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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죽음을 이기신 그 사랑··· 죽음을 이기신 그 사랑··· 4월 4~5일 ‘부활주일’ … 칸타타 등 행사 이어져 차세대 ‘부활절 문걸이’, 강동 ‘2026 행복이음 축제 4월 4일(토)과 5일(일)은 부활주일이다.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에서 부활주일 예배 를 드린다. 서빙고온누리교회 토요주일 1~2 부 예배에서는 버금미션콰이어 ‘I AM’, 일요 주일 1~4부 예배에서는 워십콰이어 ‘나를 구 원하신 예수’를 주제로 칸타타를 한다. 양재온누리교회 토요주일예배에서는 양재 토요챔버팀이 ‘완전한 사랑’, 양재 일요주일 1~4예배에서는 주기쁨찬양사역팀 ‘그 어린 양’을 주제로 찬양한다. 도곡교육관 일요주일 1~2예배에서는 주경배찬양사역팀이 ‘모든 것 이루셨네’를 주제로 칸타타를 한다. 다른 캠퍼스에서도 부활주일 예배를 드린다. 차세대사역본부에서는 각 가정에 ‘부활절 가정예배 문걸이’를 나눠준다. ‘부활절 가정 예배 문걸이’에는 가족예배 가이드와 부활절 기도문이 적혀 있다. 각 부서에서는 부활절 기 획예배 및 부활절과 관련된 다양한 소그룹 활동을 한다. 강동온누리교회는 지역 주민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나눈다. ‘2026 행복이음 축제’가 4월 5 일(일) 오후 1시 30분 강동구 천호로데오거리 나비쇼핑몰 1층 광장에서 열린다. 이번 축제에서는 부활절 달걀 나눔, 창조질 서회복 캠페인 부스, 평강 캘리그라피, 부활절 찬양, 공감소비운동 등을 한다. 지역 예술가와 단체들이 참여해서 색소폰 연주회, 태권도 퍼 포먼스 등을 선보인다. 공감소비운동에는 손 수레 양말(대표 곽호걸), 네일인(대표 송인아), 그랑프리 베이커리(대표 박성천) 등 지역사회 가게들이 참여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 장애인주일 전후, 의류∙생활용품 등 기증 온누리교회와 사회복지법 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굿윌스토어가 협업해 ‘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을 한다. 양재 4월 12일과 19일, 부천 상시 수거, 대전, 세종 4 월 19일과 26일 진행한다. 캠퍼스별 지정된 장소에 의류, 생활용품, 소형 가전제 품, 주방용품, 도서, 화장품 등을 기증하면 된다. 사회복 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굿윌스토어는 장애인이 일하는 능력을 키워서 자립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그 들의 삶의 질과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소매 유통 중심의 직업 재활 시설이다. 문의: 1533-0091 / 남현영 기자 hyun0@onnuri.org ‘좁은 길, 좁은 문’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마무리 2026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이하 40일 새벽기도회) ‘좁은 길, 좁은 문’이 지난 2월 23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국내 온누리교 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진행됐다. 고난주간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 의 보혈을 기억하며 침묵 가운데 참회의 기도 를 드렸다. 이어 온누리교회 로비에 설치된 ‘ 회개의 십자가’에 자신의 죄와 기도제목을 적은 종이를 못 박고 회개와 결단의 시간을 보냈다. 정승숙 권사(성동광진공동체)는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산상수훈 말씀 을 들으며 어렵고 힘든 길일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는 도전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세경 성도(한강공동체)는 “날마다 나를 십 자가에 못 박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 박지혜 기자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종료 7주 동안 디지털 디톡스, 생태 회복 등 실천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보시기에 좋았더라: 자기 부인의 제자도’가 막을 내렸다. 지난 2월 18일부터 4월 5일까지 이어진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에 국내 온 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참여했다. 7주 동 안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디지털 디톡스, 건강한 식습관, 생태 회복, 바른 언어생 활, 절제와 성실, 겸손과 순종 등을 실천 했다. 김우용 성도(S브릿지)는 “창조질 서회복 캠페인 기간에 디지털 미디어를 멀리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실천하면서 몸과 마음의 긍정적 변화를 경험했다” 면서 “사순절 이후에도 가정과 일터, 생 활 속에서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삶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참가자 소감을 모집한다. 묵상한 내용과 실천 사항, 실천 사진, 소감문 등을 문자메시지 (010-5395-2319) 또는 이메일(onnuri.l ent@gmail.com)로 제출하면 선정해서 소정의 선물을 보내준다. 소감문을 제출 할 때는 ‘이름, 소속 공동체, 연락처’를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문의: 02-3215-3434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4월 30일 목요일까지 참가자 모집 K-CCM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 ‘힐 링보이스’ 참가자를 모집한다. 4월 30 일(목)까지 지원서와 무반주 가창 영상, 사진 파일을 이메일(cgnhealingvoice @daum.net)로 제출하면 된다. 무반주 가창 영상은 자유곡 1곡과 지정곡 20곡 중에서 1곡을 선택해서 각각 1분 이상 부르고, 그 영상을 스마트폰 기본 카메 라로 촬영해서 제출하면 된다. 이미 데 뷔한 프로 가수나 찬양사역자도 참가 할 수 있다. 지원서와 지정곡 리스트 등 더 자세한 사항은 공식 홈페이지(heal ingvoice.cgnkorea.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 최종 우승자 1인에게는 상금 3천만 원을 수여하고, 결선에 진출한 TOP 7 인에게는 CGN 프로그램 출연, CCM 음원 발매, CGN 월드투어 콘서트 참여 등의 특전이 주어진다. 문의: 02-3275-9333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 홍하영 기자

