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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에게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에게 11월 3일~10일까지 &lt;디모데후서&gt;2:1~4:22, &lt;여호수아&gt;1:1~9 묵상포인트 1: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좋은 리더십이 되길 바랐다. 바울의 권면에서 사역자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진리에서 벗어나거나 순종하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묵상하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자세로 &lsquo;그리스도의 좋은 병사,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rsquo;의 사례를 든다. 바울은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최선을 다했다. 고난을 참고 견디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라고 한다. 금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자기를 깨끗하게만 하면 주인이 요긴하게 사용하는 귀한 그릇이 된다. 또한 바울은 청년의 정욕과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피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한다. 묵상포인트 2: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죽음(순교)이 가까운 때에 쓴 마지막 편지가 디모데후서다. 말세를 사는 모든 성도에게 바울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인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마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묵상하자. ▶말세의 특징은 &lsquo;자기중심성&rsquo;이다. 바울은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만 있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한다. 그리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한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한 일에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다. 때가 이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사욕을 따를 것이다. 사역자는 모든 일에 신중하고 고난을 받으며 자신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킨 바울에게, 그리고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님이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속히 올 것과 가죽 종이에 쓴 책도 가져올 것을 디모데에게 부탁한다. 묵상포인트 3: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에 관해 기록한 역사서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심히 두려웠을 것이다. 맡겨진 사명 앞에서 두려워하는 지도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당부와 격려가 무엇인지 묵상하자.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이 발로 밟는 모든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다. 또한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하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명하시며,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하리라고 격려하신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전투에서 승리하는 병사는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자. ▶악하고 허탄한 말은 공동체의 믿음을 무너뜨린다.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와 교회를 견고히 세우자. ▶의로우신 재판장이 임하실 그날에 부끄럽지 않도록 &lsquo;자기중심성&rsquo;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자. ▶바울처럼, 마지막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잘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살아가자.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당부하셨다.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는 힘은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하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10-31  제1562호

  •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3일(수) ‘교회, 선교로 꽃피우다’ 10월 23일(목) &lsquo;교회, 선교로 꽃피우다&rsquo; 주제강의 7 교회, 선교의 촉매제 /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교회는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lsquo;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rsquo;입니다. &lt;사도행전&gt;에 나타난 교회가 이에 해당합니다. 교회가 선교적 소명을 잃으면 두 번째 유형, &lsquo;현상 유지에 급급한 교회(Maintenance Curch)&rsquo;가 됩니다. 생존을 위해 존재하고, 소명을 잃어버린 자신만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역사가 오래될수록 세 번째 유형인 &lsquo;박물관 같은 교회(Museum curch)&rsquo;가 됩니다. 교회 존재 자체가 박물관처럼 되버리고, 모든 의사결정이 과거에 머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헌신, 도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헌신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물관 같은 교회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선교가 교회의 심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지만 양식을 먹고 호흡만 한다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선교가 영혼의 운동입니다. 교회를 있게 한 것은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선교하시는 게 아니라, 그분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기능이 필요합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로 부르셨습니다. 정기적인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배 자체로만 존재하면 소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둘째, &lsquo;제자 훈련&rsquo;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셋째 &lsquo;공동체&rsquo;입니다. 과거의 목회 패러다임에서 목회자의 주요 일과는 &lsquo;심방&rsquo;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방, 즉 공동체의 만남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을 촉진하고 형성시키는 교회를 가리켜 우리는 &lsquo;선교적 교회&rsquo;라고 말합니다. 선교에 헌신한 교회는 예배, 제자 훈련, 공동체가 살아 있습니다. 교회가 &lsquo;선교의 촉매&rsquo;라는 것은 세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와 선교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독생자와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둘째, 교회의 선교는 세상에 복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존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험하는 공동체입니다. 생존이 교회의 최고 목표가 되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이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계속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8 변화에 잘 대응하는 선교 / 넬슨 제닝스 박사(GMLF 이사장) 그동안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새로운 상황과 도전, 변화에 잘 적응해서 선교를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이 그를 이집트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이집트 사람처럼 변해갔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가 이집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바로의 왕가에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위대한 아내를 맞이했고, 위대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신약의 베드로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성령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변화를 경험하며 적응했고, 그 속에서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우리도 변화 속에서 씨름하며 기도하고, 적응하며 성장하고, 배웁니다. 온누리교회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지속해 왔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온누리교회는 그 변화에 반응해서 이 땅에 온 중국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중국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1990년 중반부터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온누리교회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변화한 환경에서 함께 기도하고 적응하며 선교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야 할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lsquo;온누리교회가 대형교회로서 어떻게 반응하느냐&rsquo;입니다. 온누리교회는 대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아갔습니다. &lt;사도행전&gt;의 역사를 계속 써가자는 &lsquo;Acts29 비전&rsquo;은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lsquo;온누리교회만이 &lt;사도행전&gt;을 이어간다&rsquo;는 외부의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lsquo;교만과 안주함&rsquo;의 도전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경제는 안정적이고,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이 자만과 안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계속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유지한 채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lsquo;다양한 민족의 교회와의 동역&rsquo;입니다. 다양한 민족의 교회와 함께 사역하는 것은 도전입니다. 가나, 일본, 인도네시아 교회가 한국과 비교해서 연약해 보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동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화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배우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배우고 성장하십시오. 주제강의3 글로벌 선교 협력 / 유병국 선교사(WEC) 지금 우리 눈앞에 마지막 남은 선교지들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어떤 곳보다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복음에 저항하고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꾼과 전략적인 연합이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서구 교회가 심각한 선교사 인력 감소를 겪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선교단체 WEC의 통계를 보면, 서구 선교사 수가 불과 10여 년 만에 70%가량 줄었고,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도 50%가량 감소했습니다. 특히 한국에 장로교를 처음 전한 선교사들을 배출했던 &lsquo;미국 북장로교 선교회&rsquo;마저 올해 3월 말 문을 닫았습니다. 남아 있던 선교사 57명 중에서 54명이 사역을 지속할 수 없게 된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한국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2010년 3만 명에 가까웠던 한국 선교사가 현재 2만 1천여 명으로 8천 명가량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히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만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들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베트남은 공산국가이지만 3천여 개 교회가 있고, 200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전체 국민 70%, 케냐는 1,800만 명이 개신교인입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에도 2,500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에 하나님이 세워 놓은 일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WEC가 이 지역에서 선발한 선교사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고 헌신적이며, 이미 다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현지에 바로 적용되는 효율적인 인력입니다. 그런데 현지 교회의 경제적 여건상 월 200불에서 400불 정도의 적은 선교비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많지만 경제력이 부족한 곳이 있는 반면, 한국이나 서구 교회는 경제력은 있지만, 보낼 일꾼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생산 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lsquo;글로벌 경영&rsquo;을 하듯이, 선교 역시 &lsquo;글로벌 선교 협력&rsquo;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WEC와 같은 선교단체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선교사를 선발하고 훈련해서 파송하고, 한국이나 서구 교회가 이들에게 부족한 선교비를 지원한다면 어떨까요? 국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글로벌 선교 협력입니다. 어떤 나라의 일꾼이든 힘을 모아 마지막 남은 선교지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저녁집회 3 선교사역 완성(Finishing the task) &lt;마태복음&gt; 24장 14절 / 이재환 선교사(컴미션) 저는 하용조 목사님과의 만남을 평생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비전, 사랑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lsquo;2천1만 비전&rsquo;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비전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 현장에 계신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을 보면 감개무량합니다. 제가 영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lsquo;Finished Task&rsquo;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교라는 과업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선교를 빨리 끝내라니,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서양 사람들이 선교에 대한 굉장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는 끝내야 하는 사역입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끝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끝내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끝내야 할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ldquo;&hellip;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rdquo;(마 28:1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교회는 이 사명을 반대하거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 사명을 이루는 데 게을러서도 안 되고, 그만두어서도 안 됩니다.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명령이요,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과 교회가 현실의 기준을 잣대로 &lsquo;선교를 할 수 있다, 없다&rsquo;를 판단합니다. 현실은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보내는 능력을 주시든지, 가는 용기를 주시든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ldquo;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rdquo;(마 24:14). 여러분,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이유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죽어서 가는 천국입니까? 아니면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올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저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lsquo;킹덤 빌더&rsquo;라고 믿습니다. 온누리교회가 한 번 더 하용조 목사님이 가르치신 선교의 비전과 열정을 가지고 선교의 자리로 나아간다면, 저는 21세기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믿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게 하는 일에 우리가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2025-10-25  제1561호

