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캠퍼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가 뭘까? 

기획  거듭나는 크리스천들을 위하여  가인, 사울 왕, 열두제자들조차 사로잡혔던 시기, 질투 시기와 질투를 버려라 …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는 일    벌써 입춘(立春)이 지났다. 새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새해 작정했던 수많은 계획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다. 본지에서는 ‘거듭나는 크리스천들을 위하여’를 주제로 우리가 꼭 버려야 할 감정과 습성을 알리고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방법이다. 그 첫 번째 제안은 ‘시기와 질투를 버리는 훈련’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구에르치노의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습성 혹은 감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잘 되는 꼴을 두고 못 보는 것이 죄 많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한다’는 뜻이고,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는 감정’을 의미한다.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두고 못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기와 질투, 그 모진 역사   인류가 생긴 이래부터 현재까지 시기와 질투의 모진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참으로 길고도 질기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아벨과 가인’ 사건 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이자 동족살인의 비극인 아벨과 가인 사건의 원인이 바로 시기와 질투였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 4:3~8).  사울은 질투의 화신이었다. 다윗을 질투한 그는 영혼까지 피폐해져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다. 그런 사울의 인생이 비극적으로 변하게 된 바탕에도 시기와 질투가 숨어 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다윗이 블레셋을 쓰러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을 때 여자들이 나와 다윗을 환영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울이 이 말에 심히 노했고, 그때부터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8~9).  한글성경에는 단순히 ‘주목하였다’고만 되어 있지만, NIV 성경에는 “사울이 질투하는 눈으로 다윗을 계속해서 주목했다(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고 기록되어 있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을 어떻게 하면 처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했고, 그 감정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할 정도로 처지가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왕으로 부름을 받을 정도로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다(삼상 9장). 외모도 준수했고, 키도 컸다. 예의가 아주 바른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신앙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자기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지략이 뛰어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다윗을 질투하면서부터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기와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일생을 끝마치게 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조차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시기와 질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마 20:20~24).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분개했다. 열두 제자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었기에 시기와 질투가 마음속에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들은 나사렛 시골 사람 목수의 아들이 권세 있는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펼치며, 그로 인해 군중들로부터 인기가 커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결심했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를 시기해 자기에게 넘겨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마 27:18).  결국 그들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 만다.    시기와 질투 버리는 세 가지 훈련    시기와 질투는 남을 해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해하는 아주 무서운 감정이자 습성이다. 그 누구도 시기와 질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우리 아들은 대학입시에 실패했는데, 모 권사님 아들은 좋은 대학에 척하니 붙으면 씁쓸하고 마음이 괴로워지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시기와 질투에서 정녕 자유로울 수 없을까? 그 무서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벗어날 수 있다. 시기와 질투를 버리는 훈련이 그 방법이다. 시기와 질투를 버리는 세 가지 훈련을 소개한다.  첫째, 비교의식을 버려야 한다. 시기와 질투는 나보다 나은 사람,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부러워하고 비참한 감정이 들 때 싹튼다. 재미있는 사실은 시기와 질투는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거지는 거지를 시기 질투하고, 시인은 시인을 시기 질투한다”는 말이 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땅을 산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보다 잘 되는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 둘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잘 되는 친구, 동료, 지인들을 보고 ‘왜 나는 안 될까’ 혹은 ‘왜 저 사람만 잘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비참해질 필요가 없다.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등 세계적인 성악가처럼 노래를 잘 해야만 찬양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찬양을 사모하기만 하면 그 누구라도 찬양할 수 있다. 최고가 되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고, 이 땅에 보내셨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자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셋째,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4~17).  야고보 사도는 시기와 질투가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질투심을 버리려면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고, 이를 토대로 살아가야 한다. 항상 말씀과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한다. 말씀에 빗대어 마귀를 대적하고 또 대적해야 한다. 그래야 선한 열매가 가득하게 된다. 시기와 질투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결국 답은 하나다. 시기와 질투가 생길 때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한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 23:17~18).      <전문가 기고>   “그들을 축복하라!”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나는 방법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1898년 12월 7일 모스크바 초연 이후 지금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해 독살했다는 줄거리이다. 직접 대본을 쓴 작곡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오페라에 모차르트의 ‘진혼곡(Requiem)’과 ‘돈 조반니’의 음악을 삽입해서 더 애절한 감성을 자아낸다.  18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했던 살리에리는 작곡가로서 높은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예술에 더욱 헌신했다. 하지만 남모르게 모차르트를 질투하면서 가슴앓이를 했다. 