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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캠퍼스

    [예수 따라, 성령 따라] 국내 온누리교회 탐방 3. 양지온누리교회 예수 따라, 성령 따라 국내 온누리교회 탐방 3. 양지온누리교회 선교 위해 태동했고, 선교 위해 기능한다! 양지온누리교회의 뿌리 깊은 선교 역사와 미래 올해는 온누리교회 창립 40주년이다. 온누리교회는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사명을 따라 ‘Acts29 비전’을 써내려가고 있다. <온누리신문>에서 Acts29 비전이 완수되는 바로 그 현장을 찾아간다. ‘예수 따라, 성령 따라’를 주제로 국내 온누리교회 캠퍼스와 협력 기관을 탐방하며 그 아름다운 현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역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세 번째 여정은 ‘양지온누리교회’다. 박철웅 목사에게 양지온누리교회의 뿌리 깊은 선교 역사와 역할에 관해 들었다.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양지온누리교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선교’다. 어쩌면 가장 뿌리 깊은 선교 역사와 선교를 위한 역할을 자랑하는 교회가 양지온누리교회다. ‘Acts29 비전빌리지’에서 선교훈련원 TIM 국제선교회와 함께 선교의 최일선에서 장단기 선교사 배출, 교회 리더십 양성 및 영성 회복 등을 완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지온누리교회와 Acts29 비전빌리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두 기관 모두 선교를 위해 태동했고, 선교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 그 시작은 ‘2천/1만 비전 선포’였다. 하용조 목사가 1994년 2천/1만 비전을 선포하고, 비전을 완수하는 훈련장으로 ‘온누리벧엘교회’와 ‘온누리이천만훈련원’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창립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온누리교회 소유의 땅이 없었다. 그런데 1996년 목회자 부재로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기 어려웠던 낙원벧엘교회 성도들이 온누리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온누리교회는 낙원벧엘교회의 노후된 건물을 보수하고, ‘온누리벧엘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상규 목사를 담당목사로 파송했다. 그 터에 있던 건물을 보수해 ‘온누리이천만훈련원’도 세웠다. 온누리이천만훈련원은 선교사들을 위한 영적 훈련장으로 사용되다가 전 세계에서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거점인 ‘온누리세계선교센터(OWMC)’로 거듭났다. 김사무엘 선교사를 초대 원장으로 세우고, 선교 정책을 수립하고 연구하는 ‘2000선교본부’,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두란노해외선교회(TIM)’를 창립했다. 그리고 2010년, 온누리세계선교센터가 ‘Acts29 비전빌리지’로 다시 한번 도약했다. 2005년 말에는 온누리벧엘교회 모든 성도가 온누리교회 등록 성도로 전환했고, 2012년 6월 온누리벧엘교회가 ‘양지온누리교회’로 거듭나며 온누리교회 10번째 캠퍼스로 탄생했다. 이상규 목사에 이어 황종연 목사, 김영배 목사, 도육환 목사가 양지온누리교회를 섬겼다. 2022년부터는 박철웅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선교지에 있지 않지만, 선교지를 경험하는 교회 양지온누리교회가 Acts29 비전빌리지 안에 위치하면서 선교적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선교사의 안식과 회복, 선교사 후보자들의 훈련, 그리고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 교차하면서 ‘선교지에 있지 않지만, 선교지를 경험하는 교회’라는 독특한 특징을 형성했다. 박철웅 목사는 양지온누리교회가 가진 독특한 특징을 다음같이 설명했다. “양지온누리교회는 Acts29 비전빌리지 안에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Acts29 비전빌리지에서 선교 훈련을 받는 후보자들, 안식년을 보내거나 잠시 본부사역을 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머물게 됩니다. 선교사들과 함께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성도들이 선교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선교 현장을 생생하게 접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양지온누리교회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자 특색입니다.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양지온누리교회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자연 친화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교회’라는 점이다. 김사무엘홀에서 예배드리고 나서 예배당 커튼이 올라가면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움을 환기해 준다. 은퇴 선교사와 안식 선교사들의 쉼과 회복을 위한 자연 쉼터를 마련하고자 했던 故 하용조 목사의 뜻과도 맞닿아 있다. 날마다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교회 양지온누리교회는 선교와 함께 태동한 교회답게 그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한 예로 ‘온누리나누리사역팀’이 있다. 온누리나누리사역팀에서는 성도들이 기증한 물품을 재판매해서 얻은 수익금으로 선교지 유치원에 놀이터를 설치하거나 선교사들의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 구매 등을 돕고 있다. 해외 아웃리치 같은 선교 기반 사역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또한 양지온누리교회 성도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선교적 삶을 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외진 지역이라는 한계가 있다. 다음 세대가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양지온누리교회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차세대 사역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성경학습 프로그램 ‘어와나(Awana)’다. 어와나(Awana)는 놀이와 게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말씀을 배우고, 협동심을 키우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연령별로 구성되어 있다. 젊은 부부를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수요오전여성예배’, ‘마더와이즈’ 등을 통해서 젊은 부부들과 그들의 자녀가 양지온누리교회에서 자리 잡고, 다음 세대가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양지온누리교회가 ‘경험하는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날마다 한 걸음 더 성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꿈꾸는 ‘선교적 미래’ 무엇보다 양지온누리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특별하고 귀하게 여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일당백’이기 때문이다. 650명 규모의 캠퍼스 교회가 다양한 사역과 프로그램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양지온누리교회 성도들이 1인 2역, 3역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박철웅 목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헌신하는 양지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양지온누리교회 성도들의 그 아름다운 헌신을 선교적 미래를 꿈꾸고 이뤄가는 소중한 발걸음으로 여긴다. 양지온누리교회가 꿈꾸는 선교적 미래는 명확하다. 양지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선교적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지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보내는 선교사’, ‘보냄 받은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따라 살기를 소망하고 있다. “양지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선교훈련원에서는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선교지와 선교사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시안기도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양지온누리교회의 더 많은 성도가 선교의 열정으로 시안기도모임에 참여해서 온누리 선교를 위한 기도가 다시 한번 뜨겁게 부흥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2025-06-28  제1546호

