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캠퍼스] 크리스천들이 실천할 수 있는 환경운동

기획_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   대중교통, 텀블러, 장바구니 이용, 친환경 수련회 등   교회 담장 넘어 가정과 지역사회로까지 뻗어나가야     환경오염으로 인해 조기사망한 사람이 900만 명이나 된다. 전 세계 사망자 6명 중 1명이 환경오염 때문에 조기사망하는 셈이다(2017년 의학저널 ‘랜싯’). 900만 명 중 650만 명이 미세먼지, 180만 명이 수질오염, 80만 명이 공장 등 근무환경에서 나오는 오염원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에이즈와 결핵,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이다. 전 세계 모든 전쟁이나 폭력으로 희생되는 사람보다 15배 이상 많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한 연구원은 “환경오염이 생명권, 건강, 안전한 근무환경, 아동과 취약계층 보호 등 인간의 기본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지구가 환경오염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청지기 사명을 가진 교회와 크리스천의 책임이 막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교회와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잘 지키고 보전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환경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김믿음(가명) 성도는 이번 추석연휴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아파트 쓰레기장으로 어떤 아저씨가 커다란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들고 가더라고요. 추석 연휴 동안 집에서 나온 음식물쓰레기 같은데, 무려 20kg이 넘더라고요. 사흘 정도 되는 짧은 기간에 가정집에서 음식물쓰레기가 20kg나 나오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만큼 낭비가 심하다는 거잖아요.” 이 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환경미화원들이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명절 직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쓰레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명절 이후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가 평소보다 2배가량 많다. 이를 수거하는 환경미화원들이 그만큼 더 수고를 해야 한다. 비단 음식물쓰레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볼 때 받은 1회용 비닐, 카페에서 편하게 이용하고 있는 일회용컵, 생수 페트병, 플라스틱 빨대 등 줄일 수 있는데 무심코 버려지는 쓰레기가 너무 많다. 이렇게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 하나하나가 모여 지구를 오염시킨다.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쓰레기들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고 있다.     환경오염, 다음 세대의 건강과 안전 위협   ‘GPGP’(Great Pacific Garbage Patch)’는 ‘거대한 태평양 쓰레기 더미’라는 뜻이다. 태평양 쓰레기 섬을 지칭한다. 1997년 찰스 무어라는 요트 선수가 LA에서 하와이까지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하다가 발견했다. 발견 당시 태평양 쓰레기 섬 크기가 한반도의 7배 정도였는데, 해마다 그 면적이 증가해서 2018년에는 한반도 크기의 무려 15배로 커졌다. 쓰레기 무게만 8만 톤에 이른다. 이 쓰레기 섬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비닐과 플라스틱이다. 이 같은 쓰레기 섬이 태평양뿐만 아니라 북대서양에서도 발견됐다. 그 크기 또한 한반도 면적의 5배에 달한다.  이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파도에 치이면서 더 작은 미세플라스틱으로 변하고 있다. 미세플라스틱을 해양 동물이 먹고, 먹이사슬을 거쳐 다시 우리 식탁으로 올라오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 명소인 남산서울타워를 밤에 유심히 보면 색깔이 변한다. 남산서울타워의 조명 이 빨간색이었다가, 파란색도 되었다가, 초록색이 되기도 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미세먼지 농도에 따라 조명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빨간색이면 매우 나쁨, 주황색이면 나쁨, 초록색이면 보통, 파란색이면 좋음을 나타낸다.  미세먼지 문제도 심각하다. <2018 세계 대기질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초미세먼지(PM2.5) 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칠레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원인은 대기정체 등 기후변화의 영향이 가장 큰데 수도권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내려질 정도의 고농도 미세먼지 일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미세먼지는 어른보다 어린이들의 건강에 더 치명적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17년 3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어린이가 처한 환경 실태가 하위권이다. 국내 환경오염 탓에 사망하는 5세 이하 어린이가 인구 10만 명 당 13.1명(세계 31위)으로, 1위 아이슬란드(2.71명), 노르웨이(5.12명), 스웨덴(5.93명)보다 훨씬 많다. 국내 어린이 인구(생후 59개월 이하) 223만여 명 중에서 연간 290여 명이 대기오염으로 인해 사망하고 있는 셈이다. 또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5세 이하 어린이 중에서 매년 590만 명이 사망하고 있는데, 29%에 해당하는 170만 명이 환경오염(대기오염, 수질오염, 화학물질 노출 등) 탓으로 사망한다.     환경오염은 선천성 장애인 증가로도 이어지고 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국내에서 태어난 선천성 장애인은 모두 4만4896명으로 전체 신생아의 10.3%를 차지했다. 2009년 5.1%에 비해 5년 사이 선천성 장애인 발생률이 두 배 늘었다. 