     2026-04-04  제1583호

  • 칼럼

    [전문가 기고] 침묵의 나선을 깨고, 가정을 다시 세웁시다! 오늘 우리는 한편으로는 배려와 존중을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자유롭게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순간 비난받거나 고립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결과, 마음속에는 분명한 생각이 있어도 입을 닫게 되고, 결국 소수의견은 점점 더 숨어 버리며, 다수의견만 더욱 강하게 보이게 된다. 이것이 사회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 이다. 문제는 이 침묵의 나선이 더는 언론이나 정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제는 가정의 식탁, 부부의 대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예전에는 가족은 생각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공동체였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세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깊은 갈등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사람은 용서와 인내, 화해와 책임을 배웠다. 그런데 오늘 날은 달라졌다. 중요한 주제일수록 조심하게 되고, 민감한 문제일수록 아예 입을 다물게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고,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정한 채 마음을 닫아 버린다. 그 결과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의 진짜 생각을 모른 채 지나가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 본래 정치적 올바름, 곧 PC(Political Correctness) 자체가 처음부터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타인을 불필요하게 모욕하지 않으려는 배려, 사회적 약자를 함부로 조롱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필요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더 강한 이념, 즉 ‘ PC주의’ 가 되면서 어떤 표현과 관점만이 도덕적으로 옳은 말로 인정되고, 그에 어긋나는 목소리는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시켜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배려는 더 이상 배려가 아니라 통제가 되고, 대화는 점검과 검열로 바뀌기 때문이다. 가정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흔들리는 가정의 대화 구조 이 시대에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 가정의 대화 구조’ 다. 예를 들어 자녀가 학교나 미디어에서 성, 젠더, 인간 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접했다고 해보자. 부모가 그 문제를 차분히 설명하고 함께 토론하기보다 아예 말을 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괜히 잘못 말했다가 차별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고, 자녀는 “부모는 구시대적이고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가장 위험한 주제가 된다. 결국, 가정은 진실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갈등을 피하고자 조용히 지나가는 자리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5)고 했다. 진리를 포기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 없는 진리도 사람을 살리지 못하지만, 진리 없는 사랑은 결국 방향을 잃게 된다. 믿음의 가정은 바로 이 둘을 함께 붙드는 자리여야 한다.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문화가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조차 더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감정과 자기 인식이 생물학적 현실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말하는 젠더 이데올로기 흐름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부모와 자녀는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전혀 다른 인간관을 갖게 된다. 부모는 창조 질서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자녀는 학교와 미디어가 전달하는 유동적 성정체성의 언어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게 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가족 내부에 깊은 인식의 단절을 가져온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지하고 억압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 있고, 자녀는 부모에게 혼란과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부모는 단순히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는지, 왜 몸은 단지 껍데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지, 왜 창조 질서는 억압이 아니라 보호인지 차분히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차단의 기술이 아니라 회복의 기술! 나아가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화가 결혼과 부모의 역할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한때 가정은 헌신과 책임, 인내와 돌봄을 배우는 자리였다. 결혼은 기분이 좋을 때만 유지하는 계약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지켜 가야 할 언약으로 이해됐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관계를 점점 더 ‘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라는 기준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부부도 서로를 언약의 동반자라기보다 감정적 만족을 위한 파트너처럼 여기기 쉽다. 부모 역할도 책임과 훈련보다 자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기술로 축소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창 2:24)이라고 하셨고,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결혼과 부모 됨을 선택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분 앞에서 감당해야 할 거룩한 책임으로 가르치셨다. 오늘날 가정이 겪는 또 다른 위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의 상실이다. 전에는 갈등이 생겨도 붙들고 대화하고, 때로는 눈물로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만 불편해도 관계를 끊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여겨진다. 사회에서 누군가를 ‘ 캔슬(Cancel)’ 하듯, 가정에서도 대화보다 차단이 먼저 나오고, 설득보다 거리 두기가 먼저 나온다. 가족 단체채팅방을 나가고, 아예 연락을 줄이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상대를 ‘ 해로운 사람’ 으로 분류해 버리는 일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부적절한 말을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소외시켜 버리는 PC주의의 캔슬 문화(Cancel Culture)가 가정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세상처럼 사람을 취소하는 곳이 아니다. 가정은 실수해도 돌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잘못이 있어도 회개와 용서의 문이 열려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정에 주신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물론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을 이유로 곧바로 관계를 끊는 것은 복음의 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차단의 기술이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다. ‘식탁의 대화’회복, 부부가 먼저 한 방향으로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어떻게 가정을 세워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식탁의 대화를 회복해야 한다. 바쁜 일상에서도 가족이 함께 앉아 서로의 생각을 묻고 듣는 시간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자녀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말할 때, 부모가 먼저 귀를 열어야 한다. 즉시 분노하거나 조롱하지 말고, 끝까지 듣고, 질문하고, 성경의 빛 아래에서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 생각은 어디서 왔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 문제를 어떻게 비추고 있을까?” 이런 질문이 쌓일 때 자녀는 세상의 주장만 듣는 게 아니라, 부모의 지혜와 믿음을 함께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신 6:6~7)고 명하셨다. 말씀을 통한 가정교육은 특별한 날에만 하는 행사가 아니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사명이다. 또한 부부가 먼저 한 방향으로 서야 한다. 자녀는 부모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기 전에, 부모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먼저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존중하는지,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말하는지, 갈등이 생겼을 때 책임 있게 해결하는지를 보면서 관계의 문법을 배운다. 그러므로 부부가 각자의 감정과 피로속에 흩어지지 말고, 말씀과 기도 안에서 다시 손을 맞잡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1). 가정을 지키는 힘은 인간의 지혜나 감정 조절 능력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집을 붙들어 주실 때 비로소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 부모는 두려워하지 말고 양육의 책임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 세상이 부모를 낡은 존재처럼 말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부모를 자녀 양육의 첫 번째 책임자로 부르신다. 사랑은 방임이 아니다. 존중은 무관심이 아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부모는 자녀가 배우는 내용과 접하는 문화, 형성되는 세계관을 책임 있게 관심 가져야 한다. 학교와 미디어가 전하는 모든 메시지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두지 말고, 자녀가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하나님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잠 22:6)이라고 약속하셨다. 오늘 심는 말 한마디, 오늘 드리는 기도 한 번, 오늘 보여 주는 부모의 태도 하나가 먼 훗날 자녀의 삶을 붙드는 뿌리가 된다. 혼란의 때 성도 들은 낙심할 시간이 없다. 가정이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더욱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가정을 통해, 가정을 위해 일하신다.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고, 학교가 혼란을 가르치고, 세속 문화가 질서를 무너뜨리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믿음의 가정을 통해 다음세대를 일으키신다. 우리는 세상의 소음에 압도당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소명은 세상의 모든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가정을 말씀 위에 바로 세우는 것이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는 여호수아의 고백은 한 시대의 종교적 표어가 아니다. 우리 가정이 다시 붙들어야 할 믿음의 선언이다. “우리 집이 세상의 유행을 따라 흔들리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위에 서는 집이 되게 하소서”,“우리 가정의 식탁이 침묵의 자리가 아니라 진실과 사랑의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 부부가 서로를 향한 언약의 신실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 자녀가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바른 질서와 따뜻한 사랑을 함께 배우게 하소서”라고 선포하자. 가정은 무너지는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다. 하나님이 다시 회복을 시작하시는 첫 자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분별이며, 침묵이 아니라 믿음의 용기다.

     2026-04-04  제1583호

  • 칼럼

    [신앙에세이] 누가 당신의 주인입니까? 신앙에세이 누가 당신의 주인입니까?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믿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비웃었다. 재물이 많은 것이 곧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보다 재물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셧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한쪽을 무시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단호하게 “불가능하다”고 선포하셨다. 결론적으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물은 단순히 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붙잡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힘, 즉 ‘맘모나스(μαμων)’를 뜻한다. 돈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불’ 비유를 떠올릴 수 있다. 불은 추위를 녹이고 음식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도구다. 그러나 통제력을 잃고 번져나갈 때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재앙이 된다. 이를 ‘불 화(火), 마귀 마(魔)’ 자를 써서 ‘화마(火魔)’라 부른다. 마치 마귀와 같은 존재로 돌변한다. 중요한 것은 불의 크기가 아니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온 산을 태워버린다. 반대로 큰불이라도 잘 다스리면 도시 전체를 밝히는 에너지가 된다. 재물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재물을 다스리지 못하면 인생 전체를 집어삼키는 맘몬이 되지만,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면 재물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가 된다. 故 하용조 목사님은 <마태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통찰하셨다. “불에 타고 없어지는 재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불에서도 견딜 수 있는 재물, 그것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거센 파도 앞에서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위험한 착각에 빠진다. ‘돈 전(錢)’ 자를 쓰는 가짜 ‘전지전능(錢知錢能)’에 삶을 의탁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책임져 주지도 못한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만이 삶을 영원히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분만이 ‘온전할 전(全)’ 자의 참된 전지전능(全知全能)이시다. 성경은 돈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핵심은 ‘소유’가 아니라 ‘주인’이다. 돈이 맘몬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는 평생에 걸쳐 다음 세 가지 영적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 첫째, 끊임없는 점검이다. 돈이 내 삶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지, 아니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는지 수시로 살펴야 한다. 둘째, 타협 없는 정직이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틈으로 맘몬은 스며든다. 재정을 다루는 데 있어 투명함과 정직함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가장 강력한 울타리다. 셋째, 범사에 감사는 태도다. 감사는 돈이 맘몬이 되지 못하게 막는 틀과 같다. 재물이 많을 때나 적을 때나 동일하게 감사하면 돈이 더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묻고 계신다. “나를 너의 진정한 주인으로 삼아줄 수 있겠니?” 돈이 주인이면 우리는 돈의 종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면 돈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도구가 된다. 우리는 전(錢)을 붙잡고 불안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한 분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한다. / 황유일 목사(꿈이자라는땅)

