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맛있는 말씀 해설 “…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3~26) 조선 시대 성군(聖君)을 꼽으라면 역사학자들은 세종, 영조, 정조, 성종을 말한다. 이 중에서 세종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분열 왕국 시대 선왕(善王)을 꼽으라면 성서학자들은 남유다의 아사, 여호사밧, 아마샤,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를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요시야에게 ‘대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싶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에 성공한 왕이기 때문이다. 요시야는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게 해서 예배를 회복하고(23절), 우상 숭배의 모든 모양을 쓸어 버리는 우상 척결 정책을 단행하며(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했던 문화를 뒤엎어 말씀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했다(25절). 하지만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요시야의 개혁에도 진노를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요시야는 재앙을 안 보고 평안히 무덤에 안장될 것’(왕하 22:20, 대하 34:28)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요시야가 애썼다 할지라도 남유다는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므낫세 왕이 나라를 완전히 망쳐놨기 때문이다. 12세에 왕위에 등극해서 무려 55년 동안 남유다를 통치한 므낫세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른다(왕하 21:1~2). 그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멸하신 모든 민족보다 그 죄악이 더 심하였다(왕하 21:9, 대하 33:9)’고 한다. 모든 민족에는 이방 나라가 대다수인데,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적대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필자는 므낫세만의 잘못이라기보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20장 19절(표준새번역)을 보면 히스기야는 자기 시대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대대손손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신앙교육을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비전(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 29:18)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멸망은 므낫세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자녀교육 실패’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지만, 간절한 기도로 15년을 더 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15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으며, 자기의 안위만 걱정했다. 무엇보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나의 시대에만 평탄하면 된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후대에도 온전한 신앙이 이어지도록 힘쓸 것인가. 히스기야처럼 근시안적 신앙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요시야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앙의 개혁을 일으킬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교육은 세뇌가 아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교육이다. 학업에는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 말씀이 아이에게 전수되지 않는다면, 즉 때를 놓친다면 신앙이 회복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신앙교육은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게 해서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에(하나님의 지혜가 지식의 근본) 매우 중요하다. 신앙 전수에는 희생이 따른다. 후대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커리어나 가시적인 성과만 중시하는 문화는 참으로 아쉽다. 시간을 따로 떼어서 신앙 전수에 힘써야 한다. 자녀의 온전한 신앙교육을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이 먼저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여호야긴 왕이 37년 만에 사면된다(왕하 25:27~30). 바벨론 왕이 에윌므로닥으로 바뀌면서 원년에 다른 왕들의 지위보다 여호야긴 왕의 지위를 더 높게 하고, 죄수복을 벗기며(명예 회복), 양식 등을 풍족하게 누리게 된다(물질 회복).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을까? 필자는 이를 요시야가 ‘예배 개혁, 말씀 개혁, 우상 타파’를 한 결과라고 본다. 얀 후스의 죽음이 무위로 끝난 게 아니라 100년 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실제로 일으켜 ‘얀 후스가 환생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요시야의 신앙개혁 이후에 남유다가 멸망했지만, 회복이 일어난 까닭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변화가 더디 올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 각 가정의 신앙 형성을 위해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해지도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힘써야 한다. / 이강현 목사(양재A공동체)
2024-09-07 제1507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영적 전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영적 전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R. C. 스프룰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에서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벌이는 영적 전쟁을 ‘가공할 적들인 세상, 육체, 마귀와의 전투’라고 설명한다. 여기서는 세상과의 전투인 세계관 전쟁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로 보고자 한다. 우리는 기존에 습득된 인본주의적 생각과 성경적 세계관이 뒤섞인 가운데 갈등하는 순간을 만난다.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잘 모르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서 그 위에 성경적 지식만 쌓아 올린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교회에서는 교회의 법을 따르는 적당히 이중적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믿음의 전진을 위해 두 팔로 안으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개인주의) 사회’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중요했고, 근대(인본주의+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 중요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나의 주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그 어떤 것도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옳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태도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할 때 인류는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사회,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를 충분히 즐기라’는 삶의 방식을 권면한다. 욜로족의 소비행태인 ‘탕진잼’(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니체(Nietzsche)적 세계관을 계승한 포스트모던을 잘 표현한 말이 “너 자신을 사랑하라”다. 다른 사람이 강요한 성공의 기준에 맞춰 살지 말고,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지금, 이 순간 너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이 매력적인 메시지는 자기혐오와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포스트모던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데서 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넘어 이웃과 사회 공동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식을 쌓기에는 열심이지만, 세상의 주도적, 지배적 시대 정신인 세속적 인본주의, 자유주의, 성문화혁명(차별금지법)이 가져올 가정과 교회의 파괴 등 세상을 아는 지식은 매우 부족하다. 앞으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 거룩한 고민이 밀려온다. 성경은 인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이 ‘죄’라고 말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절대적인 도덕 규범을 주셨다. 성경은 인간사회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단순하게 과일 하나 따먹은 사건이 아니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도덕 기준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불순종을 의도한 사건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있다.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거부도 할 수 있는데,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모습이 사사시대로 이어졌고, 지금 그 현상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성경은 해결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이후 순종과 성화에서 찾는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와 젠더리즘을 이슈화하고 있다. 특히 차별금지법 등을 통과시켜 국가 차원에서 동성애와 젠더리즘을 옹호 조장하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의 기준은 명확하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차별금지법 등에서 말하는 분류할 수 없는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적인 결합만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기준이 맘에 안 들어 스스로 성 정체성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슨 ‘죄’냐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행위를 금지하셨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신명기> 10장 13절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규례를 주신 이유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믿어드리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하다. / 윤상우 집사(강남D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2024-09-07 제1507호
[맛있는 말씀해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 6:34) 맛있는 말씀해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 6:34) 급변하는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간다. 그 불안과 두려움 이면에는 염려와 근심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막연한 염려 때문에 몸과 마음,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로 인해 우리가 정말 염려해야 하는 것마저 놓치는 게 안타까울 때가 있다. 왜곡된 염려가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아셨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정말 세상을 살면서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하루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의미일까? 본문의 맥락을 살펴볼 때 위 구절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 말씀이다. 천국 백성의 윤리를 다루면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이방인들의 삶과 무엇이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의복 문제를 염려하는 듯하다(25~30절). 현대인들에게는 의식주 문제에 해당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는 염려 대부분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반복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염려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분열하고 병들게 하기에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염려는 주변 다른 사람까지도 걱정하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제자들은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노력, 공부, 미래의 계획을 하지 말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염려하려면 주 안에서 하라는 의미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제자들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25절, 31절, 34절의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주의해서 읽어보면 그 진의를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 그러므로(25절) 목숨과 몸이 더 중요함을 너희는 알라.”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들풀보다 너희가 더욱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31절)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34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산상수훈 가르침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염려에서 해방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염려하지 않고 사는 비결은 간단하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면,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고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동떨어지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 다음 현실적인 문제(물질, 죄, 시험)를 구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중심으로 살아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모두 책임져준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그러므로’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내일의 시간을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내일의 염려는 오직 시간의 창조자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내일의 주인인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염려하지 않고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비결이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살면 세상의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 김상수 목사(대전온누리교회)
2024-08-31 제1506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놓지 말고, 기도하라!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놓지 말고, 기도하라! “우울,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지킬 방법이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본다. 과거와 비교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과 보내고 있는가? 지하철을 타면 10명 중 8명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왜 그럴까? 많은 분석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도파민’을 주요한 요소로 꼽는다. 도파민은 신경세포 간 시냅스를 오가며 신경회로를 활성화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다. 뇌의 보상회로에서 분비돼 자극에 대한 보상을 예측하게 해준다. 큰 자극이 없는 평소 상태를 100%라고 가정한다면, 쇼핑 또는 게임으로 인해 분비되는 도파민 수치는 평상시의 150%까지 올라간다. 복권 당첨 또는 이성에게 고백받았을 때 수치는 500~800%까지 올라가고, 마약류에 손댔을 때는 1300% 이상까지 도달한다고 한다. 보상회로에서 도파민 ‘민감도’가 감소하면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고, 보상회로에서 도파민 ‘농도’가 감소하면 ‘우울증’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 원인을 ‘도파민’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도파민 농도의 문제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화학적인 불균형으로 야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현대인들에게 더는 생소한 질환이 아니기에 흔히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정신 질환 중 하나라는 차원에서 ‘정서적 감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우울증을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할까? 몸에 가벼운 이상이 생겼을 때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 것처럼, 약 복용이 답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분명 의학적인 기술을 알게 하셨고, 때로는 약을 통해서도 치료하신다. 더는 약물치료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느낄 필요가 없고, 죄악시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할까? 성경에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경 인물을 통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선지자 엘리야를 떠올려 보자. 이세벨로부터 위협을 당했을 때 그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광야의 깊은 곳 로뎀나무 아래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취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존감이 낮아질 때 우울증에 노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져주실 때 그 영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엘리야의 격렬한 감정들이 배설되도록 하셨다. 엘리야가 감정을 모두 드러내자 그에게 새 임무를 맡기셨다. 새 임무는 새로운 두 왕과 한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혈혈단신 850명과 영적 전투를 치른 엘리야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을 맡기는 것도 자존감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외로움에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동역자를 보내주셨다. 제자 엘리사를 붙여주셨다. 또한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엘리야를 일으켜 세우셨다(사 41:10). 하나님께 매달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약하고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붙잡고 있다. 당신이 약할 때 그분이 강하게 하실 것이다. 당신의 부르짖음을 듣고, 눈물을 보며, 신음을 듣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전한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자. 모든 치유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의 문제가 통째로 해결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이미 모든 치유의 실마리가 있다는 뜻이다.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받으라. 하나님이 사람의 손을 통해서 일하시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분의 자녀들을 돌보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놓지 말고, 기도하라.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을 때 분명히 일으켜주신다. / 조은광 전도사(J4U청년부)
