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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지금 여기, 사도행전! 지금 여기, 사도행전! 9월 16일~10월 23일 온누리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행사 사전 캠페인, 특별순예배, 온누리사역축제(OMC) 등 개최 온누리교회가 오는 10월 6일(월) 창립 40주년을 맞이한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가 ‘ 지금 여기, 사도행전’ 을 주제로 9월 16일(화)부터 10월 23일(목)까지 이어진다. ‘ 사전 캠페인’ , ‘ 특별순예배’ , ‘ 온누리사역축제(OMC)’ 등이 진행된다. ‘ 40주년 사전 캠페인’ 은 9월 16일부터 10월 23일까지 이어진다. 40주년 축하 웹페이지 론칭을 시작으로 매주 1~2편씩 40주년 관련 영상을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한다. ‘ 은혜의 40년’ , ‘작은 시작’ , ‘ 부흥의 기억’ , ‘ 선교와 나눔’ , ‘ 다시 새롭게’ , ‘ 세대를 잇다’ , ‘ 비전의 선언’ 등을 주제로 온누리교회 창립부터 성장, 비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40일 묵상 캠페인, 사진전, 부흥회, 토크쇼, 공모전, 마라톤 대회 등도 개최한다. 특별순예배도 드린다. 9월 둘째 주부터 10월 셋째 주까지 5주 동안 한다. 1주 ‘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다’ , 2주 ‘ 큐티하면 행복합니다’ , 3주 ‘ 일대일은 온누리에 주신 선물입니다’ , 4주 ‘ 나는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 , 5주 ‘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맞춤전도’ 를 주제로 순예배를 드린다. 순장들에게 매주 이재훈 위임목사의 강의 영상 및 찬양 영상을 제공한다. 특별순예배에는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와 순이 참여한다. 2025 온누리사역축제(OMC)는 10월 21일(화)부터 23일(목)까지 서빙고온누리교회에서 막 오른다. 온누리교회 역사와 철학, 비전을 성도들과 공유하는 자리다. 21일(화) ‘ 교회, 복음으로 서다!’ , 22일(수) ‘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 23일(목) ‘ 교회, 선교로 꽃피우다!’ 를 주제로 강의 및 패널토의, 집회 등을 한다. 온누리교회 목회자 및 리더십, 성도, 파송 선 교사, 복음과도시 이사회, 국내외 인사 및 교계 리더십, 농어촌 교회 및 도시미자립 교회 목회자, 성도 등 2천5백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참가를 원하는 성도들은 10월 12일(일)까지 QR코드로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된다. 등록 문의: 각 캠퍼스 목회지원실 행사 문의: 02-3215-3234(3122, 3534)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추수감사절 감사의 쌀과 성경 나눔 ‘사르밧 프로젝트’ 10월 19일까지 순, 개인별 헌금 및 나눔 대상자 접수 2025 사르밧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참여하는 순은 10월 19일(일)까지 사르밧 프로젝트 헌금을 각 캠퍼스 송금 계좌로 봉헌하면 된다. 헌금은 쌀 20kg 한 포대 가격(65,000원)을 기준으로 형편에 맞게 하면 된다. 헌금을 입금할 때는 공동체, 다락방, 순 이름을 일곱 자 이내로 기재해서 보내야 한다(예: 한강마리아2순). 개인 참여도 가능하다. 개인 참여 성도들은 헌금을 송금할 때 이름과 생년월일을 꼭 기재해야 한다(예: 홍길동 850128). 송금 계좌는 서빙고 ‘ 하나은행 573-910019-14805’ , 양재 ‘ 하나은행 573-910021-35705’ 다. 나머지 캠퍼스는 목회지원실에 문의하면 된다. 사르밧 프로젝트 나눔 대상자도 모집한다. 1순위 온누리교회 공동체 소속 성도, 2순위 외부 기관, 3순위 외부 개인 순이다. 나눔 대상자 접수는 10월 19일(일)까지 이메일로 하면 된다(서빙고: 25thanksgiving@naver.com, 양재:hyomin2021@naver.com). 나머지 캠퍼스는 목회지원실에 제출하면 된다. 반드시 공동체 담당목사와 대표장로의 확인을 거친 다음, 공동체를 통해서 접수해야 한다. 공동체 이름과 공동체 담당목사, 대표장로 승인 여부를 기록해서 보내야 한다(예: 000공동체 000 목사님과 000 대표장로님께 승인 받음). 이메일을 보낼 때는 공동체 담당목사와 대표장로를 참조인으로 발송해야 한다. 쌀 발송을원하는 캠퍼스는 10월 19일(일)까지 담당자가 대상자 리스트를 취합해서 서빙고온누리교회 수신처로 접수하고, 그 계좌로 금액을 이체하면 된다. 문의: 02-3215-3434(서빙고), 각 캠퍼스 담당 간사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2025 하비스트(Harvest)‘Renewal’ 10월 4일부터 6일까지 파주 영산수련원 2025 하비스트(Harvest)가 ‘ Renewal’ 을 주제로 오는 10월 4일(토)부터 6일(월)까지 파주 영산수련원에서 막 오른다. 올해 하비스트에서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가 군대가 되는 환상을 배경으로 영적 회복과 갱신을 주제로 메시지들이 선포된다. 이주민들이 자신과 민족의 마른 뼈와 같은 영적 상태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하비스트 첫째 날에는 전국에서 모인 이주민들을 환영하고, 나라별 국제문화축제와 예배별 패션쇼가 열린다. 둘째 날에는 인도네시아 찬양팀과 함께하는 주일예배와 성찬식이 이어진다. 같은 날 오후에는 Mini Nations Tour가 열린다. 13개 국가 부스를 돌면서 나라별 문화체험을 하고, 서로를 축복하며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임을 경험한다. 저녁집회에서는 성령의 임재와 영광을 구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묶였던 것들이 자유케 되고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셋째 날에는 이주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삶을 헌신하며, ‘Renewal’ 세리머니를 할 예정이다. 문의: 031-491-9650 / 박지혜 기자 ‘당신이 무명(無名)의 선교사입니다’ 9월과 10월은‘CGN 후원의 달’ 9월~10월은 ‘ CGN 후원의 달’ 이다. ‘ 당신이 무명(無名)의 선교사입니다’ 를 주제로 행사 및 특별 방송, 이벤트가 이어진다. 9월 20일(토)과 21일(일)에는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에서 CGN 후원 및 약정 행사를 개최한다. 이날 온누리교회 모든 예배에서 나눠주는 약정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거나 전화(02-796-2243), 홈페이지(cgnkorea.net)에서 참여하면 된다. 후원자 참여 이벤트는 9월 20일(토)과 21일(일) 국내 온누리교회 로비에서 진행된다. 사진전과 포토 부스 등을 운영한다. 특별방송에서는 김재원 아나운서와 개그우먼 김효진이 사회를 본다. CGN의 미디어 선교 사역을 알리고, 새롭게 나아갈 비전과 사역 방향 등을 공유한다. 문의: 02-796-2243 / 홍하영 기자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 개강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가 개강한다. 9월 19일부터 12월 5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30분 서빙고 이천만광장 홍보관에서 진행된다.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는 <디모데전서> 4장 13절 말씀을 따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말씀과 신앙고전을 읽고 나누며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간단한 간식을 겸비한 교제 시간을 가진 후, 10시부터 공동체 성경읽기와 신앙서적 읽기로 진행된다. 신앙서적을 오디오북으로 듣고, 눈으로 읽는다. 문의: 010-5603-5500 / 박지혜 기자

     2025-09-13  제1556호

  • 주일강단

    [주일 강단] 다시 말씀 앞에 서다 [주일 강단] 다시 말씀 앞에 서다 여호수아 8:30~35 / 이재훈 위임목사 <여호수아>에 나타난 가나안 정복전쟁은 거룩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죄와 전쟁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민족이든, 이스라엘 민족이든 죄 가운데 있을 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전쟁 승패의 비결이 군사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략에 귀 기울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승리의 법칙입니다. 아이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이 ‘세겜’이라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모세가 이전에 그들에게 명했던 것을 이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세겜 땅 에발산에 도착하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두 차례나 명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게 될 그 땅으로 너희를 들이실 때 너희는 그리심 산에서 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해야 한다”(신 11:29).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강 건너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면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그 돌들 위에 적어 두라. 그리고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간 뒤에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이 돌들을 에발 산에 가져다 두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르라”(신 27:3~4).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연이어 정복했다면 그 기세를 몰아서 다른 도성을 정복하는 것이 세상적인 원리에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싸울 필요가 없는 지역, 가나안 민족들의 저항이 없는 세겜이라는 지역으로 올라갔습니다. 전쟁을 멈추고 하나님 말씀 앞에 다시 서기 위해 세겜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멈추고, 다시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을 갖도록 모세가 당부한 것입니다. 모세의 당부를 여호수아가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세겜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매일 전쟁 같습니다. 치열한 삶입니다. 