자신은 언제나 혼신을 다해 작품을 발표하는데, 사람들이 빈둥거리면서 만든 모차르트의 작품을  천상의 음악이라고 찬사할 때마다 신은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모차르트는 어린 아들의 천재성을 발견한 궁정악사 아버지로부터 4살 때부터 음악수업을 받았다. 5살 때 이미 작곡을 했는데 24년 동안 완전한 교향곡 68곡을 작곡했다. 살리에리는 하루 속히 모차르트라는 존재가 사라져야 자신이 돋보인다고 생각했다. 결국 저녁식사에 모차르트를 초대해 은밀히 포도주에 독약을 탔다. 희곡 속에서의 스토리는 살리에리가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기 전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차르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살리에리와의 라이벌 관계는 공공연하게 전해오는 일화다.  역사의 라이벌은 일상에서도 존재한다. 세계적인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대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한번은 플로렌스의 대형 홀을 장식할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젊은 천재 무명 화가 미켈란젤로에게도 그림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해 낙담했다. 그 일로 자신의 천재성을 더 이상 살리지 못하고 어둡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쟁자와 신인들의 출현 앞에 평정심을 유지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에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잠 14:30).    시기와 질투가 만든 비극   시기와 질투는 창조 이래 인간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죄성이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수많은 비극의 단초가 되어왔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 속담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해줄 일이다. 그 땅의 시세가 오르면 나도 좋은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고, 잘 사는 형제나 친척이 많으면 도와줘야 하는 부담도 줄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앓이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시기와 질투는 대개 경쟁관계에서 비롯된다. 타고난 조건, 환경, 경제력, 외모, 능력,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등감과 원망은 욕심과 증오의 죄를 잉태한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도 시기로 인해 형제간 살인이라는 비극이 들어온다.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동생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가인의 살인행위에서 시기심이 주는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창 4:3~4).  친형제지간에도 이러할진대, 일부일처가 아닌 역기능 가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여종 하갈이 먼저 잉태해 자기를 멸시하자 이를 시기하여 하갈을 학대하므로 하갈이 결국 도망하게 된다(창 6:4~6).  야곱의 처 라헬과 레아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므로 여종들을 야곱과 동침하게 만든다(창 30:1~15).  요셉의 형들이 아비가 요셉을 그들보다 사랑함을 알고 시기하여 이복동생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버린다(창 37:4~11).  다음세대 지도자를 세워야 하는 사회와 조직에서의 시기와 질투도 깨어있지 않으면 이겨내기 어려운 유혹이다. 사울은 자신 곁에서 음악을 연주해주고,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다윗을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는 여인들의 소리를 듣고 시기해서 죽이고자 한다(삼상 18:7~8).  바벨론의 방백들은 탁월한 다니엘을 시기해 죽이고자 했으며(단 6:3~4),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심으로 비방하고 핍박했다(행 13:45, 17:5).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별을 보고 따라온 동방박사들의 행적을 듣고 헤롯은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참담한 비극을 연출한다(마 2:16). 예수님 공생애 동안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고소한다(막 15:9~10).  “시기를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힘쓰라”(벧전 2:1~2).  시기와 질투는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1400년 전 북방의 호랑이 고구려는 강대국인 수나라, 당나라와 수십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 번도 패하지 않는 신화 같은 전쟁사를 썼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가 전쟁후유증으로 몰락해버릴 정도였다. 수나라 이후 건국된 당나라 역시 그 원수를 갚고자 수십만 대군을 앞세워 고구려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중심에는 연개소문 장군이라는 걸출한 리더십이 있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난공불락 고구려가 힘없이 무너진 이유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연개소문의 장남이 정권독식을 위해 두 동생을 몰아내고자 적국인 당나라를 찾아가 군사를 구걸했고, 결국 내분으로 중심을 잃은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한다. 이로 인해 한반도의 지형이 바뀌게 된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6).  간혹 남녀 간 에로스적인 사랑에 몰두하다가 상대가 변심하면 치정으로 인해 상대방 가정을 파괴하거나 잔인한 살인과 복수극으로 치닫는 뉴스를 접할 때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의 내용은 이아고의 모함에 속아 의처증을 갖게 된 주인공 오셀로가 질투의 노예가 되어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숨지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시기와 질투는 그 대상 외에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희생하신 주님의 아가페적 사랑에 기반을 두지 않은 남녀 간의 사랑은 순식간에 조절 불가한 애증으로 바뀔 수 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 박사는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했다. <질투의 임상학>을 저술한 화이트 박사는 이혼한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헤어졌다고 발표했다. 질투는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기지 않는 게 특징이다. 경쟁관계에 있거나 가까운 관계에서 생겨난 질투의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게 되어 상대와 자신을 태우고 주변을 태우게 된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매일 마음을 기경하는 그리스도인   영국 런던에 아주 유명한 목사 세 분이 계셨다. 그리스도교회 마이어 목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설교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은 침례교회 스펄전 목사, 웨스트민스터교회 캠벨 몰간 목사다. 몰간 목사가 잠시 미국에서 사역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웨스트민스터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그분의 목회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같은 지역에서 일하게 되니까 그게 안 되더라고요.” 마이어 목사는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은 시기와 질투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시기와 질투가 없어지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마이어 목사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질투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축복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영혼들이 가득 차도록 해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시옵소서.”    결국 이 세 분은 아름답게 사역했고, 세 교회 모두 성장했다. 마음의 논밭을 개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말이 있다.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열고, 매일 마음을 기경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 김수민 권사(동대문중랑공동체, 칼럼니스트, 기업체 대표)     