  •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10월 22일(수) &#39;교회, 문화로 퍼져가다!&#39; 주제강의 4 교회, 문화의 변혁자 /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목표 철학 다섯 번째는 &lsquo;그리스도의 문화를 심는 교회&rsquo;입니다. 故 하용조 목사님이왜 이 항목을 넣으셨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온 세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하고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보면, 교리적인 문제를 더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의 중심,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문화적인 요소입니다. 문화는 어떤 시대의 예술적인 영역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지난 세기 서구 문화의 중심에는 분명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사회에는 문화는 남았지만, 복음의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한때 교회가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교회가 창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문화에 순응하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문화의 관계는 기독교 역사 내내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주의자와 율법주의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실 복음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형성된 문화를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니버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lsquo;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Christ against Culture)입니다. 이는 세속 문화는 악한 것이므로 교회는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관습, 제도 모든 것을 거부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 삶만 강조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일치(Christ of Culture)입니다. 모든 문화에는 복음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영지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위의 문화(Christ above Culture)입니다. 그리스도의 문화는 세상 문화보다 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입장이 이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입니다. 양쪽이 긴장 관계에 있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충돌된다는 마틴 루터의 입장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입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문화 영역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lsquo;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문화 변혁자&rsquo;로 창조하셨습니다. &lsquo;번성해 가득함으로 다스리라&rsquo;는 통치를 통해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8).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초대 교회는 세상 문화를 먼저 바꾸겠다고 하지 않고, 공동체 자체가 세상 문화와 다르게 변화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의 동반자, 추종자가 아니라 선구자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회가 문화의 변혁자가 되려면 기관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어야 합니다. 급진적 사회 변화를 변혁의 기회로 봐야 합니다. AI를 중심으로 기술 혁명이 일어나는 지금이 문화 변혁의 기회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더하는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변화시켜 가기를,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5 AI시대와 교회 /김경훈 집사 글쓰기, 고객 상담, 코딩 자료 분석, 이미지 생성과 편집, 광고, 자율주행 등 AI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우리를 돕거나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 &lsquo;속도의 유혹&rsquo;입니다. AI는 클릭 한 번이면 많은 것을 해줍니다. 그런데 그 속도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랑과 절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AI에 맡기고, 어떤 것을 직접 할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행사 이름을 정하거나, 포스터 제작 등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한 기도문, 설교문, 간증문을 성령님 없이 AI만 가지고 작성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의 말처럼 될 수 있습니다. &lt;고린도전서&gt; 13장 1~3절 말씀처럼,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아 사역에 AI를 사용한다면 성령님이 선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둘째, &lsquo;신뢰의 기준&rsquo;입니다. AI의 답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데이터의 산물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적이지 않은 자료가 많기에 AI가 이것들을 학습한다면 잘못된 답을 낼 위험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적인 콘텐츠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AI시대일수록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성경 통독, 성경공부모임 등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삶 속에 깊이 심고, 말씀을 기준으로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lsquo;관계의 경제성&rsquo;입니다. AI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사람보다 AI와 관계 맺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과 감정의 비용이 들지만, AI는 내가 원할 때만 만나고 언제든 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연인, 멘토, 상담사, 심지어 목회자 역할까지 AI에게 기대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공동체성과 가정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 안에서 자라도록 지으셨습니다. 교회는 함께 먹고 마시며, 얼굴을 마주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지속해야 합니다. AI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선교의 접점도 줄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AI가 줄 수 없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인내와 회개, 교제를 어떻게 선교에 접목할지 고민해야 하고, 전도의 접점을 확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넷째, &lsquo;죄의 확장&rsquo;입니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교만도 함께 확대합니다. 하나님은 &ldquo;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7). 우리는 기술이 성공하면 교만해지고, 실패하면 불안해집니다. 창조주를 떠났던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중 하나인 AI조차 두려워합니다. 결국, AI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인간의 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I시대 교회는 죄의 현실을 더욱 직시하고, 세상에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기술 속에서도 모든 죄에서 우리를 끊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님과 함께 AI를 성경적으로 활용하고, AI로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를 기도합니다. 주제강의 6 폭력, 고통, 두려움의 세계 문화 속의 선교 / 크리스토퍼 라이트 박사(Christopher Wright) 선지자 하박국은 역사적으로 끔찍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시대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의와 거짓, 폭력과 전쟁이 난무했습니다. &lt;하박국&gt;을 통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섯 가지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lsquo;하나님의 일하심을 찾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보는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께 &ldquo;제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합니까?&rdquo;(합 1:2~4)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ldquo;다른 나라들을 잘 살펴보아라. 나는 네가 싫어하거나 믿지 못할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rdquo;(합 1: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일으켜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주권을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lsquo;믿음으로 사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ldquo;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dquo;(합 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구원의 믿음을 넘어 순종과 신뢰로 성장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며,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이 세계의 난무하는 폭력의 문화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lsquo;탄식과 저항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악에 저항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고 탄식하며 항의했습니다. 우리 역시 불의, 거짓, 고통을 영속시키는 자들을 대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강력한 탄식의 목소리가 필요함을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땅의 우상숭배, 피조세계의 파괴, 불의와 죄악, 고난에 대한 거룩한 항의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lsquo;하나님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 사명 이야기 속에서 소망을 얻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깊이 알 때 세상의 거짓된 대안들을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lsquo;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절망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ldquo;주 여호와는 내 힘이십니다&rdquo;(합 3:19)라고 고백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 행동하며 달려나갔습니다. 그의 사명은 우상숭배와 불의를 폭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분별력, 믿음, 기도, 그리고 말씀과 행위 속에서 전인적인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섭고, 폭력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세상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의 사명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저녁집회 2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lt;창세기&gt; 49장 22절 / 이동원 원로목사(지구촌교회) 하용조 목사님을 떠올릴 때마다 &lt;창세기&gt; 49장 22절, 요셉과 그 자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과 온누리교회의 역사는 이 말씀과 닮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온누리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며, 한국 교회의 공동 숙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요셉을 &lsquo;풍성한 열매 맺는 가지&rsquo;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일생은 형제들의 따돌림, 노예 생활, 억울한 감옥 생활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의 인생이 열매 맺는 일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 역시 질병과 싸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온누리교회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수많은 영적 자손을 거느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넘어 일본, 대만,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 미국에까지 그 축복의 열매를 나누며 영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요셉의 가지가 &lsquo;담을 넘었다&rsquo;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이 담을 넘는 수단이 &lsquo;문화&rsquo;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교회의 담을 넘어 다른 곳까지 심어지려면 문화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문화 속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분별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선한 문화의 변혁자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책임을 감당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그냥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lsquo;샘 곁의 무성한 가지&rsquo;였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이웃들에게 복이 되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 감옥, 애굽까지 모두 &lsquo;요셉 때문에&rsquo; 복을 누렸습니다. 요셉이 복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lsquo;영성&rsquo;입니다. 바로가 요셉에 대해 말했듯이, 그는 &lsquo;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rsquo;이었습니다. 요셉의 내면에 존재하던 맑은 영성의 샘에서 애굽 땅을 적시는 은혜를 퍼 올렸습니다. 요셉이 은혜를 따라 살면서 남긴 중요한 흔적은 &lsquo;인격적 열매&rsquo;입니다. 요셉이야말로 &lt;갈라디아서&gt;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삶에서 맺었던 사람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아홉 가지 측면을 가진 단일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향한 사랑, 역경 속의 기쁨, 구덩이와 감옥 속에서 오래 참음, 형제들을 용서한 자비, 변함없는 충성 등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인생을 통해 맺고 있었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고급진 문화를 만들어 내기를 축복합니다.