전문가들은 산모의 고령화와 함께 환경오염을 그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환경오염이 자라나는 다음 세대의 건강과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바로 ‘행복한 불편함’ 캠페인 실천해야    지금 바로 친환경적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와 크리스천이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운동이 있다. 거창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주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 온누리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행복한 불편함’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꽤 큰 효과가 있다. 오는 10월 6일은 ‘대중교통 이용하는 주일’이다. 자가용 대신 지하철,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교회에 오면 된다. 환경도 생각하고, 지역주민을 배려하고, 지역경제에도 보탬이 되는 일석삼조의 기회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자연친화적 수련회도 좋은 아이디어다. 지난 8월, 사회선교본부 생명과환경팀이 ‘Green MT’를 주제로 이색수련회를 다녀왔다. 모든 과정을 친환경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했다. 마트에서 장 볼 때 비닐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이용했고,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를 사용했다. 수련회에서 마실 물은 일회용 페트병 생수 아니라 자연여과 방식으로 정수되는 셀프케어 정수기를 사용했다. 잔반을 남기지 않도록 적정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고, 일회용 종이컵대신 개인 텀블러를 이용했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계면활성제가 들어간 화학세제 대신 EM(유용 미생물) 원액으로 설거지를 했다. 세안할 때는 비누대신 쌀뜨물을 썼다. 그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생명과환경팀 1박2일 수련회 기간 동안 쓰레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발생한 쓰레기 대부분은 재활용이 가능했다.   환경을 살리려는 노력 그 자체가 선교가 되기도 한다. 지난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 ‘헤베이 스피릿호’가 해상 크레인과 충돌해서 원유 12,547킬로리터가 유출되는 해양오염 사고가 발생했다. 국가적인 대형 해양오염 사고에 전 국민이 태안 앞바다로 달려가 ‘태안 살리기 운동’에 참가했다. 그 덕분에 태안 앞바다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그 당시 자원봉사의 80%가량이 크리스천이었다. 이는 가톨릭의 8배, 불교의 9배에 달했다. 온누리교회도 두 팔 걷어 부치고 태안으로 달려갔다. 일일 평균 150명 총 4,500여 명이 봉사에 참가했다. 우의, 고무장갑, 방한모자, 마스크 등 복구 장비에만 투입된 금액이 1억5천만 원에 달했다. 그 일을 계기로 태안 온누리교회(기도처)가 태동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매우 만족해하셨다. 그런데 청지기인 우리가 창조세계를 오염시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고 지켜야 할 의무가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행복한 불편함캠페인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 담장을 뛰어 넘어 가정, 지역사회로까지 뻗어나가 지구를 살리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환경을 살리는 사소한 실천 Tip!> _대기오염 대부분은 자동차 배기가스가 원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_일회용컵 대신 개인컵이나 텀블러 사용하자.  _세탁소에서 1회용 비닐커버를 받지 말자. _장 볼 땐 1회용 비닐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사용하자. _배달음식 시킬 때 일회용품을 받지 말자. _선물할 때 마음은 최대한, 포장지는 최소한!     <기고>    편리함과 평안함은 다르다! 우리가 꼭 해야 할 생명과 환경 위한 작은 실천      우리 교회에서는 매주 2.7톤 분량의 쓰레기가 나오고, 7,000개의 일회용컵이 매주 소비되고 있다.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만 발생되는 일반폐기물이 연간 145톤이며, 교회 카페에서 소비하는 일회용컵이 364,000개에 달한다.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창 1:22)해야 할 물고기와 새들이 받을 복을 빼앗았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아름답다. 생명력이 있고 사람에게 쉼과 회복을 준다. 하지만 세상은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스리라”는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음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생산된 플라스틱 83억 톤 가운데 63억 톤이 쓰레기로 버려졌다. 버려진 것 가운데 재활용된 것은 단 9%. 매립되거나 소각된 것까지 합쳐도 20%를 넘지 않는다. 모두 산이나 바다나 강에 뿌려졌다. 2050년이면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많아질 것이란 예측이 억측은 아닐 것이다.    생명과 환경을 위한 기도   우리는 플라스틱이 이 세상에 만들어진 이래로 분해된 것을 본 적이 없다. 플라스틱은 1900년대 초에 만들어졌는데, 플라스틱이 분해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최소 500년이기 때문이다. 작아진 플라스틱은 ‘마이크로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뢰하고 마시고 있는 세계적인 모 생수(페트병) 안에 1리터당 적혈구 크기 10.4개의 플라스틱 입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플라스틱은 우리가 마시는 물과 먹거리를 오염시켰다. 플라스틱이 분해될 때 나오는 미세플라스틱을 포함해서 나노미터 단위의 플라스틱이 사람의 세포막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우리는 매일 플라스틱을 축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앞으로 우리 몸에 어떤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올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플라스틱을 연간 1인당 132.7kg씩이나 버리고 있다. 