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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크리스천의 일과 소득에 대한 고찰 전문가 기고 소명의식 갖고 일할 때 영광이 드러난다 ‘워라밸’이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에서 매년 새해 출간하는 <트렌드 코리아>에서 언급된 용어인데, 이제는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가 된 것 같다. 의미인즉 워크(Work; 일)와 라이프(Life; 삶)의 밸런스(Balance; 균형)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 52시간 근무제 역시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가급적 잔업은 지양하고, 얼른 퇴근해서 가족들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야간근무는 물론이고, 주말도 없이 열심히 일해서 최대한 많은 소득을 벌고 이를 통해 내 집 마련과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조금 덜 벌더라도 내 삶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크리스천들은 일과 소득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거창고 직업선택의 10계명’ 대학교 재학시절 ‘거창고 직업선택의 십계명’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이 십계명을 읽고 나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만약 내가 중학생일 때 이 글을 읽었다면 거창고(경남 거창 소재)를 지원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거창고 직업선택의 십계명은 故전성은 장로가 교장으로 있을 때 학생들을 위해 쓴 글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때 왜 월급을 적게 주는 곳으로 가라고 하는지, 왜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월급도 많이 주고 장래성도 좋은 대기업이 아니라, 대기업 월급의 절반 수준인 중소기업을 찾아가라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계속 쫓아다니기보다는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서 직업을 선택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직장인들은 일할 수 있는 노동연령 동안 평균 3.5회 직장을 옮기고, 평균 근속기간이 중소기업인의 경우에는 4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통계 자료는 어쩌면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직업선택의 기준을 ‘높은 연봉’을 가장 우선시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면 소득은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보너스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경, 일과 소득에 대한 과욕 경고 공자는 <논어>에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며 어떠한 것을 즐기는 자를 당해낼 수 없음을 논했다. 얼마 전 성경말씀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본 적이 있다.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 3:22). 어느 직장,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지 보다는 그 사람이 그 일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정말 즐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와 금융교육을 진행할 때면 참 많이 떨었던 기억이 난다. 강사로 처음 활동하던 시절에는 얼마나 심장이 빨리 뛰고 목소리가 떨리던지, 준비한 스크립트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고 횡설수설했던 기억이 난다. 반면 사명감을 가지고 청중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재밌게 즐기면서 강의하면 어느 순간 강의가 끝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히 생계유지 수단으로만 나의 일과 직장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루 즐긴다는 마음으로 일을 대했으면 한다. 전도서 4장 6절은 우리에게 일과 소득에 대한 과욕을 경고한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그렇다. 두 손 가득가득, 더 많이 추구하느라 근심걱정에 둘러싸이는 것보다는 하나는 포기하고 한 손에만 가득한 상태로 평안함이 더 낫다는 의미다. 실제로 일을 즐기기보다는 돈 버는 것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있다. 주일 매출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사업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일중독에 빠져서 밤늦게까지 심지어는 주말까지 일하느라 가족과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담소 나누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조언한다. 차라리 더 많은 수입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할 것을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VS 부르심에 의한 사명이자 소명 예전에 어느 칼럼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텐트메이크’ 사역을 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천막을 만들고 팔았을까? 예수님은 목수로서 목제품을 만들 때 어떠한 태도로 만들었을까? 충분히 추측할 수 있듯이 텐트를 만들었던 바울도, 목제품을 만들었던 예수님도, 양을 치던 다윗도 모두 본인들의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바울이 텐트를 대충 만들어 팔면서 사역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텐트를 샀던 군인들과 시민들이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직업을 나타내는 또 다른 영어 단어인 ‘vocation’(천직)의 원어 뜻은 ‘소명’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 job(일, 직장)이라면 vocation(천직)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사명이며 소명(calling)인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존 칼뱅은 금욕주의자였던 성직자들이 세속적인 직업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는 것에 대해서 반대 주장을 펼치면서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해서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대할 때, 소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부르신 곳에서 나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 이주호 팀장(결혼예비학교 재정 강사) “소명의식을 가지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대할 때, 소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부르신 곳에서 나의 일을 통해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2020-05-16  제1295호

  • 국내캠퍼스

    이기심 버려야 빛과 소금 될 수 있다! 거듭나는 크리스천을 위하여 이타적 사랑, 교회와 크리스천의 정체성과 사명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가 보여준 바로 그 사랑 <서빙고 교역자들이 공감소비운동 일환으로 장신대 학생들에게 비상식량 및 위생용품을 포장해 선물했다> 크리스천은 거듭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을 경험하는 크리스천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본지에서는 ‘거듭나는 크리스천을 위하여’를 주제로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감정과 습성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한다. 그 두 번째 주제는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크리스천’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지역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계층 이기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이기심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크리스천도 예외가 아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을 ‘이기적인 사람들의 대명사’라고 비난한다. 크리스천이 그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크리스천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이기적인 행동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주인에게 인도하지는 못할지언정 실족하게 만드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할까? 이기심을 버려야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날 수 있다. 코로나19가 확산 되고 있던 지난 3월, 제주특별자치도에 해외여행 이력이 있고 코로나19 증상까지 있는데도 자가격리 수칙을 무시하고 여행을 간 모녀가 있었다.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분노했다. 해당 지자체에서는 그들 모녀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어디 이뿐인가. 의료진들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에 일부 이기적인 시민들의 행태가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클럽 등 유흥시설을 간 젊은이들,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하다며 거주지를 이탈한 자가격리자, 유증상자이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지원받은 한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자가격리 중에 편의점에 간 외국인까지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 공동체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태가 아닐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기주의의 중심에 크리스천이 있다는 점이다. 그 따가운 비난에서 크리스천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도 불구하고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현장예배를 강행하는 일부 교회의 행동은 크리스천을 향한 부정적 이미지의 정점을 찍었다. “종교가 전 세계적 위기 앞에 위로는 못해줄망정 나서서 타인의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는 행동을 하고, 타인의 고통과 눈물에는 관심도 없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일부 교회와 크리스천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분노한 시민들이 교회 예배를 금지 해달라는 청원과 민원을 제기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을 정도니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을 공감하지 않는 이들이 없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깝다. 라반과 에돔, 성경에 기록된 이기주의 교회와 크리스천의 이기적인 모습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구약시절부터 이기적인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계속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라반이다. 라반은 리브가의 오라비이고,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이며, 야곱의 장인이자 외삼촌이다. 그는 이기적인 탐욕의 소유자였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노여워하는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을 일했다. 그런데 라반이 라헬 대신 언니 레아를 야곱에게 시집보내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며 따져 묻는 야곱에게 라반은 라헬을 줄 터이니 7년을 더 일하라고 종용한다. 결국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견뎌야 했다. 라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딸마저 이용했고, 사위 야곱을 대할 때도 순전히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 했다. 그는 분명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주의자였다. 비정하리만치 이기적인 모습은 에돔의 멸망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구약서 오바댜서는 에돔의 심판(멸망)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멸망 이유가 형제의 고난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기뻐했던 이기주의에 기인하고 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다.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야곱과 에서)로 출생할 때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에돔과 유다 족속(이스라엘)의 갈등의 역사가 깊다. 그 깊은 골만큼 에돔은 이스라엘 족속을 미워했다. 에돔은 느부갓네살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멸망시키려 할 때, 바벨론 편에서 유다의 멸망을 도왔다. 에돔은 유다가 환난을 당할 때 외면하고, 도리어 그들의 재물을 탈취했으며, 그들의 멸망에 크게 입을 벌리고 환호할 정도로 기뻐했다. 도망하는 유대인을 막아서고 남은 자들을 인신매매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정하리만치 이기적인 에돔을 향해 하나님은 멸망이라는 심판을 내렸고, 에돔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비극을 맞이했다(AD 70년).