그 치열한, 전쟁터 같은 삶에서 하나님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이 없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 파묻혀 버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어도 또 다른 문제로 넘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방향을 조율하고, 방향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삶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조율하고,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조율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세가 그것을 당부했고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두 번이나 당부한 이유 세겜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의 계곡에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야곱이 우물을 팠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고, 이곳에 묻힙니다. 단지 역사적 추억이 있기 때문에 에발 산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갈대아 우르에서 내려온 아브라함이 가나안 지역에 왔을 때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던 곳이 세겜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의 큰 나무 앞에 이르렀는데 당시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12:6~7). 세겜 땅이 중요하고, 제단을 쌓았다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구체적으로 가르치신 땅이 세겜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장소가 중요하고,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을 쌓았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600년 정도 후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때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나의 삶에서,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때 신앙이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가나안 민족들이 있었고, 그는 혈혈단신 갈대아 우르에서 이주해 온 이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네게 주리라. 네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6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겨주도록 모세가 두 번이나 당부한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예배하라!” “거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제단, 곧 돌 제단을 쌓을 것이며 그것을 만들 때 어떠한 철 연장도 사용하지 말라. 다듬지 않은 돌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물을 드리라. 거기서 화목제물을 드리고 난 뒤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먹고 기뻐하라. 너희는 너희가 세운 이 돌들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분명하게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신 27:5~8). 그곳에서 행할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제단을 쌓을 때 중요한 지침들이 주어집니다. 제단을 에발 산에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축복이 선포되는 그리심 산에 제단을 세우지 않고,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 산에 제단을 세우라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에발 산은 우리의 현재 상태, 실존을 보여줍니다. 죄를 범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 희생의 제단을 통해 은혜를 베푸신 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에발 산입니다. 그 한복판에 제단을 세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예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무에 달린 사람마다 저주를 받았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갈 3:13). 에발 산에 세워진 제단은 세상 한복판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제단,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에발 산에 세워지는 제단을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방신들에게 바치는 제단들은 한결같이 화려하고 온갖 인간이 상상한 이미지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님께 드려진 제단은 순수한 자연석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제단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의와 생각도 가미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제사를 설명합니다. 하나는 번제고, 또 하나는 화목제입니다. 번제는 <레위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첫 번째 제사법입니다. 모든 것을 불태워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는 번제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번제물로 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과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함께 받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고,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화목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성찬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번제물이 되셨기에 화목제물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단을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을 다시 기록하고, 백성들에게 낭독해서 기억하게 하라!“ 둘째, 율법을 다시 기록하고 백성들에게 낭독해서 기억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쓴 모세의 율법을 베껴서 돌에 기록했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고관들과 재판관들과 이방 사람이나 토박이나 할 것 없이 법궤를 향해 서 있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여호와의 언약의 법궤를 든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 절반은 그리심 산을 등지고 섰고 그 절반은 에발 산을 등지고 섰습니다. 이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한 그대로 했습니다. 그 이후에 여호수아는 율법의 모든 말씀, 곧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축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이방 사람까지 포함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모세가 명령한 모든 말씀들 가운데 여호수아가 읽지 않은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수 8:32~35). 첫 번째는 제단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책을 다시 돌 위에 새기고, 석회를 바르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에발 산에 제단을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읽어주었다는 것은 십자가 은혜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변화를 말씀합니다. 제단과 율법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죄 받은 에발 산 위에 세워진 제단에 율법이 새겨진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 희생의 피가 흐르고, 교제가 회복된 자에게 성령의 법을 따라 살 수 있는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말씀이 공개적으로 모든 백성에게 함께 낭독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많은 사람이 문맹이었고, 인쇄 기술이 없었던 시대였기에 함께 낭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는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보급돼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대일지라도, 우리가 함께 모이는 예배 시간에 성경이 낭독되고 모든 사람이 말씀을 함께 들을 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는 자기 자신이 해석자가 됩니다.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습니다. 자기가 선택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낭독하고, 들려지는 말씀에 귀 기울일 때는 경청자가 됩니다. 말씀을 낭독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번성하려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과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주되심을 신실하게 선포하고 나타내는 성경읽기와 경청공동체로 자신을 형성해야 한다. 말씀을 함께 듣고 읽는 경청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주의 산 에발 산에 제단이 세워지고, 하나님 말씀에 함께 귀 기울이는 것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성령을 따라 사는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유업을 누리는 백성이라는 약속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09-13  제1556호

  • 칼럼

