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해설 “...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왕하 20:19). 맛있는 말씀해설 “...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왕하 20:19).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궁의 귀한 것을 모두 보여준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왕하 20:17~18). 이 말씀에 대하여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며, 자신이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으니 선하다고 반응한다. 이 반응은 자신만 무사하면 문제없다는 태도처럼 보여 무책임해 보이고,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열왕기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회복되어 바벨론의 사신들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하 말씀을 보면 전후 사정이 더 명백해진다, 바벨론 사신의 방문은 히스기야의 병이 회복된 직후가 아니라 그의 병이 회복되고, 앗수르(앗시리아)의 군대가 물러난 그 다음이다(대하 32:31).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죽을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고 교만해져서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되었는데, 히스기야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생전에는 내리지 않았다(대하 32:24~26). 히스기야가 교만해진 것은 두 번의 기적이 연거푸 일어났기 때문이다. 죽을병으로부터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막강한 앗수르의 군대를 하나님이 물리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히스기야 왕의 이름이 열방에 높아졌고, 그가 교만해졌다. 열왕기 기자는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사신 방문 사건을 바로 연결했다. 역대하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교만이 바벨론 사신의 방문 때 다시 드러났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왕궁의 모든 좋은 것을 보여준 것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역대하 기자는 바벨론 방백들의 사신이 왔을 때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2:31). 히스기야의 교만을 다시 드러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그는 자신의 교만이 재차 드러났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과거 자신의 교만이 드러났을 때 회개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히스기야 시대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시다. 내 시대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 선하다”라는 반응은 무책임한 반응이 아니다. 자신의 교만에 대한 또 다른 회개의 고백일 수 있다. 히스기야의 첫 번째 회개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 시대에는 내려오지 않은 은혜를 두 번째 교만을 드러냈을 때도 거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심판의 예언을 통해 자신의 교만이 두 번째 드러남에도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 것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시며, 자신의 시대에 태평하므로 선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히스기야의 고백은 미래 시대의 고통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기일이 다가오기까지는 오늘도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스기야가 심판의 말씀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은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교만을 용서해주시는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교만과 어리석음과 죄악을 아낌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를 받기에 너무 형편없는 우리와 대조적인 선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것처럼,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우리를 값없이 그리고 끝없이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 이은일 장로(성동광진공동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2024-09-14 제1508호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우리 인생의 답이 정해져 있나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해주신 비전, 길, 배우자 등이 정해져 있는 걸까요?” 우리 인생은 어떠한 답을 정해 놓고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풍성한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 때 감탄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인생이 된다. 먼저 비전과 길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과연 그 비전이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비전은 내려놓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또는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떠하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가다 보면 그 길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또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답’을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과연 ‘각자의 배우자가 정해져 있을까?’ 생각해 보자.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라는 말인가? 하나님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금 내게 맡겨주신 일들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어 넣으며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둘째,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생각과 태도, 인격이 변화되어야 한다. 질문자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질문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은 믿음의 여정과 같다. 그 믿음의 여정은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너는 것과 같다. 때로 돌 하나하나에 발을 내딛기가 두려울 수 있다. 믿음이 부족하고, 두려움이 나를 삼키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손잡아 주신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능히 그 믿음의 여정에 함께해 주신다. 비록 발이 물에 빠질지라도 하나님이 친히 건져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라. 이 답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좌충우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나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어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로 일하던 중에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의사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의대에 진학했고, 현재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섬기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캄캄한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축복한다. 나의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란다. / 김준태 멘토(남양주온누리교회)
2024-09-14 제1508호
[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조선 시대 성군(聖君)을 꼽으라면 역사학자들은 세종, 영조, 정조, 성종을 말한다. 이 중에서 세종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분열 왕국 시대 선왕(善王)을 꼽으라면 성서학자들은 남유다의 아사, 여호사밧, 아마샤,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를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요시야에게 ‘대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싶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에 성공한 왕이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게 해서 예배를 회복하고(23절), 우상 숭배의 모든 모양을 쓸어 버리는 우상 척결 정책을 단행하며(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던 문화를 뒤엎어 말씀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했다(25절). 하지만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혁에도 진노를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요시야는 재앙을 안 보고 평안히 무덤에 안장될 것’(왕하 22:20, 대하 34:28)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요시야가 애썼다 할지라도 남유다는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므낫세 왕이 나라를 완전히 망쳐놨기 때문이다. 12세에 왕위에 등극해서 무려 55년 동안 남유다를 통치한 므낫세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른다(왕하 21:1~2). 그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민족보다 그 죄악이 더 심하였다(왕하 21:9, 대하 33:9)’고 한다. 모든 민족에는 이방 나라가 대다수인데,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적대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필자는 므낫세만의 잘못이라기보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20장 19절(표준새번역)을 보면 히스기야는 자기 시대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대대손손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신앙교육을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비전(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 29:18)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멸망은 므낫세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자녀교육 실패’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지만, 간절한 기도로 15년을 더 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15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으며, 자기의 안위만 걱정했다. 무엇보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나의 시대에만 평탄하면 된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후대에도 온전한 신앙이 이어지도록 힘쓸 것인가. 히스기야처럼 근시안적 신앙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요시야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앙의 개혁을 일으킬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교육은 세뇌가 아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교육이다. 학업에는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 말씀이 아이에게 전수되지 않는다면, 즉 때를 놓친다면 신앙이 회복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신앙교육은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게 해서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에(하나님의 지혜가 지식의 근본) 매우 중요하다. 신앙 전수에는 희생이 따른다. 후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커리어나 가시적인 성과만 중시하는 문화는 참으로 아쉽다. 시간을 따로 떼어서 신앙 전수에 힘써야 한다. 자녀의 온전한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이 먼저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여호야긴 왕이 37년 만에 사면된다(왕하 25:27~30). 바벨론 왕이 에윌므로닥으로 바뀌면서 원년에 다른 왕들의 지위보다 여호야긴 왕의 지위를 더 높게 하고, 죄수복을 벗기며(명예 회복), 양식 등을 풍족하게 누리게 된다(물질 회복).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을까? 필자는 이를 요시야가 ‘예배 개혁, 말씀 개혁, 우상 타파’를 한 결과라고 본다. 얀 후스의 죽음이 무위로 끝난 게 아니라 100년 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실제로 일으켜 ‘얀 후스가 환생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요시야의 신앙개혁 이후에 남유다가 멸망했지만, 회복이 일어난 까닭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변화가 더디 올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 각 가정의 신앙 형성을 위해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해지도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힘써야 한다. / 이강현 목사(양재A공동체)
2024-09-07 제1507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영적 전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영적 전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R. C. 스프룰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에서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벌이는 영적 전쟁을 ‘가공할 적들인 세상, 육체, 마귀와의 전투’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세상과의 전투인 세계관 전쟁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로 보고자 한다. 우리는 기존에 습득된 인본주의적 생각과 성경적 세계관이 뒤섞인 가운데 갈등하는 순간을 만난다.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잘 모르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서 그 위에 성경적 지식만 쌓아 올린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교회에서는 교회의 법을 따르는 적당히 이중적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믿음의 전진을 위해 두 팔로 안으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개인주의) 사회’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중요했고, 근대(인본주의+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 중요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나의 주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그 어떤 것도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옳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태도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할 때 인류는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사회,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를 충분히 즐기라’는 삶의 방식을 권면한다. 욜로족의 소비행태인 ‘탕진잼’(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니체(Nietzsche)적 세계관을 계승한 포스트모던을 잘 표현한 말이 “너 자신을 사랑하라”다. 다른 사람이 강요한 성공의 기준에 맞춰 살지 말고,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지금, 이 순간 너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이 매력적인 메시지는 자기혐오와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포스트모던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데서 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넘어 이웃과 사회 공동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식을 쌓기에는 열심이지만, 세상의 주도적, 지배적 시대 정신인 세속적 인본주의, 자유주의, 성문화혁명(차별금지법)이 가져올 가정과 교회의 파괴 등 세상을 아는 지식은 매우 부족하다. 앞으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 거룩한 고민이 밀려온다. 성경은 인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이 ‘죄’라고 말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절대적인 도덕 규범을 주셨다. 성경은 인간사회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단순하게 과일 하나 따먹은 사건이 아니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도덕 기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불순종을 의도한 사건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있다.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거부도 할 수 있는데,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모습이 사사시대로 이어졌고, 지금 그 현상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성경은 해결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이후 순종과 성화에서 찾는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와 젠더리즘을 이슈화하고 있다. 특히 차별금지법 등을 통과시켜 국가 차원에서 동성애와 젠더리즘을 옹호 조장하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의 기준은 명확하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차별금지법 등에서 말하는 분류할 수 없는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적인 결합만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기준이 맘에 안 들어 스스로 성 정체성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죄’냐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행위를 금지하셨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신명기> 10장 13절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규례를 주신 이유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믿어드리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하다. / 윤상우 집사(강남D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2024-09-07 제1507호