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님의 이타적 사랑 교회와 크리스천은 결코 이기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가치가 ‘이타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님이 바로 그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제자들과 후손들이 그들의 이타적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사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창 14장).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당시 근동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애초에 악한 땅이었던 소돔을 택한 조카에 대한 비방이 아니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창 14:14). 아마도 아브라함 주변 사람들은 무모해 보이는 결정을 만류했을 것이다. 일개 민간인이 어떻게 저 큰 연합군과 싸워 이기겠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환난에 처한 조카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주의자였다면 결코 그렇게 결정하고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위기에 처한 형제(이웃)를 돕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내려주셨다(창 15:5). 초대교회가 보여준 이타적인 사랑 또한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여 교제하고, 마음을 합해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성령 충만해서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누었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눠먹었다. 날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지냈다(행 1:14, 2:44~45, 4:32~34). 초대교회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공동체 중심의 삶을 지향했다. 이타적인 삶과 예배를 몸소 실천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모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보다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셨다. 예수의 이타적인 사랑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기까지 하셨다(갈 1:4).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거듭나야 한다. 아브라함, 초대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 준 바로 그 이타적 사랑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기독교의 시작도 끝도 사랑이다. 온누리교회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 시기,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공감소비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온누리교회 298개 다락방에서 372개 사연(5월 2일 기준)을 접수했을 정도로 성도들의 관심과 호응이 뜨겁다. 김영환 장로(OCC공동체)는 공감소비운동을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도입했다. 회식비와 야유회 비용을 상품권으로 바꿔 직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도록 독려했다. CGNTV는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작은 교회를 선정해서 장비 및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예배 지원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이 모든 행동의 기반이 바로 이타적 사랑이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고 했던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를 버리고 거듭나는 크리스천이 되는 길이다. <전문가 기고> 이기주의 넘어서는 크리스천 ‘자기부인’과 ‘자기수용’의 균형 이기주의 현상을 지칭하는 ‘님비(NIMBY)’라는 용어가 있다. ‘Not In My Backyard’의 약자이다. 공공의 이익에는 부합하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는 이롭지 아니한 일을 반대하는 집단행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지역에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선다거나 장애인 시설, 노숙자 시설, 화장장, 임대 주택 등이 들어설 때 거주 지역의 이익을 위해서 반대하는 행위다. 님비가 문제되는 이유는 첫째, 꼭 필요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문제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이익이 될 수도 있는데 단순히 집값이 하락하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가 많이 듣는 신조어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이기적 태도를 지적하는데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집이나 땅을 사면 투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투기로 여기는 형태와 같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사회의 이기주의 현상을 지적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이기주의적 삶의 형태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은 ‘자기애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 교수인 유영권(2005년)은 한국 교회 쇠퇴의 요인으로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지적하고 있다. 자기애적 성향이 병리적으로 되면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된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과도하게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 사람이나 기관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시기와 질투, 칭찬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지루함과 공허감을 느끼면서 항상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교회에서는 지도자에 대한 의존욕구와 하나님에 대한 의존욕구가 융합되어 지도자를 과도하게 추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 안에서 소명과 사명 깨닫기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기적인 삶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기적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본래의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 수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된 이유를 애정의 결핍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타자로부터의 충분한 사랑을 통한 자기 수용이 필요하다.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역설적 긴장 형태를 어떻게 조화시켜 이기주의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까지 내용을 ‘탕자의 비유’라고 부른다. 탕자의 비유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집을 떠난 둘째 아들, 묵묵히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온 맏아들, 그리고 두 아들을 따뜻하게 품는 아버지다. 목회상담학자 박노권(2010년)은 탕자의 비유를 심층심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는데, 그 속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탕자의 비유의 대한 해석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을 초자아(superego), 자아(ego), 원본능(id)으로 구분하였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맏아들, 아버지는 마치 이 세 가지 형태의 마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아들은 억제되지 않은 쾌락을 추구하고, 종교적 금기를 깨뜨리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는 본능의 지배를 받은 인물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고, 본능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기적 삶을 살아간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나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는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삶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통제 안에 머무르기로 작정한다. 맏아들은 프로이드의 마음 구조에서 초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자아란 도덕, 종교, 법, 심판의 자리에 있는 자아를 말한다. 흔히 바른 생활을 하는 도덕선생, 모범적인 종교인, 부모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맏아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이라고 했다. 그는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화를 내고, 성적인 욕구를 제 멋대로 사용한 동생을 혹독하게 정죄했다. 그는 의롭고 모범적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감정이 상한 것이다. 그의 도덕적 판단은 옳은 것 같지만 매우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맏아들의 모습에서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서 이기적인 교만과 엄격한 도덕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의 부족한 모습은 아버지 안에서 연합하게 된다. 큰 아들은 여전히 화가 나 있고, 둘째 아들의 회개는 물질적 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아들의 변화된 모습과 상관없이 은혜로 그들을 수용한다. 아버지의 통제 안에서 두 아들은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에고(ego) 역할을 한다. 에고는 원래 본능과 초자아를 잘 조절해서 현실적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우리의 모습 속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모습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 속에는 본능을 추구하고자 하는 쾌락원리와 초자아를 통해 타인을 정죄하는 두 가지 모습이 갈등과 긴장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늘 내 안에 있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부인이 필요하다. 둘째 아들의 욕망을 부러워하면서도 초자아적 삶에 억눌려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하는 맏아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욕망이 수용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두 아들을 품어 준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두 아들은 인격의 두 부분인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아들은 무의식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따라 자아실현을 시도했다. 놀기 좋아하고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인 통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위기를 경험했다. 그가 겪은 삶의 위기는 그로 하여금 개성화의 길로 이끌어 아버지에게로 향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아버지 안에서 음식과 옷과 같은 욕구를 충족하게 된다. 반면 맏아들은 정신의 의식적인 부분을 대표한다. 그는 특권, 우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거부한 에로스는 그림자로서 억압된 무의식의 한 측면이다. 사실 동생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속으로 동생의 삶을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의 어두운 욕망이 그의 동생에게 강하게 투사되어 비난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가끔 사회면을 장식하는 스캔들을 접하면서 강하게 분노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개성화된 자기(Self)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아들은 아버지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본질들의 화해를 경험한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양극단을 모두 수용하고 통합함으로써 건강한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귀한 형상들이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성과 죄성을 모두 부인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이기적인 자아와 중심성을 인정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결단을 함으로써 진정한 주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수용은 자기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집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삶, 이기적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안에 이기적인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고, 비우려는 자기 부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내면의 욕구를 채울 때 우리는 이기적인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될 때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적절한 통제 속에서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 오은규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상담코칭학 Ph.D) <발문> “결국 하나님 안에서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될 때 자기 부인과 자기 수용의 적절한 통제 속에서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2020-05-16  제1295호