    [신앙에세이] 성경말씀 자체를 듣는 문화 신앙에세이 성경말씀 자체를 듣는 문화 제4차 로잔대회 서울선언 제24항은 ‘공동체 성경읽기’의 실천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문은 어느 한 단어를 생략할 수 없을 만큼 모든 표현이 중요하지만,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는 성경을 신실하게 읽고 듣는 신앙과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이 일을 위해 전 세계적인 협업을 이루며, 역사적 전통과 신앙고백 등이 깊이 참고되어야 한다. 셋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을 읽는 것은 신앙의 닻을 내리는 것처럼 중요하고 또 유용한 방법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주되심을 선포하는 신실한 성경 읽기와 이를 실천하는 공동체는 교회의 현시대적 과제이다. 성경 읽기의 중요성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며 실제로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이는 생각보다 드물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양날 선 어떤 칼보다 예리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 낸다(히 4:12). 그러나 이 살아있는 운동력을 일상에서 경험하며 말씀 위에 세운 견고한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방법적인 고민도 필수적이다. 오늘날에도 성경책을 펼치는 많은 신앙훈련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읽기보다 성경 강해나 다른 부가 자료를 가미한 프로그램으로 말씀 읽기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성경을 한번 완독하거나 성경 학습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끝냈다’고 만족하며 성경을 덮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읽기는 절대로 단기간 훈련 프로그램이 아닌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신앙 여정이다. ‘성경 본문 자체를 읽고 듣는 것’은 교회 역사에서도 계속 강조된 귀한 전통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즉 말씀을 ‘수동적’으로 듣는 것을 ‘적극적으로’ 계속 훈련해 왔다. 성경에서도 백성들이 공동체로 모여서 한 사람이 낭독하는 것을 듣는 장면이 줄곧 등장한다. 이 공적 낭독은 공동체의 신앙적 각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온누리교회에서 ‘공동체성경읽기’는 제4차 로잔대회 이전부터 이미 강조되고 교회 안에서 실천되어 왔다. 온누리교회 공동체성경읽기는 크게 세 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예배에서의 공동체성경읽기(예배 시작 전 말씀 읽기, 서빙고 2부 새벽기도회)와 개인적으로 읽되 공동체로 묶여 성경읽기(각 공동체에서 매일 365성경읽기 진도 공유하며 읽기), 그리고 공동체 성경읽기를 위한 주중모임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이 그것이다. 나는 금요PRS(공동체성경읽기모임)의 담당 목회자로 섬겼는데 이 사역은 매우 특별했다. 말씀을 강해하고 적용점을 찾아줘야 하는 설교와 달리,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같은 회중으로 서는 경험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견고하게 해주었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그 어느 시간보다 자유롭고 평안했다. 성도들 모두가 목회자의 묵상 결과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성경말씀 그 자체를 정확하게 듣고자 귀 기울이는 습관이 길러졌다. 교회에 처음 나와 세례를 받는 성도부터 오랜 신앙생활 경력을 가진 장로까지 하나 되어 말씀을 체험하며 공동체성경읽기의 유익을 실감했다.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의 날이 이를 것이라고 선포한다(암 8:11). 지구상에서 성경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성경 앞에 서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 말씀 없이 각자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현상이 더 심각해진다는 의미이다. 공동체성경읽기는 말씀을 함께 듣는 공동체적 성경 읽기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를 형성하는 사역은 말씀을 듣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며, 독려하지도 않는 시류 속에서 분명한 대안이자 해법이 될 것이다. / 변대섭 목사 (남양주온누리교회담당)

     2025-09-13  제1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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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ady)]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ady)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이야기할 때, 흔히 운동선수가 자신의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모습을 예로 들곤 한다. 실제로 운동선수들은 날마다 자신의 체력과 기술의 한계에 맞닥뜨리며 그것을 이기고자 훈련한다. 멀리 갈 것 없이 덤벨을 들어 올리는 피트니스운동으로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3kg 덤벨을 어제 5번 들었는데, 오늘 6번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면 단순히 반복 횟수가 1개 더 늘어난 게 아니다. 그것은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번 더 들어 올렸다는 의미다. 운동을 단순히 운동으로만 이해하면 몸의 근육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치게 된다. 하지만 운동을 그 이상의 가치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인생의 교훈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운동은 아직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어떤 것에 대해 능력치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혹은 발견했더라도 정면으로 뛰어넘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만나고 뛰어넘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관 같다. 한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한계를 만나도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은 도중에 포기하고 좌절하며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을 할 때 체력적으로 힘든 강도를 감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든 마음의 한계에서 오는 영적 싸움 내지 영적 전쟁이다. 이 마음은 평소에는 내면 깊이 도사리고 있다가 특정 상황이 되면 조금씩 피어오른다. ‘어제 운동 했으니 오늘은 쉬자’, ‘그동안 많이 참았으니 오늘 하루는 나에게 보상을 주고 좀 많이 먹어도 될 거야’ 등 내 안에 서로 다른 두 생각이 대치하고 부딪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어느 쪽 마음에 힘을 실어주느냐에 따라 내 생각의 중심과 균형을 잘 유지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북미 원주민인 체로키족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두 마리 늑대’라는 유명한 지혜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화가 난 감정을 이야기하는 손자에게 “우리 마음속에는 날마다 악한 늑대와 선한 늑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손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이 이야기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과 감정을 자주 되새기고 강화하냐에 따라 인격과 행동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5장 6~17절 말씀과도 연결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하고 싶어 하는 바는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육체’란 신체적 몸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본능에 의지하며 선에 대적하는 정욕과 욕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내 밖의 세상과 싸워 이기기도 전에 이미 내 안의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패한 상태로 살고 있다. 자신과 싸움에서 항상 패배하는 사람은 세상과 싸울 힘조차 낼 수 없고, 싸워 보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마음으로 날마다 신음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자신과의 마음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한 게 바로 몸의 근육, 마음의 근육, 영적 근육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신 영·혼·육은 동시에 보기도 해야 하지만, 따로 떼어 놓고 하나씩 봐야 한다. ‘나의 몸은 건강한가? 나의 마음은 강건한가? 나의 영은 온전한가?’를 날마다 확인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의 고귀한 영·혼·육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무너질 수 있다. 하나가 무너지면 그 틈으로 나머지 하나, 그리고 또 하나도 차례로, 조금씩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겪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한계 상황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며, 또 피할 길도 함께 주신다는 위로이자 응원이다. 오늘부터는 내 몸의 한계를 이겨내는 몸에 주는 선한 먹이인 운동 습관과 내 마음에는 겸손과 친절, 사랑과 긍정, 절제라는 선한 먹이를 주는 습관, 내 영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감사의 먹이를 주면서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응원한다. / 정주호 대표 (중종로공동체, 스타트레인대표, 재활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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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Issue) 바로보기!] 법의 뿌리는 사랑이고, 사랑이 법의 완성이다 이슈(Issue) 바로보기! 법의 뿌리는 사랑이고, 사랑이 법의 완성이다 지난 7월 5일(토), 법조인 전도집회에 이어 ‘히든 파라다이스’라는 근사한 제목으로 로스쿨 전도집회가 열렸다. 전국 25개 국내 로스쿨과 한동 국제 로스쿨을 대상으로 한 콘서트 형식의 행사였다. 온누리교회는 전도대상자 초청을 주도한 로스쿨기독학생연합회(로기연)를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온누리교회 법조인들이 멘토로 참석해 후배들을 격려했다. 현장의 열기도 뜨거웠고, 결신율도 예상보다 높았다. 요새 법조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따갑고, 법조계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도 거세다. 법에 입문한 로스쿨 후배들도 당혹스러울 듯싶다. 그러나 법조인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직업이다. 비록 법조계에 대한 세간의 질타가 거셀지라도 법조인의 소명마저 무너지는 건 정말 곤란하다. 