[주일강단] 선동인가 감동인가 선동인가 감동인가 <사도행전> 21:37~40, 22:22~29 /이재훈 위임목사 요즘 ‘사이버렉카’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특정인에게 일어난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비판하는 일에 참여하는 콘텐츠로 이익을 얻거나 이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 일을 이슈화하는 유튜버에 대한 별칭입니다. 세상은 지금 사이버렉카들에 의해 선동의 시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열렸던 복음주의 선교대회인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를 ‘종교통합운동’이라고 끊임없이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인천 제 4차 로잔대회 내용이 CGN으로 오전 저녁 모두 생중계 되었는데도 내용은 전혀 들어 보지도 않고, 아직도 그 선동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10년, 20년 함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 하던 목사님들이 그것이 절대 아니라고 권면해도 듣지 않고, 선동적인 사이버렉카들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선동에 의식화되어 버린 성도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받은 동영상이나 SNS 내용을 절대로 쉽게 믿지 마십시오. 스스로 찾아보는 내용도 조심해야 합니다. 해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선동은 미디어가 발전한 요즘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도 선동에 의해서 매우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누군가 사도 바울을 가리켜 ‘4천명의 자객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켜 광야로 나간 이집트 사람’이라고 지목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선동에 휩싸여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집트 사람은 사도 바울이 아닙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사람은 수천 명의 사람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했고, 결국 로마 펠릭스 총독이 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그 일의 주동자가 도망을 했는데, 다시 온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고, 그 선동에 넘어가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때 나타난 선동이 또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선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만든 게 분명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유대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며 가르치다가 성전에 이방인까지 데려와 더럽혔다”고 선동했습니다. 그 선동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믿었고, 그러 인해 군중들이 난폭해져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둘러매고 밖으로 나갔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씌운 죄목은 ‘변절자’입니다. 로마 정부가 보기에 ‘반란자’로 오해가 되도록 사도 바울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변절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저도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면서 유기성 목사님과 함께 ‘변절자’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린 장소 근처에 ‘유기성, 이재훈 변절자! 회개하라!’는 문구가 붙은 것도 봤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처럼 쉽게 선동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깊어지기보다는 순간적인 뉴스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깊이 읽고 모든 사실을 두루 살피면서 면밀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아주 짧은 영상, 자극적인 영상에 도취되어서 사고가 점점 마비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유튜브는 어느 한 영상을 보면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영상들이 알고리즘으로 계속 따라오기 때문에 세상 전부가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세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 매우 무서운 선동의 시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난 군중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법치주의 국가이고, 로마 정부가 통치하는 여러 나라들을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로마제국의 또 하나의 위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군중심리와 선동에 휩쓸리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 한 사람을 보호하고, 그가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것을 모를 때에도 무고하게 희생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면서 해명할 기회를 주는 법치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이 선동에 휩싸여 흥분하고 있는데도 청중들에게조차 정중하고, 예의 있고, 품위 있는 언어로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은 선동을 잠잠하게 하는 감동적인 연설이었습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바울의 연설이 선동적인 이들의 말과 달리 감동을 주는 메시지였던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 내용이 자신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장부터 바울의 신분이 죄수로 바뀝니다. <사도행전> 26장까지 계속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 다닙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로서 여섯 번 자기 해명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두 번, 가이사랴에서 네 번 해명을 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어느 학자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라는 말에 빗대서 ‘죄수역정(The Prisoner’s Progress)’이라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죄수로서 보낸 여정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억울함에서 벗어날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내면과 인격은 억울한 일을 당해 보면 나타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증오가 일어나고, 복수심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느 유튜버가 “유기성, 이재훈 변절자”라고 하는 말을 듣고 흥분해서 유기성 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유기성 목사님이 너무나 평온하게 “그동안 제가 과분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욕도 좀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데, 저는 막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해 봐야 인격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해명의 기회를 얻었으면 자신이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시간을 사용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상황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하는데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보여준 감동입니다.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하고, 죄수의 신분에 있을 때조차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랬을까요? 선동하는 이들은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둡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 둘째,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유대인에 대한 변절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한 변혁(trans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2장 전체에서 고백하는 내용의 핵심은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그분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런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난 믿지 않았는데 내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의 비전과 야망, 꿈을 청취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제거하는 일이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에게 합당하고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변혁을 경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빛이 임해서 그의 눈이 잠시 보지 못했지만, 그 빛이 그의 영혼을 파고 들어서 강렬한 하나님 영광의 빛을 비춤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고전 4:6). 빛을 통해서 잠시나마 눈이 멀게 됐지만, 그의 영혼이 빛을 보게 된 것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다고 목표와 비전을 설정해서 노력하는 것도 일부 변화를 만듭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변혁’이라는 더 강렬한 단어를 쓸 수 있습니다. 단지 체인지(change)가 아니라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믿음은 내 머리 속에 어떤 지식을 더 넣는 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내 머릿속에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교만하고, 자신의 생각에 더 갇혀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내 지식을 바꿉니다. 새롭게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많은 성경 지식이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랬고, 율법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어떻게 변혁이 됐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 셋째,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의 비전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비전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부르셨다는 부르심, 그 부르심에 사로잡힐 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밀히 말해서 ‘비전’보다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든 비전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의 내용을 아나니아에게 가서 듣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을 보면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거라 거기서 내가 할 일을 모두 일러줄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직접 알려 주실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아나니아에게 가서 듣게 했을까요? 사도 바울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부르심을 가지고 활동했을 때 누군가 “맞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다”라고 대변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첫 번째 사람이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그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부르심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그 부르심을 듣게 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을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 하느냐?”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매우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왜 나를 핍박 하였느냐?”고 하셨을 때 사도 바울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핍박받는 성도들과 함께 핍박받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분이 우리의 머리시며,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써 한 몸이라는 바울의 교회론이 나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인데 예수님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핍박이 곧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이 엎드려졌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변혁을 경험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에 대하여 눈이 밝은 사람이 되는 변화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사도행전> 21장 후반부터 22장 전체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이 해명의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해명할 기회에서 자신의 변명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그분이 나를 어떻게 만나 주셨으며,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그래서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선동의 시대, 선동에 끌려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동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아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무엇이 따라야 할 것이고, 무엇이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그 분별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입니다. 이 한 가지 기준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따라가야 할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악법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를 주창하신 부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님이 온누리교회 모임에서 말씀하시면서 눈물 흘리는 진심 어린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대한민국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는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함께 참여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선동이 아닌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10-19 제1512호
[주일강단]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마태복음> 28:16~20 /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머릿돌에 새겨 넣은 <마태복음> 28장 16~20절 말씀은 예수님의 ‘대위임령’, 혹은 ‘지상 명령’입니다. 온누리교회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39년을 달려왔습니다. “여러분 선교 포기하지 맙시다”라고 외치셨던 하용조 목사님을 기억하면서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다 시 한번 이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4차 로잔대회는 전 세계 교회 축소판을 보는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의 역사적 의미는 200개가 넘는 나라에서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한 것입니다. 유명 신학교, 선교단체 대표들, 목회자들, 지도자들이 모두 일주일을 함께 보내며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강사로 세운 사람들만 유명한 게 아닙니다. 모든 분들이 강의 하고,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지만, 서로 경청하고 대화하는 그 시간이 소중합니다. 200개국에서 5,394명이 현장에 참여 했고, 온라인으로만 2천여 명, 생중계로 함께 시청한 분이 161개국 3만 여 명, 자원봉사자 2,094명, 매일 중보기도집회에 참여한 분들이 연 6,888명입니다. 가장 많은 대표자들, 중보기도자들, 생중계로 함께 참여한 분들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 대회에서 우리는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 선교단체, 전문인 선교 동역자들과 함께 이 명령에 순종하기로 헌신하고,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를 논의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성취되고 있다! 첫째,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해 이 명령이 전 세계에서 계속 성취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 같지만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했던 그 역사가 지금도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11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단 11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11명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고작 11명에게 주어진 이 명령이 예수님 말씀대로 모든 족속으로 퍼져 나갔고, 지금도 계속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부흥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한 <사도행전>의 부흥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전 세계 교회를 통해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부흥의 역사에 대한 많은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지도자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제목으로 아프리카 전역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간증했습니다. 말레이시아 감리교 지도자 화융 박사는 보르네오 정글에서 일어난 부흥을 발표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은 알코올, 폭력, 질병으로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이 마을과 다른 부족과의 교류를 차단할 정도였습니다. 그 마을에 C&MA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고, 그 결과 1973~74년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화해하고, 점차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되는 이들이 일어났고, 많은 이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1984~86년 귀한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쌀과 물이 밀가루와 기름으로 변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많은 가난한 자가 먹게 되었고, 하늘에 거대한 불덩이들이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사진까지 보여준 장면입니다. 영적 은사들이 나타났고,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급속도로 번졌습니다. 공식적 통계에 의하면 지난 50년 동안 100만 명가량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믿는 이들이 증가한다! 