  • 칼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폴 고갱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폴 고갱이 1888년에 그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심리학자 루이스 코졸리노에 의하면 리더십 유형에 따라 사람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타고난 알파(Alphas)형’이다. 이들은 집단 안에서 자신감 있게 목소리를 낸다. 필요할 때는 다른 멤버를 이끌 수 있는 타고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인물 중에는 요셉이나 다윗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둘째, ‘타고난 베타(Betas)형’이다. 이들은 타고난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불안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소명을 부여하며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격려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하며 버티던 초기의 모세가 이런 유형이다. 셋째, ‘가짜 알파(Psuedo Alphas)형’이다. 이들은 겉보기에 알파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내면의 베타 때문에 갈등하며, 스스로를 알파라 착각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부정하고 타인을 공격하며 허세를 부리면서 불안감을 억누른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간 후의 사울이 이런 유형이다. 넷째, ‘알파추구(Aspiring Alphas)형’이다. 이들은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베타형이지만 알파가 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럴 능력 있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제발 저 좀 알아주세요!”유형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남의 이목을 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안달한다. 하지만 이들의 인식과 달리 천성은 추종자형이기 때문에 내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유형도 ‘알파추구형’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심리치료나 진로상담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는 야곱이 대표적이다. 전형적인 ‘알파추구형’ 야곱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2절까지 말씀과 함께 오늘 우리가 묵상할 그림은 폴 고갱(1848~1903년)이 19세기 후반인 1888년에 그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다. 정식 이름은 이보다 길다. ‘설교 후의 환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아내와 아들 등 일행 모두를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낯선 사람 즉, 천사가 나타나고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한다. 천사는 야곱이 완강하게 버티자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든다. 그리고 말한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주어라.” 그러나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이에 천사가 말했다. “이제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전형적인 알파추구형이다. 사실 성경 인물 중에 야곱만큼 집요한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캐릭터도 드물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야 만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고, 엄마와 결탁하여 아버지와 형을 비열하게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권을 뺏은 적도 있다. 희대의 사기극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이 보낸 천사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천사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면서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죽어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틴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천사가 오죽하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고갱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고갱은 성경 본문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고대 중근동에서 일어난 사건을 19세기 자신이 살던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축제의 한 장면처럼 그려냈다. 고갱은 이번에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강렬한 원색을 동원한다. 일부러 원근법도 왜곡하면서 평면적인 색면 처리를 하는 것도 평시 그의 특기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여느 작가가 그린 경건한 이미지의 종교적 주제의 성화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천사와 야곱이 씨름을 하는 풀밭은 푸른 초원이나 모래밭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붉은 색이다. 그리고 그 풀밭을 나무가 대각선으로 반을 나누고 있다. 왼쪽에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하얀색 보닛을 쓴 여성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모습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정말 씨름하는 장면과 이를 구경하는 동네 사람들을 묘사한 민속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나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에게 나타난 낯선 남자는 천사이다. 천사는 신성한 신비를 상징한다. 성경에도 처음에는 ‘어떤 사람’으로 이 낯선 남자를 표현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보낸 천사임을 암시한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는 것은 고난과 재생을 상징한다. 천사와 만난 후에 야곱은 엉덩이뼈를 다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이것은 야곱의 ‘고난’을 상징한다. 하지만 야곱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야곱은 온전히 새롭게 거듭난다. 일종의 ‘재생’이자 ‘부활’의 통과의례를 치른 것이다.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과거 도망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꼼수를 부리던 야곱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와 작당하여 형 에서를 속이고,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 아내와 재물을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이 넘게 절치부심하던 야곱.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야곱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만져주시고,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하나 소개하자면, 고갱은 이 그림을 자신이 살면서 그림의 배경으로 삼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 성당에 걸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성당의 주임신부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데다가 민속화 같은 속세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풍기는 고갱의 그림을 구입하는 걸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결국 이 그림은 지금 에든버러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몇 년 전 고갱이 1892년에 그린 ‘언제 결혼하니’라는 그림이 경매장에서 3,200억 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그림도 최소한 몇 십억을 넘어 몇 백억을 호가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림의 가격까지 매길 능력은 없지만 추정컨대 말이다. 뭐든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고갱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성당 주임신부 때문에 그 성당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굴러온 복덩이를 걷어차 버린 격이다. 아마 지금도 이 성당이 남아있다면, 성당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주임신부의 결정을 땅을 치며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2020-05-15  제1294호

  • 성인

    포스트 코로나, 이렇게 준비합시다!-‘순예배 감담회’ 토론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와 교회의 대응' 청년, 주부, 차세대 부모, 자영업자에게 묻다 5월 11일, 18일 주간 온누리교회 모든 순예배에서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와 교회의 대응’을 주제로 간담회를 실시한다. 그 두 번째 토론주제를 청년, 주부, 차세대 부모, 자영업자에게 먼저 물었다. 질문은 ‘코로나 발생 이후 느끼는 가장 크고 본질적인 변화는 무엇인가?’, ‘코로나 이후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개인(신앙, 가정, 직장, 학원) 차원, 교회 차원에서 새롭게 준비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교회를 새롭고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교회 및 성도의 본질 회복) 등이다. 이 질문에 박세혁 형제(35세, 여호수아공동체, 자영업), 유소영 성도(42세, 차세대 부모, 온라인마켓 운영), 장민구 성도(49세, 브릿지33+공동체, 회사원), 송윤숙 성도(42세, 주부, 부천 온누리교회)가 응답했다. / 편집자 주 코로나 발생 이후 느낀 가장 크고 본질적인 변화 장민구 성도(49세, 브릿지33+공동체)는 회사원이다. 원래 작은 사업을 했었는데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정리했다. 그는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삶이 단순해짐을 경험했다. “사람들과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다보니 혼자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전보다 생활이 단순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박세혁 형제(35세, 여호수아공동체)는 인테리어 관련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다. 그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역설적으로 사회의 따뜻함을 느꼈다. “코로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은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막히고 멀어졌지만 역설적이게 주 안에서 우리가 하나임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유소영 성도(42세, 차세대 부모)는 온라인예배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자녀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눈짓, 말투부터 달라지더라고요. 자녀와의 관계가 정말 많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송윤숙 성도(42세, 주부, 차세대 부모) 또한 가정이 더욱 풍성해졌다고 고백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집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찾게 되더라고요. 우리 가정이 더욱 풍성해짐을 느꼈습니다.” 코로나 이후 시대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개인) 유소영 성도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지구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 환경 보호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생태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정말 많이 반성 했습니다. 