물론 법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에 법만으로 공동체를 규율하려는 건 오만이다. 그러나 어떤 부작용이 있든지 간에 ‘공동체’를 붙들고 지지해 주는 건 여전히 법이다. 법이 없으면, 그리고 법을 담당하는 법조인이 없으면,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장래가 불안해 보일 후배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진리를 선택하는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꼭 한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힘이 하나 있다”고 말이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걸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힘(고전 13:7)’이다. 그리고 결국엔 모든 걸 이긴다. 단지 미움과 분노만이 아니다. 절망에 둘러싸인 두려움마저 없앤다. 과연 법조인이 ‘사랑’을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독일 신학자 펜넨베르그는 두 가지로 정의했다. 하나는 ‘역지사지(易地思之)’고, 또 하나는 ‘조인(助人)’이다. 먼저,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내 삶에 마주친 존재에 대하여 깊이 상상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민감성이 사랑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경험하는 현실과 타인이 경험하는 현실을 같이 모델링하는 능력,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것을 시뮬레이션하는 능력은 고통을 수반하는 고도의 정신작용이다. 당연히 자기중심적인 삶의 껍질을 깨뜨려야 생긴다. 악의 핵심은 강한 자기중심성이기 때문이다. 다음, 조인(助人)은 ‘타자를 한 인간으로 존귀하게 받아들이고, 삶을 정복하고 형성해 가는 과업을 돕는 것’이다. 현실의 상황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게 돕는 건, 사실 숭고한 일이다. 신의 영역일지 모른다. 하나님도 늘 인간을 도우신다. 특히 고통을 잘 해석할 수 있게 돕는 건 변호사의 특권이다. 나도 의뢰인의 고통 곁에 있다 보니 역경이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외려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 준다. 성찰과 변화를 불러오는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묵묵히 억울함을 통과한 사람은 영적인 권위까지 부어진다. 다만, 인간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할 수 있는 동시에 가장 천박하고 잔인할 수 있는 존재다. 죄를 반복하는 사악함에 대한 안전망 구축도 법의 영역이다. 그러나 법의 규범적 정의는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범죄마저도 형벌권의 행사를 통해 원래 상태로 돌이키려는 기대가 있다. 재판과 징벌이라는 과정을 통해 억울한 희생자는 걸러내고, 뉘우친 범죄자는 포섭한다는 희망 말이다. 판넨베르그는 “모든 정의의 형태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를 위한 창조적 해답을 찾는 게 법조인의 직무”라 했다. 나도 동감한다. 법조인은 고루한 비문 해석자가 아니다. 법에 창조적 생생함을 불어넣는 ‘사랑’을 탐구하는 직업이다. 사랑은 불의의 구조, 바로 죄로 인한 절망 속에서도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렇다. 법의 뿌리는 사랑이고, 사랑이 법의 완성이다. 나는 법조계에 불고 있는 풍랑도 우리를 더 아름답게 빚어내실 그분의 손안에 있다고 믿는다. 후배들이 환경과 상관없이 사랑을 탐구하는 법조인으로 잘 성장하면 좋겠다. 선배들이 후원하는 로스쿨 전도집회도 매년 열렸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이 다니엘과 같이 ‘신들의 지혜와 같은 똑똑함과 통찰력과 지혜, 뛰어난 영과 지식과 분별력을 가져서 꿈을 풀고, 숨겨진 비밀을 밝히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단 5:11)’이 있기를 기도해 본다. / 이은경 변호사(OCC공동체.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사단법인 크레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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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대학청년부 아웃리치 결산] 대학청년부 아웃리치만의 ‘그 특별함’ 2025 대학청년부 아웃리치 결산 ‘D To V’ 승리의 그날까지 전진! 대학청년부 아웃리치만의 ‘그 특별함’ 2025 대학청년부 여름 아웃리치는 ‘D To V’를 주제로 지난 6월 28일(토)부터 8월 30일(토)까지 이어졌다. 대학청년부 11개 공동체 200개 팀, 3,922명이 참가했다. ‘D To V’의 의미는 승리가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날 ‘D-Day(Decision Day)’와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 ‘V-Day(Victory Day)’ 사이에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이 이 땅이 더 자유로워지기를, 이 땅에서 선교가 더욱 담대하게 이뤄지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의미다. ‘D To V’, 승리의 그날까지 전진하는 대학청년부 아웃리치만의 ‘그 특별함’을 소개한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통계만 봐도 올해 대학청년부 여름 아웃리치가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지난 6월 28일(토)부터 8월 30일(토)까지 이어진 대학청년부 아웃리치에 국내 136개 팀 2,951명, 해외 64개 팀 971명, 총 200개 팀 3,922명이 참가했다. 국내 아웃리치는 경남 21개 팀, 강원 18개 팀, 전북과 경북 각 15팀, 전남 14개 팀, 충남 13개 팀, 제주 8개 팀, 서울·경기 9개 팀, 충북 4개 팀, 인천 1개 팀 등 88개 지역에서 실시했다. 해외 아웃리치는 동북아시아 14개 팀, 동남아시아 11개 팀, 중앙아시아, 서부아시아, 남부아시아, 아프리카 각 4개 팀, 유럽 3개 팀, 서태평양, 남태평양 각 2개 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각 1개 팀 등 총 26개국에서 이뤄졌다. 유연함, 그리고 추친력 대학청년부 아웃리치만이 가진 특별함은 ‘유연함 그리고 추진력’이다. 물론, 청년세대는 장년세대 만큼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다. 그러나 세상 흐름과 문화의 변화에 익숙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환경과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이 유연함이 아웃리치에서 빛을 발한다. 선교지 또는 현지 상황과 문화를 빨리 파악하고 흡수해서 주민들이 낯선 이에게 가지는 편견과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삶 속으로 재빨리 스며들어 아주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더 멀리 나아가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추진력도 으뜸이다. 그 추진력 덕분에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통로로 쓰임 받는다. 대학청년부 아웃리치만이 가진 그 특별함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허브대학부의 필리핀 톤도 아웃리치다. 쓰레기 매립지에 형성된 톤도 마을 주민들은 썩어가는 쓰레기를 뒤져 겨우 생계를 이어간다. 그 환경과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도움을 내미는 손길조차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온누리교회 청년들은 달랐다. 주저함이라곤 없었다. 그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유연하게 적응하고, 그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어도 밀어붙이는 그 특유의 추진력이 나타났다. 그 힘으로, 그 특별함으로 톤도 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교제했더니 어느새 경계가 허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미는 손을 덥석 잡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허브대학부 아웃리치팀이 보여준 유연함과 추진력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장 낮은 곳에서, 승리의 그 날을 노래하는 모습을 참 많이 닮아있었다. 그 모양대로, 그 처지대로, 그 필요대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대학청년부 아웃리치만이 가진 ‘그 특별함’이다. 아웃리치 참가자 간증 힘 있게 피어난 들꽃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음을 사모하는 마음이 커져 가던 무렵, 필리핀 아웃리치 중보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일명 ‘쓰레기 마을’로 불리는 톤도에서 차세대 사역을 하는 아웃리치였다. 사역 보고를 읽으면서 기도하는데, 성령님이 나에게 톤도 땅을 바라보시며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주셨다. 그 마음을 소중하게 품고 다시 열린 필리핀 톤도 아웃리치에 참가했다. 지난 7월 8일, 필리핀 톤도에 도착했다. 톤도는 영적 죽음을 종류별로 보여주는 부스 같았다. 구멍가게에 앉아 공허하게 휴대폰만 바라보는 엄마와 그 옆에 방치 되어있는 아기, 도박장에서 게임하는 초등학생들, 티셔츠 한 장 걸치고 길거리에 서 있는 청소년 임산부, 누구도 치우려 하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즐비했다. 복음 없는 삶의 비참함을 바라보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성령님은 내가 느끼는 그 아픈 마음이 바로 잃어버린 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과 톤도에 널부러진 그 많은 물리적인 쓰레기에 앞서 치워야 할 게 죄와 우상이라는 마음의 쓰레기임을 깨닫게 하셨다. 필리핀 아웃리치팀은 7박 8일 동안 김숙향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Love Tondo Community Ministry’에서 네 번의 어린이 사역, 청소년 Revival 부흥회, 가정방문, 체육대회, 청소년 진로세미나, 그리고 두 번의 주일예배를 드렸다. 사역하면서 어린이 350명과 청소년 150명을 만났고, 28가구를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톤도의 다음 세대에게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톤도의 차세대들은 쓰레기 더미에서도 힘 있게 피어난 풀꽃 같았다. 그들을 통해 언젠가는 쓰레기가 아니라 푸른 풀밭으로 변화될 톤도의 모습을 기대했다.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이어진 아웃리치에서 팀원들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영적성장도 이뤘다. 아웃리치가 끝난 이후에도 우리는 교제를 이어 나가고 있다. 