  • 칼럼

    [이슈(Issue) 바로보기!] 인간의 신성을 짓밟는 물질주의 이슈(Issue) 바로보기! 인간의 신성을 짓밟는 물질주의 나는 직업상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돈 꾸러 다니느라 정신없는 중소기업 사장님, 빚에 내몰려 파산을 앞둔 자영업자도 있다. 사람이 겪는 갖가지 시련 중에서 뼈가 시릴 정도로 힘든 게 ‘빚 독촉’이란 말을 가끔 듣는다. 사실 돈 없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돈이라는 명제로부터 행복과 자유를 지키는 것은 상당히 절실한 과제다. 특히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연결이 끊어졌다면 말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건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한국은 돈의 가치를 극대화하다 못해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경향마저 도드라진다. 그야말로 돈을 숭배하는 사회로 달려가고 있다. 가치나 진리까지 압도하니 말이다. 심지어 한국인은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를 묻는 말에 ‘물질적 풍요’를 택했다. 그렇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인다. 사탄은 ‘돈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속삭인다. 다만, 성경은 ‘부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과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것’을 엄하게 질책하고,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한다. 돈의 숭배는 하나님과 이웃이란 가장 고귀한 두 개의 관계를 망쳐놓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웃을 멸시하게 만든다. 지금 유행하는 물질주의는 ‘인간을 무엇으로 보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한데 인간은 하나님의 요청을 거부하고, 인간의 신성을 최대한 배격해 왔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복잡한 동물’로 낮추었고, 양심과 죄, 영혼과 같은 용어들을 구식으로 치부했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조건이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유물론을 주창했고, 다윈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시행착오를 거친 우연의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요즘엔 ‘인간과 동물 모두 평등한 사회로 전환하라’는 슬로건도 내건다. 사람이 동물과 차이가 없다는 진화론의 귀결이다. 급기야 트랜스 휴머니즘이란 이름으로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통한 신인류 탄생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시는데, 세상의 이론들 특히 사탄의 책략은 인간을 동물과 기계, 때론 동물보다 못한 잔인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이 힘겨룸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극단적으로 갈라놓는다. 인간을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표를 가진 신의 대리통치자’로 볼 건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몸부림치는 자연의 일부분’으로 여길 건지 두 관점의 영적 전쟁이 지금도 치열하다. 때로 하나님은 돈의 숭배를 무너뜨리는 극단적 개입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의 스토리를 봐도 그렇다. 자기 아들들을 불 속에 넣어 인신 제사까지 드렸던 악한 왕의 대명사로 불렸던 므낫세가 말년에 극적으로 회심한다. 코에 고리를 꿰고 청동 사슬에 묶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게 계기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에 돌아온 므낫세는 바알과 아세라 바로 ‘성공과 번영의 우상’을 없애버린다. 므낫세를 권력과 부의 자리에 놔두지 않으시고 청동 사슬로 묶어버린 건 엄청난 사랑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인간에 대한 열등한 관점이 물질주의를 조장하고, 물질주의는 인간의 신성을 짓밟는다는 점이다. 오로지 확실한 단기적 보상이 중요할 뿐, 희생과 책임마저 혐오스러운 단어로 치부하고, 나의 가치마저 돈으로 치환해 버린다. 기껏해야 돈과 성공에 도취한 삶이 인생이 최종 목적지다. 그러나 하나님 대신 돈을 선택하는 순간, 인간의 영혼은 나락에 추락하고, 돈이 유일한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이 굳게 닫혀버린다. 그렇다면 돈을 추구하는 현대적 광기를 제어할 방법이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열등한 관점을 털어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나락에 추락한 인간 수준을 한껏 끌어올리고, 존재로 대우받는 존엄성을 회복하자. 그러면 돈을 포함한 모든 자원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다음에 필요한 건 ‘사람 나라 질서’와 ‘하나님 나라 질서’의 거대한 반전이다. 나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주소를 옮기는 결단 말이다. 우리 모두 맘몬의 감옥을 부수고,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연결로 들어가자. 하나님은 바로 여기 계시고, 천국의 삶은 지금 내 앞에 있다. / 이은경 변호사(OCC공동체.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사단법인 크레도대표이사)

     2025-06-28  제1546호

  • 대청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천국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목사님, 질문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천국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교회 안에서도 다툼과 분쟁을 겪고 상처를 받는 걸까요?” 청년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이다. 교회에 처음 정착한 이들, 또는 오래 섬기다가 지쳐 쉬고 있는 이들의 공통된 고백이기도 하다.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사랑하지만, 때때로 교회가 가장 힘든 곳이 되어버릴 때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을 나누고자 한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상처 입은 인간들이 함께 살아간다. 성경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연약함을 가진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베드로와 요한, 바울도 예외가 아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선교 동역자였던 바울과 바나바조차 큰 다툼을 겪는다. 서로를 믿고 사랑했던 두 사람이지만,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렸고, 결국 다른 길을 간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조차 완전한 평안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교회란 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함께 자라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다툼이 생길 때, 그것은 교회가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필요한 자들의 공동체라는 증거일 수 있다. 둘째, 교회는 성장이 필요한 미성숙한 ‘자아’들이 부딪히는 현장이다 청년 사역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관계의 갈등은 ‘다름’보다 ‘익숙함’에서 비롯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해왔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안 해?’라는 충돌이 더 많다. 이는 세대를 넘어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다. 20대 청년의 언어와 50대 장년의 언어가 다르고, 기도 스타일이나 예배 문화, 심지어 옷차림도 때로는 갈등의 불씨가 된다. 우리는 신앙인이지만, 여전히 자아의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완전한 성품을 얻는 게 아니다. 성령 안에서 조금씩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존중하고, 자기중심성을 다듬어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 ‘성품 훈련소’다. 갈등이 없는 것이 성숙이 아니라,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고,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게 성숙이다. 셋째, 상처와 갈등조차 하나님은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사실 굉장히 현실적인 고통을 전제한다. 예수님은 제자들 간에 갈등이 있을 것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반복적으로 “용서하라”, “화목하라”,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경험하는 갈등은 때로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깊은 공동체성을 배우게 만든다. 문제는 다툼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그 갈등을 통해 ‘우리가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사랑을 선택하고 있는가’다. 어쩌면 교회에서 겪는 상처는 우리가 ‘진짜 사랑’을 배울 기회일 수 있다. 누군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주시는 게 아니라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신다. 때론 그 상황과 감정이 힘들고 고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이끌어 주신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하지만 천국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함께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다시 일어나 서로를 붙드는 자리가 교회이다. 상처가 없으면 좋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함께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 최재윤 목사(대학청년부)