     2025-10-25  제1561호

  •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1일(화) ‘교회, 복음으로 서다!’ 10월 21일(화) &lsquo;교회, 복음으로 서다!&rsquo; 주제강의 1 교회, 복음 중심의 공동체 / 이재훈 위임목사 &lt;로마서&gt; 1장 1~4절 말씀은 복음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정의입니다. 복음의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육신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사실 없이는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들의 죄,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문을 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창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됩니다. 복음 중심의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로 펼쳐진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영역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복음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우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택함 받은, 복음이 맡겨진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lsquo;복음 중심 공동체&rsquo;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적 기초와 신학적 비전, 사역의 형태를 모두 교정하고 형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중심의 공동체가 되려는 것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교회는 종교화되고, 나의 노력에 근거하며, 두려움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나 복음 중심의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섬깁니다. 복음 중심 교회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둘째,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lsquo;종교적 다원주의&rsquo;와 &lsquo;문화적 다원주의&rsquo;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종교적 다원주의를 조심하고, 경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에 이르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보다 의심을 선호하게 하고, 과학을 우상처럼 따르게 합니다. 셋째, 공로주의입니다. 공로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로를 생각하는 순간 나중 된 자가 되며, 복음 중심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제강의 2 세상이 왜 이런가요? / 이인용 장로 작년 독일의 &lsquo;성별 자기 결정법&rsquo; 발효, 우리나라 대법원의 &lsquo;동성 동반자 건강보험 피부양자등록&rsquo; 판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lsquo;950달러 이하 절도 경범죄 규정 완화&rsquo; 등의 결정은 &lsquo;인권 옹호&rsquo;, &lsquo;차별 금지&rsquo;, &lsquo;평등 원칙&rsquo;, &lsquo;약자 보호&rsquo;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말들로 이상한 법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사상가들은 진리와 선을 물었으나 인간의 삶은 불평등과 차별이 공공연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기초해서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공산사회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불과 70여 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제도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유산은 오늘날 인본주의, 인권 담론, 젠더 혁명을 포함한 정체성 정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의 배경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인 &lsquo;불평등&rsquo;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사상가들은 사회적&amp;#8231;문화적 불평등, 성에 따른 불평등도 주목하며 &lsquo;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와 제도의 억압과 차별의 구조가 숨어 있다&rsquo;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를 성별, 인종, 지역, 환경,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부딪히는 현장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란 계급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의 인정과 충돌을 조율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lsquo;포스트 막시즘&rsquo; 즉, 현재의 &lsquo;정체성 정치&rsquo;가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러 기준이 있고, 이 기준은 안과 밖을 가르며, 기준 안에서 기준의 밖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억압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논리에 따라 &lsquo;기준이 문제이고, 이 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rsquo;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준을 세우는 토대는 &lsquo;진리&rsquo;입니다. 선, 도덕, 윤리 등의 기준들은 진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lsquo;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rsquo;는 전제는 기준의 토대가 되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멀리하는 것은 이 진리를 갖고 있으면 기준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lsquo;진리의 상대성&rsquo;이며, 지금 우리가 사는 탈진실의 시대입니다. 탈진실의 시대에는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판단이 기준입니다. 요즘 대학이나 기업 등에서 사용하는 &lsquo;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rsquo;와 같은 기조 역시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의 &lsquo;절대 진리&rsquo;를 부인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절대 진리이시고, 절대 선입니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 감정, 영원을 희구하는 마음,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어주셨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인간이 인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lsquo;다양성&rsquo;이라 말하며, 그것을 포용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면 그것을 혐오 발언이라고 처벌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은 &rdquo;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rdquo;(요한 14:5)이시며, &ldquo;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rdquo;(요한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적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제강의 3 세계관과 복음 / 류현모 교수 세계관이란 &lsquo;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신념의 포괄적인 틀&rsquo;을 말합니다. 세계관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영양분을 흡수해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 세계관은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 믿음과 가치관이 생기고, 그 가치관에 근거해서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행동은 일정한 패턴이 생기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인격을 형성합니다. 결국, 인격의 근저에는 &lsquo;우리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냐&rsquo;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지고 살아온 세계관에 대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입견이 되기 쉽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세계관은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뉘며, 기독교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 신앙은 성경 내용에 기반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바탕은 성경 지식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아주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와 등장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는 &lsquo;창조-타락-구속-완성&rsquo;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죄와는 타협하지 않으시기에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한 민족을 선택해서 제사장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lsquo;완성&rsquo;은 구원받은 나는 어디로 가냐는 것입니다. 죄의 사슬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가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lsquo;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 효과&rsquo;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메타 내러티브로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들을 여기에 적용해야 합니다. &ldquo;진리가 무엇이냐?&rdquo;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ldquo;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rdquo;(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법칙을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상황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선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준 삼아야 합니다. 세계관 공부는 &lsquo;세상의 공격을 성경 속에서 어떤 답을 찾아서 대응할 것인가&rsquo;입니다. 영적 전쟁의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대응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고대에는 인간이 피고석에 와 있고,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심판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피고석에 서 있고, 인간이 재판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피고석에 계신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저녁집회 1 온전한 복음 &lt;에베소서&gt; 2장 8~10절 / 홍정길 원로목사(남서울은혜교회) 온누리교회의 특징은 &lsquo;온전한 복음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가장 노력하는 교회 중 하나&rsquo;입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본문을 정했습니다. &ldquo;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rdquo;(엡 2:8). 우리는 하나님께 &lsquo;믿음으로 얻는 구원&rsquo;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lsquo;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이 땅에 오셔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rsquo;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대로 믿으면 내 죄는 옮겨지고,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믿음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저는 서서평 선교사와 관련된 신앙의 배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외할머니가 서서평 선교사의 제자였고, 어머니는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일학교 출신입니다. 