     2026-04-04  제1583호

  • 성인

    [맛있는 말씀 해설(골 3:16)] 말씀이 머무는 자리, 회복이 시작되는 공간 맛있는 말씀 해설(골 3:16) 말씀이 머무는 자리, 회복이 시작되는 공간 최근 우리 가족에게 거룩하고 즐거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바로 ‘온누리성경읽기앱’으로 매일 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말씀을 다 들은 뒤에는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기도로 마무리한다.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자녀들의 기도와 고백을 듣다 보면 부모인 나도 큰 위로와 도전을 받는다. 온 가족이 말씀 안에서 하나 되어 기도로 마음을 모으는 이 시간은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깊은 은혜다. 이처럼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듣고 나누는 행위가 우리 영혼에 얼마나 큰 생명력을 불어넣는지 몸소 체험하며, 바울 사도가 골로새교회에 전했던 권면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본문의 첫머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는 권면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거하다(νοικετω)’라는 헬라어는 잠시 방문하는 손님이 아니라, 그 집의 주인으로서 ‘안주하다’, ‘뿌리를 내리다’, ‘계속 머물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성경이 단순한 지식의 전달체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중심인 ‘마음’에 자리 잡고,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통치적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πλουσω)’ 거한다는 것은 말씀이 삶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자리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가 당시 유행하던 헬라의 철학이나 영지주의, 금욕주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거짓 가르침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유일한 해답으로 ‘말씀의 내주’를 제시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의 수많은 정보와 가치관 속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질 때 비로소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을 갖게 된다. 이어지는 말씀은 말씀이 내주한 결과가 공동체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는 구절은 신앙이 결코 개인주의적인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됨을 보여준다. 복음은 공동체 안에서 나눌 때 그 생명력이 배가 된다. 여기서 ‘피차(αυτο)’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가르침이 어느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모든 성도가 서로를 세워가는 과정임을 나타낸다.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말씀을 듣고 기도함으로 위로를 받듯, 성숙한 성도는 연약한 자를 권면하고, 연약한 자는 순수한 고백으로 공동체에 신선한 도전을 준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스승이자 동역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지혜(πσσοφ)’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말씀의 풍성함은 반드시 찬양의 고백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본문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기록한다. 말씀이 머리에만 머무르면 교만이 되기 쉽고, 가슴에만 머무르면 감상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찬양과 감사가 된다. 여기서 ‘감사하는 마음으로(ντχριτι)’는 문자 그대로 ‘그 은혜 안에서’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형편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다.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할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얻게 된다. 형식적인 노래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감사의 제사가 드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말씀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만 켜면 언제 어디서든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느냐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삶의 자리로 가져가야 한다. 매일의 시간을 구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주인으로 자리 잡도록 ‘말씀이 머무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받은 은혜를 나누며 서로에게 권면할 때 우리 입술에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감사의 찬양이 터져 나올 것이다. 말씀이 머무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되는 성소임을 기억하며 말씀 앞에 우리 마음의 자리를 내어 드리기를 소망한다. / 정현석 목사 (고양은평공동체)

     2026-04-04  제1583호

  • 칼럼

    [특별기고]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두 가지 혁명 두 가지 다른 길 특별기고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두 가지 혁명 두 가지 다른 길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길, 아담 이래로 인류는 이 두 가지 길을 걸어왔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의해 1500년 역사의 로마가 무너지면서 역사는 큰 갈림길에 서게 된다. 천년이 넘게 이어 왔던 가톨릭 중심의 제정일치 사회가 붕괴되자 유럽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붕괴는 사실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로마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너지기 100년 전, 유럽에는 4가지 악재가 일어난다. 첫 번째 가장 먼저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오면서 "아비뇽 유수"(1309~1378)라 일컫는 교황들 간의 극심한 분열이 일어나며 가톨릭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두 번째, 유럽 대륙을 휩쓴 대기근(1315~1317)으로 유럽 인구의 15%가 죽는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로 “100년 전쟁”(1337~1453)이라 부르는 격렬한 패권 전쟁이 일어나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쟁 중에 흑사병(1347~1351)이 발생하여 유럽 인구 60%가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신앙의 힘이 가장 절박한 때, 가톨릭은 오히려 바닥난 교회 재정을 채우기 위해 면죄부를 팔면서 가톨릭과 교권에 대한 신뢰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100년 전쟁이 끝나던 해 1453년, 지칠 대로 지친 유럽은 오스만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21세)에 의해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1500년 역사의 로마는 막을 내리게 된다. 로마의 멸망은 전 유럽을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교회에 대한 큰 실망과 불신으로 표출되었는데, 절박한 때 시민들을 돕지 못하고 실망만 안겨준 교회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은 점차 커져 갔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운동인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된다. 한편, 동로마가 무너지면서 가톨릭교회가 비밀리에 보관해 왔던 원어 성경 사본들이 유출되기 시작했는데, 에라스무스가 라틴어 성경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가톨릭이 “무오(無誤)하다”고 여겨왔던 라틴어 번역본 성경(불가타역)에 오류를 발견하고 오류를 수정한 성경이 인쇄되면서 일대의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이 두 가지 다른 혁명,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극명한 다른 결과를 낳으며 근현대사회를 이끌게 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르네상스로 시작된 인본주의 운동은 20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과 기독교를 반대하는 극단적 인본주의 철학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인본주의 철학들은 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 체제와 가톨릭 기반의 사회조직을 붕괴시키는 결과들을 낳았는데, 그 정점이 바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봉 왕조의 독재를 전복시키고 국민의회 중심의 새로운 국가 체계와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지만, 왕족들과 결탁해 부패의 온상이 되었던 가톨릭 성직자들에 대한 반감이 혁명의 뿌리에 있었고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 말살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 혁명에 단초를 제공했던 사회주의자의 아버지 루소의 뒤를 이어, 그의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볼테르는 시민들 앞에서 "악당을 타도하라" 외쳤는데, 그 악당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했다. 시민혁명을 주도했던 철학자들의 광적인 부르짖음, "우리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는 구호는 국민의회의 표어가 되었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인간을 위해 모든 신적 권위로부터 해방"을 외치는 반기독교적 슬로건이 시민혁명의 본질이자 핵심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볼테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며, "인간이성"을 신앙화하여 모든 인본주의적 학문과 철학을 정치에 반영하려 했고, 니체는 "우리가 신을 죽였고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반기독교적 철학과 사상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정치, 과학, 문화, 교육, 예술, 미디어 등 전 영역에 뿌리를 내렸고 그 결과, 인간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계속 진화되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며, 이제 AI까지 동원하여 영생의 꿈을 실현해 보려 하고 있다. 로마의 멸망으로 촉발된 르네상스가 프랑스 혁명을 불러왔다면, 에라스무스의 성경 번역과 함께 루터와 칼뱅이 불러온 종교개혁은 200년 후, 1776년 개신교도들에 의해 충격적인 혁명을 만들어 낸다. 이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성경적 혁명으로, 왕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로 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칼뱅은 성경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며 유럽을 변화시킨 개신교회들을 낳게 되는데, 칼뱅에게 배운 존 녹스가 영국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세웠고, 네덜란드의 개혁자들은 “화란 개혁교회”를,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전 유럽에 흩어져 다양한 개혁주의 공동체를 생산한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들이 부패한 가톨릭을 강하게 거부하며, 오직 성경에 기초한 삶의 체계와 새로운 예배로 교회의 정체성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성경적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도전은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에 의해 통치되는 ‘왕정 국가’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인류 최초 "신정 민주주의 국가"를 시험하는 모험에 도전하는데, 그 믿음의 산물이 바로 "미국"이다. 1776년, 미국 국부들이 만든 정치적 선언인 독립선언서를 보면, 하나님 중심의 성경적 세계관으로 국가의 체계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인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셨는데, 그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국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하려 할 때,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고,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져오리라 예상되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이 선언문을 통해 그들의 가슴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미국의 독립은 하나님을 한 국가의 중심, 역사의 중심으로 모셔드린 성경적 혁명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쓴 "칼빈주의 강연"에 의하면 칼빈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죄로 무지해진 세상을 깨우고, 세상의 통치자가 정치인들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각 나라에 심겨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그 나라 정치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로 성경적 가치가 실현되는 개인과 사회, 국가를 꿈꾸기 때문이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정체성 때문에 세속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는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충돌이 아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목숨 건 신념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모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로마가 무너지고 현재까지 500년 동안, 르네상스로 촉발된 “반성경적 인본주의 세계관”과 “성경을 뿌리로 한 기독교 세계관”, 이 두 삶의 체계는 지금도 서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 지금 이 나라 이 땅은 어떤가? 이 세계관 전쟁으로부터 자유한가? 구한말 조선이 무너지고 대한민국이 태동되던 때는 로마가 무너지던 때와 유사한 패턴이 있다. 기근과 전쟁, 부패한 정권과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전 국토는 황폐해졌고 이런 상황을 바꾸어 보려는 5가지 세력들이 일어났다. 일본과 같이 개화해야 한다는 친일 개화파, 중국의 사대주의 만이 살길이라 했던 친중 위정척사파, 반식민지를 주장하는 친소 공산주의, 단재 신채호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을 때, 선교사들이 들어 오면서 새로운 세력이 생겨나는데 친미 기독교파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새로운 세력, ‘친미 기독교파’ 지배계층과 지도자들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다른 세력들과는 달리 선교사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지어 서구를 계몽시킨 현대식 교육을 도입하여 조선이 버린 여자들과 천민들을 교육해 갔다. 이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1832년 조선을 방문했던 첫 선교사라 할 수 있는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 1803-1851)는 화란선교회(Netheland Missionary Society, 1797) 소속이었고,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영국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 소속이었다. 모두 칼뱅에게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다. 조선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나라는 미국인데, 1832년부터 1948년까지 내한한 1,800여 명의 선교사 가운데, 미국 국적 선교사는 약 70%에 달한다. 선교사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전체주의 왕정 통치하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기초로 한 천부인권과 미국을 세운 신정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실천하게 했다. 1887년 10월 7일 새문안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기 위해 처음으로 “선거”를 했는데, 여자를 포함해서 모든 성도가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로 지도자를 세우게 한 것은 역사적인 변혁이자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칼뱅의 가르침대로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세우는 민주주의가 교회를 통해 시작된 것이다. 양평대군의 16대손으로 양반 중에 첫 번째 기독교인이 된 이승만은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우고 영어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영접한다. 그리고 미국의 특사로 파견되며 기독교 세계관 위에 세워진 신정 통치 국가 미국처럼 조선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꿈꾸며 조지 위싱턴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을 거치며 정치와 법을 배워 미국의 헌법을 기초로 한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들게 된다. 또한 그는 이미 친소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의해 장악된 정치 세력들을 몰아내고 그의 기도대로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기 위해 제정 국회, 첫 번째 국회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을 돌린다. 정치적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된다. 좌파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했고 우파는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을 뿐 같은 인본주의 세력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좌파와 우파는 “이념 vs 신앙” 차이로 갈라졌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물론자들인 공산주의 세력들과 유일하신 하나님, 참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오늘날 이 땅의 혼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이 땅뿐 아니라 전 세계 역시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혁명, 두 가지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은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의 길로, 다른 쪽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 중심의 그리스도의 길로 가려 한다.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길, 지금 나는 어느 편에 있고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

