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해설 “...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왕하 20:19). 맛있는 말씀해설 “...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왕하 20:19).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궁의 귀한 것을 모두 보여준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왕하 20:17~18). 이 말씀에 대하여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며, 자신이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으니 선하다고 반응한다. 이 반응은 자신만 무사하면 문제없다는 태도처럼 보여 무책임해 보이고,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열왕기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회복되어 바벨론의 사신들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하 말씀을 보면 전후 사정이 더 명백해진다, 바벨론 사신의 방문은 히스기야의 병이 회복된 직후가 아니라 그의 병이 회복되고, 앗수르(앗시리아)의 군대가 물러난 그 다음이다(대하 32:31).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죽을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고 교만해져서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되었는데, 히스기야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생전에는 내리지 않았다(대하 32:24~26). 히스기야가 교만해진 것은 두 번의 기적이 연거푸 일어났기 때문이다. 죽을병으로부터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막강한 앗수르의 군대를 하나님이 물리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히스기야 왕의 이름이 열방에 높아졌고, 그가 교만해졌다. 열왕기 기자는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사신 방문 사건을 바로 연결했다. 역대하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교만이 바벨론 사신의 방문 때 다시 드러났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왕궁의 모든 좋은 것을 보여준 것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역대하 기자는 바벨론 방백들의 사신이 왔을 때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2:31). 히스기야의 교만을 다시 드러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그는 자신의 교만이 재차 드러났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과거 자신의 교만이 드러났을 때 회개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히스기야 시대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시다. 내 시대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 선하다”라는 반응은 무책임한 반응이 아니다. 자신의 교만에 대한 또 다른 회개의 고백일 수 있다. 히스기야의 첫 번째 회개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 시대에는 내려오지 않은 은혜를 두 번째 교만을 드러냈을 때도 거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심판의 예언을 통해 자신의 교만이 두 번째 드러남에도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 것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시며, 자신의 시대에 태평하므로 선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히스기야의 고백은 미래 시대의 고통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기일이 다가오기까지는 오늘도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스기야가 심판의 말씀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은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교만을 용서해주시는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교만과 어리석음과 죄악을 아낌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를 받기에 너무 형편없는 우리와 대조적인 선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것처럼,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우리를 값없이 그리고 끝없이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 이은일 장로(성동광진공동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2024-09-14 제1508호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우리 인생의 답이 정해져 있나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해주신 비전, 길, 배우자 등이 정해져 있는 걸까요?” 우리 인생은 어떠한 답을 정해 놓고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풍성한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 때 감탄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인생이 된다. 먼저 비전과 길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과연 그 비전이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비전은 내려놓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또는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떠하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가다 보면 그 길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또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답’을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과연 ‘각자의 배우자가 정해져 있을까?’ 생각해 보자.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라는 말인가? 하나님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금 내게 맡겨주신 일들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어 넣으며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둘째,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생각과 태도, 인격이 변화되어야 한다. 질문자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질문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여정과 같다. 그 믿음의 여정은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너는 것과 같다. 때로 돌 하나하나에 발을 내딛기가 두려울 수 있다. 믿음이 부족하고, 두려움이 나를 삼키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손잡아 주신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능히 그 믿음의 여정에 함께해 주신다. 비록 발이 물에 빠질지라도 하나님이 친히 건져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라. 이 답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좌충우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나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어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로 일하던 중에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의사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의대에 진학했고, 현재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섬기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캄캄한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축복한다. 나의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란다. / 김준태 멘토(남양주온누리교회)
2024-09-14 제1508호
[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조선 시대 성군(聖君)을 꼽으라면 역사학자들은 세종, 영조, 정조, 성종을 말한다. 이 중에서 세종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분열 왕국 시대 선왕(善王)을 꼽으라면 성서학자들은 남유다의 아사, 여호사밧, 아마샤,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를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요시야에게 ‘대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싶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에 성공한 왕이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게 해서 예배를 회복하고(23절), 우상 숭배의 모든 모양을 쓸어 버리는 우상 척결 정책을 단행하며(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던 문화를 뒤엎어 말씀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했다(25절). 하지만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혁에도 진노를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요시야는 재앙을 안 보고 평안히 무덤에 안장될 것’(왕하 22:20, 대하 34:28)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요시야가 애썼다 할지라도 남유다는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므낫세 왕이 나라를 완전히 망쳐놨기 때문이다. 12세에 왕위에 등극해서 무려 55년 동안 남유다를 통치한 므낫세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른다(왕하 21:1~2). 그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민족보다 그 죄악이 더 심하였다(왕하 21:9, 대하 33:9)’고 한다. 모든 민족에는 이방 나라가 대다수인데,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적대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필자는 므낫세만의 잘못이라기보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20장 19절(표준새번역)을 보면 히스기야는 자기 시대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대대손손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신앙교육을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비전(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 29:18)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멸망은 므낫세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자녀교육 실패’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지만, 간절한 기도로 15년을 더 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15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으며, 자기의 안위만 걱정했다. 무엇보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나의 시대에만 평탄하면 된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후대에도 온전한 신앙이 이어지도록 힘쓸 것인가. 히스기야처럼 근시안적 신앙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요시야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앙의 개혁을 일으킬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교육은 세뇌가 아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교육이다. 학업에는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 말씀이 아이에게 전수되지 않는다면, 즉 때를 놓친다면 신앙이 회복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신앙교육은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게 해서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에(하나님의 지혜가 지식의 근본) 매우 중요하다. 신앙 전수에는 희생이 따른다. 후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커리어나 가시적인 성과만 중시하는 문화는 참으로 아쉽다. 시간을 따로 떼어서 신앙 전수에 힘써야 한다. 자녀의 온전한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이 먼저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여호야긴 왕이 37년 만에 사면된다(왕하 25:27~30). 바벨론 왕이 에윌므로닥으로 바뀌면서 원년에 다른 왕들의 지위보다 여호야긴 왕의 지위를 더 높게 하고, 죄수복을 벗기며(명예 회복), 양식 등을 풍족하게 누리게 된다(물질 회복).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을까? 필자는 이를 요시야가 ‘예배 개혁, 말씀 개혁, 우상 타파’를 한 결과라고 본다. 얀 후스의 죽음이 무위로 끝난 게 아니라 100년 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실제로 일으켜 ‘얀 후스가 환생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요시야의 신앙개혁 이후에 남유다가 멸망했지만, 회복이 일어난 까닭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변화가 더디 올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 각 가정의 신앙 형성을 위해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해지도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힘써야 한다. / 이강현 목사(양재A공동체)
2024-09-07 제1507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영적 전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영적 전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R. C. 스프룰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에서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벌이는 영적 전쟁을 ‘가공할 적들인 세상, 육체, 마귀와의 전투’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세상과의 전투인 세계관 전쟁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로 보고자 한다. 우리는 기존에 습득된 인본주의적 생각과 성경적 세계관이 뒤섞인 가운데 갈등하는 순간을 만난다.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잘 모르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서 그 위에 성경적 지식만 쌓아 올린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교회에서는 교회의 법을 따르는 적당히 이중적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믿음의 전진을 위해 두 팔로 안으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개인주의) 사회’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중요했고, 근대(인본주의+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 중요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나의 주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그 어떤 것도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옳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태도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할 때 인류는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사회,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를 충분히 즐기라’는 삶의 방식을 권면한다. 욜로족의 소비행태인 ‘탕진잼’(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니체(Nietzsche)적 세계관을 계승한 포스트모던을 잘 표현한 말이 “너 자신을 사랑하라”다. 다른 사람이 강요한 성공의 기준에 맞춰 살지 말고,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지금, 이 순간 너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이 매력적인 메시지는 자기혐오와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포스트모던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데서 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넘어 이웃과 사회 공동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식을 쌓기에는 열심이지만, 세상의 주도적, 지배적 시대 정신인 세속적 인본주의, 자유주의, 성문화혁명(차별금지법)이 가져올 가정과 교회의 파괴 등 세상을 아는 지식은 매우 부족하다. 앞으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 거룩한 고민이 밀려온다. 성경은 인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이 ‘죄’라고 말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절대적인 도덕 규범을 주셨다. 성경은 인간사회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단순하게 과일 하나 따먹은 사건이 아니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도덕 기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불순종을 의도한 사건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있다.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거부도 할 수 있는데,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모습이 사사시대로 이어졌고, 지금 그 현상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성경은 해결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이후 순종과 성화에서 찾는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와 젠더리즘을 이슈화하고 있다. 특히 차별금지법 등을 통과시켜 국가 차원에서 동성애와 젠더리즘을 옹호 조장하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의 기준은 명확하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차별금지법 등에서 말하는 분류할 수 없는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적인 결합만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기준이 맘에 안 들어 스스로 성 정체성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죄’냐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행위를 금지하셨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신명기> 10장 13절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규례를 주신 이유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믿어드리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하다. / 윤상우 집사(강남D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2024-09-07 제1507호