지금 당장 사용을 중지한다고 해도 앞으로 500년~1000년 이상은 우리 바로 곁에서 환경을 어렵게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풍요와 편리만을 좇았다. 하나님께 받은 생명의 감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다. 우리의 기도제목 중에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를 위한 기도와 더불어 ‘생명과 환경을 위한 기도’를 추가해야 한다. 자연은 신음하고 있고, 플라스틱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매일 환경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우리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다. 환경오염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실천은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느끼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필요와 욕망 사이   생명을 위해 교회가 먼저 앞장서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고 실천하면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지금 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종이컵 재활용률은 1년 사용량 230억 개(플라스틱 컵 17억 개)중에서 단 1% 뿐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일회용컵을 사용한다. 일회용품 사용을 막을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다. 필요를 넘는 것이나 과다하다고 여겨지는 것부터 줄여야 한다.  만약 집에서 물을 마실 때 일회용컵을 계속 사용한다고 하면 분명 불편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온누리교회는 이미 텀블러 사용하기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데, 많은 성도님들이 텀블러를 가지고 각종 예배와 스쿨에 참여하고 있다. 어떤 스쿨은 간식테이블에서 종이컵을 사용할 때 환경부담금 500원씩을 저금하게 한다. 자연스럽게 텀블러 사용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텀블러는 개인물컵이지만 매우 참여적인 환경운동이자 선교활동이다. 교회 카페에서 텀블러를 가지고 음료를 주문하면 50원씩 할인해준다. 할인된 금액 50원은 선교비로 사용되도록 포스기기(점포 판매 시스템) 시스템을 바꾸었다. 교회 카페에서 텀블러를 휴대하고 음료를 주문하는 사람이 10명이라면 500원이 선교비로 지원되는 것이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은 텀블러가 환경을 지키는 일과 복음전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점점 더 많은 공동체와 스쿨이 참여하고 있다.  온누리교회 모든 정수기 위에는 특별한 그림이 붙어 있다. 차세대 어린이들이 환경에 대한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 붙여 놓았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다회용컵을 사용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츠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상변화를 예측하는 과정에서 소수점 이하의 아주 근소한 입력 값의 차이가 완전히 다른 기후패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명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이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에 변화를 줄 수 있듯이 미세한 변화가 앞으로 예상하지 못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스틱 제품 사용과 관련해서 나의 ‘필요’와 ‘욕망’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작은 컵이나 빨대 하나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작은 날갯짓이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를 바란다. 음료수는 꼭 빨대로 마셔야 할까? 컵홀더는 반드시 필요할까? 가능하다면 줄여보는 도전이 필요하다. 편리함과 평안함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평안함을 추구해야 한다. 평안함은 불편함 속에서도 얻을 수 있다.   / 신동식 목사(성북공동체, 사회선교부 생명과환경팀 담당)   

 2019-09-22      제1262호

[국내캠퍼스] “모든 아이는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

기획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   가정위탁제도 … 정서적 애착관계 형성에 큰 역할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다        가정위탁제도. 친부모의 학대, 방임, 질병, 기타(사망, 혼외출생, 수감) 등의 사유로 친가정에서 아동을 양육할 수 없는 경우 일정기간 아동을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가족기능을 회복하도록 원조하는 아동복지서비스다. 쉽게 말해, 여러 사유로 인해 가정이 없는 아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만나기 전까지 시설이 아니라 가정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보건복지부 자료(2017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위탁아동은 총 11,983명으로, 조부모에 의한 대리양육이 7,950명(66.3%)으로 월등히 많고, 친인척위탁 3,100명(25.9%), 일반가정위탁 933명(7.8%) 순이다. 시설이 아니라 가정위탁제도가 왜 필요하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왜 가정위탁제도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양육자와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정에서 자라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하나님께 입양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또 하나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애착이란 한 개인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강한 감정적 유대관계를 말한다. 