     2026-04-04  제1583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가룟 유다 : 그가 나가니 밤이러라 가룟 유다 : 그가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21~30 /이재훈 위임목사 열두 제자 중에서 마지막 제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명단 가장 마지막에 항상 나오는 제자,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 중 하나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30절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 성경의 ‘밤이러라’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짧은 문장에 유다라는 제자의 비극적인 인생을 압축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가 대조됩니다. “그가 조각을 받고 나갔더니 밤이다”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 표기가 아닙니다. 유다의 영적 상태와 운명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유다의 퇴장과 어둠의 시작을 연결함으로써 그의 악행이 어둠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더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유다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곁에서 3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을 선택했습니다. 정반대 인생도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로 그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으면서도 빛이 아닌 어둠을 사랑해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라는 이름 앞에 붙여진 ‘가룟’은 지역 이름입니다.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의 가룟은 ‘이스카리옷’, 히브리어로 ‘이쉬 그리옷’입니다. ‘그리옷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유다 지파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유대 지방입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는 모두 갈릴리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만 유대 지방 출신입니다. 이것조차도 그가 다른 제자들과 깊이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일 거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갈릴리의 제자들보다 훨씬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바라본 이유로 여기기도 합니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서 돈을 맡았던 회계였습니다. 이 직책은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을 때 아무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절에 쓸 것을 사라”고 하시는 줄로 알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겉모습은 완벽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였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에 선택한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유다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배웠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도도 했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 행함의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의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가 배신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유다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택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시작이 아니라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대답이 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은 삼십 냥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인데, 매우 부족한 대답입니다. 그것은 거대하게 쌓여 있는 마른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배신의 유일한 동기라고 복음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가 돈에 대한 탐욕이 많아서 배신한 거라면 스승을 그 작은 돈에 팔아넘기는 것보다 계속 돈궤를 맡고 있는 게, 그래서 도둑질하는 게 더 큰 수익 아닐까요? 또 그의 주된 관심이 돈을 모으는 일이라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분명 돈과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어느 정도 포기한 제자이기도 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면 그가 후회하며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은 양심도 팔아넘기기 때문에 후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 불을 붙인 계기는 되었지만, 그보다 깊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잘못된 메시아 사상 그리고 탐욕과 위선 적어도 다섯 가지 뿌리가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메시아 사상입니다. 정치적 왕국을 꿈꿨던 그의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의 메시아관은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룹에서 세 번째 나오는 다대오, 유다, 시몬의 공통점은 모두 ‘열심당원 같은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할 때마다 유다는 신났을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보이신 분이라면, 이런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면, 이렇게 거룩하고 순수한 분이라면 유대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서, 제2의 모세가 되어 로마로부터 유대 나라를 독립시켜 주기에 충분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가 몰려올수록 피하셨고, <마가복음>에서 여러 차례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다는 계속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로마를 비판하고, “저 가이사를 끌어내려야 된다. 유대가 독립돼야 된다”라고 선포만 하시면 유대 민족이 하나가 되어서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예수님은 관심 없는 것처럼 뒤로 물러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온 것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다의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유다에게 계속 실망으로 누적되고, 분노로 발전되었고, 결국 배신에 이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탐욕과 위선의 모습입니다. 3년 동안 그는 위장 생활을 했고, 점진적으로 그 위선이 깊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유명한 사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을 때 유다가 비판했습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은 것을 비판했습니다. 얼마나 의로워 보입니까? 그러나 위선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 그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합니다. ‘훔쳐갔다’는 것은 미완료 시제로,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탐욕은 하루아침에 사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작은 합리화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인 자기기만을 거쳐 그 사람 전체를 삼켜버립니다. 유다는 완벽하게 자신을 위장했습니다. 3년 동안 다른 제자들과 함께 먹고 기도하고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놀라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연이어 질문합니다. 놀랍게도 유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탐욕과 위선이 그를 사로잡은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었습니다. 과정 중에 점점 탐욕과 위선의 지배를 당했습니다. 자기 보호, 보존의 본능 사단의 전략적인 개입 셋째, 자기 보호, 보존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로 바뀐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유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제자들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며 지적하셨습니다.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책망을 받을 때마다 돌이켜서 점점 변화되어 갔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의 눈길과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반대로 갔습니다. 이것이 악한 자기 보호 본능입니다. 게다가 유다는 매우 상황 파악이 빨랐던 사람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사람, 돈 계산을 잘하는 사람, 상황 파악이 가장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당국이 예수님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가장 먼저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써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배신자는 살려줄 것이다’라는 자기 보호의 본능을 보입니다. 야비한 본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넷째, 사단의 전략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가룟 유다에 대한 사단의 개입을 두 단계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13장 2절에서 “마귀는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넣었다’는 단어를 씁니다. 27절을 보면, “유다가 빵을 받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라고 합니다. 생각을 넣는 것에서 들어가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유다의 탐욕과 위선이 사단에게 기회를 주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때 마귀가 그를 지배해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한순간에 우리를 통째로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들어오고, 그 생각이 우리의 의지를 사로잡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단을 내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용하면 결국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 다섯 번째,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이었습니다. 13장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끝까지’라는 표현을 ‘유다까지’라고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발도 씻기셨고, 식사하는 가운데 빵 조각 하나를 떼어 주셨습니다. 최고 중요한 손님에게 주는 행위였습니다. 빵 조각을 떼어 건네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사랑까지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 닫혀 있었고, 그 순간 마귀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마음을 닫는 만큼 사단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을 활짝 열지 않으면, 마귀가 활짝 들어온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만큼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유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유다의 최후의 모습을 기록하는데, 그가 ‘뉘우쳤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 삼십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며 뉘우쳤고, 자살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은 감정적 후회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 돌이킴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그냥 후회한 것입니다. 