[주일강단] 전심으로 주일강단 전심으로 신 6:5 / 강부호 목사 성경에 종종 ‘전심으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우리말성경에서는 주로 ‘온 마음을 다해’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전심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을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찾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시 119:2).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세상을 두루 볼 수 있어서 그 마음이 온전히 그분께 향하는 사람들을 힘 있게 하십니다. 왕은 이번 일에서 어리석게 행했으니 이제 전쟁에 휘말릴 것입니다”(대하 16:9). “그 마음이 온전한 상태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를 하나님이 힘 있게 해 주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심으로 한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신 6:5). 전심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대할 것이냐가 기초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를 순서대로 따지면 “하나님을 사랑해라.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단순히 감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모두 동원된 표현입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힘을 다해서’인 것 같습니다. ‘힘’에는 육체적인 힘도 있지만,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원도 포함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휘, 권한 등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이 찾을 것이며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마 7:7~8). 한 번 구하고 중지하라는 게 아닙니다. 꾸준히 간절하게 진행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찾으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발견하게 됩니다. ‘두드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두드리면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는 한두 번 해보다가 안 되면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중단하지 아니하고 될 때까지 하라고 합니다. 될 때까지 추구해서 장벽을 마침내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실 때까지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라! “그러나 거기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고 너희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찾으면 너희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신 4:29).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갈증은 귀한 것입니다. 그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동원하고, 온 영혼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기도할 때도 마음을 쏟아 부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과 영혼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의지도, 생각도, 감정도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것과 생각을 모두 동원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8~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 말씀이 내게서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전방위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두루 다니시면서 모두 보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사람들을 힘 있게 하십니다. “너희는 가서”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전심을 쏟아 붓지 않았던 것,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 포기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삼아’를 위해서 문화적인 극복과 관심을 갖기 위해서도 전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사도행전> 1장 8절의 핵심적인 내용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입니다. 증인이 될 힘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 가운데 어떤 모양으로든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모습이 드러나기까지 성령님을 존중하고, 의지하며,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담대한 증인은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내 삶에서 나타날 때까지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또 우리는 함께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협력을 원하면 자신들은 잊히고, 그리스도만 기억되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다는 태도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마음과 결단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이 드러날 것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신앙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 “너는 내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는 이 명령들을 네 마음에 새겨 너희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되 너희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 그들에게 말해 주라”(신 6:5~7). 전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쏟아야 할 또 다른 면은 자녀를 교육하고, 다음 세대 리더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차세대 부서에도 가고,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알려 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익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허점이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설 때 그분이 힘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구하면 그분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일에 관심 없는 태도가 내게 있다면 돌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일은 복음 증거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관심 없는 마음을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역사하시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면 사용하시가 매우 힘듭니다. 이것을 돌이키지 않으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면 죄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님 일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의 협력을 그분이 기뻐하십니다. 평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일에 관심이 가득해질 때 그분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이름과 관련된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러나 예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법을 지키는 데는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떼어 다른 나라에 넘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국경을 공격했는데”(왕하 10:31~32). 여로보암이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을 쏟아 붓지 못하면 그분이 주셨던 영역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들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여호와께 경배하고 명세하지만 말감에게도 맹세하고 있는 사람들과”(슥 1:5).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마음이 아닙니다. 전심도 아닙니다.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뜻을 묻지도 않는 사람들을 없애 버리겠다”(6절). 여러분에게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려는 그 마음이 불일 듯 생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여러분 삶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를 축복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10-05 제1510호
[주일 강단] 사명을 남긴 이별 사명을 남긴 이별 <사도행전> 20:17~38 / 이재훈 위임목사 축복된 관계는 이별이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이별을 통해 더욱 성숙을 경험합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의 이별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순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가려면 에베소를 경유해서는 그 날짜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항구도시 밀레도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에베소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랐기에 성도들을 대신 한 장로들과 이별을 나누고, 또 권면하기 위해서 밀레도에 그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장로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사역을 해 왔는지 고백하고, 당부하고 싶은 권면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서 외에 모든 본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무릎을 꿇고 껴안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참된 교훈을 나누는 이 모습이 참된 교회이며, 살아있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들 모두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소리 내어 울면서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 때문에 그들은 더욱 슬퍼하며 바울을 배 타는 곳까지 전송했습니다”(36~38절). 서로를 위해 평소 기도하던 관계였기에 이별의 순간 더 슬피 울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평소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관계는 이별할 때도 그렇게 슬픔이 없습니다. 평소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이별의 순간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감동적인 이별을 하게 된 것은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해외로 이민을 가면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해서 손을 흔들며 울고불고했던 시대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이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슬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에베소를 한 번 더 방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방문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이 마지막일 수 있으며,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난다면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가 계속될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이 3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비하면 긴 기간이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3년이 금방 가지 않습니까? 그 짧은 기간에 깊은 영향력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 여정을 돌아보면서 고백하고 권면합니다. 이 내용이 정말 중요합니다. 한번 말씀을 나누는 것만으로 모두 담을 수 없는 풍성한 내용이 있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평생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겸손과 눈물로 섬긴다 오늘 바울의 고백과 권면에서 다섯 가지 중요한 사역 철학이 나타납니다. 첫째 겸손과 눈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시련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했고 공중 앞에서 또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여러분을 가르쳐 왔습니다”(19~20절). 바울이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그 겸손과 눈물로 섬겼던 모습을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가르쳤고, 많은 유대인의 음모와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며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회고하면서 자신을 통해 나타난 놀라운 표적과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는 게 놀랍습니다. 바울의 몸을 스치기만 해도, 그가 기도만 하면 병자가 낫고, 놀라운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던 것을 회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인내하며 눈물과 겸손으로 섬겼는지를 강조했습니다. 자신에게 나타난 은사와 능력을 통해 일어난 역사보다 얼마나 겸손하게 눈물을 흘리며 섬겼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눈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한국 교회 최고령 목사님이셨던 방지일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중국 선교사로 섬기셨고,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님으로 섬기셨습니다. 오래전에 우리 교회에도 몇 차례 오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선교 컨퍼런스에서 그분을 뵈었습니다. 아마 그때 90세 초반이셨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선교 컨퍼런스를 하는데 가장 앞에 앉으셔서 지팡이를 꽉 쥐고 앉아 계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시차 핑계 대고 졸고, 방에 가서 쉬고 하는데, 한 번도 빠짐없이 앉아 계셨습니다. 손자뻘 되는 강사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정말 감사해서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더니 책과 함께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책 제목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입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기자가 목사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연로하셨는데도 건강하신지를 질문했습니다.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심장운동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심장은 그냥 뛰는데 그게 무슨 운동이 되느냐고 했더니 새벽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묵상할 때 말씀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체험하고, 통회하는 눈물을 흘릴 때 심장이 고통 치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장운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겸손에서 나오는 눈물의 사람이셨습니다. 여러분, 눈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내가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씨를 뿌리는 농부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하기 싫은 농사, 힘든 농사, 씨를 뿌릴 때마다 ‘내 운명은 어떻게 이렇게 힘든 일을 할까?’ 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그 씨가 뿌려진 이후 열매 맺을 것, 하나님이 추수하실 것을 바라보는 눈물입니다. 내가 생명을 심고 거둘 수 있다는 바로 그 눈물이 기쁨이 되어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에베소 영혼이 구원 받고, 에베소 도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비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故 방지일 목사님의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눈에서 흘러 하늘에 가 닿습니다. 눈물의 사람이 되십시오. 눈물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이 흘린 눈물을 위로와 감사의 병에 담아 주십니다.” 바울의 사역 원리 이면에 겸손에서 나오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이 계획을 이끈다 둘째, 성령의 강권하심이 계획을 이끕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22절). 바울에게는 늘 사역 계획이 있었습니다. 도시 중심의 계획, 회당을 먼저 방문하는 계획, 로마의 군사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계획,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먼저 가고, 방문한 지역을 또 다시 방문하는 계획 등이 <사도행전> 전반에 나타납니다. 또 한편에 그의 계획을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바꾸시는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아시아에 집중하려는 그를 유럽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건너가게 하신 것도 성령의 강권하심입니다. 이제 바울이 22절에서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상황입니다. 그가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첫 번째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20대였습니다. 