     2025-06-28  제1546호

  • 성인

    [맛있는 말씀 해설]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맛있는 말씀 해설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요셉에게 새어 나온 고백이다. 대기근을 비웃듯 넘실대는 곳간을 틀어쥔 애굽의 총리가 자신 앞에서 쩔쩔매며 생명을 구걸하는 이방의 객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고 밝히는 자리에서 말이다. 상인에게 팔아넘겨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형들의 마음에서는 잊힐 수 없었던, 일평생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 요셉의 음성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20여 년 만에 형들과 재회하면서 요셉이 복받쳐 오르는 마음을 다잡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던 중 터져 나오는 울음을 붙잡고 그는 급히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형들도 반가웠겠지만, 하나뿐인 친동생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랴! 형 노릇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무심하게 흘러간 세월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을 속 시원히 드러내지도 못한 채 마음을 눌러 감추기도 힘겨웠을 것이다. 이후 장면에서는 형들의 변화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을 이방에 팔아넘긴 형들이 베냐민에게는 어떻게 대하는지,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사셨을지 요셉은 몹시 궁금했을 것이다. 은잔을 훔친 대가로 노예가 될 거라는 총리의 말에 넷째 형 유다가 담대하고 절절하게 탄원하기 시작한다. 한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자신들을 믿고 막내 베냐민을 애굽 길에 동행하도록 허락했는데, 그가 노예가 된다면 아버지에게는 죽기만큼 어려운 일일 거라고 말한다. 유다는 이어 자신이 동생 베냐민을 대신해 종이 되겠노라 간청한다. 베냐민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못하면 아버지를 뵐 낯이 없을 것이라는 형의 절규에 가까운 요청에 요셉은 간신히 참고 있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을 물러가게 한 뒤 드디어 그는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완전히 드러낸다. 큰 소리로 울며 내가 바로 요셉이라며 아버지가 살아계시냐고 형들에게 묻는다. 20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아버지의 안부를 여쭈며 포효하듯 외친 것이다. 37장부터 시작된 요셉의 이야기에는 극적인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그만큼 형들에게 버림받고 이방으로 팔려 간 이후 요셉이 겪은 삶은 고난의 연속 그 자체였다. 그의 현실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히 담긴 채색옷이 벗겨지고 낯설고 시커먼 노예의 옷을 입어야 했다. 급기야 죄수복을 입고 감옥으로 내몰렸을 때는 마치 인생의 문이 닫혀 버린 듯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면서 눈물이 마르고, 희망도 사라지며, 소망을 노래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느껴지는 것은 현실과는 정반대로 그의 중심이 이상하리만큼 평온해 보인다는 것이다. 형들 앞에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신을 드러내면서 전하는 말속에서 그의 지난 20여 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관통해 온 신앙의 중심이 엿보인다.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형들에 대한 한 줌의 원망이나 아쉬움, 한탄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저 자신을 먼저 보내신 거라는 믿기 힘든 고백을 한다. 마치 다윗이 사울의 칼끝을 피해 숨어 지내던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난 것처럼, 요셉도 차디찬 인생의 밑바닥에서 한결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욱 견고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일까!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와 내 가족과 내 민족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요셉을 상상해 본다. 이는 요셉의 일상이었고, 살아갈 이유였으며, 소망의 근거였을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의 삶이 잔잔한 강 같든지,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평안함을 누리는 삶 아닐까? 그것이 무엇이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감사하며 그분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뤄지기를 기도하며 걸어가는 것이다. 요셉이 형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 중심에 곰 삭혀둔 신앙을 고백하듯이,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믿음의 중심이 날로 견고해지기를 소망한다. / 황문규 목사(양재경기A공동체)