환경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이기적으로 살았음을 회개하고, 환경 보호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나 물을 아껴 쓰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세혁 형제는 코로나 이후 삶의 이유와 목적, 사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과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이후 시대는 세상이 줄 수 있는 안정이 상당히 제한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별하는 눈과 힘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장민구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을 더욱 사모하고 갈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읽기’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행동하는 믿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간절함을 더욱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송윤숙 성도도 새로운 환경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제하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확고한 믿음과 신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코로나 이후 시대를 위해 개인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 시대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온누리교회) 박세혁 형제는 코로나 이후 온누리교회가 예배의 형식과 신앙의 본질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코로나로 인해 예배 형식, 제도, 방법 등이 많이 변하고 있지만 예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예배의 본질과 형식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소영 성도는 온누리교회 차원의 캠페인성 사회참여도 좋지만, 더욱 구체적이고 성도 모두가 참여하는 작은 섬김을 하자고 제안했다. “온누리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웃사랑 캠페인도 좋지만, 순이나 성도 개개인이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섬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여하는 성도만 참여하는 캠페인이 아니라 온누리교회 성도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작은 섬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송윤숙 성도는 온누리교회가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가정에서의 신앙교육과 가정예배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세대 사순절 성경쓰기’나 성경 애니메이션 등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잘 이루어지도록 돕는 사역이나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장민구 성도는 평신도들이 온누리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장(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평신도가 목회의 일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이 아니라 주도적이고 중심적으로 사역하고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온누리교회 평신도의 역할이 확대되면 신앙과 리더십을 가진 성도들이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 사회문제 해결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성도의 본질 회복을 위해 해야 할 것 박세혁 형제는 교회와 성도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 기도, 큐티 등 신앙의 기본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교회가 세상의 비판을 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교회가 해결할 수 있다는 교만과 욕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앞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기본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과 교회가 예배, 말씀, 기도, 큐티 등 신앙의 기본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송윤숙 성도도 교회와 성도가 먼저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한다고 했다. “말씀 앞에 바로 서는 신앙이 꼭 필요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지금까지 잘 해온 것처럼 말씀중심의 양육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소영 성도는 교회와 성도의 본질 회복을 위해서는 성도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성도 개인이 곧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시스템을 모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쉽습니다. 성도 개개인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를 성도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것을 바꾸기보다는 작은 것부터 바꿔나가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장민구 성도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굳건하고 질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더 이상 ‘온실 속 화초’ 신앙은 안 된다고 단언했다. “낯설고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하고 질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즘 교회들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성도들을 온실 속 화초처럼 너무 연약하게 키우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온실 속 화초 같은 교회와 성도는 새로운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성도들에게 깨달음과 각성, 회개가 일어나야 굳은 믿음이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특별기획> 세상은 코로나 이전(BC)과 이후(AD)로 나뉜다! 교회가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이유 “앞으로 세상은 BC(Before Corona; 코로나 이전)와 AC(After Corona; 코로나 이후)로 나뉠 것이다.” 미국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한 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현상이 인류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그 때문인지 요즘 ‘포스트 코로나(Post Conora)’라는 말이 유행이다. 포스트 코로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 이후 코로나19가 가져올 사회적 변화 양상과 추이를 의미하는 용어다. 수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코로나19가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가져올 것이라 전망하고 있고, 실제로 사회 많은 부분들이 변화하고 있다. 교회도 예외일수 없다. 그래서 교회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코로나19가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인류를 변화시킬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하며 인류를 변화시켜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세시대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흑사병이다. 흑사병, 세계 역사를 바꾸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1348~1350년 무렵) 발생했다. 중국에서 3천만 명, 이집트에서는 하루 1만 명이 사망했다.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엄청난 재앙이었다. 이 흑사병은 중세 유럽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사회를 지배하던 봉건제도를 몰락시키고 자본주의, 인본주의, 르네상스, 1차 산업혁명을 낳는 산파 역할을 했다. 중세 유럽은 영주가 농노(노동자)를 착취하는 봉건사회였다. 그러나 흑사병이 발병하면서 농노들이 대거 목숨을 잃자 노동자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봉건 영주들은 농노 이탈 방지를 위해 임금과 처우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농노들의 지위가 향상되고 부유해졌다. 부유해진 농노들의 구매력이 향상되었고 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숨진 친척들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중산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과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단초가 바로 이것이다. 흑사병은 인본주의와 르네상스를 낳기도 했다. 중세 유럽은 교회(가톨릭) 중심사회였다. 그들은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전염병이 수도사의 목숨까지 수도 없이 앗아갔기 때문이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신학보다는 과학과 문학에 더욱 집중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와 르네상스의 태동이었다.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흑사병은 1차 산업혁명(노동의 기계대체) 발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국 MIT 교수 피터 테민에 따르면 농노들의 임금향상은 비용 감소를 위한 대체재를 찾게 하는 원인이 됐고, 노동력을 대체할 기계를 찾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1차 산업혁명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흑사병은 종교개혁도 촉진시켰다.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은 기계화를 유발했고, 노동력 부족은 144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인쇄술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흑사병의 피해는 유럽보다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더욱 극심했다. 그런데 유럽의 흑사병만 유독 화제가 된 이유가 뭘까? 바로 흑사병으로 인해 중세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고, 전 세계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변화에 순응하고 따라가지 못하면… 이처럼 흑사병은 인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지 않아서 새로운 변화에 적절하고 건강하게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것이다. 교회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1차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마부들과 같은 아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변화를 주저하다가 자동차 산업을 완전히 놓쳐버린 영국의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마부들의 일자리 보호 때문이었다. 1865년 ‘적기조례(Red Flag Act; 붉은 깃발법)’가 만들어졌다. 적기조례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한 대의 자동차에 운전수, 기관원, 기수 3명의 운전수가 있어야 하고,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을,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55m 앞에서 자동차를 선도해야 한다. 기수가 앞에서 마차를 타고 “뒤에 자동차가 오니 조심하시오”라고 깃발을 흔들면서 가야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또 자동차 최고속도를 시내에서 3.2km/h, 시외에서 6.4km/h로 제한했다. 당시 증기자동차의 주행속도가 30km/h 이상이었는데 마차보다 천천히 가야 하는 자동차를 타라고 법으로 정한 것이다. 그 규제의 부작용이 컸다. 영국이 자동차 산업을 터무니없이 규제하는 동안 프랑스, 독일,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꽃을 피웠다. 영국은 최초로 자동차를 사용한 나라였지만, 산업혁명의 핵심인 자동차 산업을 포기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적기조례는 1896년 폐지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마부들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변화는 이미 시작 됐다!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우리가 일반적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실제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영향을 받고 있고, 변화되고 있다. 중국 여러 도시에서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강제 격리조치가 실시된 3월 이혼율이 25%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가정폭력도 증가했다고 한다. 자가격리, 재택근무 등으로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게 도리어 독이 된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예기치 못한 악영향이다. 코로나는 경제와 교육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대표적인 것이 재택근무와 화상회의의 보편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재택근무가 확대되었고, 각 회사들은 그동안 인사관리 매뉴얼에는 없었던 재택근무 관리방안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또한 영화에서나 보던 화상회의를 하는 각국 수장들의 모습이 더는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일상에서도 화상회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또 하나의 의사소통 방식이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학교에 안 가고 개학하는 사상 초유의 ‘온라인 개학’으로 인해 각 학교들이 온라인 강의(화상 강의) 체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의료 분야에서도 로봇과 원격의료플랫폼 개발 등 IT기술을 이용해서 코로나19를 막아보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LGCNS(IT 서비스 기업)는 안면인식만으로 자동결제가 가능한 커뮤니티 화폐 서비스를 개발했다.