주후 15년 경 다소에서 자란 바울이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발걸음이 첫 번째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부모님 세대가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할 때 포로로 잡혀가서 지금의 튀르키에에 있는 다소라는 지역으로 끌려갔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강제이민을 당한 것입니다. 다소라는 지역은 길리기아의 수도인데, 로마가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4천 년 전통의 유서 깊은 도시였고, 많은 철학자가 있고, 문화가 발전한 지역이었습니다. 1세기에 가장 교육열이 높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다소를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다소의 어떤 리더십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 바울의 가족도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로마에 팔려갔을 때 주인이 자유를 주었든, 로마에 의해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되었든 로마 시민권을 얻어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사회 리더십이 되려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은 귀족 출신이어야 하고,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될 수 없었고, 자신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꿈을 가지고 20대에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인정받는 바리새인으로 성장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세 차례 전도여행을 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그의 나이가 60대가 되었습니다. 40여 년이 흐른 것입니다. 주후 56년경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자신의 꿈을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방문은 성령의 강권하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때로 우리의 계획을 더 강하게 촉진시키기도 하지만, 계획을 바꿔서 다른 계획으로 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강권하심에 우리의 계획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을 고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연하게 내어드릴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명을 위해 생명을 드린다 셋째, 사명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게 증언해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23~24절). 생명을 다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도록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가면 감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그러니 너는 피해라”고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인격적인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정보를 하나님이 주신다면 ‘나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구나. 나를 보호하려고 하시는 것이구나. 나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구나’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이 알려주셔도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한다”며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감당해야 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진정한 부르심은 상황과 환경, 고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걸어가는 성도는 앞에 어떤 어려움과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사명을 늘 우선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명 안에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사람은 때로 육신의 생명이 희생될 지라도 영적 생명을 이루는 사명을 위하여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희생을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순교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기쁘게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 드러내고, 지키기 위해서 육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순교의 신앙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양떼를 잘 살피라! 넷째, 자신과 양떼를 잘 살피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양 떼를 잘 살피고 조심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흉악한 이리 떼 같은 거짓 선생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제자들을 빼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3년 내내 여러분 모두에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든든하게 세워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기업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28~32절). ‘양떼를 돌보는 것 이전에 자신을 잘 살피라’는 의미는 목자 되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양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바로 앞만 봅니다. 앞서 가는 양이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휩쓸립니다. 양은 바로 앞 양 뒤꽁무니에 머리를 향하고 앞서 가는 양이 가는 대로 갑니다. 가장 앞서 있는 양이 목자만 따라가면 문제가 없는데, 목자를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가면 뒤따라가는 양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늘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사신 양떼들을 목자가 가는 방향대로 인도하고 있는지, 목자 되신 그분을 먼저 따르는 양으로서 잘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양떼를 잘 돌보는 것입니다. 또 자신을 따르게 하는 거짓 선생들,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이리떼 같은 선생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로잔대회가 열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되고, 거짓된 사상, 사회적 성을 부르짖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유주의 사상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떼를 잘 지키고, 그들을 믿음에 굳게 세우는 교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다섯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나와 내 일행이 필요한 것을 손수 벌어서 썼습니다. 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약한 사람들을 도우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33~35절).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주는 자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물과 피까지, 몸과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바울은 많은 필요가 있었지만,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로 사역하기를 원했습니다. 처음 믿는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받으면 믿음에 장애가 될까봐 손수 생활비를 벌어서 사역할 만큼 주는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받는 자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주는 자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받는 자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이든지 주는 자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기 위한 비전이 있을 때 하나님이 축복을 더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섯 가지 바울의 사역 철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눈물의 사람은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따라 살게 합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이 피로 사신 영혼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주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별은 에베소 지도자들에게 사명을 남겼습니다. 바울의 사역으로 세워진 교회가 계속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과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는 이별이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천국에 가셨지만 남은 우리에게 육신의 이별을 통해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로잔운동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9-14 제1508호
[주일 강단]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린다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린다 <사도행전> 19:23~41 / 이재훈 위임목사 어느 시대든지 교회가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은 “그 시대의 교회가 속한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가 모이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얼마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가 함께 앉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성도를 세상에 보냈는지를 평가해야 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친밀함을 가지는 데는 충실하지만,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의해 교회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 간의 친밀함보다 중요한 것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미쳐서 변화시키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한때 교회는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세교회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중세교회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권력을 이용한 교회는 결실을 맺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부분 교회가 본래 사역에서 멀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부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신 것은 이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의 능력에 비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이 세상의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일어납니다. 세상 문화의 중심에는 우상이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으로만 무너집니다. 세상의 우상은 결코 복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며 일어난 회개의 소동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복음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소동이 나타납니다. 복음이 에베소에 있는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우상이 무너지며 회개의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마술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비즈니스로 알고 섬겼던 우상이 무너지면서 회개하고, 마술책을 불태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공개했습니다.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책들을 모아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마술책들의 값을 매겨 보니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은 점점 힘 있게 퍼져 나갔습니다(17~20절). 5만 드라크마, 즉 5만 명의 하루 품삯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의 가치가 한순간에 불태워질 만큼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우상이 헛된 것임을 알고, 그 우상이 무너짐으로써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는 바울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이 합해져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거짓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일어난 소동 두 번째 소동은 돈을 우상으로 여기던 이들이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하게 된 것을 거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복음의 말씀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켰다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이 전해짐으로 인하여 우상이 깨어지고 무너지며 그들의 거짓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일어난 소동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우상을 분별했고, 드러냈고, 무너뜨렸습니다.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에서 우상들을 분별했고, 드러냈고, 무너뜨렸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떻게 우상을 드러냈습니까? 그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입으로 바울이 무엇을 전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행 19:26).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아테네든, 에베소든 엄청난 신전을 만들고, 사람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며, 없는 신을 만들어서 사람이 만든 신을 섬기던 사회에 이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 바울이 지혜로운 것은 어떤 신의 이름을 거명함으로써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당신들은 종교성이 많다”고 관계를 형성하는 말을 한 다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붙여진 그 이름을 이용해서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군요. 그 신을 내가 알려주겠습니다. 그 신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변증하며 그들의 생각에 침투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이 아데미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우주의 여왕’이라고 하는 아데미 신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돌봐준다고 믿어서 신전을 어머 어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 크다고 합니다. 그리스 문명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신전을 비즈니스화 했고, 아데미 신전이 아시아 지역의 은행 역할을 할 정도로 경제활동 중심지로 여겨지는 사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아데미 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면 공격을 받아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보십시오. 바울이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데미 신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고 믿으니까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그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데미 신전도 자신들이 만들었고,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고 있던 아데미 신의 모형도 자신들이 만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조각해서 만든 조각상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울이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전한 것입니다. 근본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사람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는 그 시대 사람이 만든 우상이 있습니다. 때로는 신상과 신전 등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신상에 절하는 사람은 적은 무리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우상을 스스로 만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수의 원천 하나님 버리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우상’ <예레미야> 2장 11~1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우상숭배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어떤 민족이 자기 신들을 신이 아닌 것과 바꾸었느냐? 그런데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우상들과 바꾸었다. 하늘아, 이것으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라. 몹시 두려워해 황폐해지라. 여호와의 말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생명수의 원천인 나를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소를 파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물 저장소였다”(렘 2:11~13).