     2025-06-28  제15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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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간구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간구 6월 30일~7월 6일 &lt;시편&gt; 84:1~89:37 묵상포인트 1: &lt;시편&gt; 제3권(73~89편)은 다윗의 언약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실패, 그리고 민족의 패망 상황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84~87편에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통과 절망의 상황에서 기억할 분이 누구인지, 진정한 회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묵상하자. 84편: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지은 시다. &lt;시편&gt; 기자는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은 항상 그분을 찬송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있는 사람은 복되다. &lt;시편&gt; 기자는 하루를 살더라도 성전에 거하며 성전 문지기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85편: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지은 시다. &lt;시편&gt; 기자는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포로지에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조국의 암담한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또다시 구하며 부르짖는다. &lt;시편&gt; 기자는 진리가 땅에서 솟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찬양한다. 86편: 포악한 자들에게 둘러싸인 &lt;시편&gt; 기자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다. &lt;시편&gt; 기자는 궁핍한 상황에서 종일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는 위대하셔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분의 긍휼을 구한다. 교만하고 포악한 무리는 그의 영혼을 찾지만, 그는 하나님께 은총의 표적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기다린다. 87편: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노래하는 시다. 그 배경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과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때로 본다. &lt;시편&gt; 기자는 하나님이 시온을 특별히 사랑하시며, 그곳이 열방의 중심이 될 것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근원이시다. 묵상포인트 2: &lsquo;마스길&rsquo;은 &lsquo;교훈시&rsquo;라는 의미다. 88편은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89편은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이다. 같은 마스길이지만, 시의 성격이 매우 다르다. 88편은 개인적 차원의 시고, 89편은 국가적 차원의 시다. 개인의 절망 속에서 진솔하게 부르짖는 기도, 민족의 패망 속에서 굳게 붙드는 하나님의 언약을 묵상하자. 88편: &lt;시편&gt;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시다. &lt;시편&gt; 기자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주야로 부르짖으며 자신의 영혼을 버리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소망이나 구원의 확신이 전혀 없는 이 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89편: 다윗 왕조의 멸망이라는 국가적 절망 속에서 드린 기도시다.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비교할 신이 없으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거룩한 기름을 부으셨고,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lt;시편&gt; 기자는 하나님의 집(성전)을 너무나 사모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해요, 방패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항상 그분과 그분의 집을 가까이하자. ▶암담한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성도에게 있다. 가족 혹은 지체들과 기도제목을 나누고 믿음으로 합심해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하자. ▶고난이 이중 삼중으로 겹칠 때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lt;시편&gt;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묵상하자. ▶나의 기도가 절망과 한숨뿐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분 앞에 토해내는 나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심을 기억하자. ▶&lt;시편&gt; 기자는 민족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서 다윗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아뢰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 주시고 그분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06-28  제1546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그가 속히 오시리라  그가 속히 오시리라 &lt;요한계시록&gt; 22:12~21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도 무엇인가 마음에서 빠져있거나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마련입니다. 지구상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좋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만, 그 이면에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고, 자살률이 높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북유럽을 예로들 수 있습니다. 북유럽은 해마다 UN에서 발표하는 행복지수가 거의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고, 자살률도 높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환경에 거하는 사람들도 무엇인가 빠져있는 것 같은 갈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만 했고, 누릴 수 있었던 낙원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었고, 누려야만 했던 낙원에 대한 향수는 이 세상을 아무리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최초의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에게는 그 향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 개의 나무입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요, 또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금지된 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발전시키고 성숙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나무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그 실과를 먹음으로써 육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로 점점 변화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영원히 존재케 하고, 더 높은 수준의 생명력으로 존재하게 하는 특별한 나무를 창조하셨습니다. &lsquo;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rsquo;라고 지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ldquo;먹지 말라&rdquo;고 하신 금지된 명령을 지키는 반응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ldquo;먹지 말라&rdquo;는 말씀 앞에 서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의지적으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로서 영원히 성장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먹음으로써, 하나는 먹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단계에서 죄를 지을 수 없는 단계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단계에서 타락할 수 없는 단계로 성숙하고, 영생을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두 나무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ldquo;먹지 말라&rdquo;는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만일 생명나무의 실과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상태에서 먹으면 생명력이 악을 향하여 강화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동산에서 쫓아냄으로써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차단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한 인간은 점점 그 생명이 소멸되는 유한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고,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서 타락해서 죽음에 이르렀던 모든 인류가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린 양 되신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온전한 구원과 회복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의 풍요로운 축복 속에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세상의 악이 가득한 한복판에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생명나무 취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 &lt;요한계시록&gt; 마지막 장에는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lt;창세기&gt; 2장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낙원이 회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있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없는 게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금지되었던 생명나무는 다시 나타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라진 이유는 시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절에 &ldquo;저주가 없고&rdquo;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주가 없다는 것은 불순종이 없다는 것이고, 모든 인생의 고통과 불안, 아픔의 원인이 되었던 죄와 불순종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저주가 없는 동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만 존재하는 동산이 나타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며, 타락 이전의 상태보다 높은 수준으로 변화된 동산을 보여줍니다. &lt;요한계시록&gt; 22장에 나타난 동산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시작되어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동산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이루어진 낙원입니다. &lt;요한계시록&gt; 4장과 5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모든 경배가 드려지고, 그분이 그 보좌에서 통치하시며, 심판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앉으신 보좌가 &lt;계시록&gt;의 중심입니다. 이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는 통치의 보좌이며, 심판의 보좌이며,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보좌입니다. 우리에게 예비된 동산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갈 곳,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하는 동산을 잃어버렸지만, 다시 그 동산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동산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lt;계시록&gt; 22장 14절에서 &ldquo;생명나무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문들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자기의 옷을 빠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rdquo;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명나무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lsquo;우리의 옷을 빨았다&rsquo;는 것은 희게 되었다, 의의 옷, 그리스도의 옷,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긴다 &ldquo;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로부터 어떤 것이라도 없애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그의 몫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rdquo;(19절). 생명나무를 취하지 못하고, 거룩한 도성에서 쫓겨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생명나무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행하는 일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ldquo;또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도성에 있고 그의 종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rdquo;(계 22:3). 그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직접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양의 보좌 앞에 누구든지 직접 나아가 섬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lsquo;섬김&rsquo;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또 하나는 활동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보좌 앞에서 예배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한 활동이 있습니다. 천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활동이 있습니다. 섬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일할수록 기쁨이요, 은혜요, 감사요, 찬양입니다.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천국에서는 예배와 일이 분리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영원한 천상에서의 섬김은 어떠한 상처도 없고, 섬길수록 더 깊은 감사와 생명의 능력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린다 둘째,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ldquo;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며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rdquo;(4절). 이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게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대면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깊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게 됩니다. &ldquo;다시는 밤이 없겠고 그들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므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통치할 것입니다&rdquo;(5절). 보좌에 앉으신 분이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과 함께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종으로 쓰는 것에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데까지 참여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통치에 참여합니다. 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와 인간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나라가 &lsquo;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rsquo;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동산을 요한이 보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을 보여준 천사에게 경배를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ldquo;그렇게 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과 함께 섬기는 종 된 자이니 하나님께 경배하라&rdquo;고 야단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자 죄성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만 경배해야 하는데, 그 통로가 된 존재를 자꾸 경배하려 합니다. 요한에게는 천사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예배는 오직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ldquo;예수님이 속히 다시 오십니다&rdquo; 마지막 교훈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속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ldquo;&lsquo;보라. 내가 속히 갈 것이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rsquo;&rdquo;(7절). &ldquo;&lsquo;보라. 내가 속히 갈 것이다. 내가 줄 상급이 내게 있으니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rsquo;&rdquo;(12절). &ldquo;이 모든 것을 증언하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lsquo;참으로 내가 속히 갈 것이다.&rsquo;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우리 편에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lsquo;내가 다시 가는 것&rsquo;입니다. 그것도 속히 오신다고 했습니다. 긴급성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급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긴급한 것을 깨달으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조급한 삶은 도리어 긴급하고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조급하게 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에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긴급성을 깨달으려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lsquo;크로노스&rsquo;와 &lsquo;카이로스&rsquo;입니다. &lsquo;크로노스&rsquo;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조급한 인생을 살면 크로노스에 휩쓸려갑니다. 그러나 &lsquo;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rsquo;를 바라보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있어야 될 카이로스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입니다. 카이로스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될 때 크로노스에 휩쓸리지 않고, 조급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지 못하면 반드시 이 시대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긴급성과 함께 또 하나의 긴급성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 영혼들을 초청해야 하는 긴급성입니다. &ldquo;성령과 신부가 &lsquo;오라&rsquo;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lsquo;오라&rsquo;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십시오&rdquo;(17절). 또 하나의 &lsquo;오라&rsquo;는 초청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ldquo;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rdquo;라는 소망으로 그분의 오심을 바라며 소망하고, 영혼들을 향해서는 &ldquo;목마른 자들이여 오십시오&rdquo;라는 초청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고, &ldquo;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dquo;라고 기도하며 소망하는 영혼은 반드시 생명수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의 신랑 되신 그분을 맞이해야 할 영혼들을 향해 &ldquo;주님이 속히 오실 것이니 당신들도 속히 오십시오&rdquo;라고 초청하는 선교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과 마지막 동산에 함께 들어가야 할 영혼들을 향한 구원의 초청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lt;요한계시록&gt;에 순종하며 사는 이 시대의 삶입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 다시 오심을 사모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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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캠퍼스

