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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인

    [맛있는 말씀 해설]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맛있는 말씀 해설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 8:2a 개역개정).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너희를 어떻게 이끄셨는지, 어떻게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를 시험해 너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고 하셨음을 기억하라”(신 8:2). <신명기>는 모세가 약속의 땅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2세대에게 전한 마지막 설교다. 그 핵심은 바로 “기억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 40년 광야의 고난과 역경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다. 단순한 과거 회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현재의 삶과 연결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근거로 삼으라는 영적 메시지다. 나약한 인간은 평안하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는다. 그러므로 “지난 광야의 길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겠다는 결단을 확인시키는 메시지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광야 길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모든 것이 나의 힘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기억하는 감사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첫 번째 목적은 ‘너희를 낮추시고’에 있다. ‘낮춘다’는 말은 고통을 겪게 한다거나 겸손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광야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자리한 의와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처방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이집트와 홍해의 기적을 체험했지만, 광야의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베푸신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들의 영적 교만을 보시고, 그들을 낮추셔서 오직 당신만 의지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처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광야의 길은 세상의 헛된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늘의 양식인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영적 훈련소였다. 하나님이 광야를 허락하신 두 번째 목적은 ‘너희를 시험해 너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려고 하신 것’이다. 광야 길의 고난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시험하는 장소였다. 여기서 ‘시험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괴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연단해서 정금처럼 순수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광야라는 고통스럽고 불편한 환경이 시험이 아니다. 그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는 반응이 바로 시험의 본질이다. 그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고,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즉, 광야에서의 시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자격과 능력을 갖추게 하는 시험대였다. 창립 40주년을 지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온누리교회의 지난 40년 광야 여정을 다시금 돌아본다. 그 여정은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신 연단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길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였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고, 감사를 발판 삼아 새롭게 펼쳐질 광야의 여정, 약속의 땅을 향해 순종으로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걸어가자. / 제치윤 목사(영종온누리교회)

     2026-03-07  제1579호

  • 칼럼

    [이슈(Issue) 바로보기!] 사람의 냄새 이슈(Issue) 바로보기! 사람의 냄새 나는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난다. 사람마다 독특한 냄새가 있다. 존재에 배인 체취처럼, 꽤 다양하다. 사람의 냄새는 가까이 갈수록 진하기 마련이다. 때론 역겨운 냄새도 피할 수 없다. 섣불리 다가가기 두려운 이유다. 특히 법정에서 풍기는 냄새는 강렬하고 교묘하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욕망 때문이다. 변호사들조차 예의 따윈 안중에 없는 듯 악취를 내뿜기도 한다.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이라도 진행할라치면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다. 그래도 가끔은 승패를 뛰어넘는 담백한 냄새, 억울한 상황마저 개의치 않는 잔잔한 향기가 풍긴다. 다만, 이런 냄새를 찾기가 점점 힘들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요즘 교회에 대한 세간의 시선엔 독한 날이 서 있다. 불신의 늪에 빠진 기독교는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건 냄새 때문일지 모른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위선의 냄새’를 풍긴다. ‘구리다’는 유행어처럼 말이다. 겉과 속이 판이한 신앙은 누가 봐도 역겹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안은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찬 무덤 냄새 말이다. 그렇다. 사람은 마음에 쌓인 것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선을 쌓은 사람에겐 선이, 악을 쌓은 사람에겐 악이 풍겨 나온다. 아무리 덧칠하고 분장해도 냄새를 오래 숨길 순 없다. 과연 나의 냄새는 어떨지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문득 하용조 목사님이 ‘성격 고치라’는 설교를 자주 하셨던 게 생각난다.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흠모할 만한 인격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엔 온갖 썩은 냄새들이 진동하고 있다. 난잡하고 모욕적인 언어들이 난무하고, 일상적인 예의조차 찾기 어렵다. 지도자들은 대중의 신뢰를 잃었고, 사회는 점점 무질서로 덮여간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하는 게 맞나. 모든 걸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방법은 무언가. 세상을 바꿀 힘은 어디서 나오나. 거칠고 난폭한 세상일수록 진짜 무례하지 않은 기독교인, 더 온유하고, 더 친절한 기독교인이 필요할지 모른다. 다만, 진리에 대한 확신이 담긴 친절이라야 한다. 종종 예의 바른 사람은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게 문제 아닌가. 기독교인은 ‘정열적인 신념’과 ‘기품 있는 태도’가 결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친절하고 온유한 동시에 용감하고 강인해야 한다. 그러나 사납고 전투적인 세상에서 ‘신념을 수반한 예의’를 견지하는 건 너무 어렵다. 순교까지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강렬한 신념을 열정적으로 토로했던 스데반이 군중의 돌에 맞으면서도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던 장면이 떠오른다. 돌아보니 나도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다녔던 것 같다. 신념을 거칠게 강요하기도 했고, 슬그머니 타협하기도 했다. 슬픔과 분노, 상처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고통이 목에 차오를 무렵, 불쑥 고난이 감사로 바뀌는 궁극적 행복이 찾아왔다. 그리고 갑자기 깨달았다. 가장 큰 행복은 가장 큰 거룩 속에 있다는 걸 말이다. 신념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용감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문득 한가지 소원이 올라왔다. 신의 형상에 근접한 날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열망 말이다. 가장 거룩하고 가장 행복한 순간 주님 품에 안기는 걸 날마다 꿈꾼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가장 향기로운 냄새를 뿜어낼 때 말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극심한 가치의 전쟁 중이다. 낙태, 안락사, 동성애 등 복잡하고 논쟁적인 이슈들이 법제화를 앞두고 있고, 검찰과 사법의 근간이 바뀌고 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도 강한 규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교회마다 성경의 기준을 붙들고, 흥기발광(興起發光)을 준비할 시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공적인 의를 성취하려는 노력은 세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두 가지를 짚고 싶다.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려는 자세 없이 세상의 신뢰를 얻을 순 없다’는 게 하나고, ‘아무리 명분이 중요해도 증오에 편승하는 건 곤란하다’는 게 다른 하나다. 무례한 흑백논리로 심판대에 앉을 게 아니라, 진실하고 공손하게 타자의 경험으로 들어가야 한다. ‘상처를 주는 칼날’ 대신 ‘생명을 살리는 온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하나님도 인간에게 선을 강요하진 않으셨다. 인간의 악을 십자가로 견디시고, 긍휼과 자비로 기다리셨다. 세상이 칠흑같이 어둡고 비바람도 몰아친다. 희미한 등불마저 꺼질 지경이다. 오늘보다 내일 한 걸음 더, 내일보다 모레 한 걸음 더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자! 그분의 향기에 흠뻑 젖어보자! 그리고 우리 모두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자! / 이은경 변호사(OCC공동체.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사단법인 크레도 대표이사)

