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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거룩한 전쟁 속 한 사람의 죄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거룩한 전쟁 속 한 사람의 죄 11월 17일~23일까지 &lt;여호수아&gt; 4:15~8:9 묵상포인트 1: 요단강 물이 끊어져 마른 땅이 되게 한 기적은 하나님의 권능이다. 요단 도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여호수아가 행한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행한 할례와 유월절 준수는 어떤 의미인지 묵상하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서 나오자 강물이 다시 흘러넘쳤다. 여호수아는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운다. 이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음을 알리고, 그분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2세대는 할례를 받지 못했다.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니, 하나님이 &lsquo;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게 했다&rsquo;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그 땅에서 난 것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다.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난다. 묵상포인트 2: 여리고성 정복 전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치르는 첫 번째 전투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은 칼과 창으로 행하는 물리적인 전투가 아니다. 백성이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전투 방법은 무엇인지, 하나님 명령에 담긴 영적 의미는 무엇인지 묵상하자.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과 그 왕과 용사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전투 방법은 여리고성 주위를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도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발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언약궤, 후발대 순서로 행진한다. 일곱째 날 성을 일곱 번 돈 후에 나팔 소리와 함께 백성이 크게 외치니 성벽이 무너진다.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도왔던 라합과 그 가족은 살려 주지만, 그 외 남녀노소와 짐승은 모두 멸한다. 묵상포인트 3: 여리고성 전투는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전쟁이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면, 모두가 죄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여리고성 정복 때 아간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인지 묵상하자. ▶여리고성 정복 때 유다 지파에 속한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 일부를 도둑질했다. 하나님께 &lsquo;온전히&rsquo; 바치라는 명령을 이긴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다. 하나님은 물건을 훔친 자와 그의 소유를 불사르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 언약을 어기고 어리석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제비를 뽑으니 유다 지파의 아간이 지목된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을 불사르니, 그곳 이름을 &lsquo;아골 골짜기&rsquo;라고 부른다. 아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을 점령하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아이성 뒤에 복병을 두고 전쟁을 준비한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믿음은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자녀 세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힘써 양육하자.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유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이다. 납득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자. ▶이방 여인인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이스라엘 족속인 아간은 탐욕으로 심판받았다. 언약 백성의 자격은 믿음과 순종에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상 숭배와도 같은 탐욕을 멀리하자. ▶공동체 안에서는 한 사람의 죄라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이 함께하길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도록 공동체 구성원 모두 서로 독려하며 온전한 순종으로 행하길 힘쓰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11-14  제1564호

