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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청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 공동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 공동체!” 남양주 대학청년부의 새 이름 ‘다윗공동체’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새 비전을 선포하며 그 이름을 ‘J1공동체’에서 ‘다윗공동체’로 바꿨다. 다윗을 따라 삶과 공동체와 열방을 품고, 세우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공동체가 되겠다는 포부와 소망이 담겨 있다. 지난 3일(주일) 다윗공동체가 첫 예배를 드렸다. 이름부터 비전까지 모든 것이 새로워진 다윗공동체 첫 예배를 축하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지난 15년 동안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를 이끌고 섬겼던 선배들도 참석했다. 그 뜻 깊은 자리에 다녀왔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여기는 남양주 온누리교회 본당. 오후 2시 대학청년부 예배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손길이 몹시 분주해 보인다. 복도에 나와 예배드리러 온 청년들을 맞이하는 청년들도 보이고, 본당에서는 찬양팀의 연습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청년들이 일주일 동안의 삶을 나누며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풍경이지만 오늘 예배는 무엇인가 특별하고 설렘이 가득하다. 왜냐하면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공동체’라는 새 비전을 선포하며 공동체 이름을 ‘J1공동체’에서 ‘다윗공동체’로 바꾸고 처음으로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3일부터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의 이름은 ‘다윗공동체’다. 남양주 온누리교회의 새로운 비전을 이루는 데 대학청년부가 견인차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같이 결정했다. 남양주 온누리교회는 창립 15주년을 보내면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며(행 15:16)’라는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다. 무너진 예배와 삶 공동체를 회복하고, 열방을 세워나간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과 열정,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했던 마음을 기억하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윗의 장막이 되기로 결정했다.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도 이에 발 맞춰 공동체 이름을 다윗공동체로 변경하고 새 비전에 동참하기로 했다. 앞으로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는 성령을 통해 삶을 세우고, 예배를 통해 공동체를 세우고, 선교를 통해 열방을 세워나갈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공동체가 되겠다는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의 포부가 무척이나 근사하고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삶과 공동체, 열방을 품고 세운다 다윗공동체 첫 예배를 드리는 청년들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청년들의 발걸음에는 기쁨이 묻어있었다. 다윗공동체 첫 예배에는 아주 특별한 손님들도 참석했다. 지난 15년 동안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를 이끌고 섬기던 선배들이다.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의 시초 느헤미야공동체(성벽을 재건하라는 의미)와 J1공동체(Jesus First,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자는 의미)를 섬기던 선배들이다. 다윗공동체 첫 예배에 참석한 선배들은 새로운 비전과 새 이름을 선포한 후배들을 축하하고 응원했다. 선배들의 응원과 격려만큼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것이 없었다. 서로를 축복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고 따뜻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한 자리에 모인 선후배들은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의 역사를 살펴보고 비전을 공유했다.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청년들 가슴에 새겼던 꿈과 비전, 사랑과 희망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러면서 지난 15년 동안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를 이끌고 섬겼던 선배들의 조언과 응원에 힘입어 남양주 온누리교회의 앞으로 15년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초창기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를 섬긴 박민정 자매(우수교회)는 “다윗공동체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응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은정 자매(SNS공동체)는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는 정말 귀한 공동체”라면서 “다윗공동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더욱 빛나는 공동체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오예송 자매(다윗공동체)는 “다윗공동체와 함께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뜻 깊고 의미 있다”면서 “지치거나 소외되는 지체 없이 모두 함께 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서로를 섬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영 형제(다윗공동체)는 “다윗처럼 기쁘게 찬양하는 공동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고백하는 공동체, 남을 세우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다윗공동체 회장 이영혜 자매(다윗공동체)는 “다 함께 모여 다윗공동체의 이름과 비전을 세우는 과정이 너무 설레고 행복했다”면서 “다윗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삶과 공동체와 열방을 품고 세울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사역칼럼 세우는 사람, 다윗공동체 ‘세우는 사람, 다윗공동체’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의 새 이름이다. 남양주 온누리교회가 새로운 예배당 부지를 확정하고 창립 15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다윗의 장막’이라는 비전을 선포함과 동시에 대학청년부도 공동체의 이름을 ‘다윗공동체’로 바꾸고 그 비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로 다짐했다. 나에게는 다윗공동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2001년 서빙고 온누리교회 대학부가 출범할 때 이름도 다윗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빙고 온누리교회 대학부는 양재 온누리교회의 바울대학부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설되었는데 바울대학부는 학생 수도 많았고, 아웃리치도 활발하게 해서 명실 공히 대학부의 명예를 세워가는 공동체였다. 그런 상황에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 또 다른 대학부를 시작해야 했기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다윗’이었다. 다윗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찾아가서 아들들을 다 불러오라 했을 때 아버지 이새의 머리 속에 존재조차 없었던 어린 목동이었다. 형들에게 무시당하고, 언제나 들판에서 홀로 노래하고 찬양하며 외로움을 달랬던 다윗이 떠올랐다. 당시 다윗공동체의 담당목사님이셨던 곽성환 목사님이 다윗이란 이름을 말했을 때 정말 공동체 이름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었다. 다윗은 약해 보였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거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결국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적장을 무너뜨리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사울이라는 최악의 리더십으로부터 최고의 리더교육을 받으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성장하게 된다. 다윗처럼 서빙고 온누리교회 대학부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바울대학부처럼 성장하게 되었다. 2개의 대학부가 곧 4개의 대학부로 확장 되었다. 벌써 15년 전 이야기다. 나는 당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50대 중견 목회자가 되었고, 대학생 나이의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어느 날 이해영 목사님(당시 청년부 사역)이 나에게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아마 그때의 추억을 되살려 대학청년부를 새롭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웬 대학청년부?”라는 생각을 했지만 목사님의 속뜻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새로운 마음과 꿈을 부어주셨다. 지난 1년 동안 J1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과 나름 열심히 뛰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청년사역에 대한 감을 조금씩 찾았다. 청년들에게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몰라 청년 관련한 글들을 열심히 읽었고, 대학생들과 카페에서 대화하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때 마침 교회가 다윗의 장막이라는 비전으로 새 성전을 향해 갈 때 내 머리 속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무척이나 막막하고 존재감이 없던 시절 큰 용기로 다가왔던 다윗이라는 이름이었기에 다시 사용해보고 싶었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고 존재감도 없어 보이지만 남양주 온누리교회 대학청년부가 다윗 못지않게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라는 믿음과 가능성을 붙잡고 작은 다윗들이 되어보려고 한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잠 못 이루는 초등학생처럼 두 번째 시작하는 다윗공동체를 기대한다. 전쟁과 업적을 좋아했던 청년시절을 지나 찬양과 기도에 전무했던 노년의 다윗처럼 영적으로 성숙해진 다윗공동체의 미래를 꿈꾸며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딛어 본다. / 허원희 목사(다윗공동체)