정기적인 기도회를 통해서 끝까지 톤도를 위한 중보자가 될 것이다. / 조은별 자매(허브대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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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는 말씀해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맛있는 말씀해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영적(靈的)’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영적’이라고 하면 ‘육체적’이라는 개념과 대비해서 이해하곤 한다. 이를테면 “저분은 영적인 분이야”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그 사람은 육체적 유혹을 초월해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영적’이라는 말은 ‘이성적’의 반대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세상의 경험과 지식, 지혜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를 깨닫는 것을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영적’이라는 단어는 육체든 정신이든 유한한 인간적 차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이런 의미로 이해한 채 <로마서> 12장 1절을 마주하면 다소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가 곧 ‘영적 예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이라는 개념을 육체와 분리해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몸과 영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여 모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어를 살펴보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영적 예배’라고 번역된 표현의 원어는 헬라어로 ‘로기코스 라트레이아’인데, ‘로기코스’는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단어다.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납득될 만한 것’을 뜻한다. ‘라트레이아’는 ‘봉사, 섬김, 헌신이 기초된 예배’를 말한다. 원어를 직역하면 ‘이치에 맞는 예배, 합리적인 예배, 납득이 되는 예배’로 번역할 수 있다. 성경의 여러 번역본은 ‘참되고 합당한 예배, 신령한 예배, 이치에 맞는 예배 등으로 적용하고 있다. 보통 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를 사용한다. 신령한 몸(고전 15:44), 신령한 노래(엡 5:19) 등 육체와 구별되는 영적인 것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프뉴마티코스’가 아닌 ‘로기코스’를 사용한 것은 바울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영적 예배로 몸을 드리라”는 바울의 권면은 자신의 몸에 어떤 물리적 가해 행위를 하라는 말이 아님은 확실하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 행위를 미워하셨고, 제의적 목적으로 몸에 상처를 내거나 자해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을 드리기 위해 몸을 상해를 입히거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바울의 권면은 영과 몸을 따로 분리할 게 아니라 하나 되어 전인이 예배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단순히 육체적 행위로만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성적 생각만으로도 온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결국, 예배하는 이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삶의 일상까지도 거룩하게 구별된 삶이 곧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영적 예배란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행하는 것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단지 예배당에 몸이 있다고 해서 예배가 되는 게 아니다. 반대로 몸은 부재한 상태에서 마음과 생각만 예배당에 있다고 해도 예배라 할 수 없다. 예배에서 어떤 지적 만족을 얻었다고 해서 곧 예배가 되지도 않는다. 예배는 구약의 희생 제사처럼 삶이 늘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로 나의 삶이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보더라도 내 모습이 예배라 인정할 수 있는 모습,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납득이 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룩하게 구별된 삶은 상당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와 수고가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며, 인내해야 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예배자 됨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영적 예배에 나아가고 있는가? 나의 인격과 성품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나의 행동과 언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가? 내가 예배자라 불리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납득 가능한 모습인가? 누구든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거리고 있는가? 우리가 그동안 드려왔던 예배를 말씀 앞에 돌아보고 진정한 영적 예배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 박근범 목사(김포공동체)

     2025-09-13  제1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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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9월 15일~21일까지 &lt;로마서&gt; 6:8~8:30 묵상포인트 1: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악한 세상에서 죄에 끌려다니지 않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정체성이 필요하다.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가 의의 무기로, 의의 종으로 쓰임 받기 위해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묵상하자.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으며,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계신다. 우리도 자신을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에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죄의 종은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은 의에 이른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 묵상포인트 2: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더러움을 비춰 줄 수는 있지만, 우리를 깨끗하게 씻겨 주지는 못한다. 율법의 기능과 율법의 한계가 무엇인지,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할 유일한 분은 누구인지 묵상하자.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해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기에 얽매던 율법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살길 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다. 바울은 이런 비참한 자신을 누가 구원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묵상포인트 3: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더는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이유와 자격 없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 사랑을 묵상하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이는 &lsquo;생명의 성령의 법&rsquo;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이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자라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lsquo;아빠 아버지&rsquo;라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피조물도 우리도, 하나님 자녀의 영광이 나타날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다.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나의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나의 지체를 거룩하게 사용하자. ▶나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를 원하면서도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예수님 안에서 정죄함이 아닌 자유함으로 살아가자.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누구의 기쁨을 위한 것인지 점검하자. ▶나를 죄로 이끄는 것이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 단호히 거부하자. ▶현재의 고난에 낙심하지 말고,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고 살아가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09-13  제1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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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웃리치특집] “복음은 사랑과 순종으로 증거된다!” 서대문공동체 스리랑카 &ldquo;복음은 사랑과 순종으로 증거된다!&rdquo; 지난달,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서대문공동체가 스리랑카 땅을 밟았다. 6박 8일 여정이었는데,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스리랑카 &lsquo;감파하&rsquo;와 &lsquo;코타갈라&rsquo;에서 사역하면서 우리의 계획보다 크신 하나님의 계획을 경험했다. 감파하에서의 사역은 직업훈련학교(TIMI) 한국어학과(KLVC) 학생들과 함께한 10주년 행사였다. 전통 놀이, K-푸드, 한복 체험 등 한국문화를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눴다. 