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대국을 의지한 것을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앗시리아,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마치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처럼 의지하는 선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약속은 믿지 않으면서 주변 나라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것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수 있는 영역을 이웃나라들이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신이 아닌 것과 하나님을 바꾸었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생명수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이 저장되지 못할 터진 저장소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상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이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것을 통해 얻으려고 인간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삶의 중심이 되어서 만일 그것을 잃어버릴 때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절망이다”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 신성을 부여합니다.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이 자신의 소원을 해결해 주고, 필요를 채워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물 저장소일 뿐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어떤 신도 있게 하지 말라”입니다. 우상을 금지하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계명의 2계명부터 10계명까지 말씀이 어겨지는 이유는 1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계명을 어기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어겨지는 것입니다. 만일 1계명을 반드시 지키면 그 다음 계명들을 어기지 않게 됩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어떤 신도 있게 하지 말라.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는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거짓과 악을 기초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전했을 때 우상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붙잡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소동을 주도한 사람이 ‘데메드리오’입니다.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아 엄청난 수입을 얻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데미 신을 섬기는 것에서 떠나자 자신의 수입이 주니까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 중에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에베소의 원형 극장, 대략 2만5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고, 지금도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군중심리로 끌려갔습니다. “연극장 안에서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 말을 하는 통에 모인 곳은 매우 혼란스럽게 됐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대부분이었습니다”(32절). 데메드리오가 이렇게 선동했습니다. “그가 직공들은 물론 이 일에 관련된 일꾼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이 사업으로 소득이 꽤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보고 들은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여기 에베소뿐 아니라 아시아 온 지방에서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며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마음을 돌려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업의 명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전의 명예도 실추되고 아시아 지방과 전 세계에 걸쳐 숭배되고 있는 이 여신 자체도 그 신성한 위엄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라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 높였습니다”(25~28절).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거기에는 진짜 아데미 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외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수입이 줄어들자 화가 나서 외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데미 신을 높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신전의 명예를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거짓된 변명입니다. 포장입니다. 아데미 신전을 바울이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지만,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진리가 전해짐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준 것입니다. 거짓과 악을 기초로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일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탄의 영역을 침략할 때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때로 물리적은 소동도 일어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두려운 현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시고, 우리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무너지고, 사회 속에 있는 우상이 무너질 때 마술책이 불타는 것 같은 회개의 영향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반항하는 소동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성령님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악한 영들이 아무리 소동을 일으켜도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의 소동은 시청 서기관이 나와 합리적인 방향으로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을 피울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다면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해서 소동이 해결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이 소동은 어떻게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우상이 무너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1907년 ‘평양대부흥’의 역사는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많은 우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근대화, 현대화될 수 있는 영적 기초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으로 내 안에 있는 우상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내 안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얻으려고 만든 우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속한 직업, 사회, 문화의 중심에 있는 우상을 나도 함께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없어질 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만일 우상을 붙잡고 있는 인생이 있다면 우상과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내 안의 우상을 무너뜨린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너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닙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9-07 제1507호
[주일 강단] 성령과 주의 말씀 성령과 주의 말씀 <사도행전> 19:1~20 / 이재훈 위임목사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2차 선교여행을 했던 바울 일행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의 여러 차례 선교여행은 언제나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재정비해서 또다시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여행에서는 에베소라는 지역을 방문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인구 2십만 명의 대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1차 선교여행 때 복음화 하려고 했었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하나님이 다시금 문을 열어주셔서 아시아 지방을 다니면서 결국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장기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이 연기되면 실패한 것이며, 꿈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지만, 연기된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고 풍성한 열매를 가져옵니다. 우리 시간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계획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계획, 나의 시간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구나’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강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연기는 더 큰 열매를 거두게 하시려는 계획인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 세례의 축복 에베소 지역에서는 두 가지 특별하고 두드러진 사역이 나타납니다. 첫째,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 세례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몇몇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욱 성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는 분명한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연약한 어린아이의 신앙이 있고, 강건하고, 확신 있고, 능력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날마다 의심과 유혹에 휩쓸리고 무너지는 신앙이 있는 반면 다른 누군가를 붙잡아 줄 수 있는 성숙하고, 강인한 신앙이 있습니다. 나 중심적인 신앙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에게 증거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는 뚜렷한 신앙의 변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세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성령님이 행하시는 사역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사역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은 성도임에도 구원받은 자, 거듭난 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과 확신, 성숙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성령의 세례를 경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은 언제나 연약합니다. 확신과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모시지 못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지 못합니다. R.A. 토레이는 이것을 ‘잠재적 사건’과 ‘체험적 사건’이라는 단어로 구별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연합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확신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단계를 ‘잠재적 사건’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을 설명하실 때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거듭남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거듭남의 신비는 우리가 어느 한 시점, 어느 한 체험을 거듭남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들은 거듭난 이후 우리가 체험하는 느낌의 경험이지, 거듭남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신비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잠재적 사건으로써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체험적 사건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믿는 모든 성도와 한 몸임을 느낍니다. 체험합니다. 실감합니다. 깨닫습니다. 그렇게 행동합니다. 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싶어도 그리스도의 한 몸 됨,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절제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다른 지체들을 배려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이미 믿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바로 그때’라고 해석할 수 있고, ‘예수님 믿고 난 후에’라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사람들은 아직 믿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진정 믿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분들은 성령의 세례가 거듭남과 동일한 거라고 주장하는 해석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이 어색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책인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분명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제자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믿는다’는 단어를 쓸 때는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까? 그 의미는 내가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내가 자각할 수 있느냐, 인식할 수 있느냐,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그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성령의 세례는 체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거듭난 이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체험하는 것이지 거듭난 그 순간을 우리가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아직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행 8:15~16).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은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써의 능력과 확신,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율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성령의 세례가 온다는 법칙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역사를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 세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세례의 체험을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님 되심을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나에게도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체험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사건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들이 “아니오.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듣고 믿었지만, 성령님을 알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존재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령님을 ‘잊혀진 하나님’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잊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잊힌 하나님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분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믿게 하고, 우리를 그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성령님, 내 안에 온전히 오시옵소서. 나를 주관하셔서 내 안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모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분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할 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실 분을 믿으라고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예언하게 됐습니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 정도였습니다”(4~7절). 이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요한의 세례는 그저 착한 행위를 위한 서약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패턴을 보면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을 때 동시적으로, 어떤 사람 믿고 난 이후에, 어떤 사람은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적으로, 어떤 사람 물세례를 받은 훨씬 이후에, 어떤 사람은 물세레를 받기 이전에 성령의 세례를 먼저 받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할 때 우리는 확신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모시고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됩니다. 때로는 은사와 함께 나타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무런 은사도 없이 능력과 확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 섬김의 은사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과 사역자 파송 둘째, 두란노 서원을 통해 사역자들을 훈련해서 아시아 전역에 파송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두란노 서원에서 훈련받은 이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목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해져 믿기를 거부하고 공공연하게 그 가르침을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려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가르쳤습니다. 