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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카운트다운' Follow me! '카운트다운' Follow me! 2026 예배&선교 콘퍼런스 카운트다운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장충체육관 대학청년부가 주최하는 2026 예배&선교 콘퍼런스 카운트다운(이하 2026 카운트다운)가 ‘나를 따르라’(마 16:24)를 주제로 막 오른다. 6월 19일(금)부터 21일(일)까지 장충체육관(서울 중구 동호로 241)에서 열린다. ‘예배의 회복’과 ‘선교의 부흥’을 비전으로 삼은 청년들이 다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열방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2026 카운트다운에서는 6월 19일(금) 황성은 목사(창동염광교회) ‘CALL 부르심’, 20일(토) 김다위 목사(선한목자교회) ‘OBEY 순종’, 문대원 목사(대구동신교회) ‘UNITY 연합’, 이용규 선교사(인도네시아) ‘NATIONS 열방’, 21일(일) 박종길 목사(서빙고온누리교회) ‘TURN 회심’, 양승훈 선교사(불어권 선교회) ‘DONE 완성’, 이재훈 위임목사 ‘WIN 승리’를 주제로 메시지를 전한다. 찬양과 특순, 합심기도, 결신 등의 순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참가신청은 카운트다운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QR코드 참고). 회비는 3만 원(일요주일 연합예배는 무료). 참가신청을 한 다음 카운트다운 홈페이지 ‘My Page’에서 신청 내역을 확인하고, 현장 접수에 필요한 QR코드를 발급받아야 한다. 최성민 목사(대학청년부 본부장)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식지 않고 더욱 뜨겁게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면서 “초대교회의 예배 열정과 복음을 향한 사명을 회복하며, 그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모든 분을 카운트다운에 초대한다”고 말했다. 예배&선교 콘퍼런스 카운트다운은 2011년 시작된 집회다. 청년들의 영적 부흥과 선교 헌신을 목표로 2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여성기도부흥운동 마리아행전 ‘왕의 기도’ 국내 온누리교회 및 해외 비전교회 3,078명 참석 2026 여성기도부흥운동 마리아행전 ‘왕의 기도’가 막을 내렸다. 6월 10일(수)부터 12일 (금)까지 이어진 집회에는 국내 온누리교회 및 해외 비전교회에서 마리아 3,078명이 참석 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웠다. 2026 마리아행전에서는 10일(수)과 11일(목) 양재온누리교회 집회 실황을 각 캠퍼스 본당 에 송출했다. 12일에는 양재 사랑홀에서 다함 께 모여 연합 기도회를 했다. 첫째 날(10일)에는 송정미 사모 특순, 조호영 목사 오프닝 메시지,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기도회 등을 했다. 둘째 날(11일)에는 찬양, 정 명호 목사(혜성교회) 설교, 기도회 등을 했다. 셋째 날(12일)에는 찬양, 유기성 목사(선한목 자교회 원로목사) 설교, 기도회, 세리모니 등 을 했다. 강민정 성도(도곡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나 아가 나의 깊은 곳에 자리한 죄와 연약함부터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소망했다. 마리아행전은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 다 음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여성기도부흥운동’ 이다. 지난 2010년 시작해서 올해 17번째 집회 를 열었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복음의 증인, 기도로 서는 교회 7월 17~18일 ‘714연합기도대성회’ 714연합기도대성회(이하 714기도회)가 오 는 7월 17일(금)과 18일(토) 서울 잠실학생체 육관에서 막 오른다. ‘복음의 증인, 기도로 서 는 교회’(사 62:6)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 에는 500개 한국 교회 2만 여 성도가 참석할 예정이다. 714기도회에서는 7월 17일 오후 4시부터 8 시 30분까지, 18일 오후 1시 30분부터 8시까 지 집회가 이어진다. 17일 이인호 목사(더사 랑의교회), 유기성 목사(위지엠) 환영, 이기용 목사(신길교회), 이인호 목사 말씀, 안광복 목 사(상당교회), 이해영 목사(성민교회), 김도훈 목사(신림동산교회), 김형석 목사(필그림교 회)가 기도회를 인도한다. 18일에는 김다위 목사(선한목자교회), 이재 훈 목사(온누리교회) 환영, 문대원 목사(대구 동신교회), 이재훈 목사, 이정규 목사(시광교 회) 말씀, 이요한 목사(수원순복음교회), 류성 룡 목사(흩어진화평교회), 이지훈 목사(대구 범어교회), 남경우 목사(GMTC), 이종필 목사 (세상의빛교회), 김경석 목사(강서침례교회) 가 기도회를 인도한다. 참가를 희망하는 성도들은 714연합기도운 동 홈페이지(www.714praymov.org) 또는 하 단 QR코드로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된다. 문의: 02-868-8425 / 홍하영 기자 나를 따르라, 열방을 향해 아웃리치 발대식, 6월 24일 오후 7시 30분 2000선교본부가 ‘나를 따르라, 열방을 향해 ’ 를 주제로 6월 24일(수) 오후 7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본당에서 ‘2026 아웃리치 발대 식’을 개최한다. 이재훈 위임목사 메시지, 아웃리치를 위한 중보기도, 아웃리치 지침 및 교육 등을 할 예정이다. 국내외 아웃리치 참가자 및 공동체 리더십들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참가신청은 아웃리치 팀장이 대표로 6월 17일(수)까지 하단 QR코드로 하면 된다. 에서는 여름 아웃리치 사진과 간증 원고를 모집한다. 매주 월요일까지 간증 (한글 파일 기준 글자 10포인트로 A4용지 1 장)과 사진(가로 형태 사역 사진, 간증을 쓴 성 도 사진)을 이메일(wisdom7@onnuri.org)로 보내면 7~8월에 순차적으로 게재한다. / 박지혜 기자