그 학생들은 불교와 힌두교 문화권에 속해 있는데, 그들에게 한국문화 체험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이며, 은혜를 위한 섭리였다. 스리랑카 한세일, 유은선 선교사님과 현지인 선교사로 허입된 JOY 선교사님과 만남, 직업훈련학교 스태프들과의 연합은 우리에게도 큰 격려였다. &lsquo;합력하여 선을 이룬다&rsquo;는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며 매 순간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아웃리치를 처음 경험하는 선교사님들은 스리랑카에 와서 가장 가슴 벅찬 위로를 선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10주년 행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코타갈라 차밭 마을로 이동했다. 현지 교회 성도들과 연합예배를 드리고, 후원 행사를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현지 교회 방문, 기도회, 목회자 가정과 성도 가정 심방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빗물 가득한 진흙 바닥을 걷고, 거머리가 다리를 물어도 그 땅에 하나님의 온기와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특히 차밭에서 일하는 가정과 어린이들을 위해 준비해 간 학용품과 의류, 쌀가루 등 각종 선물은 우리에겐 너무 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선물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이들을 보면서 깊은 도전과 책임감을 느꼈다. 3개 언어 (타밀어, 싱할라어, 영어) 동시통역을 하면서 현지인들과 함께 드린 예배도 기억에 남는다. 언어는 달라도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로 어우러졌다.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이 큰 은혜로 다가왔다. 팀원들 간의 사랑과 섬김, 기도와 격려는 우리를 더욱 끈끈한 공동체로 만들었다. &lsquo;콜롬보&rsquo;에서 팀 전체가 아웃리치 보고를 하고, 스리랑카 한인연합교회 주일예배를 드리며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밀도 높은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그 땅을 섬기러 잠깐 갔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셨다. 우리가 밟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아웃리치에서 &ldquo;한 영혼만이라도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dquo;고 고백했다. 모든 주권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했다. 우리를 스리랑카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것이 사역의 열매를 맺는 원동력이었음을 고백한다. 문화와 언어, 환경은 달라도 사랑은 통했고, 순종의 걸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졌다. &lsquo;복음은 사랑과 순종으로 증거된다&rsquo;는 진리를 품고 나아가면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온다. &lt;사도행전&gt; 말씀으로 모든 이들을 단단하게 묶어주신 황신연 목사님과 모든 일정을 기쁨과 미소로 섬겨주신 선교사님, 현지 동역자들, 함께 기도해 주신 서대문공동체 지체들에게 감사하다. 앞으로도 삶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을 실천할 것이다. / 이종민 집사(서대문공동체)

     2025-09-06  제15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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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웃리치특집] 평생 잊지 못할 축복 여호수아청년부-케냐 아웃리치 평생 잊지 못할 축복 나는 늘 재정적인 이유로 아웃리치 지역을 동남아로만 제한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ldquo;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rdquo;는 목사님의 한마디가 마음 깊이 꽂혔다. 목사님의 그 말씀으로 인해 평생 갈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케냐 땅을 마음에 품었고, 너무나도 명확한 하나님의 응답과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그 길을 떠났다. 사막으로 향하는 여정은 길고 험했다. 나이로비에 도착해서도 최북단까지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힘든 여정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도 아웃리치 팀원 중 단 한 사람도 아프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이동하는 차 안은 찬양과 나눔이 가득했다. 사역지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부족민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마들과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며 교제를 나눴다. 나중에 들어보니 마마들은 우리가 찍어준 폴라로이드 사진을 손에 꼭 쥐고 한참 동안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평생 거울을 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데도 여전히 많은 것이 없다고 불평하던 과거의 내 모습을 돌아봤다.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서는 문명의 혜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울리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음에도 누군가는 문명의 모든 것을 누리며 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평생 자신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며 사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긴 시간 동안 그 생각이 계속됐다. 그러다 두 개의 답이 마음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려온 답은 &lsquo;모든 문명을 누리는 것이 곧 축복은 아니다&rsquo;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답은 저녁 모임 때 목사님이 전해주신 &lsquo;먼저 받은 자들이 나누면 된다&rsquo;는 말씀이었다. 사역이 끝나고 사막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크심이 마음 깊이 다가왔고, 서울에서 부딪히고, 안고 있던 고민과 걱정들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lsquo;광야&rsquo;라는 단어가 차로 오랜 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길과 현실을 직접 겪으며 내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자리 잡았다. 블레싱 시간에 선교사님의 자녀인 하윤이와 예윤이에게 &ldquo;언니, 오빠들이 와서 좋아?&rdquo;라고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ldquo;언니, 오빠들이 와서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우리도 좋아요.&rdquo;라고 답했다. 10살, 11살밖에 안 된 아이들의 이 대답이 아웃리치 기간 내내 내 마음을 울렸다. 선교사님은 다큐멘터리 영화 &lsquo;무명(無名)&rsquo; 속의 선교사님들처럼, 오직 예수님만 아는 분이었다. 복음 전할 생각으로 가득했고, 강도의 위협이 가득한 곳이지만 가장 복음이 필요한 곳이기에 그곳에서 살고 계셨다. 사막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할 사람을 찾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신다. 일주일 남짓 짧은 시간 동안 아웃리치팀이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 또한 아웃리치의 중요한 사명임을 깨달았다. 나는 2016년부터 매해 아웃리치를 다녀왔는데, 이렇게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곳은 처음이었다. 우리 팀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아쉬웠다. 자연스럽게 내년에는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물품을 가져가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이 모든 시간을 돌아보니 처음 케냐라는 나라를 품게 하신 순간부터 다녀온 지금까지 여정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팀에게 가장 사랑하는 자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았다. 광야와 같은 곳에서도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셨고, 우리가 작은 손길로 섬길 때조차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났다. 이 여정을 돌아보며 결심했다. 앞으로 어떠한 환경이 기다리고 있든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기꺼이 걸어가겠다고 말이다. 하나님이 이번 아웃리치를 통해 보여주신 작은 손길과 기쁨은 평생 잊지 못할 축복이다. / 전아라 자매(여호수아청년부)

     2025-09-06  제1555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죄와 전쟁하시는 여호와 [주일강단] 죄와 전쟁하시는 여호와 여호수아 7:6~21 / 이재훈 위임목사 &lt;여호수아서&gt;에 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전쟁은 &lsquo;여리고 정복 전쟁&rsquo;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대로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고,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는 &lsquo;기이한 승리&rsquo;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정복하도록 주신 전략은 군사 전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중심으로,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가고, 군사들은 앞뒤에서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군사 전략이라기보다 예배의 행진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법궤를 중심으로 백성들이 행진하는 것, 그 성을 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곱이라는 숫자가 강조되었습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나팔, 7일간의 행진,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도는 등 &lsquo;7&rsquo;이라는 숫자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의 수, 완전수, 이 세상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발자국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역사를 온전히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리고 전쟁에서 실제 전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에 큰 두려움이 임하도록 하셨고, 두려워 떠는 이들을 진멸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하심이 나타났고,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자자해졌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후 곧이어 싸우는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합니다. 