둘째,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런 지역에서 믿는 이들이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가 계속될 뿐만 아니라 핍박의 역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OMF 국제대표였던 패트릭 펑 선교사는 이름 없는 선교사들을 통해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를 발표했습니다. 그가 런던대학교에서 선교사들의 기록을 모아 놓은 수천 개의 문서를 보는데, 직원이 “여기 문서 하나가 중국 사람을 위해 바쳐진 한 생명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이름 없는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잊힌 이름들, 이름 없는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패트릭 펑 선교사님가 “그들은 잊히기 위해 살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기억되도록 하였다”고 말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전 세계에 지금도 이름 없이 순교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이란, 파키스탄, 중국입니다. 이란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이 1850~60년대인데, 전혀 믿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아주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1996년 7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이 모두 순교했습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을 대표할 수 있는 7명이 모두 순교한 그때부터 이란에 복음이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내용을 발표한 분이 파르시드 파티라는 이란의 목회자입니다. 그는 2010년 열린 3차 로잔대회에 이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습니다. 3차 로잔대회 참석하고 65일 뒤 감옥에 갇혔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협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5년 징역형을 살았습니다. 2015년 그가 출소한 이후 이란에서 믿는 이들이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이란 혁명이 일어난 때가 1974년이었는데, 그때 이란의 그리스도인 숫자가 5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5년 만에 그분이 개척한 교회도 20개 도시에서 48개나 됩니다. 이번 대회에 중국에서 100여 명의 지도자들이 공안의 눈을 피해서 왔습니다. 3차대회 때는 참석을 희망했던 200명을 전부 가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엄청난 박해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로잔대회가 적색 단체처럼 분류되어서 참석을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피해서 1백여 명이 왔습니다. 중국 목회자 모임에 제가 참석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번 로잔대회에 와 있는 동안 공안이 중국 집을 압수수색 하고 가족들에게 “당신 남편은 중국에 돌아오는 즉시 구속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갔다고 합니다. 핍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발표하는 분은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도 핍박이 매우 심합니다. 테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 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교회가 쇠퇴하는 지역은 아무런 고난과 핍박이 없는 곳이고, 교회가 성장하는 곳은 고난과 핍박이 있는 지역입니다. 순종해야 할 책임은 모든 성도에게 있다! 셋째,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할 책임은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위기는 이 명령을 소수의 선교사, 소수의 사역자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을 때 찾아왔습니다. 이 명령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졌습니다. 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유람선이 있고, 군함이 있습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는 소수의 사역자들만 일하고 나머지는 관광하듯 구경합니다. 그러나 군함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 일이 있습니다. 모두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발표된 서울선언문 43항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교회는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대위임령은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순종을 가르침으로써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뜻에 동참하도록 모든 신자를 모든 곳으로 초대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임재(Christ-filled presence), 그리스도 중심의 선포(Christ-centered proclamation),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실천(Christlike practice)을 통해 이를 수행한다(마 28:18~20)” 이번 로잔대회의 중요한 단어 중에 ‘다중심적 선교’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 지역이 나오는데, 전 세계를 압축해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지역을 동시다발적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그곳에서 선교사가 될 때 다중심적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선교사로 존재할 때 다중심적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 세계 기독교 지형이 바뀌었습니다. 50~60년 전만 해도 대다수는 서구 유럽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구 유럽과 북미가 30%정도로 줄었고, 나머지 70%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지역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제는 서구에서 비서구로 가는 선교사 개념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모든 지역에서, 모든 성도가 선교의 사명을 다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넷째,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 포함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빛이 아닙니다.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전도의 우선순위를 잃어버리고 사회적 책임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의 모든 선한 삶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로잔대회 주제가 교회가 다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Declare), 그 다음에 삶으로 나타내자는 것입니다(Display). 대위임령에서도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 삼고 세례를 준다는 것은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모든 것’은 산상수훈의 교훈을 포함해서 세상 속에서 선한 행실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도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할 때 끊임없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로마서> 15장에서는 서바나(스페인)로 가고자 했습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먼저 거기로 가야겠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만 세운 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선교사역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님들이 교회 사역만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만 드리고, 말씀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함께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빨리 변화된 것입니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입니다. 복음 전파의 역사를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로잔운동이 주장하고 있고,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 강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게 아닙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온누리교회에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나타난다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에 헌신해 온 믿음의 선배들 덕분입니다. 온누리교회는 바로 이 명령에 단순하게 순종하면 됩니다. 이것이 목회 철학이고, 목회 방법이고,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위임 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온누리교회의 존재 목적이요, 비전이요, 목회 철학이요, 모든 것입니다. 이 한 가지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10-12 제1511호
[주일강단] 전심으로 주일강단 전심으로 신 6:5 / 강부호 목사 성경에 종종 ‘전심으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우리말성경에서는 주로 ‘온 마음을 다해’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전심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을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찾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시 119:2).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세상을 두루 볼 수 있어서 그 마음이 온전히 그분께 향하는 사람들을 힘 있게 하십니다. 왕은 이번 일에서 어리석게 행했으니 이제 전쟁에 휘말릴 것입니다”(대하 16:9). “그 마음이 온전한 상태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를 하나님이 힘 있게 해 주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심으로 한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게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신 6:5). 전심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대할 것이냐가 기초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를 순서대로 따지면 “하나님을 사랑해라.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단순히 감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모든 행동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모두 동원된 표현입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힘을 다해서’인 것 같습니다. ‘힘’에는 육체적인 힘도 있지만,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원도 포함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휘, 권한 등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이 찾을 것이며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마 7:7~8). 한 번 구하고 중지하라는 게 아닙니다. 꾸준히 간절하게 진행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찾으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발견하게 됩니다. ‘두드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두드리면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는 한두 번 해보다가 안 되면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중단하지 아니하고 될 때까지 하라고 합니다. 될 때까지 추구해서 장벽을 마침내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실 때까지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라! “그러나 거기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고 너희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찾으면 너희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신 4:29).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갈증은 귀한 것입니다. 그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동원하고, 온 영혼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기도할 때도 마음을 쏟아 부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과 영혼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의지도, 생각도, 감정도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것과 생각을 모두 동원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8~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 말씀이 내게서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전방위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두루 다니시면서 모두 보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사람들을 힘 있게 하십니다. “너희는 가서”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전심을 쏟아 붓지 않았던 것,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끝까지 하지 않고 중도 포기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삼아’를 위해서 문화적인 극복과 관심을 갖기 위해서도 전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사도행전> 1장 8절의 핵심적인 내용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입니다. 증인이 될 힘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 가운데 어떤 모양으로든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모습이 드러나기까지 성령님을 존중하고, 의지하며,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담대한 증인은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내 삶에서 나타날 때까지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또 우리는 함께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협력을 원하면 자신들은 잊히고, 그리스도만 기억되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다는 태도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마음과 결단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이 드러날 것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신앙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 “너는 내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는 이 명령들을 네 마음에 새겨 너희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되 너희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 그들에게 말해 주라”(신 6:5~7). 전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쏟아야 할 또 다른 면은 자녀를 교육하고, 다음 세대 리더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차세대 부서에도 가고,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알려 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익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허점이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설 때 그분이 힘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구하면 그분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일에 관심 없는 태도가 내게 있다면 돌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일은 복음 증거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관심 없는 마음을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역사하시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면 사용하시가 매우 힘듭니다. 이것을 돌이키지 않으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면 죄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님 일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의 협력을 그분이 기뻐하십니다. 평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일에 관심이 가득해질 때 그분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이름과 관련된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러나 예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법을 지키는 데는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떼어 다른 나라에 넘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국경을 공격했는데”(왕하 10:31~32). 여로보암이 죄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을 쏟아 붓지 못하면 그분이 주셨던 영역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들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여호와께 경배하고 명세하지만 말감에게도 맹세하고 있는 사람들과”(슥 1:5).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마음이 아닙니다. 전심도 아닙니다.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뜻을 묻지도 않는 사람들을 없애 버리겠다”(6절). 여러분에게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려는 그 마음이 불일 듯 생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여러분 삶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를 축복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10-05 제1510호