2024-08-31 제1506호
[주일 강단]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린다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린다 <사도행전> 19:23~41 / 이재훈 위임목사 어느 시대든지 교회가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은 “그 시대의 교회가 속한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가 모이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얼마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가 함께 앉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성도를 세상에 보냈는지를 평가해야 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친밀함을 가지는 데는 충실하지만,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의해 교회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 간의 친밀함보다 중요한 것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미쳐서 변화시키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한때 교회는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세교회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중세교회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권력을 이용한 교회는 결실을 맺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부분 교회가 본래 사역에서 멀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부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신 것은 이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의 능력에 비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이 세상의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일어납니다. 세상 문화의 중심에는 우상이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으로만 무너집니다. 세상의 우상은 결코 복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며 일어난 회개의 소동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복음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소동이 나타납니다. 복음이 에베소에 있는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우상이 무너지며 회개의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마술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비즈니스로 알고 섬겼던 우상이 무너지면서 회개하고, 마술책을 불태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공개했습니다.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책들을 모아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마술책들의 값을 매겨 보니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은 점점 힘 있게 퍼져 나갔습니다(17~20절). 5만 드라크마, 즉 5만 명의 하루 품삯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의 가치가 한순간에 불태워질 만큼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우상이 헛된 것임을 알고, 그 우상이 무너짐으로써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는 바울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이 합해져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거짓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일어난 소동 두 번째 소동은 돈을 우상으로 여기던 이들이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하게 된 것을 거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복음의 말씀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켰다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이 전해짐으로 인하여 우상이 깨어지고 무너지며 그들의 거짓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일어난 소동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우상을 분별했고, 드러냈고, 무너뜨렸습니다.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에서 우상들을 분별했고, 드러냈고, 무너뜨렸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떻게 우상을 드러냈습니까? 그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입으로 바울이 무엇을 전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행 19:26).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아테네든, 에베소든 엄청난 신전을 만들고, 사람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며, 없는 신을 만들어서 사람이 만든 신을 섬기던 사회에 이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 바울이 지혜로운 것은 어떤 신의 이름을 거명함으로써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당신들은 종교성이 많다”고 관계를 형성하는 말을 한 다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붙여진 그 이름을 이용해서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군요. 그 신을 내가 알려주겠습니다. 그 신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변증하며 그들의 생각에 침투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이 아데미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우주의 여왕’이라고 하는 아데미 신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돌봐준다고 믿어서 신전을 어머 어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 크다고 합니다. 그리스 문명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신전을 비즈니스화 했고, 아데미 신전이 아시아 지역의 은행 역할을 할 정도로 경제활동 중심지로 여겨지는 사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아데미 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면 공격을 받아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보십시오. 바울이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데미 신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고 믿으니까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그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데미 신전도 자신들이 만들었고,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고 있던 아데미 신의 모형도 자신들이 만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조각해서 만든 조각상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울이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전한 것입니다. 근본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사람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는 그 시대 사람이 만든 우상이 있습니다. 때로는 신상과 신전 등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신상에 절하는 사람은 적은 무리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우상을 스스로 만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수의 원천 하나님 버리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우상’ <예레미야> 2장 11~1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우상숭배를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어떤 민족이 자기 신들을 신이 아닌 것과 바꾸었느냐? 그런데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우상들과 바꾸었다. 하늘아, 이것으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라. 몹시 두려워해 황폐해지라. 여호와의 말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생명수의 원천인 나를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소를 파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물 저장소였다”(렘 2:11~13).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대국을 의지한 것을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앗시리아,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마치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처럼 의지하는 선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약속은 믿지 않으면서 주변 나라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것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수 있는 영역을 이웃나라들이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신이 아닌 것과 하나님을 바꾸었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생명수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이 저장되지 못할 터진 저장소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상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이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것을 통해 얻으려고 인간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삶의 중심이 되어서 만일 그것을 잃어버릴 때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절망이다”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 신성을 부여합니다.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이 자신의 소원을 해결해 주고, 필요를 채워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물 저장소일 뿐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제1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어떤 신도 있게 하지 말라”입니다. 우상을 금지하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계명의 2계명부터 10계명까지 말씀이 어겨지는 이유는 1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계명을 어기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어겨지는 것입니다. 만일 1계명을 반드시 지키면 그 다음 계명들을 어기지 않게 됩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어떤 신도 있게 하지 말라.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는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거짓과 악을 기초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전했을 때 우상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붙잡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소동을 주도한 사람이 ‘데메드리오’입니다.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아 엄청난 수입을 얻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데미 신을 섬기는 것에서 떠나자 자신의 수입이 주니까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 중에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에베소의 원형 극장, 대략 2만5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고, 지금도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군중심리로 끌려갔습니다. “연극장 안에서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 말을 하는 통에 모인 곳은 매우 혼란스럽게 됐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대부분이었습니다”(32절). 데메드리오가 이렇게 선동했습니다. “그가 직공들은 물론 이 일에 관련된 일꾼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이 사업으로 소득이 꽤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보고 들은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여기 에베소뿐 아니라 아시아 온 지방에서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며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마음을 돌려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업의 명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전의 명예도 실추되고 아시아 지방과 전 세계에 걸쳐 숭배되고 있는 이 여신 자체도 그 신성한 위엄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라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 높였습니다”(25~28절).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거기에는 진짜 아데미 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외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수입이 줄어들자 화가 나서 외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데미 신을 높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신전의 명예를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거짓된 변명입니다. 포장입니다. 아데미 신전을 바울이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지만,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진리가 전해짐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준 것입니다. 거짓과 악을 기초로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일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탄의 영역을 침략할 때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때로 물리적은 소동도 일어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두려운 현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시고, 우리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무너지고, 사회 속에 있는 우상이 무너질 때 마술책이 불타는 것 같은 회개의 영향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반항하는 소동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성령님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악한 영들이 아무리 소동을 일으켜도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의 소동은 시청 서기관이 나와 합리적인 방향으로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을 피울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다면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해서 소동이 해결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이 소동은 어떻게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우상이 무너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1907년 ‘평양대부흥’의 역사는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많은 우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근대화, 현대화될 수 있는 영적 기초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으로 내 안에 있는 우상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내 안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얻으려고 만든 우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속한 직업, 사회, 문화의 중심에 있는 우상을 나도 함께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없어질 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만일 우상을 붙잡고 있는 인생이 있다면 우상과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내 안의 우상을 무너뜨린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너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닙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9-07 제1507호