  • 국내캠퍼스

    [News] "다음세대 응원단을 찾습니다!" &quot;다음세대 응원단을 찾습니다!&quot; &lsquo;2026 온누리교회 차세대 교사&rsquo;모집 차세대 교사 175명, 사랑부 교사 40명 필요 &lsquo; 2026 온누리교회 차세대 교사 모집&rsquo;을 11월 8일(토)부터 16일(일)까지 한다. 현재 차세대 교사175명,사랑부교사40명이더필요하다. 2026년 온누리교회 차세대 교사로 섬기기를 희망하는 성도들은 소속 공동체 담당목사에게 추천을 요청한 다음, 온누리교회 홈페이지 또는 QR코드로 신청하면 된다. 차세대 교사로 지원하려면 다음세대를 향한 사랑을 품은 성도로 온누리교회 등록 성도, 세례교인, 공동체 순예배 참석 중인 성도여야 한다. 차세대 교사 모집 기간 온누리교회 예배에서는 교사들의 간증과 특순을 한다. 서빙고온누리교회 1~4부 예배와 대학청년부(SNS, 하늘, 요셉) 예배에서는 유남옥, 장요한, 이영희, 예상욱, 정현우, 김단비, 조명, 이슬기 교사가 간증하고, 유년2부, 유치부 연합, 예꿈 샤이닝키즈, 유년1부, 유년3부, 초등2부가 특순한다. 양재 1~4부 예배와 대학청년부(여호수아,J4U, 허브)예배에서는 양은경, 이신혜, 김주미, 권성국, 박정미, 이정연, 이건희 교사가 간증하고, 유년2부, 예꿈 샤이닝키즈, 초등1부, 유년1부, 유아부 연합, 초등2부가 특순한다. 2026년 신입 차세대 교사들을 대상으로 &lsquo; 교사사명교육&rsquo; 도 한다. 목요반은 12월 4일(목)부터 26일(금)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온라인(Zoom), 토요반은 12월 6일(토)부터 27일(토)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온라인(Zoom)으로 진행한다. 사랑부 교사교육은 장애인사역본부에서 별도로 한다. 문의: 서빙고 02-3215-3521 양재 및 도곡 02-570-7436 서빙고 사랑부 02-3215-3263 양재 사랑부 02-570-7349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수험생을 위한 &lsquo;수능당일기도회&rsquo; 11월 13일 오전 8시 40분부터 차세대사역본부에서 수험생을 위한 &lsquo;수능당일기도회&rsquo; 를 개최한다. 2025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11월 13일(목) 오전 8시 4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양재온누리교회 사랑홀에서 이어진다. 수험생들과 동일한 일정으로 기도회를 한다. 1교시 박종길 목사, 2교시 강부호 목사, 3교시 최성민 목사, 4교시 노치형 목사가 설교하고, 기도회를 인도한다.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와 교사, 수험생을 위해 기도하기 원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문의: 02-3215-3523 / 홍하영 기자 &lsquo;2025 엔젤트리&rsquo;사연 접수 11월 16일까지 사연신청서 제출 2025 엔젤트리 사연을 접수한다. 11월 16일(일)까지 온누리교회 홈페이지나 각 캠퍼스 목회행정실에비치된사연신청서를작성해서제출하면 된다. 사연을 신청할 때는 돕고 싶은 이웃의 사연과 연락처, 도로명 주소, 전하고 싶은선물,신청자이름,소속공동체및다락방,연락처를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웃에게 전달할선물은5만원이하(꽃,음식,현금금지)여야 한다.후원이나기부도가능하다. 2025 엔젤트리 사연은 11월 22일(토)부터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로비에 전시한다. 캠퍼스는상황에맞춰일정을변경할수있다. 엔젤트리는 주변에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고, 작은 선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전하는운동이다. 계좌번호: 하나은행 573-910007-03004(온누리교회엔젤트리) / 박지혜 기자 11월 비전헌금, 스포츠선교회 &lsquo;FCA&rsquo; 후원 11월8일(토)과9일(일)봉헌하는11월비전헌금은운동경기장을선교지삼아하나님사랑과 복음을전하는스포츠선교회&lsquo;FCA(Fellowship of Christian Athletes)&rsquo;를 후원하는 데 사용한다. FCA는 1954년 미국에서 창립해 올해 70주년을 맞이한 국제적인 스포츠선교 단체다. FCA의 비전은 코치와 선수의 영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FCA 한국지부 &lsquo;FCA Korea&rsquo;는 2017년 문을 열었다&lt;관련 기사 5면&gt;. / 홍하영 기자 안전관리위원회, 화재 대피 훈련 실시 11월 16일 서빙고 2부 예배 직후 온누리교회 안전관리위원회에서 안전한 예배 환경 조성을 위한 &lsquo; 화재 대피 훈련&rsquo; 을 실시한다. 11월 16일(일) 서빙고온누리교회 2부 예배 직후 진행한다. 본당, 비전홀, 시온홀, 자모실, 두란노홀, 콘서트홀, 사랑홀 등 교회 주요 시설에서 예배 드리는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화재 대피 훈련과 화재 진압 시연 등을 한다. 실질적인 상황 대처 능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둔다. 이날 훈련 참가자들은 동빙고근린공원 실습장에서 심화 안전 교육도 받을 수 있다. / 홍하영 기자 CGN 홈페이지 &lsquo;예배 VOD 서비스&rsquo;종료 CGN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던 온누리교회 예배 VOD 서비스를 종료한다. 11월 12일(수)부터 시청할 수 없다. 온누리교회 예배 VOD 서비스는 11월 16일(일)부터 기독 OTT &lsquo;퐁당&rsquo;에서 제공한다. 과거 예배 영상은 추후 순차적으로 기독 OTT &lsquo; 퐁당&rsquo; 에 업로드할 예정이다. 문의: 02-792-0691 / 홍하영 기자