 2020-02-16      제1282호

[국내캠퍼스] 예수 믿는 부모의 가장 큰 사명 ‘신앙전수’

신년기획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방법 3. 신앙전수   예수 믿는 부모의 가장 큰 사명 ‘신앙전수’ 최적의 신앙전수 방법 부모와 자녀가 함께 가정예배    <가정예배의 회복을 돕는 CGNTV 프로그램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   온누리교회가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2020년 새해를 힘차게 출발했다. 본지에서는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성도들에게 제안하고자 한다. 그 세 번째 방법은 예수 믿는 부모의 가장 큰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세대 신앙전수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다윗, 솔로몬, 사무엘 선지자.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녀교육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솔로몬은 지혜가 충만했고, 사무엘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로 추앙받았지만 모두 자녀교육은 실패했다. 자녀교육은 믿음의 조상들에게조차 쉽지 않았던 일이다.  예수 믿는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최적의 방법이 무엇일까? 바로 신앙전수다. 성경은 다음세대에 신앙을 제대로 전수하지 않았을 때와 신앙전수가 제대로 되었을 때의 결과를 아주 극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전수 실패 및 성공사례    성경에는 다음세대 신앙전수의 성공과 실패사례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앙전수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는 여호수아 이후 세대다. 모세는 출애굽 하고 비록 자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신앙전수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그러지 못했다. 가나안 정복을 이룬 여호수아 세대는 믿음을 지켰지만, 그 이후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7~10).  슬프고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세대는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들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3대를 가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그토록 많은 기적과 은혜를 경험했지만 그들은 모두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에 실패했다. 신앙전수의 실패는 혹독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4~15).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의 사례도 신앙전수의 대표적 실패사례다. 엘리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지나치게 방임했다. 결국 이들은 여호와를 의식하지 않았고(삼상 2:12), 여호와의 제사를 업신여겼으며(삼상 2:17), 심지어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저질렀다(삼상 2:22).  엘리는 자식을 잘못 기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홉니와 비느하스 때문에 여호와의 법궤를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겼고, 이 전쟁으로 두 아들을 잃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충격에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만다.  디모데는 신앙전수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영적 아들이자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였다. 사도 바울이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디모데의 믿음이 남달랐던 가장 큰 이유는 외조모와 어머니, 그리고 디모데에게 이어진 신앙전수에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유언 같은 편지 디모데후서에 잘 나타나있다.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디모데는 가정환경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유대인,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깨끗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과 교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음을 사도 바울이 인정한 것이다.    디모데를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로이스-유니게-디모데로 이어지는 3대 신앙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녀교육은 믿음의 조상들도 쉽지 않았던 일이다. 쉽지 않은 다음세대 신앙전수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모델인 디모데를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첫째,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로이스와 유니게는 디모데가 어려서부터(infancy; 0~2세의 영아기) 말씀을 가르쳤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어려서부터’ 즉, 영아기 때부터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모데 인생 최초의 배움이 성경말씀이었다. 어려서부터 말씀을 듣고 자란 디모데는 훗날 사도 바울과 함께 세계 선교의 장을 여는 주인공으로 자라났다.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게 최우선이다.   둘째, 부모와 자녀가 수시로 대화해야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5~7).  여기서 ‘강론’이 영어 성경에서는 ‘talk about’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집에 있던지, 밖에 있던지, 누워있던지, 앉아있던지, 서 있던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자녀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앙전수 최적의 방법이 무엇일까? 부모가 자녀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묵상한 말씀을 나누고, 하루의 삶을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전수의 최적의 방법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교회에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맡겨버리곤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일주일 168시간 중에서 주일학교 1시간만으로 어떻게 자녀들에게 신앙을 제대로 전수할 수 있단 말인가? 신명기 6장 5~7절에 나오는 ‘너’는 ‘부모’를 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링컨에게 유일한 교사는 어머니였고,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책이었다. 훗날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이 낡은 성경책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실 때 물려주신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모두 이 성경책 덕분이다. 나는 성경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약속한다.”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이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가르쳐 지키게 하고, 성경이 명령한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2020-02-02      제1280호

[국내캠퍼스]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이다!