[주일 강단] 성령과 주의 말씀 성령과 주의 말씀 <사도행전> 19:1~20 / 이재훈 위임목사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2차 선교여행을 했던 바울 일행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의 여러 차례 선교여행은 언제나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재정비해서 또다시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여행에서는 에베소라는 지역을 방문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인구 2십만 명의 대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1차 선교여행 때 복음화 하려고 했었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하나님이 다시금 문을 열어주셔서 아시아 지방을 다니면서 결국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장기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이 연기되면 실패한 것이며, 꿈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지만, 연기된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고 풍성한 열매를 가져옵니다. 우리 시간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계획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계획, 나의 시간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구나’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강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연기는 더 큰 열매를 거두게 하시려는 계획인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 세례의 축복 에베소 지역에서는 두 가지 특별하고 두드러진 사역이 나타납니다. 첫째,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 세례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몇몇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욱 성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는 분명한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연약한 어린아이의 신앙이 있고, 강건하고, 확신 있고, 능력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날마다 의심과 유혹에 휩쓸리고 무너지는 신앙이 있는 반면 다른 누군가를 붙잡아 줄 수 있는 성숙하고, 강인한 신앙이 있습니다. 나 중심적인 신앙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에게 증거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는 뚜렷한 신앙의 변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세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성령님이 행하시는 사역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사역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은 성도임에도 구원받은 자, 거듭난 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과 확신, 성숙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성령의 세례를 경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은 언제나 연약합니다. 확신과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모시지 못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지 못합니다. R.A. 토레이는 이것을 ‘잠재적 사건’과 ‘체험적 사건’이라는 단어로 구별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연합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확신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단계를 ‘잠재적 사건’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을 설명하실 때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거듭남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거듭남의 신비는 우리가 어느 한 시점, 어느 한 체험을 거듭남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들은 거듭난 이후 우리가 체험하는 느낌의 경험이지, 거듭남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신비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잠재적 사건으로써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체험적 사건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믿는 모든 성도와 한 몸임을 느낍니다. 체험합니다. 실감합니다. 깨닫습니다. 그렇게 행동합니다. 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싶어도 그리스도의 한 몸 됨,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절제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다른 지체들을 배려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이미 믿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바로 그때’라고 해석할 수 있고, ‘예수님 믿고 난 후에’라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사람들은 아직 믿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진정 믿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분들은 성령의 세례가 거듭남과 동일한 거라고 주장하는 해석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이 어색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책인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분명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제자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믿는다’는 단어를 쓸 때는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까? 그 의미는 내가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내가 자각할 수 있느냐, 인식할 수 있느냐,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그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성령의 세례는 체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거듭난 이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체험하는 것이지 거듭난 그 순간을 우리가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아직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행 8:15~16).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은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써의 능력과 확신,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율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성령의 세례가 온다는 법칙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역사를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 세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세례의 체험을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님 되심을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나에게도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체험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사건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들이 “아니오.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듣고 믿었지만, 성령님을 알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존재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령님을 ‘잊혀진 하나님’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잊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잊힌 하나님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분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믿게 하고, 우리를 그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성령님, 내 안에 온전히 오시옵소서. 나를 주관하셔서 내 안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모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분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할 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실 분을 믿으라고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예언하게 됐습니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 정도였습니다”(4~7절). 이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요한의 세례는 그저 착한 행위를 위한 서약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패턴을 보면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을 때 동시적으로, 어떤 사람 믿고 난 이후에, 어떤 사람은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적으로, 어떤 사람 물세례를 받은 훨씬 이후에, 어떤 사람은 물세레를 받기 이전에 성령의 세례를 먼저 받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할 때 우리는 확신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모시고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됩니다. 때로는 은사와 함께 나타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무런 은사도 없이 능력과 확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 섬김의 은사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과 사역자 파송 둘째, 두란노 서원을 통해 사역자들을 훈련해서 아시아 전역에 파송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두란노 서원에서 훈련받은 이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목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해져 믿기를 거부하고 공공연하게 그 가르침을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려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가르쳤습니다. 이 일이 2년 동안 계속돼 아시아 지방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9~10절).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하자 작은 서원에 제자들을 따로 데려다가 2년 동안 가르칩니다. 이것이 신학교 훈련 기관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에 파송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들을 훈련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와 주의 말씀의 역사가 연결되어 순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과 주의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였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모든 부흥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에베소에 성령의 세례가 임했을 때 18장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사람의 말씀 사역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해서 주의 말씀을 많이 가르쳤지만,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예수를 믿었는데 클라오디오 총독의 칙령으로 쫓겨나서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을 만나고, 그와 함께 에베소에 정착한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덕분에 아볼로가 더욱 분명하게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역의 토대 위에 성령의 세례가 임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한 사람들은 주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갈급함이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배웠다고 했는데, 자료에 의하면 그들이 모인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4시였습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입니다. 모이기 어려운 그 시간에 그들은 더 모였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 때문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면 육신의 피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은 성령의 세례 받은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고, 주의 말씀의 사모함은 또 다른 성령의 역사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 성령과 주의 말씀은 언제나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동행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주의 말씀을 향하게 되고, 주의 말씀을 향하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역사 통로가 됩니다. 그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절). 에배소에 있던 많은 우상들, 마술로 인하여 귀신들이 성행하던 그 지역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자 마술을 하는 유대인들이 흉내를 내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용할 정도였습니다. 유대 사람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선포하자 악한 영이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고 했습니다. 바울도 알고, 예수님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악한 영에게 놀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악의 영이 떠납니다. 그런데 믿지 않으면서 이용하려고 하면 “너는 누구니?”라고 귀신이 조롱합니다. 우리가 악한 영을 대적하고 내쫓을 때 악한 영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너도 안다”고 대답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과 주의 말씀의 역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일어났다! 그때 사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는 우상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마술의 도시였습니다. 엄청난 마술책이 횡행했습니다. 그러니 귀신들도 횡행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회개하자 자신들이 의지하던 마술 책을 모두 불에 태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공개했습니다.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책들을 모아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마술 책들의 값을 매겨 보니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은 점점 힘 있게 퍼져 나갔습니다”(17~20절). 5만 드라크마는 오만 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한 사람의 139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매우 많은 돈입니다. 에베소 도시가 변화된 것입니다. 회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재산을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거짓되고, 악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주의 말씀의 역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회 변혁이 있습니다. 노비 제도가 폐지되고, 축첩제가 폐지되고, 조혼이 철폐되는 등 사회의 구습들이 변혁되었습니다. 성령과 주의 말씀은 단지 예배당 안에서의 변화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사회의 불리함, 정직하지 못한 것, 더러움, 악의 영들이 판치는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물결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령과 주의 말씀을 의지해서 사회 변혁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와 같이 우상의 도시, 마술의 도시, 귀신이 판치는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서 귀신도 놀라 떠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8-31 제1506호