     2025-11-08  제1563호

  • 칼럼

    [러브소나타 시가 한일 리더십 포럼 윤형주 장로 간증]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러브소나타 시가 한일 리더십 포럼 윤형주 장로 간증 &ldquo;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rdquo;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된 용정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 27년 2개월의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과 나는 육촌 관계이다. 우리 집안은 1890년대 말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조선 땅 북방의 북간도에 들어올 당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 영향으로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알았고, 주일학교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성경 말씀에 따라 살고자 몸부림쳤던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앞서가는 교육의 나라였던 일본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었다. 나의 부친은 명치(메이지, 明治)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와세다대학에서 강의한 윤영춘 박사로, 조카 윤동주의 일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부친은 일본의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동경의 릿쿄대학에 조카 윤동주를 입학시키고, 이후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시키셨다. 부친은 그의 하숙방까지 구해 주고 나서야 동경으로 가셨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다. 가계로는 당숙과 조카 사이면서 어린 시절에는 주일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다. 또 용정중학교에서는 교사와 제자였으며, 문학적으로는 모두 시인이자 선배와 후배, 서로를 존경하는 문학지기였다. 두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뜻을 품은 동지이기도 했다. 유산처럼 물려주신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미움 도시샤대학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1943년 &lsquo;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rsquo;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아버지는 동경에서 매주 후쿠오카 형무소로 조카 윤동주를 면회하러 가셨다. 나날이 수척해지는 그의 모습에 아버지는 &ldquo;왜 이렇게 몸이 말라 가느냐?&rdquo;고 물으셨고, 윤동주는 &ldquo;간수들이 영양제라고 하면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놔주고 있다&rdquo;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전보 한 통을 받게 되었다. &lsquo;윤동주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가져가시오. 만약 시신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이 시신을 규슈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해부용으로 제공하겠습니다&rsquo;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후쿠오카 형무소로 달려간 아버지 앞에는 차디찬 주검이 된 조카 윤동주가 누워 있었다. 일본의 명문대를 나오셨던 아버지는 조카의 죽음 이후 절대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1978년 별세하신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일본에 대한 미움과 분노, 원망과 증오였다.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가수가 된 나는 이후 일본의 유명한 가수들과 친구가 되어 가깝게 지내면서 양국을 오가며 함께 공연했다. 그러나 후쿠오카 지역만큼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곳은 형님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곳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슬픔과 원망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후쿠오카를 생각하면 조카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고, 우리에게 유산처럼 물려주신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미움이 되살아났다. &ldquo;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일본을 용서했겠니? 용서하지 않았겠니?&rdquo; 시간이 흐르고, 윤동주가 재학했던 동경의 릿쿄대학에서는 매해 2월 &lsquo;윤동주 추모일&rsquo;이 다가오면 대강당에서 예배와 함께 강연이나 음악회, 시낭송회를 열고 있다. 약 5년 전, 나는 이 대학으로부터 윤동주 추모콘서트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족으로서 감사한 일이었지만, 또다시 아버지가 남겨 주신 아픔과 미움이 살아났다. 이에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ldquo;주님, 제가 이 행사에 가야 합니까? 거절해야 합니까?&rdquo; 故 하용조 목사님이 일본을 품자는 취지로 시작하신 &lsquo;러브소나타&rsquo;가 30여 차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참여 요청이 있었음에도 나는 한 번도 그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 미움 때문에 그곳에서 봉사는 했을지언정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때 주님이 내게 질문하셨다. &ldquo;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그가 일본을 용서했겠니?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겠니?&rdquo; 윤동주는 살아생전 시를 통해 고백했었다. &ldquo;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rdquo;(&lsquo;서시&rsquo; 中) &ldquo;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rdquo;(&lsquo;십자가&rsquo; 中) 내가 윤동주 시인의 유족임을 아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이 내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용서를 구하곤 한다. 일본 북해도부터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600여 개의 윤동주 동호회가 있다.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추모일이 되면 그들은 &ldquo;윤동주의 시는 그 시인의 모국어로 낭송해야 한다&rdquo;며 우리말을 배운 뒤 울면서 그의 시를 낭송한다. 살아생전 윤동주는 이미 &lsquo;모든 죽어가는 것&rsquo;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릿쿄대학 윤동주 추모콘서트에 참여했고, 그 자리에서 고백했다. &ldquo;나는 오늘 여러분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습니다. 내가 그동안 여러분을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윤동주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일본 땅에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해, 유족 중 하나인 저에게 그토록 미안해 마십시오. 만약 윤동주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그는 여러분을 용서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평생 닮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rdquo; 우리를 사랑하사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이 땅에 있었던 실제 역사이다. &lsquo;러브소나타&rsquo;의 목적과 방법도, 그 열매도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 자신을, 가족을, 자녀를, 이웃을, 나라를, 더 사랑하길 바란다. 윤동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lsquo;용서&rsquo;라는 얼굴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가수는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직업이지만, 일부는 관객들을 수입의 배경으로만 삼고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환호성과 박수, 열성적인 합창이 나를 기쁘게 해주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숱한 사랑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고 부와 영광을 차지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사랑 연기를 잘했던 어느 여배우는 누가 쓴지도 모르는 악성 댓글에 끝내 목숨을 끊었다. 두 번째 곡의 음반 판매 실적이 저조해 그 상처로 세상을 등진 가수도 있다. 감동적인 연기와 노래로 사랑을 표현하던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도, 해보지도 못한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죽음의 문턱에 다가섰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치욕스럽고, 죽고만 싶던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조명이 화려한 무대에 서 있는 내게 오셔서 &ldquo;참 잘하고 있구나, 내가 네게 준 목소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구나. 내가 무척 기쁘다&rdquo;라고 하지 않으셨다. 고통 속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 발을 씻겨주시며 말씀하셨다. &ldquo;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rdquo;. 비로소 나는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값없이 받은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려 한다. 나의 지친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손을 내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들이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그분이 나를 씻어 주신 것처럼, 모두의 발을 씻어 주실 것이며, 나를 살리신 것처럼, 모두를 살리실 것이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의 온기가 서로에게 스미는 믿음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ldquo;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rdquo;(요 13:34). 80년 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쓸쓸하게 숨져 간 나의 형님, 윤동주 시인이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고대한다. / 윤형주 장로(서초B공동체)