[주일강단]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주일강단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누가복음> 17:15~19 / 박종길 목사 감사는 참 아름답고, 감사는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감사는 상황과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조건적인 감사가 일시적인 기쁨을 준다면, 무조건적인 믿음의 감사는 우리의 신앙에 영원한 기쁨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큰 감사입니다. 감사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삶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구원의 진리에 굳건히 서고, 복음으로 영생을 얻고,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귀한 삶을 사는 비결이 감사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감사에 대한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표현할 때 진정한 감사 첫째, 표현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5~16절). 오늘 본문에 열 명의 한센병 환자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데, 한 명만 돌아와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자기를 고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낫게 해 주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합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높이며, 진정으로 감사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를 표현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자그만 것이라도 감사를 표현할 때 더 큰 감사가 열립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한센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했는데, 이 감사로 인해서 영혼까지 구원받는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사는 표현될 때 진정한 감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감사하는 것에 서툴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조금 어색해 합니다. 문화적인 이유도 있고, 감사를 감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함도 있습니다. 감사를 감사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졌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롬 1:21). 감사하지 않는 마음의 깊은 뿌리에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함, 어리석음, 죄가 있습니다. 감사가 표현될 때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를 표현해야 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행복하고, 잘 되고, 믿음 가운데 승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고,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모든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게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감사하는 게 우리를 승리하게 하고, 감사하는 게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감사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거나 놓치면 불평과 불만이 찾아옵니다. 감사를 잃어버릴 때 우리는 남과 비교하고, 그 비교 속에서 교만하든지 아니면 열등감에 괴로워합니다. 절망하고, 분노와 시기, 질투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국의 행복을 빼앗깁니다. 감사를 표현하고 고백하십시오. 감사가 사랑의 선물로 나눠지는 것이 우리를 행복의 잔치로 초대하는 초청장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고백하고, 내가 받은 사랑과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현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감사가 감사를 낳고, 더 큰 감사를 낳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 감사가 축복의 자리, 행복의 잔치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감사를 선택할 때 형통의 문이 열린다 둘째, 감사를 선택할 때 형통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열 명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방 사람 말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되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17~18절). 감사는 선택입니다. 열 명의 한센병자가 나음을 얻었는데, 감사를 표현하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한 사람은 한 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불평과 원망, 섭섭함과 분노, 좌절과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감사와 기쁨, 용기와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감사는 선택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나 환경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상황과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조건으로 얻어지는 행복이라기보다 그 상황과 형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입니다. 어떻게 묵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얻어지는 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슬프고 아프고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그분의 주권이 나와 함께함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나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이성, 판단보다 뛰어난 하나님을 믿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감사를 택할 때 형통의 문이 열리고,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했고, 풍랑이 이는 바다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고, 그 물고기 뱃속에 갇혀 생명을 유지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나 내가 감사의 노래로 주께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내가 서원한 것을 내가 잘 지킬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욘 2:9). 요나가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징계를 받았지만, “나는 감사의 노래로 주님께 나가겠습니다. 내가 서원한 것을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라고 기도하며 믿음을 선택하고, 감사를 고백합니다. 여러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처음에는 받은 것을 감사하지만, 점점 상황과 환경에 관계없는 감사로 나아가게 되고, 그 감사가 우리를 더 큰 형통의 문, 구원의 문으로 인도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 성숙은 감사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결코 감사하지 않습니다. 감사한다면 사단의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감사가 우리의 어두운 상황에 빛을 비춰 줍니다. 감사는 조건으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선택할 때 더 큰 형통의 문이 열립니다.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역경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불행을 끝내는 도구일 뿐 아니라 더 큰 감사의 문을 여는 형통의 도구입니다. 감사는 상황을 뛰어넘는 마중물 셋째, 감사는 상황을 뛰어넘는 마중물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했다’”(19절).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를 선택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이 구원받는 축복을 얻습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와 축복을 여는 열쇠이자, 마중물입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마중물입니다. 마중물은 적은 양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얻는 물이 엄청납니다. 끝이 없습니다. 감사가 이와 같습니다. 감사는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육체적인 병을 치유 받는 것 이상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는 큰 축복을 얻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기가 겪었던 어려운 상황들을 고백합니다. 매를 셀 수 없이 맞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39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나 있었고, 로마 사람들에게 매질 당한 것이 세 차례나 있었고, 돌에 맞은 것이 한 차례였습니다. 그는 망망대해에 빠져 꼬박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해마다 고된 여행을 하면서 여러 개 강을 건넜고, 강도들을 피해 다니고, 벗들과 다투고, 적들과도 싸웠습니다. 도시에서도 위험에 처하고, 시골에서도 위험에 처하고,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의 위험과 폭풍이 이는 바다의 위험도 겪었습니다. 형제로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했습니다. 단조롭고 고된 일, 중노동을 했고, 길고 외로운 밤을 여러 차례 지내고, 식사도 자주 거르고, 추위에도 상하고, 헐벗은 채 비바람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게 아니라 그 어려움조차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고 고백하고, 자신의 약함마저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위해 여러분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 3: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감사가 우리를 형통의 문으로, 축복의 문으로, 행복의 잔치로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하는 마중물입니다.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하십시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감사로 닫힌 문을 열고, 감사를 축복의 마중물 삼아 메마른 삶과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로 가득 채우십시오. 감사는 표현할 때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감사를 선택할 때 형통의 문이 열리게 합니다. 감사는 상황을 뛰어넘는 마중물입니다. 감사로 무한한 축복의 근원이고,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넘쳐흐르게 하고, 막혀 있는 문이 활짝 열리게 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10-06 제1509호
[CGN] 복음 들고 세계로 향하는 CGN! 복음 들고 세계로 향하는 CGN! 해외 지사 직원들의 고백 “내가 CGN을 사랑하는 이유”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 25개 협업 갭(GAP) 중에서 큰 관심을 받은 분야가 바로 ‘디지털’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를 두고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제는 굳이 선교지에 가지 않아도 디지털이라는 도구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CGN의 역할과 섬김이 더욱 귀하고, 필요하다. CGN은 한국 본사 외에 미국, 일본,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프랑스 등지에 6개 지사를 두고 있다. CGN 해외 지사의 활약과 섬김을 통해 복음이 열방으로 퍼져나가고,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멋진 일을 해내고 있는 CGN 해외 지사 직원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있다. “CGN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 김현준 기자 khj@onnuri.org 핌팡아 아룬쨍와타나 자매(HR 담당, 후원금 및 지출입 관리, 2013년 입사)는 CGN 태국 지사에서 일한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CGN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고백이 날마다 떠나지 않는다. “내 피를 뽑아보면 빨간색이 아니라 주황색(CGN 로고 색)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녀가 CGN을 이토록 사랑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CGN에서 일하는 것이 곧 축복”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낼 때 태국에서 CGN이 더 많이 알려지고, 후원자가 늘었습니다. ‘교회가 있는데 크리스천 미디어가 꼭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미디어 선교의 중요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 태국의 크리스천 미디어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CGN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CGN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 소중한 일에 보탬이 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모릅니다.” 핌팡아 자매가 요즘 뜨겁게 기도하는 제목이 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CGN 태국 지사 직원 대부분이 교회 사역자입니다. 교회와 CGN을 함께 섬기고 있는데 사역에 필요한 새 힘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해서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 해주십시오. 저희는 하나님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하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합니다. CGN 태국 지사 모든 직원이 하나님 안에서 굳건하고, 서로 더욱 친밀해지기를,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대만 지사에서 일하는 양문화 자매(후원 업무, 2018년 입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큰 비전이 있다. 대만 지사가 국경을 넘어 중국과 전 세계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쓰임을 받는 것이다. “CGN 대만 지사는 신앙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유로운 콘텐츠 시청이 제한된 중국 본토에 복음을 보내는 굉장히 중요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감시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CGN 앱으로 복음 콘텐츠를 접하는 크리스천들이 늘고 있습니다. CGN 대만 지사는 대만과 중국이 복음화될 때까지 이 비전을 품고 전진할 것입니다.” 양문화 자매가 그 힘들고 어렵다는 CGN 대만 지사에 일하는 게 행복이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있다. “저처럼 작고 연약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에 참여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CGN 대만 지사 직원들에게도 정말 감사합니다. CGN 대만 지사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 흔한 질투나 건강하지 않은 비판이 없습니다. 믿음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CGN 대만 지사 직원들에게는 서로 돕고 격려하는 일이 당연합니다. 매일 아침 함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영적 생활도 누리고 있습니다.” CGN 후원자들에게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후원자들의 기도와 후원 덕분에 CGN이 멈추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후원으로만 방송국을 운영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후원자가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그 어려운 일을 CGN이 해내고 있습니다. 모두 후원자님들 덕분입니다. CGN 후원자들은 모두 미디어 선교사입니다. 여러분이 미디어 선교에 헌신한 덕분에 CGN이 전 세계에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CGN이 미국에 꼭 필요한 이유 미주 지사는 CGN의 첫 해외 지사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 CGN이 갈 필요가 있을까 여길 수도 있는데,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지만, 복음에서 가장 빠르게 멀어지는 나라다. 미주 지사에서 일하는 주재후 형제(제작, 2024년 입사)가 미국에 왜 CGN이 필요한지를 설명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지만 1990년대 이후 기독교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더욱 급격하게 성도들이 줄고 있습니다. 세속화, 다원주의, 젊은 세대의 탈종교화, 무교와 무종파 인구 증가 등이 원인입니다. 지금 미국은 재복음화가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미국의 중심 역할을 다시 하도록 회복하는 게 매우 시급합니다. 21세기 미디어 선교는 미국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데 아주 탁월한 도구입니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SNS) 등 다양한 매체로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발전하면서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CGN이 미국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재후 형제는 입사한 지 8개월 된 신입직원이다. 하지만 CGN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에 제가 쓰임 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CGN에서 사역하면서 정말 큰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때로는 인력 부족과 과도한 업무에 지치는 순간도 있지만, 그런 때일수록 서로가 더욱 협력하면서 더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CGN 일본 지사, 하나님이 하실 일 기대 일본은 크리스천 인구가 1%도 되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의 고유한 정서적 특성이 전도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CGN 일본 지사에서 일하는 카도타 나오미 자매(후원·홍보업무 담당, 2012년 입사)가 “미디어야말로 일본 선교에 가장 적합한 도구”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일본 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독한 사회’입니다. 청년뿐만 아니라 노인층까지 모든 연령층이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타인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어려워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미디어를 통한 선교방식이 그 어떤 도구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은둔형 외톨이였던 사람이 유튜브에서 CGN의 ‘모야모야아웃(고밍아웃)’이라는 고민상담 프로그램을 보고 용기 내 동네 교회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CGN 일본 지사 직원들이 그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울수록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기도와 인내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과 기쁨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남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고, 열매도 맺었습니다. 일본은 어떤 일을 강하게 부탁하는 게 어려운 문화를 가진 사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교회에게 “함께 미디어 선교하고, 복음 전합시다! 후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일이 여전히 긴장되고 큰 도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미디어 선교사(후원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년 전 200명이던 후원자가 800명으로 늘었었습니다. 미디어 선교에 참여하는 후원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CGN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기대됩니다.”