여리고 성 전투가 기이한 승리라고 한다면, 아이 성 패배는 기이한 패배였습니다. 도무지 패배할 수 없는 패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 성으로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ldquo;그 성이 너무 작고 백성들 수도 적으니 다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2~3천 명만 보내면 충분합니다&rdquo;라고 건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36명이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 군사 3천 명이 두려워 도망했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절망, 좌절에 빠진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리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한탄했습니다. 죄는 철저히 대적하신다 &ldquo;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lsquo;일어나거라! 왜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느냐?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내 언약을 어겼다. 그들이 진멸시켜야 할 물건을 가져가서 훔치고는 거짓말하고 자기 창고에 넣어 두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적을 당해 내지 못하고 등을 보인 것이다. 그들이 진멸시켜야 할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진멸시켜야 할 물건을 너희 가운데 없애지 않으면 내가 더 이상 너희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rsquo;&rdquo;(10~12절). 하나님이 알려주신 패배의 원인은 &lsquo;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진멸하라고 한 물건의 일부를 훔치고,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rsquo;입니다. 하나님이 아이 성 패배를 통해 죄와 싸우시는 여호와, 죄와 전쟁하시는 분임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철저히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벽한 승리를 주셨던 여리고 성 전투에서 어떤 사람이 은밀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게 하신 것은 끔찍한 심판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을 실행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심판의 실행자, 도구, 대리자로 쓰임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죄를 범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죄로 인해 심판받는 환경을 보면서, 심판을 집행하는 역할을 하면서 죄를 범하는 게 &lsquo;인간의 죄성&rsquo;입니다. 심판의 도구가 되어서 여리고가 진멸 당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인간의 구제 불능한 완악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리고 평원에서 군사령관이 나타났을 때 여호수아가 &ldquo;당신은 우리 편이요? 아니면 원수 편이요?&rdquo;라고 질문합니다. 여호수아는 &ldquo;네 편이다&rdquo;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텐데, &ldquo;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사령관으로 왔다&rdquo;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은 &ldquo;내가 너와 무조건 함께 하는 게 아니다&rdquo;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여호와의 원수들을 치는 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나안 족속이 그 대상이지만, 너희들도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고, 너희들도 죄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칠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어느 편을 일방적으로 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대적하는 게 임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돼서 실행하는 이들인데,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아이 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믿음으로 참여하는 이들은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 그 언약 바깥으로 불순종해서 뛰쳐나간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의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민족, 누구라도 죄와 싸우십니다. 죄인을 대적하시는 분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를 극명하게 대조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여리고 성 정복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면 그분이 어떻게 함께하시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아이 성 패배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그분이 어떻게 대적하시는지, 어떻게 버리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죄, 끝까지 추적해서 드러내신다 &ldquo;가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lsquo;너희는 내일을 위해 너희 몸을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 진멸시켜야 할 물건을 제거하지 않으면 너희 원수들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아침에 각 지파별로 나오라. 여호와께서 제비로 뽑는 지파는 가문별로 나오고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제비로 뽑는 가문은 가족별로 나오고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제비로 뽑는 가족은 성인 남자별로 나와야 한다. 진멸시켜야 할 물건을 가진 사람이 잡히면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불태워야 한다. 그가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rsquo;&rdquo;(13~15절). 둘째,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의 죄일지라도 끝까지 추적하셔서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제비뽑기 과정을 통해 죄인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각 지파별로 나오게 하고, 그 지파 중에 한 가문이 뽑히면 가문별로, 한 가문이 뽑히면 가족별로, 그 가족 중에서 성인 남자별로 한 사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의 죄일지라도 끝까지 추적하셔서 드러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아간이 대표적인 지도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lsquo;한 사람의 죄 때문에 전체가 패배하게 하는 것은 너무하신 것 아닌가?&rsquo;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복의 근원이 되는 민족을 삼으셨고,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 죄의 전염을 가져온 것처럼, 한 사람의 죄가 곧 전염을 일으킬 것으로 보셨습니다. 여러분, 죄는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떠한 죄도 순전히 개인적인 것은 없습니다. 모든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동체를 통해 일어납니다.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염력이 강하고 영향력을 미칩니다. 죄의 전염력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전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더욱 엄격하게 대하시고,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격하게 다루시는 시점이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시대가 열리는 때 하나님이 죄를 엄격하게 다루심으로써 그 민족과 역사를 운영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제비뽑기 기간이 회개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이 승리하는 그 순간에 범했던 죄를 알고 계셨고,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멸시켜야 할 물건에 손을 댔습니다.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며, 삽디의 손자이며,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진멸시켜야 할 물건의 일부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분노가 이스라엘에 대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진멸시키라고 하는 물건을 왜 몰래 취했습니까?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ldquo;전리품 가운데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와 은 200세겔과 50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 그것들은 내 장막 안 땅 속에 숨겨져 있고 은은 그 밑에 있습니다&rdquo;(21절). 값비싼 은과 금을 보고 탐이 나서 가지게 된 것이고, 숨겨놓은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를 하나님은 이미 보셨습니다. 