     2025-11-08  제1563호

  • 성인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요단강 도하의 기적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요단강 도하의 기적 11월 10~16일 &lt;여호수아&gt; 1:10~4:14 묵상포인트 1: 같은 비전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큰일을 이룬다. 여호수아는 3일 안에 요단강을 건널 수 있도록 모든 백성을 준비시킨다. 특히 요단 동쪽에서 기업을 분배받은 지파들의 헌신을 다짐받는데, 그 이유에 대해 묵상하자. ▶여호수아는 사흘 안에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차지하러 갈 것을 온 백성에게 전한다. 또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요단강 서쪽(가나안) 땅에서 정복 전쟁을 끝마칠 때까지 선봉에 서서 싸울 것을 요청한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에게 순종한 것같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할 것을 다짐한다. 묵상포인트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나아가는 길에 믿음의 사람을 준비하신다. 라합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을 믿은 여인이다. 정탐꾼들과 라합의 만남을 통해 우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묵상하자.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탐하도록 보낸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묵는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이 온 것을 알리자, 왕은 사람을 보내 정탐꾼을 수색한다. 라합은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 밑에 그들을 숨겨 준다. 라합은 정탐꾼들 앞에서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한다. 하나님이 홍해를 마르게 하신 일, 아모리 사람을 진멸시키신 일 등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라합은 자신이 정탐꾼을 선대했듯이, 그들도 자신의 아버지 집을 선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정탐꾼들은 창문에 &lsquo;붉은 줄&rsquo;을 매달아 가족과 함께 모여 있으라고 말한다. 붉은 줄은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이의 생명을 구원하는 표가 될 것이다. 라합의 도움으로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진영에 무사히 도착한다. 묵상포인트 3: 요단강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넌 것처럼, 출애굽 2세대는 요단강을 건넌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이 백성에게 지시하신 것이 무엇인지, 요단강 도하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묵상하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는 날, 관리들이 백성이 할 일을 명한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가면 백성은 2,000규빗(약 900m)쯤 떨어져서 뒤따라야 했다.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한곳에 쌓였다. 모든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서 있었다.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고,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택해 요단 가운데 들어가 돌 열두 개를 가져오게 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한 증거로 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백성 앞에서 위대하게 하시며 그의 리더십을 확증해 주신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같은 비전을 품고 서로 힘을 합쳐야 공동체의 비전을 이루게 됨을 기억하자.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졌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나는 하루 동안 무엇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는지 돌아보자.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성결함을 명령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자신을 늘 성결하게 하자. ▶하나님의 언약궤는 백성보다 앞서서 나아갔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도록 주의하자. ▶하나님은 요단강 도하를 기념하도록 열두 개의 돌을 세우게 하신다.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보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11-08  제15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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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는 말씀 해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 5:13). 맛있는 말씀 해설 &ldquo;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hellip;&rdquo;(마 5:13). 최근 우리 사회는 다양한 도덕적 혼란과 가치관의 혼재 속에서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 진리와 거짓이 뒤섞이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해지면서 사람들은 무엇이 참된 삶인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한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ldquo;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hellip;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rdquo;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마 5:13~14).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역시 혼란과 어려움의 시대였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동안 페르시아 시대, 헬라 시대, 하스모니안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렀고, B.C.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함락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ldquo;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rdquo;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유대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로마는 유대 제사장들을 이용해 황제를 숭배하게 하고, 세금을 징수하게 하는 등 종교적, 정치적으로 유대인을 억압했다. 유대인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역시 점차 로마에 협력하며 식민지 체제를 돕는 기관으로 변질했고, 결국 종교적 정체성마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평범한 제자들을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ldquo;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rdquo; (마 5:13). 예수님은 이 명칭을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 이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위로이자 사명이었다. 그렇다면 소금이 가진 특징이 무엇일까? 첫째, 소금은 짠맛을 낸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맛을 내는 것이다. 음식에 소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해도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lsquo;신앙의 짠맛&rsquo;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바울도 &ldquo;여러분은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같이 은혜롭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rdquo;라고 권면한다(골 4:6) 우리가 은혜로운 말과 행실로 살아갈 때, 세상은 하나님의 복음을 맛보게 된다. 둘째,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죄와 타락으로 기울어가지만, 성도들은 그 안에서 부패를 막는 영적 방부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진리와 거룩을 지켜내는 것이 바로 소금의 사명이다. 셋째. 소금은 생명에 반드시 필요하다. 소금은 단순한 음식의 부재료가 아니다. 한때 &lsquo;노스웨스턴(Northwestern)&rsquo;에서 교환교수로 오신 분과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이 전문의로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ldquo;사람의 몸에서 약 0.9%의 염분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rdquo; 다시 말해 소금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필수 요소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ldquo;너희는 소금&rdquo;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성도들을 하찮게 여기고,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도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소금으로서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넷째, 소금은 녹아야만 맛을 낸다. 헬라어로 &lsquo;맛을 잃다&rsquo;라는 단어가 &lsquo;모라이네인&rsquo;인데, 이 단어는 &lsquo;어리석게 되다&rsquo;, &lsquo;어리석게 만들다&rsquo;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녹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는 어리석은 상황이 된다. 녹지 않은 소금은 동물의 사료로 사용할 수 없다. 건축재료로도 쓸 수 없다. 녹을 때 맛을 내며 기능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ldquo;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rdquo;이지, &ldquo;소금이 되라&rdquo;고 하지 않으셨다. 이미 제자들은 소금이었다. 그러나 소금은 그대로 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고, 녹을 때에야 비로소 짠맛을 내며 제구실을 한다. 성도는 자신을 희생하며 녹을 때 세상에 맛을 내고, 생명을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도전한다. 소금처럼 짠맛을 내며 부패를 막는 존재, 그리고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로 우리를 부르셨다. 어느 상황,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주신 &lsquo;소금&rsquo;의 사명을 기억하며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 여성민 목사(광명공동체)