     2026-06-13  제1593호

  • 칼럼

    [신앙에세이] 어느 목사에게나 미안한 교회가 존재한다 신앙에세이 어느 목사에게나 미안한 교회가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서툴고 어색했던 시절이 있 다. 나에게는 2018년, 파트전도사로 차세대 사역을 감당하던 그 때가 그랬다. 내가 사 역하던 시기에는 ‘부 교역자’는 마치 ‘보 험왕’처럼 굉장히 외 향적인 분들이 많았 다. 성향이 그렇지 않 더라도 그렇게 되기 위해 마땅히 노력해야 하 는 분위기가 있었다. 내향적인 성향이었던 나 는 먼저 성도님들께 다가가고, 맡은 부서 아 이들을 밝은 미소로 맞이하며, 학부모들과 자 녀들을 위해 신앙상담을 해주는 일이 참 어려 웠다. 그러나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만 큼 내향적인 나를 깨뜨려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 사 역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사역을 마치고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왜 그렇게밖에 설 교하지 못했을까?’ 후회를 반복하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강대상에 올라가 는 게 편안해졌고, 준비한 설교 원고를 넘어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말씀을 전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일은 물론이 고 평일에도 학생들과 학부모님들로부터 연 락이 왔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그들의 신앙적 고민을 함께 나누고 상담해 주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때 비로소 누군가에게 의지 가 되는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서 사역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 어갈 즈음, 새로운 고민이 마음 한편을 차지 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차세대 사역에 머 물 수는 없다는 현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배이신 장로님, 권 사님, 집사님들을 대상으로 설교와 목양을 과 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이 시작되었 다. 그 고민은 차세대 사역을 처음 맡았을 때 처럼 점점 깊어졌다. 나는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면, 두렵더라도 피하지 않는다. 일단 그 상황으로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 성장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에 도 마찬가지였다. 목회자로서 더 성장하고 싶 다는 마음이 있었고, 마침 하나님이 길을 열 어주셔서 온누리교회 준전임교역자로 부임할 기회를 허락하셨다. 캠퍼스 준전임전도사로 부임한 이후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곁에서 온누리교회의 다양한 사역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목사 안수를 받았고, 지금은 감사하게도 전임 사역을 감당 하는 부목사가 되었다. 오래전 본격적으로 목회 현장에 뛰어들며 경험했던 성장의 시간을 나는 여전히 선명하 게 기억한다. 처음 장년 예배 설교자로 강단 에 섰을 때도 그랬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수없이 수정하고 연습했던 원고가 막상 강대 상에 오르자 백지장처럼 느껴지던 그때를 기 억한다. 그 백지 위의 글씨가 다시 보이기까 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돌아보 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병아리 전도사 시절부터 나를 기다려주시 고, 부족하기 짝이 없던 설교조차 인내하며 들어 주셨던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참 많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게는 온누리교회에서 성 장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성도님들에 대한 미 안함이 늘 남아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은 언제나 과분한 사랑을 주셨고, 서툴기만 했던 나를 기도로 세워주셨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 지 받은 사랑과 기도의 빚을 결코 잊을 수 없 다. 늦었지만 이 지면을 빌려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특히 온누리교회 서산캠퍼스 성 도님들이 생각난다. 언제나 아들처럼 품어 주 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떠나서 죄송한 마음이 크다. 아주 그 립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온누 리교회와 성도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 가 되기 위해 오늘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 성은일 목사(춘천새순교회)

     2026-06-13  제1593호

  • 칼럼

    [정주호의 Holy Body]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입니다” 정주호의 Holy Body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입니다” 많은 사람이 살을 빼야겠다고 다짐하고 운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포기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의지의 문제일까? 의지가 있는데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심은 하는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의지와 행동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마음이다. 우리 안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운 마음, 잘되지 않을 것 같은 걱정, 미래를 향한 막연한 불안이 있다. 이것은 단지 운동과 체중감량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부, 직장, 관계, 건강, 신앙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불안은 대부분 마음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상처와 경험, 미래에 대한 염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각은 점점 커지고, 마음은 흔들린다. 같은 현실에서도 어떤 사람은 평안하고, 어떤 사람은 무너진다. 현실보다 해석이 불안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에서 시작된 불안이 결국 몸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걱정이 많아지면 어깨가 올라간다. 목은 굳어지고, 숨은 불규칙해지고 짧아지게 된다. 밤에 잠이 오지 않고, 새벽에는 걱정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운동을 권한다. 몸을 움직이면 세로토닌, 도파민, 엔도르핀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고, 몸은 회복되기 시작한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 혼, 육의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잘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삶 전체가 강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영에서 혼을 지나 육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회복이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꾼다고 믿는다. 맞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육에서 혼을 지나 영으로도 일하신다. 잠을 충분히 자고, 몸을 움직이고, 깊게 호흡하고, 운동하며 몸이 회복되면 놀랍게도 마음이 안정되고, 감정이 회복되며, 신앙생활에도 힘을 얻게 된다. 영적인 문제처럼 보였는데 시작은 몸이었던 일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은 이 땅에 몸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셨고, 만져 주셨고, 안아주셨다. 몸을 통해 마음을 만지셨고, 마음을 통해 영혼을 회복시키셨다. 예수님의 회복은 언제나 삶의 가장 실제적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상처 입은 몸, 지친 마음, 무너진 삶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은 단순히 제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의 무너진 부분을 다시 만지시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불안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라는 초대일 수 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삶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님 안에서 영, 혼, 육이 건강한 성전으로 살아가기를 건강전도사 정주호가 응원한다. / 정주호 대표(중종로공동체, 재활과학박사, 한동대학교 겸임교수)

     2026-06-13  제1593호

  • 칼럼

    [크리스천의 건강한 생활] 예수님은 종합병원 의사 크리스천의 건강한 생활 예수님은 종합병원 의사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동안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 치유사역은 예수님의 공생애 3대 사역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사역이다. 치유사역의 목적은 예수님이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고(마 14;14), 치유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요 11:4). 예수님은 수많은 치유를 하셨는데, 4복음서에서 질병의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 20회가 넘는다. 특히 <마태복음> 9장과 <마가복음> 5장에는 각각 3회와 6회 치유사역이 기술되어 있다. 치유된 질환의 종류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현대 종합병원의 여러 진료과를 아우르는 ‘전과 전문의’셨다. 안과, 재활의학과, 성형외과 등 오늘날 의료체계로 구분하면 11개 이상 진료 분야에 해당하는 치유사역을 행하셨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안과 진료는 실로암 연못(요 9:7)의 맹인과 바디메오(막 10:52)를 포함해 네 차례나 기록되어 있다.(마 9:30, 막 8:25) 재활의학과 전문의로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환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고(요 5:8), 안식일에는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셨으며(마 12:13), 이방 지역 베레아에서는 18년 동안 허리가 굽은 여인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셨다(눅 13:13). 또한 가버나움에서는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막 2:11)와 백부장의 중풍병 걸린 하인(마 8:13)을 고치셨고, 변화산 아래에서는 간질 걸린 아이를 회복(막 9:27)시키시는 신경과 진료를 하셨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향해 “죽지 않고 잠든 자”라고 말씀하셨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누 7:15)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에게는 “달리다쿰, 일어나거라”라고 외치시며 잠을 깨우셨다(막 5:42). 그리고 베다니에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라고 외치시면서 나사로를 살리셨다. 이러한 사역은 마취과 의사와도 같았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나병환자(막 1:42)와 사마리아의 나병환자 10명(눅 17:14)을 치유하신 피부과 의사이기도 하셨다. 또한 가버나움 회당의 귀신 들린 사람(막 1:26)과 거라사 지역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막 5:15)을 회복시키셨고,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는 자신의 딸을 식탁 밑에서 부스러기 먹는 개로 비유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막 7:30) 온전한 정신을 되찾게 하는 정신과 의사 역할을 하셨다. 내과 의사로서는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마 8;15), 베레아에서는 복부에 물이 찬 수종병 환자를 치유하셨다(눅 14:4). 또한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12년 동안 혈우병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막 5:29) 산부인과 의사이셨으며, 데가볼리 지역에서는 귀먹은 자에게 “에바다, 열려라” 말씀하시며 듣고 말하게 하신 이비인후과 의사이셨다(막 7:35). 예수님의 마지막 치유사역은 성형외과 의사에 비유할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베드로가 칼로 대제세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다(요 18:10). 예수님은 그 잘린 귀를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주셨다(눅22:51). 또한 가나에서는 왕의 신하 아들이 죽어갈 때 직접 찾아가지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치유하셨는데(요 4:51), 이는 오늘날 원격진료를 떠올리게 한다. 더 나아가 이방 지역인 갈릴리 서북쪽 두로와 시돈, 그리고 요단강 동편 베레아까지 두루 다니시며 순회 진료도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 그 어느 의사보다 바쁘게 사역하신 ‘일당백 의사’셨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의사가 많은 지역에서는 의사의 손길을 통해 치료하신다. 기독교 무료병원인 다일천사병원은 ‘하나님은 치유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를 사명으로 삼으며 치유자는 하나님이시라고 천명(闡明)한다. 반면 의사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선교사의 기도로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 의료선교사는 “선교지에서는 기도로 치유가 일어나는데, 서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사가 없는 곳에서는 예수님이 의사가 아닌 선교사를 통해서 치유사역을 이어 가신다. 의사들은 예수님 치유사역의 동역자다. 성경의 많은 분량이 치유사역을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설교 말씀에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지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의사 윤리로서 희생, 봉사,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히포크라테스선서도 중요하지만, 의사들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동참한다는 소명 의식을 가져야 한다. 환자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많은 치유사역을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의사를 통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 / 이철 장로 (OCC 공동체, 하나로의료재단 명예 원장, 전 연세의료원장)

