한 부자’가 될 수 있다. 성실한 사람은 복을 받지만, 벼락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벌을 면치 못한다(잠 28:19~20). ‘부(富)’는 불과 같아서 감당하고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성경에 “내게 가난도 부도 허락하지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만을 달라”고 소박한 삶의 바람을 절절히 표현한 구절도 있다(잠 30:8). 사도 바울처럼 가난에도 처하고 부유함에도 처할 수 있는 비결(빌 4:12)로 부를 다스리고 사는 사람이 흔치 않다. “자족하고 청빈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의롭고 거룩한 부자로 살 것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기를 바란다. 마음은 원하는데 입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답이 아니라 진정 솔직한 답을 내리기를 바란다. 어떤 선택을 하던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던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한 것을 제대로 하자. 하나님은 가난함과 부유함에 상관없이 우리가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해서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부유함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유함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고,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면 큰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거룩은 구별됨이고, 거룩은 사랑이다. / 박기일 멘토(길청년부)
2024-10-19 제1512호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우리 인생의 답이 정해져 있나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해주신 비전, 길, 배우자 등이 정해져 있는 걸까요?” 우리 인생은 어떠한 답을 정해 놓고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풍성한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 때 감탄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인생이 된다. 먼저 비전과 길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과연 그 비전이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비전은 내려놓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또는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떠하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가다 보면 그 길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또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답’을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과연 ‘각자의 배우자가 정해져 있을까?’ 생각해 보자.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라는 말인가? 하나님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금 내게 맡겨주신 일들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어 넣으며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둘째,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생각과 태도, 인격이 변화되어야 한다. 질문자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질문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여정과 같다. 그 믿음의 여정은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너는 것과 같다. 때로 돌 하나하나에 발을 내딛기가 두려울 수 있다. 믿음이 부족하고, 두려움이 나를 삼키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손잡아 주신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능히 그 믿음의 여정에 함께해 주신다. 비록 발이 물에 빠질지라도 하나님이 친히 건져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라. 이 답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좌충우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나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어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로 일하던 중에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의사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의대에 진학했고, 현재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섬기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캄캄한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축복한다. 나의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란다. / 김준태 멘토(남양주온누리교회)
2024-09-14 제15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