어릴 적 거룩한 성경 인물 같은 믿음의 어른들을 많이 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고, 그 참혹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끔찍한 현장을 보면서 &lsquo;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이렇지 않을 것&rsquo;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닫았습니다. 대학은 예수 안 믿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철학과를 택했고, 예수 믿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친구 꼬임에 넘어가 수양관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기도하는 청년들의 얼굴에 주님이 주신 평화가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ldquo;지금 이곳에 주님이 계시면 제가 예수님 믿게 해주십시오&rdquo;라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제가 울면서 어릴 때부터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마음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빛이 따뜻하게 저를 안아주시며 &ldquo;정길아, 너 내게 너무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rdquo;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음성에 엎드렸고,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외롭거나 힘들 때, 기쁠 때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그 자리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신 그 놀라운 은혜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살 인생에 대해 주께서 &ldquo;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았다&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 믿게 한 것은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온전한 복음은 &lsquo;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rsquo;는 귀한 축복을 놓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늘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고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온누리교회는 선한 일을 알면 참지 못하는 교회이고, 열심히 선한 일을 끝까지 좇아가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명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귀한 온전한 복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로서 온전한 복음으로 살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2025-10-25  제1561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 &lt;여호수아&gt; 17:14~18 /박신웅 목사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지난날의 기쁨이었고, 오늘 우리 입술의 불평이 &lsquo;지나온 시간의 감사&rsquo;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흘리는 많은 눈물의 기도, 직장과 비즈니스, 관계와 가정, 상황의 많은 눈물이 사실은 삶의 큰 기쁨이었고, 큰 감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두 지파가 되는 큰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실제 므낫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땅 분배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큰 축복을 누렸습니다. 땅 한 평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요단 동편에 므낫세 반 지파가 정착하고, 큰 정복 전쟁이 끝나고, 지파별로 국지적인 전투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요셉 지파는 지난날의 감사와 기쁨보다 오늘의 부족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합니다. 빚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ldquo;요셉의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lsquo;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큰 복을 주셔서 내가 큰 민족이 됐는데 왜 내게 한 번만 제비를 뽑아 한 몫만 유산으로 주십니까?&rsquo;&rdquo;(14절). 여호수아에게 항변하고 불평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입니다. 한 지파로서 가장 큰 인구와 넓은 땅을 소유했던 지파는 유다 지파입니다. 두 지파를 합했을 때 가장 많은 인구와 많은 땅을 소유했던 민족이 요셉의 후예들이었습니다. 객관적으로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므낫세는 그 어떤 지파보다 많은 땅과 인구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흔아홉 가지의 축복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유다 지파와 자신의 지파를 비교하면서 부족함을 느끼는 모습이 요셉 지파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패배 의식에 젖어있고, 비교의식 속에서 생각이 뒤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여호수아가 그 어떤 상황보다 가슴 아픈 이유는 자신이 요셉 지파 출신, 에브라임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유다 지파의 위대한 믿음의 용기를 바라봤을 때 자신의 지파를 향한 기대와 소원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터인데,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믿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여호수아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요셉의 믿음이 너무나 약해져 있어서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리더였습니다. 호통칠 수도 있고, 혼낼 수도 있고, &ldquo;왜 그러느냐? 돌아가라&rdquo;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끝까지 요셉 지파가 일어나도록 기다려줬습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연약한 차세대가 자라도록 기다려주고, 연약한 다음 세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대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모세의 변화를 기다리시고, 다윗의 생애에 함께하시며 그를 빚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연약함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호수아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자녀들이, 다음 세대들이 연약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믿음의 도전과 싸움처럼 말입니다. 지금 요셉 지파에게 나타난 두려움, 걱정, 염려 때문에 속상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여호수아는 요셉 지파를 끝까지 기다려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대신 선언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최고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로운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땅 분배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아 주는 게 아니라 산악지대,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땅을 점령해서 스스로 개척해라고 명령합니다. 여전히 요셉은 연약한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ldquo;요셉의 자손들이 대답했습니다. &lsquo;산악 지역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평지에 사는 모든 가나안 사람들은 벧스안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이나 이스르엘 골짜기에 사는 사람도 모두 철 전차를 가지고 있습니다&rsquo;&rdquo;(16절). 그 산악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철 전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명 속에 머물던 이스라엘은 그 산악지대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철 전차라는 큰 피해를 입히는 최신 무기를 장착한 용맹한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항변이 이어집니다. 그들을 향해서 여호수아가 명확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승리를 약속해주시는 하나님 &ldquo;그러나 여호수아는 요셉의 집,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게 말했습니다. &lsquo;너는 큰 민족이고 세력도 크니 한 번의 제비만 뽑을 수는 없다. 산악 지역도 네 것이 될 것이다. 산악 지역일지라도 네가 스스로 개척하여라. 그러면 그 끝자락까지 네 것이 될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이 철 전차를 가졌고 힘이 막강하더라도 너는 그들을 쫓아낼 것이다&rsquo;&rdquo;(17~18절).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에 대한 약속을 선언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승리를 약속하시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다음 세대를 향한 도전은 &lsquo;승리를 약속해주시는 하나님&rsquo;입니다. 여러분, 역사 속에서 철 전차와 같은 인생의 대적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늘 여기까지 오기까지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요단강과 여리고성이라는 큰 철 전차가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백 가지 요소를 가진 이유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거라는 그 한 문장이 승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건강이 인생의 철 전차로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재정적인 환경과 상황, 우리가 가진 여러 한계가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못하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수아를 통해 &ldquo;네가 스스로 개척하여라. 그들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너는 그들을 쫓아낼 것이다&rdquo;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삶, 다음 세대를 가로막는 그 어떤 강력한 철 전차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승리합니다. 역사에 가장 큰 전차로 여겨졌던 골리앗이 등장했습니다. 소년 다윗의 손에 들린 것은 다섯 개의 물맷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ldquo;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rdquo;고 선포하며 물맷돌을 흔들며 달려가는 순간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오늘도 다음 세대의 다윗이 하나님의 고백을 회복한다면,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 앞에 선다면 그분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철 전차에 대해서 분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안 되는 10가지, 100가지, 1만 가지의 이유를 드러내며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여호수아를 통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의 음성은 &ldquo;아멘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말씀이 실제가 된다&rdquo;는 것입니다. 강력한 도전 속에서도 여호수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여호수아가 리더들을 불러놓고 유언적인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그 메시지는 &ldquo;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rdquo;는 역사적인 설교입니다. 