동물들의 각인(출생 이후 처음 시야에 들어온 어미나 다른 움직이는 존재에 지속적인 애착을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왜냐하면 유아기에 형성된 애착관계는 한 사람이 평생 맺는 모든 대인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를 학문(이론)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영국의 소아과 의사 볼비(Bowlby)다.    이론과 실험, 역사적 사건으로 증명된 아기들의 정서적 애착의 필요성과 중요성   볼비는 유아 초기의 애착형성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고, 애착형성이 잘 되지 않으면 아동기뿐 아니라 성인기의 여러 정신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이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유아기 시절 양육자와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로의 빨간털원숭이 실험은 볼비의 애착이론을 뒷받침해준다. 위스콘신대학 심리학자 해리 할로는 빨간털원숭이를 대상으로 애착형성 실험을 했다. 새끼원숭이를 어미와 격리시키고, 철사로 만든 어미 원숭이(인형)와 함께 있게 했다. 하나는 차갑고 딱딱한 모형 철망에 우유병을 걸어놓았고, 다른 하나는 철망에 부드러운 벨벳천으로 싸놓은 대신 젖병은 연결하지 않았다. 새끼원숭이는 두 어미 중에서 누구에게 갔을까? 놀랍게도 새끼원숭이는 배고픔을 채워주는 철사로 된 원숭이가 아니라 배고픔을 채워주지 않지만 부드러운 촉감이 있는 벨벳천으로 덧댄 원숭이에게 붙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배고픔보다 따뜻함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할로는 아기의 정서적 애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아기들의 정서적 애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역사적 사실로도 증명됐다. 1989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몰락하고 드러난 고아원 실상이 이를 보여준다. 차우셰스쿠는 1980년대 루마니아를 지배했던 악명 높은 독재자다. 그는 매우 비인간적인 인구증가 정책을 내세웠다. 인구수가 늘어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군사력도 강해져서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차우셰스쿠는 가정 당 무조건 네 명 이상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자녀할당제’를 시행했다. 문제는 독재와 폭정으로 루마니아 경제가 가난해진 것이다. 빈곤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아이를 도저히 양육할 수 없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고아원이 고아들로 가득 찼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 15만 명 이상의 고아들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열악했던 루마니아 고아원의 실상이 서방 언론에 알려지며 ‘가정위탁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루마니아 고아원의 비극에 대해 게오르게트 뮬헤어(NGO 활동가)는 TED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우셰스쿠의 전시용 고아원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보육원이 많이 시끄러울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수녀원만큼 조용했습니다. 침대마다 아이들이 누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우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곳의 수간호사가 제게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우리 아이들은 정말 예의바르답니다.’ 그곳의 아기들이 다른 사람과 접촉할 시간은 하루 중 고작 몇 분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자라서 보육원을 떠날 때 사회부적응자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몰도바에서는 보육원의 여자아이들이 또래 아이들보다 인신매매를 당할 확률이 10배 높고, 러시아에서는 보육원을 떠나고 2년 뒤 20%의 아이들이 범죄 경력을 갖게 되며, 14%는 성매매에 연루되고, 10%는 자살한다고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가족에 대한 권리가 있고, 가족을 가져야 하며, 가족을 필요로 합니다. 보육원이나 고아원을 지원하는 것보다 가정위탁제도를 지원해야 합니다. (시설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뿌리 뽑을 수 있는 아동폭력의 한 형태입니다. 이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가정위탁은 꽃에 물을 주는 것… 사랑과 관심이 그 아이들을 살린다!   아기의 정서적 애착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이론과 실험, 역사적 사실이 타당한 주장일까? 실제 가정위탁을 하고 있는 크리스천 가정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오충화 집사(서대문공동체)네는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아내 최진옥 집사 덕에 아들 둘(현준 18세, 현민 16세), 딸 둘(현아 13세, 현주 9세)을 둔 다복한 가정이다. 오 집사네는 아이들을 위탁해서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아내 최 집사가 수년 전부터 남편 오 집사에게 아이를 위탁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데, 가정이 아닌 시설에서 자라는 것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다. 오 집사는 아내의 결정을 두 가지 이유로 걱정했다. 하나는 위탁받은 아이가 입양이 결정돼 다른 가정으로 갈 경우 아이에게 생길 분리불안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예쁘게 잘 키우던 아이를 보내고 남겨질 상실감이었다. 그런데 어쩌랴. 아내의 뜻이 너무 확고했다. 결국 지난해 소정의 위탁교육을 받고 첫 번째 아이를 위탁받았다. 지난해 12월 10일 예꿈(가명, 남아)이가 오 집사네 집에 왔다.  “예꿈이가 너무 예뻐서 소리 지르고 뽀뽀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게 우리가 그렇게 애정표현을 해도 아이가 반응이 없더라고요. 마치 영혼 없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어요. 울지도 않고요. 더 기가 막혔던 건 아이가 밤새 한 번도 안 깨는 거예요. 