유다에게는 적어도 세 번의 회개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셨을 때이고, 또 하나는 겟세마네에서 유다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배반하느냐”라고 하셨을 때도 회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은 삼십을 돌려주며 가책을 느꼈을 때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기회 모두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심령이 몹시 괴로우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심령이 몹시 괴롭다고 하신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십자가를 내다보시며, 그리고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괴로우신 것은 배신감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 영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수많은 영혼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다”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27절). 배신을 촉구하신 게 아닙니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 예수님의 친구가 메시아를 배신할 것이 예언되었다면 누군가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하는 것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하나님 예정의 희생자가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다복음>이라는 위경에서는 유다를 미화합니다. 그가 원치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행했던 ‘비운의 운명’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성경을 왜곡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반과 죽음이 예언되어 있다고 해서 유다가 변명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예언을 이루고자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악한 마음 때문에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죄 짓는 것을 예정하지 않으십니다. 죄란 철저히 인간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자기 의지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유다가 먼저 갑니다.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 넘겨줄지를 먼저 제안합니다. 그가 제안을 받은 게 아니라 먼저 제안했고, 먼저 주도적으로 의논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원치 않은 악역을 맡은 게 아닙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 악인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내버려 두심으로 이용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번 경고하셨고,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지만, 그가 끝까지 거부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을 뿐이며, 포기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은혜를 거절한 것은 유다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악한 선택을 아셨고, 그의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악인으로 규정하며 이 사건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죄 역시 그에게만 해당되는 유일무이한 죄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우리도 유다 같은 배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유다의 배신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배신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단의 먹이와 표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제자마저 탐욕과 위선으로 회개하지 않음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탐욕과 위선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유다가 잘못된 신앙의 동기를 가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작은 타협의 위험도 경계해야 합니다. 유다의 배신도 작은 탐욕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뒤에 숨어 있는 내면을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후회가 아닌 회개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유다의 비극은 죄를 지은 것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돌아왔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을 넘겨준 행위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과 유다의 배신을 보면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줌으로써 배신한 것이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말로 배신한 것이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끝맺는 말 “그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다”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나가는 길이 빛의 길인가? 아니면 어둠의 길인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 완전한 어둠은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며 배신의 뿌리를 끊임없이 끊어내고,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4-04  제15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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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고난주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각 캠퍼스 본당 3월 30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고난주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기간이다. 이 기간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이하 40일 새벽기도회)에서는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난주간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성도들은십자가목걸이를걸고, 예배 전후 침묵으로 기도한다. 매일 한 끼 이상 금식기도하고, TV와 인터넷, 스마트폰, 영화, 게임 등 불필요한 미디어 사용을 자제한다. 온누리교회 로비에는 ‘회개의 십자가’가 설치된다. 자신의 죄와 기도제목을 적은 종이를 나무 십자가에 못 박고 회개하는의식을하면된다. 고난주간 40일 새벽기도회 주제는 ‘십자가의 길’ 이다. 3월 30일(월)부터 4월 3일(금)까지 오전 5시 30분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진행된다. 온누리교회 유튜 브 채널과 CGN으로도 참여할 수 있다. 3월 30일(월) ‘십자가의 길’ (막 15:16~25), 31일(화) ‘ 십자가의 용서’ (눅 23:33~38), 4월 1일(수) ‘ 십자가의 절규’(마 27:45~49), 2일(목) ‘십자가의 완성’(요 19:28~30), 3일(목) ‘ 십자가 밑에서의 고백’ (마 27:50~54)을 주제로 해외비전교회 담당목사들이 설교한다. 4월 3일(금)에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설교하고, 온누리교회 전체 교역자가 특순한다. 조은정 권사(고양은평공동체)는 “365일 중 40일의 새벽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 매해 참여하고 있다”며 “주시는 말씀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그 말씀을 더욱 붙들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CGN 개국 21주년 감사예배 임직원 및 관계자 223명 참석 글로벌 선교 미디어 CGN이 개국 21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지난 3월 27일(금) 오전 10시 서빙고온누리교회 경찬홀에서 드렸다. CGN 임직원과 온누리교회 리더십, 교계 인사 등 223명이 참석했다. CGN 개국 21주년 감사예배는 김용기 장로(실행위원장) 대표기도, CGN 임직원 특순, 이재훈 위임목사(CGN 이사장) 메시지, 전진국 대표(CGN) 감사 인사, 함태경 본부장(CGN) 장기근속자 감사패수여등의순으로진행됐다. 이재훈 위임목사는 ‘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사 43:18~21)을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 목사는 “<이사야> 43장 말씀처럼,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CGN의 21년 역사와 같다”면서 “앞으로도 CGN이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세우는 놀라운 사역에 쓰임받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전진국 대표는 “CGN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복음의 핵심을 시대에 맞는 언어와 방식으로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겠다”면서 “문화를 통한 복음 전파에 기도와 후원, 응원으로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했다<관련 기사 6면>. CGN 개국 21주년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다. 4월 5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CGN TV편성 기준), ‘ 소년이 어른이 되어’ , ‘ 땅끝의 증인들’ 이 방송된다. 기독 OTT 플랫폼 ‘ 퐁당’ 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 박지혜 기자 K-CCM 글로벌 오디션 ‘힐링보이스’ 4월 30일까지 참가자 모집 CGN 기획 K-CCM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 참가자를 4월 30일(목)까지 모집한다. 이미 데뷔한 프로 가수와 찬양사역자도 참가할 수 있다. 참가를 원하는 지원자는 지원서와 가창 영상(자유곡 1곡, 지정곡 1곡), 사진 파일을 이메일(cgnhealingvoice@daum.net)로 제출하면 된다. 가창 영상은 스마트폰 기본 카메라로 촬영해야 한다. 지원서 양식과 지정곡 리스트 등 자세한 사항은 ‘힐링보이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가자 모집이 끝나는 5월에는 심사를 통해 예선 진출자를 선발하고, 7월부터 예선과 본선, 결선을 통해 최종 우승자를 선정한다. 최종 우승자 1인에게는 상금 3천만 원을 수여하고, 결선에 진출한 TOP 7인에게는 CGN 프로그램 출연, CCM 음원 발매, CGN 월드투어 콘서트 참여 등의 특전이 주어진다. 문의: 02-3275-9333 / 박지혜 기자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7주차 2026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보시기에 좋았더라: 자기 부인의 제자도’ 가 마지막 7주 차(3/30~4/5, 고난주간)에 돌입한다. 성인공동체와 대학청년부 7주 차 주제는 ‘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다. 지난 40일 동안 가장 도전이 되었던 실천 사항 한 가지를 정하고, 일상에서 지속하며 간증을 나 눈다. 캠페인 기간에 묵상한 내용과 실천 사항, 실천 사진, 소감문을 문자메시지(010-5395-2319) 또는 이메일(onnuri.lent@gmail.com)로 제출하면 우수작을 선정해서 소정의 선물을 보내준다. 소감문을 제출할 때는 ‘ 이름, 소속 공동체, 연락처’ 를 반드시 기입해야 한다. 차세대는 ‘ 겸손, 순종’ 을 주제로 실천사항을 이어간다. 30일(월) 부모님이 부탁하신 일을 즉시 실천하기, 31일(화)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 간식비 일부를 저금하기, 4월 1일(수) 학교나 교회에서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하기, 2일(목)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하기, 3~4일(금~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미디어 금식 동참하기를 실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4월 5~18일‘온누리 모자이크 주간 온누리M미션이 오는 4월 5일(일)부터 18일(토)까지 국내 온누리교회 전 캠퍼스에서 ‘2026 온누리 모자이크 주간’ 을 진행한다. 모자이크 주간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외국인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는 ‘모자이크 교회’ 의 정체성을 나누기 위해 마련됐다. 이 기간 동안 온누리M미션 소속 외국인 성도들이 각 캠퍼스를 방문해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며, 이를 통해 성도 간 교제와 연합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문의: 031-491-9650 / 홍하영 기자