이 일이 2년 동안 계속돼 아시아 지방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9~10절).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하자 작은 서원에 제자들을 따로 데려다가 2년 동안 가르칩니다. 이것이 신학교 훈련 기관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에 파송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들을 훈련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와 주의 말씀의 역사가 연결되어 순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과 주의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였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모든 부흥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에베소에 성령의 세례가 임했을 때 18장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사람의 말씀 사역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해서 주의 말씀을 많이 가르쳤지만,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예수를 믿었는데 클라오디오 총독의 칙령으로 쫓겨나서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을 만나고, 그와 함께 에베소에 정착한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덕분에 아볼로가 더욱 분명하게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역의 토대 위에 성령의 세례가 임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한 사람들은 주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갈급함이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배웠다고 했는데, 자료에 의하면 그들이 모인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4시였습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입니다. 모이기 어려운 그 시간에 그들은 더 모였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 때문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면 육신의 피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은 성령의 세례 받은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고, 주의 말씀의 사모함은 또 다른 성령의 역사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 성령과 주의 말씀은 언제나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동행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주의 말씀을 향하게 되고, 주의 말씀을 향하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역사 통로가 됩니다. 그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절). 에배소에 있던 많은 우상들, 마술로 인하여 귀신들이 성행하던 그 지역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자 마술을 하는 유대인들이 흉내를 내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용할 정도였습니다. 유대 사람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선포하자 악한 영이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고 했습니다. 바울도 알고, 예수님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악한 영에게 놀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악의 영이 떠납니다. 그런데 믿지 않으면서 이용하려고 하면 “너는 누구니?”라고 귀신이 조롱합니다. 우리가 악한 영을 대적하고 내쫓을 때 악한 영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너도 안다”고 대답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과 주의 말씀의 역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일어났다! 그때 사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는 우상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마술의 도시였습니다. 엄청난 마술책이 횡행했습니다. 그러니 귀신들도 횡행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회개하자 자신들이 의지하던 마술 책을 모두 불에 태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공개했습니다.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책들을 모아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마술 책들의 값을 매겨 보니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은 점점 힘 있게 퍼져 나갔습니다”(17~20절). 5만 드라크마는 오만 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한 사람의 139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매우 많은 돈입니다. 에베소 도시가 변화된 것입니다. 회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재산을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거짓되고, 악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주의 말씀의 역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회 변혁이 있습니다. 노비 제도가 폐지되고, 축첩제가 폐지되고, 조혼이 철폐되는 등 사회의 구습들이 변혁되었습니다. 성령과 주의 말씀은 단지 예배당 안에서의 변화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사회의 불리함, 정직하지 못한 것, 더러움, 악의 영들이 판치는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물결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령과 주의 말씀을 의지해서 사회 변혁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와 같이 우상의 도시, 마술의 도시, 귀신이 판치는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서 귀신도 놀라 떠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8-31 제1506호
[2024 마리아행전] 용서와 간구, 그리고 예배의 엎드림 용서와 간구, 그리고 예배의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 3,600여 명 참석 용서와 간구, 예배의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에 참가한 마리아들이 쏟아낸 간증이자 큰 은혜다.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이 지난 6월 12일(수)부터 14일(금)까지 양재온누리교회, 각 캠퍼스에서 막 올랐다. 순백의 마리아 3,600여 명이 모였다. 집회 첫날에는 찬양사역자 송정미 사모 특순,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합심기도회가 열렸다. 메시지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용서의 엎드림’을 주제로 전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은 용서하는 영혼에게 무한한 기쁨과 사랑을 부어주신다”면서 “용서의 엎드림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회개와 용서의 기도도 이어졌다. ‘타인을 향한 용서의 엎드림’, ‘하나님께 대한 용서의 엎드림’, ‘나라를 위한 용서의 엎드림’을 주제로 마리아들이 뜨겁게 부르짖었다. 전해옥 성도(양재온누리교회)는 “뜨겁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용서해야 할 사람을 생각나게 하시고, 나를 묶고 있는 부정적 생각에서 자유롭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집회 둘째 날에는 이인호 목사(더사랑의교회) 설교, 합심기도회 등이 이어졌다. 이인호 목사는 ‘미스바의 엎드림’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 목사는 “사무엘 한 사람을 통해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뤄졌다”면서 “우리도 사무엘처럼,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광자 권사(영등포구로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에게 우상이 있는지 통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연합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더 뜨겁게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집회 셋째 날에는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성도들이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 모여 함께 예배드렸다. 이한영 부총장(아신대) 설교, 합심기도회, 세리모니 등이 이어졌다. 이한영 부총장은 ‘탄식에서 예배로’를 주제로 설교했다. 이 부총장은 “엎드림의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자로 승화시켜 주신다”면서 “엎드림의 기도가 일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북 상주교회 성도들도 집회에 참석해 더욱 뜻깊었다. 김영미 권사(상주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부르짖는 마리아행전에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 김다애, 홍하영 기자 마리아들의 고백 나라를 위한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은 한마디로 수많은 위기 앞에 있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엎드려 부르짖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리아행전’ 같은 기도운동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행전에 참가하면서 ‘하나님과 첫사랑을 회복하는 엎드림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마리아행전은 말씀을 회복하고, 엎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우상이 세워지고, 내 마음이 세상에 이끌리게 되기에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올해 9월 로잔대회를 통해서 또 한 번의 선교 운동이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 이숙현 집사(S브릿지공동체) 회복을 위한 엎드림 저는 이번 마리아행전 ‘엎드림’ 봉사자로 섬겼습니다. 봉사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마리아행전을 준비하면서 은혜는 준비하는 과정과 중보기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엎드릴 때 옆 사람도 엎드리게 되고,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옆 사람도 함께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배웠습니다. 이번 마리아행전에서 저로 인해 옆 사람이 회복되고, 옆 사람을 통해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김용곤 집사(동대문중랑공동체) 갈망을 위한 엎드림 마리아행전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저는 4기 암환자입니다. 오늘 CT를 찍는 날이었는데 하나님이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마리아행전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서산온누리교회에서 참여한 마리아행전 집회도 정말 좋았지만, 모든 캠퍼스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니까 더욱 감사했습니다. 이번 마리아행전에서 그동안 저의 기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할 때 나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갈망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몸이 아프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어서 자녀를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예배자로 양육하고 싶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만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 편은정 성도(서산온누리교회)
2024-06-15 제1496호
[러브소나타]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 5월 15~16일 러브소나타 효고 ‘회복’ 현장 2,635명, 온라인 3,917명, 일본인 643명 결신 한국과 일본이 함께 나라와 교회, 가정과 복음을 위한 회복의 노래를 불렀다. 34번째 러브소나타 효고가 지난 5월 15일(수)과 16일(목)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 ‘회복’을 주제로 열렸다. 러브소나타 집회에 현장 참석자 2,635명, 온라인 참석자 3,917명이 참가했고, 일본인 참가자 643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러브소나타 효고의 포문은 지난 15일(수) 고베동부교회에서 진행된 회복 세미나가 열었다. 일본 러브소나타 실행위원, 일본 교회 성도, 한국 목회자 및 리더십 등 130여 명이 참석했다. 이기원 목사(회복사역본부장) ‘목회 케어와 회복’, 타카미자와 에이코 목사(몽골 키즈홈 서포트팀 대표)가 ‘성경 안의 나’를 주제로 강의했다. 이기원 목사는 “성도들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통합적 방법으로 돌봐야 한다”면서 “성도들이 고통의 자리에서 감사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카미자와 에이코 목사는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쓰여 있다”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받은 사랑을 전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같은 날 저녁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는 러브소나타 전야제 ‘가스펠 나이트’ 집회가 있었다. 일본 교회 성도 1,066명, 한국 성도 632명, 온라인 1,732명이 참석했다. 스즈키 마사야 전도사(무코노소 메구미교회, 청소년 사역자)가 설교하고, LOVE OBI, 잇삐 재팬, CCM 가수 지미선, 옹기장이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스즈키 마사야 전도사는 ‘Re!!’를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면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가 회복을 경험하고, 그 회복의 경험을 나누고 전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16일(목) 오전에는 고베 메리켄파크 오리엔탈 호텔에서 리더십 포럼이 진행됐다. 한국과 효고 각 분야(정재계, 교육, 언론, 의료 분야 등)에서 활동하는 리더십 90명(한국측 40명, 일본측 50명)이 참석했다. 이인용 장로(당회서기), 가네코 미치히토 목사(일본 참의원, 사회복지법인 ‘굿사마리안’ 이사장)가 강의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 러브소나타 효고 집회가 막 올랐다. 온누리 사랑챔버 오케스트라, 개그우먼 조혜련, 가수 범키, 팝페라 가수 신델라,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배재철, 가스펠보컬밴드 CRUX, Lalo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메시지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회복’을 주제로 전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의 희생을 치르셨다”면서 “그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과의 회복을 경험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코이와 레이나 자매는 “한국 성도들이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주시고, 러브소나타를 열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러브소나타를 통해 일본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관련 기사 4-5면>. / 홍하영, 김다애 기자
2024-05-18 제1492호
[러브소나타 효고 현장에서] 효고는 이제 회복의 땅! 러브소나타 효고 현장에서 효고는 이제 회복의 땅! 일본은 경제력도 좋고,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의 영혼이 메마르고, 큰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산다. 일본의 온전한 회복을 소망하는 러브소나타 효고가 울려 퍼진 이유다. 고베 문화홀을 찾았다. ‘GOD Bless you’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안내팀이 보였다. 스태프와 눈이 마주쳤는데 활짝 웃으며 맞아줬다. 그 덕분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김정희 권사(한강공동체)는 러브소나타 효고 안내팀으로 섬겼다. 지난해 러브소나타 ‘미야기’에서도 안내팀을 섬겼는데, 올해도 안내팀에 배정됐다. 그녀가 안내팀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안내팀은 러브소나타 참가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며 환영합니다. 참가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매번 안내팀을 섬기고 싶습니다. 올해도 안내팀에서 섬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참가자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다는 게 큰 감격입니다. 일본 땅을 짓누르고 있는 아픔과 어둠이 걷히고,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섬겼습니다.” 가스펠 나이트 집회 현장도 찾았다. LOVE OBI, 잇삐 재팬, 지미선, 옹기장이의 찬양이 이어졌는데, 그 찬양을 들으면서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함께 박수하며 찬양하는 성도들도 보였다.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한국 봉사자들이 일본인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눈물로 기도하던 김재란 선교사(경배와찬양)가 고백했다. “가스펠 나이트 집회에 오기 전에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큰 아픔이 있는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꼭 안아주고 왔는데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그 자매처럼 큰 아픔을 가진 일본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한일연합기도회에도 참석했다. 기도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의 봉사자들이 함께 일본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였다. 기도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황상윤 장로(송파B공동체)는 기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꿈을 꿨다. “사람들의 마음이 걱정과 우울 등으로 묶여있습니다.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을 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은 좋지 않은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기를 싫어했던 요나처럼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러브소나타 본 집회 시작 전부터 참가자들이 북적였다. 