     2019-11-10  제1269호

  • 인물

    "기도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온누리신문, CGNTV 공동기획 CGNTV가 다하지 못한 이야기 “기도해드려도 괜찮을까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청년 ‘조셉 붓소’ “기도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이보다 따뜻한 말이 또 있을까? 날마다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목회자도 아니다. 외국인 청년이다. 그 청년의 이름은 ‘조셉 붓소’다. CGNTV가 조셉 붓소의 이야기를 방영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떻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어쩜 그렇게 용기 있게 전도할 수 있는지 큰 감동과 도전을 줬기 때문이다. 비크리스천들도 조셉 붓소와의 만남을 환영하고 있다. 그 멋진 청년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CGNTV가 ‘붓소핸섭 시즌2’를 방영한다. 붓소핸섭은 조셉 붓소와 CGNTV가 함께하는 길거리 전도프로젝트다. CGNTV ‘KNOCK 채널’에서 만나볼 수 있다. CGNTV가 다하지 못한 조셉 붓소의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인터뷰를 끝내고 그 형제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 형제의 기도를 받는 순간 하나님이 왜 이 청년을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형제는 스치듯 나누었던 작은 이야기들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기도에 담아냈다. 기자의 개인적인 고민과 비전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형제의 기도에는 힘이 있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정말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부족함 없이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 형제의 기도를 받게 하시려고 나를 이 자리로 초대하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조셉 붓소(Joseph Butso)다. 한국 이름은 최준섭, 나이는 스물일곱이다. 한국과 사랑에 빠지다 조셉 붓소 형제는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고 조지아 주에서 자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국에 있을 때 비로소 삶의 목적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조셉 붓소 형제에게 한국은 정말 특별한 나라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 정서, 음식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는 이 형제는 외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정말 좋아한다. 감기에 걸리면 홍삼액을 챙겨먹고, 식당 주인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넉살을 떠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느껴진다. 조셉 붓소 형제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게 된 것은 학창시절 우연히 들은 K-POP의 영향이 컸다. K-POP은 조셉 붓소 형제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노래를 들을수록 한국어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꼭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셉 붓소 형제는 한국에 오려고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 조셉 붓소 형제는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만 되면 한국을 찾았다. 대학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한국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여름방학마다 한국을 찾아오는 조셉 붓소 형제를 위해 친구 부모님이 가까운 교회를 소개해주셨다.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조셉 붓소 형제는 한국 교회에 가는 일이 너무 신나고 행복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또 한 번 한국에 반했다. “한국어로 된 찬양을 듣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가사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멜로디와 몇 마디 찬양 가사들이 제 마음을 울렸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그 뒤로는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 교회를 일부러 찾아다녔어요.” “조셉, 나를 사랑하니?” 대학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한국에 갈 생각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조셉 붓소 형제가 하나님께 질문했다.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질문에 곧바로 응답하셨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던 조셉 붓소 형제에게 “가수가 돼라”고 말씀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음성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성을 붙잡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하나님의 응답이었으니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계속 되는 실패에 낙심이 찾아왔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에 있는 가정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는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하나님이 주신 응답을 믿고 왔는데 어려움이 한꺼번에 닥치니까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저를 만나주시고, 저를 낮추시기 위해 준비하신 시간이 분명해요.” 하나님께 기도밖에 할 수 없던 조셉 붓소 형제는 우연한 기회에 ‘연탄365’(CCM버스킹팀)라는 팀을 만나게 됐다. 거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팀이었다. ‘가스펠스타C’라는 CCM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할 기회도 찾아왔다. 그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 한국에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정말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는 정말 하나님이 주신 기회 같았다. 그런데 우승은 다른 팀에게 돌아갔다. 크게 낙심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했다. 상황이나 여건이 나아진 것이 없었는데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했다. 그날 오디션 장소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이다. 조셉 붓소 형제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우연히 다른 팀의 찬양을 들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찬양이었다. 그 찬양을 듣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루 종일 그 음성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저녁 하나님은 “조셉, 나를 사랑하니?”라고 질문하시면서 다시 그를 찾아오셨다. 조셉 붓소 형제는 망설임 없이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너의 삶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니?”라고 다시 물으셨다. 조셉 형제는 그 순간 떠오르는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가 매일 길거리로 나서는 이유 그날 이후 조셉 형제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하나님은 조셉 붓소 형제의 삶을 전도자의 삶으로 바꿔나가셨다. 조셉 붓소 형제는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음악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얼굴을 알렸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버스킹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더 열심히 했다. 2016년에는 CGNTV와 인연을 맺게 됐다. CGNTV는 조셉 붓소 형제의 이야기를 KNOCK 미니휴먼다큐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음악으로 하나님을 전하고 싶다는 조셉 붓소 형제의 삶과 신앙, 찬양, 복음 메시지를 담은 영상이었다. 1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고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CGNTV KNOCK 노크 채널에서 ‘붓소핸섭’을 시작하게 됐다. 지난 1일(금)부터 ‘붓소핸섭 시즌2’가 방영 중이다. 조셉 붓소 형제가 길거리에서 찬양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아름다운 일상을 생생하게 담은 프로그램이다. “붓소핸섭은 정말 감사한 사역이에요. 붓소핸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제 믿음이 더욱 커져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제가 하나님께 더 큰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조셉 붓소 형제에게도 전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거절을 당할 때도 있고, 이유 없이 욕을 먹기도 한다. 그때마다 상처를 받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한 영혼을 만나러 거리로 나서고 있다. 매일 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조셉 붓소 형제에게도 함께 나누고 싶은 기도제목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세우는 사람이 될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붓소핸섭 전도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세요. 사랑하는 저의 가족과 친구,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들을 더욱 사랑하고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후원문의: 02-796-2243 정기후원: KEB하나은행 573-910002-67804