     2026-03-28  제1582호

  • 칼럼

    [신앙에세이] 세상을 바라보는 ‘제3의 눈 신앙에세이 세상을 바라보는 ‘제3의 눈’ 우리에게는 세상을 보는 세 가지 눈이 있다고 생각한다. 제1의 눈은 자연적인 눈이다. 웅대한 자연을 감상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참으로 황홀하다고 느끼는 눈이다. 이 눈을 가진 사람은 시인이 되거나 예술가가 되어 자신의 감수성을 더욱 발전시킨다. 제2의 눈은 지성적인 눈이다. 웅대한 자연을 보고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그 원리를 파악해서 학문적으로 발전시키는 시각이다. 이들은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보고 이동 경로를 연구하며 조류학을 발전시키고, 아름다운 꽃을 보며 식물학을 정립한다. 마지막으로 제3의 눈이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지성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인 시각이다. 예수님이 이 눈을 가지셨는데, 우리 주변의 사물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26, 28). 예수님의 시각은 하나님의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해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 묵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사물을 보고 하나님과 연관시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태도이다. 이 관점을 갖게 되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발견하고,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위대한 성인들은 모두 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만물 가운데 내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이 관점을 회복한다면 자연 만물을 결코 무생물이나 소비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존재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고, 돌이 그냥 돌이 아니게 된다. 그것들은 나의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며,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거룩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가 새들과 대화하고 설교했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전에 신학교 시절, 교수님이 들려주신 간증이 떠오른다. 캐나다 유학 시절, 황혼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V자 형태로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고는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서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셨다고 한다. “너희도 나와 같은 창조물이지?” 그러자 기러기들이 갑자기 방향을 선회해서 교수님을 향해 날아와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날아갔다고 한다. 그때의 놀라움과 감격, 희열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새들도 교수님의 감탄을 알아듣고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우리가 제3의 눈을 회복해서 사물 안에 내재해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기도가 나의 호흡이 되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점점 일치하게 된다. 사물은 더이상 나와 상관없는 타자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연결되는 영혼의 친구들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시각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 신음하고 있는 지구 생태계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될 것이다. / 허원희 목사(과천의왕공동체)

     2026-03-28  제1582호

  • 칼럼

    [크리스천 학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 크리스천 학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 “하나님,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학부모님과 선생님들을 위한 글을 써야 할까요?” 이렇게 기도하고 일주일쯤 지난 토요일 큐티에서 <마태복음> 21장 2~3절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실 때 어미 나귀도 같이 있었나?’ 성경을 읽다 보면 유독 낯설게 다가오는 구절이 있는데, 그날 말씀이 그랬습니다. 성경 앱으로 찾아보니 이 장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묘사되어 있지만, 어미 나귀가 함께 있다고 기록한 건 <마태복음>뿐이었습니다. 관련 이미지를 찾아보니 30여 장 가운데 단 한 장에만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가 함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새끼 나귀만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미 나귀는 어디에 있었을까?’ 본문을 더 읽어 보았지만, 어미 나귀에 대한 기록이 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의 유난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나귀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나귀는 말보다 지구력과 자생력이 뛰어나고 비교적 영리하지만, 한 번 가본 길만 가려는 습성이 있어서 낯선 길을 가려면 매우 고집을 부린다고 합니다. 또한 수명이 길어서 오랜 시간 주인과 함께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제야 예수님이 새끼 나귀만이 아니라 어미 나귀도 함께 끌고 오라고 하신 이유가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주변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온 성이 소동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스럽고 낯선 길을 새끼 나귀 혼자였다면 온순히 갈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미 나귀가 앞서갔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현장에서 오랜 시간 아이들을 만나며 교사로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부모와 교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너는 안전해. 내가 널 지켜줄 거야’라는 안정감입니다. 무엇을 더 많이 해주는 것보다 안정감이 우선입니다. 부모님의 이혼 과정에서 불안을 겪은 어떤 아이는 목소리도 크고 들뜬 채 뛰어다니지만, 눈빛이 심하게 흔들립니다. 예민하고 불안한 아이들은 얼굴 근육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틱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은 빽빽한 학원 일정 때문에 공부는 잘하지만, 밝게 웃질 못합니다. 바쁜 부모님이 쥐여주신 용돈으로 친구들에게 간식이나 학용품을 사주며 관계를 맺으려는 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귄 친구들은 곧 떠나갑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부모를 기다리는 한 시간조차 두렵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정서적 부재와 불안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러면 아이는 눈치를 보며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생존을 위해 ‘부모’의 기대에 들기 위해 노력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생활이나 공부에 집중할 에너지를 잃어버립니다. 돌이켜보면 저 역시 그랬습니다. 부모로서 더 많이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아이를 혼자 두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편안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때 내 아이는 자연스레 안정감을 느낄 것입니다. 가족이 ‘하하호호’ 웃는 가정에서 자란 안정감 있는 아이가 건강한 학교생활을 합니다. 이건 수년간 봐온 일입니다. 그저 새끼 나귀가 따라오도록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어미 나귀처럼, 아이 곁을 지켜주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이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나 줄 수 있는 우리의 모습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 최민혜 교사(부천온누리교회, 석천초등학교, <야누시 코르차크 아이들을 편한 길이 아닌 아름다운 길로 이끌기를> 저자)