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안면인식이 가능하고, 결제과정에서 기계나 사람 간 불필요한 접촉을 없애 코로나19같은 전염병 감염 확률을 크게 낮추는 효과가 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코로나19는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처럼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세상이 재편될 지도 모른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온누리교회가 ‘온누리미래위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와 교회의 대응’ 간담회를 실시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2020-05-15  제12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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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1일, 18일 주간 ‘순예배 간담회!’ 포스트 코로나 시대 준비 …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와 교회의 대응’ 웨비나 등 활용한 토론회 이후 온누리교회 미래 방향 설정에 적용 <순예배 중인 서초B공동체 성도들> 온누리교회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본격 준비한다. 5월 11일과 18일 주간 온누리교회 모든 순예배에서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와 교회의 대응’을 주제로 ‘순예배 간담회’를 실시한다. 순예배 간담회는 온누리교회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첫걸음이다. 온누리교회가 준비하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골자는 ‘교회와 성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교회와 성도들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는 변화와 인식을 교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 통로가 바로 ‘순예배 간담회’다. 5월 11일 주간과 18일 주간 실시되는 ‘순예배 간담회’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시하면 된다. 첫째, 공동체 담당목사가 순장교육에서 순장들에게 ‘코로나 이후 세계 변화와 교회의 대응’을 위한 순예배 간담회 취지와 배경, 향후 계획과 일정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둘째, 온누리신문(5월 3일자, 10일자)에 보도된 ‘순예배 간담회’ 관련 기사 파일(PDF)을 순장과 순원들이 함께 읽거나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에서 제공하는 순예배 간담회 관련 카드뉴스를 시청한 다음 순예배를 시작한다. 셋째, 순장들은 순예배 간담회에서 나눈 내용들을 정리해서 1주일 이내에 공동체 담당목사에게 제출하면 된다. 5월 11일 주간 순예배 간담회에서는 ‘코로나 시대 내가 느끼는 가장 크고 본질적인 변화는 무엇인가?(직장, 가정, 학교, 취업 및 진로에서)’, ‘코로나 시대의 변화가 나의 삶과 신앙생활에 주는 시사점과 과제는 무엇인가?’, ‘이 시기가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불태우고 치유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우리 안에 불태우고 정결하게 회복할 부분은 무엇인가?’, ‘코로나 이후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내가 개인 차원에서 새롭게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신앙, 가정, 직장 생활, 학업, 진로 영역에서)’ 등을 주제로 토론하면 된다. 5월 18일 주간 순예배 간담회에서는 ‘코로나 시대 내가 느끼는 가장 크고 본질적인 변화는 무엇인가?(교회, 신앙생활에서)’, ‘코로나 이후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 차원에서 새롭게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할 이슈)’,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고, 성도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하기 위해)’, ‘한국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교회와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등을 주제로 토론하면 된다. 온누리미래위원회에서는 순예배 간담회에서 나온 성도들의 의견을 파악한 다음 온누리교회가 고민하고 적용해야 할 과제들을 선정해서 성도들과 쌍방향 의사소통을 실시할 예정이다. 웨비나(Webinar; 웹과 세미나의 합성어, 웹 사이트에서 행해지는 실시간 혹은 녹화의 양방향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 등을 활용해서 발제자, 토론자, 청중 등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만들 예정이다. 이재훈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회 리더십들이 참석해서 성도들이 의견을 적극 수렴할 계획이다. 순예배 간담회와 웨비나 등을 활용한 토론에서 나온 성도들의 의견과 자료들을 분석한 다음에는 교회가 고민해야할 시대적 과제들을 추려내고 논의한 다음,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온누리교회의 방향설정을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온누리미래위원회(위원장 윤영각 장로)는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순예배 간담회는 코로나 이후 변화된 환경 속에서 온누리교회를 새롭게 하고, 교회의 미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순예배 간담회에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순예배 간담회 가이드라인을 위한 Q&A> Q. 이 간담회 가이드라인은 무엇을 위해 만든 건가요? A. 5월 둘째 주(11일 주간)와 셋째 주(18일 주간) 진행할 두 차례 간담회 개최 배경과 순예배 진행 방식 설명을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Q. 간담회 형식의 순예배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코로나 이후 변화된 환경 속에서 온누리교회를 새롭게 하고, 미래 방향 정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입니다. 이 첫걸음은 우리 교회의 실핏줄 같은 순예배를 통해 성도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Q. 그럼 이번 순예배에서 <생명의삶>은 사용을 안 하나요? A. 아니요, <생명의삶>도 사용합니다. 다만 이번 두 번에 한해 간담회에 집중하기 위해 <생명의삶>을 간략히 나눈 후 간담회를 진행하려고 합니다(90분 진행의 경우, <생명의삶> 30분, 간담회 60분으로 진행). Q. 이번 간담회 결과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나요? A. 1차적으로는 웨비나 토론 주제 선정과 진행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며, 2차적으로는 자료 분석과 당회를 비롯한 교회 리더십에 보고하여 향후 온누리교회 방향 설정을 위한 기초자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Q. 이번 간담회와 웹세미나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나요? A. 5월 중 간담회와 6월 중 웹세미나의 결과는 7월 중 당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리더십에 보고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온누리교회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Q. 과거에도 성도들의 의견수렴을 위한 설문조사는 몇 차례 있었는데, 의견을 듣는데서 멈추고 어떻게 반영되어 진행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피드백이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것 아닌가요? A. 이번 간담회와 웹세미나는 출발점이 다릅니다. 먼저 단순한 일방적인 설문조사에 그치는게 아니고, 순예배에서 진솔한 토의가 먼저 진행됩니다. 한 달 간 순예배에서 목소리를 경청하는 시간을 갖고, 두 번째 단계가 진행됩니다.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회 리더십과 성도들 간에 실시간 양방향의 의견교환을 위해 웹세미나를 갖게 되는 점이 과거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 달 간의 두 단계 과정을 거친 후 7월부터는 교회 리더십 안에서 신중하게 논의를 할 것입니다. 그후, 논의 경과에 따라 금년 가을부터는 금년 상반기에 진행한 과정을 토대로 한 성도들과 교회 리더십 간 소통과정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2020-05-15  제12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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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세이-코로나19 앞에 선 크리스천 신앙에세이 코로나19 앞에 선 크리스천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축복의 일을 통해서도, 또한 고난의 일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코로나19를 바라보며 기도할 때 먼저 나오는 기도이다. 요셉의 고난의 인생, 모세의 광야의 삶, 욥의 고난과 이스라엘의 수난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선하심을 나타내셨다. 이번 코로나19의 어려움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분명히 담겨있다. 이것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역할이다. 코로나19는 질병의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의 가치관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전에는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으면 예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됐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들은 취소됐고,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 시장, 식당에도 가기를 꺼려한다.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는 사람관계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고 있다. 코로나19가 육체적 전염 속도 보다 훨씬 빠르게 사회적, 심리적 전염을 전파하고 있다. 이 큰 사태 앞에서 크리스천으로서 회개의 기도가 먼저 나온다. “세상을 다스리라”는(창 1:26)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과 인간의 수많은 욕심과 죄가 이 일의 시작임을 알기에 회개의 기도로 이 어려움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다. 코로나19 앞에서 크리스천과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구하며 기도한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어적 자세만을 취하는 것을 넘어서 이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선하심을 보여주는 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구하며 기도할 때 뉴스를 통해 이러한 소식을 들었다. “헌혈 부족. 코로나19로 인해 헌혈하는 단체들이 취소하고, 개인들의 참여율도 낮아져서 헌혈보유량이 심각한 수준이다. 환자들이 수술을 연기해야하고, 응급상황에서 생명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 뉴스를 보는 순간 개인적으로 기도했던 크리스천의 역할에 대한 응답을 주심을 깨달았다. 부천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 지체들과 코로나19 앞에 선 크리스천의 적극적 자세와 헌혈동참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 권면했다. 청년들도 공감하며 적극 동참했다. 대학청년부 멘토님들도 함께 했다. 부천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는 코로나19의 상황이 누그러지고 헌혈 부족이 해소될 때까지 ‘헌혈동참 인증샷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다. 나도 담당목사로써 바로 다음날 아침 헌혈의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전날 수면부족의 이유로 그날은 하지 못하고 며칠 뒤에 재도전해서 헌혈을 했다. 마음과 의욕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준비가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코로나19의 사태를 바라보며 2001년 뉴욕 911테러사건 당시 한 신문기사가 떠오른다. 빌딩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들은 무너지는 빌딩 반대방향으로 살기 위해서 달렸다. 그때 누군가는 그들에게 “더 빨리 달리십시오! 더 빨리!”라고 외치며 오히려 무너지는 빌딩 방향으로 달렸다. 그들은 소방관이었고 경찰관이었다. 그들은 달리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일로인해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 도와주세요.” 코로나19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질문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 조병홍 목사(부천 온누리교회)

     2020-02-23  제1283호

