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승리의 때가 오고 있다
[주일강단]
승리의 때가 오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0~24
/이재훈 위임목사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악으로 인해 상처입고 고통 받는 성도들의 탄원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거룩하신 대주제여 언제까지 우리의 핏값을 갚아주지 않으시려는 것입니까?”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일곱 인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일곱 대접의 재앙이 주어지고, 결국 마지막 재앙,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5~16장 말씀을 통해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가득한 악은 심판으로도 씻기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판이 집행되는 한복판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지옥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이 사단과 함께 가는 곳입니다. 진리가 눈앞에 있는데도 따르지 않고, 거짓을 끝까지 고집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단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 심판입니다.
“또 나는 물을 주관하는 천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거룩하신 이여, 주는 공의로우십니다. 이는 주께서 이것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주는 그들에게 피를 주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마땅합니다.’ 이때 나는 제단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주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계 16:5~7).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정확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했던 이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모든 것을 의롭게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심판 그 자체가 결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함께 베풀어지는 심판이기에 의롭습니다. 셋째, 마지막 심판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으로 구원이 함께 베풀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 나타난 재앙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임했던 열 가지 재앙을 연상하게 합니다. 첫 번째 출애굽이 미래에 있을 진정한 출애굽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재앙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리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2절을 보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나타납니다. 구약 역사에서 물을 통과해 구원을 받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바로의 군대가 수장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그 가운데 건짐을 받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왜 물이 등장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심판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심판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이 내 머리에 있는 것은 ‘내가 수장되었다’,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에서 다시 나올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죽음을 통과해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물은 심판의 물이며, 구원의 물입니다.
심판 받을 대상과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주께서 하신 일들은 크고 놀랍습니다. 나라들의 왕이시여, 주의 길들은 공의롭고 참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이는 주만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라들이 와서 주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이는 주의 의로우신 일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계 15:3~4).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통해서 나라들이 주 앞에 나와 경배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목적은 영원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 대상에게 어떻게 심판이 임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내게 말했습니다. ‘이리로 오너라.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여 주겠다. 땅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했고 땅에 거하는 사람들도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 인해 취했다’”(계 17:1~2).
이 여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한 붉은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온갖 화려함으로 장식하고 손에는 가증스럽고 불결한 것으로 가득한 금잔이 있고, 이마에는 큰 바벨론 창녀들과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로 취해 있었습니다. 성도들을 공격하고, 어린 양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였습니다. 심판받을 대상입니다. 그들이 성도들을 공격했지만,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성도들이 순교로써 승리합니다. 이미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 17:14).
어린 양을 대적하는 이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이 그들을 이기셨고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들을 이길 것”이라는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고, 승리의 날, 승리의 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창녀는 성적 타락의 이미지입니다. 우리에게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알려줍니다. 성적 타락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단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상을 섬기게 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사단은 성을 이용해 인생에 대한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사랑은 소중한 선물임에도 그것을 돈으로 사는 것으로 속입니다. 대인관계는 헌신임에도 불구하고 거래관계로 만들어버립니다. 인간의 성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영적 도구인데, 그것을 탐욕의 도구로 바꿔버리는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음행 자체도 문제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우상을 숭배하게 합니다. 고대부터 우상 숭배는 반드시 음행과 관련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이 큰 창녀는 <요한계시록> 19장 이후 나오는 동정녀 신부와 대조됩니다. 17~18장에 큰 음녀가 나타나고, 19장부터 정결한 신부가 나옵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순결한 동정녀 신부가 등장합니다. 음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지만, 이 신부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헌신합니다. 음녀는 여러 보석으로 장식된 현란한 옷을 입고 있지만, 신부는 깨끗한 세마포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음녀는 왕들과 상인들을 유혹하고 경제적 정치적 부패로 얼룩져 있지만, 신부는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습니다. 두 여인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모든 인간을 큰 창녀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거짓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큰 창녀는 짐승에게 이용당하고, 짐승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악은 결코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죽일 뿐입니다. 철저히 속이고 이용하고 버립니다. 악과 타협하고 악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악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악은 결코 질서를 세울 수 없고, 보존할 수 없고, 무너뜨리기만 할 뿐입니다. 결국 악은 자멸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그 도성에서 나와라
그 도성을 즐거워하라!
“또 네가 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큰 도성이다”(계 17:18).
당시에는 도시를 여성으로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큰 도성 바벨론을 ‘큰 창녀’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17장에서는 한 여인으로 비유했고, 18장에서는 큰 도성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당시에는 로마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로마라고 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도 바벨론처럼 여러 도시에 타락의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미지는 로마뿐만이 아닙니다. 이 시대 도시들도 바벨론이 될 수 있습니다. 공통점은 자신을 신성시하는 극도의 교만입니다. 여러분, 세상 제국의 힘이 강해지면 교만해집니다. 교만의 절정은 자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주변 나라들을 침범해서 약탈하고, 자신을 신성시하고, 더 나아가 지도자를 숭배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벨론과 로마의 공통점이고, 이 시대 역사에도 존재합니다. 어떤 지도자를 신성시하는 것은 극도의 교만이며, 바벨론의 증상입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많은 강대국이 바벨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바벨론 같은 제국이 멸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바벨론의 길을 걷는 나라와 도시는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 18장에서 하나님이 큰 도성 바벨론을 심판하실 때 탄식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무너졌다. 큰 도성 바벨론이 무너졌다. 재앙이다. 큰 도성이 무너졌다. 재앙이다”라는 탄식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가장 슬퍼하는 이들이 상인들로 나오는데, 당시 로마가 정치적으로만 착취한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시를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 탐닉에 빠지게 하고,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숭배하게 만드는 우상 숭배입니다. 곧 큰 창녀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바벨론이 무너진 것처럼 로마도 무너질 것이고, 이 시대 바벨론도 무너질 것입니다. 바벨론이 자신을 영화롭게 한 만큼 고통과 슬픔을 겪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이 다른 이들에게 행한 것에 두 배로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말씀하시며 우리가 행해야 할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그 도성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때 나는 하늘에서 다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들아, 너희는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 이는 너희로 그녀의 죄악들에 동참하지 않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계 18:4).
바벨론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순교의 각오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로부터, 쾌락주의로부터, 허무주의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된 이념들로부터, 세상의 화려한 유혹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문화가 거대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안개가 사라지듯 한순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바벨론과 함께 사라지지 않으려면 나와야 합니다. 둘째, 진정한 도성이 있음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예언자들아, 그 도성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그녀를 심판하셨기 때문이다”(계 18:20).
바벨론 도성과 큰 창녀가 심판받아 멸망된 것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의 도성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이하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이 나타납니다. 큰 창녀인 바벨론과 대조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성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아무리 살기 좋은 나라도 결코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도성은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을 사랑할뿐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찬송으로 끝납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도성으로 즐거워하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진정한 할렐루야, 경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갑시다. 우리는 이 땅 위의 영원한 도시가 아니라 다만 장차 올 도시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 13~14).
우리는 이 땅의 도성이 아닌 장차 올 하나님의 도성을 갈망합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05-31
제15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