시설에서는 너무나 훈련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오 집사 가족들은 반응 없는 예꿈이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다. 뽀뽀도 계속 하고, 예뻐하고, 눈을 마주치고, 끊임없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그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예꿈이가 가족들의 눈을 마주치면서 웃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아이가 밤에 잠투정을 했다. 한밤중에 요란한 울음소리 때문에 가족들이 잠을 못자서 힘들었지만 너무나 기뻤다. 왜냐하면 그게 아기의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정말 기뻤어요. 예꿈이가 한 달 만에 꽃피기 시작했어요.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행복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아이가 참으로 아름답더라고요. 물론 우리 몸은 피곤했지만요(웃음)” 예꿈이의 입양처가 정해졌다. 예꿈이를 위탁양육한 지 꼭 두 달째 됐을 때다. 오 집사 가족은 기쁨과 눈물로 예꿈이를 양부모에게 보냈다. 아이를 보낸 날 첫째 현준이가 그러더란다. “아빠, 이제 (위탁) 그만하면 안 돼요?” 사실 예꿈이를 키우면서 첫째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한창 사춘기여서 방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아들이었다. 시큰둥해 하던 큰아들이 예꿈이를 보기 위해 안방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예꿈이를 키우면서 얻은 생각지도 못한 은혜였다. 그만큼 현준이의 상실감이 컸던 모양이다. 오 집사가 그런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마음이 아프고 상실감도 들지만 그 아이는 인생이 바뀌었어.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니?” 예꿈이를 보낸 지 2주 후, 입양기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음 아이를 언제 맡을 거냐고. 오 집사는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가족여행이 끝나고 맡겠다고 했다. 그러자 기관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다만 며칠이라도 가정에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시설에서 줄 수 없는 사랑을 가정에서 줬으면 좋겠어요. 가족여행가실 때는 우리가 볼 테니까 그 전까지라도 맡아주실 수 없을까요?”  결국 예꿈이를 보낸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예진(가명, 여아)이를 받게 되었다.   “예꿈이를 보내고 뻥 뚫린 마음이 예진이로 인해 완전히 치유가 되더라고요.” 오 집사네는 요즘 예진이의 예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느라 바쁘다. 예진이가 외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되기까지 약 1년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예진이의 커가는 모습을 못 볼 양부모와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정위탁은 마치 꽃에 물을 주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그 아이에게 사랑을 주면 아이는 살아나요.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 있어요. 많은 크리스천 가정에서 아이들의 중보자, 보호자, 양육자, 멘토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요. 한 아이에게 물을 주고 꽃을 피우도록 쓰임 받는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젊은 부부들,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위탁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위탁을 하면서 자녀들의 품이 커지거든요. 우리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가정위탁은 입양과 다르다 크리스천들의 또 하나의 사명   가정위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동복지법 시행규칙 제2조에 의하면 위탁아동을 양육하기에 적합한 수준의 소득이 있는 가정, 위탁아동이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도록 양육과 교육이 가능한 가정, 25세 이상 부부로 위탁아동과 나이 차이가 60세 미만인 경우, 자녀가 없거나 자녀(18세 이상 제외) 수가 위탁아동을 포함해 4명 이내인 가정, 성범죄와 가정폭력, 아동학대, 정신질환 등의 전력이 없는 가정으로 아이를 돌보고자 하는 마음과 용기,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위탁부모가 될 수 있다.  가정위탁과 입양은 다르다. 입양은 친부모가 친권을 포기하고 입양부모의 호적에 입적시켜 친자녀로 양육하는 것이고, 가정위탁은 친가정 복귀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아이의 주민등록상 주소지만 위탁부모에게 이전해 동거인 자격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다.   가정위탁의 유익은 친부모와의 분리로 인한 아이의 불안을 최소화하고, 안정된 가정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 간 상호작용을 통해서 사회학습이 이루어지며, 친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치유 및 성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위탁된 아동이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크리스천이라면 앞장서 가정위탁을 하거나 관련 시설을 지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과부와 고아를 보살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2~23).  제이홈(온누리교회 입양 커뮤니티) 오창화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국가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비난이 친부모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세상의 빛과 소금,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이고 교회잖아요.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비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습니다.” 