무엇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하다 &ldquo;그러나 만약 너희 마음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내키지 않으면 그때는 너희 스스로 누구를 섬길 것인지,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에서 섬겼던 신들이든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 오늘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rdquo;(수 24:15). 나와 내 집은 크게는 이스라엘이지만, 작게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상징합니다. &ldquo;지금은 유다 지파보다 못해 보이고, 연약하고, 부족해 보이지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rdquo;이라는 유언적인 메시지입니다. 세겜의 돌은 과거를 상징하는 돌이 아니라 새로운 믿음, 새로운 시작점의 돌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믿음의 유산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얻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무엇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이 분기점이 마치 여호수아의 세겜 언약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실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더욱 놀라운 일들, 광야의 길을 내고, 사막의 강을 내는 위대한 일들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유산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시며 죽을 수밖에 없는 다음 세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 계획을 수립하셨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아직 시몬인데 베드로라 불러주시며 연약한 자를 품어주셨습니다. 도저히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도망쳤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믿음의 용사로 만드시고, 승리의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천국과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가 되라는 사명을 통해서 다음 세대인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려내시고, 오늘도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한 자입니다. 우리 가정의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교회의 다음 세대, 세계 열방의 다음 세대가 살아날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철 전차도 붕괴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10-25  제1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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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연단을 통과한 회복의 날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연단을 통과한 회복의 날 10월 27일~11월 2일까지 &lt;스가랴&gt; 12:1~14:21, &lt;디모데후서&gt; 1:1~18 묵상포인트 1: 스가랴서 후반부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보여 준다.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lsquo;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rsquo;을 부으시고, &lsquo;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rsquo;을 열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묵상하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해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시면 모든 민족의 군사력은 무력해질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가장 약한 사람조차 다윗처럼 강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lsquo;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rsquo;(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으셔서 애통하며 회개하게 하실 것이다. 그날에 &lsquo;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rsquo;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열릴 것이다. 그날에는 우상의 이름이 끊어져 더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며, 거짓 선지자들도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은 칼을 향해 그분이 세우신 선한 목자를 찌르라고 명하신다. 목자가 사라지고 양 떼가 흩어지는 연단과 시험을 거친 후에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묵상포인트 2: &lsquo;여호와의 날&rsquo;은 연단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다. 그날에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의 원수들과 싸우시고 승리를 주실 것이다. &lt;스가랴&gt; 선지자가 전하는 &lsquo;여호와의 날&rsquo;의 의미는 무엇인지,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날에 행하실 일은 무엇인지 묵상하자. ▶&lsquo;여호와의 날&rsquo;은 환난과 고통과 패망이 임하는 날인데, 이는 백성 가운데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는 연단의 과정이다. 그날에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을 치시고 예루살렘에 임하실 것이다. 그날이 되면 빛과 광명한 것들이 사라지고 하나님 자신이 꺼지지 않는 빛이 되실 것이다. 그날에 하나님이 천하의 왕이심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고 예루살렘은 평안할 것이며, 예루살렘을 대적한 모든 백성은 살과 혀가 썩는 재앙을 당할 것이다. 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주변 나라들이 &lsquo;여호와의 날&rsquo;에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 것이다. 그날이 도래하면 말방울이나 솥처럼 평범한 물건조차 모두 거룩해질 것이다. 묵상포인트 3: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무렵, 에베소 교회는 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내적으로 복음을 흔드는 이단의 현혹이 있었다. 로마 감옥에서 순교를 목전에 둔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를 어떻게 위로하며 격려하는지 묵상하자. ▶디모데의 낙심과 눈물을 아는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길 원하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에게 다시 불 일듯 일어나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lsquo;바른 말&rsquo;(건전한 말씀)을 본받아 지킬 것을 당부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배교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오네시보로를 언급한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성령님이 죄를 깨우쳐 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 하나님이 &lsquo;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rsquo;을 부어 주셔서 내 속의 죄악을 다 토해 내고 정결하게 변화되도록 은혜를 구하자. ▶&lsquo;여호와의 날&rsquo;은 연단을 통해 정결하게 되는 날이다. 하나님의 연단을 감당할 힘을 간구하고,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기회로 삼자. ▶하나님은 천하의 왕이시다.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다. 복음의 삶에는 고난이 따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을 선택하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10-24  제1561호

  • 칼럼

    [신앙에세이] 믿음의 유산 신앙에세이 믿음의 유산 수원온누리교회 차세대 초등부 교역자와 교사, 자녀 21명이 베트남 호치민으로 아웃리치를 다녀왔다. 이 여정이 내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ldquo;어떻게 하면 다음세대가 신앙을 이어갈 수 있을까?&rdquo; 오늘날 한국 교회는 다음세대의 인원 감소라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이는 단순히 숫자가 줄어드는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일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었기에 이번 아웃리치 여정이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첫 번째 일정은 베트남 선교사님이 섬기는 구찌 고아원 방문이었다. 한국에서 준비한 &lsquo;하나님의 용사, 다윗&rsquo;을 주제로 캠프를 열었고, 키즈벤처 찬양을 베트남어로 번역해서 함께 부르며 율동했다. 언어는 달랐지만,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두 함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교사들과 아이들은 무언극, 태권무, 찬양과 율동을 준비하면서 복음전하는 훈련을 받았고, 선교 현장에서 섬김을 통해 모두의 믿음이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방문한 곳은 소수민족 기숙사 겸 교회였다. 베트남 사회에서 소수민족은 차별과 배제 속에 살며 공부 기회조차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듣고 뜨겁게 예배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깊은 도전이 되었다. 그곳을 섬기는 현지 목사님이 기도제목과 비전을 나눠주셨다. &ldquo;이 땅의 고아들과 소수민족들,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이들이 복음을 알게 되고, 교육을 통해 세워져 베트남의 새로운 리더로 자라나기를 소망합니다.&rdquo; 그 기도제목과 비전을 들은 우리 팀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모두 함께 기도했다. 밤에는 야학을 방문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배우기 위해 모여드는 아이들의 모습은 단순한 배움 그 이상이었다. 정부 건물에서 운영되기에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전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배움과 말씀을 사모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호치민온누리교회도 방문했다. 해외에서 신앙을 지키며 그 땅을 위해 헌신하는 교역자들과 성도님들의 예배와 기도에서 깊은 은혜가 흘러넘쳤다. 선교사 센터를 방문해서 선교사님들의 사역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분들이 품은 비전을 함께 나누었다. 책이나 강의로 배운 선교가 아니라 땀과 눈물 속에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현장이었기에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아웃리치팀은 매일 저녁 함께 모여 하루를 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고 찬양과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자리에서 자녀들의 입술을 통해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교사로 섬기는 부모님들도 은혜를 나누며 자녀들에게 살아 있는 신앙의 본이 되었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삶과 교사로 섬기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배우며 신앙이 성장하는 체험을 했다. 차세대는 교회의 미래뿐 아니라 현재이기도 하다. 이번 베트남 아웃리치에서 만난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갈망하며 예배했다. 그들의 모습은 한국의 다음세대에게 신앙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다시 질문을 해본다. &ldquo;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믿음을 물려줄 것인가?&rdquo;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부모가 말씀을 가까이하며 기도하고, 교회 공동체가 함께 예배하고 섬기는 삶에서 신앙이 전해진다. 자녀들은 그 모습을 통해 도전을 받고, 아웃리치와 선교 현장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믿음의 유산이다. / 하청훈 목사(수원 차세대)