     2026-06-13  제1593호

  • 사역

    [선교] “선교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온누리 IN2 콘퍼런스의 의미 그리고 역할 “한 교회가 세계 선교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온누리교 회는 전 세계 교회의 귀한 모델입니다.” ‘ 2026 온누리 IN2 콘퍼런스’가 비서구권 교 참가자 간증 회 지도자들에게 온누리교회의 선교 비전과 사역을 공유했다. 비서구권 교회 지도자를 비 롯해 온누리교회 목회자 및 선교사역팀 리더 십, 봉사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2026 온누리 IN2 콘퍼런스는 ‘선교는 교회 의 심장입니다’를 주제로 지난 5월 19일(화)부 터 24일(일)까지 Acts29비전빌리지 김사무엘 홀에서 열렸다. 5월 19일(화)에는 박종길 목사(서빙고온누리 교회) ‘요단강 건너기’(수 3:17) 말씀, 김홍주 목사(2000선교본부장) ‘Acts29 비전과 사역’ 강의 등을 했다. 5월 20일(수)에는 여성민 목사 (전도사역본부장) ‘맞춤전도’, 배행삼 목사 (2000선교) ‘온누리양육체계와 성도의 여정’, 이재훈 위임목사 ‘Movement인가? Monume nt인가?’ 강의, 대학청년부 1인극 공연, 순예배 시연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이날 이재훈 위임 목사는 “선교가 교회의 심장임을 다시 한번 깨 닫고, 각 교회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동 적인 원동력이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5월 21일(목)에는 양성민 목사(양육사역본 부) ‘QT’, 허복만 장로(부천온누리교회) ‘일대 일제자양육’, 김재석 목사(가정사역본부장) ‘ 가정사역’강의 등을 했다. 5월 22일(금)에는 권은영 목사(NGO더멋진세상) ‘NGO더멋진 세상’, 이기원 목사(회복사역본부장) ‘BEE사 역’강의, 자유 토론 등을 했다. 5월 23일(토)에 는 국가별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국립박물 관 등지를 방문했다. 5월 24일(일)에는 SNS공 동체, 여호수아공동체와 함께 예배드렸다. 2026 온누리 IN2 콘퍼런스 참석자들은 한 목 소리로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임을 다시 확인하고, 각 나라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연 합을 다지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참가자 간증 하나님이 맡기신 지상명령 온누리교회에서 개최한 2026 IN2 콘퍼런스 에 우리 교회 목회자들과 동역자들이 함께 참 석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콘퍼런스 첫날, 메인 스크린에 비친 “선교는 교회의 심장입니다”라는 문구가 제 마음을 사 로잡았습니다. 사람의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살 아갈 수 없듯이, 선교적 소명을 잃어버린 교회 는 점차 영적인 활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다 시 생각했습니다. 저는 문득 ‘어떻게 온누리교 회는 모든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선교적 마 음을 깊이 심어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선 교가 단순한 교회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상에 서 실천하는 사명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 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온누리교회는 12가정으로 시 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왔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건강한 교회의 토 대를 세워 왔고, 청사진을 단계적으로 세워 나 갔습니다. 며칠 동안 강의를 듣고, 선교사와 장 로, 소그룹 리더, 그리고 우리를 환대해 준 성 도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복음과 선교를 향 한 열정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콘퍼런스는 교회가 단순히 모임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모두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날마 다 새로워지고, 기꺼이 준비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파송되고, 하나님의 손에 귀하 게 쓰임 받기를 소망합 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우리 교회 가 하나님의 선교적 마 음으로 가득 차, 이 시 대 가운데 밝게 빛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 합니다. /메리 송 집사 (말레이시아 쿠칭 시 트리니티 감리 교회 선교위원회) ‘Act29 비전’에 초대받은 사람들 2026 온누리 IN2 콘퍼런스에 참석하면서 수 많은 영적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엇보 다 리더 한 명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 얼마 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다 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故 하용조 목사 님께 주신 Acts29 비전이 온 교회에 선교적 열 정을 일으켰고, 그 비전이 오늘까지 이어져 수 많은 성도가 사명감을 가지고 선교에 헌신하 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 비전 을 통해서 일대일제자양육과 큐티 사역이 시 작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는 점 역시 큰 감동이었습니다. 한 교회가 세계 선 교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 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전 세계 교회에 귀한 모델입니다. 이 귀한 사역이 앞으 로도 이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저 역시 이 사역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2019년 비타민C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횃불 트리니티신학대학교대학원을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2026 온누리 IN2 콘퍼런스에 비서구권 지도 자 20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들이 각자의 나라와 선교지로 돌아가 이곳에서 받은 비전 과 도전을 나눈다면 그 영향력은 훨씬 커질 것 입니다. 故하용조 목사님으로부터 시작된 비 전이 온누리 IN2 콘퍼런스를 통해서 열방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Acts29 비전에 초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가 29장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합 니다. 모두가 선교지에 서 29장을 써 내려가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 찰스 마리에 콩데 목사 (코트디부아르 AOG교단 총회장) 선교는 말이 아니라 실천 한국에 머무는 동안 故 하용조 목사님의 묘 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 용조 목사님처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선교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선 교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넘어서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사역 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몽골의 칭기즈칸 왕을 잘 알 것입 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정복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전사로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며, 잃 어버린 영혼들을 그분께로 인도하는 삶을 살 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평생 하나 님의 선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선포합니다. 말로만 하는 약속이 아닙니 다.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몽골의 한 교회를 섬기기 위해 30km 떨어진 지역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도로 사정이 열악 한 몽골에서는 험한 길을 오랜 시간 이동해야 하는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 회 성도들은 지금까지 꾸준히 그곳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교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 을 경험으로 배우고 있 습니다. 2026 온누리 IN2 콘퍼런스 참가자 들께 부탁하고 싶습니 다. 이번에 배운 것들을 각자의 선교 현장으로 돌아가 반드시 실천해 주십시오. / 장발스랭 목사 (몽골 Kingdom Family Network 대표 목사)

