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주일강단] 해같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교회
해같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교회
<사사기> 5:1~12, 31
/ 이재훈 위임목사
창립 41주년을 맞이하는 주일 <사사기> 5장 31절에서 온누리교회를 향한 기도의 제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모든 원수들이 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솟아오르는 해같이 힘차게 하소서.’ 그러고 나서 40년 동안 그 땅에 전쟁이 없었습니다”(31절).
<사사기> 5장은 드보라와 바락이 철병거 900대를 가진 시스라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승리한 이후에 하나님께 감사를 찬송으로 올려 드린 기록입니다. 출애굽 이후에 모세와 미리암이 하나님을 찬송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는 드보라의 마지막 기도를 온누리교회의 기도로 드리고자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교회 되게 하소서.”
해는 깊은 밤을 지나서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해가 힘차게 솟아오름과 같게 하소서”는 그 시대가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시대에, 야엘의 시대에 큰길은 비었고 여행자들은 구불구불한 길로 다녔다네. 결국 나 드보라가 일어나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일어나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마을 주민들이 없었다네. 그들이 새로운 이방 신들을 선택했고 그때 전쟁이 성문까지 이르렀다네. 이스라엘 군인 4만 명 가운데 방패 하나, 창 하나가 보였던가?”(6~8절).
큰길이 텅 비었고, 장사하는 사람도, 순례하는 사람도 큰길로 다니지 못하고, 숲 사이 구불구불한 샛길로 숨어 다닌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성벽 없는 마을의 농부들은 밭을 두고 떠났습니다. 군인 4만 명 가운데 창과 방패를 가진 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폐해지고, 무력해진 사회의 모습입니다. 왜 어두운 사회가 되었을까요? 그들이 이방 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이방 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이방 신’이라는 표현이 이목을 끕니다. 우상숭배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보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겉모양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우상숭배는 시대마다 모양만 새롭게 할 뿐,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깊은 어둠은 가나안의 철병거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우상숭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의 환경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우상숭배에서 시작됩니다. 그 어둠 한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거듭 외칩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의 자녀로 부름을 받다
“깨어나거라, 깨어나거라 드보라여! 깨어나거라. 깨어나서 노래하여라! 일어나거라, 바락이여! 네 포로를 사로잡아라! 아비노암의 아들이여!”(12절).
“깨어나거라”라고 네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이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탄하고 한가한 시대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부르심입니다.
드보라도 자신이 사사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깨어나거라”며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깊고 어두운 밤에 사람을 깨워 일으키십니다. 아침 해가 어둠을 밀어내며 떠오르듯이 그렇게 하십니다. 역사의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깨워서, 때로는 한 교회를 깨워서 일하시기도 합니다. 역사의 어두운 배경과 함께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교회를 통해 어둠을 뚫고 나가도록 역사하십니다. 온누리교회가 이 시대가 아무리 어두울지라도 그 어둠을 깨고 일어나 해처럼 솟아오르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회복이 되지 않는 몸, 앞이 보이지 않는 재정 상황, 기도해도 달라지지 않는 가정 때문에 어두운 밤처럼 느껴지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도 해가 힘 있게 솟아오르기를 기도합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
자원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첫째, 언제나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 자원하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백성들이 자원해 전쟁에 나갈 때 여호와를 찬양하라!”(2절).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백성들 가운데 전쟁에 자원하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나니 여호와를 찬양하라!”(9절).
드보라와 바락이 900대의 철병거를 가진 시스라의 군대와 싸우러 나갈 때 억지로 끌려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일어나 나가자!”라고 했을 때 자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동원이 아니라 자원함입니다. 지도자가 앞서갈 때 자원함으로 따르는 이들에 의해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온누리교회 41년 역사에는 언제나 앞서가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자원함으로 따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때로 이해되지 않는 비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비전에도 순종하며 자원했던 역사가 바로 온누리교회의 역사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헌신된 지파를 거명합니다.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그랬습니다. 반면 싸움에 나오지 않는 지파들도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양 우리 주변에서 머뭇거리고만 있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저편에 머무르고 있었고, 아셀 지파는 해변에 남아 부둣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고 헌신했던 지파들이 있는 반면, 머뭇거리며 생각만 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지파들도 있었습니다. 드보라는 그 지파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지파에 속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즐거이 자원함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되어야겠습니까? 아니면 머뭇거리며 심사숙고만 하는 이들이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서 자원하며 즐거이 헌신하는 교회가 바로 해같이 솟아오르는 교회입니다.