  • 칼럼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내 양을 먹이라”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내 양을 먹이라” 라파엘로의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 <사진캡션> 라파엘로 산치오의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소장) 내가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년)가 그린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1515~1516년)의 실물을 처음 본 건 런던올림픽이 열린 2012년 여름이었다. 당시 문체부장관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올림픽 기간 중에 런던을 가게 되었다. 우리 부처 직원들은 한국 선수들을 지원하는 동시에 한국의 문화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각종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에서 열린 한국 의상과 음식을 소개하는 행사였다. 의상 발표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이 맡았고, 한국 음식은 비비고(CJ제일제당)에서 해외에 첫 출시하는 비빔밥이 주 메뉴였다. 당시 올림픽 참관 차 온 외국인들과 런던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초청 받아 참석했다.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다. 당시 V&A 관장은 행사 전에 도슨트(박물관 안내자)를 자임하며 박물관에 전시된 주요 작품들을 자상하게 해설해 주기도 했다. 마침 박물관이 휴관일이라 넓은 박물관에 우리뿐이었다. 나는 장관을 수행하고 온 본분을 망각한 채 내부를 종횡무진 했다. 그러다 라파엘로관에서 큰 그림 두 점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라파엘로의 ‘고기잡이 기적’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오늘 소개할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였다. 나란히 걸린 두 작품을 만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생각보다 큰 그림 사이즈도 놀라웠지만, 그림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대체 얼마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시간도 멈추고, 몸도 굳었지만 내 가슴은 뛰었다. 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화 앞에서 내적으로 전율하던 내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 했을까? 내가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 심리학적 상징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성화를 탐구하고 글을 쓰고 강연을 시작한 것도 그날 이후였다. 드디어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하사하시다 오늘 라파엘로의 그림과 함께 묵상할 성경본문은 마태복음 16장 13~20절과 요한복음 21장15~17절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맡기며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는 내용이다. 이 그림은 당시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가 그린 ‘천국열쇠를 받는 베드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페루지노의 수제자였다. 이 사제지간처럼 루벤스, 푸생, 귀도 레니 등 수많은 후배 화가들도 같은 소재로 작품을 남겼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자. 그림 왼쪽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 계신다. 라파엘로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 자국을 선명하게 그려 넣고, 제자들을 12명이 아닌 11명만 그려 넣어 지금 이 시간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라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님의 하얀 옷 역시 부활 후임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당신의 신성(神性)을 보여주셨던 ‘거룩한 변모’의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 9:3). 예수님의 부활 직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가 빈 무덤 안에 있는 두 천사를 만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마 28:3)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주검을 싼 깨끗한 세마포(마 27:59) 역시 흰색이었을 것이다. 흰색은 완전한 순결, 죽음의 어둠을 이긴 빛나는 승리를 상징한다. 라파엘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옷을 하얗게 묘사한 이유일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왼손은 베드로를, 오른손은 양떼를 가리킨다. 예수님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열쇠를 받아들고 있는 이가 베드로다. 예수님이 물으신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거듭하시며(요 21:15~17) 그의 믿음을 세 차례나 거듭 확인하신 이후 마침내 그에게 양떼를 맡기신다. 가이사랴 빌립보 어느 강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베드로야,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반석이란 이름을 가진 베드로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인즉, 저승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 16:15~18). 그러니까 라파엘로의 이 그림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 실린 두 내용을 하나의 그림 속에 뭉뚱그려 표현한 것이다. 원래 ‘양(羊)’은 복합적인 상징을 갖는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백성을 뜻한다. 양들은 그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또 하나는 양이 아닌 선한 목자를 상징하는 역설적인 경우이다.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희생양이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바위(반석)’ 역시 이중적인 상징을 갖는다. 앞서 말한 반석이 베드로의 이름과 같은 뜻임에 근거하여 베드로의 믿음을 상징한다. 또한 바위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모세가 시내산을 지날 때 호렙 바위를 치자 생수가 샘솟았다(출 17:6). 여기서 바위는 목마른 양떼들에게 생명수 같은 존재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다. 주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베드로의 믿음을 확인하신 예수님이 드디어 천국열쇠를 하사하신다. 여기서 열쇠는 영적인 부요(富饒)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는 그리스도의 권위인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이후 도상학(圖像學)에서 열쇠는 베드로를 상징하는 지물(attribute, 속성)이 된다. “나는 또 네게 천국열쇠를 줄 것이다. 무엇이든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 16:19). 안셀름 그륀에 의하면 여기서 ‘매이고 풀리다’는 말은 예수님과의 연결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와 매이는(연결되는) 것은 나를 부자유의 사슬과 두려움에서 풀어주고, 마침내 나를 내 아집(ego)의 함정에서 풀어준다.” 그리하면 너에게 천국열쇠를 주겠노라! 그렇다. 사실 베드로는 우리 자신을 뜻한다. 베드로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믿음과 의심, 순종과 불순종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제자라고 큰소리치다 하룻밤 새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자가 베드로처럼 항상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면 그는 예수와 마태복음이 말하는 진정한 제자다.” 마침내 그리스도와 매인(연결된) 베드로는 진정한 제자로서 사역하다가 순교하고,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지기까지 한다. 라파엘로가 멀리 원경(遠景)에 그려 넣은 성당이 바로 성베드로 성당이다. 주님은 라파엘로의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에게 매일 것이냐? 너는 나를 메시아로 고백하고 항상 내게로 돌아오겠느냐?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천국열쇠를 주겠노라!”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2020-02-23  제12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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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단 - 온전한 거룩 주일강단 온전한 거룩 단 1:1~9 / 이재훈 목사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성도는 온전히 거룩함을 지키는 성도입니다. 거룩의 본래 뜻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된 분입니다. 그분만이 홀로 존재하실 수 있고, 그분만이 영원히 홀로 존재하십니다. 그분만이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분이요,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능력 차원에서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성품에 있어서도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미움과 분노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슬픔을 이길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슬픔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시고 기뻐하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거룩한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거룩하라’는 명령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구별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요, 연결된 존재로서 구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통치자요,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닙니다. 자연 속에 살지만 초자연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이기에 자연과 초자연의 중간연결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이 모든 것을 망가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았습니다. 우리가 거룩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씻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분이 의가 되시고, 거룩함이 되심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하심이 됩니다. 우리는 그분을 덧입어야만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노력, 열심, 인간이 만든 규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만든 규례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슬픔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때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며 다시 새 힘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손뼉 치며 찬양할 수 있는 것이 거룩입니다. 세상은 슬픔이지만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 거룩이요, 세상에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하지만 우리에게는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이 거룩입니다. 세상은 절망이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을 포기하지 않은 다니엘과 세 친구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기는 사람들을 보면 거룩이 중심에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기둥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도 언제나 거룩합니다. 거룩을 선택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입니다.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가고, 어떤 이들은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던 그 시대 다니엘은 바벨론에 전쟁 포로로 붙잡혀 왔습니다. 얼나나 절망적입니까? 그러나 다니엘서가 기록된 것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역사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 역사를 반전시키고 회복시킨다는 것을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같은 거룩함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식을 잘못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그랬습니다. 한 나라를 무력으로만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정신까지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경험을 했었습니다. 이주시키고 고립시켜서 그 나라의 문화와 철학을 교육시켜서 정체성을 빼앗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왕궁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학문과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바꾸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름은 영혼같이 소중했습니다. 그들 정체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의 이름은 ‘엘’이나 ‘야’로 끝납니다. 스가랴, 히스기야, 예레미야 등 ‘야’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엘’은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과 친구들의 이름도 야와 엘로 끝납니다. 그 이름이 바뀌는 수치 속에서 그들에게 엄청난 신앙도전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것을 먹어야 했습니다. 