그들의 눈빛에서 부픈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챔버, 신델라, CRUX, 범키, 개그우먼 조혜련,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배재철의 특순이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의 함성이 고베 문화홀을 가득 메웠다. 이재훈 위임목사가 ‘회복’을 주제로 메시지를 선포했다. 참가자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소망하며 결신서를 작성했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형광봉을 들고 회복의 세레모니도 이어졌다. 장수정 성도(오사카온누리교회)는 러브소나타는 비신자는 물론이고, 일본 크리스천들에게도 위로와 회복 그 자체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일본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갈급함이 있었는데, 그 갈급함을 러브소나타가 채워줬다고 고백했다. “러브소나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시간이지만,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러브소나타를 통해서 일본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에덴으로’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 가사처럼 일본이 에덴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이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홍하영, 김다애 기자 기도하는 사람들 청년이 일본 청년들을 위해 저는 청년의 때 누군가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만난 이 좋은 예수님을 일본인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러브소나타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일본 청년들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일본 청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 은혜로 깨어지고,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과거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한일봉사자가 연합으로 기도하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청년들과 일본의 청년들이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승리의 자리로 초청해 주시는 부르심에 응답해서 각 나라,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 이태리 자매(여호수아공동체) 한국 성도가 일본 교회를 위해 지난해 러브소나타 ‘미야기’에 참석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자리에 섰는데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먼저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부어주셨습니다. 일본 땅과 일본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일본을 위해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의 작은 섬김을 통해서 일본이 변화되고, 일본 교회가 부흥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사역에 함께 하고 싶어서 러브소나타 ‘효고’에도 참석했습니다. 러브소나타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일본을 회복시키기를 기도합니다. 일본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일본의 크리스천이 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러브소나타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결신자들이 가정과 일터, 사회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고,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 / 김윤희 성도(영종온누리교회) 교사가 일본 다음세대를 위해 일본의 복음화율이 1%가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다음세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미전도종족’이라 불리는 한국의 다음세대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가 사라지는 현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나고 자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실히 느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은혜의 자아’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자아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은혜의 자아가 인생의 어려움을 이길 힘을 길러주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줍니다.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일어설 용기를 줍니다. 일본의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자아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만날 수많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먼저 찾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을 책임지고, 일본을 회복시킬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본 교회에 다음세대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박혜연 교사(양재 차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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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소나타]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 “교회를 지켜주소서. 일본을 구원해 주소서. 세계에 평화를 허락하소서.” 이 기도는 평생을 전도자로 살았던 어느 남자의 유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이자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이웃사랑을 실천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1888년 7월 10일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아버지와 게이샤(술자리 흥을 돋우는 직업을 가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부유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이듬해 1월 죽었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된 가가와 도요히코는 아버지의 본부인(미치)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양모의 학대와 의붓형제들과 친구들의 놀림, 온갖 천대를 받으며 지냈다. 외로웠던 소년 가가와 도요히코는 혼자 숲과 들판, 창고 등에 숨어 종일 책을 읽곤 했다. 그때의 경험이 외로움과 상실, 혐오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공감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중학생 시절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가타야마학교에서 만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찰스 로건 선교사에게 예수의 생애를 배웠고, 마이어스 선교사 부부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자라면서 받은 사랑이라곤 부모 생전 짧게 받은 게 전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외국인 선교사들은 제2의 부모 같은 존재였다. 선교사들에게 신앙과 지식, 가정과 가족의 의미, 감정의 교감, 이웃사랑 등을 깊이 배운 그가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학비를 대주던 숙부에게 도쿄제국대학 입학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도쿄의 장로교계 대학 메이지가쿠인대학 고등부 신학예과에 입학했다.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했다. 신학, 문학, 철학, 자연과학, 역사, 농학, 예술 등 여러 분야 책을 빠짐없이 읽었다. 그를 가르친 라이샤워 박사는 “메이지가쿠인대학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신학예과를 졸업한 가가와 도요히코가 1907년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고베신학교(후의 고베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고베에서 사역하면서 목회자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치현 오카자키교회와 도요하시일본기독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며 전도자로서 성장했다. 그때부터 대중집회와 거리 전도에 시간을 쏟으며 전도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학교 2학년 때 결핵에 걸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어느 날 깊은 산골에서 가네자와교회 나가오 목사를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는 가가와 도요히코를 나가오 목사가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나가오 목사의 자비로운 성품을 보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빈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고아, 학대, 천대받았던 경험, 중학교와 메이지가쿠인대학에서의 영적, 지적, 사회적 각성 그리고 고베신학교 시절 전도자 경험과 사선(死線)을 넘나들게 만든 병고가 그를 모든 경험이 뛰어난 전도자이자 헌신자로 만들어 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1909년 병고로 인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베의 빈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를 얻어 방화범, 도박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매독에 걸린 거지 등과 함께 살았다. 굴뚝 청소하면서 번 푼돈을 빈민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눠주고, 자신의 옷도 벗어줬다. 불량배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를 주었다. 자신의 집에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고, 초상집에서는 시신을 씻고 장례를 집전했다. 주일에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1914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유학했다. 미국의 슬럼가와 노동 운동에서 시사를 얻어 1917년 귀국한 그는 고베 빈민가로 다시 돌아가 전도와 노동 운동을 펼친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노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농민 협동조합, 보통 선거권 운동 등 사회운동을 펼치며 일본의 사회 회복과 변화를 주도했다. 그는 <사선을 넘어>, <새벽이 오기 전에>, <한 알의 밀>, <빈민 심리 연구>, <우애의 경제학> 등 수많은 저서도 남겼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10억 엔의 인세 소득을 사회운동을 위해 모두 기부하기도 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문학가, 학자, 저술가, 빈민운동가,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로서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일평생 자신이 전도자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는 1960년 별세할 때까지 빈민촌에서 헌신적으로 전도하며 이웃들을 돌봤다. 일본의 변화와 회복을 꿈꾸며 빈민촌에서 평생을 바쳤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들은 기생들이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만큼 그를 통해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분명 평생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었다. 가가와 기념관(Kagawa Memorial Center) 주소: 5 Chome-2 20 Azumadori, Chuo Ward, Kobe, Hyogo 651-0076 홈페이지: core100.net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고베개혁신학교 평소 일본에 대한 내 생각은 긍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생각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역사적 사건들 뿐만아니라 현재에도 일부에서의 차별적 시선과 이념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러브소나타 효고에 참석하게 되었다. 권사님들과 함께 러브소나타와 일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가 지속되며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채워주셨다. 그 사랑의 마음을 안고 효고에 왔다.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가 방문한 곳은 ‘고베개혁신학교’였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교정이 우리를 반겼다. 고베개혁신학교는 1947년 4월 일본 기독개혁파교회에 의해 개교했다. 요시다 타카시 교장 외 4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고, 강사 16명이 강의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강사보다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11명이 전부였고 올해는 신입생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 보니 신학교에도 학생이 많이 없다. 어느 권사님은 “크고 멋진 고베개혁신학교의 건물과 대비되는 작은 인원이지만, 그만큼 신학교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절실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선물과 찬양 특순 등을 준비했다. 선물은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와 물품들로 꾸러미를 만들었다. 찬양은 ‘GOD Bless You’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준비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받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감사가 밀려왔다. 특순 시간이 감동이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일본어로 부르고, ‘GOD Bless You’를 한국어로 부르는데,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이 같은 찬양을 화답가로 준비해 왔다. 화답가를 한국어로 준비해 와서 마지막 찬양은 서로를 축복하며 합창했다. 고베개혁신학교의 비전은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교사, 사상과 품행이 방정해서 모든 것에 강하게 맞설 수 있는 부끄러울 것 없는 목자, 박해와 유혹, 빈곤에 굴하지 않고 겸허히 기도로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 학교의 비전처럼 많은 젊은이가 교사와 목자, 전도자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고베개혁신학교를 통해서 일본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다음세대가 더 많이 양성되기를 소망한다. / 김지희 권사(서빙고 권사회장)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 나는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비즈니스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일본은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러브소나타 참석을 위해 방문한 일본은 조금 특별했다. 사업적 시선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측면에서 일본을 바라보고 싶었다. 함께 러브소나타에 참석한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과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방문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는 1950년 2월 16일 ‘히가시나다신아이기독교회’로 개척했다. 당시 미국에서 온 한 선교사님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세워져서 선교센터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은 청각장애인들을 섬기는 사역도 하고 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교회가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크리스천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일본인들의 영혼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감동이 있었다. 한 성도님이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할 텐데 열심히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일본은 종교가 많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나라다.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갈급하고 메말라 있다. 이 나라에서 전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포함한 일본 교회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공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러브소나타가 일본 교회에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갈급함을 느끼는 한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 김화동 성도(영종온누리교회)
