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주일강단] 나를 따르라(6)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나를 따르라(6)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마태복음> 3:13~17
/ 이재훈 위임목사
지금까지 살면서 잊히지 않는 누군가의 음성이 있습니까?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입니다. 지치고 낙심해서 절망할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주는 목소리, 모두가 등을 돌릴 것 같은 상황에서 “괜찮아, 너는 소중해”라고 말해주는 목소리입니다. 부모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스승의 음성일 수도 있고, 친한 친구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규정하는 어떤 음성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어떤 음성은 우리를 평생 짓누르고, 어떤 음성은 우리를 평생 떠받칩니다. 어떤 음성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사느냐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결정합니다.
500년 전, 한 음성을 붙잡고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입니다. 그는 담대한 종교 개혁을 일으켰지만, 담대한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매우 소심했고, 두려워했고, 자책에 자주 시달렸습니다. 밤이 되면 마귀가 귓가에 다가와 그가 지은 죄의 목록을 끝없이 읊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죄를 짓고도 네가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냐?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이 무슨 개혁이냐?”라는 음성이 그의 영혼을 짓누를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마틴 루터는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대응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잘못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책상에 라틴어 ‘바프티자투스 숨(나는 세례를 받았다)’이라는 의미의 문장을 써놓고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문장을 그가 무너질 때마다 붙잡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이루어낸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선물로 주어진 음성이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음성입니다. 그 음성이 마귀의 정죄를 물리쳤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했고, 끝까지 서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처럼
우리의 자리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붙잡아 주는 음성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붙드셨던 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그 때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요단강으로 인도합니다. 요단강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사람들의 줄입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며 물에 잠겼다가 올라옴으로써 세례를 받는 줄이 이어졌습니다. 그 줄에 자백할 죄가 없으신 분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막아섰습니다. 요한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줄을 잘못 서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고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러자 요한은 그대로 따랐습니다”(15절).
여기서 ‘의’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기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뜻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백성의 허물을 짊어지고 죄인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죄인 중 하나가 됨으로써 그 백성의 죄를 짊어지셔야 한다는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를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의 자리, 곧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완전히 서시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인정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정할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회개해야 할 우리의 자리, 죄 씻음을 받아야 할 우리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서주셨기에 우리가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우심을 우리가 덧입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인 됨을 그분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처럼 우리의 자리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한다’”(16~17절).
첫째, 하늘이 열렸습니다. 닫혀 있던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저절로 열린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열린 것입니다. 하늘을 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린 것은 오랫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는 신호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백 년 동안 한 사람의 선지자도 일어나지 않고, 한 번의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던 침묵의 시대를 깨뜨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습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여러 그림으로 예표됩니다. <창세기>에는 비둘기라는 명칭은 없지만,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한다’는 표현은 마치 새가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둘기의 출현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 이후 노아가 비둘기를 풀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심판의 물이 가라앉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둘기는 온유함, 순결함, 평강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 위에 임하신 성령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온유하신 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의 강함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온유함과 순종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셋째,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장면에 뚜렷하게 나타나신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예수님의 이 세례 받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됨과 교제가 잠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라”
그 가운데 들려온 음성,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를 매우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입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고, 이삭을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는 돌이킴 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보내신 진정한 이삭, 새로운 이삭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었던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 22:12).
오랜 세월이 흘러 사도 바울이 이 표현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롬 8:3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드린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내어주신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은 칼을 면했지만, 하나님의 독생자는 그 칼을 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노라’ 하시리라. 내가 이제 여호와의 율례를 선포하리라.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도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 2:6~7).왕 중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선언을 미리 예언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보내신 그 아들이,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말씀에서는 ‘기뻐하는 자’라는 표현과 함께 그는 ‘고난받는 종’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그리고 끝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종으로 오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표현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단순한 소개도 아닙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분의 일종의 취임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이제 너는 죄인들을 위하여, 온 세상을 위하여 고난받는 종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분을 고난받는 종으로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왕좌에 오르시는 왕이신 동시에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종으로서 영광과 고난이 함께 선포된 것입니다.
<시편> 2편에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는 구절이 있지만, 이 음성에는 ‘낳았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세례의 순간 비로소 아들이 되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굳이 이 세례의 장면에서 그 음성이 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음성을 들으셨을 때는 공생애가 시작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의 질병도 고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으신 그 순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음성을 먼저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을 먼저 하셨습니다.
이 음성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만 들려왔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공생애 전체를 떠받쳐 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곧바로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40일 금식 끝에 사탄이 공격합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 공격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받들게 하라(마 4:3~7).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놀라운 기적을 보임으로써 고생하지 않고 영광을 얻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공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험을 <신명기> 말씀을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험에 넘어지지 않은 더 깊은 이유는 바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그 음성이 예수님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이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사역하신 게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인정과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을 하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칭송하든 공격하든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변화산에서도 똑같은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때 구름이 나타나 그들 위를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마 9:7).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들었던 그 음성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걸음마다 들려온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을 사셨던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하시는 모든 여정, 예수님의 공생애를 붙잡아 주셨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였습니다.
나 자신과 가정, 공동체,
이 세상과 선교의 자리에서도
예수님께 들려온 이 음성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들려진 그 음성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과 연합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들려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자리에 서주셨기에,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자리에 있기에 그분에게 들려온 음성이 곧 우리에게 들려온 음성입니다.
<로마서> 8장 15~16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내려오셨던 그 성령이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기뻐하는 자다.”
여러분, 이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듣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려고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얻어내려고 애쓰는 신앙은 늘 불안합니다. 내가 충분히 노력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이 음성, 이미 받은 사랑에서 시작된 신앙은 자유롭습니다. 우리의 약함조차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의 약함을 자랑하리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도리어 그 약함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나의 약함조차 자랑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음성이 광야를 지나 십자가를 향해 나가던 예수님을 붙잡았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 음성을 붙잡고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그 음성을 붙잡아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의 자리’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 기뻐하는 자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모든 시험을 거뜬히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은 ‘가정의 자리’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 상태에서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가 무엇을 이루기 전에 먼저 축복하고 사랑을 선언해야 합니다. 네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음성을 부모가 자녀에게 먼저 전해줄 때, 자녀가 그 음성을 붙잡고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누가 서로 잘났는가?” 견주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기뻐하시는 자”라는 음성을 함께 듣는 자리입니다. 비교와 경쟁을 뛰어넘는 자리입니다.
‘이 세상과 선교의 자리’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로서 고난받는 종이 되셨던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위해서, 복음이 증거되게 하려고, 고난받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와 헌신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은 사랑이 흘러넘쳐서 세상 속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이미 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드려서 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물속으로 들어오신 그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음성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