금신상에 절을 하도록 강요받았고, 느부갓네살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는 엄청난 핍박 속에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엄청난 절망적인 상황과 신앙의 핍박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거룩함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들은 환경과 타협할 수도 있었습니다. 굳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로가 보장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지만 그들은 안락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보다 중심에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과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뜻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다니엘서 1장은 그 첫 번째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왕이 정한 음식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바벨론 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 정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바벨론 신을 섬긴다는 상징이었고, 순종을 맹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하기로 결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거룩’을 선택하는 믿음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먹는 특별한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내시의 우두머리에게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8절).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생명을 내걸고 거절했습니다.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역사적 소명이라는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바벨론 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거절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이 내시의 우두머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9절).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시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거룩을 결심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 상황, 문제, 고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부딪히게 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능력을 먼저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거룩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혜를 먼저 구하지만 하나님은 거룩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룩을 먼저 택할 때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문화와 그 상황을 순교하듯 거부하며 다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부했습니다. 감독관에게 “10일 동안 기회를 주십시오. 10일 동안 우리는 물과 채식만 하고, 그래서 왕이 정한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하고 평가해 주십시오”라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주신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바벨론 한복판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요 16:33).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거룩을 선택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승리를 경험한 또 하나의 비결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뜻을 정한 것은 다니엘이었지만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한 세 친구들이 있었기에 더욱 용기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또 다른 믿음을 만나면 용기가 됩니다.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그 나라와 민족을 다시 일으키시는 일에 사용하셨던 사람들은 온전히 거룩함을 지키기로 결단한 영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거룩이 승리의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다니엘 시대의 바벨론 같은 제국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바벨론 같은 인본주의적인 이념, 철학, 사상으로 우리의 영혼을 세속화시키는 시대입니다. 몸으로는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영으로는 바벨론의 포로 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야말로 우리가 눈을 뜨고 거룩을 선택해야 할 시기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보호와 지혜를 허락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이시며, 거룩에서 나온 지혜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일에 거룩한 백성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순교가 어렵다고 하지만 순교보다 어려운 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바벨론 제국 같은 이 시대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거룩하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며 거룩으로 세상을 이기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0-02-23  제12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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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 - 가정에서 이뤄지는 '선교교육'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 가정에서 이뤄지는 ‘선교교육’ “엄마! 아빠! 선교는 왜 하는 거예요?” 자녀의 이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온누리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니까 선교해야지”, “교회에서 하자니까 해야지”, “선교가 교회의 비전이야”라는 대답은 옳은 말이지만 자녀들 입장에서 보면 안하느니만 못한 답변일 수 있다.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는 대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선교에 동참하겠다고 결심한 자녀가 아웃리치를 다녀와서 “가난한 나라 아이들의 삶을 보니까 그동안 제가 얼마나 불평불만이 심했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라고 말한다면 부모는 뭐라고 답해줘야 할까? “아웃리치 다녀오더니 철들었네. 이제 말 잘 듣자”라고 한다면 0점이다. “그 아이들이 부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예수님을 만나는거야”라고 한다면 50점짜리 대답이다. 부모들은 아웃리치를 다녀와 가난한 국가의 아이들에게서 상대적인 행복과 만족을 느낀 자녀들에게 복음 전도의 필요성과 함께 가난한 아이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할 책임이 있다고 교육해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교적인 삶은 해외 아웃리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가장 모범적인 선교교육은 부모가 선교적으로 살면서 삶으로 자녀들에게 선교를 가르치는 것이다. 온누리교회에는 선교와 관련된 예배, 기도모임, 스쿨 등이 무수히 많다. 교회 서점에는 다양한 선교관련 서적들이 있다. 가정예배에서 부모가 자녀들의 선교교육을 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와 정보가 무궁무진하다. 가정예배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선교를 가르치고, 일상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선교적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자녀들이 일상에서 선교를 행하도록 돕는다면 이보다 좋은 선교교육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 가이드 (문영재 목사) 제목: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는 하나님 본문: 요한복음 6장 9~13절 찬양: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메시지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은 구원을 알게 하시고, 허락하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의 지친 모습을 보시며 먹을 것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이 있느냐?” 안드레가 말합니다. “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첫째,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와 떡을 모인 무리 모두가 먹고 남게 하십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보기에도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최선의 것을 받으시며 이를 사용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난다면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맡기며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드리며 온전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받으십니다. 둘째, 원대로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원하는 대로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5천 명쯤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 모두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아보니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믿음 없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고 있는 것들이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의 삶에 한계란 없습니다. 어제도 계시며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광대하신 능력이 오늘도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며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는 귀한 가정되시길 바랍니다. *오늘(2월 23일) 저녁 8시 30분 CGNTV에서 방송되는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를 시청하시면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YouTube 채널 <아무리 바빠도 가정예배>를 통해 직접 가정예배 Live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2020-02-23  제12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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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사칼럼-세상과 구별된 ‘선한 그리스도인’ 권사칼럼 세상과 구별된 ‘선한 그리스도인’ 새해 들어 작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선한 그리스도인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었다. 제목이 금방 내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았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너무도 평범하고 자주 듣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 크리스천들은 흔히들 듣는 말일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보며 선한 사마리아인이 생각났다. 평소와 같이 별 감동과 느낌 없이 지나쳤다. 선물 받은 책을 큐티책상에 며칠 동안 가만히 올려 두었다. 한동안 겉표지만 묵상하다가 책을 펼쳐 들었다. 존경하는 담임목사님이 새해에 주시는 메시지인데 한 번은 꼭 봐야지 하는 의무감에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위대한 삶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위대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첫 장을 펼치고 들어온 문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제야 끌리지 않던 제목도 내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책장을 넘겨나갔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무엇이 소금됨이며, 무엇이 빛인지 깨달았다. 우리의 선한 행실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말씀은 눈물 없이는 기쁨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인생의 목표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멋지게 통과하여 그 고통이 행복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불행은 환경과 물질과 성취에서 행복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요, 전부다. 선한 양심이란 한 번도 죄를 지은 적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로 타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경험하고 중생한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이나 마틴 루터처럼 믿음과 양심을 따라 살아갈 때 그들과 동일한 담대함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서 핍박받는 자로 성숙하라”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나라에 이미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성품과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마음의 가난에서 누리는 천국에 머물지 않고, 더 성숙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천국에 이르는 것이다. 책 <선한 그리스도인을 찾습니다>는 각 주제를 통해 복음을 간직한 믿음의 성도들에게 많은 교훈을 전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성숙한 제자도가 주옥같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을 통하여 2020년 나를 포함한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세상과 구별된 진정한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해본다. / 조혜선 권사(강남C공동체)

