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주일강단] 사사기 강해(1) 절반의 순종이 남긴 것
사사기 강해(1)
절반의 순종이 남긴 것
<사사기> 2:1~9
/ 이재훈 위임목사
나무로 된 물건을 다루다가 손에 작은 가시가 박혀본 경험이 한 번쯤 있으실 것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제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가시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문제를 일으킵니다. 염증을 일으키고, 그 부위가 부어오르게 합니다. 계속 신경 쓰이게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역사 속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바로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너희가 남겨둔 것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뽑지 않고, 뽑지 못하고 남겨둔 것이 우리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말씀을 통해서 비춰봐야 합니다.
<사사기>는 3천 년 전 기록이지만, 오늘의 거울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서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어서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고 말씀합니다. 절대적 기준을 부정하고 모두가 각자의 의견을 절대화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사사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오래된 책이 소중하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와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사기>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12명의 사사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 사사들이 역사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흠이 많았습니다. 겁이 많았던 ‘기드온’, 경솔했던 ‘입다’, 정욕에 흔들린 ‘삼손’까지 흠이 많았던 이들입니다. 그 흠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의 순간을 기록하셨고, 그들을 통해서는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듭 배신을 당하면서도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사사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능력’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
<사사기> 1장은 서론 역할을 합니다. 1장 내용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기록을 보면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각 지파에 대하여 나오는 기록들에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 “쫓아내지 못하였다”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들은 산간 지대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철로 만든 전차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삿 1:19).
‘철로 만든 전차’를 ‘철병거’라고 합니다. 1장 27절과 28절에 므낫세 지파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강해지자 가나안 사람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쫓아내지 못했던 것도 있고, 쫓아내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스불론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파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쫓아내지 못했다”는 문장이 반복됩니다.
히브리어 표현으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것을 지적합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고 살도록 허용되는 정도였습니다. 쫓아내지 않고 허용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단계에 보면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한가운데 들어와 삽니다. 그다음에는 거꾸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산다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아셀 사람들도 그 땅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삿 1:32).
아셀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서 산지로 쫓겨가게 됩니다. ‘밀렸다’라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압제당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쫓아내라고 보낸 백성들이 그들과 함께 살다가 결국 쫓겨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철병거 때문에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힘이 강해지고, 가나안 사람들을 부리는 일꾼으로 쓰기 위해서 타협을 한 것입니다. 무리한 전쟁보다 실리 있는 공존이 낫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미세한 균열, 절반의 순종,
결국 전체의 불순종으로
<사사기> 2장 말씀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 말합니다. 1장 내내 반복되는 단어가 ‘올라간다’였습니다. 유다가 올라가고, 그다음에 요셉 가문이 올라가고, 마지막에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사기> 1장은 전체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쫓아낼 수 있는 백성들을 여러 이유로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쫓아내지 않다가 그들과 섞이게 되고, 언약을 맺고, 결국 단 지파가 그들에게 쫓겨 나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데려와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땅으로 인도했다. 내가 말했다. ‘나는 너희와 맺은 내 언약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부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너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1~2절).
돌이켜 기억해 보십시오.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철병거보다 견고한 성벽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사사기> 몇 장을 앞서가면 드보라와 바락이 철병거 900대를 앞세운 시스라의 군대를 무너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철병거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 다른 것입니다. 마땅히 순종할 수 있는데, 순종하지 아니하는 모습입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절반의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늘 핑계 대고 변명하는 모습, 그래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이 이 백성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이미 <사사기> 1장 첫 장면에서도 이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유다가 올라가서 이겼지만, 형제 시므온을 불러서 함께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것입니다. 최대한 인원을 많이 확보하려는 인간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섬세한 머뭇거림, 작은 불신앙이 결국 철병거 앞에서 후퇴하고 타협하는 일들을 만든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합니다. 정탐꾼은 자신들의 능력을 적의 능력과 비교해서 “우리가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인간적인 계산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불순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고, 그것이 절반의 순종이 되고, 결국 전체의 불순종으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저마다 철병거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공동체에도 있습니다. 세상의 계산법으로 교회 사역을 내다보면 할 수 없는 게 전부입니다. 철병거 앞에서 변명하는 모습이 많이 생깁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화
그때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옵니다. 출발지가 주목을 끕니다. 길갈하면 <여호수아>에서 떠올라야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길갈의 열두 돌,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첫발을 내디뎠던 곳, 광야에서 미루었던 할례를 행함으로 첫 번째 유월절을 지켰던 곳, 하나님이 바로 그곳에서 말씀하시고, 새롭게 해 주셨던 출발지입니다. 은혜의 자리요, 영적 전쟁의 출발지입니다.