[주일 강단]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 <사도행전> 18:1~22 / 박종길 목사 바울이 아테네에서의 전도 이후 고린도로 사역지를 옮깁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동역자들을 만나기도 하고, 깊은 영적 우울과 침체,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환상 중에 바울에게 말씀하심으로 1년 6개월 동안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시 안디옥으로 귀환함으로 2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역자의 모습 첫째, 동역자의 모습입니다. “이 일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본도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유대 사람들은 모두 로마를 떠나라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 때문에 얼마 전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일하며 지냈습니다. 바울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천막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면 그는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오자 바울은 말씀 전하는 데만 전념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유대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1~5절).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이 부부 역시 로마에 있다가 복음을 믿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황제의 칙령에 의해 고린도에 왔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지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왔을 때 하나님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하셨고, 그들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역시 바울과 같은 유대인이었고, 바울과 같이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 그들이 가깝게 지내면서 함께 사역하고, 교제하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베뢰아 이후 홀로 떨어져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겪었던 바울에게 이 부부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 가장 적절할 때, 가장 필요할 때 동역자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동역자를 예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아시기 때문에 때에 맞춰 도움을 주는 동역자를 보내주십니다. 바울도 어려움 속에서 고린도에 왔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역시 핍박을 피해 고린도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만나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고, 서로 격려하며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사역하시는 것처럼, 교회는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는 곳입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동역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 역시 홀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가고, 함께 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사명을 맡길 때, 교회와 선교 일을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동역자를 붙여 주십니다. 동역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동역자들과 함께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 둘째,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마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9~10절). 바울은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토론하고,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바울에게 대들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지치고, 실망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 사람들이 아닌 이방 사람들을 위한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회당을 떠나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 집에 갔는데 그 집이 유대인 회당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디도 유스도 뿐만 아니라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또 다른 많은 고린도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은 은혜가 일어났습니다. 한 쪽 문이 막히면 하나님이 다른 쪽 문을 열어 주십니다. 바울이 선교 방향을 전환했을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회당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나고, 그를 통해 다른 많은 고린도 사람이 세례를 받는 열매를 얻습니다. 낙심되고, 어렵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시간을 이겨내면, 통과하게 되면, 끝까지 참고 견디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인내일 것입니다. 어려움, 핍박, 환난, 고통, 좌절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셨고, 전도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을 때 하나님의 예비 된 사람들을 통해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포기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도망가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도전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연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있었습니다”(고전 2:3). 그 강한 바울이 마음이 무너지고, 두렵고 떨렸다고 합니다. 그때 바울에게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말씀해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지치고, 힘들고, 낙심되고, 바울처럼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9~10절에서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를 해치치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입니다. 계속되는 유대인의 반대와 핍박, 박해로 인해서 계속 이동해야만 했고, 지치고 의기소침하고, 두렵고 떨린 바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준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낙심해서 사명의 자리를 피하지 말고, 일어나 힘을 내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손해 볼 것 같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침묵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이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전하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불가능하게 보이고, 어려워서 다 내려놓고 침묵하고 있다면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해라.” 하나님이 바울에게 들려주신 음성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아무도 너를 해치치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동역자를 붙여 주시고,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도와주겠다. 그러니 잠잠히 있지 말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세벨의 위협 앞에 영적 우울감에 빠져서 호렙산에 도망가 죽으려 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만지며 말했습니다. ‘일어나 뭘 좀 먹어라. 네 갈 길이 아직 멀었다.’ 그러나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사람들 7,000명을 이스라엘에 남겨 두었다”(왕기 19: 17~18). 믿음을 가진 성도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 있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새 힘과 새 능력을 부어줍니다. 우리의 중심이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으면 넘어져도 다시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선한 사람의 걸음을 여호와께서 정하시니 그분은 그 길을 기뻐하십니다. 그는 넘어지더라도 아주 엎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으로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37:23~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넘어지고 쓰러져도 낙심하지 않고, 중심을 하나님께 두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것입니다. 바울이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서 고린도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잠잠히 있지 않고 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하는 것입니다.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선교의 여정 셋째, 계속되는 선교의 여정입니다. “바울은 얼마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게 됐는데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동행했습니다. 배를 타고 출항하기에 앞서 바울은 전에 서원했던 것이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들은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곳에 남겨 두고 혼자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 사람들과 토론했습니다”(18~19절). 보통 바울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고린도 선교의 특징이 있다면 자비량입니다.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선교 방향이 옮겨졌습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엄청난 역사와 부흥을 일으킵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바울을 잡아 핍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아가야 지방의 총독인 갈리오가 유대인의 종교적 갈등에 로마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며 그 고소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 쫓아냅니다. 바울이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를 거쳐서 다시 안디옥으로 복귀합니다. 이렇게 그의 2차 선교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남겨두고,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 아볼로와 교제합니다.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것은 서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지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서원한 것이 있다면 지키기를 바랍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는 삶 되기를 원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서 만난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잘 설명해 줌으로 아볼로가 성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더 강력하게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멈추지 않습니다. 선교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만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아볼로의 만남을 보면 협력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 인사한 뒤 안디옥으로 내려갔습니다.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지내던 바울은 그곳을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두루 돌며 모든 제자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었습니다”(22~23절). 하나님의 선교는 중단할 수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잠시 안디옥에 머물고는 다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두루 돌며 제자들을 권면하고, 복음을 전하는 3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땅 끝까지 복음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동역자를 예비하시고 보내주십니다. 끝까지 견디고 인내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잠히 있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교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선교는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바울이 순종해서 멈추지 않고, 잠잠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예수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감당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8-24 제1505호
[주일 강단] 우상의 도시에 복음을 심다 우상의 도시에 복음을 심다 <사도행전> 17:16~34 /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 전파의 패턴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어떤 상황이 발생하고, 불신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 대하여 사도들이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새로운 상황에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 전파를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앞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어떤 일, 역사,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상황이라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로 들어갑니다. 복음이 아테네에 왔다는 것은 이교 문화의 심장부를 관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테네는 그리스 헬라 문명의 발상지로서 철학, 문학, 예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습니다. 먼저 아테네에 들어간 바울이 도시를 둘러보는데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아테네의 웅장함이 감동이 아니라 탄식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 최고의 문학, 철학, 예술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시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한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회당에서도 복음을 전했지만, 더 많은 전도는 시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시장이라는 단어는 ‘아고라’입니다. 아고라는 아테네 사람들의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장소입니다. 이 아고라에서 바울이 철학자들과 토론합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철학자들이 바울을 폄하하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의 신선함에 관심을 가졌고, ‘아레오바고’라는 광장으로 데려갑니다. 아레오바고는 로마 통치 아래에서 아테네가 자치 정부 역할을 하는 공식적인 의결 기구였습니다. 재판장 역할도 하고, 새로운 사상을 심의하는 기구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광장 사역 “그때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려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소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 귀에 생소한 것들을 전하니 우리가 그 뜻을 좀 알고 싶습니다’”(19~20절). 바울이 전한 새로운 가르침, 복음의 소식에 새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에 의한 초청입니다. 34절을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게 된 아레오바고 관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긍정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매우 소수였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전한 설교는 가장 탁월한 교차 문화적인 복음 전도의 모범입니다. 우상과 인간의 철학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우상의 도시 한복판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단 한 사람의 결신자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 복음 전파가 시작됩니다. 복음 증거는 언제나 한 영혼을 놓고 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회심자만 있어도 매우 값진 것입니다. 누군가 복음을 심고, 누군가 추수하는 일들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복음 전파는 늘 한 번에 수만 명이 뒤집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역사가 있다면 그 전에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또 기도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광장 사역이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의 상황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를 보면서 분노했습니다. 바울이 분노를 쏟아내면서 아테네 도시를 다녔다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전하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의 탁월함은 청중들과의 접촉점에서 나타납니다. 