2024-10-12 제1511호
[제4차 로잔대회]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 9월 22~28일 송도컨벤시아서‘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 200여 개국에서 5,300여 명 참석, 영향력 및 아이디어 공유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이하 ‘제4차 로잔대회’)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다. 제4차 로잔대회가 지난 9월 22~28일 송도컨벤시아에서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를 주제로 막 올랐다.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 목회자, 신학자, 기업가, 정치인, NGO 활동가 등 5,300여 명이 참석했다. 온라인 참가자 5천여 명, 자원봉사자 2천여 명, 중보기도자 4천여 명도 대회에 함께했다. 제4차 로잔대회 참석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와 세계 복음화 방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강력하게 선포했다. 그 아름다운 선포를 <서울선언문>에 담아 발표했다. 제4차 로잔대회 개막을 하루 앞둔 9월 21일(토)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셈타워 아셈볼룸에서 ‘지도자 리셉션’이 열렸다. 국제로잔위원회 및 한국로잔위원회 지도자, 정계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블러썸 챔버의 오프닝 연주를 시작으로 로잔대회 소개 영상 상영,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 이재훈 목사(제4차 로잔대회 공동조직 위원장)의 환영사, 마이클 오 총재(Michael Oh, 국제로잔 총재) 메시지, 내빈 축사 등이 이어졌다. 축사는 김진표 의원(전 국회의장), 황효진 부시장(인천시 정무 부시장), 장종현 목사(한국교회총연합회장), 라메즈 아탈라(전 로잔운동 부총회장), 더그 버셀(전 로잔운동 대표), 마이클 캐시디(전 로잔운동 명예회장) 등이 했다. 9월 22~28일 4차 로잔대회 개회예배부터 폐회예배까지 9월 22일(일) 오후 6시 30분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제4차 로잔대회 개회예배를 드렸다. 개회예배는 한국 워십팀 아이자야61(ISAIAH6TYONE)과 안무팀의 연합공연이 포문을 열었다. 사회는 사이먼 서우(Indigitous 공동설립자)와 델핀 판폰(Me4Real International CEO)이 봤다. 정계 인사들의 환영사도 이어졌다. 용호성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 윤석열 대통령 축사를 대독하고, 유정복 인천시장이 환영 인사를 했다. 이어서 이재훈 목사의 개회사, 마이클 오 총재의 제4차 로잔대회 소개, 유리 크리엘(Jurie Kriel)과 유지영 자매의 ‘협력 행동’(Collaborative Action)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9월 23일(월)부터 27일(금)까지 제4차 로잔대회의 주요 프로그램이 열렸다. 매일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성령강림’, ‘선교공동체’, ‘핍박과 선교’, ‘일터사역과 세계선교’, ‘섬기는 리더십’, ‘땅끝까지 왕되신 예수를 전하자’를 일별 주제로 정하고 성경 강해, 주제 강의, 소그룹 토의, 12개 지역별 모임, 25개 이슈트랙 모임, 저녁 집회 등을 했다<관련 기사 2-4면>. 23일(월) 주제는 ‘성령 강림’이었다. 페미 아델레예(Femi Adelye) 성경 강해, 빌리 윌슨(Billy Wilson) 박사, 크와베나 아사모아 기아두(Kwabena Asamioah Gyadu) 목사, 화융(Hwa yung) 감독, 사라 브뤼엘(Sarah Bruel) 선교사 주제 강의, 지역별 모임, 갭스(GAPs) 모임, 캐서린 헤이호(Katharinee Hayhoe) 교수,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Ruth Padilla Deborst) 박사, 본 로버츠(Vaughan Roverts) 목사 저녁 집회 발표 등이 이어졌다. 24일(화) 주제는 ‘선교공동체’였다. 성경 강해, 주제 강의, 소그룹 토의, 지역별 모임, 갭스 모임, 저녁 집회, 로잔운동 50주년 기념식 등이 진행됐다. 안네 자키(Anne Zaki) 박사, 에프라임 텐데로(Efraim M. Tendero) 감독, 데니스 마가렛 톰슨(Denise Margaret Thompson) 교수, 데일 스티븐슨(Dale Stephenson) 목사, 마이클 오(Michael Oh) 총재 등이 강의했다. 25일(수)은 ‘핍박과 선교’가 주제였다. 패트릭 펑(Patrick Fung) 목사 성경 강해, 바부 베르게스(Babu Verghese) 박사, 파르시드 파시(Farshid Fathi) 목사, 사라(Sara Akhavan Nielsen) 자매가 주제 강의를 했다. 소그룹 토의, 갭스 모임, 지역별 모임, 저녁 집회 ‘성찰’ 등이 이어졌다. 김병연 교수(서울대학교)가 주제 강의하고, 기드온 파라 말람(Gideon Para Mallam) 목사, 리아드(Riad Kassis) 형제가 중동과 사하라 이남 지역 박해 소식을 전했다. 26일(목)에는 ‘일터사역과 세계선교’를 주제로 성경 강해, 찬양집회, 주제 강의, 소그룹 토의, 갭스 모임, 저녁 집회 등을 했다. 줄리아 가샤겐(Julia Garschagen) 소장 성경 강해, 밥 돌(Bob Doll) 의장, 마크 비스바삼(Mark Visvasam), 소나 카잔지안(Sona Kazanjian), 맥 피어(Mac Pier)가 오전 주제 강의를 했다. 조셉 바이자얌(Joseph Vijayam, 로잔운동 일터 사역 담당자)은 ‘로잔 일터 사역 네트워크’를 주제로 발표했다. 저녁 집회에서는 ‘한국 교회의 열두 돌’을 주제로 한국 기독교 역사와 부흥을 소개했다. 27일(금) 주제는 '섬기는 리더십'이었다. 성경 강해, 주제 발표, 패널 토의, 청년리더모임(YLT, Younger Leaders Team) 소개 및 임명식, 갭스 모임, 저녁 집회 '화해'가 이어졌다. 성경 강해는 필립 라이켄(Philip Ryken) 박사, 패널 토의는 나나 야 오페이 아우쿠(Nana Yaw Offei Awuku)와 올레 매그너스 울라프 스루드(Ole Magnus Olafsrud)가 진행했다. 저녁 집회에서는 루비(Ruby)가 '성적 착취'를 주제로 발표했다. 제4차 로잔대회는 9월 28일(토) 폐회예배를 마지막으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성경 강해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을 주제로 호날두 리도리오(Ronaldo Lidorio) 목사가 했다. 주제 강의에서는 릭 워렌(Rick Warren), 조은아 박사, 미셀 켄모니(Michel Kenmogne) 박사, 알란 마타모로스(Allan Matamoros)가 메시지를 전했다. 마이클 오 총재 발표, 서약식, 성찬식 등도 이어졌다. 한편 제4차 로잔대회를 위한 중보기도가 대회 기간 내내 인천온누리교회에서 이어졌다. 중보기도자 4천여 명이 제4차 로잔대회와 세계 복음화, 전 세계 교회를 위해 부르짖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024-10-06 제1510호
[제4차 로잔대회] 23일(월) / 인종, 나이, 성별 뛰어 넘어 성령의 임재로 하나 되다! 제4차 서울-인천 로잔대회, 그 현장 속으로! 23일(월), ‘성령강림’ 인종, 나이, 성별 뛰어넘어 성령의 임재로 하나 되다! 제4차 로잔대회 첫째 날 주제는 ‘성령강림’이었다. 9월 23일(월) 오전 9시, 인천 송도컨벤시아 메인홀에 인종과 성별, 나이를 뛰어넘어 성령강림을 간구하는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5천여 명이 집결했다. 첫날 성경 강해는 페미 아델레예(Femi Adelye) 목사가 ‘성령 강림’을 주제로 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늘 기도에 힘쓰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함께하심을 믿으며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자”고 권면했다. 그룹별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 주제는 ‘오늘날 여러분의 지역에서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선교의 다양한 상황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해 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등이었다. 오전 주제 강의에서는 ‘부흥’을 주제로 빌리 윌슨(PFW 회장) 박사, 크와베나 아사모아 기아두 목사, 화융 감독, 사라 브뤼엘 선교사가 메시지를 전했다. 라트비아 교회와 오세아니아 교회 성도들의 간증 영상도 상영했다. 빌리 윌슨 박사는 ‘부흥 운동’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구원에 관한 확신과 핍박에 대한 유연성,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로 연합을 이룰 때 전 세계에 대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와베나 아사모아 기아두 목사는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를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성령님을 뜻한다”면서 “성령님이 함께하심을 믿을 때 권능이 부여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융 감독은 ‘보루네오 정글의 부흥’을 주제로 말레이시아에서 경험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증했다. 그는 “1928년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주에 선교사 3명이 복음을 전파했는데, 당시 약 3~4천 명으로 구성된 소수 부족 룬바왕(Lun Bawang) 구성원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부흥이 일어났다”고 간증했다. 사라 브뤼엘 선교사는 ‘회개를 향한 부르심, 부흥을 위한 회개’를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200여 개국에서 모인 우리가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회개할 때 부흥의 걸림돌이 제거 되고, 부흥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망했다. 그리고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참석자들도 하나둘씩 땅에 엎드렸다. 5천여 현장참가자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께 자신의 죄, 민족과 교회의 죄를 회개했다.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깊은 감동과 회복의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의 모습에서 강한 성령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갭스(GAPs) 모임이 이어졌다. 갭스 모임은 <대위임령보고서>에 담긴 과제 중에서 25개 주제를 선별해서 소그룹 토론을 했다. 주제는 세계 고령화 인구, 다음세대 전도, 이슬람, 세속주의, 일터사역 등이었다. 오후 6시 30분에는 ‘회개’를 주제로 저녁 집회가 막 올랐다. 저녁 집회에서는 캐서린 헤이호( 교수,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박사, 본 로버츠 목사가 메시지를 전했다. 캐서린 헤이호 교수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생명체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면서 “기후 위기를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창조세계를 돌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루스 파디야 데보르스트 박사는 ‘정의’를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고, 찾고, 기도하며 실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본 로버츠 목사는 ‘성과 정체성’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조정하고, 회개에 대해 말하지 않는 수정주의 교회들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적 갈등을 겪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인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속을 가르치고, 회개와 변화의 중요성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녁 집회에서는 한국 워십팀 ‘아이자야61’(ISAIAH6TYONE)이 찬양을 인도했다. 그런데 음향 문제로 집회가 잠시 멈췄다. 달아오른 열기가 꺼질 것 같았는데 그 순간 참석자들이 손을 들고 무반주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부둥켜 안으며 축복하며 기도했다. 바로 그 장면이 ‘성령 강림’ 그 자체였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시 시작된 찬양은 더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2024-10-06 제1510호
[제4차 로잔대회] 24일(화) /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우리는 선교공동체!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 그 현장 속으로! 24일(화), ‘선교공동체’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우리는 모두 선교공동체! 제4차 로잔대회 둘째 날 아침,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제 받은 은혜와 감격을 나누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집회로 피곤할 법도 한데, 누구 하나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직 기쁨과 기대가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로잔대회 둘째 날 주제 ‘선교공동체’라는 단어가 번뜩 떠올랐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꿈이 선교이고, 그들이 모인 곳이 바로 선교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오전 성경 강해에서는 안네 자키(Anne Zaki) 박사(카이로복음주의신학교 교수)가 ‘선교공동체’를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모든 교회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평화롭고 정의로운 선교를 이루어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룹별 토론이 이어졌다. ‘선교공동체’를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지 그 실제적인 방법을 심도 있게 나눴다.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급진적인 제자도를 특징으로 하는 선교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당신의 교회 생활과 선교 계획에서 어떻게 더 우선순위를 두고 노력할 수 있을까요?’, ‘건강한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는 내적 장애물들이 여러분의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성령께서 이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하도록 어떻게 도우셨나요?’ 등이 주제였다. 오전 주제 강의도 ‘선교공동체’를 주제로 이어졌다. 에프라임 텐데로 감독, 데니스 마가렛 톰슨 교수, 데일 스티븐슨 목사가 강의했다. 에프라임 텐데로 감독은 ‘세계 선교공동체의 변화 촉구’를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대위임령을 완수하기 위해 ‘평신도 중심의 사역 주체 변화’,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제자도 사역’, ‘젊은 세대 세우기 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데니스 마가렛 톰슨 교수는 ‘Z세대와 정신 건강’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소속감을 중요하게 여기고, 협업 공간을 선호하고, 건강한 일과 생활의 균형을 원하고, 상사들의 멘토링, 진정성, 투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MZ세대들과 교회가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들이 믿음을 키워나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데일 스티븐슨 목사는 ‘개인의 제자도’를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예수님은 배운 것 없고, 평범하고, 믿음 없는 사람들을 제자 삼았다”면서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선교에 관한 25개 주제별 갭스(GAPs) 모임을 했다. 