끝까지 주의 원수들을 대적한다
둘째, 끝까지 주의 원수들을 대적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모든 원수들이 망하게 하소서! …”(31절).
‘우리 원수’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원수’라고 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나를 서운하게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망하기를 바라는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힘이 무너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의하면,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23문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셔서 우리가 점점 더 주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성장하게 하옵소서. 마귀의 일과 주께 대항하여 일어나는 모든 세력, 그리고 주의 거룩한 말씀을 거스르려고 꾸미는 모든 악한 계략을 무너뜨려 주옵소서. 주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실 때까지 이 모든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주께 대항해 일어나는 모든 세력, 모든 악한 계략을 무너뜨려 달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원수들은 때로 사람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법과 제도와 문화의 얼굴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서 움직이는 죄와 사망과 어둠의 권세가 있습니다. 시대마다 주의 말씀을 거스르고 꾸미는 악한 계략들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교회를 존재할 수 없게 하려고 합니다. 이슬람의 견고한 진은 더 강력하게 공격합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교회도 안전한 환경에서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묘한 신학과 사상으로 공격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 하나님의 원수가 망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원수와 싸우는 무기는 다릅니다. 드보라 시대는 실제 칼과 창을 가지고 싸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지신 무기는 다릅니다.
“그는 그분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계셨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왔고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계 1:16).
이 한 구절에 해가 나오고, 검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 검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의 싸움은 실제 칼로 이루어졌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는 말씀의 검으로 싸웁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악한 권세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여러 번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칼도 없었고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저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옥문을 지나 풀려나왔고, 백성들의 환호 속에 자신을 신처럼 높이던 헤롯은 주의 사자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대적하는 원수들은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주후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성경을 불태우고, 예배당을 허물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로마 제국이 교회에 가했던 박해 중에 가장 혹독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이들의 종말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주의 원수들을 망하게 하소서”라는 드보라의 기도가 있었고, 수많은 성도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드보라는 “그 해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해처럼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태양신을 섬겼던 그 시대에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태양이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그 해를 떠올리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태양을 떠올리듯이 그 백성들도 어두운 시대에 떠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이 기도를 우리는 담대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다면 이 기도를 못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주의 대적들을 망하게 하소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해같이 떠오르게 된다
셋째,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해같이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는 것입니다. 해는 떠오르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습니다. 날마다 같은 길을 기뻐하며 달려 나오듯 떠오릅니다. <시편> 19편에서는 아침 해를 두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동틀 무렵 비추는 빛과 같아서 점점 밝아져 환한 대낮같이 되지만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넘어져도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조차 모른다”(잠 4:18~19).
의인의 길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점점 밝아져 동틀 무렵 비추는 해와 같이 비추어져 환한 대낮같이 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창립 41주년을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정직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에베소교회처럼 수고와 인내와 바른 교리를 다 갖춘 교회였지만, 하나님은 그 교회에 “너희는 첫사랑을 버렸다”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강조했던 큐티, 일대일제자양육 등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어떤 법과 제도와 율법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 말씀의 기도 앞에 서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 편지로 읽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고,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이웃을 향한 사랑이요,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교회만이 시대의 어둠과 위협 앞에서도 해처럼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먼저 떠오르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처럼 떠오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노래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을 공의로 다스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통치하는 사람은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 같을 것이다. 비 갠 뒤의 햇살이 땅에 새싹을 돋게 하는 것 같을 것이다’”(삼하 23:3~4).
다윗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태어날 의로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아침에 떠오르는 해와 같을 것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말라기>에서도 이렇게 약속합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떠올라서 그 광선으로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난 송아지처럼 펄쩍펄쩍 뛸 것이다”(말 4:2).
<누가복음>에서 사가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태양이 높은 곳에 떠올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눅 1:78~79).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왜 태양이 떠오르는 비유를 자주 썼을까요? 그것은 드보라가 기도했고, <말라기>가 약속한 그 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만물을 움직이는 중심에 있는 태양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그 아침 해가 떠오르듯 하나님이 어두운 시대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한다면, 해가 힘 있게 솟아오르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16절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때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같이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 13:43).
해같이 떠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교회와 성도들은 해같이 떠오르는 인생 그리고 교회가 됩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둡고, 아무리 교회를 핍박하고,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와 함께 해같이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어둠을 뚫고 해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인생 그리고 교회가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