청중들과의 두 가지 접촉점 “그러자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섬기는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게 됐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22~23절). 첫째,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이여! 내가 보니 여러분은 여러모로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경계심을 풀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긍정적인 언어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문을 연 것입니다. 같은 말도 긍정적인 관계에서 그 사람이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여는 것이 지혜입니다. 둘째, 바울이 아테네에 즐비한 제단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접촉점으로 삼았습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내가 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려주겠다”고 대화를 풀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본론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 신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들 안에 살지 않으십니다”(24절). 바울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당시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전에 살지 않으신다”는 말은 우상 도시 한복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5절).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섬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은 인간이 찾아 만날 수 있고, 인간과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고 각 나라의 연대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의 국경도 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그리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우리가 그분의 자녀입니다’”(26~28절). 인간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설명할 때 구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아테네 철학자들이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유명한 시구들을 인용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교도의 시를 구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이방 철학과 우상에 가득한 사람들을 전도할 때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철학이 잘 나타나는 설교입니다. 세 가지 결론과 결단 촉구 바울이 하나님을 증거한 이후에 세 가지 결론을 내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령하십니다.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30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왜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날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습니다”(31절). 사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세상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종말도 끝이 아니라 심판일 뿐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있기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마땅히 심판받아 죽어야 할 우리가 회개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이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부는 비웃었고, 일부는 더 알고 싶었고, 일부는 믿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에 반응하는 세 부류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아테네와 같은 많은 우상과 신전이 존재합니다. 보이는 신전과 신상은 일부만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교묘한 형태의 우상과 신전이 존재합니다. 바울이 아테네 언덕에서 바라본 그 도시의 우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합니다. 돈의 우상, 술과 마약의 우상, 성욕과 부도덕의 우상, 정치 권력의 우상, 힘과 건강의 우상 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바울이 아테네를 바라보며 품었던 거룩한 분노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혜로운 변론으로 바꿔 증거했던 그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그 청중들의 문화를 통해서 지혜롭게 전하는 노력과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타 종교인들,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8-17 제1504호
[2024 마리아행전] 용서와 간구, 그리고 예배의 엎드림 용서와 간구, 그리고 예배의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 3,600여 명 참석 용서와 간구, 예배의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에 참가한 마리아들이 쏟아낸 간증이자 큰 은혜다.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이 지난 6월 12일(수)부터 14일(금)까지 양재온누리교회, 각 캠퍼스에서 막 올랐다. 순백의 마리아 3,600여 명이 모였다. 집회 첫날에는 찬양사역자 송정미 사모 특순,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합심기도회가 열렸다. 메시지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용서의 엎드림’을 주제로 전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은 용서하는 영혼에게 무한한 기쁨과 사랑을 부어주신다”면서 “용서의 엎드림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회개와 용서의 기도도 이어졌다. ‘타인을 향한 용서의 엎드림’, ‘하나님께 대한 용서의 엎드림’, ‘나라를 위한 용서의 엎드림’을 주제로 마리아들이 뜨겁게 부르짖었다. 전해옥 성도(양재온누리교회)는 “뜨겁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용서해야 할 사람을 생각나게 하시고, 나를 묶고 있는 부정적 생각에서 자유롭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집회 둘째 날에는 이인호 목사(더사랑의교회) 설교, 합심기도회 등이 이어졌다. 이인호 목사는 ‘미스바의 엎드림’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 목사는 “사무엘 한 사람을 통해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뤄졌다”면서 “우리도 사무엘처럼,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광자 권사(영등포구로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에게 우상이 있는지 통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연합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더 뜨겁게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집회 셋째 날에는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성도들이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 모여 함께 예배드렸다. 이한영 부총장(아신대) 설교, 합심기도회, 세리모니 등이 이어졌다. 이한영 부총장은 ‘탄식에서 예배로’를 주제로 설교했다. 이 부총장은 “엎드림의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자로 승화시켜 주신다”면서 “엎드림의 기도가 일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북 상주교회 성도들도 집회에 참석해 더욱 뜻깊었다. 김영미 권사(상주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부르짖는 마리아행전에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 김다애, 홍하영 기자 마리아들의 고백 나라를 위한 엎드림 2024 마리아행전 엎드림은 한마디로 수많은 위기 앞에 있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엎드려 부르짖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리아행전’ 같은 기도운동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행전에 참가하면서 ‘하나님과 첫사랑을 회복하는 엎드림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마리아행전은 말씀을 회복하고, 엎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우상이 세워지고, 내 마음이 세상에 이끌리게 되기에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올해 9월 로잔대회를 통해서 또 한 번의 선교 운동이 우리나라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 이숙현 집사(S브릿지공동체) 회복을 위한 엎드림 저는 이번 마리아행전 ‘엎드림’ 봉사자로 섬겼습니다. 봉사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마리아행전을 준비하면서 은혜는 준비하는 과정과 중보기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엎드릴 때 옆 사람도 엎드리게 되고,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옆 사람도 함께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배웠습니다. 이번 마리아행전에서 저로 인해 옆 사람이 회복되고, 옆 사람을 통해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김용곤 집사(동대문중랑공동체) 갈망을 위한 엎드림 마리아행전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저는 4기 암환자입니다. 오늘 CT를 찍는 날이었는데 하나님이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마리아행전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서산온누리교회에서 참여한 마리아행전 집회도 정말 좋았지만, 모든 캠퍼스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니까 더욱 감사했습니다. 이번 마리아행전에서 그동안 저의 기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할 때 나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갈망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몸이 아프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어서 자녀를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예배자로 양육하고 싶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만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 편은정 성도(서산온누리교회)
2024-06-15 제1496호
[러브소나타]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 5월 15~16일 러브소나타 효고 ‘회복’ 현장 2,635명, 온라인 3,917명, 일본인 643명 결신 한국과 일본이 함께 나라와 교회, 가정과 복음을 위한 회복의 노래를 불렀다. 34번째 러브소나타 효고가 지난 5월 15일(수)과 16일(목)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 ‘회복’을 주제로 열렸다. 러브소나타 집회에 현장 참석자 2,635명, 온라인 참석자 3,917명이 참가했고, 일본인 참가자 643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러브소나타 효고의 포문은 지난 15일(수) 고베동부교회에서 진행된 회복 세미나가 열었다. 일본 러브소나타 실행위원, 일본 교회 성도, 한국 목회자 및 리더십 등 130여 명이 참석했다. 이기원 목사(회복사역본부장) ‘목회 케어와 회복’, 타카미자와 에이코 목사(몽골 키즈홈 서포트팀 대표)가 ‘성경 안의 나’를 주제로 강의했다. 이기원 목사는 “성도들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통합적 방법으로 돌봐야 한다”면서 “성도들이 고통의 자리에서 감사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카미자와 에이코 목사는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쓰여 있다”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받은 사랑을 전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같은 날 저녁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는 러브소나타 전야제 ‘가스펠 나이트’ 집회가 있었다. 일본 교회 성도 1,066명, 한국 성도 632명, 온라인 1,732명이 참석했다. 스즈키 마사야 전도사(무코노소 메구미교회, 청소년 사역자)가 설교하고, LOVE OBI, 잇삐 재팬, CCM 가수 지미선, 옹기장이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스즈키 마사야 전도사는 ‘Re!!’를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면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가 회복을 경험하고, 그 회복의 경험을 나누고 전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16일(목) 오전에는 고베 메리켄파크 오리엔탈 호텔에서 리더십 포럼이 진행됐다. 한국과 효고 각 분야(정재계, 교육, 언론, 의료 분야 등)에서 활동하는 리더십 90명(한국측 40명, 일본측 50명)이 참석했다. 이인용 장로(당회서기), 가네코 미치히토 목사(일본 참의원, 사회복지법인 ‘굿사마리안’ 이사장)가 강의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고베 문화홀 대홀에서 러브소나타 효고 집회가 막 올랐다. 온누리 사랑챔버 오케스트라, 개그우먼 조혜련, 가수 범키, 팝페라 가수 신델라,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배재철, 가스펠보컬밴드 CRUX, Lalo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메시지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회복’을 주제로 전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의 희생을 치르셨다”면서 “그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과의 회복을 경험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코이와 레이나 자매는 “한국 성도들이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주시고, 러브소나타를 열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러브소나타를 통해 일본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관련 기사 4-5면>. / 홍하영, 김다애 기자
2024-05-18 제1492호
[러브소나타 효고 현장에서] 효고는 이제 회복의 땅! 러브소나타 효고 현장에서 효고는 이제 회복의 땅! 일본은 경제력도 좋고,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의 영혼이 메마르고, 큰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산다. 일본의 온전한 회복을 소망하는 러브소나타 효고가 울려 퍼진 이유다. 고베 문화홀을 찾았다. ‘GOD Bless you’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안내팀이 보였다. 스태프와 눈이 마주쳤는데 활짝 웃으며 맞아줬다. 그 덕분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김정희 권사(한강공동체)는 러브소나타 효고 안내팀으로 섬겼다. 지난해 러브소나타 ‘미야기’에서도 안내팀을 섬겼는데, 올해도 안내팀에 배정됐다. 그녀가 안내팀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안내팀은 러브소나타 참가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며 환영합니다. 참가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매번 안내팀을 섬기고 싶습니다. 올해도 안내팀에서 섬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참가자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다는 게 큰 감격입니다. 일본 땅을 짓누르고 있는 아픔과 어둠이 걷히고,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섬겼습니다.” 가스펠 나이트 집회 현장도 찾았다. LOVE OBI, 잇삐 재팬, 지미선, 옹기장이의 찬양이 이어졌는데, 그 찬양을 들으면서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함께 박수하며 찬양하는 성도들도 보였다.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한국 봉사자들이 일본인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눈물로 기도하던 김재란 선교사(경배와찬양)가 고백했다. “가스펠 나이트 집회에 오기 전에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큰 아픔이 있는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꼭 안아주고 왔는데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그 자매처럼 큰 아픔을 가진 일본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한일연합기도회에도 참석했다. 기도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의 봉사자들이 함께 일본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였다. 기도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황상윤 장로(송파B공동체)는 기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꿈을 꿨다. “사람들의 마음이 걱정과 우울 등으로 묶여있습니다.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을 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한국과 일본은 좋지 않은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기를 싫어했던 요나처럼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러브소나타 본 집회 시작 전부터 참가자들이 북적였다. 그들의 눈빛에서 부픈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챔버, 신델라, CRUX, 범키, 개그우먼 조혜련,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배재철의 특순이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의 함성이 고베 문화홀을 가득 메웠다. 이재훈 위임목사가 ‘회복’을 주제로 메시지를 선포했다. 참가자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소망하며 결신서를 작성했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형광봉을 들고 회복의 세레모니도 이어졌다. 