     2026-03-28  제1582호

  • 사역

    [CGN 개국 21주년 기념] “디지털 복음의 등대 CGN, 선교의 내일을 더합니다” CGN 대표 전진국 장로와 함께 “디지털 복음의 등대 CGN, 선교의 내일을 더합니다” 세대를 연결하고 세계를 잇는 글로벌 선교 미디어의 꿈 글로벌 선교 미디어 CGN이 어느덧 스물한 살, 청년이 됐다. 2005년, ‘오직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순수 복음 방송’을 기치로 내건 CGN이 첫 전파를 쏘아 올린 지 벌써 21년이 지났다. 그동안 CGN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해 위성방송, IPTV, 국내 최초 기독 OTT 플랫폼 ‘퐁당’을 선보이기까지 한순간도 쉼 없이 달렸다. 끊임없이 변화했다. 태동부터 성장기와 성숙기를 거치면서도 CGN은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의 통로’라는 정체성을 단 한 번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비상을 꿈꾼다. ‘세대를 연결하고 세계를 잇는 글로벌 선교 미디어’라는 새로운 꿈을 꾸는 CGN 대표 전진국 장로를 만났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지난해 CGN이 개국 20주년을 기념하며 ‘선교의 내일을 더하다’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었다. 새로운 슬로건 선포 이후 거침없이 달렸고, 성장했으며, 달라졌다. 그 여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CGN은 또 해내고야 말았다. 지금도 새로운 슬로건 달성을 위하여 내달리고 있다. CGN 대표 전진국 장로는 그 여정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털어놨다. “CGN이 보낸 지난 20년은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와 故 하용조 목사님의 ‘선교에 목숨을 건’ 각오, Acts29 비전을 품고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선교 열정 덕분에 탄생했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CGN의 모든 걸음은 하나님의 큰 은혜 덕분이라고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CGN이 또 한 번 옷을 갈아입습니다. 개국 21주년을 보내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지난 20년이 복음 방송의 기반을 다지고, 양질의 기독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20년은 세대를 연결하고, 세계를 잇는 글로벌 선교 미디어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CGN이 보여준 도전사(史) 그 대표적 사례 영화 ‘무명((無名)’ CGN다운 포부고, 변화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CGN은 한 번도 안주하거나 멈춰선 적이 없었다. CGN이 보여준 도전사(史)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CGN 개국 20주년을 기념하며 세상에 내놓은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이다. CGN의 도전과 변화 그리고 영향력을 강력하게 보여줬다. CGN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건너와 복음을 전했던 일본인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와 ‘오다 나라지’의 삶을 그렸다. “일제강점기, 그것도 가해국에서 온 선교사가 피해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쉽게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 어두운 시대,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던 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한 선교사가 존재했고, 복음은 계속 퍼져나갔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선교에 대한 도전과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이 개봉한 지난해는 광복 80주년이자 한일수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CGN은 복음을 매개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역할을 감당하기를 소망했고, 끝내 이뤄냈습니다. 바로 그것이 CGN의 역할이고 영향력입니다.” 실제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이 가져온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국내 교계를 넘어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상영 요청이 쇄도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요코하마에서 일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했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지금도 CGN 일본 지사를 중심으로 찾아가는 상영회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반향이 일었습니다. 캘리포니아, 뉴욕, 뉴저지 지역에서 상영 요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 약 200회 정도 찾아가는 상영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CGN이 만든 영화가 이토록 눈부시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아픔을 이해하고, 복음으로 하나 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선교의 도전을 주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CGN의 노력과 결실을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미국에서 열린 제53회 ICVM((international Christian Visual Media) 크라운 어워즈에서 CGN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이 금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이 ICVM 크라운 어워즈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인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와 함께 CGN 미주지사가 제작한 ‘더 파이널 프로젝트(The Final Project)’는 제작비 5만 달러 이하의 베스트 다큐멘터리(Best Documentary Under $50,000)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했습니다. CGN의 두 작품이 함께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 수상은 해외 무대에서도 CGN의 콘텐츠 역량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매우 큽니다.” 미국 내슈빌에서 열린 시상식은 NRB 컨퍼런스 및 박람회와 함께 진행됐다. CGN은 그 현장에서 부스를 운영하며 사역을 소개했다. 다양한 국가 관계자들과 교류하며 협력 가능성을 넓혔다. 한국 교계에서는 유일하게 참가해서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 계기를 마련했다. “CGN은 2017년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을 시작으로 2025년 영화 ‘무명(無名)’에 이르기까지 선교와 복음을 담은 콘텐츠를 끊임없이 제작해 왔습니다. 앞으로는 다큐멘터리를 넘어 극영화까지 영역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비기독교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그 안에 자연스럽게 복음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고자 합니다.” “K-CCM 열풍도 불게 하겠다” 글로벌 CCM 오디션 ‘힐링보이스’ CGN은 ‘K-CCM 열풍도 불게 하겠다’는 새로운 도전에도 나섰다. 글로벌 CCM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를 선보인다. “잘 알다시피 최근 K-콘텐츠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흐름입니다. CGN은 K-CCM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필요성을 느끼고,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찬양으로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위로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글로벌 CCM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참여 그리고 고백. “글로벌 CCM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에는 전문 CCM 사역자뿐 아니라 찬양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바랍니다. 찬양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기대합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참여해주십시오.” 글로벌 CCM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는 CGN의 ‘글로벌 확장성’과 ‘지속성’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 CCM은 국내 중심으로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K-콘텐츠가 세계로 확장된 것처럼, K-CCM 역시 글로벌 무대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CCM 오디션 프로그램 ‘힐링보이스’는 CGN의 6개 해외 지사를 기반으로 미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K-CCM 역사상 가장 글로벌한 오디션이 될 것입니다. 단순한 이벤트성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TOP7에 선발된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후속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월드투어와 음반 제작 등을 통해 찬양사역이 계속 이어지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힐링’, ‘위로’, ‘공감’, ‘용기’ 같은 하나님의 언어에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궁극적으로 복음과 교회에 다가서는 진입장벽을 낮추고,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CGN의 사명에 끝까지 동참해 주십시오” 개국 21주년을 보내는 CGN의 비전은 명확하다. ‘Christian Global Network(크리스천 글로벌 네트워크)’라는 그 이름처럼, 세대를 연결하고, 세계를 잇는 글로벌 선교 미디어가 바로 그것이다. “CGN은 글로벌 선교 미디어로서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부 역량을 고도화하고, AI 기술을 활용한 선교콘텐츠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국내 유일의 기독 OTT 플랫폼 ‘퐁당’이 이용자 25만 명을 돌파하며 자리를 잡은 만큼 다국어 자막서비스를 더욱 확대해서 전 세계 어디서든 예수님을 만나는 환경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변하지 않는 복음을 시대에 맞는 언어와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 CGN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CGN은 ‘디지털 복음의 등대’라고 정의합니다.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끊임없이 복음을 밝히는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CGN의 모든 사역은 온누리교회 성도님과 동역자님들, 후원자님들의 기도와 후원이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끝까지 CGN의 비전에 동참해 주십시오.” 문의: 02-796-2243