참가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선교 과업을 달성할 수 있을지 열띤 토론을 했다. ‘고령화 인구에 대한 구체적인 복음 전도 전략은 무엇인가?’(세계 고령화 인구), ‘다음세대를 위한 구체적인 복음전도 전략은 무엇인가?’(다음세대 전도), ‘무슬림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선교/교회, 조직/사역자가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가?’(이슬람), ‘성과 성별에 관한 현대의 대화는 어떻게 복음의 타당성을 형성하는가?’(성과 성별), ‘어떤 디지털 공동체가 미전도 공동체인가?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디지털 공동체) 등이 주제였다. 저녁집회에서는 로잔대회 5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참가자들이 하나 되어 로잔대회 50주년을 기념하고 그 기쁨을 공유하고자 각 나라 전통의상을 입었다. 저녁집회 1시간 전부터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참가자들이 로비에 모여 사진을 찍고,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천국 잔치가 따로 없었다. 저녁집회 주제는 ‘기쁨’이었다. 로잔대회 50주년 축하 영상 상영, 로잔대회 참가자들의 간증, 전(前) 로잔대회 기획자들의 대담, 축하 공연, 드라마팀의 특순, 마이클 오 목사의 설교, 로잔 리더십 격려 및 임명식, 찬양 콘서트 등이 이어졌다. 마이클 오 총재는 ‘미래’를 주제로 설교했다. 그는 “향후 50년 동안 전 세계 교회가 전략적이고 아름다운 협력을 이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지난 1~3차 로잔대회 참가 이후 삶이 바뀐 참가자들이 간증을 했다. 마리아는 “로잔대회 참가 이후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음세대를 위해 헌신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다”고 간증했다. 저녁집회의 하이라이트는 게티 밴드의 축하 공연과 찬양 콘서트였다. 게티 밴드의 멋진 연주에 흠뻑 젖은 참가자들이 발을 구르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며 축제를 즐겼다. 미리 준비한 고깔, 안경, 머리띠 등의 소품을 착용하고, 풍선과 폭죽을 터뜨리며 로잔대회 50주년을 축하했다. 찬양 콘서트에서는 참가자들이 옷이 흘러내리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처럼 온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참가자 몇몇은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 줄 기차를 만들어 대회장을 돌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뜨거운 천국 잔치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024-10-06 제1509호
[크리스천을 위한 회복시리즈] “복음(福音)을 통한 회복(回福)!” 크리스천을 위한 회복시리즈 1. 복음과 회복 2. ‘행복 QT’와 행복반 “복음(福音)을 통한 회복(回福)!” 성주명 장로, 성아나 권사가 이야기하는 회복 이 시대가 아프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프다. 이 시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통한 회복’이 필요하다. 여기, 40년 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한 회복을 선물하는 부부가 있다. 성주명 장로와 성아나 권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부부는 기독교 상담과 소그룹, 회복사역 ‘행복반’을 운영하며 하나님만이 치유와 회복을 주신다고 믿고, 날마다 그분께 나아가고 있다. 그들 부부가 이야기하는 복음을 통한 회복이 과연 무엇인지 물었다. / 김남원 부장, 홍하영 기자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심각한 심리적 문제에 대한 진단을 부탁드립니다. 성주명 장로(이하 성): “지금 세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인가에 쫓겨 달리는 세대’ 같습니다. 무언가에 홀려있고, 취해있습니다. 빠르게 반응하는데 깊이가 없고, 겉으로는 웃고 즐거워 보이는데 마음이 공허합니다. 자신과의 대면을 피하거나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된 자신(true self)을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또 가정이 깨져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제도이며, 우리에게 주신 언약(covenant)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로서 부부가 서로를 품고, 사랑하고 헌신하고, 성장을 도모하며 하나 되어야 합니다.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키워야 합니다.” 성아나 권사(이하 아나): “한국의 체면 문화가 유독 심합니다. 그래서 남과 비교해서 내가 더 잘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향으로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성공물질제일주의’라는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줬습니다. 잘못된 자녀 양육을 해왔습니다. 경쟁 위주 사회에서 자녀들이 더불어 사는 훈련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품을 발전시키면서 사회성이 부족해졌습니다. 전인격적인 성장 부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잘못 세워져 있어서 부모와 사회의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남과 비교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때 깊은 좌절과 우울, 울분과 분노가 쌓이고, 반사화적 행동이나 중독 등에 취약해졌습니다. 가족과도 사이가 가깝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한집에 살면서도 각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돈 버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자녀를 성공시키는 사람이고, 자녀는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가족들끼리의 놀이나 여행이 너무 부족합니다. 자녀들은 공부하느라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잃어버리고, 부부는 친밀감이 없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은퇴하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부부가 시간이 갈수록 남 같아집니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우울과 이혼, 자살이 더욱 증가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하나 됨과 기쁨,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고립만 남게 됩니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교육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일은 가정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부모가 이것을 방치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이뤄지기가 힘듭니다. 교회가 전부 해줄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으나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 삼는 일에는 소홀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일차 사명인데 말입니다.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영적으로 방치하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키우고, 좋은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하면 자녀들을 세상에 빼앗깁니다. 믿는 부모들이 회개해야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필사적으로 기도하며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특히 남성(아빠)들의 방황과 좌절, 고통이 무척 커 보입니다. 성: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교제권이 부족합니다. 특히 삶의 문제나 고민 등을 잘 나누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좋은 영향을 받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나 스승, 선배들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이라도 신앙에서 오는 진실성(integrity)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교제하거나 순이나 소그룹, 신우회 등에 참석해서 멘토들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또 남성들이 열심히 사는데, 삶의 목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적인 목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가족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헌신하고 돕는 자가 되어서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를 원한다는 등의 목표 설정과 정진이 필요합니다.” 아나: “한국 남성들이 방황과 좌절, 고통을 크게 경험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남성들을 부양자(bread winner)로만 보는 사회와 가정의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늦은 취업과 이른 은퇴로 인해 빨리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크고, 그 부담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이어집니다. 둘째, 일하는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직장 윤리(work ethic)나 일하는 환경이 아주 열악한 사회에서 과도한 경쟁과 여러 종류의 부당함, 언어폭력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셋째, 한국 남성에게 주어진 고정관념의 영향으로 친밀한 관계에 투자하지 않아서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가족관계에서도 소원함과 거리감이 있습니다. 여기에 실패감이 더해지면 중독, 외도 등의 문제로 쉽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이들에게 ‘회복’이 필요해 보입니다. 구체적인 회복의 원리와 키워드가 궁금합니다. 아나: “사람들은 마음이 힘들 때 회복을 원합니다. 그래서 회복은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의 회복이 관계의 회복을 가져오고, 관계가 회복되면 마음이 더 많이 회복되면서 상호작용합니다. 회복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회복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회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또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새 마음을 주십니다. 셋째, 회복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상처받고, 마음의 어두움을 경험하기에 회복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합니다.” 성: “회복의 키워드는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나는 어느 대학을 나오고, 어는 직장에 다니고, 연봉이 얼마이고,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남편이고, 내 부모가 누구인가가 내 정체성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바로 그 사람’입니다(고전 15:10). 동시에 ‘나는 용서 받은 자, 사랑받는 자이며,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 자체도 대단한 일인데 나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한 방울 피도 귀한데 무려 4리터 보혈을 나를 위해 아낌없이 쏟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나를 세세히 계획하시고, 신묘막측하게 지으시고(시 139:14), 내 이름을 그분의 손바닥에 기록하셨습니다(사49:16). 그분의 사랑이 <로마서> 8:32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진 사람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마 22:37~39).” ‘내가 회복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심리학, 상담학, 정신 건강 등 세상에서 활용하는 회복의 도구와 복음을 통한 회복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 “첫째,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육신의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망나니 아들이 집을 나갈 때 이미 용서하시고, 그 아들을 기다리시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마자 신도 신지 않고 뛰어나가 맞아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온 우주를 소유하시고,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마음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야단치실 때에도, 그 마음 깊숙이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간절히 있으십니다. 예수님을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살면서 상실감이나 거절감으로 힘들 때 우울이나 자기 연민으로 도망가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붙잡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신뢰로 그분께 나아가는 믿음의 실천을 계속해야 합니다.” 아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을 깊이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회복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른 방법들을 찾아다닙니다. 심리학, 상담학, 정신 건강 등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고, 삶을 아주 분주하게 만들어서 마음의 고통을 잊으면 회복될 거라고 막연히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일시적입니다. 근본적이지 못하고 표면적이어서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수많은 노력이 교회에서 이뤄졌는데 하나님은 왜 회복을 주시지 않는가 하면서 그분을 더 오해하고 원망합니다. 상담학, 심리학이나 정신 건강에서 추구하는 회복과 치유는 그 주체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주도하심을 배제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나를 의지하면 근본적인 회복과 치유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복음을 통한 회복은 그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치유와 회복을 주신다고 믿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2024-10-06 제1509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모든 영혼의 필요를 따라 복음 증거!