     2019-11-10  제12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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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번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아이들 기획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 만 18세가 되면 아동복지시설 퇴소 … 4명 중 1명 빈곤층 전락 고아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크리스천의 도리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만 18세가 되면 퇴소해야 한다. 그때부터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때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 적절한 도움이 제공된다면 그 힘들고 외롭고 처절한 싸움이 한결 수월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바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고아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크리스천의 경건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만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퇴소해야 하는 이들을 ‘보호 종료 아동’이라고 한다. 보호 종료 아동이란 아동복지법 제16조에 따라 아동복지시설에 살고 있는 보호대상 아동의 연령이 만 18세에 달하였거나 보호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인정되면 관할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아동의 보호 조치를 종료하거나 해당 시설에서 퇴소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지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연평균 2,470명의 보호 종료 아동들이 보육원 등의 아동복지시설에서 퇴소했다.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빨리 험난한 사회로 나가야만 한다. 또 다른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제도라고 하지만 정말 안타깝고, 어떻게 보면 잔인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자기 몸 누일 곳 찾아 전전긍긍… 보호 종료 아동들의 너무나 열악한 현실 가장 큰 문제는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란 이들이 보호 종료가 되어 퇴소한 다음 발생한다. 아동복지시설을 퇴소한 청소년 4명 중 1명이 빈곤층이나 취약계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는 자립정착금이 지원된다. 자립정착금은 보호 종료 아동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부지원금인데 1인당 300~500만 원 정도다. 자립정착금이 이보다 적거나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있다. 자립정착금을 지원하는 기관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이다 보니 지역에 따라 지원 금액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 지원되는 자립정착금이 너무 적다. 서울 신림동 원룸 보증금이 500만 원에 월세가 40~50만 원 선인 것을 감안하면 자립정착금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지난 4월부터 보호종료아동(퇴소 2년 이내)들에게 월 30만원씩 ‘자립수당’이 지급되고는 있지만, 정착금과 수당만으로는 비싼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이나 자립지원시설 등이 있지만 그곳에 입소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방안’에 따르면 지난 2017년 보호 종료 조치된 인원이 2,593명이다. 그 중에서 835명(32%)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LH임대주택이나 자립지원시설, 공동생활가정 등에서 살고 있다. 나머지 68%는 스스로 월세를 부담하거나 기숙사, 친인척 집 등에서 머무르고 있다. 10명 중 7명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을 위한 자립지원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립지원시설은 아동보호시설을 퇴소한 이후 거주지를 마련할 때까지 머물 수 있는 기관인데 전국에 12개 밖에 없다. 시설 수용정원은 221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다수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이 자신의 몸 누일 곳을 찾아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의 눈물 경제적 어려움, 주거문제, 심리적 부담감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거주지뿐만이 아니다. 진로의 제한도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대다수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학 진학보다 취업을 선택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발간한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방안>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전체 보호 종료 아동의 대학(전문대 이상) 진학률은 13.7%에 그쳤다. 2017년 우리나라 전체 고교 졸업자들의 대학진학률이 68.9%인데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대학진학률도 낮지만 또래들보다 훨씬 빨리 사회로 나오다보니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2016 보호종결아동 자립실태 및 욕구조사’(2017년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50.9%가 단순노무직, 서비스직에서 일하고 있다. 임금 또한 박하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의 월평균 수입은 123만원이었다. 2017년 최저임금(약 135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지출은 클 수밖에 없다. 월세 등 생활비로 월평균 138만원을 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안정적인 자립을 위한 자산을 형성하기는커녕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오죽하면 앞서 언급한대로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4명 중 1명이 빈곤층이나 취약계층으로 전락할까.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상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사회보장정보원에서 제출받은 ‘시설퇴소아동의 기초수급 및 차상위계층 수급 현황’에 따르면 2014년부터 5년 동안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중에서 기초생활수급자 혹은 차상위계층이 된 사람이 24.4%나 됐다. 빈곤층이 되는 속도 또한 빨랐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 88.5%가 단 6개월 만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2016년 보호 종결 아동 자립실태조사에 따르면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어려움(31.1%)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주거문제(24.2%), 심리적 부담감(10.1%), 돈 관리 지식부족(7.7%) 등의 순이었다. 태어난 지 6,570일이 되면 다시 혼자가 되는 그들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지 6,570일이 되면 아동복지시설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싫든 좋든 홀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그때부터 외롭고, 힘들고,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은 아마 가장 빨리 빈곤의 덫에 허덕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디 경제적 문제뿐이겠는가. 외롭고, 쓸쓸한 그 심정은 또 어떠한가. 부모 없다고, 시설에서 자랐다고 기피하거나 업신여기고,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시선은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랐어도, 부모가 없어도,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하디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고, 적절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와 크리스천 말고는 그 아름다운 일을 해낼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그들을 어떻게 도우면 될까? 오창화 팀장(사회선교부 입양커뮤니티 제이홈)과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가 그 방법을 제시했다. 오창화 팀장은 멘토가 되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은 그야말로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입양된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엄청난 빚을 감당하셨는데, 정작 우리는 기댈 곳 하나 없는 그들의 빚을 갚아줄 생각조차 못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아동복지시설과 결연을 맺어서 그들의 멘토가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는 아동복지설 퇴소자들에게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가족이 되어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혼자라는 사실만큼 서러운 게 없습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에게 정말 따뜻하고, 포근하고, 사랑을 듬뿍 주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 또한 성경은 고아를 돌보는 것이 곧 크리스천의 경건한 삶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전문가 기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동의 이름 우리가 100만 고아들의 눈물을 닦아줍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동의 이름이 무엇일까? 나는 고아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지켜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줘야 할 부모가 버린 존재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인 고아이다. 나도 고아이다. 1985년 화창한 어느 여름 당시 7살이던 나를 어머니가 고속터미널에 데려갔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고, 그 길로 나는 시설에 넘겨졌다. 나를 발견한 경찰은 유기범(부모)에 대한 조사나 실종신고 혹은 어떠한 조치나 기록도 하지 않고 그냥 시설에 넘겨버렸다. 어머니의 손을 놓친 지 불과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가장 불쌍한 이름인 ‘고아’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만약 그때 조금만 인내를 갖고 부모를 찾아줬으면 어땠을까? 고아원에 내던지듯 보내지 말고 입양할 부모를 만나게 해줬다면 고아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시설(보육원) 생활은 정말로 비참했다.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사랑은 고사하고 조금의 관심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는 생존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일을 시키면 땀을 가장 많이 흘려야 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힘 있는 선배한테 상납해야 한다. 선배들의 눈을 절대로 봐서도 안 된다. 거짓말 같지만 선배들이 똥을 먹으라면 먹는 시늉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진짜 죽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배들에게 대들었다가 호미에 찍혀서 평생 뇌전증을 안고 사는 아이들을 종종 봤다. 힘을 키워서 싸움을 잘하지 않는 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만 살 수 있었다. 이쯤에서 궁금할 것이다. 원장님과 시설의 선생님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외부에 알려지면 그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아원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아무리 심각해도 얼른 덮고 무마시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처럼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당시 고아원 동기가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다. “고아원에서 맞은 것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고아원의 ‘고’자도 듣기 싫다.” 만 18세, 퇴소 후에 찾아온 더 큰 고난 만 18세가 되었다. 나도 여느 보육원 동기들처럼 시설을 퇴소해서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의지할 곳도, 상담할 곳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겨우 지하 단칸방에서 보육원 동생들 10명과 칼잠을 자며 힘들게 살았다. 대학 졸업 이후 취업을 하려고 면접을 볼라치면 고아라는 주홍글씨가 취업의 문을 막았다. 그나마 선심을 베풀 듯 동정하는 마음으로 고용한 회사와 사람들도 내가 잘못하면 “역시 고아는 안 돼”라고 쓰디쓴 말을 내뱉으며 해고했다. 외롭고 힘들었던 나는 빨리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정말 운 좋게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부모라도 있으면 어떻게 생각해 보겠는데, 고아라 안 되겠다.” 지금의 아내는 두 번째 여자친구이다. 다행히 장인, 장모님께서 입양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셨다. 장인, 장모님은 아들을 입양하는 마음으로 고아 사위를 맞이해주셨다. 그 기쁨과 감격도 잠시, 이번에는 아내와 단둘이 살 신혼집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 살 집이 있어야 하는데 모아둔 돈이 없었다. 결국 처남이 살던 전세집 방 한 칸을 빌려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동복지시설 퇴소자에 대한 주거 지원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었다. 임대아파트나 취약계층의 주거지원 프로그램을 알아봤는데 노인,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저소득층에 대한 혜택만 있지 나 같은 고아나 보육원 퇴소자들을 위한 혜택은 없었다. 얼마나 막막하고 서러웠던지 보건복지부에 전화를 걸어 울면서 호소했던 기억이 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자들을 위한 집을 마련해달라고 애원했다. 보육원이 폐쇄 됐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선배가 하나 있었다. 그 선배는 폐허가 된 시설에서 전전긍긍했다.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다. 그 선배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살아있을까? 죽었을까? 고아는 죽는 순간에도 철저히 외로운 존재이다. 무연고자 사망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무연고자 장례는 가족이 나타날 때까지 10년 동안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가 기간이 지나도 가족에게 인도되지 못하면 공원부지에 매장되거나 자연장으로 처리된다. 고아한테 가족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슬퍼하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고아들의 슬픈 숙명이다. 고아는 그저 피해자일뿐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고아를 단순히 불쌍한 아이, 자선을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동정했다. 이는 고아들의 눈물과 한은 외면한 일방적 접근이다. 고아는 취약계층이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걸인에게 적선하듯 동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생 고마워하며 살아라”, “부모도 버린 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만으로 평생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라”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고아는 명백한 피해자이다. 1차 가해자는 그들을 버린 부모이고, 2차 가해자는 그런 부모의 유기범죄를 제재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한 국가이며, 3차 가해자는 ‘오죽하면 버렸겠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회이다. 결국 가해자는 우리 모두인 것이다. 고아들은 만 18세가 되면 더욱 냉혹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보호 종료가 돼 그동안 살아온 시설에서 퇴소해야 한다. 보육원 퇴소자들의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백석대 교정보안학과 김안식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교도소 수용자들의 경우 교정시설 퇴소 이후 절반 이상이 다시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로 들어오는데 반해, 보육원 퇴소자들은 상황이 더욱 심각해서 80% 이상이 교정시설로 다시 들어온다. 한번 보육원을 퇴소하면 더 이상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갈 곳이 그곳밖에 없다. 교도소, 군대, 보육원 등 대표적인 수용시설의 처우를 비교해 봐도 고아들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알 수 있다. 세 군데 수용시설 모두 식사를 제공해주고, 옷을 입혀주고, 잠을 재워주고, 소정의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도소와 군대의 경우 상담 프로그램이 있지만 보육원에서는 원아들의 상담이 미비하다. 범죄자와 군인들은 이유야 어찌됐든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고아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다.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인권보호 및 감독 실태도 교도소와 군대에 비해 보육원이 더 나쁘다. 폭력과 학대 정도는 또 어떠한가? 교도소가 가장 적고 다음이 군대, 그리고 보육원이다. 보육원에서 발생하는 학대가 가장 많다. 시설 안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에도 차이가 있다. 교도소와 군대는 피해보상을 해주지만 보육원에서는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세 군데 수용시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퇴소 이후 대책이다. 교도소와 군대를 퇴소하면 가족들에게 돌아가지만, 고아들은 보육원을 퇴소하면 갈 곳이 없다. 한 조사에 따르면 보육원을 거쳐 성인이 된 아이들의 자립률이 7%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3%가 교정시설에 수용되거나 노숙을 하는 셈이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여기서 ‘신원(伸冤)’의 의미는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리다’는 뜻이다. 이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자식을 보육원 등의 시설에 맡기고 나 몰라라 한 부모들은 뒤늦게라도 그 자녀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했으면 좋겠다. 국가는 고아들이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퇴소자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도 강화해야 한다. 보호자도 없고, 제대로 된 사회적응 교육도 못 받고 거리로 내몰리는 고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해져있다. 범죄에 빠지거나, 윤락가로 빠지거나, 생활고를 못 이겨 사채를 쓰고 빚더미에 앉는 것이다. 그들을 위한 멘토링, 상담 프로그램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사회는 ‘오죽하면 버렸겠니’라는 폭언을 함으로써 고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이 보육원 퇴소 이후에도 사회에 잘 적응해서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인내와 배려, 사랑으로 따뜻하게 맞아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을 돌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던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출해내셨다. 이 땅에는 100만 명의 고아들이 존재한다. 100만 고아들의 한과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들을 가나안 땅에 데리고 들어가라!” / 조윤환 대표(고아권익연대, 1급 사회복지사) <발문> “이 땅에는 100만 명의 고아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한과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 그들을 가나안 땅에 데리고 들어가라!”