    [News] CGN 기독 다큐멘터리 영화‘무명(無名)’개봉 CGN 기독 다큐멘터리 영화&lsquo;무명(無名)&rsquo;개봉 6월 25일 전국 롯데시네마 하루 2회 단독 상영 일제강점기 조선에 복음 전한 일본인 선교사 감동실화 CGN이 제작한 기독 다큐멘터리 영화 &lsquo; 무명(無名)&rsquo; 이 6월 25일(수) 개봉한다. 전국 롯데시네마에서 하루 2회 단독 상영한다. CGN 기독 다큐멘터리 영화 &lsquo; 무명(無名)&rsquo; 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 복음을 전한 두 일본인 선교사의 감동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교회에서 영화관을 단체 대관하면 러닝타임 90분 외에 30분 추가 시간을 제공한다.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lsquo; 영화로 드리는 예배&rsquo; 를 경험할 수 있다. QR코드로 신청하면 된다. 지난 6월 16일(월)에는 잠실 월드타워 롯데시네마에서 VIP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이재훈 위임목사,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배우 조혜련, 권오중 등 약 400명이 참석했다. 기자간담회에는 CGN 전진국 대표와 연출을 맡은 유진주 감독이 자리했다. 유진주 감독은 &ldquo;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예수님 닮은 삶이 무엇인지, 헌신하는 선교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rdquo;면서 &ldquo;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내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어떤 사랑을 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느꼈으면 좋겠다&rdquo;고 말했다. 지난 6월 13일(금)에는 경북 영덕에서 산불 피해 이재민들을초청해특별시사회를개최했다. CGN은 지난 2017년 개봉한 &lsquo;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rsquo; 이후 8년 만에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선보인다. 문의: 02-3275-9303, 9304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여호와께 돌아가자! 7월 14일 오후 2시 &lsquo;714연합기도대성회&rsquo;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올림픽체육관 한국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부르짖는 &lsquo;714연합기도대성회&rsquo;가 오는 7월 14일(월) 오후 2시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올림픽체육관에서 &lsquo;여호와께 돌아가자&rsquo;(호 6:1)를 주제로 열린다. 714연합기도운동본부가 주최하고, 한국로잔위원회, 복음과도시, 위드지저스미니스트리, 한국세계선교협의회, M-bridge가 협력한다. 714연합기도대성회는 세 개 세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세션(오후 2시)에서는 이인호 목사(더사랑의교회),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환영 인사 및 714연합기도대성회 비전 소개, 안광복 목사(청주상당교회) 설교, 정명호 목사(혜성교회), 김용석 목사(서울반석교회)가 기도회를 인도한다. 찬양은 청주상당교회 찬양팀이 한다. 두 번째 세션(오후 4시 15분)에서는 이인호 목사 714 기도 비전 소개, 유기성 목사(위드지저스미니스트리) 설교, 박성수 목사(부산온누리교회), 이건호 목사(순복음대구교회)가 기도회를 인도한다. 찬양은 청주상당교회 찬양팀이 한다. 세 번째 세션(오후 6시 50분)에서는 이재훈 목사가 제4차 로잔대회와 714연합기도대성회를 소개하고, 최병락 목사(강남중앙침례)가 말씀을 전한다. 기도회는 문대원 목사(대구동신교회), 이신사 목사(남군산교회), 이해영 목사(성민교회), 이인호 목사(더사랑의교회)가 인도한다. 찬양은 강남중앙침례교회 찬양팀이 한다. 714연합기도대성회 참가신청은 하단 QR 코드로 하면 된다. 온누리교회 성도 1천 명과 안내 봉사자를 모집한다.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참가자 물품 배부, 착석 안내, 식사 안내, 해산 및 뒷정리 등을 한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는 서빙고, 양재 권사회와 여성사역에서 섬길 예정이다. 타 교회 성도는 714연합기도운동본부 홈페이지(714praymov.org)에서 참가신청하면 된다. 문의: 02-3215-3313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하나님의 사람 요셉처럼! 7월 5일~8월 10일 &lsquo;차세대 여름사역&rsquo; 올 여름에는 요셉 이야기다. 온누리교회 차세대 여름사역이 하나님의 사람 요셉 이야기를 중심으로 7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이어진다. 차세대 각 부서의 눈높이에 맞춰 요셉의 삶을 따라가며 하나님의 뜻과 꿈, 인도하심을 깊이 체험한다. 예수님의꿈아이(영아부, 유아부, 유치부)와 꿈이자라는땅(유년부, 초등부, 소년부)은 &lsquo;하나님의 꿈을 입은 요셉&rsquo;을 주제로 7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온누리교회 각 캠퍼스 본당 및 외부에서 여름사역을 한다. &lsquo;꿈을 주신 하나님&rsquo;, &lsquo;함께하신 하나님&rsquo;, &lsquo;인도하신 하나님&rsquo; 등 과별주제로 성경 퀴즈, 적용 놀이, 체험활동 등을 한다. 파워웨이브(중고등부)는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lsquo;His Plan&rsquo;을 주제로 외부에서 찬양과 기도, 강의 중심의 여름캠프를 한다. 문의: 02-3215-3521 / 홍하영 기자 서빙고 우선주차증 전면 교체 트롤리카드 신규 발급 서빙고온누리교회가 우선주차증 제도를 개선하고, 실수요자 중심의 주차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주차증 전면 교체, 트롤리 주차증을 신규 발급한다. 그동안 우선주차증이 오랜 기간 사용되며대상 기준이 불명확해질 수 있다는 점과 기존 흰색 트롤리카드만으로는 트롤리 주차 가능차량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 등을 개선한다. 이에 따라 우선주차증에는 발급일로부터 유효기간(1년)을 부여하고, 매년 갱신하도록 할 예정이며, 트롤리 주차 이용자에게는 주차증을 신규 발급해 차량을 보다 정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우선주차증 및 트롤리카드는 6월 21일(토)부터 신청 가능하며, 6월 28일(토)부터 순차적으로 수령할 수 있다. 문의: 02-3215-3220 성도님들께 알립니다 지난 2025년 6월 18일(수) 새벽 5시 53분경,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로 송출하던 새벽기도회 영상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따라 긴급하게 관련 영상을 내리고, 원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구체적인 영상 사고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온누리교회 1부 새벽기도회가 이어지던 5시 53분경 약 20초 동안 인공기 이미지와 북한 국가로 추정되는 음악이 재생되었습니다. 이후 영상은 자동으로 복구돼 정상적인 예배 장면으로 돌아왔지만, 온누리교회는 즉각 예배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사태 파악에 나섰습니다. 온누리교회 내부 점검 결과, 장비 자체의 오작동보다는 외부 해킹 또는 계정 침입을 통한 의도적 조작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경찰과 유튜브 보안팀 등 관계 기관과 협조하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사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대응 방안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송출 시스템에 대한 보안 점검 절차를 새롭게 수립하고, 관리자 계정의 접근 권한 및 비밀번호 정책을 강화하는 등 실무적 조처를 했습니다. 이번 영상 사고를 계기로 온누리교회는 예배의 경건함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모든 실시간 송출 환경에 대한 전면적인 보안 체계를 재정비하고, 더욱 철저한 사전 대응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입니다. / 미디어본부