2024-05-18 제1492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모든 영혼의 필요를 따라 복음 증거!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영혼의 필요를 따라 복음 증거!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 이재훈 위임목사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나왔다.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 23년 역사를 함축한 책이다. 2001년 40대 남성을 위한 맞춤전도집회 ‘비상구(EXIT)’’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47회 집회가 이어졌다. 그 수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은혜와 열매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 아름다운 축복의 역사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전도를 소망하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을 위한 메뉴얼이다. 다음은 이재훈 위임목사와의 일문일답. / 김현준, 홍하영 기자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맞춤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원과 지혜를 최대한 활용해서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1년부터 현재까지 총 47번의 맞춤전도집회를 개최했습니다. 바로 그 역사를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에 담았습니다. 23년 역사의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 사명과 비전, 방법과 원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더불어 온누리교회 맞춤전도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변화를 도모하고, 한국 교회가 맞춤전도를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한국 교회에 ‘맞춤전도집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맞춤전도집회를 기획하고 실행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1996년부터 2000년은 온누리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새가족이 급증했습니다. 새가족 중에는 온누리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처음 믿은 성도들도 있었지만, 다른 교회를 출석하다가 옮겨 온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주일 새가족 교육 1주차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타 교회에서 온 성도가 훨씬 큰 비율을 차지하는 교회가 되면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길로 하용조 목사님을 찾아가 새가족 사역을 내려놓고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은 불신자들만 전도하는 사역을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제 마음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전도사역본부’를 신설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전도사역본부를 신설하고 맞춤전도집회 기획과 사후 양육 등을 준비하면서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용조 목사님께 전도집회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시대적, 목회적 상황에 따라 대상을 세분화하고, 맞춤전도집회 장소를 레스토랑으로 변화시켜 소수만 초청하자는 단순한 아이디어 수준이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시행해 보라고 하시며 지지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현재까지 총 47번 맞춤전도집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와 열매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는 2001년 12월 열린 첫 번째 맞춤전도집회 40대 남성을 위한 ‘비상구(EXIT)’입니다. 가장 풍성한 열매가 맺힌 집회도 그때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40대 남성들 상당수가 IMF 외환위기로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었고, 자살률이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불신자 대부분이 40대였습니다. 그래서 40대 남성만을 대상으로 맞춤전도집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세대만 지정해서 집회를 연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맞춤전도집회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교회가 믿지 않는 40대 남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40대 남성들이 교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아울러 예배당을 레스토랑처럼 꾸민 시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긴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3일 동안 이어진 40대 남성을 위한 프로그램과 메시지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수많은 중보기도자가 참여했는데, 전도 대상자들이 그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맞춤전도집회 메시지는 40대 남성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도록 도왔습니다. 당시 40대 남성 750명을 초청했는데, 무려 530명이 결신했습니다.” ‘전도’라는 단어조차 부담스럽고 불편해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위한 맞춤전도 전략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도는 반드시 대상자의 필요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전도를 불신자들의 필요와 연관시키지 않으면 그들은 복음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의 세계관과 필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복음을 그 필요에 적합한 언어로 해석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은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고, 전도 대상자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맞춤전도에서는 전도자와 메시지가 전도 대상자의 필요에 적합한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메신저가 전도 대상자의 필요와 문제를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메시지도 전도 대상자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도 대상자들의 세계관과 문화, 현재 문제와 필요를 깊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전도 도구와 방법 또한 대상자의 필요에 부합해야 합니다." 앞으로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가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하며, 변화해야 합니까? “세 가지 방향에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를 전도하는 전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SNS나 온라인을 이용한 전도 방법이 있지만, 결국 인격적 대면이 이뤄져야 하는 전도의 성격상 그들과 어떻게 관계 형성을 하고, 복음을 전할지에 대한 숙제가 있습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초개인화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초개인화 문화에 맞춤화된 전도 전략이 필요합니다. 온-오프라인을 병행하는 방법부터 일대일 전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도 실행이 요구됩니다. 둘째, 타 종교와 세계관별 맞춤화된 메시지와 전도 전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에 더욱 집중하려면 타 종교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타 종교의 세계관 속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할지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 시대 세계관과 타 종교별 맞춤화된 메시지와 전도 철학을 계발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한국의 작은 교회들이 적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맞춤전도는 많은 인원을 초청할 때보다 적은 인원일 때 효과적입니다. 작은 규모의 교회들이 맞춤전도를 실행하면서 적합한 모델들을 더 많이 만들면 한국 교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전도 패러다임이 정착할 것입니다.”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독자들에게 어떤 영의 양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 전도를 했는지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을 듣는 대상의 수준과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전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하셨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맞춤전도 원리는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맞춤 사역의 절정입니다. 맞춤전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계획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영혼의 시대와 문화, 필요에 따라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를 읽고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2024-08-03 제1503호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아주 특별한 경험과 고백 발달장애인을 위한 예배공동체 사랑부에서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이하 행복한 부부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진새골 사랑의집에서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가 개강했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장애인 자녀를 둔 사랑부 가정이 성경적인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부와 가정이 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사랑부 부모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사랑을 다시 누리고, 자녀와 부부를 위한 아름다운 가정으로 회복되는 거룩한 장(場)이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발달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 겪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애인 자녀의 주돌봄자 80% 이상이 부모인데, 그에 따른 부모의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어려움이 매우 크다. 여기에 장애가 있는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보호자 사후 자녀 돌봄에 대한 막막함도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한 편견과 차별이 사회적 고립마저 발생시키고 있다.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 소식을 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가 그래서 필요하고, 중요하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열린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한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눈물과 고백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면서 정말 힘들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가정으로 회복될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축복의 통로 최난숙 성도(서초C공동체)는 장애가 있는 자녀가 하나님 축복의 통로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아들의 장애를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했었다. 25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터라 더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장애를 자연스레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장애가 있는 아들 덕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행복한 부부학교가 이 사실을 재확인 시켜줬다. 특히 강미향 목사가 전한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는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회복을 도왔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와 자녀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억하게 하셨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라는 정체성을 발견했다. 장애인 자녀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장애인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더욱 힘써 양육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또한 행복한 부부학교를 섬기는 목사, 장로, 조장 부부, 교사들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자신도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겸손한 섬김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언약결혼식’이었다. 결혼 30년이 지나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해야겠다고 계획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언약결혼식을 하고,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어서 무척 행복했다.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 박동희 성도(양재 사랑부)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 배움이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받은 가장 큰 은혜다. 장애가 있는 아이는 스스로 의사결정하거나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모가 매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가 많은데, 주변에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것과 내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통로라는 것도 배웠다. 물론 그동안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수없이 고백했지만, 결국 내 중심으로 자녀를 바라봤기에 괴롭고 힘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존귀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그 자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그래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배움이 특별하고 고마웠다. 늘 자녀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석하면서 부부가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바로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자녀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희 성도는 ‘언약결혼식’에서 아주 특별한 고백도 했다.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가정을 이뤄서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부부 십계명을 함께 적고, 부부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 되기로 기도했다. 자녀 양육보다 먼저 부부관계를 아름답게 형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에게 하나님 축복의 통로이자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김혜숙 성도(서빙고 꿈사랑부)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선물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더 인정해 주고, 세워주는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아름다운 변화를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남편과 함께 교육받으면서 경험했다. 사실 김혜숙 성도는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남편과 함께 교육을 듣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부 모두에게 의지가 있어야 하고, 바쁜 남편을 교육에 참여시키는 게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고, 하나님 앞에서 부부 십계명을 만들고, 함께 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롭게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부부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한 것 자체가 행복이었고, 큰 변화였다, 김혜숙 성도 부부는 벽에 걸린 부부 십계명을 한 번씩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혜숙 성도의 자녀는 또래에 비해 발달이 늦다. 육체적인 어려움도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네 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늘 도와줘야 한다. 그 때문에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는 아이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세상에도 장애 아동을 돌봐주는 시스템이 있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 행복한 부부학교처럼,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쉼을 얻고, 부부가 함께 온전히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아이들을 돌보는 돌봄 프로그램이 더 많이 필요하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의 모든 중심이 아이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부 관계가 나빠지기도 하고, 결국 장애인 자녀를 돌보다가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숙 성도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그동안 아이에게는 온 신경을 쓰고, 예쁘게 말하면서 정작 남편에게는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인정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를 더욱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로 다짐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결국,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은 부부가 장애인 자녀에게서 조금 벗어나 서로를 인정해 주고, 사랑을 고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회 자체가 회복이다. 아이에게만 모든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선물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문의: 010-8567-1808