     2019-11-10  제1269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 15:31, 고후 4:10~14 /이재훈 목사 참된 회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참된 고백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은 곧 하나님 은혜의 빛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삶은 너무 소중하고, 보배로운 인생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죽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할 때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이 죽음이 의미하고 있지 않은 것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 앞에 선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나는 언젠가 죽습니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언젠가 찾아오는 죽음을 묵상해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죽지 않을 것처럼, 이 육신에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에 찾아올 죽음을 묵상해도 삶이 거룩해집니다. 만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분명 다른 차원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죽음을 묵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정신적 죽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정신적 죽음은 우리 영혼에 찾아오는 낙심, 절망, 포기, 좌절 등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파스칼에 의하면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도 인간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의 말, 한 단어로도 인간의 영혼은 낙심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고, 좌절을 경험할 만큼 인간의 정신은 강한 것 같지만 약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 속에서 정신적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죽음의 두려움이 너무 커서 우리 삶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정신적 죽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영적으로 단절 상태에 있는 죽음입니다. 분리로서의 죽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하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 있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경험해야 할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죽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죽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의 의미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입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고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고전 15:3). “이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사람을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사람을 대신하셨다는 것은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동참하게 만드셨을 때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우리도 부활의 생명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진리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우리를 함께 포함합니다.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승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재림에 함께 연합한 자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롬 6:10~11).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죄에 대해 죽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도 죄에 대해 죽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개념을 합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죄를 위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넘기는 모든 자들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것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했고 그분과 함께 죽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 믿으면 여전히 죄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죄를 이기고, 죄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존재요, 동시에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왜 죽어야만 하는 존재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루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심으로 우리는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죽음, 영원한 생명의 능력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항상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 4:10~11). 10절과 11절이 유사한 문장인데 원어로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10절의 죽음과 11절의 죽음이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10절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실제 예수님의 시신을 짊어지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을 뜻하는 헬라어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 중에 있는 행동을 표현합니다. 당시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과 살아 있는 사람을 서로 포개서 묶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형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과 얼굴, 배와 배, 다리와 다리를 일치시켜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과 묶는 것입니다. 물론 굶어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끔찍한 것은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죽음의 독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스며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진다고 할 때는 그 죽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 이르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나타난 죽음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종결된 죽음입니다. 완료된 상태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과정은 대부분 10절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음을 믿지만 여전히 죽을 몸 가운데 죄의 영향력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에 처하도록 우리 옛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완전히 묶어버려야 합니다.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예수님의 죽음에 묶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야 합니다, 그때 완전한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생명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는 것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24절). ‘못 박으십시오’라는 표현은 권면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료형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는 고백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날마다 매달려 있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연합하고, 계속 죽음을 경험하며, 결국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조롱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 네가 만일 메시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고 했습니다. 군중의 음성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서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로 살아가려고 할 때 사탄은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욕심과 옛 성품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 필요가 없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면서 끊임없이 내려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결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자리는 십자가 못 박힌 자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옛사람을 죽음에 넘겼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묶인 자다. 그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고백을 합니까? 그것은 죽음에 묶인 자가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변화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부활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고난 앞에 서 보면 압니다. 위기 앞에 서 보면 압니다. 낙심하는 상황에 처해보면 압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보면 압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할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고백앞뒤에 사도 바울은 답답한 일을 경험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항상 예수님의 죽음에 자신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8~9).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쇠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고후 4:16절). 여러분, 사도 바울의 믿음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낙심하는 상황인데 낙심하지 않는 비결, 모두가 절망하지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모두가 좌절하지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말입니다. 우리 삶에는 때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죽음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육체적 죽음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와 낙심과 절망과 좌절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나는 좌절할 수 없어. 이러한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하고, 파이팅을 외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약간의 효과는 있겠지만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낙심과 절망, 답답한 일, 모든 고난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밀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일치시켜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될 때 놀랍게도 육체적, 정신적 죽음의 고통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생명이 나의 죽을 육체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고 승리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로 끝나지만 그 의미는 “나는 날마다 살아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겉 사람은 날로 쇠하나 나의 속사람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는 고백은 “나는 날마다 살아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죽지 않도록 죽게 하소서.”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 내가 분리된 죽음입니다. 뒤의 죽음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삶의 시련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간에,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여러분을 넘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우리를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4장 13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고 또한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 대해 죽는 삶을 경험하려면 우리의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자아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간주해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예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시도록 주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결심과 발걸음을 내딛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보혈의 역사와 능력이 임함으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됩니다.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정신적 죽음으로 인한 삶의 고통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욕심에 대하여, 환경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는 고백을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붙잡으면 부활의 생명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19-11-10  제12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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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어주는 목사 영원을 생각하다 <돈 소유 영원> 랜디 알콘 저 / 토기장이 / 28,000원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병상 중에는 치유를, 고난 중에는 위로와 평안을, 매일의 일상 속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살아계심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와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음과 기도에 대한 말씀보다 두 배나 많은 약 2,350구절에서 돈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랜디 알콘의 <돈 소유 영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돈 소유 영원>의 저자 랜디 알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깊이 생각해봐야 할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밑줄 친 성경 구절보다 그냥 지나친 구절에서 더 많이 배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마음을 울린 설교의 일부분을 적거나 성경 구절에 밑줄을 쳐서 외우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밑줄 친 말씀과 밑줄 치지 않은 말씀 모두를 우리를 위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 지나쳤던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돈은 선한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선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예배드리는 장소가 집에서 멀면 수확물의 십일조를 돈으로 교환하고, 이를 예배 장소에 와서 다시 예물로 바꾸도록 배려하셨다. 이것이 도구로서의 돈의 선한 기능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신약에서는 거룩한 성전을 장사꾼들의 터로 바꾼 것을 통해 돈의 역기능을 말씀하셨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돈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넘어서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도구와 소유들은 한 가지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사용하고 소유한 사람들이 모태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지닌 죄성으로 인해 얼마든지 도구가 악하게 사용될 수 있다. 도구가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우상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사울은 다윗에게 이것저것 입히고 강해 보이는 무기를 주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불안과 염려가 가득했다. 그래서 불안과 염려를 해소해주는 도구가 모든 것의 답이자 영원을 지켜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정확하게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맷돌만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믿고 나아갔다. 결과는 당연히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승리였다. 그렇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불안함으로 인해 성경을 폈지만, 여전히 우리가 의지할 도구를 찾으며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지나치고 밑줄 치지 않은 성경 말씀을 찾아 읽을 때다. 결국 답답하고 막막한 우리의 현실을 기대와 소망으로 바꾸실 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 윤준석 전도사(열린새신자예배)