     2026-06-13  제1593호

  • 사역

    [마리아행전] "예수님처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겠습니다!” 나와 교회, 민족과 세상을 위한 왕의 기도! “예수께서 이말씀을하시고눈을 들어 하늘 을 우러러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1a).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이 눈을 들어 하 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셨다. 자신을 위해, 제 자들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마리아들이 바로 그 왕의 기도를 따라, 나와 교회, 민족과 세상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첫째 날, 자신을 위한 왕의 기도 6월 10일(수) 오전 9시 40분,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 마리아들이 하나둘 모였다. 이윽고 예배당이 그녀들의 기도로 채워졌다. 오전 10시, 집회가 시작됐다. Blossom 챔버의 연주와 찬양이 울려 퍼졌다. 송정미 사모의 특 순이 끝나고, 조호영 목사(여성사역본부장)가 단상에 올랐다. “내 욕심과 뜻을 앞세우는 기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원하시는지 배워보십시 오.” 첫째 날 설교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왕의 기도’(요 17:1~5)를 주제로 했다. 기도회는 김정희 목사(양재여성사역)가 ‘자신을 위한 기도’ 를 주제로 인도했다. 둘째 날, 교회를 위한 왕의 기도 마리아행전 둘째 날 집회는 The Blessing 챔 버의 연주와 찬양, 기도로 시작됐다. 설교는 정 명호 목사(혜성교회)가 ‘세상 안으로 보내심 을 받은 자들의 기도’(요 17:6~19)를 주제로 했다. 마리아들의 기도는 날이 갈수록 뜨거워 졌다. 둘째 날 기도회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 다. 김현실 목사(부천 여성사역)가 ‘교회를 위 한 기도’를 주제로 인도했다. 말씀을 잃지 않 는 교회가 되도록,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 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진리로 거룩해지는 교회가 되도록 부르짖었다.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회도 이어졌다. 이윤재 목사(수원 여성사역)가 ‘정치, 법, 사회를 위한 기도’를, 김미정 목사(인천 여성사역)가 ‘교육, 문화, 미디어를 위한 기도’를 주제로 인도했다. 셋째 날, 세상을 위한 왕의 기도 집회 마지막 날,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마리아들이 모였다. 설교는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원로목사) 가 ‘아버지, 하나 되게 하소서’(요 17:20~26) 을 주제로 했다. 기도회는 배순양 목사(제주 여 성사역) ‘북한, 통일을 위한 기도’, 권오향 목 사(남양주 여성사역) ‘열방을 위한 기도’를 주 제로 인도했다. 백미는 세리머니였다. 마리아 들이 서로에게 왕관을 씌워주며 손을 맞잡고 축복했다. / 홍하영, 박지혜, 남현영 기자 인터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 평소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왕, 선 지자,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하나 님 나라가 임하고,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도 꾸준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단의 계략을 분별할 지혜와 영적 전쟁을 감 당할 능력을 주셨음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첫날 메시지를 들으면서 기도의 은 사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 다. 세상의 우상뿐만 아니라 제 안의 우상도 돌아봤습니다. 이것을 무너뜨릴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며, 마지막 시대 성도 에게 순교적 신앙의 중요성을 마음에 새겼습 니다. 앞으로는 “하나님, 제가 죽기를 원합니 “무너진 곳을 세우는 중보자” 다”라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부 어주시는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웠 습니다. 그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비로소 타인 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고 믿습니 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한 삶은 예배하는 일상에서 시작된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 재로 지으셨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참된 예 배자로 부르고 계신다 고 믿습니다. / 이승진 집사(강남B공동체) "무너진 곳을 세우는 중보자" 평소에도 교회를 위한 기도를 매일 드렸는 데,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결국 점점 악해질 텐데, 내가 기도한다고 달라 질까’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그 기도가 실제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품은 채 마리아행전 자리에 앉았 습니다. 말씀을 듣는데 무엇인가 달라지기 시 작했습니다. 우리가 연합해서 기도할 때 하나 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 내 기도가 작아 보여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음으로 붙 들게 됐습니다. 특히 “무너진 곳을 세우는 중 보자”라는 말씀이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함 께 기도하는 지체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한 군 대가 되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 니다. 교육, 미디어, 정치 등 세상의 모든 영역 을 위해서 지금보다 구체적으로, 더욱 민감하 게 기도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포함해서 하루 한 시간은 기도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 기도할 제목이 많아졌습니다. 교회 리더십을 위해, 세속화되는 이 시대를 분별하기 위해, 다음세 대를 위해 더 깊이 무 릎 꿇겠습니다. / 박진영 집사(이수공동체)