     2025-11-08  제1563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피할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피할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lt;여호수아&gt; 20:1~9 /이재훈 위임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그 땅이 각 부족, 족속들에게 정의롭게 분배되기를 원하셨습니다. &lsquo;정의롭게 분배된다&rsquo;는 것은 기계적으로, 인원수에 따라 똑같은 면적을 나눠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툼과 분열이 없도록 하려고 제비 뽑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분쟁과 다툼을 없애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습니다. 제비를 뽑지 않을 수 있는 여러 예외가 허용됐습니다. 자진해서 어떤 땅을 원할 때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ldquo;우리는 이곳에 머물기 원합니다. 단 우리는 함께 정복하는 것은 참여하겠습니다&rdquo;라고 했을 때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또 한 가지는 갈렙과 유다 지파가 자진해서 헤브론 산지, 가장 위험하고 힘든 땅을 정복하겠다고 자진한 경우입니다. 남다른 헌신을 하는 경우입니다. 희생하는 선택을 했을 때 존중되고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반면 요셉 지파처럼, &ldquo;우리는 인원이 많고 두 지파나 되는데 땅이 너무 좁습니다. 땅을 더 주십시오&rdquo;라고 요청했을 때는 &ldquo;스스로 개척하라&rdquo;고 여호수아가 거절하며 도전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의는 기계적 정의, 기계적 분배가 아닙니다.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존중되고, 더 많이 수고한 사람들이 존중받는 모습을 이끌어 내고,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는 나태하고 안일한 사람들에게는 도전하고 스스로 일하도록 일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에게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동일하게 주는 기계적 정의가 결코 아닙니다. 선한 영향력이 사회에 미치게 되는 것, 그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는 것이 올바른 정의입니다. &ldquo;도피성을 지정하라&rdquo; 가나안 땅이 분배되는 마지막 시점에서 하나님이 &ldquo;도피성을 지정하라&rdquo;는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주십니다. &ldquo;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lsquo;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모세를 통해 지시한 도피성들을 지정하라고 말하여라. 그래서 뜻하지 않게 실수로 살인한 자가 그곳으로 피신해 피로 복수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라&rsquo;&rdquo;(1~3절). 의도치 않게, 고의가 아닌, 미움이 아닌 우연한 사고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복수를 바로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제도로 도피성을 만들어 피난처로 삼게 하셨습니다. &lsquo;도피&rsquo;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어감을 많이 줍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도피하는 경우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도피도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보다 훨씬 심한 보복을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 당장 피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곳은 필요합니다. 정말 억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과 사회에서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셨기에 &lsquo;도피성&rsquo;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아이디어가 탁월한 수준의 사랑과 정의가 담겨 있는 제도라는 것을우리가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읍의 장로들이 심사를 하게 돼 있습니다.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 받아 줍니다. 혐의가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재판의 과정을 거치고 혐의 없음이 확인되면 그 도피성에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살아야합니다. 진짜 잘못한 것이라면 복수를 받도록 내어 줬습니다. 이 성을 요단 동편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를 지정합니다. 요단 서편에는 납달리 산지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 유다 산지의 헤브론이 지정됐고, 요단 동편에는 르우벤 지파의 베셀,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 므낫세 지파의 바산 골란 지역입니다. 골고루 분포된 이유는 어디서든지 다가갈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는 그 길도 잘 닦아 놓도록 했고, 표지판까지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가나안 땅 분배의 마지막 지점에서 도피성을 지정한 것이 놀랍습니다. 전쟁이 잦고 폭력적인 당시 사회에서 하나님은 한 생명이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도록, 보복 사회로 치달았던 그 시대에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귀한 제도입니다. &ldquo;누구든 사람을 쳐 죽이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다만 의도적으로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넘겨주신 일이면 그는 내가 정해 놓은 곳으로 도망치게 해야 한다&rdquo;(출 21:12~13). 의도적으로 죽인 게 아니라면 도망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의도성을 기준으로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게 없었던 시대입니다. 무조건 누군가의 피해를 받으면 보복에 나서는 시대였습니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시대에 이 아이디어를 통해 그 사회를 하나님의 질서로 다스리고, 하나님 나라 모델을 보여주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ldquo;그러나 만약 적개심이 없이 누군가를 갑자기 밀치거나 아무 의도가 없이 무언가를 던졌거나 혹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돌을 미처 보지 못하여 어떤 사람을 맞아 죽게 했다면 그는 원수도 아니고 해칠 생각도 없었으므로 회중은 그 살인자와 그 피를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 사이에 이런 규례들을 따라 판단해 주어야 한다. 회중은 그 피를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그 살인자를 보호해야 하며 그를 그가 피했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그는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 부음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한다&rdquo;(수 35:22~25).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이게 된 경우는 보호해 주고, 도피성 제도를 통해 생명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ldquo;이것은 사람을 죽이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거기 피신하는 사람에 관한 규범으로 자기 이웃을 악의 없이 우연히 죽이게 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자기 이웃과 함께 나무를 베려고 숲에 들어갔는데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도끼를 휘두르다가 도끼머리가 날아가 그 이웃을 쳐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그 성들 가운데 하나에 피신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rdquo;(신 19:4~5). 합당한 확인이 될 때까지 그 사람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해서 했든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건지를 확인할 때까지는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에 오면 장로들이 판단하는 중요한 재판관 역할을 했고, 재판 과정을 통해서 고의성 여부를 확인하고, 만일 의도하지 않았다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도피성에 살도록 했고, 대제사장이 죽은 이후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사랑 도피성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첫째, 실수를 범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생명을 보호하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로운 정의,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람들은 복수하는 정의를 생각합니다. 의도성 없는 실수도 정죄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복수심을 표현하는 정의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에 근거한 정의입니다. 재판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처벌 중심의 사회가 아닌 회복 중심의 사회를 보여줍니다. 의도성 없는 실수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정의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지나친 복수심을 억제하는 정의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lsquo;눈에는 눈, 이에는 이&rsquo;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수를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복수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은 피해 받은 사람이 복수하는 게 아니라 어떤 국가나 공권력에 의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복수를 개인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복수를 맡겨 놓으면 당한 것보다 심하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악순환을 방지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이러한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도치 않게 실수로 누군가를 죽게 할 경우에 그 사람이 잘못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호해 주는 제도입니다. 