장수정 성도(오사카온누리교회)는 러브소나타는 비신자는 물론이고, 일본 크리스천들에게도 위로와 회복 그 자체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일본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갈급함이 있었는데, 그 갈급함을 러브소나타가 채워줬다고 고백했다. “러브소나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시간이지만,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러브소나타를 통해서 일본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에덴으로’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 가사처럼 일본이 에덴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이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홍하영, 김다애 기자 기도하는 사람들 청년이 일본 청년들을 위해 저는 청년의 때 누군가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만난 이 좋은 예수님을 일본인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러브소나타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일본 청년들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일본 청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 은혜로 깨어지고,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과거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한일봉사자가 연합으로 기도하는 자리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청년들과 일본의 청년들이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승리의 자리로 초청해 주시는 부르심에 응답해서 각 나라,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 이태리 자매(여호수아공동체) 한국 성도가 일본 교회를 위해 지난해 러브소나타 ‘미야기’에 참석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자리에 섰는데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먼저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부어주셨습니다. 일본 땅과 일본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일본을 위해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의 작은 섬김을 통해서 일본이 변화되고, 일본 교회가 부흥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사역에 함께 하고 싶어서 러브소나타 ‘효고’에도 참석했습니다. 러브소나타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일본을 회복시키기를 기도합니다. 일본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일본의 크리스천이 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러브소나타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결신자들이 가정과 일터, 사회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고,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 / 김윤희 성도(영종온누리교회) 교사가 일본 다음세대를 위해 일본의 복음화율이 1%가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다음세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미전도종족’이라 불리는 한국의 다음세대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가 사라지는 현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나고 자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실히 느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은혜의 자아’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자아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은혜의 자아가 인생의 어려움을 이길 힘을 길러주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줍니다.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일어설 용기를 줍니다. 일본의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자아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만날 수많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먼저 찾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을 책임지고, 일본을 회복시킬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본 교회에 다음세대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박혜연 교사(양재 차세대)
2024-05-18 제1492호
[러브소나타]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 “교회를 지켜주소서. 일본을 구원해 주소서. 세계에 평화를 허락하소서.” 이 기도는 평생을 전도자로 살았던 어느 남자의 유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이자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이웃사랑을 실천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1888년 7월 10일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아버지와 게이샤(술자리 흥을 돋우는 직업을 가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부유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이듬해 1월 죽었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된 가가와 도요히코는 아버지의 본부인(미치)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양모의 학대와 의붓형제들과 친구들의 놀림, 온갖 천대를 받으며 지냈다. 외로웠던 소년 가가와 도요히코는 혼자 숲과 들판, 창고 등에 숨어 종일 책을 읽곤 했다. 그때의 경험이 외로움과 상실, 혐오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공감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중학생 시절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가타야마학교에서 만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찰스 로건 선교사에게 예수의 생애를 배웠고, 마이어스 선교사 부부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자라면서 받은 사랑이라곤 부모 생전 짧게 받은 게 전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외국인 선교사들은 제2의 부모 같은 존재였다. 선교사들에게 신앙과 지식, 가정과 가족의 의미, 감정의 교감, 이웃사랑 등을 깊이 배운 그가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학비를 대주던 숙부에게 도쿄제국대학 입학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도쿄의 장로교계 대학 메이지가쿠인대학 고등부 신학예과에 입학했다.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했다. 신학, 문학, 철학, 자연과학, 역사, 농학, 예술 등 여러 분야 책을 빠짐없이 읽었다. 그를 가르친 라이샤워 박사는 “메이지가쿠인대학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신학예과를 졸업한 가가와 도요히코가 1907년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고베신학교(후의 고베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고베에서 사역하면서 목회자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치현 오카자키교회와 도요하시일본기독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며 전도자로서 성장했다. 그때부터 대중집회와 거리 전도에 시간을 쏟으며 전도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학교 2학년 때 결핵에 걸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어느 날 깊은 산골에서 가네자와교회 나가오 목사를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는 가가와 도요히코를 나가오 목사가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나가오 목사의 자비로운 성품을 보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빈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고아, 학대, 천대받았던 경험, 중학교와 메이지가쿠인대학에서의 영적, 지적, 사회적 각성 그리고 고베신학교 시절 전도자 경험과 사선(死線)을 넘나들게 만든 병고가 그를 모든 경험이 뛰어난 전도자이자 헌신자로 만들어 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1909년 병고로 인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베의 빈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를 얻어 방화범, 도박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매독에 걸린 거지 등과 함께 살았다. 굴뚝 청소하면서 번 푼돈을 빈민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눠주고, 자신의 옷도 벗어줬다. 불량배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를 주었다. 자신의 집에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고, 초상집에서는 시신을 씻고 장례를 집전했다. 주일에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1914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유학했다. 미국의 슬럼가와 노동 운동에서 시사를 얻어 1917년 귀국한 그는 고베 빈민가로 다시 돌아가 전도와 노동 운동을 펼친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노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농민 협동조합, 보통 선거권 운동 등 사회운동을 펼치며 일본의 사회 회복과 변화를 주도했다. 그는 <사선을 넘어>, <새벽이 오기 전에>, <한 알의 밀>, <빈민 심리 연구>, <우애의 경제학> 등 수많은 저서도 남겼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10억 엔의 인세 소득을 사회운동을 위해 모두 기부하기도 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문학가, 학자, 저술가, 빈민운동가,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로서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일평생 자신이 전도자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는 1960년 별세할 때까지 빈민촌에서 헌신적으로 전도하며 이웃들을 돌봤다. 일본의 변화와 회복을 꿈꾸며 빈민촌에서 평생을 바쳤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들은 기생들이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만큼 그를 통해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분명 평생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었다. 가가와 기념관(Kagawa Memorial Center) 주소: 5 Chome-2 20 Azumadori, Chuo Ward, Kobe, Hyogo 651-0076 홈페이지: core100.net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고베개혁신학교 평소 일본에 대한 내 생각은 긍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생각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역사적 사건들 뿐만아니라 현재에도 일부에서의 차별적 시선과 이념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러브소나타 효고에 참석하게 되었다. 권사님들과 함께 러브소나타와 일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가 지속되며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채워주셨다. 그 사랑의 마음을 안고 효고에 왔다.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가 방문한 곳은 ‘고베개혁신학교’였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교정이 우리를 반겼다. 고베개혁신학교는 1947년 4월 일본 기독개혁파교회에 의해 개교했다. 요시다 타카시 교장 외 4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고, 강사 16명이 강의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강사보다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11명이 전부였고 올해는 신입생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 보니 신학교에도 학생이 많이 없다. 어느 권사님은 “크고 멋진 고베개혁신학교의 건물과 대비되는 작은 인원이지만, 그만큼 신학교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절실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선물과 찬양 특순 등을 준비했다. 선물은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와 물품들로 꾸러미를 만들었다. 찬양은 ‘GOD Bless You’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준비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받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감사가 밀려왔다. 특순 시간이 감동이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일본어로 부르고, ‘GOD Bless You’를 한국어로 부르는데,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이 같은 찬양을 화답가로 준비해 왔다. 화답가를 한국어로 준비해 와서 마지막 찬양은 서로를 축복하며 합창했다. 고베개혁신학교의 비전은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교사, 사상과 품행이 방정해서 모든 것에 강하게 맞설 수 있는 부끄러울 것 없는 목자, 박해와 유혹, 빈곤에 굴하지 않고 겸허히 기도로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 학교의 비전처럼 많은 젊은이가 교사와 목자, 전도자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고베개혁신학교를 통해서 일본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다음세대가 더 많이 양성되기를 소망한다. / 김지희 권사(서빙고 권사회장)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 나는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비즈니스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일본은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러브소나타 참석을 위해 방문한 일본은 조금 특별했다. 사업적 시선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측면에서 일본을 바라보고 싶었다. 함께 러브소나타에 참석한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과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방문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는 1950년 2월 16일 ‘히가시나다신아이기독교회’로 개척했다. 당시 미국에서 온 한 선교사님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세워져서 선교센터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은 청각장애인들을 섬기는 사역도 하고 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교회가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크리스천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일본인들의 영혼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감동이 있었다. 한 성도님이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할 텐데 열심히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일본은 종교가 많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나라다.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갈급하고 메말라 있다. 이 나라에서 전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포함한 일본 교회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공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러브소나타가 일본 교회에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갈급함을 느끼는 한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 김화동 성도(영종온누리교회)
2024-05-18 제1492호