문의: 보건복지부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 1577-1406       대한사회복지회 02-552-7739         <기고>   입양부모를 만나기 전에도 엄마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 두말 할 필요 없는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바꿔 말해보겠다.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른이 된 여자들이 모두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은 모든 여자들이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엄마가 키울 수 없게 된 아이들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기 위한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다. 나는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엄마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우리 같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간절히 외치고 싶다.  이 세상에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 말은 생물학적인 인간 탄생에 대한 것으로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제도적 관점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엄마가 아이를 키웠다거나 엄마가 누군지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관점의 엄마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에는 자신의 엄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있고, 엄마가 아닌 사람의 손에 성장한 아이들도 있다. 보육원 등의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보육사들을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근로자로서의 엄마가 아무리 사랑과 신념을 가지고 아이들을 돌본다고 한들, 우리네 엄마와 같을 수 있을까? 같을 수 없다면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답을 알면서도 설명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평소 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입양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9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성장하는 동안 아빠가 없어서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은 했지만, 엄마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 고아들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도 그런 일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특별한 일이었다. 나 또한 엄마 없는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엄마는 자본도 학력도 인맥도 없고, 경제관념이나 장사 수완 등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생계를 위해 사회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여자 혼자서 자녀를 키우는 일에 얼마나 큰 희생이 숨겨져 있는지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엄마의 존재에 대해, 엄마의 희생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모든 아이에게는 당연히 엄마가 있어야 하고, 엄마라는 존재는 당연히 자신의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다고. 그리고 이 이미지를 덧입히면서 역할을 강요한다.    ‘엄마’라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일   최근 들어 주 52시간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매우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보육사는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인 동시에 근로자이다. 1주일 168시간 중에서 52시간 이내에서만 엄마 역할을 하면 된다고 법이 보호를 하겠다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로제는 우리나라가 노동환경의 측면에서도 경제수준과 걸 맞는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보육시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날마다 3명 이상의 엄마들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3번 정도의 교대근무로 인해 엄마가 바뀌는 이 제도가 과연 근로환경을 개선하는 만큼 가정을 대신하는 사회복지시설이라는 시스템과 엄마를 대신하는 직업으로서 보육사의 역할을 발전시키는 것인지 질문하고 싶다. 3~4명의 엄마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엄마는 한 명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내편인 나의 절대적 지지자이며,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의 존재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쯤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챘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엄마의 품을 벗어난 즉,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한사회복지회는 입양기관이다. 이곳에서는 부모(대부분 미혼모)들이 키울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입양을 결정해서 인도된 아이들이 입양 절차를 진행하며 보호받고 있다. 부모가 없는 상태인 아이들에게 온전한 부모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는 입양부모를 만나기 전에도 엄마가 필요하다. 우리 기관의 아이들에게는 그 단 한 명의 엄마가 출생까지는 친생모였고, 기관에 온 후에는 위탁모이며, 입양된 후에는 양부모가 되는 셈이다. 