     2019-11-08  제12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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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답: “무슨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하셨군요? 가뜩이나 살기도 힘든데 꼭 죄, 죄인, 지옥이라는 표현을 써서 부담을 주느냐는 생각이시지요? 그런데 누구나 싫어하고 꺼리는 죄를 언급하는 것은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려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만일 오늘 밤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갈 자신 있습니까?’라는 구원의 확신을 질문한다. 만일이란 가정이 전제된 질문이지만 전도대상자들은 ‘죽음’, ‘죄’, ‘지옥’, ‘회개’라는 단어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죄라는 단어를 빼버린다면 복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 죄를 빼면 복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죄인이고,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죄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범죄자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하거나 마음을 닫아 버린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복음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의 좋은 소식인데 복음이 부담스럽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심령이 가난할 만큼 절박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들의 현재 삶을 전도자들이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후보다 현실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미래의 일까지 생각하는 것이 부담이라는 것을 전도자들이 이해해야 한다. 나도 처음 전도할 때 이와 비슷한 공격성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에 내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실제로 나는 죄가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라고 하면서 논리적으로 응대했더니 싸늘한 반응만 돌아왔다. 논쟁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패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을 하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표현 방법을 바꿔보라는 마음을 주셨다. 다소 무거운 ‘죄’라는 말 대신 ‘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보았다. “우리가 살면서 아무 문제도 없고 좋은 일만 계속 된다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우리 인생은 다 짐들이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짐, 자녀로서의 짐, 경제의 짐, 병의 짐 등 아주 무겁지요.” 표현을 달리 한 그 말에 전도대상자들이 공감을 하면서 경청하는 것을 보았다.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짐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 예수님이 그 짐을 가지고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평안과 쉼을 주실 수 있는 것은 나보다 더 큰 짐을 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인생의 아픔을 더 많이 경험하셨고, 더 많이 외로우셨고, 더 많이 절망하셨어요. 죄가 없으신 분이 인간의 모든 죄악과 허무, 질병의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요. 혼자 짐을 지고 쩔쩔매지 말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 짐을 그분께 맡겨보세요.” 전도의 접촉점을 ‘지금 짊어지고 있는 짐을 벗겨 주시는 분이 초대하신다’라고 표현했더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사람마다 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죄’ 대신 ‘짐’이라는 표현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마음이 열리면 그때는 죄를 언급해도 거부하지 않고 인정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 박인숙 권사 (신용산공동체, <전도여왕의 전도 레시피> 저자)

