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주일강단] 자유를 섬기는 교회
자유를 섬기는 교회
<누가복음> 4:16~30
/ 이재훈 위임목사
‘ 자유’ 라는 단어는 성경이 들어오고,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이 들어오면서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자유’ 라는 단어는 복음의 전파와 역사를 같이 합니다. 자유는 얻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습니다. 역사를 보면 자유는 총칼에 빼앗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얻은 국민 스스로 자유를 내어준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1900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이 독일의 국민이 투표와 환호로 얻은 자유를 나치 독재자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목격한 후,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씁니다. 근대 신분 제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를 얻은 국민이 해방감과 함께 고독과 불안을 느끼기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불안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찾아옵니다. 묶여 있을 때는, 통제받을 때는 몰랐던 자유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내면의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유를 짐으로 여기고, 벗으려고 다시 도피한다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이 관찰한 도피의 길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복종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짐을 강한 지도자에게 넘겨버리고, 그 힘에 기대어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 파괴입니다.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된 대상을 미워하고, 부수고, 파괴하는 데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셋째, 동조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다수가 생각하는 대로 따르며 군중 속에 숨는 것입니다. 1930년대 독일 국민은 이 세 가지 길을 걸었습니다. 독재자에게 열광하고, 어느 한 민족을 증오하며, 다수의 의견이라고 밀어붙이는 사회는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빼앗기기 전에 먼저 버림받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유와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를 가진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유를 버리고, 그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했습니다. 스스로 자유를 선포한 첫날 인간은 숨었고, 두려워했고, 불안해했습니다. 뿌리 뽑힌 나무처럼, 자유의 무게를 스스로 지탱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기댈 곳을 찾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 우상’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인간이 우상에게 도피하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과 같은 시대에 같은 어둠을 바라보며 다른 자리에서 길을 찾은 사람이 있습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입니다. 에릭 프롬이 자유를 내어주며 도망치는 인간의 마음을 지적했다면, 에밀 브루너는 자유를 삼키는 국가를 지적합니다. 국가를 구원자로 믿는 순간 우상이 되고, 국민은 그 우상의 종이 됩니다. 국가는 타락한 이 세상에서 불의를 억제하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보호할 책임을 하나님께 받은 기관입니다. 국가는 구원자가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국가가 지켜야 할 것은 정의입니다. 그 정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해야 하고, 다수의 합의나 시대 유행이 아닙니다.
또 다른 방향에서 자유는 정의가 지켜야 할 으뜸가는 몫입니다. 자유는 국가가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이미 각 사람에게 주신 몫입니다. 각 사람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만드는 질서는 아무리 정의의 이름을 붙여도 정의가 아닙니다. 국민은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국가에게 자유를 내어주고, 국가는 자유의 책임을 공의로 지켜주지 못하고 도리어 가져가면서 자신을 구원자처럼 여길 때 전체주의가 피어납니다. 이것이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입니다. 자유로운 나라의 참 성벽은 군대나 헌법 전에, 국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국민입니다. 자유를 지키는 것은 정의이고, 정의를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정의만으로는 국가가 움직일 수 없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결국,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랑은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정의를 이루고, 참된 자유를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와 무거운 세금에 눌려 백성들이 정치적 자유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으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습니까?(18~19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몰아내는 자유를 가져다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낭독에는 그 회당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두 가지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이사야> 58장 6절을 추가하셨습니다. 종살이에서 풀려난 백성들이 정작 자신들 곁에 눌려 있는 자를 풀어주지 않는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8장과 61장을 연결하시며 “해방 받은 백성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제 내가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를 얻고도 자유를 나누지 못한 실패의 역사를 이제 자유케 하시는 분이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이사야> 61장에 본래 있으나 예수님이 읽지 않으신 말씀입니다. 61장 2절에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후반부를 읽지 않으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보복의 날, 곧 심판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복의 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속해 있기에 읽지 않으셨고, 예수님이 지금 여신 시대는 원수 갚는 날이 아니라 은혜의 해라는 선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
정의와 사랑을 이룰 수 있고, 자유를 우리에게 진정 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얻는 방법을 가르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한 인격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은 정의를 요구하지만, 그 정의를 이룰 힘이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정의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참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
<누가복음> 24장 47절의 ‘ 죄 용서’ 는 자유와 같은 단어입니다. 자유는 죄 사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들이 왜 자유로부터 도피합니까?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죄 사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참된 자유와 연결됩니다. 복음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축복이 되고, 하나님을 떠날 때 저주가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다시 예배하게 될 때 우상이 필요 없게 됩니다. 우상이 필요 없는 사람들만이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 5:1).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만족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십시오”(갈 5:13).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말씀이 자유를 얻게 된 이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서로의 자유를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자유케 하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이 십자가로 값 주고 사신 이웃의 자유를 함께 섬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미워할 권리를 포기하고 용서하는 자유, 자기의 몫을 내어놓고 섬기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한 사회의 자유를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참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자녀들, 십자가로 진정 자유케 된 이들, 죄 사함을 받은 이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를 섬기는 교회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국가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전체주의는 교회를 길들이려 했고, 예배하는 교회를 두려워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를 섬기는 교회란 자유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어떤 권력과 이념도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는 세상을 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예배받으실 분이요, 국가, 이념, 권력, 다수의 여론, 돈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자유를 섬기는 교회는 자유의 무게를 감당할 사람을 키웁니다. 복종의 길에 들어서지 않을 사람, 어떤 지도자도 우상으로 삼지 않을 사람을 키웁니다. 다수에 숨지 않고 진리를 따를 사람을 키웁니다. 자유를 섬기는 교회는 억눌린 이웃을 자유케 하는 일을 섬깁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억눌린 이웃, 이주민들, 탈북민들, 독거인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고통받는 이들, 그들을 돌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는 빼앗기기 전에 먼저 버림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깨어 예배하며, 자유를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