     2026-03-07  제1579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도마 : 질문하는 신앙 도마 : 질문하는 신앙 <요한복음> 20:24~29 /이재훈 위임목사 오늘은 ‘도마’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마의 또 다른 이름은 ‘디두모’입니다. 헬라식 이름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식, 정확하게 말하면 아람어 이름입니다. 두 이름 모두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도마라는 이름을 들으면 곧 떠오르는 단어가 ‘의심’입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고, 의심이 많아서 부정적인 제자로 알려졌지만, <요한복음>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선입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 의심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질문한다고 해서 곧 의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질문이 많은 제자였다고 평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도 의심이 있습니다. 말을 안 할 뿐입니다. 믿는 척할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 척하는 것보다는 자신 안에 생겨나는 질문을 정직하게 던지면서 확실한 믿음을 세워나가는 자세가 훨씬 바람직합니다. 도마는 ‘질문을 통해 확신을 구하는 신앙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정반대 기질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베드로는 낙천적이면서 다가오는 위험과 도전을 진지하게 살피기보다 확신이 없어도 모든 것을 과신하는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확신이 없으면 없다고 인정하면서 확신을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도마의 성격과 신앙의 모습 도마에 관해서는 <요한복음>에서만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유대 지방 곧 베다니로 가시고자 하셨을 때 제자들이 당황했습니다. 이미 두 차례나 예수님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과 10장에 예수님을 공격하는 유대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로 돌아가자”라고 하셨는데, 그곳은 예루살렘의 위성 성읍입니다. 예루살렘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도마의 이 고백은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관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시면 죽게 되실 게 분명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비장한 헌신이지만 또한 비관적인 태도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의도와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닥칠 위험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이제 우리도 함께 가서 죽자”고 말한 것입니다. 양면성이 있습니다. 도마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충동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님 앞에 다가오는 위협을 실제적으로 판단한 사람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항상 최악을 가정하는 성향을 보여줍니다. 도마는 이미 예수님이 죽음에 이를 거라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종합해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한 것은 비관의 골짜기를 통과한 비장한 용기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성격입니다. 그의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도마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두 번째 본문은 도마가 예수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눌 때 도마가 정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면서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침묵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그 길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상 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아는 척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여,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요 14:5). 도마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비합리적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질문입니다. 이것은 더디 믿는 의심이 아닙니다. 정직한 질문이며,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믿음에 필요한 질문이기에 예수님이 그 질문을 결코 책망하신 적이 없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도마는 결코 쉬운 성격이 아닙니다. 까다로운 성격입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태도는 ‘정직한 갈망의 표시’입니다. 도마의 이 질문이 없었다면 예수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대답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입니다. 도마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원의 길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을 통해 길이란 세상의 철학이나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길, 생명, 진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진리는 어떤 도덕적인 원리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란 당신의 인격, 생명도 인격, 길도 인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어떤 방법을 구합니다. 인생의 문제 앞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관계가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관계 말입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질문하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목적지이시며,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아는 척하지 않는 영적 정직성입니다. 신앙에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이해될 수 있는 영역도 많습니다. 이해될 수 있는 영역에서도 아무런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맹목적 신앙으로 시험당할 때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질문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믿기 원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질문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자신의 한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참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확증을 구하는 도마의 신앙 질문하는 도마의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에서 증거를 구하는 신앙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움과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줬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그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소!’하고 말했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내가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며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는 한 나는 믿을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25절). 도마의 이 고백도 이중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만 믿을 수 있다는 면에서는 일종의 이성적인 회의주의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직접 만나보고 경험함으로써 내가 믿고 싶다’는 인격적인 체험을 구하는 갈망입니다. 도마의 고백 속에 나타난 갈망의 긍정적인 면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묻지도 말고, 볼 필요도 없고 구하지도 않는 게 참된 믿음인 것처럼 생각하기보다는 도마가 추구하는 자세를 먼저 봐야 합니다.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겠다”고만 했다면 이성을 신앙 위에 두는 것이고, 과학을 하나님의 계시 위에 두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주신 것을 보면, 질문하면서 확증을 구하는 갈망을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며 채워주신 거로 봐야 합니다. 확증을 구하는 신앙을 무조건 선입견으로, 잘못된 것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신을 구하는 의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정직한 의심과 증거를 진지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27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계시고, 의심도 다 알고 계십니다. 놀라운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상처를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도마와 도마 같은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되셔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선뜻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사라지고 영광스럽게 되신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을까요? 매우 의도적입니다. 도마와 같은 이가 질문할 것을 아셨고, 예수님을 만나는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고 “내 주이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9절). 우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성령 안에서 그분은 살아계시며,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도, 손으로 만지지 않고도 믿는 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확증을 원하는 누구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즉각적으로 수용하는 믿음도 좋은 믿음이고, 질문하는 믿음도 좋은 믿음입니다. 도마는 우리가 어떻게 의심을 질문을 통해 확인하고,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우리도 도마와 같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확신 있는 참된 신앙에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질문을 정직하게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성령 안에서 대답을 받고 확신에 이르는 귀한 신앙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3-07  제15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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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단] 마태: 과거로부터의 자유 마태: 과거로부터의 자유 <마태복음> 9:9~13 /이재훈 위임목사 일본의 도자기 기술 중에서 ‘킨츠기’(Kintsugi)가 있습니다. 깨지거나 금이 간 도자기를 옻칠과 금가루를 이용해서 수리하는 전통 공예 기술입니다. 깨진 그릇을 버리지 않고, 깨어진 곳을 감추는 대신 순금으로 채워 넣어서 이전보다 훨씬 귀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고치는 것을 뛰어넘어 상처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깨진 그릇들이 순금으로 채워져 아름다운 디자인이 되고, 멋진 작품이 되는 예술입니다. 이 기술의 의미는 깨어진 과거를, 상처 입은 과거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영적으로 적용해 보면 과거의 상처와 아픔, 심지어 죄와 허물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되어 용서받고 변화되면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깨지면 가치 없게 여겨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진 그릇 같은 우리를 순금 같은 은혜로 채우셔서 이전보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으십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이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롭게 빚어진 인생이 마태에게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 마태가 나오는데 다른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소개합니다. 마태가 알패오의 아들이라면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지간이 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형제가 세 그룹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야고보가 두 명이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 큰 야고보, 작은 야고보라고 하고, 앞에 누구의 아들이라고 붙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로 살던 마태는 깨어진 인생의 전형이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영혼을 팔아먹은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로 여겨졌습니다. 