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영혼의 필요를 따라 복음 증거!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 이재훈 위임목사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나왔다.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 23년 역사를 함축한 책이다. 2001년 40대 남성을 위한 맞춤전도집회 ‘비상구(EXIT)’’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47회 집회가 이어졌다. 그 수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은혜와 열매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 아름다운 축복의 역사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전도를 소망하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을 위한 메뉴얼이다. 다음은 이재훈 위임목사와의 일문일답. / 김현준, 홍하영 기자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맞춤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원과 지혜를 최대한 활용해서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1년부터 현재까지 총 47번의 맞춤전도집회를 개최했습니다. 바로 그 역사를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에 담았습니다. 23년 역사의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 사명과 비전, 방법과 원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더불어 온누리교회 맞춤전도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변화를 도모하고, 한국 교회가 맞춤전도를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한국 교회에 ‘맞춤전도집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맞춤전도집회를 기획하고 실행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1996년부터 2000년은 온누리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새가족이 급증했습니다. 새가족 중에는 온누리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처음 믿은 성도들도 있었지만, 다른 교회를 출석하다가 옮겨 온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주일 새가족 교육 1주차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타 교회에서 온 성도가 훨씬 큰 비율을 차지하는 교회가 되면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길로 하용조 목사님을 찾아가 새가족 사역을 내려놓고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은 불신자들만 전도하는 사역을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제 마음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전도사역본부’를 신설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전도사역본부를 신설하고 맞춤전도집회 기획과 사후 양육 등을 준비하면서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용조 목사님께 전도집회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시대적, 목회적 상황에 따라 대상을 세분화하고, 맞춤전도집회 장소를 레스토랑으로 변화시켜 소수만 초청하자는 단순한 아이디어 수준이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시행해 보라고 하시며 지지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현재까지 총 47번 맞춤전도집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와 열매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는 2001년 12월 열린 첫 번째 맞춤전도집회 40대 남성을 위한 ‘비상구(EXIT)’입니다. 가장 풍성한 열매가 맺힌 집회도 그때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40대 남성들 상당수가 IMF 외환위기로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었고, 자살률이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불신자 대부분이 40대였습니다. 그래서 40대 남성만을 대상으로 맞춤전도집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세대만 지정해서 집회를 연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맞춤전도집회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교회가 믿지 않는 40대 남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40대 남성들이 교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아울러 예배당을 레스토랑처럼 꾸민 시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긴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3일 동안 이어진 40대 남성을 위한 프로그램과 메시지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수많은 중보기도자가 참여했는데, 전도 대상자들이 그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맞춤전도집회 메시지는 40대 남성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도록 도왔습니다. 당시 40대 남성 750명을 초청했는데, 무려 530명이 결신했습니다.” ‘전도’라는 단어조차 부담스럽고 불편해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위한 맞춤전도 전략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도는 반드시 대상자의 필요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전도를 불신자들의 필요와 연관시키지 않으면 그들은 복음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의 세계관과 필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복음을 그 필요에 적합한 언어로 해석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은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고, 전도 대상자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맞춤전도에서는 전도자와 메시지가 전도 대상자의 필요에 적합한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메신저가 전도 대상자의 필요와 문제를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메시지도 전도 대상자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도 대상자들의 세계관과 문화, 현재 문제와 필요를 깊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전도 도구와 방법 또한 대상자의 필요에 부합해야 합니다." 앞으로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가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하며, 변화해야 합니까? “세 가지 방향에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를 전도하는 전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SNS나 온라인을 이용한 전도 방법이 있지만, 결국 인격적 대면이 이뤄져야 하는 전도의 성격상 그들과 어떻게 관계 형성을 하고, 복음을 전할지에 대한 숙제가 있습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초개인화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초개인화 문화에 맞춤화된 전도 전략이 필요합니다. 온-오프라인을 병행하는 방법부터 일대일 전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도 실행이 요구됩니다. 둘째, 타 종교와 세계관별 맞춤화된 메시지와 전도 전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에 더욱 집중하려면 타 종교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타 종교의 세계관 속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할지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 시대 세계관과 타 종교별 맞춤화된 메시지와 전도 철학을 계발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한국의 작은 교회들이 적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맞춤전도는 많은 인원을 초청할 때보다 적은 인원일 때 효과적입니다. 작은 규모의 교회들이 맞춤전도를 실행하면서 적합한 모델들을 더 많이 만들면 한국 교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전도 패러다임이 정착할 것입니다.”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독자들에게 어떤 영의 양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 전도를 했는지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을 듣는 대상의 수준과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전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하셨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맞춤전도 원리는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맞춤 사역의 절정입니다. 맞춤전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계획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영혼의 시대와 문화, 필요에 따라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를 읽고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2024-08-03 제1503호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아주 특별한 경험과 고백 발달장애인을 위한 예배공동체 사랑부에서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이하 행복한 부부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진새골 사랑의집에서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가 개강했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장애인 자녀를 둔 사랑부 가정이 성경적인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부와 가정이 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사랑부 부모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사랑을 다시 누리고, 자녀와 부부를 위한 아름다운 가정으로 회복되는 거룩한 장(場)이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발달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 겪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애인 자녀의 주돌봄자 80% 이상이 부모인데, 그에 따른 부모의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어려움이 매우 크다. 여기에 장애가 있는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보호자 사후 자녀 돌봄에 대한 막막함도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한 편견과 차별이 사회적 고립마저 발생시키고 있다.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 소식을 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가 그래서 필요하고, 중요하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열린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한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눈물과 고백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면서 정말 힘들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가정으로 회복될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축복의 통로 최난숙 성도(서초C공동체)는 장애가 있는 자녀가 하나님 축복의 통로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아들의 장애를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했었다. 25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터라 더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장애를 자연스레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장애가 있는 아들 덕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행복한 부부학교가 이 사실을 재확인 시켜줬다. 특히 강미향 목사가 전한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는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회복을 도왔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와 자녀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억하게 하셨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라는 정체성을 발견했다. 장애인 자녀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장애인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더욱 힘써 양육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또한 행복한 부부학교를 섬기는 목사, 장로, 조장 부부, 교사들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자신도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겸손한 섬김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언약결혼식’이었다. 결혼 30년이 지나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해야겠다고 계획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언약결혼식을 하고,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어서 무척 행복했다.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 박동희 성도(양재 사랑부)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 배움이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받은 가장 큰 은혜다. 