     2025-06-21  제1545호

  • 칼럼

    [신앙에세이] 편견을 넘어선 순종 신앙에세이 편견을 넘어선 순종 우리는 살아온 문화적 배경과 개인의 경험에 따라 자연스럽게 &lsquo;편견&rsquo;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기를 포기할 때 편견으로 상대를 쉽게 판단하게 된다. 상대가 내린 선택의 정황과 맥락을 숙고하는 일은 품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판단은 쉽지만 사랑은 어렵다. 분리는 쉽지만 하나 됨은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 같다(요 17:23). 얼마 전,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를 묵상하며 받은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여러 기적을 일으켰다. 8년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애니아의 중풍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하고,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믿음의 선포로 살려냈다. 베드로는 신앙으로 불치병과 죽음의 문제를 단번에 극복했다. 이어지는 &lt;사도행전&gt; 10장에서 베드로가 낮 12시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한다. 당시 유대 전통에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다. 베드로 역시 그 관습을 따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믿음 좋고, 능력도 있으며,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지붕에서 기도하던 중에 베드로가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온갖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담긴 바구니가 내려왔다. 하나님이 바구니를 보고 있는 베드로에게 &ldquo;일어나 잡아 먹어라&rdquo;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ldquo;말도 안 됩니다. 저는 불결하고 더러운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rdquo;(행 10:14). 믿음 좋고, 능력도 있으며, 기도도 많이 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다. 성경은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경험에서 형성된 편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세 번이나 거절했다. 그는 믿음과 능력으로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단번에 극복했지만, 편견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세 번에 걸친 경고와 설득이 필요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베드로의 편견에는 율법에 대한 충성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율법에 순종하려는 그의 진심이 편견이 되었을 때 율법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잘하고자 하는 진심을 가지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편견은 우리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준행자가 아닌 심판자로 만든다(약 4:11).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인간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실감하며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lsquo;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자리는 편견을 넘어서 순종하는 자리일 수도 있겠다&rsquo;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모르게 품고 있는 편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편견이란 &lsquo;그것이 편견인지 모른다는 점&rsquo;에서 스스로 인식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이 말씀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ldquo;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rdquo;(롬 13:9). 편견을 넘어서는 것은 우리가 &lsquo;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rsquo; 가능하다. 편견은 우리를 심판자로 만들어 서로 판단하게 하고 분리시킨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준행자로 만들어 서로 관용하고, 연합하게 한다. 편견은 예수님 앞에 선 나의 이웃을 &lsquo;불결하다&rsquo;면서 그가 깨끗해지면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을 달게 한다. 반면 사랑은 예수님 앞에 선 나의 이웃을 존귀하게 대하고, 그의 부족함보다 크신 예수님의 은혜를 믿고 중보하게 한다. &ldquo;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rdquo;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의 모든 편견에서 자유롭기를 소망한다. / 이호준 목사(양재 차세대 파워웨이브)