동족의 돈을 갈취해서 로마에 바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죄인들’이라고 한꺼번에 묶지 않고 세리를 앞에 떼어놓은 것은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 중에 가장 형벌 받을 죄인’이라는 의미로 구분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이나 성전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재판의 증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세리가 멀리 서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된 세리들의 죄가 큽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매우 탐욕스럽고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몇몇 세리가 세례 받으려고 찾아와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 질문에 세례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많은 세금을 걷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에 당시 세리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많이 걷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제국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길을 가던 사람을 멈춰 세워서 수색할 권한도 있었습니다. 결혼한 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수색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세리들은 여행자들이 도저히 낼 수 없을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고, 낼 돈이 없으면 높은 이자로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로마 제국과 그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입니다. 마태가 바로 이와 같은 세리였습니다. 물론 세리 중에서도 삭개오 같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기에 사회적 평판이 가장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가 소속된 세관은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편의상 팔레스타인을 두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가 행정관을 파견해 다스리고, 갈릴리 지역은 당시 헤롯 안티파스라는 사람을 세워서 통치했습니다. 직접적인 관할을 받는 세리는 아니었지만, 헤롯 안티파스 역시 로마의 비호를 받는 지도자였기에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마태는 쓰레기 같은, 깨어진 그릇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마태를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며 부르셨습니다. 그의 죄로 인한 깨어짐 위에 은혜의 금가루로 입혀주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세관에 있던 마태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세리에 대한 평가를 모르시고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회 분위기를 모르거나 마태의 직업을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세관에 있던 마태를 의도적으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들이 받는 비난과 조롱을 아셨지만, 세리 중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모든 비난과 조롱을 함께 감당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인기나 인정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당시 민감한 여론을 의식하셨다면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라는 사람, 또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캔들이 될 것이고, 비난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빌립, 나다나엘은 전통적인 유대인이요, 어부입니다. 나다나엘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 마태는 다릅니다. 가장 비난받는 죄인의 죄까지 짊어지고, 구원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것은 이 땅에서 가장 비난받는 죄인의 죄까지 짊어지고, 구원의 대상에서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따른 게 아니라 마태가 이미 예수님의 여러 행적을 통해서 ‘저분은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물음을 던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오셔서 여러 행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베드로의 장모 집에 모여든 많은 병자를 고치신 일,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고 그 귀신이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신 일 등이 그것입니다. 세리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대한 정보를 늘 수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 여러 정보 채널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분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을 보고는 단지 훌륭한 도덕 선생일 수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삭개오처럼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을 배척했기에 이미 포기된 인생으로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랑과 은혜, 포용과 관대함에 이끌렸을 것입니다. “네가 세리의 일을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음성에 이끌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실 때도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수군거린 것은 ‘삭개오가 어떤 인물인 줄 알지 못하고 저렇게 하신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서 “네가 범한 죄를 모르느냐? 너의 모든 부정한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책망도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삭개오를 불러주셨습니다. 마태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마티디아’(Mattithiah)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선물을 뜻하는 ‘마탄’과 여호와를 의미하는 ‘야’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그 이름대로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대상은 소수 교양 있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온 백성, 모든 사람에게, 마태와 같이 죄 가운데 있어서 사람들의 증오와 배제의 표적이 된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이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세리 중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잘 보여주는 부르심입니다. 마태가 연 잔치의 세 가지 의미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예수님은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병들어 있는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의사의 존재 가치는 환자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의사라도 환자가 없으면 그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의사로 비유하셨습니다. 당시 마태는 도덕적 중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당시 의인이 있고 죄인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중병에 걸린 환자이기에 예수님이 의사로 오신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착각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모든 자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마태와 같은 죄인들, 다른 세리들과도 교제하셨습니다. 세리 가운데 마태만 부르시고 그하고만 교제하신 게 아니라 다른 세리들과도 교제하셨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교제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는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많은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눅 5:29). 여기서 ‘레위’는 마태입니다. 마태가 잔치를 베푼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자신의 동료 세리들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잔치의 의미를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종의 결혼 잔치와 같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주께 드린 결혼 잔치와 같이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을 축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식탁의 교제는 어떤 문화권에서든지 동일함과 동질감을 가져다줍니다. 같은 식탁에 함께 나온다는 것,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함께 식사하는 것 자체가 벽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마태와 같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세리들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초대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에서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가 나왔습니다. 맞춤전도집회의 성경적 근거를 마태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같은 그룹, 같은 문화권의 문제를 고민하고, 같은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집회가 맞춤전도집회입니다. 온누리교회는 2000년대 초반부터 대상을 세분화해서 때로는 연령으로, 때로는 직업으로, 때로는 같은 문제를 가진 직업군으로 구별해서 마태의 잔치와 같이 함께 식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셋째, 마태의 과거 삶에 대한 단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이 잔치를 기점으로 과거의 수치스러운 삶으로 돌아가는 다리를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제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세리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선포와 알림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마태의 새로운 삶의 증인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비난받던 죄인 세리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증거하는 사도로 세리 출신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까지도 만나셨습니다. 이 사역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있었던 놀라운 흐름입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마태가 어떻게 쓰임을 받았습니까? 사도들의 행적은 전승을 통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에 때로는 확실하지 않는 기록이 있어서 인용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태의 경우는 그가 쓰임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라는 복음서입니다. 세리 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로서 교회 역사로 확인됩니다. <유세비우스>라는 교회사에 등장하기도 하고, 마태가 복음서의 저자라는 여러 중요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누구를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출교 당하거나 분리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인용이 많이 나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는 <마가복음>으로 알려집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서기 역할을 했던 마가가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증언에 기초해서 쓰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도 정확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매우 짧은 기록, 때로는 구조가 정확하게 갖춰지지 않는 상태에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제자가 직접 목격한 내용들이기 때문에 <마가복음>보다 훨씬 질서를 가지고 기록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에 자신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한 것은 일종의 고백록입니다. 이런 메시지입니다. “나는 원래 사도나 복음서의 저자가 될 수 없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변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마태복음>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세리로서의 분석력과 치밀함, 특히 수리적인 분석력이 나오는 장면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꼼꼼한 장부 기록 기술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다가 기둥에 묶여 화형 당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리 출신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사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해지고 깨끗해진 이후에 부르시는 게 아니라 여전히 죄의 세관에 있을 때 부르십니다. 또한 세상에 죄 없는 자를 찾으러 오신 게 아니라 깨어진 영혼을 부르셔서 고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은혜의 부르심 앞에 우리 모두 응답해야 합니다. 마태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난받던 죄인 세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선물을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 역시 죄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물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마태와 같은 제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깨어진 과거가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죄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감추고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은혜의 금빛으로 우리를 다시 칠해 주셔서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2-28  제1578호