입양되기 전까지 이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수일, 수개월, 수년의 시간 동안 위탁모들이 대리양육자로서 아이에게 엄마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기관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당분간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며, 앞으로도 이에 대한 전망은 밝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관이 조금 더 많은 비용을 위탁모들에게 지불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합당한 대가라고 말할 수 없다. 엄마의 역할에 대한 가치매김을 돈으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에게 엄마의 필요를 채워줄 새로운 위탁모가 너무 절실하다.    어른이 된 여자들이 모두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은 모든 여자들이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탁과 입양을 통해 양육의 몫이 더욱 커진 엄마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엄마’라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다. 달란트는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키워야 한다. 더 많은 성도들에게 이 현실을 전파해주기를, 행동해주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 김수진 부장(대한사회복지회) 

 2019-09-08      제1261호

[국내캠퍼스] 2019년 추석 감사예배 및 추모예배

                                                                         * 가정예배 지침 1) 제사는 죽은 영혼에 대한 것이나 추모예배는 고인을 회고하며 유일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본분을 지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2) 감사예배의 경우 가족들이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립니다. 추모예배의 경우 고인의 사진을 세워 놓고 고인이 쓰던 성경, 찬송가 또는 유품을 펼쳐 놓은 뒤 주변을 꽃으로 장식합니다. 향이나 촛불을 켜지 않으며, 지방을 쓰거나 음식상을 차려 놓지 않습니다.  3) 예배 후 함께 식사를 나눈 뒤 소박한 상품과 함께 가족별 장기자랑을 하거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작은 사랑을 실천한다면 보다 더 의미 있는 명절이 될 것입니다.      감사예배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찬송 .......................... 경배와 찬양 67장(날 구원 하신 주 감사) ............................ 다같이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시편 118:28~29 ..................................... 가족 중에서 설교 ............................................ 사랑하기 때문에 ............................................ 설교자 감사와 기도제목 나누기 ....................................................................................... 다같이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기도제목을 나눈다. 중보기도 ............................................................................................................ 다같이 찬송 .......................... 경배와 찬양 160장(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말    누군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도대체 그 사람의 어떤 점이 좋아서 그러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 자체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 때문에 주어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작은 것 하나를 주셔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선물 그 자체에 대한 만족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크고 작은 감사의 내용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들은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 자체가 시시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우리의 상황과 현실에 상관없이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이러한 마음은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합니다. 위기와 시련이라는 구체적인 사실들에만 매달려 괴로워하기보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거듭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를 괴롭게 하는 문제로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기회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주님 밖에서 살아가는 형통함보다 행복한 것이며, 주님 앞에서 쓰라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주님의 등 뒤에서 웃는 것보다는 훨씬 희망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주를 의지하며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은 소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주님께 기쁨이 될까? 어떻게 살아야 주의 이름을 높여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내게 너무나 큰 소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시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라는 진실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주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삶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추석 명절, 우리 가족 모두가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합니다. 