[만나고 싶었습니다] 모든 영혼의 필요를 따라 복음 증거!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영혼의 필요를 따라 복음 증거!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 이재훈 위임목사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나왔다.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 23년 역사를 함축한 책이다. 2001년 40대 남성을 위한 맞춤전도집회 ‘비상구(EXIT)’’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47회 집회가 이어졌다. 그 수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은혜와 열매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 아름다운 축복의 역사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전도를 소망하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을 위한 메뉴얼이다. 다음은 이재훈 위임목사와의 일문일답. / 김현준, 홍하영 기자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맞춤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원과 지혜를 최대한 활용해서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2001년부터 현재까지 총 47번의 맞춤전도집회를 개최했습니다. 바로 그 역사를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에 담았습니다. 23년 역사의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 사명과 비전, 방법과 원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더불어 온누리교회 맞춤전도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변화를 도모하고, 한국 교회가 맞춤전도를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한국 교회에 ‘맞춤전도집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맞춤전도집회를 기획하고 실행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1996년부터 2000년은 온누리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새가족이 급증했습니다. 새가족 중에는 온누리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처음 믿은 성도들도 있었지만, 다른 교회를 출석하다가 옮겨 온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주일 새가족 교육 1주차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타 교회에서 온 성도가 훨씬 큰 비율을 차지하는 교회가 되면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길로 하용조 목사님을 찾아가 새가족 사역을 내려놓고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은 불신자들만 전도하는 사역을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제 마음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전도사역본부’를 신설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전도사역본부를 신설하고 맞춤전도집회 기획과 사후 양육 등을 준비하면서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용조 목사님께 전도집회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시대적, 목회적 상황에 따라 대상을 세분화하고, 맞춤전도집회 장소를 레스토랑으로 변화시켜 소수만 초청하자는 단순한 아이디어 수준이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시행해 보라고 하시며 지지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현재까지 총 47번 맞춤전도집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와 열매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는 2001년 12월 열린 첫 번째 맞춤전도집회 40대 남성을 위한 ‘비상구(EXIT)’입니다. 가장 풍성한 열매가 맺힌 집회도 그때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40대 남성들 상당수가 IMF 외환위기로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었고, 자살률이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불신자 대부분이 40대였습니다. 그래서 40대 남성만을 대상으로 맞춤전도집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세대만 지정해서 집회를 연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맞춤전도집회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교회가 믿지 않는 40대 남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40대 남성들이 교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아울러 예배당을 레스토랑처럼 꾸민 시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긴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3일 동안 이어진 40대 남성을 위한 프로그램과 메시지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수많은 중보기도자가 참여했는데, 전도 대상자들이 그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맞춤전도집회 메시지는 40대 남성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도록 도왔습니다. 당시 40대 남성 750명을 초청했는데, 무려 530명이 결신했습니다.” ‘전도’라는 단어조차 부담스럽고 불편해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위한 맞춤전도 전략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도는 반드시 대상자의 필요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전도를 불신자들의 필요와 연관시키지 않으면 그들은 복음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의 세계관과 필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복음을 그 필요에 적합한 언어로 해석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은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고, 전도 대상자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맞춤전도에서는 전도자와 메시지가 전도 대상자의 필요에 적합한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메신저가 전도 대상자의 필요와 문제를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메시지도 전도 대상자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도 대상자들의 세계관과 문화, 현재 문제와 필요를 깊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전도 도구와 방법 또한 대상자의 필요에 부합해야 합니다." 앞으로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가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하며, 변화해야 합니까? “세 가지 방향에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를 전도하는 전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SNS나 온라인을 이용한 전도 방법이 있지만, 결국 인격적 대면이 이뤄져야 하는 전도의 성격상 그들과 어떻게 관계 형성을 하고, 복음을 전할지에 대한 숙제가 있습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초개인화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초개인화 문화에 맞춤화된 전도 전략이 필요합니다. 온-오프라인을 병행하는 방법부터 일대일 전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도 실행이 요구됩니다. 둘째, 타 종교와 세계관별 맞춤화된 메시지와 전도 전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에 더욱 집중하려면 타 종교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타 종교의 세계관 속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할지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 시대 세계관과 타 종교별 맞춤화된 메시지와 전도 철학을 계발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한국의 작은 교회들이 적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맞춤전도는 많은 인원을 초청할 때보다 적은 인원일 때 효과적입니다. 작은 규모의 교회들이 맞춤전도를 실행하면서 적합한 모델들을 더 많이 만들면 한국 교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전도 패러다임이 정착할 것입니다.” 신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가 독자들에게 어떤 영의 양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 전도를 했는지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을 듣는 대상의 수준과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전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하셨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맞춤전도 원리는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맞춤 사역의 절정입니다. 맞춤전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계획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영혼의 시대와 문화, 필요에 따라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를 읽고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2024-08-03 제1503호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아주 특별한 경험과 고백 발달장애인을 위한 예배공동체 사랑부에서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이하 행복한 부부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진새골 사랑의집에서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가 개강했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장애인 자녀를 둔 사랑부 가정이 성경적인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부와 가정이 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행복한 부부학교는 사랑부 부모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사랑을 다시 누리고, 자녀와 부부를 위한 아름다운 가정으로 회복되는 거룩한 장(場)이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발달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 겪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애인 자녀의 주돌봄자 80% 이상이 부모인데, 그에 따른 부모의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어려움이 매우 크다. 여기에 장애가 있는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보호자 사후 자녀 돌봄에 대한 막막함도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한 편견과 차별이 사회적 고립마저 발생시키고 있다.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 소식을 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랑부 가정을 위한 행복한 부부학교가 그래서 필요하고, 중요하다. 지난 6월 15일(토)과 16일(일) 열린 첫 번째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한 최난숙, 박동희, 김혜숙 성도의 눈물과 고백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면서 정말 힘들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가정으로 회복될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축복의 통로 최난숙 성도(서초C공동체)는 장애가 있는 자녀가 하나님 축복의 통로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아들의 장애를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했었다. 25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터라 더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의 장애를 자연스레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장애가 있는 아들 덕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행복한 부부학교가 이 사실을 재확인 시켜줬다. 특히 강미향 목사가 전한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는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회복을 도왔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와 자녀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억하게 하셨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라는 정체성을 발견했다. 장애인 자녀는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장애인 자녀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더욱 힘써 양육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또한 행복한 부부학교를 섬기는 목사, 장로, 조장 부부, 교사들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자신도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겸손한 섬김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언약결혼식’이었다. 결혼 30년이 지나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해야겠다고 계획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언약결혼식을 하고,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어서 무척 행복했다. 행복한 부부학교 덕분에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 박동희 성도(양재 사랑부)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 배움이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받은 가장 큰 은혜다. 장애가 있는 아이는 스스로 의사결정하거나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모가 매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가 많은데, 주변에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것과 내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통로라는 것도 배웠다. 물론 그동안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수없이 고백했지만, 결국 내 중심으로 자녀를 바라봤기에 괴롭고 힘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존귀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그 자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그래서 자녀 양육만큼 부부 관계도 소중하다는 배움이 특별하고 고마웠다. 늘 자녀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석하면서 부부가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바로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자녀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희 성도는 ‘언약결혼식’에서 아주 특별한 고백도 했다.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가정을 이뤄서 축복의 통로가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부부 십계명을 함께 적고, 부부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 되기로 기도했다. 자녀 양육보다 먼저 부부관계를 아름답게 형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에게 하나님 축복의 통로이자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김혜숙 성도(서빙고 꿈사랑부)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선물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더 인정해 주고, 세워주는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아름다운 변화를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남편과 함께 교육받으면서 경험했다. 사실 김혜숙 성도는 가정의 변화를 위해서 남편과 함께 교육을 듣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부 모두에게 의지가 있어야 하고, 바쁜 남편을 교육에 참여시키는 게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행복한 부부학교에 참가했고, 하나님 앞에서 부부 십계명을 만들고, 함께 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롭게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부부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한 것 자체가 행복이었고, 큰 변화였다, 김혜숙 성도 부부는 벽에 걸린 부부 십계명을 한 번씩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혜숙 성도의 자녀는 또래에 비해 발달이 늦다. 육체적인 어려움도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네 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늘 도와줘야 한다. 그 때문에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는데, 행복한 부부학교에서는 아이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세상에도 장애 아동을 돌봐주는 시스템이 있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 행복한 부부학교처럼,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쉼을 얻고, 부부가 함께 온전히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아이들을 돌보는 돌봄 프로그램이 더 많이 필요하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의 모든 중심이 아이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부 관계가 나빠지기도 하고, 결국 장애인 자녀를 돌보다가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숙 성도는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그동안 아이에게는 온 신경을 쓰고, 예쁘게 말하면서 정작 남편에게는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인정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를 더욱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로 다짐했다. 행복한 부부학교에서 자녀를 따로 돌봐줘서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결국,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은 부부가 장애인 자녀에게서 조금 벗어나 서로를 인정해 주고, 사랑을 고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회 자체가 회복이다. 아이에게만 모든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는 독립심을, 부부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선물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문의: 010-8567-1808