  • 국내캠퍼스

    [News] 좁은 문, 좁은 길 좁은 문, 좁은 길 2월 23일~4월 3일‘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본당 오전 5시 30분 2026 ‘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가 2월 23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이어진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5시 30분 ‘좁은 문, 좁은 길’ 을 주제로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진행된다.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과 CGN TV 채널에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실황을 시청할 수 있다. 2026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는 주별로 산상수훈의 핵심 메시지를 따라 진행된다. 1주 차(2/23~27) ‘복의 길’ , 2주 차(3/2~6) ‘의의 길’ , 3주 차(3/9~13) ‘ 온전함의 길’ , 4주 차(3/16~20) ‘기도의 길’ , 5주 차(3/23~27) ‘그 나라의 길’ , 6주 차(3/30~4/3) ‘십자가의 길’이다. 이재훈 위임목사가 캠퍼스를 순회하며 해당 캠퍼스 부목사와 함께 설교한다. 고난주간에는 해외비전교회 담당 목사들이 설교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대학청년부와 차세대가 예배를 주관한다. 고난주간에는 온누리교회 성도들 모두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예배 전후 침묵으로 기도한다. 교회 로비에 설치된 ‘ 회개의 십자가’ 에 기도제목과 자신의 죄를 적은 종이를 못으로 박고 회개하는 의식도 한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보시기에 좋았더라’(부제: 자기 부인의 제자도) 2월 18일~4월 5일‘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을 실시한다. ‘ 보시기에 좋았더라’(부제: 자기 부인의 제자도)를 주제로 2월 18일(재의 수요일)부터 4월 5일(부활주일)까지 이어진다. 성인공동체와 대학청년부는 1주차(2/18~21) ‘ 디지털 디톡스: 내 손안의 우상을 내려놓다’ , 2주차(2/23~28) ‘ 건강한 식습관: 내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 3주차(3/2~7) ‘ 생태 회복: 소유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 , 4주차(3/9~14) ‘ 바른 언어 생활: 죽이고 살리는 혀의 권세’ , 5주차(3/16~21) ‘ 절제와 성실: 운이 아닌 은혜로 사는 삶’ , 6주차(3/23~28) ‘ 겸손과 순종: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 7주차(3/30~4/5) ‘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를 주제로 캠페인을 한다. 자기 전 종이 성경책 읽기, 과식 피하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하는 자리에 끼지 않기, 주식∙코인 차트 확인 등 과도한 몰입 멈추기, 나를 위한 지출 줄여 이웃 구제금 마련하기 등을 실천한다. 차세대는 ‘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회복하기’ 를 주제로 1주차 ‘ 디지털’ , 2주차 ‘ 식습관’ , 3주차 ‘ 생태’ , 4주차 ‘ 언어’ , 5주차 ‘ 디지털 미디어’ , 6주차 ‘ 정체성’ , 7주차 ‘ 겸손, 순종’ 에 맞춰 실천 사항을 행한다. 구체적인 실천 사항은 SNS 앱 알림 모두 끄기, 탄산음료 대신 물 마시기, 길에 떨어진 쓰레기 3개 줍기, 긍정적인 말하기, 영상 보기 전 성경 읽기 등이다. 문의: 02-3215-3434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026 이주민 설 집회 개최 2월 14~21일 이주민 720여 명 참석 온누리M미션이 2026 이주민 설 집회를 개최한다. 2월 14일(토)부터 21일(토)까지 각 언어권별(총 29개)로 연합 수련회와 아웃팅(Outing, 나들이)을 한다. 몽골, 네팔,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에서온이주민720여명이참석한다. 각 센터 몽골어 예배는 팀 수양관에서 연합 수련회를 한다. 안산M센터 우즈벡(15일), 열방YER(15~16일), 필리핀(15~16일), 태국(16~17일), 베트남(16~18일)공동체는 안산M센터에서 설 집회를 연다. 남양주M센터 인도(14일), 캄보디아(15일), 방글라데시(17일)공동체는 남양주M센터에서 예배를 드린다. 남양주 네팔공동체는 2월 14~15일 Acts29 비전빌리지에서 수련회를 한다. 김포M센터 차세대는 2월 14일 이주민 설 집회를 한다. 2월 16일 안디옥인도네시아교회는 안산M센터에서 연합 집회를 하고, 화성M센터 네팔 공동체는 안산지역 네팔연합집회에참석한다. 아웃팅도 한다. 서빙고 아랍어예배 충남(15일), 네팔어예배 군포 쉘터(17일), 안산M센터 네팔어예배 대부도 펜션(14~15일), 군산M센터 열방∙라오스예배 전주 한옥마을(17~18일), 화성M센터 캄보디아예배 서울(17일)에서 아웃팅을 한다. 인천 이주민 차세대와 아프간 청소년들은 SNS청년부와 함께 서울랜드(21일) 나들이를 한다. 문의: 02-3215-3730 / 홍하영 기자 온누리교회 ‘공동체성경읽기 앱’ 출시 공동체성경읽기 앱 ‘온누리 성경읽기’를 출시했다. 성경읽기 영상과 진도 점검, 알림 기능을 제공한다. 앱을 실행하면 그날 본문에 해당하는 ‘성경읽기 영상’이 제공된다. ‘통독 캘린더’로 성경읽기 진도를 점검할 수 있고, ‘알림 기능’을 설정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말씀 묵상습관을 기를 수 있다. 온누리교회는 지난달 31일부터 매주 토요주일과 일요주일 예배에서 ‘공동체성경읽기’를 하고 있다. 성경 낭독의 전통을 회복하고,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높이 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동행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 홍하영 기자 강동온누리교회 창립 18주년 감사예배 강동온누리교회 창립 18주년 감사예배를 드린다. 2월 21일(토) 오전 10시 30분, 22일(일) 오전 9시, 11시 30분 강동온누리교회 12층 본당에서 진행된다. 주찬양찬양사역팀과 주기쁨찬양사역팀이 특순한다. 강동온누리교회는 2008년 2월 24일에 창립했다. 노희태 목사(강동온누리교회 담당)는 “지난 18년 동안 강동온누리교회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강동 지역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고 성도들의 가정마다 신앙의 유산을 세워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 박지혜 기자

     2026-02-14  제15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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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2월 18일부터 4월 5일까지‘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디지털 디톡스, 건강한 식습관, 생태 회복, 바른 언어생활 등 온누리교회가 ‘ 2026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을 전개한다. ‘ 보시기에 좋았더라’(부제: 자기부인의 제자도)를 주제로 오는 2월 18일(재의 수요일)부터 4월 5일(부활주일)까지 이어진다.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은 인간이 무분별하게 파괴해 온 창조질서를 바로잡고, 성도 개개인이 세상의 헛된 우상과 중독에서 벗어나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 제자의 삶을 회복하는 거룩한 여정이다.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은 사순절 7주 동안 진행된다. 매주 다른 주제로 공통 실천사항과 요일별 실천사항을 행한다. 1주차(2/18~21) ‘ 디지털 디톡스: 내 손안의 우상을 내려놓다’ 를 주제로 스마트폰과 미디어 중독을 끊어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다. 스마트폰 불필요한 알림 끄기, 자기 전 종이 성경책 읽기 등을 실천한다. 2주차(2/23~28) ‘ 건강한 식습관: 내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을 주제로 자극적인 음식을 절제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먹거리로 몸을 정화한다. 인스턴트 및 배달 음식 줄이기, 과식 피하기 등을 실천한다. 3주차(3/2~7) ‘ 생태 회복: 소유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 을 주제로 병드는 지구를 위해 편리함을 내려놓고 환경을 돌본다. 일회용품 대신 다회용기 사용하기, 자차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을 실천한다. 4주차(3/9~14) ‘ 바른 언어 생활: 죽이고 살리는 혀의 권세’ 를 주제로 비난과 험단, 판단을 멈추고 축복과 감사의 언어를 심는다.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하는 자리에 끼지 않기, 하루 5번 감사 고백하기 등을 실천한다. 5주차(3/16~21) ‘ 절제와 성실: 운이 아닌 은혜로 사는 삶’ 을 주제로 도박, 투기,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성실한 청지기의 삶을 산다. 주식·코인 차트 확인 등 과도한 몰입 멈추기, 일터에서 경쟁보다 협력자 되기 등을 실천한다. 6주차(3/23~28) ‘ 겸손과 순종: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를 주제로 나의 직분과 소유 등을 내세우지 않고 이웃을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흘려보낸다. 하나님 말씀과 권위자의 권면에 즉시 순종하기, 나를 위한 지출 줄여 이웃 구제금 마련하기 등을 실천한다. 7주차(3/30~4/5) ‘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를 주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기쁨을 묵상하며 참된 제자의 삶을 회복한다. 문의: 02-3215-3434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온누리M미션, ‘이주민 설 집회’ 개최 2월 14~21일 언어권별 예배와 교제 나눠 온누리M미션이 ‘ 2026 이주민 설 집회’ 를 개최한다. 2월 14일(토)부터 21일(토)까지 각 지역 M센터에서 진행된다. 라오스, 몽골, 네팔,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아랍, 러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온 이주민 600여 명이 참가한다. 언어권별로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한다. 안산M센터는 네팔 2월 14~15일 대부도 펜션, 베트남 2월 16~18일 안산M센터, 열방 YER 2월 15~16일 안산M센터, 태국 2월 16~17일 안산M센터, 우즈벡 2월 15일 안산M센터, 필리핀 2월 15~16일 안산M센터에서 이주민 설 집회를 한다. 군산M센터는 열방, 라오스 2월 17~18일 전주 한옥마을, 김포M센터 차세대는 2월 14일 김포M센터에서 이주민 설 집회를 한다. 남양주M센터는 2월 14~15일 네팔, 14일 인도, 15일 캄보디아, 17일 방글라데시 공동체 예배를 드린다. 서빙고온누리교회 네팔어에배는 2월 17일 군포 쉘터, 아랍어예배 2월 25일 충남에서 이주민 설 집회를 한다. 안디옥인도네시아교회는 2월 16일 안산M센터에서 연합 집회를 한다. 인천온누리교회 이주민 차세대, 아프간 청소년은 2월 21일 서울랜드에서 SNS청년부와 아웃팅을 함께할 예정이다. 화성M센터 캄보디아 2월 17일 서울 투어, 네팔 2월 16일 안산M센터 연합 집회에 참석한다. 각 센터별 몽골어예배는 2월 14~16일 팀수양관에서 연합집회를 한다. 문의: 02-3215-3730 / 홍하영 기자 차세대 파워웨이브 엽합수련회 ‘PASSION 2026’막 내려 1차와 2차 파워웨이브 소속 학생 및 교사 2,537명 참석 차세대 파워웨이브 엽합수련회 ‘ PASSION 2026’ (이하 패션집회)이 막을 내렸다. ‘Unshakable’ 을 주제로 열린 이번 패션집회에는 국내 온누리교회와 M센터 소속 파워웨이브, 몽골 현지 학생, 파워웨이브 교사, 봉사자 등 2,537명이 참가했다. 패션집회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 선택 강의, 폐회예배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송바울 전도사(한터사역), 이훈형 대표이사(와우산레코드),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채널 운영)가 강의했다. 선택강의는 강동민 센터장(온누리청소년센터), 강하선 디자이너, 고대곤 교수, 김지연 약사, 오경숙 본부장(창조과학회), 래퍼 지푸 등이 했다. 이수아 학생(서빙고 파워웨이브, 중3)은 “하나님을 어렵게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하나님을 가장 편안한 친구로 소개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 홍하영 기자 온누리교회 ‘공동체성경읽기 앱’ 출시 공동체성경읽기 앱 ‘ 온누리 성경읽기’를 출시했다. 성도들이 온누리교회 성경 읽기표에 맞춰 매일 말씀을 묵상하도록 돕는 영상을 제공한다. 앱 사용자는 통독 캘린더를 통해 진도를 점검할 수 있고, 알림 기능을 설정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 읽기 알림을 받을 수 있다. 온누리교회는 지난 1월 31일부터 매주 토요주일과 일요주일 예배에서 ‘ 공동체성경읽기’ 를 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성경 낭독 전통을 회복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동행하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홍하영 기자 2월 비전헌금, 수원기독호스피스센터 후원 2월 7일(토)과 8일(일) 봉헌하는 2월 비전헌금은 ‘ 수원기독호스피스센터’ 건립을 후원하는 데 사용한다. 수원기독호스피스는 1996년 12월 창립된 호스피스 봉사 기관이다. 수원 지역 목회자와 성도들이 말기 질환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봉사와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2005년 6월 1일에는 의료법인 하나의료재단을 설립하고, 호스피스완화의료전문 기관 수원기독의원을 개원했다. 현재 새로운 센터 건립을 준비 중이다. / 홍하영 기자