신년기획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방법 2. 이웃사랑 이웃사랑, 크리스천의 정체성이자 존재이유   <서울역희망공동체 봉사자들이 동자동 쪽방촌 주민을 찾아가 섬기고 있다.>   온누리교회가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라’를 표어로 내걸고 2020년 새해를 힘차게 출발했다. 본지에서는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성도들에게 제안하고, 실천하기를 독려하고자 신년기획 코너를 마련했다.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그 두 번째 방법은 이웃사랑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사랑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며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요일 2:4).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못 박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라면 응당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자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작은 실천이 이웃들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잘하는 걸까? 헌금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면 이웃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이웃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방법을 그렇게 믿고 있다면 돈도 많아야 하고, 시간도 많아야 하고, 거창한 마음까지 있어야 할지 모른다. 단호하게 말하건대 이웃사랑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할 수 있다. 허정우 성도(성동광진공동체)와 황시영(19세)군의 사례를 보면 크리스천들이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허정우 성도는 지난해부터 서울역희망공동체에서 봉사하고 있다. 서울역희망공동체는 온누리복지재단이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은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관리하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그들의 생활지원을 돕고 있는 사회선교팀이다. 허정우 성도가 서울역희망공동체에서 쪽방촌 주민들을 섬겨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단순했다.  “제가 대기업에 다녔는데 승진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치열함이 너무 컸어요. 남들과 비교해가며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했고요. 2018년 퇴사하고 창업을 하게 되면서 회사 다닐 때 가질 수 없었던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그래서 막연하게 회사 다닐 때는 못해본 봉사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허정우 성도는 쪽방촌 주민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주민들의 작은 변화가 허정우 성도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인 셈이다.   “처음 쪽방촌 주민들을 만났을 때는 마음의 빗장이 굉장히 단단하더라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방문했더니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고요, 저에게 불행했던 과거사를 털어놓기도 하고, 언젠가 부터는 덥수룩한 수염을 깎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희가 오기를 기다리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예수이야기를 꺼내면 듣지도 않더니 지금은 ‘아멘’으로 화답하시고요.”  허정우 성도는 아주 단순한 계기로 이웃사랑을 시작했고,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일상이 되었다. 더 많은 성도들과 함께 이웃사랑을 실천했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꿈도 생겼다.   “사실 저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숙제 같고 행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유혹이 너무 많고, 잘 할 수 있을까, 이웃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만나는 이웃들을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분들이 진짜 제 가족처럼 느껴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감사하는 습관까지 생겼어요. 사실 제가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것을 드릴 수 있겠어요?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기도해 드리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 작은 실천이 이웃들을 변화시키더라고요.”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 아니다   황시영 군은 “서빙고 온누리교회 이웃사랑팀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다”고 인사했다. 황시영 군은 할머니(97세)와 아버지와 함께 보광동에서 산다. 엄마는 없다. 황시영 군의 기억에는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다. 황시영 군이 아주 어릴 때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이다.  황시영 군은 고령의 할머니, 바쁜 아버지 사이에서 외롭게 자라야만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있으니까. 그런데 늘 곁에 있어주던 할머니가 세월의 흐름까지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이가 더 들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외출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 어릴 때는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곤 했는데, 할머니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로는 그나마 가던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시영 군의 집에 서빙고 이웃사랑팀이 찾아왔다.  “할머니가 서빙고 이웃사랑팀의 방문을 너무 즐거워하세요. 언제 또 오나 하고 기다리시는 걸 보고 제 마음이 안심이 되더라고요. 서빙고 이웃사랑팀이 저희 집에 오셔서 할머니와 아버지 안부를 물어주시고, 기도도 해주시고, 할머니 건강도 챙겨주는 게 너무 감사해요.” 서빙고 이웃사랑팀의 꾸준한 방문이 황시영 군과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서빙고 이웃사랑팀의 선물은 그게 다가 아니다. 서빙고 이웃사랑팀의 추천으로 황시영 군이 서빙고 권사회로부터 장학금을 받게 됐다. 황시영 군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 생긴 것은 덤이다.  “저희 가족들을 계속 찾아와 주시고, 챙겨주시고, 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사랑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황시영 군은 온누리교회가 더 많은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할머니와 저처럼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온누리교회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꾸준하게 관심 가져주시고, 찾아와주십시오. 서빙고 이웃사랑팀이 없었다면 할머니와 저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서빙고 이웃사랑팀처럼 저도 커서 기부도 하고,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웃사랑을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이웃사랑은 돈이 많아야 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허정우 성도와 황시현 군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결코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이웃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 된다. 소외된 이웃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이다. 찾아주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달래줘야 한다. 이웃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고, 말벗이 되어주고, 기도해주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면 된다.   새해에는 작지만 큰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자.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를 보고 세상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요 13:35).     문의: 02-3215-3434, 3436

 2020-01-19      제1279호

공동체  공동체

 말씀

 국내, 국외 해외 캠퍼스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