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하늘나라의 청첩장
하늘나라의 청첩장
<요한계시록> 19:1~10
/ 이재훈 위임목사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다시 바로 세우시는 세 단계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첫째,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승리를 먼저 보여 주시는 단계입니다. 둘째, 어린양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이 세상에 맞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적인 권력과 싸우며 죽기까지 증거함으로써 이 승리에 동참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임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수단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회개케 하는 게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자비하심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이 임하면 더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기간에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증인들을 통해 계속 증언하고 계십니다. 사단에게 속해 우상숭배하는 거짓된 악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어린양을 따른 이들에 대한 최후의 구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충성스러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벌에 처하는 이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입니다.
네 가지 할레루야의 내용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큰 창녀와 큰 도성으로 표현되는 우상숭배 세력에게 심판이 임함으로 큰 슬픔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큰 도성 바벨론의 엄청난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큰 맷돌이 바다에 번져질 때 다시는 찾게 될 수 없듯이, 큰 도성 바벨론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 도성에서 들려오던 노랫소리도 다시는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다시는 들리지 않게 됩니다. 큰 도성 바벨론이 멸망 당한 뒤 성도들이 기뻐하며 큰 함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찬송과 할렐루야로 마무리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큰 도성 바벨론이 멸망 당함으로 슬퍼하는 노래가 세 번 나오는데, 19장 시작과 함께 나오는 찬양들이 이와 대조됩니다. 큰 도성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노래와 큰 하나님의 무리, 성도들의 할렐루야 찬송 소리가 대조됩니다. 어떤 면에서 바벨론의 존재는 어린양과 신부의 결혼식 준비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엄청난 핍박과 유혹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의 불로써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네 번의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의 히브리어 문구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을 연상케 합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이 두 가지 면에서 <시편>과 흡사합니다. 첫째, 다양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 악에 대한 심판을 탄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으로 구원해 주셨음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할레루야의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하늘에서 많은 무리가 큰 함성으로 외치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운 것임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복수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인내하고 보류했던 참되고 의로운 심판입니다. 둘째, 그 무리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셋째, 24장로와 4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를 고백합니다. 넷째, 다시 많은 무리의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가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고, 강한 천둥소리처럼 외쳐집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회복되었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이제 어린양의 결혼잔치가 이르렀다는 것을 찬양합니다.
어린양의 결혼식에 신부로!
“또 나는 많은 무리의 소리 같고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같고 강한 천둥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 소리들은 외쳤습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는 어린양의 결혼식이 이르렀고 그의 신부가 혼인 준비를 갖추었으며 그녀는 밝고 깨끗한 고운 삼베를 입을 것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이 고운 삼베는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들이다’”(6~8절).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어린양의 결혼식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를 통치하시고, 악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이루시며 행하시는 마지막 완성은 어린양의 결혼식입니다. 어린양의 결혼식에 의로운 행실로 덧입은 밝고 깨끗하고 정결한 신부가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타난 큰 음녀로 표현된 여인과 정반대입니다. 바벨론의 여인은 온갖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장식하고 있었으나 가증한 것들과 음행의 불결한 것들로 가득했지만, 정결한 신부는 의롭고 순결한 옷을 입은 여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여인이 죄와 타락, 슬픔과 파멸의 모습이었다면, 정결한 신부는 생명과 승리, 의와 기쁨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린양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내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린양의 결혼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또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이다’”(9절).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어린양의 결혼잔치에 신부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어린양의 결혼잔치에 초대받은 신부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이미 알려 주신 바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책이 <호세아>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너와 영원히 혼약을 맺고 내가 의로움과 정의로 또 인애와 긍휼로 혼약을 맺을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 진실로 혼약을 맺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호 2:19~20).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도 신랑으로 소개했습니다.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 소개했습니다.
“신부를 얻는 자는 신랑이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그 음성으로 인해 매우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다”(요 3:29).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신의 사역을 동일한 맥락으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꼭 나를 용납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의 간교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순전함과 정결함을 버리고 부패하게 될까 두렵습니다”(고후 11:1~3).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 증거 사역을 ‘약혼시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성경 곳곳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남편 되시고, 예수님을 믿고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은 어린양의 결혼식에 신부로 초대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순종하듯 하십시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몸의 구주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아내들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엡 5:22~24).
우리가 이 땅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 가정을 이루고 살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영원히 살아가는 삶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가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 땅에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결혼했다. 결혼 관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가장 친밀한 관계가 결혼인 것처럼, 구원의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결혼잔치에 신부로서 초대받은 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우리의 ‘유일한 준비’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시면서 왕이 자기 아들의 결혼잔치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왕이 왕자의 결혼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못 들은 척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일이 바쁘다며 거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내버려 두고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아니, 자격 없는 사람을 데려와 놓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왜 쫓아냅니까? 당시에는 왕이 초대를 하면 예복을 주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준 예복을 갈아입지 않고 “나는 입던 대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고,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왕이 내어 주는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왕이 준비해 준 옷을 입는 것은 기쁨입니다. 왕이 준비해 준 옷 입기를 거절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 결혼식에 신부로서 참여할 때 요구되는 단 한 가지는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준비해 주신 옷을 입는 게 우리의 유일한 준비입니다. 정결하고, 의로운 행실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하게 준비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옷을 받습니다. 회개란 우리의 옛 옷을 벗고 예수님이 허락하신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 결혼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준비하고, 기뻐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06-07
제15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