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 영적생활 방역이 시급하다
주일강단
영적생활 방역이 시급하다
느 7:1~7
/ 이재훈 목사
코로나19 팬데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이 재난을 통해서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이 재난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이 땅에는 참으로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이 재난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 교훈을 새롭게 얻어야 합니다. 이제 제도적 방역을 뛰어넘어 생활방역 체제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방역에 쏟는 모든 노력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지키는 노력을 뛰어넘어서 이제는 영적 생명을 지키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사람, 올바른 위치, 올바른 직임
느헤미야와 그 백성들을 통해서 완공된 예루살렘 성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방어시설일 뿐입니다. 성벽 그 자체로는 보안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성벽이 아무리 견고하다 할지라도 누가 그 성문을 어떻게 지키는가와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누가 임명하고, 훈련하고, 감독하는가에 따라서 성벽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보안체계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한 인격, 신실한 성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곧 가장 확실한 요새입니다. 영적 바이러스를 차단하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적 성벽입니다. 끊임없이 문화와 제도를 파고 드는 바이러스를 차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곧 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영적 성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벽이 완공된 후에 느헤미야의 행적이 매우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완공 이후 백성들을 생활방역 체제로 이끌었습니다. 성벽이 완공되었을 때 백성들이 흥분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52일 만에 성벽이 완공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습니다. 대적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이제 축하잔치도 하고,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지난 50일 동안 가졌던 긴장을 전혀 풀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목적을 향하여 이제 한 걸음 나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의 위협도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벽은 완성되었지만 대적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벽 완공을 방해하는 것만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대적했던 세 사람의 이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입니다. 그중에서 도비야는 당시 유다 지도자들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경제적 동맹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혼인을 통해서도 여러 귀족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52일 중간에 도비야는 유다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계속 느헤미야를 압박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을 통한 방어계획이 아니라 영적으로 온전한 방어계획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 전반부는 성벽을 세워가는 여정입니다. 그때는 어쩌면 백성들이 성벽을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성벽이 백성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언제나 목표 그 너머를 바라보며 준비합니다. 성벽 재건이 목표였지만 느헤미야는 성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리더십 너머를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사람을 올바른 위치에 올바른 직임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리더십의 최고 절정은 자신이 없을 때 잘 되도록 해 놓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맡았을 때 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진짜 리더십은 자신이 없을 때 잘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후를 바라보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완공한 이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생활예배자’로 다시 서야합니다
“성벽을 건축하고 문짝들을 달고 나서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들과 레위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나는 내 동생 하나니와 성의 사령관 하나냐를 세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나냐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많은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1~2절).
가장 먼저 세운 사람들이 레위인들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성벽을 세운 이유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가 회복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미 완공되어 있었습니다. 1차 포로 귀환 때 당시 정치지도자가 스룹바벨이었고, 영적 지도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이 힘을 합하여 백성들을 이끌어서 1차 귀환한 백성들이 16년 동안 방치되었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거주할 수 없었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대적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위협 속에 시달렸기 때문에 성전에서의 제사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재건됨으로써 성전에서의 제사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가장 먼저 레위인들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 시대 영적생활 방역의 가장 첫 번째 원칙은 우리가 생활예배자로 다시 서는 것입니다. 정기적인 예배만이 아니라 개인생활 예배인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하나님의 말씀묵상, 개인기도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이 시대에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손을 씻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코로나19 시국을 지나면 신앙이 완전히 두 갈래로 갈라질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더욱 철저하게 예배드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신앙의 차이가 벌어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방역은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감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면역력이 높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사망자보다 완치자가 월등히 많은 것은 면역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면역력은 어디서 옵니까? 함께 모이는 공예배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생활예배에서 옵니다. 이것이 영적생활 방역의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 기간 동안 큐티에 더욱 힘쓰고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상을 시청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영상을 시청하는 것과 내가 예배드리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 시청을 통해 예배로 나갈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청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시청자를 넘어 예배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영적생활 방역의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충직하고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느헤미야는 레위인들을 세훈 이후 성전에서의 제사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고, 정치와 사회질서를 바로잡았습니다. 자신을 도와서 예루살렘 성읍을 이끌어갈 책임자로 두 사람을 세웠습니다. 한 사람은 행정책임자인 자신의 동생 하나니, 또 한 사람은 군사책임자 하나냐입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형편을 알린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는지가 말씀 곳곳에 나옵니다.
“나도, 내 형제도 내 형제도, 내 부하도, 나와 함께 경비하는 사람도 옷을 벗지 않았고 각자 무기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물 마시러 갈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느 4:23).
하나니는 옷을 벗지 않고 일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집중하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12년 동안 일할 때도 사례를 받지 않았고, 그 형제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되던 해, 곧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지만 나와 내 형제들은 총독의 몫으로 나오는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느 5:14).