제비뽑기를 몰라서 한 게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고, 회개하게 하시려고 그 과정을 주신 것입니다. 라합과 아간을 비교하면 정반대입니다. 라합은 멸망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심판받을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군지 전혀 몰랐던 여인이 구원을 얻었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을 향하던 사람이었지만, 말씀에 불순종하고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받았습니다. 아간의 죄를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의 죄를 인지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승리에 도취해서 스며든 교만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정탐꾼들의 보고에서 나타납니다. 정탐꾼들이 &ldquo;그 성은 작고, 사람도 적으니 2~3천 명만 올라가도 충분합니다&rdquo;라고 보고합니다. 교만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게 자신들의 힘으로 무너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숫자로 계산해서 이루어지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여리고 성에서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를 잊어버리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처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가 오는 겁니다. 모든 종류의 실패는 교만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교만의 본질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자신이 받을 영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백성들만 교만의 죄에 빠진 게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지도자로서 한 번 더 기도하고 판단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도 교만해진 것입니다. 패배한 후에 울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그 원인을 듣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아이 성을 놓고, 여리고 성 앞에서처럼 하나님과 시간을 가졌더라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이 성의 패배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은 언제나 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죄에 대한 전쟁, 죄와의 싸움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해결한 이후에야 아이 성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전심을 다하여, 전력을 다하여 싸움으로 8장에 가서 승리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죄와 전쟁하시는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라도, 그 누구라도 죄를 범하면 가나안 민족과 동일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죄를 드러내도록 추적하십니다. 그래서 아이 성의 패배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때로 패배를 통해서 내 안에 어떤 죄가 있는지 살펴보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에 어떤 죄가 있는지를 추적하게 하시고, 그것을 드러내시고, 처리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패배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전략에 전심을 다해서 순종합니다. 아이 성의 패배가 약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때로 실패합니다. 교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산다고 착각합니다. 영적 긴장감을 잊어버립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와도 싸우십니다. 죄와 싸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안에 죄가 있으면 대적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십자가로 온전히 처리해야 합니다.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 묻듯이, 우리의 죄를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묻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ldquo;너희 안에 있는 죄가 있다면 나는 너와 싸울 수밖에 없다. 나는 너를 대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너는 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 골고다 언덕에서 여호수아가 아골 골짜기에서 아간을 파묻듯이 저 골고다 언덕에 너의 죄를 파묻어라. 그리하여 내가 너와 함께할 수 있다&rdquo;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09-06  제1555호

  • 칼럼

    [신앙에세이] 낮아짐의 용기, 겸손의 가치 신앙에세이 낮아짐의 용기, 겸손의 가치 &ldquo;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rdquo; 익어가는 벼의 무게만큼 깊어지는 삶의 태도는 아마도 &lsquo;겸손&rsquo;일 것이다. 세상도 교회도 겸손을 귀한 덕목이라 외치지만, 막상 그 의미를 &lsquo;내 삶&rsquo;으로 풀어내려 하면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다. 주변에서 &lsquo;진짜 겸손한 사람&rsquo;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겸손을 &lsquo;겸손한 척&rsquo;으로 오해한다. 차세대에서 청소년들을 섬기며 학생들과 겸손에 관해 이야기 나누다 보면 그 오해가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밤을 새워 열심히 공부하고도 막상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는 &ldquo;아니야, 나 정말 못했어&rdquo;라며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으면 &ldquo;에이, 아니야&rdquo;라며 고개를 돌린다. 그것이 학생들이 그동안 보고 느꼈던 겸손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있는 사실도 마치 아닌 것처럼 축소해서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칭찬을 거부하며 속으로는 &lsquo;역시 난 오늘도 겸손했어&rsquo;라며 스스로를 토닥이지만, 진실로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진심 없는 겸손은 자존감을 갉아먹고, 결국 나도, 세상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 어떤 이는 차라리 겸손을 포기한 채 &lsquo;내가 제일 중요해&rsquo;라며 우뚝 서기도 한다. &lt;마가복음&gt; 10장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ldquo;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 중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rdquo;라며 은밀히 청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오른팔과 왼팔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제자 열 명이 분개했다. 그들이 화난 이유는 간단하다. 야고보와 요한만 높은 자리를 원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ldquo;너희 중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rdquo;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은 자기를 깎아내리는 연기가 아니라 다른 이를 높이는 선택이었다. 겸손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lt;요한복음&gt; 13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유대 사람들이 외출 뒤에 반드시 하는 것 중 하나가 발을 씻는 것이다. 발이 드러나는 샌들을 신고 다니는 유대 사람들의 발은 언제나 흙먼지로 쉽게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외출 후 더러워진 발을 씻기는 일은 늘 노예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고는 &ldquo;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주었다&rdquo;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낮아지실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발을 씻긴다고 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섬김을 받는다고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제자들의 가치를 일깨웠고, 그들도 이 사랑을 세상에 전하라고 초대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다르지 않다. 진짜 겸손은 하나님 안에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신할 때 가능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타인을 섬길 수 있고, 흉내가 아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다. 그런 삶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향기가 된다. 우리는 공동체와 사역팀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다양한 지역과 국가로 나아가기도 한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면서도 제자들이 그러했듯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어느 순간 자리할 수 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벼가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듯, 우리 역시 사랑 안에서 익어갈 때 자연스레 낮아질 수 있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용기이며, 섬김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유다. 오늘도 그 자유 안에서 누군가를 높이고, 겸손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세상에 심자. 당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풍성한 수확이 되리라 믿는다. / 김은혜 목사(양재차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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