잘했다면 좋지만 못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사랑하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이제 전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서 한평생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추모예배순서   오늘 우리는 고(故) OOO님을 추모하며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시간 신령과 진리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묵도 ............................................. 시편 145:1-4 ............................................... 다같이 찬송 .................................. 찬 435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대표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마태복음 16:25~28 ................................... 가족 중에서 설교 ........................................ 주를 위해 사는 인생 .......................................... 설교자 찬송 .................................. 찬 380장(나의 생명 되신 주) .................................... 다같이  추모하는 이야기 ................................................................................................. 다같이  고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나 유품을 통해 고인에 관한 추억을 나눈다.  주기도문 ............................................................................................................ 다같이     주를 위해 사는 인생   들어가는 말 고인이 우리의 곁을 떠나가신지 OO주기를 맞이하여 드리는 이 추모예배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우리 모두에게는 하늘의 위로와 평안이 넘치기를 간구합니다. 오늘 고인을 추모하는 이 시간은 단지 지나간 고인의 과거를 회상하는 자리만이 아니라 아직 삶의 여정 가운데 남겨진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다”(25-26절)  예수님은 온 세상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기의 목숨이며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밝히셨지만(26절), 이렇게 소중한 목숨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잃으면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절, 막 8:35).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 목숨이야말로 오직 주와 하나님으로부터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기에 진리가 됩니다. 따라서 정말 목숨이 소중하다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주신 분을 위해 사는 것이 합당한 이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지 지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다시 올 것이다”(27절)  곧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처음 오심은 베들레헴의 구유, 비천함 가운데 오셨지만 그의 다시 오심은 전능하신 심판주로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모든 사람은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다시 오심이 결코 막연한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비롭게도 이 미래는 벌써 현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요 3:18).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벌써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아직 미약할지라도 주를 믿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영광이 됩니다.  “인자가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28절) 예수님은 당시 말씀을 듣던 사람들 가운데서 죽기 전에 주의 다시 오심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지나친 과장법이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의미는 단지 물리적인 시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있지만 그 실상은 성도의 믿음 안에서 이미 현재 속에서 역사하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도들은 모두 이러한 신앙의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녁식탁의 행복과 기쁨은 밥을 먹는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밥 짓는 냄새가 문 앞까지 흘러가는 순간에도 시작된 것이며, 동네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얘들아! 들어와 밥 먹자”라는 어머니 목소리에서부터 벌써 그 행복과 안식은 시작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단순히 종교적 생활을 실천하는 작은 주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이, 세상의 마지막이 벌써 우리 삶에 들어와 있다고 확신한다면 이제 우리의 목숨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결단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인을 추모하는 것은 여기 남아있는 우리들이 이제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인을 품에 안으시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 이해영 목사(남양주 온누리교회)

 2019-09-06      제12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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