     2019-11-08  제12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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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세이 - 기다림의 은혜 신앙에세이 기다림의 은혜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열매 맺는 삶이 성도의 삶이다. 인생에도 무수한 기다림이 있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농부들, 배우자를 만나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청년들, 경제적인 어려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거나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사람 등 인생은 수많은 기다림의 연속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다림이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을 무익하게 생각하고, 조급함과 원망이 쉽게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고,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기다리는 기간 동안 두려워하고, 낙심에 빠지며,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무익하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성경에서는 중요한 덕목과 성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다림의 시간은 무의미하게 닫힌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열려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 은혜의 씨앗을 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성도는 기다림 중에 낙심하지 않고, 사명을 이루어가며, 고난과 싸워 승리하게 된다. 인내를 이루는 기다림의 시간은 결과를 보기까지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보내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시간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 안에서 신뢰하고 의지하며 소망하는 역동적인 시간이다. 성경은 수많은 인물들이 기다림을 통해 온전한 믿음과 승리를 누렸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늦가을의 문턱에서 시므온과 안나의 기다림을 묵상해보고자 한다. 이들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스라엘의 위로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 평생 이 바람을 가지고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다. 결국 그는 노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결례를 행하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 안기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역사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안나는 남편과 7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사별하고 84세에 이를 때까지 기도하고 금식하며 성전을 지킨 여선지자였다. 안나 역시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는 노년까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은 평생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노년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므온과 안나가 살았던 시대는 그리스도가 오시기전 어둡고 혼란한 때였다. 성전의 제사장들은 타락했고, 정의와 공의는 행해지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이 혼란한 시국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결국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때를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한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게 된다. 당시 하루하루를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성전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했던 이들을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었던 이들의 삶이 누구보다 가치 있고 성공한 인생 임을 증언하고 있다. 2019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나가는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와 쓸쓸함이 생기게 된다. 한 해의 결실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에 우리가 시므온과 안나처럼 성령 안에서 주의 구원을 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성령 안에서 결실의 때를 바라며,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능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꿈꾸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때를 맞이하는 은혜를 누리게 될 줄 믿는다. 짙어가는 가을날 후회와 낙심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다가올 결실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 김병조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2019-11-03  제1268호

  • 칼럼

    장로칼럼 - 동빙고 근린공원 착공식에서 장로칼럼 동빙고 근린공원 착공식에서 온누리교회가 청소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비전의 공간을 만든다. 차세대 8천여 명과 2천7백명의 선생님들이 8년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던 사역이 드디어 열매를 맺는다. 동빙고 근린공원에는 청소년 수련시설과 국공립어린이집, 체육관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또한 세계적인 FCA 스포츠 선교팀과 이영표 축구교실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통해 온누리교회 차세대가 살아나고,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의 비전이 될 것을 기대하며 착공식에서 드렸던 기도문을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과 기쁜 마음으로 나누고자한다. "지금까지 34년 동안 온누리교회와 저희 모두에게 넘치는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2011년 하용조 목사님을 통해 특별한 섭리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공원 부지를 매입하게 해주셨고, 이재훈 목사님을 통해 어린이집과 공원화 사업에 새 생명의 꿈을 담아 첫 삽을 뜨게 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늘 감격스러운 착공예배의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과 기도로 준비하고 헌신하신 실무자 한 분 한 분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새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서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부터 청소년들이 다문화 학생들과 어울려 건강한 청소년 문화를 만들어 가게 하옵소서. 또한 이 터전을 통해 열방을 품고 선교의 사명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린이집을 통해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양육되며, 치열한 입시경쟁으로 밤늦도록 학원을 다니며 지쳐있는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확인하는 축복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 교회를 잠시 떠났거나 믿지 않는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아울러 잘 꾸며진 공원에서 모든 성도들과 가정 구성원이 함께 어울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회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삭이 그랄 목자들과 다투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 주실 것을 믿고 평안의 르호봇 우물을 판 것처럼 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이 축복의 터전 되게 하옵소서. 특히 지역사회와 주민들과는 서로를 섬기며 협력하는 소통의 공간이 되게 하옵소서. 평화와 공존의 자리가 되어 지경이 넓어지고 번성케 되는 샘의 근원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품어야 할 사회선교로까지 이어지는 마중물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공사가 안전하게 진행되며 성도들에게는 더 큰 기쁨을 위해 감당해야 할 불편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확인하며 매일 매일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구하며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 임희창 장로(차세대 대표장로)