2024-07-06 제1499호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온누리교회 사회선교본부가 출범 1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이 지난 5월 25일(토) 온누리청소년문화센터 소극장에서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막 올랐다. 사회선교본부 리더십 및 성도 231명이 참석했다.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은 사회선교 역사 소개,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 결과 발표, 이재훈 위임목사 특강, 임희국 교수 특강, 패널 토의,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기훈 목사(사회선교본부장)가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역사’를 주제로 지난 10년 동안 걸어온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발자취를 나눴다.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에는 11개 팀이 참가했다.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SNS청년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싶은 마음에 공모전에 참가했다”면서 “앞으로도 목마른 영혼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재훈 위임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나아갈 길’을 주제로 특강했다. 이 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비전은 국내외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선교’를 주제로 강의했다. 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시대와 상황의 요청에 응하는 사회선교는 두 바퀴의 수레처럼 항상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선교의 실천 방안을 구체화하고, 사례를 나누는 패널 토의도 이어졌다. 임희국 교수, 정운오 장로, 박순길 장로, 박승호 선교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는 서빙고온누리교회 S브릿지공동체, 마포공동체,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인천온누리교회 북누리공동체가 발표했다. 구경용 성도(도곡공동체)는 “다락방 지체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곳을 찾아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면서 “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김현주 장로(사회선교본부 다문화팀)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가 10년 동안 어떻게 달려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준비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 뜻깊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회선교가 더욱 확장되고, 더 많은 성도가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 당선작 문턱 낮추고, ‘사회선교 대학청년부’ 세우기! 온누리교회 청년들은 사회선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청년 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사회선교를 들어본 적 있다’가 70%, ‘들어본 적 없다’가 30%였는데, 70% 응답도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과 이기훈 목사님의 리더십 특강 때 처음 들어본 청년들이었다. 둘째, 청년들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어한다. 설문에 응답한 청년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 87명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회선교에 접근하는 방법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사회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거나 신청 과정에 문턱이 높다고 답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춰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SNS청년부 아웃리치가 떠올랐다. SNS청년부 국내외 아웃리치 신청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사회선교 접근성을 높이는 데 차용하려 한다. 첫째, 예배 시간에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사회선교 리더십들과 지속적인 교제 시간을 마련한다. 더불어 사회선교를 경험한 지체들의 간증을 나눈다. 사회선교를 지속적으로 노출해서 더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둘째, 사회선교 교육과정을 개설한다.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는 말씀을 기반으로 한 여러 교육과정이 있다. 사회선교도 바이블아카데미, 기독 OTT 퐁당 등을 활용해서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면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셋째, SNS를 활용한 소통 채널을 확대한다. 사회선교에 대한 정보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사역별 최신 현황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캘린더를 활용해서 사역 신청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활성화하고, 카카오톡 등 SNS를 개설해 신속하고 활발한 소통을 돕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대학청년부 사회선교팀’을 세워서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섬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 영역에서 은사를 쓰임 받도록 달란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둘째, 청년들의 마음이 가는 사역을 제안해서 운영한다. 셋째, 유튜브, 인스타 등을 미디어에 좀 더 친숙한 청년들에게 운영을 맡겨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도록 기회를 준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마음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흘려보내는 청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팀브링)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도곡공동체의 이웃 향한 사랑 그리고 섬김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는 희락다락방, 긍휼다락방, 화평다락방, 소망다락방, 은혜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곡공동체 모든 다락방이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 사회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희락다락방은 하나공동체, 정선 동강교회, 우리들학교를 섬기고 있다. 한국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탈북민들을 지원하고, 하나공동체 예배를 섬기고 있다. 북한에 쌀을 보내고, 탈북민 청년들이 지내는 기숙사에 반찬을 전달하는 봉사도 했다. 2018년 이후 쌀을 보내는 사역이 정부의 제재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농촌교회를 새롭게 섬기게 되었다. 코로나19 기간에는 정선 동강교회를 도왔다. 봄에는 밭을 경작하고, 여름에는 블루베리를 소출하는 일을 도왔다. 희락다락방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섬기기도 했다. 희락다락방에서는 탈북민 학생들이 공부하는 우리들학교 봉사도 하고 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을 사는 탈북 학생들이 교회와 사회의 일꾼 되기를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다. 긍휼다락방은 굿윌스토어에서 장애인들의 자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굿윌스토어를 찾아가 물건을 분류 및 선별하고, 포장해서 판매를 돕는다. 1년에 두 번은 장애인 100명에게 간식과 선물을 준다.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화평다락방은 서울농아교회를 섬긴다. 농아교회는 국내 및 해외 선교사 파송 사역을 하고, 유튜브로 수어 설교 방송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서울농아교회를 방문해서 수어로 찬양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한다.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역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소망다락방은 양평 덕수교회와 송파구 거여동 임마누엘집을 섬긴다. 양평 덕수교회로 아웃리치를 가서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교실’을 운영했다. 거여동 임마누엘집에는 쌀, 과일 등 생필품을 전달하고, 직업 재활 작업을 지원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 교제도 했다. 은혜다락방은 재한몽골학교를 섬기고 있다. 재한몽골학교는 학생 16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이주민 학생 350명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나섬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을 도와서 몽골뿐만 아니라 인도와 필리핀 등지에 온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해서 급식 봉사와 설거지, 청소 등을 한다. 앞으로도 도곡공동체가 사회선교에 앞장서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를 기대한다. / 구경용 성도(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2024-06-01 제1494호
[특집]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을 찾아라!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우정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독거노인들에게 따듯한 정(情)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다. 그들은 때마다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음식을 대접하고, 집수리도 해준다. 그들의 얼마나 정성스럽게 섬겼는지 꽁꽁 얼어 있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봄날 눈 녹듯 녹아내렸다. 지금은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뜨거운 우정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박온유, 이지영, 이희정, 김차영, 김현수, 김태현, 진병수, 공혜진, 김호영, 황명진, 정다영, 방유석, 노창우, 강원조.’ 독거노인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이름이다. 청년과 노인이라는 단어 옆에 ‘우정’이라는 말이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굉장히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은 세대 간 갈등이 세계 1위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영국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갈등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28개국 시민 2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12개 갈등 항목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7개 항목에서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그중에서 빈부격차와 성별, 세대 갈등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28개국 평균 40%대인데, 우리나라는 80%에 달할 정도였다. 비율이 2배 가까이 높았다. 2018년 영국 BBC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전 세계 27개국 시민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개 갈등 항목에서 우리나라가 남녀갈등 1위, 세대갈등 2위, 빈부갈등 4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 세대갈등이 세계 최고라고 공인받을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인데, 청년과 노인의 우정이라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세대갈등을 넘어서게 만들었을까? 청년과 노인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예수님 사랑으로 연결되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결성된 건 4년 전이다. 전에는 브릿지33+공동체와 산마루교회 성도들(노숙인 포함)이 함께 서울역 청소를 했다. 몇 년 동안 해오던 사역이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멈춰 섰다. 아쉬운 마음에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다른 사역을 찾고 있었는데, 서빙고온누리교회 이웃사랑팀에서 독거노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로 지내며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는 어르신들의 사연이 브릿지33+공동체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브릿지33+공동체는 양재온누리교회 소속 청장년 공동체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기꺼이 매월 서빙고동을 찾기로 했다. 마음이 맞는 청년 6명이 모여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의 태동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지역상품권을 들고 서빙고동, 동빙고동, 보광동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분기별로는 생필품과 반찬 등이 담긴 ‘사랑의 상자’를 들고 찾아간다. 추수감사절 사르밧프로젝트에서 쌀 나눔을 할 때도 있다.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사역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만들어진 이후 4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동안 팀원이 늘어서 현재 14명이 동역하고 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만나는 어르신 대부분 홀로 지내신다. 무엇보다 정(情)이 고픈 분들인데, 웬일인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찾아갔을 때도 몇 번 오다 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으셨다. 청년들은 어르신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가 말벗이 되어드리고,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어르신들의 생일잔치를 열어드리기도 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4년 동안 꾸준히 이어지는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덕분일까? 어르신들이 하나둘 마음의 문을 여셨다. 청년들이 처음 찾아갔을 때는 “상품권만 주고 갈 거면 오지 말라”고 문전박대 하던 어르신들이 청년들이 계속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안부를 묻고, 준비한 선물을 나누고 일어서는 청년들에게 “나랑 같이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할 정도다. 귀가 잘 안 들려서 대화가 쉽지 않지만, 청년들의 전화만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청년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손자들이 집에 오는 것처럼 깔끔하게 단장하고 맞아주셨다. 한 어르신은 청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90세, 몸이 많이 아픈 어르신을 위해 청년들이 찾아갈 때마다 따듯한 국수나 부드러운 죽 등을 챙겨갔다. 그 어르신의 식사를 도우면서 복음을 전했다. 청년들의 사랑이 그 어르신의 마음 밭을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복음의 씨앗이 금세 심겼다. 그 어르신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쁘게 고백하면서 청년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사랑과 섬김 덕분에 어르신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 청년들은 복음 전하는 기쁨과 조금씩 마음을 열고, 변화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다. 박온유 자매(브릿지33+ 이웃사랑팀장)가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뜨거운 우정을 쌓은 비결을 소개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면 나이를 떠나 정(情)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즐겁습니다. 저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애틋하고, 그분들께 더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어르신들도 저희의 마음을 잘 아시고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십니다, 손을 한 번 더 잡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합니다. 더 많은 어르신과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드디어 꿈꾸던 일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어르신들 댁에 갈 때마다 열악한 환경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며 제대로 닫히지 않는 현관문, 불이 들어오지 않는 형광등, 타일이 깨지고 곰팡이 핀 화장실, 다 벗겨진 벽지, 얼음장 같은 바닥 등 어르신들의 주거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그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몇몇 자매들이 어르신들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이 그 응답으로 방유석, 김태현, 강원조, 황명진 형제를 보내주셨다.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인데, 안전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따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팀원 대부분 자매들이라 가구나 장판을 교체하고, 수도관과 전기 배선을 만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귀한 형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꿈만 꾸던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 댁을 드디어 수리할 수 있었다. 고장 나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화장실 환풍기를 고치고, 전등 스위치 배선 정리와 전등 교체를 해드렸다. 온수가 안 나와서 제대로 씻을 수 없던 어르신을 위해서 보일러를 수리해드렸다. 안방 전등 전기 점검, 현관문 닫힘 조절기 설치 및 페인트칠, 주방 양념통 선반 설치, 청소 및 물건 정리, 모기장 교체, 커튼 달기 등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대신해서 심부름도 하고 있다. 시간과 정성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청년들이 자비량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어르신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뜨거운 우정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아름답고 귀한 헌신이 계속 이어지도록 더 많은 관심과 기도, 도움과 동역자가 필요하다. 문의: 010-2024-4220 기도제목 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께 복음이 전해지도록, 어르신들이 영육이 강건하도록 2. 보일러 비용이 비싸서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사용하는 어르신들에게 난방비가 지원되도록 3. 문두현 어르신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눈과 치아 진료를 제대로 못 받는데 치료 받도록 4.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건강과 물질의 어려움 없이 어르신들을 계속 섬길 수 있도록
2024-05-04 제14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