     2025-10-18  제15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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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멘토가 멘티에게] 멘토는 신호등 그리고 네비게이션 멘토가 멘티에게 멘토는 신호등 그리고 네비게이션 &ldquo;멘토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rdquo; 지난 5월, 인천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에서 개최한 &lsquo;멘토링 정류장 멘토 토크쇼&rsquo;는 내게 깊은 여운을 남긴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질문 중 하나가 바로 &ldquo;멘토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rdquo;였다. 나는 &ldquo;교통신호등&rdquo;이라고 대답했다. 멘토란 복잡하고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ldquo;이것이 정답이다&rdquo;라고 단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호등처럼 조용히 제자리에 서서 진실하고 분명한 신호를 보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통신호등은 누군가의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정확한 신호를 통해 지금이 멈춰야 할 때인지, 천천히 가야 할 때인지, 아니면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인지를 알려줄 뿐이다. 그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할지는 온전히 운전자에게 달려 있다. 멘토로 산다는 것도 이와 같다. 청년들 곁에 서서 지금은 멈추는 게 안전한지, 이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내딛어도 좋은지를 말씀과 기도로 분별하며 안내해준다. 그러나 그 결정과 책임은 결국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존중하며 기다려준다. 때로는 무심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호등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멘토의 첫 번째 의미이다. 온누리신문으로부터 &lt;멘토가 멘티에게&gt; 원고를 부탁받으며, 나는 멘토로서의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렸다. 바로 &lsquo;네비게이션&rsquo;이다. 목적지까지 방향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처럼, 멘토는 청년들이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다양한 길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네비게이션은 단 하나의 길만 제시하지 않는다. 가장 빠른 길, 톨게이트가 없는 길, 막히지 않는 길, 때로는 경치가 아름다운 길까지 제시한다. 그중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언제나 운전자 몫이다. 멘토 역시 인생의 정답을 단정 짓기보다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년들이 삶을 주도적으로 살도록 돕는 것이 멘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네비게이션이 말없이 안내만 하듯, 멘토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때로 길을 잃고 돌아가더라도 곁에서 함께 고민해 주고, 다시 경로를 탐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그런 멘토가 된다면 청년들의 여정이 훨씬 덜 외롭고 더 따뜻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쯤에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다. 교통신호등과 네비게이션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필요한 게 무엇일까? &lsquo;정확한 정보&rsquo;다. 신호 체계가 잘못되어 있거나 도로 정보가 오래되었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 있다. 잘못된 신호는 사고를 일으키고, 부정확한 안내는 소중한 자원(시간, 에너지, 기회 등)을 낭비하게 만든다. 멘토 역시 마찬가지다. 말 한마디, 태도 하나가 누군가의 진로를 결정짓기도 하고, 신앙의 여정을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다짐한다. 멘토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하고,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씀 앞에 서서 삶으로 살아낸 신호를 보내도록 날마다 내 신호등의 전선을 점검하고, 내 네비게이션의 지도를 업데이트해 나가야겠다. 그렇게 할 때 청년들이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등불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그래야 나의 삶이 단순한 조언을 넘어 &lsquo;빛&rsquo;이 될 수 있고, 청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만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이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ldquo;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rdquo;(시 119:105). 요즘처럼 빠르게 변하고, 방향을 잃기 쉬운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필요하다. 신호등이 흔들릴 때, 네비게이션이 잠시 꺼질 때, 결국 우리가 의지해야 할 단 하나의 기준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것이 멘토인 나도, 멘티인 청년들도 날마다 돌아가야 할 원점이다. / 김효수 멘토(인천 WEB대학청년부)

     2025-10-18  제15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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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Issue) 바로보기!] 성경적인 조직과 조직문화 (Biblical Structure and Its Culture)1 이슈(Issue) 바로보기! 성경적인 조직과 조직문화 (Biblical Structure and Its Culture)1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잠 4:23). 사람은 마음의 크기만큼 산다. 우리에게 가장 큰 마음, 즉 정체성을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정체성을 알려준다. 하나는 흙먼지, 창조의 은혜를 배신한 죽어야 할 행악자, 영원한 형벌을 받은 자 등으로 표현되는 &lsquo;절대 깊이의 정체성&rsquo;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 부활, 영원한 상속자 등으로 표현되는 &lsquo;절대 높이의 정체성&rsquo;이다. 최하의 정체성에서 최고의 정체성으로 가는 일은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해진다. 이 두 가지 정체성 모두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한국 또는 미국 같은 개별 국가가 아닌, 열방을 유업으로 품고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다. 즉, &lsquo;절대 넓이의 비전&rsquo;이 생긴다. 이보다 큰 정체성과 비전을 주는 사람과 신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성경적인 인문사회학적 소양)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지난 6월 14일 &lt;온누리신문&gt; 9면에서 설명했다. 당대 최고 지성으로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지식을 집대성한 아담 스미스의 &lt;국부론&gt;과 칼 막스의 &lt;자본론&gt;을 각각 성공하고 실패하게 만든 차이가 바로 인간 근원에 대한 이해에 있다. 조직의 주춧돌: 정체성과 비전 성경에서의 정체성과 비전은 성막의 구조로부터 알 수 있다. 인류의 타락 이후 번제단에서 정체성이 회복되고, 지성소에서 비전이 회복된다. 번제단은 &lsquo;무한한 용서&rsquo;를 통하여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깊이의 십자가 고난, 그리고 절대 높이의 부활(영광)과 함께 구원받은 자의 모든 존재를 다 한 감사와 예배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세계관(world view)의 변화가 이곳에서 일어난다. 가정, 교회, 학교, 기업 등 모든 조직에는 &lsquo;무한한 용서&rsquo;가 있어야 한다. 그 조직에는 희생양 삼는 &lsquo;비판 정신&rsquo;(criticizing spirit)&rsquo;이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lsquo;수용 정신(accepting spirit)&rsquo;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직에 대한 정체성이 강화된다. 희생양 삼는 것은 죄책감을 주는 것이고,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가장 무서운 짐이기 때문이다(롬 6:23). 모든 조직의 정체성은 공동체가 함께 겪은 과거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 조직이 겪은 가장 큰 고난과 성취한 가장 큰 영광이 조직원들의 마음에 정체성으로 각인된다. 즉, 모든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던 그 길, 십자가의 고난에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동선을 따라가면서 정체성의 깊이와 높이가 형성된다. 따라서 과거 조직을 만들어 주신 선배들의 고난의 깊이와 성취의 높이를 감사하고 선배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정체성 유지의 핵심 요소이다. 이것이 바로 &lsquo;역사의식&rsquo;이다. 번제단을 지나 지성소에 이르면 하나님의 &lsquo;무한한 격려&rsquo;를 만난다. &lsquo;패배의식&rsquo;이 사라지고, &lsquo;자신감&rsquo;이 회복된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듣고 마음의 소원과 비전이 생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생긴다(빌 4:13).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사람은 신학자가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는 이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받은 비전으로 공동체의 마음을 모으며 비전을 실현해 나가면서 시대변화를 주도해 미래를 만들어 간다. 이때 공동체에 무한한 격려로 자신감을 지속적으로 불어넣어 주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하나님이 지도자에게 이러한 권능을 허락하신다. 과거 고난의 깊이와 성취의 높이를 통해 정체성의 깊이와 높이를 언어화하고, 과거 선배 세대에 대한 감사를 기반으로 하나의 마음을 만들고, 하나님께 받은 새로운 비전으로 마음이 나뉘지 않도록 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며,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을 이 시대에 맞는 언어로 재구성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결국,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지도자는 역사의식과 비전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역사의식을 통한 정체성에 의해 과거에 대한 감사로 첫 번째 마음이 모이고, 비전 공유에 의한 불같은 소원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두 번째 마음이 모인다. / 박성진 교수(OCC공동체, 포스텍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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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진노의 현실, 소망의 미래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진노의 현실, 소망의 미래 10월 20일~26일까지 &lt;스가랴&gt; 7:1~11:17 묵상포인트 1: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종교적 행위의 부족이 아니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 묻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상기시키는 과거의 죄악이 무엇인지, 앞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기이한 회복은 무엇인지 묵상하자. ▶벧엘 사람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금식을 계속할지 묻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질타하신다. 이스라엘은 마음을 금강석같이 완고하게 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 나라에 흩으셨고, 그들이 살던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이한 회복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시고,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 되며, 그곳 사람들이 번성할 것이다.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은 진리를 말하고, 정직한 재판을 하며,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금식이 희락의 절기로 바뀌게 될 때, 많은 나라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것이다. 