     2026-06-13  제1593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나를 따르라 (4) 바위 틈새에서 바라본 영광 나를 따르라 (4) 바위 틈새에서 바라본 영광 <출애굽기> 33:12~23 / 이재훈 위임목사 기도는 영혼의 창문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지, 혹은 하나님과 얼마나 상관없이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개인의 건강과 자녀, 사업과 관계의 문제 등 모든 기도제목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기도제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도제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갈망 모세가 있는 자리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기적의 통로로 쓰임 받았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할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만하면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나를 따르라’를 주제로 제자 됨의 증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되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분에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갈망과 그분의 임재를 갈급해하는 영혼입니다. 오늘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중요한 증거를 찾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갈망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바위 틈새에 두시고 그 손으로 덮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 뒤 그 뒷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위 틈새에서 모세가 보았던 영광이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갈망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가 주를 알게 하소서” <출애굽기> 33장 12절에서 17절까지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가 나옵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하나님을 배신한 이후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주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선물은 주시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들이니 여차 하면 내가 가는 도중에 너희를 멸망시킬지 모르니 말이다”(출 33:3). 여러분이 모세였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래도 약속의 땅은 들어갈 수 있으니 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중보기도합니다. 모세의 간구를 보면 그 갈망이 한 단계씩 깊어집니다. 그 간구에 응답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도 한 단계씩 깊어집니다. 모세가 가장 먼저 구한 것은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13절을 보면 “주의 길을 내게 가르쳐 주셔서 내가 주를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친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님(Panim), 얼굴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얼굴이 가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너와 함께’라는 표현은 해석을 돕기 위해 덧붙인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모세를 향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모세를 부르셨기에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명확하게 분석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거든 아예 우리를 여기서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나와 주의 백성들이 주께 은총을 입었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와 주의 백성들이 지면의 다른 모든 백성들과 어떻게 구별되겠습니까?’”(15~16절). 모세의 기도는 어떤 내용입니까? 약속의 땅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것보다, 모든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다 받아도 그것을 주시는 분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분이 더 귀하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를 만들어내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패역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이 이 백성들과 함께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네가 말한 그대로 내가 하겠다. 네가 내 은총을 입었고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모세에게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이 모세가 기도한 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하고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과도 함께 하십니다. 약속의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백성들과 함께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간구와 중보에 응답하심으로써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또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기도제목이 바로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러면 부탁입니다만, 내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18절). 모세는 이미 임재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구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의 마음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결코 거기서 멈추지 못합니다. 그분을 더 알기를 원하고, 그분을 더 보기를 원하고, 그 영광을 보기를 갈망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에게 있어야 갈망은 그분을 더 알기 원할 뿐만 아니라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제자의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증거입니다. 제자도를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로 먼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제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연결되어 있는 존재,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께 목말라 해야 합니다. 그분과의 교제를 깊이 추구하면서 응답을 받습니다. 모세는 응답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하며 궁극적으로 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카보드(Kabod)’인데, ‘무게’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게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이 있고, 묵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무게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통치되는 무게, 하나님 자체의 무게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달랐습니다. 흙장난에 머무르지 않고 바다 자체를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삶의 선택 기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실체는 선함입니다” 모세의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데,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겠고 내가 네 앞에 내 이름 여호와를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19절).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 모든 선함을 내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영광을 구했는데 선하심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놓쳐선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영광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당시 이방 민족들은 자신들의 신을 무서운 빛으로 떠올렸다고 합니다. 쏟아지는 빛,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빛, 사람들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빛입니다. 이방 신들의 임재는 그저 힘을 자랑하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선하심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영광은 무엇입니까? 선함이 발견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같이 선함의 열매가 나타날 때 우리는 영광스러움을 봅니다. 하나님 영광의 실체는 선함입니다. 14절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내 얼굴이 가리라, 내가 친히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정반대로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라고 하십니다. 똑같은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내 얼굴이 가리라”라고 하셨는데, 20절에서는 “그 얼굴은 볼 수 없다, 보게 되면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얼굴, 기꺼이 보여주시는 얼굴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 보게 되면 죽는 얼굴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가려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심으로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것을 하나님의 낮추심, ‘어코모데이션’(Accommodation)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어른이 아기들과 대화할 때 눈높이에 맞춰서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그렇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갈망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영광을 안전하게 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러고 나서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 가까운 곳에 바위가 있으니 그 위에 서 있어라. 그러면 내 영광이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바위 틈새에 두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내 손으로 덮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내 손을 뗄 것이니 너는 내 뒷모습만 보고 내 얼굴은 보지 못할 것이다’”(21~23절).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시되, 그 영광을 보고 죽지 않도록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위 틈새에 모세를 두고 손으로 덮어주시고 그 영광이 지나간 후에 그 뒷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 복음이 나타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바위틈에 숨겨주셨고, 그 손으로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바위틈은 우리가 그 안에 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안전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존재, 곧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래된 찬송가 가운데 이런 가사들이 있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반석은 바위를 뜻합니다. 바위가 열려 내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찬송 가사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편히 쉬리니 나의 반석 구주 예수 나를 숨겨 주소서’,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안전한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을 덮으시네’는 오늘 본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를 위해 갈라지고 열린 반석 틈에 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안전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오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모세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시대가 열렸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고후 4:6).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요 1:14). 모세가 보기를 갈망했지만, 뒷모습만 보았던 영광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닫혀 있던 그 얼굴이 그리스도 안에서 활짝 열리며 “와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위틈에 숨어서 손바닥에 가린 채 보았지만, 우리는 바위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일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습니다”(고후 3:18).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내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반석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갈망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원했던 것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도 주셨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영광이었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모세는 바위 틈새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바위 틈새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는 뒷모습만 보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6-12  제15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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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단] 나를 따르라(3) 사슴이 알려준 제자도의 비밀 나를 따르라(3) 사슴이 알려준 제자도의 비밀 <시편> 42:1~11 / 이재훈 위임목사 <시편> 42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첫걸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갈망은 감정의 영역이지만,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고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올바른 지식이 있고, 행하려는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서가 죽어 있다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헐떡이는 것은 몸 전체가 목이 마를 때, 몸 안에 있는 모든 모공이 목말라 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슴은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는 짐승인데, 헐떡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라면 얼마나 간절히 목이 마른 상황인지를 보여줍니다(시 42:1). 