셋째, 실수라고 할지라도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정의입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은 실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다는 게 증명돼도 그 사람에게 치러야 할 대가는 그 도피성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일종의 구금 효과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고귀한 생명을 잃게 한 실수에 대한 대가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발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의 죽음과 이 사람이 자유케 되는 것을 연결시켜 놓은 것의 의미입니다. 일종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그 사람 죄의 대가를 치르는 죽음으로 하나님이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음으로 살인한 자의 죄 값을 치른 것으로 간주함으로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 값을 치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신 제도입니다. 구약 곳곳에 하나님의 십자가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도피성은 그냥 눈감아 주는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 대신 죄 값을 치름으로 살 길을 열어 주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을 행하는 정의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입니다. 여러분, 정의를 부르짖는다면 반드시 살펴봐야 하는 것이 &lsquo;내 마음에 어떤 사랑이 있는가&rsquo;입니다. 복수에서 나오는 정의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나오는 정의인가가 중요합니다. 사랑을 부르짖는 경우라면 &lsquo;정의가 뒷받침이 되어 있는가&rsquo;가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무분별한 행동을 방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견책하고, 책망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누군가에게 정의를 외칠 때 우리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정의입니다. 정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정의, 어떤 것도 올바른 사랑과 정의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입니다. &lt;시편&gt; 어느 말씀에 의하면, 사랑과 정의가 서로 입 맞추었다고 합니다. 도피성은 결국 예수님의 위대한 십자가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도피성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도피성에는 이방인이나 여행객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문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서만 보호 받을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는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피함으로만 우리는 보호를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디서나 쉽게 도피성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늘 우리 곁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문을 잠그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도피성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죽인 자만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피성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도피성을 찾아가는 사람은 때로 실패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찾는 자는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도피성으로 안내하는 안내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때로는 의도한 죄로 인해서 영혼의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로 피하십시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올바른 정의가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정의입니다. 그 징계를 달게 받을 때 우리가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열방에 나타내실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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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ody)] 영·혼·육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ody) 영&middot;혼&middot;육을 살리는 &lsquo;생명의 양식&rsquo; 성경을 &lsquo;생명의 말씀&rsquo;이라고 하고, &lsquo;일용할 생명의 양식&rsquo;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lsquo;말씀을 먹는다&rsquo;라고 표현한다. 말씀을 먹으면 영혼의 생명이 살아난다. 마찬가지로 몸에 좋은 영양소를 먹는 것은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ldquo;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rdquo;(창 1:29). &ldquo;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rdquo;(창 9:3). 성경은 우리가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채소와 과일, 고기를 잘 먹으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는 식탐이나 스트레스를 마취시키기 위한 진통제로 폭식과 야식 등을 한다. 또 극한의 다이어트나 우울감으로 인한 거식증이나 편식, 극단적인 식단 등으로 몸의 건강을 해치는 일을 한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 우리는 &lsquo;일용할 양식&rsquo;을 구한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하루 먹을 양식이다. 곧 오늘 하루를 살아갈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겸손함이 있을 때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먹고도 남을, 내일도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음식을 저장하듯 몸에 쌓아 넣는 것은 식탐이며 과욕이다. &lt;고린도전서&gt; 8장 13절은 &ldquo;&hellip;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rdquo;고 말씀하고 있다.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만 배불리 채우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채움으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음식 자체는 부정하지 않다. 죄가 없다. 하지만 음식을 바라보고 먹는 사람의 마음에 식탐이 있다면 이마저도 탐욕이다. 물욕, 명예욕과 다를 게 없다. 또 음식을 과하게 섭취하면 건강을 해칠뿐더러 체지방도 늘어난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까지도 살리는 능력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다. 하지만 식사 외에 야식을 먹으면서 살을 빼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역사적으로 이런 기도 응답은 들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실천, 노력과 성실을 대적하는 나태와 게으름, 편해지고자 하는 본능의 욕심과 싸움이기 때문이다. 의지와 본능의 싸움은 하나님의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쉽게 구분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능을 거스르며 오늘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적절한 양과 영양소의 주어진 분량만큼만 감사히 먹는 절제의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의 양식을 먹는 것도 다르지 않다. 때로 성경을 기간 내에 빨리 일독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보통 말씀을 읽을 때, 단순한 읽기의 정확을 요구하는 &lsquo;정독&rsquo;, 분량을 빨리 해치우려는 &lsquo;속독&rsquo;, 최근 유행하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며 넓게 읽는 &lsquo;통독&rsquo;을 선택한다. 하지만 필자는 꼭꼭 씹어 먹는 방법인 &lsquo;심독&rsquo;을 권하고 싶다. 심독은 문맥 속 의미를 깊이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동시에 저자의 의도를 좇아가며 자신의 삶과 연결해 성찰하는 읽기 방법이다. &lsquo;성찰적인 독서&rsquo; 또는 &lsquo;묵상적 독서&rsquo;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이 성경 읽기는 내 안에서 울림을 찾아가게 도와준다. 그뿐만 아니라 내적 변화와 외적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읽기 속도가 늦더라도 한 줄의 말씀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내가 변화되고 살아가는 것이 더 큰 가치가 있다.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두 가지 양식을 겸손하고, 감사하고, 기쁘게 깨달으며 먹어야 한다. 육의 양식만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몸은 살되 영혼이 점점 죽어가는 삶을 살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육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영혼을 담고 살아갈 몸이 죽는다.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고루 섭취해야 몸도 살고, 영도 살아난다. 오늘도 몸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을 위한 양식을 날마다 공급해 주시고, 하루하루 삶을 연장해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 정주호 대표(중종로공동체, 스타트레인대표, 재활과학박사)