묵상포인트 2: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를 위해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묵상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민족들의 심판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하드락, 다메섹, 하맛, 두로, 시돈, 블레셋 등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겸손해 나귀를 탄 그 왕은 세상에 화평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와 에브라임을 무기로 삼아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양 떼처럼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땅에 정착시켜 왕관의 보석같이 빛나게 하실 것이다. 묵상포인트 3: 하나님은 백성을 바르게 이끌도록 지도자들을 세우신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방식을 따르면, 백성은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게 된다.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구별 기준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지도자의 악행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묵상하자. ▶하나님께 봄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내려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그분께 구하지 않고 헛된 우상을 찾는 악한 지도자들(목자들, 숫염소들)을 벌하시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 나라에 흩으셨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회복의 날에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해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들(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나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몰락할 것이다. 양 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목자들은 결국 다른 나라에 넘겨질 것이다. 은총(하나님과의 관계)과 연합(사람과의 관계)을 깨뜨린 악한 목자에게는 칼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이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도록 주의하자. 하나님 말씀을 마음 다해 듣고 힘써 순종하자.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왕관을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가 나와 공동체에도 임하기를 간구하자. ▶풍성한 추수를 위해 봄비를 내리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나와 공동체의 필요를 오직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의 기쁨을 누리자. ▶지도자의 사명은 목자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공동체 구성원을 바르게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께 심판받는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내게 맡겨 주신 양 떼를 성심껏 보살피며 섬기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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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는 말씀 해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맛있는 말씀 해설 &ldquo;&hellip;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rdquo;(마 19:24). 이 말씀을 들으면 누구나 마음속에 의문이 생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인데,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그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당시 제자들조차 놀라며 &ldquo;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rdquo;라고 되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ldquo;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rdquo; 이 말씀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lsquo;낙타&rsquo;와 &lsquo;바늘귀&rsquo;를 비유로 드셨을까? 낙타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 큰 동물이었고, 바늘귀는 사람이 사용하는 가장 작은 구멍이었다. 예수님이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인간은 불가능한 일임을 강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예루살렘 성문중에서 작은 문을 가리킨다거나, &lsquo;낙타&rsquo; 대신 &lsquo;굵은 밧줄&rsquo;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의 흐름과 공관복음 전체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애초에 과장된 표현을 통해 충격을 주려는 것이었다. 인간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점을 뚜렷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돈 자체가 죄라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돈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기 쉽다는 데 있다. 재물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의존은 약해진다. &lt;마태복음&gt; 6장에서 &ldquo;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rdquo;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lt;마가복음&gt;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며, &ldquo;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rdquo;라고 기록한다. 단순히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뢰하는 태도가 문제임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결국, 재물은 마음의 우상이 되기 쉽고, 그것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부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자기 무덤을 내어놓은 부자였고, 삭개오는 회개한 이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참된 제자의 길을 걸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부자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지 않으면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경고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며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는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성경은 보여준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 말씀은 날카로운 도전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재물은 곧 성공과 안정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부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각자가 의지하는 무언가(돈, 명예, 지식, 혹은 자기 능력)가 하나님보다 앞서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바늘귀 앞의 낙타와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마음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 두고,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두려움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불가능을 말씀하시며 동시에 가능한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재물은 우리 손에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는 대신 그것을 나누고 베풀 때, 그 재물은 나를 속박하는 쇠사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 씨앗이 된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동일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ldquo;저의 소유와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재물이 저를 지배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rdquo; 이 고백 속에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오은규 목사(성동광진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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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강단

    [주일강단] 감사와 충성  감사와 충성 &lt;여호수아&gt; 14:6~14 /이재훈 위임목사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미경의 관점이고, 또 하나는 망원경의 관점입니다. 현미경은 아주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해서 실제보다 크게 보는 기능을 가져다줍니다. 망원경은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처럼 보이게 해줍니다. 불평은 현미경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문제를 크게 확대합니다. 불평하면 할수록 작은 문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로 확대됩니다. 감사는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평을 버리고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충성되게 섬기는 마음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수록 충성합니다. 감사와 충성으로 충만한 &lsquo;갈렙&rsquo; 구약 역사에서 감사와 충성으로 충만한 한 사람을 꼽으라면 갈렙입니다. &lsquo;갈렙&rsquo;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lsquo;켈렙&rsquo;인데, 목자를 돕는 개를 가리킵니다. 동물의 이름을 사용한 것을 비천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는 참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구약 역사에서 주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중부 여리고와 아이성을 정복하고, 남부로 내려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메롬 물가 전투, 혹은 하솔 전투라고 불리는 북부 연합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입니다. 가나안 땅의 전반적인 지배권을 가져온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가나안 원주민들은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각 지파가 맡게 된 영역은 알아서 정복하게끔 하는 시점입니다. 그만큼 전반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는 전체적인 전투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세를 장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각 지역에 숨어있거나 흩어진 가나안 민족들은 부족들이 알아서 점령하도록 임무를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 땅을 어떻게 분배할지를 상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기본적인 원칙은 &lsquo;그 부족의 숫자대로, 그 인원대로 땅을 배분하라&rsquo;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lsquo;제비를 뽑아서 나누라&rsquo;입니다. 정치적인 판단이나 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제비를 뽑아서 땅을 분배하고, 인원에 따라서 배분하라는 원칙을 주셨습니다. 두 지파 반은 이미 빠졌고, 레위 지파는 분깃이 없으므로 또 빠졌습니다. 나머지 지파만 분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은 여호수아와 대제사장과 족장들에게 맡겨졌습니다. 바로 그 시점입니다. 