장애가 있는 아이는 스스로 의사결정하거나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모가 매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가 많은데, 주변에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것과 내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통로라는 것도 배웠다. 물론 그동안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수없이 고백했지만, 결국 내 중심으로 자녀를 바라봤기에 괴롭고 힘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존귀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그 자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그래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배움이 특별하고 고마웠다. 늘 자녀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석하면서 부부가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바로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자녀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희 성도는 ‘언약결혼식’에서 아주 특별한 고백도 했다.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가정을 이뤄서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부부 십계명을 함께 적고, 부부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 되기로 기도했다. 자녀 양육보다 먼저 부부관계를 아름답게 형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에게 하나님 축복의 통로이자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김혜숙 성도(서빙고 꿈사랑부)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선물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더 인정해 주고, 세워주는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아름다운 변화를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남편과 함께 교육받으면서 경험했다. 사실 김혜숙 성도는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남편과 함께 교육을 듣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부 모두에게 의지가 있어야 하고, 바쁜 남편을 교육에 참여시키는 게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고, 하나님 앞에서 부부 십계명을 만들고, 함께 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롭게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부부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한 것 자체가 행복이었고, 큰 변화였다, 김혜숙 성도 부부는 벽에 걸린 부부 십계명을 한 번씩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혜숙 성도의 자녀는 또래에 비해 발달이 늦다. 육체적인 어려움도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네 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늘 도와줘야 한다. 그 때문에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는 아이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세상에도 장애 아동을 돌봐주는 시스템이 있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 행복한 부부학교처럼,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쉼을 얻고, 부부가 함께 온전히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아이들을 돌보는 돌봄 프로그램이 더 많이 필요하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의 모든 중심이 아이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부 관계가 나빠지기도 하고, 결국 장애인 자녀를 돌보다가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숙 성도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그동안 아이에게는 온 신경을 쓰고, 예쁘게 말하면서 정작 남편에게는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인정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를 더욱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로 다짐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결국,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은 부부가 장애인 자녀에게서 조금 벗어나 서로를 인정해 주고, 사랑을 고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회 자체가 회복이다. 아이에게만 모든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선물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문의: 010-8567-1808
2024-07-06 제1499호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온누리교회 사회선교본부가 출범 1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이 지난 5월 25일(토) 온누리청소년문화센터 소극장에서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막 올랐다. 사회선교본부 리더십 및 성도 231명이 참석했다.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은 사회선교 역사 소개,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 결과 발표, 이재훈 위임목사 특강, 임희국 교수 특강, 패널 토의,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기훈 목사(사회선교본부장)가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역사’를 주제로 지난 10년 동안 걸어온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발자취를 나눴다.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에는 11개 팀이 참가했다.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SNS청년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싶은 마음에 공모전에 참가했다”면서 “앞으로도 목마른 영혼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재훈 위임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나아갈 길’을 주제로 특강했다. 이 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비전은 국내외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선교’를 주제로 강의했다. 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시대와 상황의 요청에 응하는 사회선교는 두 바퀴의 수레처럼 항상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선교의 실천 방안을 구체화하고, 사례를 나누는 패널 토의도 이어졌다. 임희국 교수, 정운오 장로, 박순길 장로, 박승호 선교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는 서빙고온누리교회 S브릿지공동체, 마포공동체,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인천온누리교회 북누리공동체가 발표했다. 구경용 성도(도곡공동체)는 “다락방 지체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곳을 찾아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면서 “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김현주 장로(사회선교본부 다문화팀)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가 10년 동안 어떻게 달려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준비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 뜻깊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회선교가 더욱 확장되고, 더 많은 성도가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 당선작 문턱 낮추고, ‘사회선교 대학청년부’ 세우기! 온누리교회 청년들은 사회선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청년 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사회선교를 들어본 적 있다’가 70%, ‘들어본 적 없다’가 30%였는데, 70% 응답도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과 이기훈 목사님의 리더십 특강 때 처음 들어본 청년들이었다. 둘째, 청년들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어한다. 설문에 응답한 청년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 87명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회선교에 접근하는 방법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사회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거나 신청 과정에 문턱이 높다고 답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춰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SNS청년부 아웃리치가 떠올랐다. SNS청년부 국내외 아웃리치 신청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사회선교 접근성을 높이는 데 차용하려 한다. 첫째, 예배 시간에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사회선교 리더십들과 지속적인 교제 시간을 마련한다. 더불어 사회선교를 경험한 지체들의 간증을 나눈다. 사회선교를 지속적으로 노출해서 더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둘째, 사회선교 교육과정을 개설한다.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는 말씀을 기반으로 한 여러 교육과정이 있다. 사회선교도 바이블아카데미, 기독 OTT 퐁당 등을 활용해서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면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셋째, SNS를 활용한 소통 채널을 확대한다. 사회선교에 대한 정보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사역별 최신 현황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캘린더를 활용해서 사역 신청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활성화하고, 카카오톡 등 SNS를 개설해 신속하고 활발한 소통을 돕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대학청년부 사회선교팀’을 세워서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섬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 영역에서 은사를 쓰임 받도록 달란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둘째, 청년들의 마음이 가는 사역을 제안해서 운영한다. 셋째, 유튜브, 인스타 등을 미디어에 좀 더 친숙한 청년들에게 운영을 맡겨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도록 기회를 준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마음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흘려보내는 청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팀브링)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도곡공동체의 이웃 향한 사랑 그리고 섬김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는 희락다락방, 긍휼다락방, 화평다락방, 소망다락방, 은혜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곡공동체 모든 다락방이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 사회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희락다락방은 하나공동체, 정선 동강교회, 우리들학교를 섬기고 있다. 한국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탈북민들을 지원하고, 하나공동체 예배를 섬기고 있다. 북한에 쌀을 보내고, 탈북민 청년들이 지내는 기숙사에 반찬을 전달하는 봉사도 했다. 2018년 이후 쌀을 보내는 사역이 정부의 제재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농촌교회를 새롭게 섬기게 되었다. 코로나19 기간에는 정선 동강교회를 도왔다. 봄에는 밭을 경작하고, 여름에는 블루베리를 소출하는 일을 도왔다. 희락다락방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섬기기도 했다. 희락다락방에서는 탈북민 학생들이 공부하는 우리들학교 봉사도 하고 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을 사는 탈북 학생들이 교회와 사회의 일꾼 되기를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다. 긍휼다락방은 굿윌스토어에서 장애인들의 자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굿윌스토어를 찾아가 물건을 분류 및 선별하고, 포장해서 판매를 돕는다. 1년에 두 번은 장애인 100명에게 간식과 선물을 준다.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화평다락방은 서울농아교회를 섬긴다. 농아교회는 국내 및 해외 선교사 파송 사역을 하고, 유튜브로 수어 설교 방송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서울농아교회를 방문해서 수어로 찬양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한다.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역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소망다락방은 양평 덕수교회와 송파구 거여동 임마누엘집을 섬긴다. 양평 덕수교회로 아웃리치를 가서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교실’을 운영했다. 거여동 임마누엘집에는 쌀, 과일 등 생필품을 전달하고, 직업 재활 작업을 지원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 교제도 했다. 은혜다락방은 재한몽골학교를 섬기고 있다. 재한몽골학교는 학생 16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이주민 학생 350명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나섬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을 도와서 몽골뿐만 아니라 인도와 필리핀 등지에 온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해서 급식 봉사와 설거지, 청소 등을 한다. 앞으로도 도곡공동체가 사회선교에 앞장서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를 기대한다. / 구경용 성도(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2024-06-01 제149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