     2020-02-23  제12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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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 장로칼럼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 나라 위태로울 때 내 목숨 지키듯 나라 지키게 하소서 교회 위태로울 때 십자가 예수님 피에 나의 피도 흐르게 하소서 때 분별하도록 우리 안에 계시고 가야할 길 볼 수 있게 우리 눈이 되소서 위기에 기도하게 하시고 자기 의로 위선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나라 어렵게 하는 악한 세력 주님 힘입어 담대하게 이기게 하소서 이긴 후엔 악한 세력의 도구된 불쌍한 영혼 예수님 사랑으로 구원하여 온전한 승리하게 하소서 피 흘려 싸운 용사 고요히 기도한 성도 원망하지 말게 하시고 간절한 기도의 용사 행동한 양심의 실수조차 감사케 하소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이루는 손발 되고 이 나라의 교회 하나님 찬양하게 하옵소서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온누리에서도 이루시옵소서. 아멘 / 이재규 장로(동대문중랑공동체)

     2020-02-23  제1283호

  • 사역

    온 가족이 함께하는 사순절 성경필사 온 가족이 함께하는 사순절 성경필사 차세대, 오늘(23일) 성경필사노트 배부, 26일부터 시작 차세대사역본부가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사순절 성경필사’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온 가족이 함께 성경을 읽고 쓰면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 고난을 묵상하는 프로그램이다. 말씀 안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신앙을 회복하고,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틀림없다. 국내 온누리교회 10개 캠퍼스 차세대 모든 부서에서 실시한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사순절 성경필사의 의미부터 유익, 성경필사노트 활용 방법 등을 소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필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 새해 목표로 성경일독과 함께 ‘성경필사’를 계획하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을 눈과 입으로만 읽을 때보다 따라 쓰면 그 감동이 배가 된다. 그런데 ‘성경필사’라는 목표를 완수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혼자하다 보면 막막할 때가 있고, 성경 전체를 필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쉽게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세대사역본부가 이와 같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사순절 성경필사’가 바로 그것이다. 혼자 하기 막막했던 성경필사를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고, 사순절 기간 동안 정해진 분량만큼만 필사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필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온 가족이 함께 성경을 읽고 쓰면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온 가족이 함께 신앙을 회복하고, 가정을 바로 세우는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까지 여섯 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말한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노아 홍수 때 40일 밤낮으로 비가 내렸고(창 7:4),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십계명을 기록했다(출 34:28). 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고(민 14:33),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40이라는 숫자는 고난과 시련, 인내를 상징한다. 성도들은 40일 동안 이어지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기간만큼은 더욱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며, 절제한다. 결국 사순절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기간이다. 성경필사노트 활용법 차세대사역본부는 사순절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온 가족이 함께하는 성경필사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를 위한 성경필사노트도 제작했다. 성경필사노트 활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순절 기간 동안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정한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 정해진 성경 본문을 함께 읽는다. 말씀을 읽은 다음에는 그날 읽은 말씀을 성경필사노트에 기록한다. 그날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삶과 사역, 고난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기도로 마무리 한다. 날짜를 정해서 가족들이 돌아가며 기도해도 좋다. 만약 온 가족이 함께 모이기 힘든 경우라면 각자 그날의 성경본문을 읽고, 성경필사를 한 다음 기도로 마무리하면 된다. 주일에 일주일 동안 해온 성경필사를 점검하고, 소감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차세대사역본부에서 준비한 성경필사노트는 저학년용(미취학 아동, 유년부)과 고학년용(초등부, 파워웨이브)이 있다. 고학년용 성경필사노트는 보통의 성경필사노트와 마찬가지로 왼편에는 본문 말씀이 쓰여 있고, 오른편에 본문을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글을 읽고 쓰기가 어려운 저학년용 성경필사노트는 흐릿한 글씨로 성경본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글자를 따라 쓰면 된다. 읽고 써야할 말씀이 많은 날에는 성경본문을 기록하는 대신 그림일기를 쓰는 칸이나 본문을 설명해주는 그림이 그려있다. 이를 활용하면 재미있게 성경필사를 이어갈 수 있다. 차세대사역본부에서 준비한 성경필사노트는 오늘(23일) 국내 온누리교회 10개 캠퍼스 차세대 예배에서 배부한다. 성경필사노트는 올해 사순절 기간인 오는 2월 26일(수)부터 4월 10일(토)까지 정해진 날짜와 분량에 맞춰 작성하면 된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성경필사에는 차세대사역본부 모든 교역자들과 교사들도 참여한다. 사역칼럼 ‘신앙의 기억’이라는 도서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저녁식사를 준비하시던 어머니께서 분홍색천으로 만든 작은 자루에 쌀을 한움쿰 넣으셨다. 나는 어머니께 “거기에 쌀을 왜 담아요?”라고 질문했다. 어머니는 “교회에 가지고 갈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쌀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다. 나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할 만큼 강력했다. 그날 이후로도 어머니께서 성경가방에 성미자루를 넣고 교회에 가시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나는 그 장면을 ‘신앙의 기억’이라는 도서관에 꽂아두고 지금도 필요할 때 꺼내곤 한다. 이처럼 유아기나 아동기 때부터 교회를 다니는 자녀들은 어린 시절 들었던 성경이야기, 신앙의 추억들을 자양분으로 신앙이 자라난다. 이러한 자양분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다. 이들을 ‘중요한 타자’라고 한다. 이들이 하는 하나님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 일상에서 하는 선택들은 자녀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자녀 신앙양육의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는 부모는 행동과 선택이 신앙적인지,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나는 자녀에게 신앙양육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신앙양육은 무엇을 알려주기 위함인가?’, ‘나는 하루 중에서 어떻게, 어떤 시간을 이용해서 신앙양육을 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은 자녀 학교의 급식표, 선생님과 교우관계, 건강상태 등의 질문보다 훨씬 우선해야한다. 하나님을 믿고 갈망하는 마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녀 신앙양육의 목표가 무엇인가? 신명기 6장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준비하던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유일한 여호와시니”라고 선포한다. 이 선포는 오늘 나의 삶, 우리의 가정에도 울리는 말씀이며, 자녀 신앙양육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다. 상상해보라.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 되심을 알고, 믿고, 그 분의 뜻에 따르는 것을. 믿는 부모에게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물음이 생긴다. 자녀에게 하나님만 사랑하는 신앙을 교육하기 위한 구체적은 방법이 무엇인가? 신명기는 그 첫 번째 방법으로 “부모가 먼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두 번째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한다. 부지런히 알려준다는 것은 하루 중에서 네 때, 즉 앉아있을 때, 길을 걸어갈 때, 누울 때, 일어날 때에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나는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식탁에서, 자녀가 집을 나설 때, 잠자리에서 신앙교육을 하고 있는가?’ 만약 하고 있다면 ‘자녀의 안전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 되심을 교육하고 있는가?’를 질문해보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자녀의 신앙양육을 하고 싶은 마음은 온누리교회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나는 차세대에서 15년 동안 사역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자녀의 신앙양육을 위해 애쓰는 부모를 보면서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녀의 신앙양육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신앙교육의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수시로 잃게 된다. 또한 방법을 몰라 손을 놓게 되는 경우도 있고, 갑자기 무엇을 하려고 하면 많이 어색하고 자녀가 잘 따라올지 걱정이 돼서 시작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자녀들이 귀찮아해서 멈추게 되기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차세대 교역자들이 고민하며 찾아낸 것은 가정에서 의미 있고 일관성 있는 신앙양육을 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하루 중 ‘네 때’를 이용해서 자녀에게 부지런히 교육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 말씀 뒤에 제시되는 것이 제도이다. ‘이 말씀’을 손목에 기호로 매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의 문과 문설주에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 교수방법이다. 믿는 이들로 하여금 이것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차세대사역본부에서는 2019년부터 매달 성경말씀이 적힌 식빵모양의 카드를 자녀들을 통해 가정에 보냈다. 현관문에 붙이고 하루에 한 번씩 가족들이 함께 읽도록 안내했다.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해요’라고 적힌 야광액자를 가정에 보냈고, 아침과 저녁 침대에서 읽기를 부탁했다. 식탁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크리스마스에는 각휴지를 나눠줬다. 올해 역시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 말씀식빵과 액자는 그대로 진행되고, 식탁 신앙양육을 위해 각휴지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에 제공될 것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프로그램은 사순절 기간을 이용한 ‘가족 성경 쓰기’이다. 말씀쓰기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차세대에서 제공되는 가정신앙양육 프로그램을 통해 말씀의 지식과 함께 신앙의 추억이 매일 쌓여가기를 소망한다. 차세대들 모두가 그 추억들을 신앙의 기억이라는 도서관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어 신앙을 지켜가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고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 노희태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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