사슴은 몸 안에 물을 저장할 저장소가 없기에 수시로 수분을 보충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낙타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면 물을 저장해서 살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물을 마시면 되니까 얼마나 편안하고 경제적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낙타가 아니라 사슴입니다. 사슴은 물에 아주 예민하고 자주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살아있는 신앙과 없는 신앙은 매우 다릅니다. <시편> 기자는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살아있습니다. 사슴이 알려주는 제자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의 갈망이 깨어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갈망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종교적 활동에 불과합니다. 선물은 받지만,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갈망은 가지지 않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시편> 기자가 갈망하는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종교적 활동도 아닙니다. 성전도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말라 합니다(시 42:2).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시편> 기자는 어떻게 이 깊은 갈망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의 갈망은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가 아니라 척박한 광야에서 얻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이 깊어지는 자리는 가장 척박한 광야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실제로도 광야에 있습니다. 더 넓게 표현하면 세 겹의 광야에 있습니다. 세 겹의 광야에서 첫째, '사회적 광야'입니다(시 42:3). 한두 번 사람들에게 조롱받은 게 아닙니다. 종일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비난입니다. “너를 보니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 “당신을 보니 예수님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조롱입니다. “교회를 보니 예수님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게 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최고의 칭찬은 “당신을 보니 하나님을 믿고 싶다”,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네”, “교회를 보니 나도 예수님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사회적으로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너의 이 불안하고 낙심에 있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람은 실제로 '물리적 광야'에 있습니다(시 42:6). 요단 땅, 헤르몬 산, 미살 산은 지금 이스라엘 최북단 시리아 국경 지역입니다. 요단강의 발원지입니다. 미살 산은 아마 헬몬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떤 일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이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북쪽 변방으로 피신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했을 때 함께 도피했던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시편> 42편 4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집을 다니며 명절을 지키러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뻐 외치며 찬양하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무너지게 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할 때 사람들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시편> 기자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 깊어졌습니다. 만일 그가 예루살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면, 이 <시편>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의 가장 감동적인 고백들의 공통점은 모두 광야에서 쓰였다는 것입니다. 깊은 광야에서, 험한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고백과 갈망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는 '영적 광야'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조롱만 받은 게 아니고, 물리적인 광야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침체와도 싸우고 있습니다. <시편> 42편 5절과 11절에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오 내 영혼아,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느냐? 왜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인데, 여기서 ‘풀이 죽어 있다’와 ‘불안해하다’라는 동사를 분석해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풀이 죽어 있다는 건 의기소침해서 가라앉은 상태이고, 불안해한다는 것은 으르렁거리며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가라앉고, 한편으로는 끓어오릅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며, 섬기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의 영혼을 사슴으로 비유하며, 그분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침체의 상태를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적 침체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친밀함을 경험했던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과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매너리즘이 아닙니다. 매너리즘은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는 갈망이 있기에 괴로운 것입니다. <시편> 42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광야에 있던 한 영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물리적으로도 광야에 있고,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의 갈망이 역설적으로 더 강렬해졌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이, 강렬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망을 통과하고 헤쳐 나오는 방법 이 <시편> 기자는 갈망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갈망을 통과하고 어떻게 헤쳐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침체와 가라앉음 속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섬겼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찬송 받으셨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은혜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합니다. 5절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릅니다. 여러분, 가만히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매일 누군가와 말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염려의 말, 절망의 말, 두려움의 말, 근심의 말, 비교 의식의 말, 후회의 말이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자기 자신에게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태어난 새 사람이 우리의 옛사람을 향해 계속 말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책망하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끊임없이 말하는 것에 끌려가면 안 됩니다. 셋째, 영혼은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그 갈망을 이어갑니다. “내가 오히려 그분을 찬양하리라”는 말씀에서 ‘오히려’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환경이 다 바뀐 뒤에 감정이 좋아지면 찬송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광야의 한복판에서 상황은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이 깊이 익어가는 곳은 찬송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그분을 갈망하고, 광야의 한복판에서 그 갈망이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조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42편을 붙잡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아버지를 갈망하며 살아가셨다면, 우리도 이 <시편> 말씀을 붙잡고 목마른 한 마리의 사슴처럼, 광야 속에서도 하나님을 갈망하고, 찬송하는 자리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삶의 분주함이 그 갈망을 대체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갈망 없는 신앙생활은 활동에 불과합니다. 우리 안에 잃어버린 갈망이 깨어나도록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광야 속에서 이 갈망이 더 깊어짐을 감사하십시오. 매일 아침 <시편> 42편 5절 말씀을 여러분의 영혼을 향하여 먼저 말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6-05  제1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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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세이] 권사님들과 함께 양화진 순례  [신앙에세이] 권사님들과 함께 양화진 순례 봄기운이 완연했던 5월의 어느 화창한 날, 강서공동체 권사님들과 함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았다. 모임 장소와 가까운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조금 일찍 도착해 홀로 둘러보았다. 절두산 순교지는 양화진과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톨릭 성지라는 막연한 거리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훨씬 고요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공간이었다. 병인박해 때 수많은 성도가 순교했던 현장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평화로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으니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던 이들의 시간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래도록 묵상하고 싶은 여운을 남기는 장소였다. 권사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양화진으로 이동했다. 양화진은 189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 생을 마감한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대학생 시절 처음 해외 아웃리치를 갔을 때 선교사님에게 이곳의 존재를 듣고 여러 번 방문했는데, 이번 방문은 10여 년 만이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도슨트의 안내 덕분에 양화진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삶과 한국 기독교 역사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는데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복음과 교육, 의료선교를 위해 낯선 조선 땅에 왔던 그들의 헌신 앞에서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영상 속 선교사들은 먼 시대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름도, 언어도 낯설었던 이 땅을 사랑하며 살아낸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익숙한 삶을 내려놓았던 그들의 선택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믿음을 돌아보게 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지난 시간도 떠올랐다. 선교적 사명과 목회자의 소명 사이에서 고민하며 걸어왔던 시간들. 예전에는 단지 ‘헌신한 선교사들’로만 보였던 분들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익숙한 삶을 내려놓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순종하며 걸어갔던 선교사님들의 그 믿음의 발걸음이 내 마음을 깊이 울렸다. 묘원투어 하던 그날은 유난히 햇볕이 따뜻했다. 눈부신 햇살 때문에 쓴 선글라스는 어느 순간 흐르는 눈물을 가리는 도구가 되었다. 특히 한쪽에 자리한 작은 묘비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태어난 해와 마지막 해가 같거나 한두 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어린아이들의 묘였다. 몇 대에 걸쳐 이 땅에 복음을 심고자 했던 선교사 가족들의 희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묘비 앞에 잠시 서 있는 동안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대학생 때 선교사의 꿈을 품고 중국 우루무치에서 자비량 선교사로 1년 반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품었던 선교적 부르심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중요한 소명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내가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사역자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삶과 부담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동시에 다시 도전받는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렸던 믿음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순종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양화진에서의 하루는 내 마음을 다시 새롭게 했다. 사역의 열매보다 중심을 돌아보게 하셨고, 일이 아닌 사명으로,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목회를 감당해야 함을 다시 깨닫게 하셨다. 조선이라는 낯선 땅을 품고 순종했던 선교사들의 발걸음을 기억하며, 나 역시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되게 걸어가기를 소망한다. 함께했던 강서공동체 권사님들과 이 은혜를 나눌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한 하루였다. / 하성희 목사(강서공동체)