     2019-11-03  제1268호

  • 칼럼

    그때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 집에서 성경보고 하나님 잘 믿고 있는데..." 그때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요? 집에서 성경보고 하나님 잘 믿고 있는데..." "사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영적인 양식을 받기도 하고, 성도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기도 합니다. 머리 되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는 믿겠지만 혼자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꼭 교회에 나가야 하는 두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해줘야 한다. 첫째,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주는 젖이나 분유를 스스로 먹을 수 없다. 반드시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한다. 이처럼 영적으로 갓 태어난 사람도 젖과 같은 영적인 양식을 받아먹어야 하는데 그 양식이 바로 주일에 교회에서 듣는 목회자의 설교 말씀이다. 조금 성장한 어린아이와 중고등학생들은 스스로 식사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혼자서 식사를 하면 편식하게 된다. 영양불균형 때문에 균형 잡힌 성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어린아이나 청소년 상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반드시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인은 완전한가? 그렇지 않다. 성인이 되어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듯 신앙생활은 반드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둘째 성도는 함께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 그리고 우리들을 가지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 붙어있으라고 하셨다.(요15:5)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를 우리의 몸으로 비유해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몸의 각 지체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만일 손이 없다면 음식을 어떻게 입에 넣을 수 있을까? 만일 발만 있고 눈이 없다면 어떻게 목적지에 갈 수 있을까? 이처럼 입 혼자 발 혼자 살 수 없다. 모든 성도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혼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때도 함께할수록 유익하다. 부모는 자녀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깊은 우애를 나누며 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다. 예수님이 믿는 성도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다. 이 말씀도 성도는 교회 안에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머리 되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롬 12:4~5, 고전 12:26~27)이다. / 장경문 장로(온누리전도학교, 양촌공동체)

     2019-11-03  제1268호

  • 칼럼

    책 읽어주는 목사 <냉정한 이타주의자> 책 읽어주는 목사 하나님의 마음과 청지기의 마음 &lt;냉정한 이타주의자&gt; 윌리엄 맥어스킬/ 부키/ 16,000원 남아프리카인 트레버 필드는 매우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이 남성이 어느 날 선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그것은 &lsquo;플레이펌프(Playpump)&rsquo;인데 아이들이 일명 &lsquo;뺑뼁이&rsquo;라고 부르는 놀이기구와 펌프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플레이펌프는 아이들이 놀이하듯 뺑뺑이를 돌리면 펌프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삶에 필요한 물을 기를 수 있도록 만든 기구다. 이 기구는 물 부족을 즐겁게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소개되었다. 플레이펌프는 많은 이들에게 선한 일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급기야 플레이펌프 캠페인이 시작되었는데 유명인들의 SNS와 신문방송을 넘어서 정치인들까지 합세한 커다란 선한운동이 되었다. 플레이펌프가 아프리카 각지에 설치되었고 수백만 달러가 모금 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실사단이 플레이펌프가 설치된 지역을 방문했을 때 어느 지역에서도 더 이상 플레이펌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레이펌프를 돌리는 아이들이 빨리 지치고, 여성들에게도 일이 되었다. 일반 펌프보다 낮은 효율 때문에 플레이펌프는 지역주민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폐물이 되었다. 이 책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한 것을 위한 행동이 반드시 옳은 것인지 묻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lsquo;청지기로서 부르심&rsquo;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스리고 정복한다. 또한 이 명령은 창세기 명령의 연장선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청지기는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발전시켜야 한다.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길을 떠날 때 세 명의 종에게 각각 5달란트(한 달란트는 노동자 20년 치 급여에 해당), 2달란트, 1달란트를 주고 떠난다.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하는데 5달란트를 가진 자는 5달란트를 남기고, 2달란트를 가진 자는 2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가진 자는 땅에 묻었던 한 달란트를 가지고 왔다. 그 행동에 대해 주인은 각각 5달란트와 2달란트 남긴 자에게 동일하게 &lsquo;착하고 충성된 종아&rsquo;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한 달란트 가진 자에게는 &lsquo;악하고 게으른 종아&rsquo;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과 이 책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청지기는 &lsquo;맡은 자&rsquo;다. 주인의 것을 관리하되 자신의 맘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주인의 방식대로 관리해야 한다. 그 의미로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옳으나 선한 일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 주인의 것을 임의대로 사용하거나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소명을 무시하고 그대로 두는 일은 청지기로서 잘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빌 2:13)이시다. 하나님의 뜻인 소원을 잘못 관리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원을 받은 자가 선한 목적으로 현실성 없는 사역과 봉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체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 플레이펌프를 만드는 청지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청지기는 &lsquo;종&rsquo;이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5달란트, 2달란트 가진 자가 불의로 재물을 불렸다면 주인이 칭찬했을까? 오히려 손해를 보더라도 주인의 뜻 안에서 행했던 빚진 종을 칭찬한다. 교회는 효율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교회다. 때로는 한 영혼을 위해서 많은 재정과 노력을 쏟을 수 있는 곳이 교회다. 전부 허비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행하는 곳이 교회다. 때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플레이펌프와 같은 비효율적인 일을 하더라도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기꺼이 플레이펌프를 돌리는 곳이 교회다. 세상과 구별된 기준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청지기는 명심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를 원한다. 천하를 주고도 한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역과 일터에서 냉정하고 효율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마음을 갖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추천한다. / 김성웅 목사(대전 온누리교회)

     2019-11-03  제1268호

  • 칼럼

    권사칼럼 - 바꿀 수 없는 크고 비밀한 일 권사칼럼 바꿀 수 없는 크고 비밀한 일 &ldquo;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가슴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rdquo; &ldquo;난 오늘같이 아름다운 달이 뜨면 언제나 우리 처음 만난 날 그대가 눈부시던 그 시월의 마지막 밤이 생각나~♪&rdquo; 패티김의 &lsquo;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rsquo;과 이용의 &lsquo;시월의 마지막 밤&rsquo;이라는 노래다. 나는 이 노래를 참 즐겨 불렀다. 친구들에게도 가르쳐주곤 했을 정도다. 이 노래를 묵상하며 살아왔던 지난 날 나를 되돌아보니, 지금 나를 만들어주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내 입술로 고백하며 선포해본다. &ldquo;이제는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으리라&rdquo;(잠 31:30). 주님은 내가 새 노래를 부르도록, 회개와 자복의 영이 임하는 공동체로 인도하셨다. 바로 찬양하는 공동체 &lsquo;포에버성가대&rsquo;다. 찬양으로 부르는 말씀이 나의 지난 세월을 치유하시며 회복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습을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고 비밀한 일이다. 포에버성가대를 통해 천국을 소망하게 된다.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준비하게 하시는 시간이라고 고백한다. 기쁨도, 슬픔도, 애통으로 교차하며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날마다 바뀌어가고 있다. 혼자 지내기가 어려운가? 자꾸 속상한가? 늙어가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나는가? 성경이 읽기가 어려운가? 기도가 나오지 않는가? 삶에 감사가 없는가? 성령의 바람과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는 행복자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항상 기뻐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입술로 맘껏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 포에버성가대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면 좋겠다. 은혜의 찬양공동체 포에버성가대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기를 원한다. 찬양하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당신의 형상대로 다듬어가고 계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님들의 영과 함께 있기를 기도한다. / 김수진 권사(포에버성가대)