그 길갈에서부터 왔다는 것은 장소가 메시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냥 나타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온 곳이 길갈입니다. ‘하나님이 왜 길갈에서 너희들을 새롭게 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역사적 기억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말한 것은 추궁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고, 너희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 책망의 내용은 실패가 아니라 타협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장 19절에서 백성은 쫓아내지 못했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한 것이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이고,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타협이 문제”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왜 타협했을까요? <사사기> 1장 28절을 보면 그들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강성해졌을 때, 가나안 족속을 노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이 있을 때, 그 힘으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 힘으로 그들을 부리려고 했습니다. 그 힘으로 타협한 것입니다. “진멸하라”고 하신 명령을 “그 백성을 활용하라”라고 왜곡해 버린 것입니다.
<사사기> 1장 첫머리에 보면, 유다가 가나안 땅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고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릅니다. 포로를 욕보이는 가나안 전쟁의 풍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첫 전투에서부터 심판하러 온 그 대상을 향해서 가나안 민족의 방식으로 행하는 모습이 <사사기> 전체에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모습이 아닌 이방인들의 흉내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전체의 주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화’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처럼 닮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 앞에 신실하게 되면 누구를 닮아갑니까?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런데 그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 그 백성들을 닮아갑니다.
절반의 순종이 가져온 큰 위험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요, 그들의 신은 너희에게 덫이 될 것이다”(3절).
남겨둔 민족은 가시가 되고, 남겨둔 신들은 덫이 됩니다. 가시는 바깥에서 찔러오는 고통이요, 덫은 미끼를 놓아서 잡아먹는 도구입니다. 그들 스스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민족이 그들을 찌르는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을 사로잡는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절반의 순종이 얼마나 큰 위험을 가져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과 타협하며 실리를 추구하고, 우상도 따랐습니다. <사사기>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절반의 순종은 결국 전체의 불순종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있는 풍요의 신 바알, 아스다롯,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고,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져다준다고 했던 노동력, 일하지 않고 편리하게 살려고 했던 편리주의, 이 모든 것들이 가시와 덫이 되어서 그들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절반의 순종은 무엇인가? <사사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은 이 장면을 ‘절반의 제자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절반만 따르는 삶은 결국 전부를 따르지 않게 됩니다.
회개가 아니라, 후회의 눈물
“여호와의 천사가 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말을 하자 백성들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의 이름을 보김이라고 하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4~5절).
온 회중이 통곡했습니다. 그 자리에 ‘우는 자들’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부흥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눈물이 있고, 돌이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변화는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으며 바알 신들을 섬겼습니다”(11절).
눈물은 흘렸지만, 그 눈물은 금세 마르기 마련입니다. 회개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김’이라는 장소를 언급한 것도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와서 보김이라는 곳에 왔습니다. 보김은 벧엘이라는 지역 바로 옆입니다. 하나님의 집, 야곱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바로 그곳에서 백성들이 울며 모였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후회의 눈물이 아닙니다. 진정한 돌이킴의 회개입니다. 잠깐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그들은 죄가 아프고 끔찍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가 두려워 흘린 눈물입니다. 회개가 아닙니다. 후회의 눈물일 뿐입니다.
<사사기>는 눈물의 책입니다. 2장은 보김에서의 눈물로 시작해서 벧엘에서의 눈물로 끝납니다. 첫 울음이 진정한 돌이킴의 회개가 되지 못했기에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사사기>의 순환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악을 범하고, 고통당하고, 고통 속에 부르짖고, 하나님이 사사로 구원해 주시고, 그러나 또다시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맺은 내 언약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다”(1절b)
<사사기>는 어둡고, 눈물의 역사였지만 우리에게 복음의 소망을 주는 이유는 이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사기>가 혼란한 반역의 역사임에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끝까지 붙잡고 계십니다. 사사들은 그 언약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백성들은 절반의 순종으로 가시와 덫에 찔리고 빠졌습니다. 우리가 뽑지 않은 가시, 스스로 자초한 죄악이 만든 가시들을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심으로 머리에 쓰셨습니다. 보김에서 백성들은 눈물 흘렸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천사’ 혹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예외가 아닌 이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시적인 나타나심으로 해석합니다. 길갈에서 보김으로 와서 그들에게 언약을 확실히 지킬 거라고 선언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불순종의 가시와 덫을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셔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오늘 사사 시대,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김에서 흘렸던 이들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시대 절반의 순종이 다음 세대 전반적인 배교가 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타협이 자녀들에게 가시와 덫이 됩니다. 이 시대의 위기는 조상들이 한 절반의 순종이었고, 우리 절반의 순종이 다음 세대에 불신앙으로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길갈에서부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심판하러 오시는 걸음이 아니라, 언약을 결코 어기지 아니하시는 분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분으로, 우리의 가시를 온전히 제거해 주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새 언약에 믿음으로 참여하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언약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