     2026-05-30  제1591호

  • 칼럼

    [특별기고] 성서적 세계관 가진 후보를 선출하자! [특별기고] 성서적 세계관 가진 후보를 선출하자! 지방선거 선출직 공직자 자격과 선출 기준에 관하여 많은 기독교인이 “정치 이야기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진리를 오해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관념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의 상당 부분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지도자의 분별력, 국제 관계를 다루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가 당시 이집트가 아닌 바빌론과의 관계를 강조했던 것처럼,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향과 정책적 결정에 달려 있다. 복음의 핵심은 세상 모든 나라와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증명하는 실체적인 세계관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그리스도의 권위가 미치는 모든 국가와 권력 위에 있으며, 동시에 그 국가 안에서 행사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선언 역시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배타적인 영적 영역에 한정되거나 죄와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만 국한된 곳이 아니다. 정치에 대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세계관 차이 인류 역사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는 것은 시민의 문화적 책임을 전면 부인하는 행위이자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에게 항복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치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간의 핵심적인 전쟁터 중 하나이다. 인본주의자들은 “국가자원의 배분권을 주도하는 정치가 가장 중요한 전쟁터”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특히 공산주의, 사회주의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에게 가장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 국가권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를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본다. 반성서적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에게는 독재 권력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자체가 종교화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를 교회로 만들고자 한다. 북한이 주체사상을 모든 국민에게 강요하고, 중국 공산당이 공산주의를 강요하면서 다른 종교와 이념을 배타적으로 탄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서적 인간관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죄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에 정부의 권력은 가능한 최소화되어야 하며, 국가의 입법, 행정, 사법은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상호 철저하게 견제해야 한다. 정부는 외교, 국방, 공정한 법질서 유지를 위한 경찰, 검찰, 법원이 상호 권력 남용 방지를 제도화하고, 개인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책임지며, 그 이외의 권력은 개인, 가정, 교회, 지방의 자치정부가 주민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율적으로 자기 책임을 지도록 행사해야 한다. 세금과 규제가 줄어들고,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되는 형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델이다. 반면 인본주의·사회주의 독재 정부는 인간 본성은 선하나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면서 정부가 국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 기본 소득 등 모든 삶을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지만, 정부가 국민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대신 정부를 찾게 된다. 결국, “어떤 정부 형태가 신앙에 유리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시스템이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데 더 적합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역할분담 지방자치는 국가권력을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으로 나눈다. 중앙정부는 국가의 존립과 전국적·통일적 사안을 담당하고, 지방정부는 주민의 삶의 질과 관련된 행정서비스를 지역 실정에 맞게 제공하도록 하는 수직적 권력분립 제도를 말한다. 즉, 국가권력을 중앙정부가 독점적으로 행사하지 말고, 지방정부와 나누어 행사하라는 헌법의 명령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중앙정부는 외교와 국방, 전국적·통일적 국가 사무를 넘어, 지방정부가 수행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지역경제, 주택, 교육 등의 사무에까지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해 왔다. 그 결과, 각 지방은 애향심과 창의적인 정책을 통해 지역발전의 성과를 충분히 이루지 못했고, 저출생·고령화와 맞물려 지역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더욱이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시하려 했다면 국회와 지방의회 간 입법권의 범위를 명확히 조정하고, 중앙정부가 보유한 재원의 상당 부분도 지방정부와 합리적으로 나눴어야 했다. 그러나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은 지방자치 실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8대 2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인권과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인류 공통의 도덕과 윤리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법률과 조례를 무분별하게 입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차별금지법을 이유로 특정 종교인들을 처벌하는 것은 사회적 상규와 도덕, 윤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국회와 중앙정부가 동성애 합법화 지지, 북한 동포의 인권침해를 외면한 채 추진되는 위장된 평화, 국민통합 저해, 대한민국의 정통성 훼손,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과 기독사립학교의 신앙교육 권리 제한, 교사 임용권 박탈, 과도한 기업 규제와 조세 제도 등을 입법하더라도, 주민의 대표기관인 지방의회가 지역 주민의 실질적인 지지와 의사를 반영한 자치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무엇보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 가족이 무너지면서 1인 가구가 급증했고, 개인은 위기에 처해도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특히 청년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얻지 못해 결혼마저 포기할 정도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치외법권적 특혜를 제도화하며 또 다른 불의를 만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압도적 다수가 지배하는 국회와 강력한 중앙집권적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중앙정부와 정치권은 노무현 정부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지방 균형 발전을 외쳐 왔지만, 수도권 인구 집중은 더 심화했고, 지방소멸은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중앙정부 부처를 세종시로 이전하면 지방분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처럼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막대한 국고만 투입되었을 뿐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문제는 계속 악화하고, 중앙집권 구조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방을 살릴 유일한 길은 성서적 기준에 따라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이루는 것이다. 외교와 국방, 대외경제, 국가 치안, 대법원과 같은 국가적 사무를 제외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지방권력기관(지방법원, 지방검찰, 지방경찰 등)은 주민의 통제를 받을 수 있도록 분권해야 한다. 이를 통해 중앙정치 권력의 독주를 지방정부가 견제하고, 진정한 수요자 중심의 지방자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회복과 번영의 길 지방선거에서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많은 유권자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고 했다. 결국,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역과 국가의 미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첫째, 유권자는 후보자가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성과를 이루어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탁월성과 헌신, 그리고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춘 후보자인지 검증해야 한다. 주민들이 책임 있게 지도자를 선출할 때 비로소 정치인은 유권자를 두려워하게 된다. 둘째, 유권자는 각 정당이 국가적 과제들에 대해 어떤 정책과 성과를 보여 왔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국가안보, 인공지능 시대의 노동 변화, 공교육 문제 등에 대해 실제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는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지방분권을 진정성 있게 추진하였는지 아니면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확산하였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해 투표해야 한다. 셋째, 단체장과 교육감, 지방의원 후보들이 올바른 역사관, 청년 일자리, 공동체 회복, 지역경제 활성화, 주민 안전, 치안과 교육 정책 등을 자유민주적 가치와 윤리관에 따라 어떻게 실현해 왔는지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유권자의 신중한 선택이 지역과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유권자의 삶의 문제는 국가의 도움 없이도 개인, 공동체, 지방정부 차원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다음세대에게 대책없이 재정 부담을 떠넘기며 무책임한 각종 복지 및 교육 정책을 남발하며 마치 정치 권력이 유권자의 구세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우주와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제왕적 대통령제와 과도한 중앙집권 체제는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정치 구조라는 점에서 반성서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약자가 보호받는 공동체 형성, 양성평등과 가족의 가치 존중, 그리고 지방의 검찰·경찰·법원이 지역의 질서와 정의, 공평을 실현할 수 있도록 실질적 지방자치를 위해 중앙정부와도 맞설 각오가 되어 있는 능력 있고 용기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서적 세계관과 책임 있는 가치관을 가진 지도자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만일 이러한 후보가 없다면, 이는 교회가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충분히 길러내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유권자는 성서적 세계관을 가진 자유민주적 가치와 우리 사회의 도덕·윤리관을 공고하게 할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해야 할 정치적 사명이 있다. “내 백성이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며 사악한 길에서 떠나면 그 땅을 고치리라”는 성경 말씀(대하 7:14)대로, 성서적 세계관을 가진 후보를 선출하면, 대한민국이 유럽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한 회복과 번영의 길로 새 출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투표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중요한 통로이자 성경적 가치와 공의를 실현할 후보를 선택하라고 하나님이 위임하신 신앙인의 의무이다. 따라서 성도가 투표할 때 반드시 후보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 검증하고 신중하게 투표해야 한다. / 김성호 집사(요셉공동체 멘토, 자치법연구원 부원장)

     2026-05-30  제1591호

  • 사역

    [전도] 행복 실은 기차에서 만난 예수님 행복 실은 기차에서 만난 예수님 전도사역본부 부모맞춤전도여행 ‘기차는 행복을 싣고’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행복이 반짝였다. 초대한 자녀도, 초대받은 부모님도 기뻐서, 또 감격해서 웃고, 울었다. 지난 5월 25일(월) 전도사역본부가 주최한 부모맞춤전도여행 ‘기차는 행복을 싣고’는 가슴 뭉클한 축제였다. 가장 큰 감동은 행복 실은 기차에서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제 함께 교회 가자”며 복음 전하는 자녀들과 그들의 오랜 기도 덕분에 마음을 연 부모들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아름다운 현장에 동행했다. / 남현영 기자 hyun0@onnuri.org 만나러 가는 길부터 설렜다. 어떤 가족들을 만날지 기대감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오전 8시, 서울역 2층 대합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에도 미소와 기대감이 가득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천국의 축제가 이미 시작됐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스태프들의 따뜻한 환대도 눈에 띄었다. 부모님과 함께 앉아 있는 김세은 성도(분당B공동체)를 만났다. “아무도 예수 믿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30년이 넘도록 부모님 전도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부모맞춤전도여행처럼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서 모시고 왔습니다. 부모님이 하루빨리 영적인 평안과 강건함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여행에 오시는 모든 부모님이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타는 열차가 ‘하나님을 만나는 구원 열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 김진태 씨는 딸의 간절한 기도와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화답하고자 이번 여행을 수락했다. “딸이 같이 여행 가자고 해서 흔쾌히 아내와 함께 왔습니다. 어제저녁에 딸네 집에서 머물렀는데 잠을 설쳤습니다. 오늘 여행이 너무 기대되고 설렜기 때문입니다. 딸에게 고마웠습니다. 예전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다시 은혜받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행복 실은 기차 그리고 사람들 전도사역본부에서 부모님들을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 정성이 부모님들에게 큰 감동과 즐거움을 선물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10분 단위로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며 포스트잇 편지 쓰기, 가족사진 찍기, 가족 레크리에이션 등을 진행했다. 부모님과 자녀들이 손을 맞잡고, 손뼉을 치며 오랜만에 함께 웃고 소리치며 마음껏 즐겼다. 곳곳에 전도사역본부 봉사자들의 노고가 숨어 있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스태프부터 가족들과 소통하는 스태프, 가족들의 행복한 순간을 촬영하는 스태프, 안내하는 스태프까지 모두 한마음으로 섬겼다.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오직 찬양만 흘러나왔다. 행복 실은 기차를 은혜로 물들인 코너는 ‘음악 방송’이었다. 객실 스피커에서 자녀들이 부모님과 가족들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는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한 편지와 함께 신청한 노래도 흘러나왔다. 그 주인공인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신청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미소 지었다. 또 다른 사연의 주인공 김미연 집사(온믿음공동체)의 어머니 백문희 씨는 딸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들으며 지나온 세월이 생각나는 듯 연신 눈물을 훔쳤다. “딸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습니다. 우리 딸이 나를 초대한 그 마음을 잘 압니다. 함께 웃고 떠들며 즐기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쩔 땐 엄마 같기도, 친구 같기도 한 딸과 앞으로도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습니다. 딸이 초대하면 어디든지 따라갈 것입니다.” 곁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김미연 집사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제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가 느끼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 마음을 사연 편지에 썼습니다. 제가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지금은 어머니만 빼고 가족들 모두 교회를 다닙니다. 어머니도 이번 기차 여행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위로를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교회 가자!” 오후 12시,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제천시 청풍리조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연회장에 마련된 점심 식사를 즐겼다. 콘서트는 모든 가족이 하나 되는 축제였다. 가수 이무송 집사가 노래를 시작했다. 가스펠싱어 지미선의 노래와 하모니카 연주자 최상미의 아름다운 연주도 울려 퍼졌다. 흥에 겨운 부모님과 자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기자에게 수많은 가족이 먼저 다가와 가족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행복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영원히 남기고 싶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성민 목사(전도사역본부장)가 메시지를 선포했다. “믿음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인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부모님들의 세례식은 감동 그 자체였다. 사전에 온라인(Zoom)으로 세례 교육을 이수한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함께 단상에 올라 세례를 받았다. 오래도록 기도하고 꿈꿔왔던 바로 그 순간을 마주한 자녀들이 눈물을 흘렸다. 자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부모님들도 함께 울었다. 세례받는 부모님에게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안겨드리는 자녀들도 있었다. 민은주 성도(분당A공동체)도 세례받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내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20년 동안 어머니가 예수 믿기를 소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세례받는 모습을 보는데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20년 동안 이어진 기도가 응답받은 것 같아서 감격했습니다.” 딸의 고백을 듣던 어머니 박금옥 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받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딸 덕분에 제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저를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기도해 준 딸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딸과 더 잘 지내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오후 3시 30분, 서울행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행 기차 안에서도 세례식이 열렸다. 여행하는 동안 마음을 열고 세례받기로 결심한 부모님들이 신청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세례를 신청했다. 이날 세례받은 부모님은 모두 50명이었다. 오후 6시 10분, 행복을 가득 실은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모두가 행복한 여행이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껴안으며 약속했다. “이제 우리 함께 교회 가자!”