     2026-03-28  제1582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다대오 유다: 세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 다대오 유다: 세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 <마가복음> 3:16~19, <요한복음> 14:21~24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11번째 제자는 갈릴리 출신의 ‘유다’ 혹은 ‘다대오’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 제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절의 일부 사본에서는 ‘레배오’라는 이름으로도 나옵니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같은 이름이 많았고, 두세 개 이름을 가진 것이 흔했기 때문에 이것은 혼란이나 불일치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입니다. ‘다대오’는 그리스어 이름입니다. ‘테오도토스’라는 이름의 단축형으로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다’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부모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또 ‘가룟 유다’처럼 그 앞에 지역 이름을 넣어서 구분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의미가 같은 다른 언어, 그리스어나 아람어 등 다른 언어의 의미가 같은 단어를 차용하거나 발음이 비슷한 다른 단어를 선택해서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대오’와 ‘유다’라는 이름을 당대인들은 마치 히브리어 사울과 그리스어 바울처럼, 같은 운율을 가졌기에 비슷한 발음으로 여기고 차용했습니다. ‘다대오’와 ‘유다’가 같은 발음권에 있기 때문에 ‘유다’라는 사람이 ‘다대오’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것으로 봅니다. ‘유다’라는 본명을 가진 제자가 그리스식 별명인 ‘다대오’, ‘테오도토스’의 약칭으로 불린 것입니다. ‘테오도토스’라는 이름, 당시 그리스 이름들, 유대인들 가운데 ‘데오’가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들어간 이름들을 유대인들도 많이 사용했는데, 거기서 ‘다대오’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다대오’의 그리스 발음으로 ‘타다이오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다대오’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발음으로는 ‘테오도토스’의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저는 ‘다대오 유다’라고 함께 불렀습니다. 유다가 던진 질문의 초점, 우리가 아니라 세상 다대오 유다가 제자들의 명단 외에 나오는 기록은 <요한복음> 14장 22절이 유일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질문을 단 한 번 던진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다른 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요 14:22절).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떠나시는 듯한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제자들 가운데 불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그 분위기에서 베드로가 가장 먼저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이 답변을 해주셨고, 그 답변에 또 다른 제자 도마가 질문했고,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 답변을 또다시 빌립이 질문했고, 그 대답에 대해서 또다시 질문으로 던져진 것이 다대오 유다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의미를 알려면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도마, 빌립, 유다로 이어지는 네 명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 중반부터 14장 전체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주여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고, 빌립은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은 “주여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였습니다. 네 번째 질문한 다대오 유다의 질문과 앞서 질문한 세 명, 베드로, 도마, 빌립의 질문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앞서 질문한 세 명은 초점이 우리, 곧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불안으로 “우리들도 그곳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했습니다. 도마는 “주께서 가시는 길을 우리가,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합니다. 알려 달라”고 질문했습니다. 빌립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질문했습니다. 초점이 공통적으로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제자들의 염려, 알고자 하는 마음, 제자들에게 나타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초점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22절). 여기에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의 초점이 있습니다. 다대오 유다는 1세기 팔레스타인을 로마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세상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상태였는데, 예수님이 빌립에게 주신 답변의 마지막 부분에 반응하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 또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21절).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라는 말씀에 반응한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하셨는데 그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이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십니까? 세상 한복판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내시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 제국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주저하고 계십니까?” 다대오 유다의 질문, 두 가지 의미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신학적인 의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왜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분의 왕 되심을 선포하지 않으시는가? 둘째, 실존적인 좌절입니다. 예수님은 곧 떠나신다고 하는데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고 로마는 여전히 유대를 짓밟고 있는데, 우리에게만 나타나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겠는가? 다대오 유다가 던진 질문은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불의함을 보는 눈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과 방식이 자신의 기대와 너무 달랐기에 이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질문이 아니라 평소에 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요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도 예수님이 나타나야 하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는 온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예수님이 나타나실 거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메시아로 오셨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시다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세상에도 그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셔서 통치하셔야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대한 소망,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쁜 의미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올바로 바뀌어야 된다는 건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과의 시각 차이입니다. 그는 당장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서든 아니면 교훈을 통해서든 로마 시저의 통치를 끝내주시고, 유대의 불의한 관료들을 무너뜨리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생각은 당시 열심당원들의 생각 흐름과 같은 맥락입니다. 라틴어 성경 사본에서 다대오 유다를 ‘열심당원 유다’라고 표현 한 것을 보면 그가 그들의 시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만큼은 아닐지 모릅니다. 칼을 들고 사람들을 암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맥락에서 메시아로 오신 분은 반드시 이 세상을 공개적으로 변화시켜 주셔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었던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 출애굽 역사를 읽으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애굽의 바로를 무너뜨리고 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처럼, <신명기> 말씀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2의 모세가 오실 것이고, 그가 오신다면 로마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메시아 사상이요, 소망이었습니다. 다대오 유다에게도 그 소망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오해와 예수님의 답변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아버지와 내가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3~24절). 예수님의 대답은 21절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21절을 더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함께 내주하시게 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다대오 유다는 “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왜 세상을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으신 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주실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풀어 쓰면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에 무관심하신 게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한번 풀어 써 보았습니다. “다대오 유다야, 나는 네가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기대하는 그런 왕으로 통치하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내 나라는 로마의 시저를 끌어내리고 유대를 독립시켜 세우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다. 나는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왕관을 쓰기 전에 십자가를 져야 하며 내일이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이며, 나도 너희에게 다시 올 것이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고 있지만 나를 어떻게 할 권한이 없다. 그들의 권한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버지께서 명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대오 유다의 세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알아주면서 그가 가진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나라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 통치 세력의 메시아로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주하심, 내적인 거주와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유다의 오해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변혁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메시아의 공개적인 나타남, 현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세상의 변혁은 내부로부터, 사랑과 순종으로 형성된 사람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처를 삼으심, 내주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실한 임재가 된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 속에 나타난 선교적 관심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다른 세 명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초점이 있었다면, 다대오 유다는 세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매우 올바른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온 세상을 비추셔야 하는데 왜 제자들에게만 비추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 은혜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준 한계입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택함 받은 제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을 통해 그 빛이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먼저 택하신 유대인들이 바라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라,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세상 속에 빛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결국 다대오 유다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에데사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함으로써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가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다대오 유다의 질문을 기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그 답의 일부로 만드신 것입니다. 잘못된 세상을 보면서 성도들에게도 다대오 유다와 같이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은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대오 유다에게 주신 답변을 기초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내 방식은 다르다. 나는 너희 안에 거처를 삼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너희가 나의 말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나는 너희를 통해 세상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종교 문화 사회학자인 제임스 헌터가 쓴 <To Change the World>, 한글로는 <기독교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세 가지 패러다임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방어적 대응’입니다. 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 반응을 취했습니다. 세상을 우리가 되찾아야 된다는 흐름 속에서 열심당원이 나온 것입니다. 메시아가 지금 당장 로마를 몰아내야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둘째, ‘문화적 관련성 추구’입니다. 메시아는 억눌린 자의 편에 계신다는 입장으로 ‘필요에 응답해야 된다’는 자유주의 여러 신학 사상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셋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분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순수성을 지켜야 된다는 분리주의 입장입니다. 이 세 가지 패러다임 모두 결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 패러다임 모두에게 깔려 있는 원한과 분개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제임스 헌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 속에 그리스도 제자들의 신실한 임재, 이 세상 안에 신실하게 임재하는 것이 바로 유일한 대안이다.”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제자들이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제자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처를 삼으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세상에 들어가 신실하게 존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 나라의 많은 문제를 소수 사람들의 책임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 신실하게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서 신실한 임재가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가 세상 속에 신실한 주의 임재 통로로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3-28  제1582호

  • 칼럼

    [이슈(Issue) 바로보기!] 이슈(Issue) 바로보기! 성경적인 조직과 조직문화 2 (Biblical Structure and Its Culture)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조직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조직은 당연히 인간관계로부터 시작한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 세상에서의 혈연, 지연, 학연 등의 모든 관계를 배제한 채,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인 ‘절대 개인’으로 바로 서야 한다.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자신을 놓고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인권, 신체의 자유, 소유권의 자유 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정립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개인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직을 위하여 희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라는 개인 존중 인권 사상과 함께, “하지만 개인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지켜주고 기회를 주는 조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애국심과 직업윤리를 확립해야 한다. 이 둘에 대한 순서가 중요하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사이의 균형과 긴장에 의해 국가 또는 조직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절대 개인’이라는 개념은 중세 왕정과 농업경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끌어냄으로써 빈곤의 시대에서 풍요의 시대를 연 위대한 철학이다. 고착화한 기득권을 극복하고 생산적인 새로운 기회를 만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절대 개인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진정한 회개)이 선행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된 이후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 영역과 타인의 자유의지 영역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알고 이를 지킬 때 관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관점에서는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문제가 생기면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하는 공동체의 몸이 느껴지고,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 같은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엡 1:23). 이 공동체 의식은 조직의 신뢰도를 향상시킨다. 따라서 조직에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성경적인 결론에 도달한다(마 22:37~40). 조직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다. 이는 실제 업무인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인의 믿음이다(롬 1:17).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위해서 조직을 만들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있는 기초, 즉 믿음이 필요하다. 월급을 주는 기업 조직과 세금 또는 회비를 내는 조직은 서로 다르다. 기업은 최고 책임자가 종업원을 채용하는 조직인 반면, 국가는 선거와 세금을 통해서 최고 책임자를 선출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조직의 목적을 위해 동일하게 위계질서가 필요하고, 효율적인 위계질서를 위해 믿음에 근거한 (의인들의) 구심력과 원심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 역사를 위해 의인의 믿음을 사용하신다. 조직이 업무를 잘 수행하고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최고 책임자의 최종 의사결정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 미디어 기업인 포브스의 연구에 따르면, 최고 책임자의 최종 의사결정이 미치는 영향이 조직 전체의 30% 를 차지한다고 한다. 전체 조직을 위한 최고의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의사결정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최고 책임자에게 전달이 되어야 한다. 이 구심력이 업무 수행 및 성과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구심점을 잃어버린 조직은 마음과 힘이 흩어지게 된다. 하나님이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흩어짐의 두려움을 느낀 바벨탑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창 11:4). 또 조직원들은 성과가 있을 때 최고 책임자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고, 문제가 있을 때 최대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권위는 권위자의 개인 인격에 의해 순기능(배려)이 역기능(폭력)으로 순식간에 변화될 수 있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조직 전체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조직이 커지면서 최고 책임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원심력인 위임이 매우 중요하다. 위임은 큰 조직이 벤처 조직같이 빠른 의사결정을 해서 변화가 큰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한다. 한 사람의 위대한 리더만의 힘이 아니라 모든 조직원 업무의 총합으로 조직의 성과와 열매가 나타나기 때문에(시장에서 분업의 원리) 최고 책임자부터 시작해서 모든 조직원에 대한 권한 위임과 책임이 실현된다면, 공유 리더십을 통해서 최고의 실적으로 연결될 것이다. / 박성진 총장(OCC공동체, 포스텍교수, 한동대학교 총장)

     2026-03-27  제15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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