     2025-06-21  제1545호

  • 성인

    [맛있는 말씀 해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맛있는 말씀 해설 &ldquo;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rdquo;(빌 4:13).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면접을 앞두고 이 말씀을 붙든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투자설명서를 내밀며 &ldquo;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rdquo;고 확신한다. 마라톤 출발선이나 운동경기에서 유니폼에 이 말씀을 새기기도 하고,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녀의 수능시험이나 유학 준비를 앞두고 이 구절을 붙들고 기도한다. 이 모든 장면은 한 가지 공통된 인식을 보여준다. &lt;빌립보서&gt; 4장 13절이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lsquo;성공&rsquo;과 &lsquo;자기 성취&rsquo;를 위한 응원 구절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아름다운 고백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ldquo;모든 일에서 성공하게 해주신다&rdquo;는 뜻은 아니다. &lsquo;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rsquo;는 식의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lsquo;성공 신앙&rsquo;의 근거로 사용되기엔,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훨씬 더 깊고 오히려 정반대의 맥락에 서 있다. 본문을 담고 있는 빌립보서 4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지금 어떤 외적인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핍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족하는 삶의 태도를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11절에서 &ldquo;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rdquo;라고 말하며, 풍요나 궁핍, 배부름이나 배고픔에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안을 말한다. &ldquo;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rdquo;(빌 4:11) 그러고 바로 이어지는 고백이 &ldquo;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rdquo;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lsquo;모든 것&rsquo;은 &lsquo;원하는 바를 다 이룬다&rsquo;는 뜻이 아니다. 사실 바울은 단지 &lsquo;불편한 상황&rsquo;을 이겨냈던 것이 아니다. &lt;고린도후서&gt; 11장을 보면 그는 매를 맞고, 돌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에 빠지고, 굶주리고, 헐벗고, 강도와 동족 및 거짓 형제의 위험에 시달리며, 죽을 뻔한 일을 여러 번 겪는다. &lt;빌립보서&gt;를 쓸 당시에도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ldquo;모든 것을 할 수 있다&rdquo;는 이 말은, 내가 원하는 일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주어진 삶을 감당할 수 있다는 고백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영웅적 성공이 아니라, 고통과 결핍, 실패의 현장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의 외침인 것이다. 본문의 중심은 &lsquo;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rsquo;에 있지 않다. 핵심은 &lsquo;능력 주시는 자&rsquo;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약함 속에서도 주시는 은혜의 힘을 말하고 있다. &lsquo;모든 것을 할 수 있다&rsquo;는 이 말은 바로 그 능력 주시는 주님으로 인해, 오늘의 괴로움도, 내일의 불확실함도 감당해낼 수 있다는 깊은 신앙의 고백이다. 우리 역시 본문을 &lsquo;성공의 보증서&rsquo;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시련과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외울 때 그 고백은 &ldquo;내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해주소서&rdquo;라는 주문이 아니라 &ldquo;주님, 어떤 상황이든 제가 믿음으로 살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rdquo;라는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lsquo;무엇이든 이룬다&rsquo;가 아니라, &lsquo;무엇이든 감당하게 하신다&rsquo;는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ldquo;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rdquo;(빌 4:13) 바울의 이 고백이 힘들고 지친 일상 속에서 우울하거나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길 바란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2025-06-21  제1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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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 초대하기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 초대하기 6월 23일~6월 29일까지 &lt;시편&gt; 78:40~83:18 묵상포인트 1: 죄인 된 인간은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 존재를 의심하려는 본성이 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은혜를 잊은 이스라엘과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랑을 묵상하자. 78편: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듭 반역하고 시험해 하나님을 노하시게 했다. 기이한 표적과 징조로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양 떼같이 인도해 약속의 땅에 거주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도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섬겼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성막에서 떠나시고 그들을 대적에게 넘기셨다. 하지만 자기 백성의 죽음과 고난을 보시고 다시 일어나 대적을 물리치셨다. 하나님 사랑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묵상포인트 2: 절망의 상황에서 성도는 기도해야 한다. &lt;시편&gt; 기자는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을 초대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명예와도 연결된다. 절망의 상황에서 시편 기자가 드린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지 묵상하자. 79편: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되고 파괴될 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지은 시다. &lt;시편&gt; 기자는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성전이 더럽혀지고 백성이 수치를 당한 일을 한탄한다. 그는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해 자신들을 구원하시길 간구한다. 80편: 고난의 상황에서 회복을 간구하는 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에 심으신 포도나무와 같았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번성했으나 하나님은 그 담을 허셔서 대적에게 멸망당하게 하셨다. 시편 기자는 주님 얼굴의 광채를 비춰 구원하시길 간구한다. 묵상포인트 3: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이유다. 불의한 재판관으로 인해, 강한 원수로 인해 &lt;시편&gt; 기자가 믿음의 입을 열어 드린 기도는 무엇인지 묵상하자. 81편: 이스라엘의 주요 절기에 부르는 축제의 노래다. &lt;시편&gt; 기자는 백성을 불러 모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또한 과거 불순종을 상기시키며 우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82편: 통치자와 재판관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약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그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어둠에서 행하니, 땅의 모든 기초가 흔들린다. &lt;시편&gt; 기자는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길 간구한다. 83편: 국가적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길 간구하는 시다. &lt;시편&gt; 기자는 사사 드보라와 기드온 때처럼 대적을 물리쳐 주시길 간청하며, 지존하신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길 소망한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반복하는 영적 기억 상실증을 경계하자. 구원받은 성도답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길 힘쓰자. ▶&lt;시편&gt; 기자처럼, 내가 처한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을 초대하는 기도를 드리자. ▶통치자와 재판관이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땅을 바르게 이끌도록 중보하자. ▶하나님이 내게 주신 힘과 권력은 연약한 자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자. ▶세상의 강한 자들 사이에서 그들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06-21  제1545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새 하늘과 새 땅  [주일강단] 새 하늘과 새 땅 &lt;요한계시록&gt; 21:1~8, 22~27 /이재훈 위임목사 흔히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데, &lt;요한계시록&gt;에서는 &lsquo;천국이 우리에게 온다&rsquo;고 합니다. 또한 &lsquo;천국&rsquo;이라는 단어 대신 &lsquo;새 하늘과 새 땅&rsquo;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으로 귀결됩니다. 성경에서 약속된 미래는 죄로 망가져 있고, 무너져가는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인데, 심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ldquo;그때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lsquo;보아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rsquo; 그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lsquo;이 말들은 신실하고 참되니 너는 기록하여라.&rsquo; 그는 또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lsquo;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 내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줄 것이다&rsquo;&rdquo;(5~6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혼돈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심판과 구원을 통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목적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ldquo;다 이루었다&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을 때 마지막 종말에 이루어질 &ldquo;다 이루었다&rdquo;는 선언을 미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만물이 새롭게 되는 역사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lt;계시록&gt;에서 &ldquo;다 이루었다&rdquo;는 선포가 확실하게 성취된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 세대가 중복되는 현재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의 때를 확대해 보면 두 세대가 중복되는 현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ldquo;다 이루었다&rdquo;고 말씀하시고 부활 승천하셨고,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는 그 기간에 이미 옛 시대는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 옛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의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만물이 새롭게 될 때 &ldquo;다 이루었다&rdquo;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종말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안에 형성되는 종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완성되는 종말,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종말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두 시대가 중복되는 이 기간은 긴장의 기간이요, 고난의 기간이요, 싸움의 기간입니다. 이미 다 이루셨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기간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존재로서 마지막 날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아야 할 기간입니다. 또 두 시대가 중복되는 기간은 선교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완결될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옛 시대의 세상 속에 살지만 새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영원에 속한 사람으로서 옛 시대에 묶여있는 영혼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도록 헌신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어느 날 두 시대의 중복이 끝날 것입니다. 옛 시대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넘어가지 못한 모든 것은 무서운 죽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회복 &ldquo;&lsquo;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일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기뻐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의 성읍으로 창조하고 그 백성을 즐거움의 백성으로 만들겠다&rsquo;&rdquo;(사 65:17~18).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고, 이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lt;요한계시록&gt;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 변화를 설명하는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회복입니다. &ldquo;그리고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lsquo;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처음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rsquo;&rdquo;(3~4절). &ldquo;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rdquo;(7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ldquo;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 하나님이시며, 나는 그의 백성인가?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인가?&rdquo;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는 이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끊어져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21장 7절에서 &lsquo;이기는 사람&rsquo;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겼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의미입니다. 악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 도시의 회복 둘째, 하나님 나라 도시의 회복입니다. &ldquo;또 나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남편을 위해 화장한 신부처럼 준비돼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rdquo;(2절). &ldquo;그러고 나서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이끌어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거룩한 도성, 곧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이 빛은 수정처럼 빛나는 벽옥과 같았습니다&rdquo;(10~11절). 거룩한 도성,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셨는데, 마지막에는 인류에게 새 예루살렘 도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도시에 모여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만들었지만, 하나님이 도시를 구속하셔서 낙원의 축복을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도시이자 동시에 낙원이며, 성전입니다. 이제 큰 도성 바벨론은 멸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해 주신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의 회복, 영토의 회복, 도시의 회복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시,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타락한 음녀이지만, 새 예루살렘은 순결한 신부입니다. 바벨론은 마귀들이 드나드는 장소이지만,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바벨론의 화려함은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데서 나왔지만,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애통과 신음과 슬픔으로 가득 찼지만, 새 예루살렘은 기쁨과 빛으로 충만합니다. 바벨론은 세상 나라들을 타락시켰지만, 새 예루살렘은 나라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화해시킵니다.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폭, 높이가 1만2천스타디온이라고 합니다.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2천2백km인데, 당시 로마 전체 영토와 얼추 비슷한 크기라고 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사각형으로 묘사한 것은 고대 사람들이 완벽한 도시를 상상할 때 사각형으로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완벽한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도시, 더 축복된 도시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임재와 통치의 회복 셋째, 하나님 나라 임재와 통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ldquo;나는 도성 안에 성전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도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도성을 비추며 어린양께서 도성의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rdquo;(22~23절). &ldquo;그들이 나라들의 영광과 존귀를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돼 있는 사람들 외에 모든 속된 것과 가증한 것과 거짓을 행하는 사람은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rdquo;(26~27절).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lt;요한계시록&gt; 21장 이전에는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하늘로 제한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고,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천사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21장 이전에는 보좌에 앉으신 분은 하늘에만 계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땅에 계시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좌에 계신 분이 하늘에 계시지만, 이 땅에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배자들 그리고 핍박받는 교회에 숨어계시듯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21장에 들어와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통치가 땅으로 내려오심으로써 그분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하늘과 땅의 간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21장 초반부에 &ldquo;장막이 함께 하셨다&rdquo;는 것은 단순히 장소 의미가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 보좌 통치가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통치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그로 인해서 옛 시대에 이 세상에 존재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바다가 없습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슬픔과 눈물이 없습니다. 애통이 없습니다. 거짓과 부정과 우상숭배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다른 발광체와 빛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도성을 비추고, 어린 양이 도성의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닫힌 문이 없고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모든 악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기에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고, 거짓이 없고, 부정이 없고, 어둠도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세워집니다. 우리도 육신의 몸을 입을 때와 다른 차원이 됩니다. 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지만, 만물이 새롭게 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합니다. 하나님이 새 창조를 이루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어린 양의 문화가 짐승의 문화를 대신하고, 생명의 문화가 죽음의 문화를 대신하고, 평화의 문화가 불안과 두려움의 문화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분의 백성들이 회복되고, 그분의 도성이 회복되고, 그분의 통치가 온전히 회복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끊어내며 끝까지 죄 가운데 있는 이들을 심판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십니다. 여러분,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말씀하는 책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을 알고,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세상 가운데 담대합니다. 휩쓸리지 않습니다. 이기는 자로 끝까지 승리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06-21  제1545호