2024-07-06 제1499호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온누리교회 사회선교본부가 출범 1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이 지난 5월 25일(토) 온누리청소년문화센터 소극장에서 ‘온누리 사회선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막 올랐다. 사회선교본부 리더십 및 성도 231명이 참석했다. 사회선교본부 10주년 기념 포럼은 사회선교 역사 소개,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 결과 발표, 이재훈 위임목사 특강, 임희국 교수 특강, 패널 토의,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기훈 목사(사회선교본부장)가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역사’를 주제로 지난 10년 동안 걸어온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발자취를 나눴다.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아이디어 공모전에는 11개 팀이 참가했다.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SNS청년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싶은 마음에 공모전에 참가했다”면서 “앞으로도 목마른 영혼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재훈 위임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의 나아갈 길’을 주제로 특강했다. 이 목사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 비전은 국내외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선교’를 주제로 강의했다. 임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시대와 상황의 요청에 응하는 사회선교는 두 바퀴의 수레처럼 항상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선교의 실천 방안을 구체화하고, 사례를 나누는 패널 토의도 이어졌다. 임희국 교수, 정운오 장로, 박순길 장로, 박승호 선교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는 서빙고온누리교회 S브릿지공동체, 마포공동체,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인천온누리교회 북누리공동체가 발표했다. 구경용 성도(도곡공동체)는 “다락방 지체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곳을 찾아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면서 “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김현주 장로(사회선교본부 다문화팀)는 “온누리교회 사회선교가 10년 동안 어떻게 달려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준비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 뜻깊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회선교가 더욱 확장되고, 더 많은 성도가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 당선작 문턱 낮추고, ‘사회선교 대학청년부’ 세우기! 온누리교회 청년들은 사회선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청년 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사회선교를 들어본 적 있다’가 70%, ‘들어본 적 없다’가 30%였는데, 70% 응답도 대학청년부 사회선교 공모전과 이기훈 목사님의 리더십 특강 때 처음 들어본 청년들이었다. 둘째, 청년들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어한다. 설문에 응답한 청년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 87명이 사회선교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회선교에 접근하는 방법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사회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거나 신청 과정에 문턱이 높다고 답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춰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사회선교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SNS청년부 아웃리치가 떠올랐다. SNS청년부 국내외 아웃리치 신청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사회선교 접근성을 높이는 데 차용하려 한다. 첫째, 예배 시간에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사회선교 리더십들과 지속적인 교제 시간을 마련한다. 더불어 사회선교를 경험한 지체들의 간증을 나눈다. 사회선교를 지속적으로 노출해서 더 많은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둘째, 사회선교 교육과정을 개설한다.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는 말씀을 기반으로 한 여러 교육과정이 있다. 사회선교도 바이블아카데미, 기독 OTT 퐁당 등을 활용해서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면 사회선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셋째, SNS를 활용한 소통 채널을 확대한다. 사회선교에 대한 정보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사역별 최신 현황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캘린더를 활용해서 사역 신청을 바로 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활성화하고, 카카오톡 등 SNS를 개설해 신속하고 활발한 소통을 돕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대학청년부 사회선교팀’을 세워서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섬기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선교 영역에서 은사를 쓰임 받도록 달란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둘째, 청년들의 마음이 가는 사역을 제안해서 운영한다. 셋째, 유튜브, 인스타 등을 미디어에 좀 더 친숙한 청년들에게 운영을 맡겨 사회선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도록 기회를 준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마음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흘려보내는 청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 이해인, 염길현, 백은지 자매(팀브링) 공동체 1다락방1사역 사례 발표 도곡공동체의 이웃 향한 사랑 그리고 섬김 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는 희락다락방, 긍휼다락방, 화평다락방, 소망다락방, 은혜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곡공동체 모든 다락방이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 사회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희락다락방은 하나공동체, 정선 동강교회, 우리들학교를 섬기고 있다. 한국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탈북민들을 지원하고, 하나공동체 예배를 섬기고 있다. 북한에 쌀을 보내고, 탈북민 청년들이 지내는 기숙사에 반찬을 전달하는 봉사도 했다. 2018년 이후 쌀을 보내는 사역이 정부의 제재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농촌교회를 새롭게 섬기게 되었다. 코로나19 기간에는 정선 동강교회를 도왔다. 봄에는 밭을 경작하고, 여름에는 블루베리를 소출하는 일을 도왔다. 희락다락방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섬기기도 했다. 희락다락방에서는 탈북민 학생들이 공부하는 우리들학교 봉사도 하고 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을 사는 탈북 학생들이 교회와 사회의 일꾼 되기를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다. 긍휼다락방은 굿윌스토어에서 장애인들의 자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굿윌스토어를 찾아가 물건을 분류 및 선별하고, 포장해서 판매를 돕는다. 1년에 두 번은 장애인 100명에게 간식과 선물을 준다.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 화평다락방은 서울농아교회를 섬긴다. 농아교회는 국내 및 해외 선교사 파송 사역을 하고, 유튜브로 수어 설교 방송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서울농아교회를 방문해서 수어로 찬양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한다.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역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소망다락방은 양평 덕수교회와 송파구 거여동 임마누엘집을 섬긴다. 양평 덕수교회로 아웃리치를 가서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교실’을 운영했다. 거여동 임마누엘집에는 쌀, 과일 등 생필품을 전달하고, 직업 재활 작업을 지원했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 교제도 했다. 은혜다락방은 재한몽골학교를 섬기고 있다. 재한몽골학교는 학생 16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이주민 학생 350명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나섬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을 도와서 몽골뿐만 아니라 인도와 필리핀 등지에 온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해서 급식 봉사와 설거지, 청소 등을 한다. 앞으로도 도곡공동체가 사회선교에 앞장서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를 기대한다. / 구경용 성도(양재온누리교회 도곡공동체)
2024-06-01 제1494호
[특집]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을 찾아라! ‘어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우정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독거노인들에게 따듯한 정(情)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다. 그들은 때마다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음식을 대접하고, 집수리도 해준다. 그들의 얼마나 정성스럽게 섬겼는지 꽁꽁 얼어 있던 어르신들의 마음이 봄날 눈 녹듯 녹아내렸다. 지금은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과 독거노인들의 뜨거운 우정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박온유, 이지영, 이희정, 김차영, 김현수, 김태현, 진병수, 공혜진, 김호영, 황명진, 정다영, 방유석, 노창우, 강원조.’ 독거노인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이름이다. 청년과 노인이라는 단어 옆에 ‘우정’이라는 말이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굉장히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은 세대 간 갈등이 세계 1위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영국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갈등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28개국 시민 2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12개 갈등 항목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7개 항목에서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그중에서 빈부격차와 성별, 세대 갈등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28개국 평균 40%대인데, 우리나라는 80%에 달할 정도였다. 비율이 2배 가까이 높았다. 2018년 영국 BBC에서 발표한 자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전 세계 27개국 시민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개 갈등 항목에서 우리나라가 남녀갈등 1위, 세대갈등 2위, 빈부갈등 4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 세대갈등이 세계 최고라고 공인받을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인데, 청년과 노인의 우정이라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세대갈등을 넘어서게 만들었을까? 청년과 노인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예수님 사랑으로 연결되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결성된 건 4년 전이다. 전에는 브릿지33+공동체와 산마루교회 성도들(노숙인 포함)이 함께 서울역 청소를 했다. 몇 년 동안 해오던 사역이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멈춰 섰다. 아쉬운 마음에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다른 사역을 찾고 있었는데, 서빙고온누리교회 이웃사랑팀에서 독거노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로 지내며 외로움과 가난과 싸우는 어르신들의 사연이 브릿지33+공동체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브릿지33+공동체는 양재온누리교회 소속 청장년 공동체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기꺼이 매월 서빙고동을 찾기로 했다. 마음이 맞는 청년 6명이 모여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의 태동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지역상품권을 들고 서빙고동, 동빙고동, 보광동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분기별로는 생필품과 반찬 등이 담긴 ‘사랑의 상자’를 들고 찾아간다. 추수감사절 사르밧프로젝트에서 쌀 나눔을 할 때도 있다.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사역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만들어진 이후 4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동안 팀원이 늘어서 현재 14명이 동역하고 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만나는 어르신 대부분 홀로 지내신다. 무엇보다 정(情)이 고픈 분들인데, 웬일인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이 찾아갔을 때도 몇 번 오다 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으셨다. 청년들은 어르신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가 말벗이 되어드리고,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어르신들의 생일잔치를 열어드리기도 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4년 동안 꾸준히 이어지는 청년들의 사랑과 헌신 덕분일까? 어르신들이 하나둘 마음의 문을 여셨다. 청년들이 처음 찾아갔을 때는 “상품권만 주고 갈 거면 오지 말라”고 문전박대 하던 어르신들이 청년들이 계속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안부를 묻고, 준비한 선물을 나누고 일어서는 청년들에게 “나랑 같이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할 정도다. 귀가 잘 안 들려서 대화가 쉽지 않지만, 청년들의 전화만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청년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손자들이 집에 오는 것처럼 깔끔하게 단장하고 맞아주셨다. 한 어르신은 청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90세, 몸이 많이 아픈 어르신을 위해 청년들이 찾아갈 때마다 따듯한 국수나 부드러운 죽 등을 챙겨갔다. 그 어르신의 식사를 도우면서 복음을 전했다. 청년들의 사랑이 그 어르신의 마음 밭을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복음의 씨앗이 금세 심겼다. 그 어르신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쁘게 고백하면서 청년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사랑과 섬김 덕분에 어르신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 청년들은 복음 전하는 기쁨과 조금씩 마음을 열고, 변화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다. 박온유 자매(브릿지33+ 이웃사랑팀장)가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뜨거운 우정을 쌓은 비결을 소개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면 나이를 떠나 정(情)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즐겁습니다. 저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애틋하고, 그분들께 더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어르신들도 저희의 마음을 잘 아시고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십니다, 손을 한 번 더 잡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합니다. 더 많은 어르신과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드디어 꿈꾸던 일을!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은 매월 어르신들을 찾아뵙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어르신들 댁에 갈 때마다 열악한 환경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며 제대로 닫히지 않는 현관문, 불이 들어오지 않는 형광등, 타일이 깨지고 곰팡이 핀 화장실, 다 벗겨진 벽지, 얼음장 같은 바닥 등 어르신들의 주거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그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몇몇 자매들이 어르신들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이 그 응답으로 방유석, 김태현, 강원조, 황명진 형제를 보내주셨다.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인데, 안전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따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팀원 대부분 자매들이라 가구나 장판을 교체하고, 수도관과 전기 배선을 만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귀한 형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꿈만 꾸던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 댁을 드디어 수리할 수 있었다. 고장 나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화장실 환풍기를 고치고, 전등 스위치 배선 정리와 전등 교체를 해드렸다. 온수가 안 나와서 제대로 씻을 수 없던 어르신을 위해서 보일러를 수리해드렸다. 안방 전등 전기 점검, 현관문 닫힘 조절기 설치 및 페인트칠, 주방 양념통 선반 설치, 청소 및 물건 정리, 모기장 교체, 커튼 달기 등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대신해서 심부름도 하고 있다. 시간과 정성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청년들이 자비량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어르신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뜨거운 우정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브릿지33+ 이웃사랑팀 청년들의 아름답고 귀한 헌신이 계속 이어지도록 더 많은 관심과 기도, 도움과 동역자가 필요하다. 문의: 010-2024-4220 기도제목 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께 복음이 전해지도록, 어르신들이 영육이 강건하도록 2. 보일러 비용이 비싸서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사용하는 어르신들에게 난방비가 지원되도록 3. 문두현 어르신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눈과 치아 진료를 제대로 못 받는데 치료 받도록 4. 브릿지33+ 이웃사랑팀이 건강과 물질의 어려움 없이 어르신들을 계속 섬길 수 있도록
2024-05-04 제14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