     2026-02-07  제1576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요한: 사랑의 머무름 [주일강단] 요한: 사랑의 머무름 <요한복음> 19:25-27, <요한계시록> 1:9 / 이재훈 위임목사 요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 세베대의 아들입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세베대의 아들인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부유한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또한 안드레와 함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비슷하게 충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격렬한 성격이었기에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예언적 이름을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야고보와 함께 세속적 야망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원숙한 목회자요, 신학자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증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다른 시각으로 기록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같은 관점에서 기록했다고 해서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서들은 주로 갈릴리 사역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대와 예루살렘 중심이며,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최후 일주일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짧은 비유들을 중심으로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긴 설교, ‘강화’라고도 부르는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기적 그 자체를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기적의 의미를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역사적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에 집중했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독자적인 기록들이 나옵니다. 요한이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은 체험을 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환상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제이며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 섬에 있었습니다”(계 1:9). 당시 요한은 초대교회에 매우 잘 알려진 성숙한 지도자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다른 서신서나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계시와 예언들이 나타납니다. 성경 66권을 마무리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일깨워 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요한이 격렬한 성격에서 변화되어서 영적으로 깊이 있는 증언과 기록을 남기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환난과 인내하는 성숙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매우 흔한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그 이름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성경 곳곳에 쓴 글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몇 구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 중 하나인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 곁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요 13: 23).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요 20:2).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이시다!’ 시몬 베드로는 ‘주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벗어 두었던 겉옷을 몸에 걸치고 물로 뛰어들었습니다”(요 21:7). “베드로가 돌아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제자는 만찬에서 예수께 기대어 ‘주여, 주를 배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사람이었습니다”(요 21:20). 요한은 여러 곳에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하고, 13장과 21장에서는 ‘예수께 기대어 있던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있었던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몸에 기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요한의 이때 나이를 10대 중후반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어렸습니다. 요한은 천진난만해서 예수님 품에 기대고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 동생입니다. 친척 관계이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하셨을 때, 모든 제자가 입 다물고 있었지만, 요한은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신성과 영광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표현이 나올 때는 직접 경험한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매우 상세하게 예수님 최후의 행적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 십자가 처형 장면, 십자가 위에서 주신 말씀들, 베드로의 배신과 그 회복의 여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요한이 있었습니다. 남자 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 예수님의 사촌 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어머니와 그 곁에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보아라.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25~27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처형을 당한 장면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비롯한 여성 제자는 네 명이었고, 남자 제자는 한 명이었습니다. 끔찍한 십자가 처형 장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십자가와의 물리적인 거리가 곧 예수님의 사랑의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멀찍이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끝까지 지킨 사람은 군병들과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소수 제자, 다섯 명입니다. 요한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23절과 24절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어서 나눠 가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찢어져 떨어졌을 때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이 십자가로 더 가까이 다가갔을 거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을 때 흘리는 피와 지친 몸 때문에 멀리 보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오늘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오, 아들입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당신의 아들이라는 건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 말씀은 이제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모셔달라는 요청과 명령이고, 마리아에게는 이제 나 대신 요한이 모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제 저와 어머니의 관계는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요한이 당신의 아들로서 당신을 모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에베소에 가보면 지금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는 기도원이 있습니다. 요한은 열두 사도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저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이고, 예수님이 당신의 어머니를 위탁할 정도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 사랑에 관한 증언을 합니다. 특히 <요한일서> 4장에 사랑에 대한 위대한 말씀을 남깁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됩니다”(요일 4:10~1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셔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의 서신들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강조하며 사랑에 사로잡힌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롬’이라는 분에 의해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베소에 노쇠할 때까지 머물렀던 요한이 거동하기가 어려워서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예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많은 말을 할 기력이 없기도 했지만, 모일 때마다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가 늘 같은 설교를 하는 것에 따분함을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왜 항상 같은 말씀 하십니까?” 요한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며, 또한 서로 사랑하는 일만 제대로 행한다면 더는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외에는 모든 것을 잊은 사람처럼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행할 수 있는 말씀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붙잡고 죽기까지 충성한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다시 받을 때 요한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와 항상 같이 있었던 제자가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머문다’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은 사랑에 머무는 제자였습니다. 형 야고보는 순교의 우렛소리가 되었지만, 동생 요한은 사랑의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함께 가장 먼저 예수님을 따른 제자였고, 가장 오래 예수님을 따른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제자였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머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면 말씀 앞에 머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과 임재를 사랑하면, 그분 앞에 머물러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우리는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전하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주의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2-07  제1576호