  • 부흥집회

    [2025 마리아행전 '평강의 복'] 메시지 6월 11일 수요일 평강에서 평강으로 &lt;이사야&gt; 26장 3절 / 이훈 목사 하나님이 &ldquo;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키시겠다&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은 마음의 뿌리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상황과 감정에 따라 흔들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탁받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평화가 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을 우리를 통해서 흘러나오도록 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도 먼저 복을 주시고, 그 복이 아브라함을 통해 전해지고 흘러가게 하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삶의 문을 열어 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ldquo;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rdquo;라고 말합니다. 내가 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ldquo;네&rdquo;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에는 평강의 복을 누리며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평강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첫째, 불안을 양식 삼지 말아야 합니다. 불안과 염려가 계속되면 자꾸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안을 주변 사람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ldquo;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평화를 훼손하는 것에서 마음의 거리를 둬야 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뺏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황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환대를 받거나 학대받는 그 어떠한 상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지닌 채 흔들리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상황보다 우리를 흔들어 놓은 게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배신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배신한 이들에게 기대가 없으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신실하게 변화시켜 가실 거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평화를 훼손하는 상황과 사람에게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가 마음 붙일 수 있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과 평화를 약속하시면서 &ldquo;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rdqu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강의 복을 누리고, 그 복을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나타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마음 깊이 배우고,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상황과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불안한 사람들이 와서 머물며 쉼을 얻고,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6월 12일(목) 평강의 길, 짐과 쉼 &lt;마태복음&gt; 11장 28~30절 /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강을 누리지 못할까요? 첫째, 예수님이 주신 평강의 약속 위에 살지 않고, 나의 기분, 상황,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내 느낌보다 훨씬 정확하고, 예수님의 약속이 내 판단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강의 약속 위에서 사는 법을 매우 의도적, 지속적,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둘째, 약속하신 평강의 의미를 잘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약속하실 때 &ldquo;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rdquo;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약속하는 평강은 가짜 평안입니다. 내 필요와 욕구가 채워져야만 누릴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내 욕망과 자아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영원한 평안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채워집니다. 예수님으로 채워지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참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ldquo;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 이 말씀은 수고할수록 무거워지는 짐, 곧 욕망의 짐, 죄의 짐, 자책의 짐, 의심과 두려움의 짐, 원망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짐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보다 나의 판단과 감정, 상황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짐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우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분 곁에만 있으면 우리는 영원히 걱정할 문제가 없습니다. 삶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가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완벽히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짐을 가지고 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가져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문제를 풀어놓고 기도하지만, 기도가 끝나면 다시 그 문제를 짊어지고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ldquo;나의 멍에를 메라&rdquo;고 말씀하십니다. 짐을 내려놓으라고 부르셔놓고는 짐을 지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것에 중독되어야 하는 것처럼, 더 가볍고 좋은 예수님의 멍에를 지면 자연스럽게 짐을 내려놓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된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신 복음과 그분의 약속 위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강을 누리고, 그 평강의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기를 축복합니다. 6월 13일 금요일 고요하고 평온하게 &lt;시편&gt; 131편 / 이재훈 위임목사 &lt;시편&gt; 131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의 의미를 우리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힘이 바로 &lsquo;평강&rsquo;입니다. 평강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죄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lsquo;교만&rsquo;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의 문제를 모르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교만이 눈을 가려 하나님의 평강을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교만을 &lsquo;눈이 높은 것&rsquo;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시 101:5, 18:27). 교만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을 제거하는 게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한 가장 큰 과제입니다.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받고 싶어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위대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을 극복한 다윗은 &ldquo;내가 너무 큰일과 벅찬 일을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rdquo;라고 고백합니다(1절). 다윗은 큰일을 하려고 나선 적이 없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을 큰 일로 여기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부터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벅찬 일들을 맡기십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그가 왕이 되기 전에 하나님이 고통의 세월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다윗 안에 있는 교만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 고통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교만을 끊어 낸 영혼이 영원히 평강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lsquo;젖 뗀 아이&rsquo;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물질, 사랑하는 가족, 나의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고통스럽지만 통과하면서 누리는 평강이 있습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젖을 뗌으로 경험하는 평강이 있습니다. 첫째,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으로 평강을 누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임재로 인해서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평강이자 예배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교만을 못으로 박지 않으면 우리 영혼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젖을 떼는 관계를 통해서 이제는 다른 양식을 먹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젖만 먹는 단계의 신앙은 흔들리기 쉽습니다(히 5:12~14).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연단된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서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젖 뗀 아이와 같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나의 행복이 되고, 의의 말씀으로 연단된 분별력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2025-06-14  제15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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