     2025-11-08  제1563호

  • 칼럼

    [신앙에세이] 그럴 줄 알았어 신앙에세이 그럴 줄 알았어 지난겨울, 아웃리치를 준비하던 중에 한 지체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ldquo;목사님, 저 아웃리치에 갈 수 없어요. 이유는 묻지 말아 주세요.&rdquo; 순간 &ldquo;말하지 않아도 알아요&rdquo;라는 CM송 가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온 힘을 다해 이 지체를 설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필자가 먼저, 그다음에는 팀 구성원들이, 마지막에는 멘토님들이 설득을 시도했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중도 하차한 지체를 뒤로한 채, 어쩌면 지체가 걱정했을 법한 고민을 안은 채 아웃리치 첫걸음을 뗐다. 그러나 염려도 잠시, &ldquo;하나님이 다 미리 준비하셨어요&rdquo;라는 고백이 연신 터져 나오는 현장에는 은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은혜의 현장을 떠나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 마음 한편에 잠시 묻어 두었던 염려가 피어올랐다. 아웃리치에 갈 수 없다고 했던 그 지체였다. 그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증거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여름이 되었다. 여름사역 회의에서 &ldquo;모든 청년 구성원이 함께 아웃리치에 참여했으면 좋겠다&rdquo;는 의견이 나왔고, 그때 그 지체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 지체는 현실적인 이유로 아웃리치 참여가 어렵다고 했다. 지체를 향해 필자는 설득이 아닌 믿음을 고백했다. &ldquo;하나님이 다 예비해 두셨으니 우리는 잘 준비해서 현장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두려움만 넘어서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맛볼 것입니다&rdquo; 그날 이후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부단히 기도하며 한 치의 의심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름 아웃리치 아침이 밝았다. 당일 우천 소식으로 인해 준비했던 페인트 작업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안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다 예비해 두셨다. 우려했던 비는 오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구름기둥과 같은 시원한 그늘을 주셔서 편안하게 작업하게 하시고, 작업이 끝난 후에는 불기둥처럼 뜨거운 햇빛을 주셔서 작업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다. 이후로도 3일을 꼬박 하나님은 신실하게 역사하셨다. 마지막 날 저녁, 마침내 &ldquo;하나님이 정말 다 예비해 두셨네요&rdquo;라는 고백을 이 지체가 듣게 되었다. 필자의 염려가 해소되는 그 순간 &lsquo;그럴 줄 알았어&rsquo;라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하나님이 내 마음 한편에 그 지체를 염려로 주신 이유, 공동체를 통해 그에게 아웃리치를 도전하게 하신 이유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에세이를 작성하면서 &lsquo;무엇이 이 지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했을까?&rsquo;를 되물었다. 그 답을 &lsquo;삭개오&rsquo;라는 인물에게서 발견했다. &lsquo;삭개오&rsquo;는 &lsquo;정결한 사람&rsquo;이라는 뜻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lsquo;죄인&rsquo;이라 불렀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실 때 삭개오는 그분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랐다. 이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이 &ldquo;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rdquo;고 말씀하시며 이야기가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이 감동적인 사건에는 한 가지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분명 삭개오는 로마의 세리이고,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유대민족을 구원할 메시아셨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오른 것은 분명 숨겨진 요소가 있으리라. &ldquo;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다&rdquo;, &ldquo;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rdquo;는 그의 고백은 앞으로의 포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 시제로 기록된 이 고백은 그가 이미 그렇게 해오던 일을 앞으로도 이어가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이런 자신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삭개오의 간절한 바람이 그 지체에게도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기에 역시 하나님이 하실 줄 알았다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아닐까? 한 해를 결산하며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 &ldquo;그럴 줄 알았어&rdquo; / 박모세 목사(서산봄청년공동체)