  • 칼럼

    [신앙에세이] “나를 따르라” 신앙에세이 “나를 따르라” 2026년 온누리교회 표어가 ‘나를 따르라’이다. 거기에 작은 부제가 붙어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게 다름 아닌 ‘자기’, ‘나 자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심리학 용어로 ‘에고(ego)’를 말한다. 에고는 우리 삶 주위에 둘러친 일종의 방어막과 같은 것이다. 에고는 늘 두려움에 차 있고 항상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매우 경쟁적이어서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물론 자기 보호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주도권을 온전히 돌려드리는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된다. 즉, 나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국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에고이다. 마귀 사단이 우리의 가장 큰 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다. 위험한 적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다. 내부에 있다. 신앙 영성의 핵심은 사단을 대적하는 게 아니라 내 욕심과 자아(에고)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있다. 예수님이 자기가 달려 죽으실 십자가를 친히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못 박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인가? 흔히들 자기 삶에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나 문제를 자기 십자가로 해석한다. 전 생애 동안 포기하지 못하고, 실패한 삶이 만들어 낸 무거운 짐들을 십자가로 보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이것이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오니 잘 지고 가도록 도와 주세요…” 그러나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너희가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준 자유와 은혜를 잘못 사용해서 얻게 된 무거운 짐일 뿐이다.” 거짓된 짐과 십자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된 짐은 우리 스스로 만든 삶의 어려움이다. 내 욕심과 자아를 만족시키려고 쌓아 놓은 쓰레기 같은 일들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옥죄고 힘들게 하며 늙어 가게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당신의 멍에를 대신 메라고 말씀하신다(마 11:28~30).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란 무엇일까? 바로 십자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무겁고 두렵기까지 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오히려 마음의 쉼을 주고, 삶을 가볍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되 쉼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만든 헛된 짐을 내어 버리고, 그분이 주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새롭게 거듭나게 할 사명의 짐이다.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짐이다. 이것을 받을 때 곧 우리의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인생의 방황이 종결된다. 예수님이 주신 사명의 짐은 무척 무겁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볍고 마음에 안식을 준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겉보기에는 힘들고 어려워 보일지라도 내적으로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걱정 없이 헌신하면 된다. 올 한 해,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주신 사명의 짐을 지고, 즐거이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한다. / 허원희 목사(과천의왕공동체)