느헤미야와 그의 동생 하나니는 청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하나니를 동생이라고 임명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니는 성벽 재건 시작부터 끝까지 아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형의 헌신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그와 함께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이 영문의 관원 하나냐입니다. ‘영문’은 OP(Outpost) 즉 초소장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를 주목했습니다. 작은 초소를 성실하게 관리하는 그를 보고 전체 군사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동생 하나니와 성의 사령관 하나냐를 세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나냐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많은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2절).
느헤미야는 하나냐를 충직하고 하나님을 다른 사람보다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나니도 동일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 충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생활 방역의 중요한 두 번째 원칙을 발견합니다. 충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지도자가 가장 중요한 문지기입니다. 모든 성벽을 지키는 문지기들보다 중요한 사람이 바로 한 두 사람의 지도자입니다. 만일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들이 충직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방역체계가 뚫린 것입니다. 영적방역 체계가 뚫린 것입니다. 나라가 어수선해지는 게 수많은 백성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워서 입니까? 나라가 혼란해 지는 것이 수많은 국민들이 도둑질해서입니까? 소수의 지도자 몇 사람이 도둑질해서 아닙니까? 교회가 혼란해지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많은 성도들이 다툼을 일으켜서입니까? 아닙니다. 소수의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다툼이 아니라 소수 지도자의 타락 때문에 교회가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다투게 하는 것은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사회 지도자든 교회 지도자든 지도자는 문지기입니다. 하나니와 하나냐의 충직함, 정직함, 성실함이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해가 높이 뜰 때까지 예루살렘 성문들을 열지 말고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동안에도 문을 단단히 닫고 빗장을 질러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경비로 세워 각기 지정된 초소와 자기 집 앞을 지키게 하라.’ 그 성은 크고 넓은데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 없고 제대로 지은 집들도 아직 얼마 없었습니다”(3~4절).
성문을 어떻게 지킬지 철저하게 대책을 세웁니다. 해가 중천에 떠야만 성문이 열립니다. 해가 환할 때만 잠시 개방을 허용합니다. 그런데도 철저히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문을 닫고 빗장을 질러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문을 단단히 잠가야 합니다. 빗장을 질러놓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제3의 분류할 수 없는 성이 있다’는 것이 법문에 들어가는 순간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법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 사회 언론과 교계 일부 언론이 법 제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가리켜 ‘가짜뉴스를 남발한다’고 비판합니다. 무엇이 가짜 뉴스입니까? 남자와 여자 외에 제3의 성이 있다는 것이 가짜 아닙니까? 그것을 반대하는 게 가짜뉴스입니까? 과학적, 의료적으로 그런 성향이 있는 것과 그런 염색체가 있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성향이 있다고 해서 남자나 여자가 아닌 제3의 성염색체가 있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있는 것처럼 명문화 하는 것은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을 단단히 닫고, 빗장을 질러놓아야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문을 열어 서는 안 됩니다. 최근 가톨릭 로마 교황이 동성결혼법을 지지하며 문을 활짝 열고 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모든 공립학교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사람이 미국이 영적으로 타락하는 문을 연 것입니다. 이러한 문을 여는 일이 없도록 충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세워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와 하나냐를 세운 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문을 단단히 닫고 빗장을 질러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이고, 답답한 모습이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없는 건 없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제3의 성은 없습니다. 문을 열어 서는 안 됩니다.
영적 공동체 일원으로 속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세우고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다윗도 인구조사를 했는데 사탄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동기가 다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세력을 과시하고 군사력을 의지하기 위해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생각에서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정반대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우고, 성전 제사를 회복시키고, 지도자들을 세우고, 가장 중요한 예루살렘에 마땅히 거주해야 할 사람들을 거주시킴으로써 예루살렘 공동체를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어느 계보 사람들이 얼마나 돌아왔는지를 조사합니다. 인종을 차별하기 위해 조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인종을 차별하기 위해서라면 ‘느디님’이라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사실 이방인입니다. 레위인들을 수종 드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를 속여서 살아난 기브온 사람들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힘든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신분에 있던 사람들이 392명이나 돌아왔습니다. 일반 레위인들보다 훨씬 많이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종차별을 위한 조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마땅히 거주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 소속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영적생활 방역 세 번째 원칙이 나옵니다. 영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속해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거리두기가 미덕이 되었습니다. 교회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순으로부터도 거리두기 하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예배에서 같이 붙어 앉을 수는 없지만 마음을 나누며 더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해주는 공동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에 거리를 둔다면 영적 방역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더욱 힘써 화상으로든, 전화로든, 편지로든,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소속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함께 나눠야 할 관계에 더 깊이 소속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들 중에서 목회를 잘 하다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시험에 드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쁜 일이 생길 때 함께 나눌 수 있는 영적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살아 있는 성도들은 시험에 잘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방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중보기도 하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방역입니다.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성벽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성벽 재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제사를 회복시키고, 지도자를 회복시키고, 예루살렘 공동체를 회복시켰습니다. 우리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영적생활 방역을 지켜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활예배로 면역력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와 절대로 거리두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하나님 앞에 함께 나감으로써 어려운 시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공동체로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0-10-31
제13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