그때 갈렙이 유다 자손, 유다 지파들과 함께 여호수아에게 나온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서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민족의 가장 절대적이고, 영향력 있는 지파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다 지파로부터 나셨고, 메시아가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 종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족속입니다. 유다 족속의 리더가 바로 갈렙이었습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나와 &ldquo;제비 뽑는 일에서 우리를 제외시키고 자신들이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도록 배정해 달라&rdquo;고 요청합니다. 더 많은 땅을 얻기 원하는 이기심에서 하는 요청이 아닙니다. 헤브론 산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무덤이 있고, 아브라함이 최초로 자기 돈으로 구입한 막벨라 굴이 있는 땅이 있었습니다. &ldquo;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날 내게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십시오. 당신도 그때 직접 들었다시피 거기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성은 크고 강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그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rdquo;(12절). &lsquo;그날에 말씀하신 산지&rsquo;가 헤브론 산지입니다.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크고 강한 산지를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갈렙이 이 시점에 요청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감사와 충성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충성된 모습을 보십시오. &ldquo;그런데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해 내 하나님 여호와를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날 모세가 내게 맹세했습니다. &lsquo;네가 마음을 다해 네 하나님 여호와를 따랐으므로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rsquo;&rdquo;(8~9절). &lsquo;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따랐다&rsquo;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곧 충성된 믿음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따르던 갈렙의 믿음입니다. 갈렙의 고백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ldquo;이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신 지 45년이 됐습니다. 지금 내가 85세가 됐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냈던 때처럼 나는 아직도 강건하고 내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드나드는데 기력이 왕성합니다&rdquo;(10~11절).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주셨고, 하나님이 강건하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넘쳐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따르는 충성된 믿음과 감사가 갈렙의 마음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신앙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 감사와 충성이 가득한 갈렙에게 세 가지 신앙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불신앙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ldquo;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 땅을 정탐하라고 나를 보냈을 때 내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에 확신이 서는 대로 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해 내 하나님 여호와를 따랐습니다&rdquo;(7~8절). 갈렙이 성경에서 처음 소개되는 장면은 &lt;민수기&gt; 13장입니다. 그가 유다 지파의 대표로서 열두 정탐꾼의 일원으로 가나안을 정탐했습니다. 그때 일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한 것은 사실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이 원해서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와 불안과 두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ldquo;백성들이 그 땅에 가봐야 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rdquo; 했더니 &ldquo;그러면 열두 명의 각 지파의 리더들이 그 땅을 가서 살펴보고 오게 하라&rdquo;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두 명을 정탐꾼으로 보내 그 땅을 살펴보라고 하신 단어가 군사용어가 아닙니다. &lsquo;살펴본다&rsquo;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인 곳이 지혜서입니다. &lt;잠언&gt;과 &lt;전도서&gt; 같은 곳에서 같은 단어가 쓰였는데, 지혜를 통해서 살펴보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을 확인하고 맛보는 의미의 정탐이지, 군사적 의미의 정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lt;민수기&gt; 13장에서 하나님이 &ldquo;그래 살펴보라&rdquo;고 하는 것은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 소망을 품고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을 미리 보고 백성들에게 잘 전하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살펴본 열 명의 정탐꾼들이 불신앙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 불신앙에 백성들이 휩쓸렸습니다. 열 명의 보고에 사람들이 넘어간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옳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때 갈렙이 나서서 &ldquo;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답이다&rdquo;라고 했습니다. 그 땅에서 가져온 포도송이를 보여주며 &ldquo;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은 이렇게 좋은 땅이다&rdquo;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보고를 한 사람이 갈렙입니다. 후에 여호수아도 합세했지만, 불신앙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가장 흔들리고 두려워할 때 나서서 말한 사람은 갈렙입니다. 그는 매우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두 명이 가나안 땅, 특히 헤브론 산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묘가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산 땅입니다. 역사적인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집중적으로 봤는데, 그 땅에 아낙 자손들이 강한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거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때 갈렙이 &ldquo;아니다. 우리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이다&rdquo;라고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열 명의 불신앙은 자신들의 힘과 거인들을 비교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거인들과 하나님을 비교한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와 충성은 불신앙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고 많아도 절대로 휩쓸리지 않습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불신앙의 소리는 더 커집니다. 과학을 더 숭배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세력들이 득세할 것입니다. 불신앙의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휩쓸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의 위치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둘째, 갈렙은 자신의 위치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출애굽한 세대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20세 이상 성인들은 다 죽고 차세대만 살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역사에 부각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수십 년 간 여호수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무대에서 가려지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지만, 그는 변함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좇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충성된 믿음은 자신의 위치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45년 동안 여호수아와 동역했습니다. 여호수아 옆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갈렙의 충성된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따르는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소명과 임무가 중요했습니다. 사명보다 직분이 중요한 교회는 결국 싸우게 됩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서 일하느냐가 중요한 교회는 결국 분열과 다툼,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길을 자청하는 믿음 셋째, 갈렙을 통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길을 자청하는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헤브론 산지를 자신의 지파에게 맡겨달라고 한 것은 가장 쉽고 좋은 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제비를 뽑아서 맡은 것만 해도 될 텐데 헌신을 자청했습니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요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비를 뽑으라고 하신 것은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지 최선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갈렙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충성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감사하는 믿음, 충성된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고 희생하고 헌신하게 합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많은 헌신을 했던 갈렙이 지금도 그 감사와 충성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갈렙이 45년 동안 지치지 않고 인내했고, 85세가 되었어도 감사와 충성이 가득한 믿음으로 도전하는 힘은 인간적인 힘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힘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ldquo;여호와의 눈은 세상을 두루 볼 수 있어서 그 마음이 온전히 그분께 향하는 사람들을 힘 있게 하십니다(대하 16:9).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힘 있게 하십니다. 건강도 힘 있게 하시고, 믿음도 힘 있게 하시고, 일터도 힘 있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가 헤브론 산지를 갈렙에게 맡깁니다. 갈렙은 그 산지를 훌륭하게 정복했습니다. 유다 지파는 헤브론 산지의 중심부를 도피성으로 제공합니다. 성업 자체를 레위 자손들에게 제공합니다. 정작 자신들은 변두리 산지와 촌락에 거주합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해서 얻은 기업을 하나님께 다시 바쳤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렙처럼 감사하며 충성하는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갈렙과 같이 감사와 충성이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감사와 충성이 가득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10-18  제15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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