     2026-01-31  제1575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누가복음> 9:51~56, <사도행전> 12:1~3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매우 다양했습니다. 늘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의 베드로가 있었던 반면, 그의 동생 안드레는 조용히 뒤에서 섬기기를 더 좋아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연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이지만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이 형제들에게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 즉 천둥번개와 같은 의미로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했으므로 요한도 그러한 성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불같이 급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우레 같이 분노가 터지는 성격을 꾸짖는 의미로 이름을 붙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새로 지어 주시는 것은 현재나 과거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 상태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미래와 비전을 미리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장래에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계획을 담아 주신 것입니다. 이 해석 원리를 적용하면, 야고보에게 ‘우레의 아들(보아너게)’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그의 현재 성격이 불같이 거칠지라도, 그 너머에 세상을 깨우는 우레 소리와 같은 사람으로 쓰임 받을 것을 미리 선포하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의 성품이 한순간에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사건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그의 성품이 변화되어 제자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과 열정의 사람 먼저 그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부유한 미래를 포기합니다. 당시 ‘세베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그는 갈릴리 수산업계의 소위 ‘큰 손’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어부를 고용하고, 배들을 소유한 선주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레위 지파 후손으로 당시 대제사장 가문과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어물을 판매할 여러 상점도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의 집에도 자주 출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출입이 가능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버지 세베대의 영향력으로 요한도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버지 세베대는 야고보와 요한이 가업을 이어받아 더 발전시킬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부친의 사업과 배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단호한 결단은 그들 안에 있는 때로는 불같이 급하지만 타협하지 않고 중간이 없는 강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안락함을 박차고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부유한 미래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보다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뜨거운 열정과 가능성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때로 자신의 야망과 독선으로 인해 위험한 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야고보가 세속적인 야망으로 위험한 불이 될 뻔 한 일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을 선발대로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투숙할 곳을 찾고 준비하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 사람들에 대한 상처와 차별로 인해 그들을 냉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라서 냉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를 냉대했던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불친절과 거절에 분노한 야고보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이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할까요?” 불같은 성격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에는 깊은 앙금과 미움, 증오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불을 내려 멸망시켜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역을 지나가고자 하셨고, 여러 차례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면서 한 여인을 구원해 주셨으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를 넣으신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당연히 포함되지만, 땅 끝으로 가기 전에 사마리아라는 지역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당시 세상이 네 지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도저히 넘고 싶지 않은, 불을 내려 진멸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예수님이 선교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심판부터 생각하는 야고보의 열정은 방향을 잘못 잡으면 편협한 독선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이 없는 열정은 타인을 정죄하는 불의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 대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도 마땅하다고 바라보는 것은 위험한 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적대감에 대하여 동일한 적대감과 보복심으로 대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 전쟁과 종교 재판이 그랬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으니 스스로 불을 만들어 사람들을 징벌했던 모습이 야고보에게서 나타나고,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야고보의 열정은 때로 세속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 중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 10:35~37). 야고보와 요한은 세속적인 야망으로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영광의 자리는 세속적인 힘을 가진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보신 영광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시는 순간은 곧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영광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자리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영광이 될 수 있는가?’ 끊임없이 자기의 야망과 자기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또한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과 세속적인 야망, 예수님이 이루실 나라에 대한 오해를 통해 자신이 위대해지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과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열 제자들도 이 말을 듣고 분노했는데, 그들도 똑같이 영광의 자리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끓어오르는 열정이 때로는 세속적인 야망에 휩쓸려 위험한 불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12장을 통해 그의 꺼지지 않는 열정이 순교의 우렛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됩니다. 우렛소리로 쓰임 받은 첫 번째 순교자 “그 무렵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하려고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들을 체포했습니다. 헤롯은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이 일을 유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이어 베드로도 잡아들였습니다. 이때는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행 12:1~3). 여기서 헤롯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입니다. 분봉왕과 같은 지역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 구체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려고 몇몇 사람을 체포했는데, 가장 먼저 희생시킬 사람을 골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을 먼저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먼저 제거해야 교회가 두려워할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보기에 반교회적 세력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잡혀갑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가 불같은 열정으로 때로는 위험한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3년의 공생애를 통해 그를 변화시켜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그에게 특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오르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동행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순간도 함께 목격하도록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예수님이 고통 속에 기도하시는 모습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체험들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야고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 반교회적 세력이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후 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났지만,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고보는 미워하셔서 빨리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더 사랑하셔서 감옥에서 풀어주시고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게 아닙니다. 야고보는 짧은 순간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죽음의 세례를 함께 경험한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한때 세속적인 욕망으로 예수님 우편에 앉기를 원했지만, 첫 번째 순교자로서 예수님의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의 불같은 열정을 그저 지적하고 판단하고 정죄해서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도록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우레는 짧게 울립니다. 그러나 세상을 진동시키며 사람들을 깨웁니다. 야고보의 사역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매우 짧았습니다. 우레처럼 짧게 울리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렬한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깨우고, 안일했던 교회를 깨우고, 복음의 야성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권력을 탐하던 야망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과 복음 증거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거룩한 우레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으면 도리어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야고보와 비슷하게 통제되지 않았던 열정이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지적 교만과 정욕에 휩쓸려 방황했습니다. 에너지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이 하나님이 아닌 쾌락과 궤변을 따를 때 그는 마니교와 성적 타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 열정은 세상을 깨우고 교회를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이 남긴 <고백록>을 비롯한 여러 문서가 없었더라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중세 시대가 아닌 짧은 시대를 살았던 어거스틴의 우레와 같은 생애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 안에 끓어오르는 열정의 동기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이름을 위한 열정인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열정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영광의 자리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내 힘과 능력으로 성격을 고치려 하지 말고, 성령의 임재와 불을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파괴적일 수 있었던 불같은 열정을 우레의 아들다운 순교의 불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고보가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몬이 베드로라는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처럼, 야고보가 우레의 아들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도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1-31  제1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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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예수님의 제자 된 목회자” 지난 1월 26~28일 열린 '2026 목회사관학교'. 2026 목회사관학교 온누리 어워즈에서 수상한 30년 이상 근속 목회자들(왼쪽부터 황종연, 도육환, (이재훈 위임목사), 박종길, 강부호, 이기훈 목사). "예수님의 제자 된 목회자” 1월 26~28일‘2026 목회사관학교’개최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 360여 명 참석 2026 온누리교회 목회사관학교가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1월 26일(월)부터 28일(수)까지 오크밸리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전임, 파트), 협력 교회, 온누리교회 출신 담임목회자, 선교사 등 총 360여 명이 참석했다. 2026 목회사관학교에서는 공동체성경읽기,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특강, 기도회, 패널토의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첫날 주제 강의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 공동체성경읽기’ 를 주제로 했다. 이 위임목사는 “아무리 탁월하고 감동적인 설교도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의 권위보다 높을 수 없다”면서 “말씀 자체보다 설교에 익숙해진 현실을 돌아보며 설교 중심 예배에 대한 건강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배 안에서 ‘ 공동체성경읽기’ 를 시작함으로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하고,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을 바꿔가도록 돕는 목회자들 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목회사관학교 첫날 오후에는 마크최 목사 ‘ 나의 목회 이야기’ , 조호영 목사 ‘ 나의 사역 이야기’ , 목회자 특순, 박종길 목사 ‘ 교역자의 경건 생활’ 특강, 소그룹 나눔 및 발표, 기도회, 온누리 어워즈 등이 이어졌다. 온누리 어워즈에서는 이한규 목사(맨인블랙상: 최다 장례사역 교역자), 전진 목사(강대상: 우수 설교교역자), 김용산 목사(온누리루키상: 우수 적응 교역자), 배윤주 전도사(전파상: 전임 같은 파트 교역자), 김재승 목사(기름부음상: 최장거리출퇴근 교역자)가 수상했다. 둘째 날에는 공동체성경읽기, 박신웅, 전현규 목사 ‘ 나의 목회 이야기’ , 이기훈, 이기원 목사 ‘ 나의 사역 이야기’ , 신국원 교수 ‘ 기독교 세계관과 선교적 비전’ 주제 강의, 강부호 목사 ‘ 교역자의 기도 생활’ 특강, 소그룹 나눔 및 발표, 패널토의, 기도회, 온누리 어워즈 등이 이어졌다. 이날 온누리 어워즈에서는 30년 이상 근속한 목회자들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박종길(서빙고온누리교회), 강부호(양재온누리교회), 도육환(영종온누리교회), 이기훈(사회선교본부), 황종연(Acts29 비전빌리지) 목사가 수상했다. 셋째 날에는 공동체성경읽기, 최성민 목사 ‘ 나의 사역 이야기’ , 신무환 장로 ‘ 평신도의 세상살이로 나타내는 복음적 세계관’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 및 발표, 폐회예배, 기도회 등을 했다. 폐회예배에서는 박종길 목사가 ‘ 다시 시작하라’ (수 17:14~18)를 주제로 설교했다. 박현식 목사(동경온누리교회)는 “국내외 온누리교회 모든 목회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말씀 안에서 다시한번 세워지는 귀한 시간이었다”면서 “예수님을 따라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더 순종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수진 전도사(서빙고 차세대)는 “공동체성경읽기에 대한 큰 도전을 받았다”면서 “말씀을 잘 낭독하고 삶에 깊이 새기며, 예수님을 따르는 교역자가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목회사관학교는 2003년부터 시작된 온누리교회 목회자 수련회다.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들이 모여 비전과 목회 철학, 사역 방향 등을 공유한다. / 홍하영, 박지혜 기자 예수제자학교(JDS) 참가자 모집 2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서빙고, 양재 주간, 저녁반 예수제자학교(JDS) 참가자를 모집한다. 2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서빙고 주간반, 저녁반, 양재 주간반, 저녁반을 운영한다. 예수제자학교는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발견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삶을 살도록 돕는 평신도 제자훈련이다. 서빙고 주간반은 2월 26일(목)부터 9월 22일(화)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 시온홀에서 시작된다. 서빙고 저녁반은 2월 28일(토)부터 9월 19일(토)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시온홀에서 열린다. 양재 주간반은 2월 24일(화)부터 9월 22일(화)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 온유홀에서 진행된다. 양재 저녁반은 2월 20일(금)부터 9월 19일(토)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온유홀에서 한다. 참가를 원하는 성도들은 서빙고와 양재온누리교회 로비에 마련되는 안내데스크나 아이스쿨(ischool.ionnuri.org)에서 신청하면 된다. 회비는 70만 원(전도여행비 별도). 문의: 02-3215-3534 / 홍하영 기자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2월 18일부터 4월 5일까지 2026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을 한다. 사회선교본부 생명과 환경팀 주도로 2월 18일(재의 수요일)부터 4월 5일(부활주일)까지 진행한다. 올해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주제는 ‘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다. 부제는‘자기부인의제자도’이다. 올해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실천사항은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각종 중독과 무절제함을 끊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1주 차 ‘ 디지털 디톡스: 내 손안의 우상을 내려놓다’ , 2주 차 ‘ 건강한 식습관: 내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 3주 차‘ 생태 회복: 소유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 , 4주 차 ‘ 바른 언어생활: 죽이고 살리는 혀의 권세’ , 5주차 ‘절제와 성실: 운이 아닌 은혜로 사는 삶’ , 6주차 ‘ 겸손과 순종: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 7주차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가 주제다. 문의: 02-3215-3434 / 홍하영 기자 2월부터 예배순서 일부 개편 15분 전 찬양과 기도, 예배 중반‘공동체성경읽기’ 2월부터 예배순서가 일부 개편된다. 15분 전부터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다. 예외적으로 예배 전 찬양과 기도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배 5분 전 진행하던 ‘ 공동체성경읽기’ 는 예배 중반에 한다. ‘ 온누리 공동체 성경읽기표’ 를 따라 모든 성도가 함께 성경 본문을 듣고 읽는다. 예배 시간은 변동 없다. 온누리성경읽기 진도표는 온누리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으면 된다. 주일예배 공동체성경읽기(신약∙시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인성경읽기(구약∙신약), 토요일과 일요일 개인성경읽기(잠언, 전도, 시편∙구약)를 하면 1년 동안 성경일독을 할 수 있다. / 박지혜 기자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PASSION 2026’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 PASSION 2026’(이하 패션집회) 2차 집회가 2월 1일(일)부터 3일(화)까지 대전 배재대학교에서 ‘ Unshakable’ (흔들리지 않는)을 주제로 열린다. 서빙고(1부), 양재(고등부), 남양주, 대전, 세종, 도곡, 양지, 인천, 평택, 서산온누리교회와 안산, 평택M센터 파워웨이브 학생들이 참가한다. 2차 패션집회에서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 선택 강의, 폐회예배 등의 순서가 이어진다. 주제 강의는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송바울 전도사(한터사역),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채널 운영)가 한다. 선택 강의는 ‘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나를 찾다’ , ‘ 디자인, 하나님을 닮은 창조의 언어’ 등을 주제로 이어진다. 문의: 02-3215-3521 / 홍하영 기자