     2026-05-29  제1591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나를 따르라(2) 붙어있음, 그것이 곧 열매이다 나를 따르라(2) 붙어있음, 그것이 곧 열매이다 <요한복음> 15:1~8 / 이재훈 위임목사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를 단어의 이미지로 알려 줍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붙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11절까지 11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붙어 있으라”, “거하라”, “머물러 있으라”입니다. 헬라어 ‘메노’(meno)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제자도의 본질은 우리가 누구에게 붙어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된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들어 올리고, 붙잡고, 가지치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역할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요 15:1). 이 말씀 헬라어 원문의 어순을 그대로 옮기면 “나는 포도나무, 그 참된 것이다”입니다. 강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때로는 영광과 권세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거대한 황금 포도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진정한 포도나무는 성전의 황금으로 된 화려한 조각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포도나무가 세워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농부이시다”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자르실 것이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손질하신다”(요 15:2). 농부의 행위를 표현하는 두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자른다’입니다. 둘째, 더 많이 열매 맺도록 가지를 ‘손질하신다’입니다. 첫 번째 동사 ‘자른다’는 헬라어 아이레이(airei)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잘라 버리신다는 의미로 해석되면 안 됩니다. 아이로(airo)라는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들어 올리다’, ‘높이 들다’라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뻗어 나갈수록 점점 무거워져서 땅에 처지게 됩니다. 포도는 땅에 붙어서 성장하는 식물이 아닙니다. 땅에 붙어있으면 햇빛도 받지 못하고, 병충해도 쉽게 맞고, 약하기 때문에 땅에 붙어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처진 가지를 들어올려야 합니다. 들어 올려서 햇빛도 받고 영양분을 잘 보존하도록 하는 농부의 역할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무조건 자르는 게 아닙니다. 이 단어의 두 번째 의미는 가지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가지가 불필요하게 자라지 않도록 생장점이 되는 곳을 자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심’이라고 합니다. ‘아이로’라는 동사 자체가 포도 가지를 들어 올리기도 하고, 더 자라지 않도록 가지를 치는 두 가지 기능을 한 단어에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많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손질하신다’는 것은 ‘가지치기’입니다. 영양분이 불필요한 가지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농부의 역할입니다. 농부는 포도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끊임없이 돌보고, 그 가지에서 열매가 맺어지도록 끝까지 돌보고 챙기는데 이 모습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를 들어 올리시고, 붙잡아 주시고, 불필요한 영역을 가지를 치십니다. “머물러 있으라” 받아들임과 동역자 <요한복음> 15장 3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보혈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미 깨끗해졌습니다. 하지만 더욱 깨끗해지도록 하나님이 가지를 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려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연단하시고 아들로 받으신 사람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했습니다. 연단하시고 채찍질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손길이 바로 포도나무 가지를 섬세하게 붙들고, 때로는 가지를 치시는 농부 되시는 아버지의 사랑 행위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 말씀은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붙을 수 있는 것처럼 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리스도께 붙은 존재가 되었으니, 붙어있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계속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기라”고 명령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우리 행함 이전에 받아들임입니다. 여러분, 가지의 본분은 포도나무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나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저 받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태를 계속 주장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가지를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나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을 흘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가지에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가 없어도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그러나 열매 맺으시는 일, 곧 이 세상에 예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일은 가지인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자들은 아닙니다. 그분의 동역자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내어 드리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은 오직 만물을 창조하시며,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을 그 뜻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평가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만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는 운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본질입니다. 제자도의 본질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느냐입니다. 이 지점에서 자주 혼동하는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역과 활동을 하지만, 사역과 열매가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일을 했지만,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그분의 가지로서 연결되어 있는가?”, “그분의 가지로서 붙어있는가?”, “그분의 가지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늘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붙어있는 게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 잡혔다”고 말합니다. “그 잡힌 것을 따라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 거하는 것, 그분께 붙어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머무르라”는 명령은 무거운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붙잡고 계신 예수님께 우리를 내어 드리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본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의 열매 <요한복음> 15장 6절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앞부분에 방점을 두고 읽어야 합니다. “만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이 가장 중요한 기도의 조건, 약속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분과 연결되면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뜻, 하나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것을 구하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 된 자로 포도나무에 연결되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기도가 삶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통로가 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고 이것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요 15:8). 제자도의 본질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의 열매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머무르라, 붙어있으라”는 명령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포도나무요 나는 그분의 가지입니다”라고 여기고, 말씀 앞에 늘 귀 기울일 때 나타나는 열매가 제자의 삶입니다. 제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고백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도록 그분께 연결되고, 붙어있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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