     2019-11-03  제1268호

  • 대청

    사랑, 그것은 대학 캠퍼스의 '희망' 사랑, 그것은 대학 캠퍼스의 &lsquo;희망&rsquo; 2019 희망노트 명지대 2,377명, 연세대 897명 참석 복음의 불모지, 복음화율 4%, 전도의 희망이 없는 곳&hellip; 이 시대 대학 캠퍼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수많은 청년들이 예수와 복음에 관심이 없고, 세상의 가치를 쫓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공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고, 교회가 세상의 모범이 되지 못한 이유도 있다. 크리스천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도 상당하다. 요즘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전쟁이 정말 심각하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끊임없이 청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대학청년부 &lsquo;희망노트&rsquo;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1세기는 변화의 연속이다. 그 속도도 참 빠르다. 가치관, 세계관, 문화 등이 참 빨리도 변한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교회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이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학 캠퍼스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청년들이 교회와 예수에 마음을 닫아버렸다고 생각하고 캠퍼스 전도를 포기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실제 수많은 기독교 대학에서 채플을 실시하지 않고, 선교단체는 전도활동을 종료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온누리교회 대학부는 대학 캠퍼스에서 예배와 전도의 불씨가 꺼져가는 암담한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인 것을 부끄러워하고,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청년들이 나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학 캠퍼스에 뿌리내린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시선을 변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 대학부는 청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연구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사라진 전도의 기회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 연구와 고민의 결과가 바로 대학생들을 위한 전도집회 희망노트다. 희망노트는 2014년부터 시작됐다. 대학 캠퍼스에서 실시하고 있는 채플시간에 청년들과 만나 소통하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장을 마련했다. 명지대학교를 시작으로 연세대학교, 한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충남대학교, 호서대학교, 공군사관학교 등지에서 희망노트를 이어오고 있다. 1년에 두 차례 대학교 채플에서 집회를 하고, 캠퍼스 예배와 전도활동을 돕고 있다. &ldquo;사람은 사랑할 때 행복하고,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rdquo; &ldquo;여러분 사랑하십시오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rdquo; 2019 희망노트는 지난 29일(수)부터 31일(금)까지 명지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막 올랐다. 명지대학교 학생 2,377명, 연세대학교 학생 897명이 참석했다. 올해 희망노트의 키워드도 역시 &lsquo;사랑&rsquo;이었다. 최성민 목사(대학부 본부장)는 집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에게 &ldquo;사람은 사랑할 때 행복할 수 있다&rdquo;면서 &ldquo;그 사랑의 비밀이 담긴 책이 바로 성경&rdquo;이라고 소개했다. 대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가수 몽니, 지미선, 김상진, 이미쉘, 하니 등을 게스트로 초대했다. 메시지는 최성민 목사가 전했다. 최 목사는 &ldquo;사랑이신 하나님의 DAN를 가지고 창조된 인간은 사랑할 때 행복하고,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rdquo;고 말했다. 최성민 목사의 설교는 물론이고, 인트로 영상, 주제 영상, 게스트들의 찬양과 간증까지 모두 사랑을 이야기했다. 사람이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왜 사랑할 때 행복한지, 사람이 받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 등을 주제로 사랑을 노래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세상에는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사랑 중의 으뜸은 &lsquo;하나님의 사랑&rsquo;이라는 것을 선포했다. 희망노트에 참석한 대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박지현 학생(명지대학교)은 &ldquo;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고, 영광 돌리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신천하고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dquo;고 다짐했다. 유다운 학생(연세대학교)은 &ldquo;인생의 의미가 사랑에 있다는 메시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rdquo;면서 &ldquo;나도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rdquo;고 고백했다. 김동완 학생(연세대학교)은 &ldquo;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예수의 사랑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rdquo;고 했고, 백혜진 학생(연세대학교)은 &ldquo;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였다&rdquo;고 말했다. 명지대학교 교목 실장 구제홍 교수(명지대학교 교목)는 &ldquo;희망노트가 대학생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관계를 배울 수 있는 장이 되어주고 있다&rdquo;면서 &ldquo;더 많은 학생들이 희망노트를 통해 위로와 희망을 얻고 복음을 들었으면 좋겠다&rdquo;고 소망했다. 2019 희망노트에서는 명지대학교 학생 473명이 &lsquo;하나님을 믿어보겠다&rsquo;고 했고, 576명이 &lsquo;하나님의 사랑에 공감한다&rsquo;고 응답했다. 연세대학교 학생 132명이 &lsquo;하나님을 믿어보겠다&rsquo;고 했고, 306명이 &lsquo;하나님의 사랑에 공감한다&rsquo;고 응답했다. 한편 온누리교회 대학부는 올해 12월 공군사관학교에서 희망노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사역칼럼 희망노트의 꿈 한국에 있는 수많은 대학 캠퍼스가 영적 전쟁터가 되었다.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꽁꽁 숨는 일이 많아졌다. 전도의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학생들이 많아졌다. 많은 대학의 채플과 선교단체활동이 줄어들고 있는 것 또한 한국 대학 캠퍼스의 현실이다. 대학 캠퍼스에 복음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대학부 희망노트는 대학생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학업과 취업문제로 고민하는 청년들, 관계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DNA를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대학 캠퍼스의 학생들이 이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 희망노트에서 크리스천 학생들에게 &ldquo;작정하고 사랑하라!&rdquo;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이 보여주는 사랑을 보면서 비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신자 학생들에게는 &ldquo;사랑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rdquo;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가기를 소망한다. 캠퍼스 복음화율이 4%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캠퍼스의 복음화율은 15%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11%가 숨어있을 뿐이다. 우리는 숨어있는 11%의 불씨를 찾아야 한다. 희망노트를 통해 대학생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대학 캠퍼스 안에 남아 있는 예배와 전도의 불씨를 찾아 지키고자 한다. 희망노트 사역만으로 대학 캠퍼스에 복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할 수는 없다. 희망노트는 남아 있는 복음의 불씨를 지키는 역할이다. 희망노트를 통해 대학생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바로 그 일에 대학 캠퍼스에 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 함께 사랑을 전하고 나눠야 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 희망노트를 통해 수많은 대학생들이 비전을 찾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있다. 한동대학교에서 진행했던 희망노트 집회가 끝나고 한 여학생이 울면서 찾아왔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데, 희망노트에 참석하면서 잊고 있었던 영상을 통해 하나님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여자대학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한 학생이 찾아왔다. 집회가 끝났는데도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 학생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학생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이처럼 희망노트를 통해 잊고 있던 비전을 다시 발견하는 학생도 있었고, 잃어버린 인생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는 학생들도 있다. 희망노트를 통해 대학 캠퍼스에 복음의 불길이 다시 한 번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 최성민 목사(대학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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