     2026-01-31  제1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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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서산온누리교회’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서산온누리교회’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 드려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리더십 및 성도 등 190여 명 참석 서산온누리교회(충청남도 서산시 안견로 213 삼일빌딩 4층)가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로 전환됐다. 이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 를 지난 1월 21일(수) 서산온누리교회 본당에서 드렸다. 이재훈 위임목사, 박종길 목사, 최영민 목사, 당회서기 민문기 장로 등 온누리교회 목회자 및 리더십, 서산온누리교회 성도 등 190여 명이 참석했다.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는 박종길 목사(서빙고온누리교회) 인도, 당회서기 민문기 장로 기도,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이성민 담임목사(서산본향교회) 축사, 장경식 장로, 함일성 장로, 최영민 목사(서산온누리교회) 감사의 말씀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이재훈 위임목사는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우리가 끊임없이 새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며 “서산온누리교회가 예수님이 나의 신랑 되신 기쁨을 늘 기억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최영민 목사는 “1994년 기도 모임으로 시작된 서산온누리교회가 32년의 여정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면서 “서산온누리교회는 앞으로도 지역사회를 겸손히 섬기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산온누리교회는 지난 2004년 기도처로 태동했다.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지역주민들에게 칭찬받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2025년부터 최영민 목사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PASSION 2026’ 1차 1월 30일~2월 1일, 2차 2월 1~3일 배재대학교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 PASSION 2026’ (이하 패션집회)이 막 오른다. ‘Unshakable’ (흔들리지 않는)을 주제로 대전 배재대학교에서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된다. 주제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8절이다. 차세대를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거룩한 세대로 세우는 것이 목표다. 1월 30일(금)부터 2월 1일(일)까지 열리는 1차 집회에는 서빙고(2~4부), 양재(중등부), 강동, 부천, 수원, 영종, 하랑센터 파워웨이브를 비롯해 몽골 현지 학생들이 참가한다. 2차 집회는 2월 1일(일)부터 3일(화)까지 진행된다. 서빙고(1부), 양재(고등부), 남양주, 대전, 세종, 도곡, 양지, 인천, 평택, 서산온누리교회와 안산, 평택 M센터 파워웨이브 학생들이 참가한다. 2026 패션집회에서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 선택 강의, 폐회예배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송바울 전도사(한터사역), 이훈형 대표이사(와우산레코드),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채널 운영)가 강의한다. 청소년들의 실제적인 고민을 다루는 선택강의도 풍성하다. 강동민 센터장(온누리청소년센터) ‘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나를 찾다’ , 강하선 디자이너 ‘ 디자인, 하나님을 닮은 창조의 언어’ , 고대곤 교수 ‘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 김지연 약사 ‘ 중독 없는 차세대를 위한 실전 가이드’ , 오경숙 본부장(창조과학회) ‘ 하나님의 설계’ 래퍼 지푸 ‘ 8비트 랩으로 고백하는 Unshakable Faith’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문의: 02-3215-3521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026 목회사관학교 1월 26~28일 오크밸리 그랜드볼룸 2026 목회사관학교가 ‘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1월 26일(월)부터 28일(수)까지 오크밸리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 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목회자, 해외 비전교회, 협력 교회, 온누리교회 출신 담임 목회자, 선교사 등 총 362명이 참석한다. 이번 목회사관학교에서는 공동체성경읽기,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 특강, 기도회, 패널토의 등이 이어진다. 한편, 지난 1월 23일(금)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 2026 상반기 Acts29 비전 콘퍼런스’ 를 개최했다. 30개 해외 비전교회 목회자들과 협력 위원, 스태프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Acts29 비전 콘퍼런스에서는 찬양, 양웅 장로 대표기도, 축복의 시간, 오범규 장로 격려, 권역별 인사 및 협력위원 소개, 이재훈 위임목사 비전의 말씀, 권역별 모임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 홍하영 기자 2월부터 예배순서 개편 예배 중반에‘공동체성경읽기’ 2월부터 예배순서가 일부 개편된다. 예배 5분 전 진행하던 ‘ 공동체성경읽기’ 를 예배 중반에 한다. ‘ 온누리 공동체 성경읽기표’ 를 따라 모든 성도가 함께 성경 본문을 듣고 읽는 시간을 가진다. 예배 시간은 변동 없다. 온누리성경읽기 진도표는 온누리교회 홈페이지(www.onnuri.org, 교인지원센터, 자료실)에서 다운받으면 된다. 주일예배 공동체성경읽기(신약·시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인성경읽기(구약·신약), 토요일과 일요일 개인성경읽기(잠언, 전도, 시편·구약)를 하면 1년 동안 성경일독을 할 수 있다. 예배 시작 15분 전부터는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다. 예외적으로 예배 전 찬양과 기도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 박지혜 기자

     2026-01-24  제1574호

  • 칼럼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ody)]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ody)]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학교에 다닌다고 성적이 저절로 오르지 않고, 직장에 출퇴근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업무 성과가 나거나 연봉이 오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삶은 학교, 직장, 교회에서 나를 변화 시킬 수 없다. 학교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집중해서 배우려고 하고, 직장에서 시키지 않은 일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설교를 멍하니 듣고 나와서는 내적, 심적, 영적 변화가 생길 리가 만무하다. 남으로부터가 아닌 나로부터 출발하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주일마다 개근하고도 믿음의 개근상 하나 받지 못할 수 있는 분들은 ‘믿음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하기보다는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야고보서> 1장 22~24절에서도 듣기만 하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나 역시 불신자에서 교회를 들락날락하던 교인으로,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기까지 상당히 오랜 세월이 있었다. 내가 경험한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방법 하나는 바로 ‘Why’였다. 스스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은 있는가? 하나님이 있다면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는가? 그럼 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나? 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나? 왜 나는 우리 부모님 가정에서 태어났나? 왜 나는 남들과 다른 성장 배경을 가졌나? 왜 나는 지금 이 일을 하는가? 왜 나는 이런 성격, 인격, 성향을 가졌나? 왜 나는 어떤 일에 기뻐하고, 어떤 일에 슬퍼하는가? 왜 나는 이런 가치관을 가졌는가? 왜 나는 살아가야 하는가? 왜 나는 결국 인생을 다하고 죽는가? 왜 나는 남이 아닌 나인가? 왜 나는 내가 아는 다른 인생의 모습과 다른가? 왜 나는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가? 왜 나는 나인가? 수많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인문 서적을 읽으며 답을 구하려고 했다. 또 세미나를 찾아가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인생의 시간을 소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질문이 아무리 많아도 답은 하나라는 진리를 발견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수없이 많은 질문, 즉 삶을 헤쳐가는 동안에 생기는 수많은 걱정과 근심과 시련, 고난과 역경, 고민을 단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복잡했던 모든 것이 일순간 마음에서 정리되고 인생이 간단해진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온전히 나의 숙제로 남아 매일 밤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근심과 걱정이 된다. 필자는 우리가 Why를 날마다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Why에 대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를 살아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다. 밤에 잠을 청할 때는 하나님과 연관 있는 의미 있고 값진 하루의 인생을 감사할 수 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이 말씀처럼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곧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고, 밤에 잠드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작은 죽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날마다 태어나고, 또 날마다 죽음을 지나는 셈이다. 은혜를 매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하루 내가 한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 뜻에 합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 밤 잠든 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항상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 말씀을 되새겨보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인생은 바로 오늘이다. 최고의 순간은 바로 지금임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신나게 하루를 기대하며 살기를 건강전도사 정주호가 응원한다. / 정주호 대표(중종로공동체, 스타트레인 대표, 재활과학박사)

     2026-01-24  제1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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