     2025-11-08  제1563호

  • 성인

    [<생명의 삶> QT 프리뷰(preview)]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에게 &lt;생명의 삶&gt; QT 프리뷰(preview)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에게 11월 3일~10일까지 &lt;디모데후서&gt;2:1~4:22, &lt;여호수아&gt;1:1~9 묵상포인트 1: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좋은 리더십이 되길 바랐다. 바울의 권면에서 사역자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진리에서 벗어나거나 순종하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묵상하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자세로 &lsquo;그리스도의 좋은 병사,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rsquo;의 사례를 든다. 바울은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최선을 다했다. 고난을 참고 견디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라고 한다. 금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자기를 깨끗하게만 하면 주인이 요긴하게 사용하는 귀한 그릇이 된다. 또한 바울은 청년의 정욕과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피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한다. 묵상포인트 2: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죽음(순교)이 가까운 때에 쓴 마지막 편지가 디모데후서다. 말세를 사는 모든 성도에게 바울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인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마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묵상하자. ▶말세의 특징은 &lsquo;자기중심성&rsquo;이다. 바울은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만 있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한다. 그리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한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한 일에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다. 때가 이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사욕을 따를 것이다. 사역자는 모든 일에 신중하고 고난을 받으며 자신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킨 바울에게, 그리고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님이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속히 올 것과 가죽 종이에 쓴 책도 가져올 것을 디모데에게 부탁한다. 묵상포인트 3: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에 관해 기록한 역사서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심히 두려웠을 것이다. 맡겨진 사명 앞에서 두려워하는 지도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당부와 격려가 무엇인지 묵상하자.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이 발로 밟는 모든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다. 또한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하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명하시며,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하리라고 격려하신다. 적용을 위한 가이드 ▶전투에서 승리하는 병사는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자. ▶악하고 허탄한 말은 공동체의 믿음을 무너뜨린다.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와 교회를 견고히 세우자. ▶의로우신 재판장이 임하실 그날에 부끄럽지 않도록 &lsquo;자기중심성&rsquo;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자. ▶바울처럼, 마지막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잘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살아가자.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당부하셨다.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는 힘은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하자. / &lt;생명의 삶&gt; 편집부

     2025-10-31  제1562호

  •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3일(수) ‘교회, 선교로 꽃피우다’ 10월 23일(목) &lsquo;교회, 선교로 꽃피우다&rsquo; 주제강의 7 교회, 선교의 촉매제 /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교회는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lsquo;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rsquo;입니다. &lt;사도행전&gt;에 나타난 교회가 이에 해당합니다. 교회가 선교적 소명을 잃으면 두 번째 유형, &lsquo;현상 유지에 급급한 교회(Maintenance Curch)&rsquo;가 됩니다. 생존을 위해 존재하고, 소명을 잃어버린 자신만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역사가 오래될수록 세 번째 유형인 &lsquo;박물관 같은 교회(Museum curch)&rsquo;가 됩니다. 교회 존재 자체가 박물관처럼 되버리고, 모든 의사결정이 과거에 머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헌신, 도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헌신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물관 같은 교회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선교가 교회의 심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지만 양식을 먹고 호흡만 한다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선교가 영혼의 운동입니다. 교회를 있게 한 것은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선교하시는 게 아니라, 그분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기능이 필요합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로 부르셨습니다. 정기적인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배 자체로만 존재하면 소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둘째, &lsquo;제자 훈련&rsquo;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셋째 &lsquo;공동체&rsquo;입니다. 과거의 목회 패러다임에서 목회자의 주요 일과는 &lsquo;심방&rsquo;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방, 즉 공동체의 만남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을 촉진하고 형성시키는 교회를 가리켜 우리는 &lsquo;선교적 교회&rsquo;라고 말합니다. 선교에 헌신한 교회는 예배, 제자 훈련, 공동체가 살아 있습니다. 교회가 &lsquo;선교의 촉매&rsquo;라는 것은 세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와 선교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독생자와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둘째, 교회의 선교는 세상에 복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존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험하는 공동체입니다. 생존이 교회의 최고 목표가 되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이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계속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8 변화에 잘 대응하는 선교 / 넬슨 제닝스 박사(GMLF 이사장) 그동안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새로운 상황과 도전, 변화에 잘 적응해서 선교를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이 그를 이집트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이집트 사람처럼 변해갔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가 이집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바로의 왕가에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위대한 아내를 맞이했고, 위대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신약의 베드로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성령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변화를 경험하며 적응했고, 그 속에서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우리도 변화 속에서 씨름하며 기도하고, 적응하며 성장하고, 배웁니다. 온누리교회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지속해 왔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온누리교회는 그 변화에 반응해서 이 땅에 온 중국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중국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1990년 중반부터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온누리교회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변화한 환경에서 함께 기도하고 적응하며 선교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야 할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lsquo;온누리교회가 대형교회로서 어떻게 반응하느냐&rsquo;입니다. 온누리교회는 대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아갔습니다. &lt;사도행전&gt;의 역사를 계속 써가자는 &lsquo;Acts29 비전&rsquo;은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lsquo;온누리교회만이 &lt;사도행전&gt;을 이어간다&rsquo;는 외부의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lsquo;교만과 안주함&rsquo;의 도전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경제는 안정적이고,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이 자만과 안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계속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유지한 채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lsquo;다양한 민족의 교회와의 동역&rsquo;입니다. 다양한 민족의 교회와 함께 사역하는 것은 도전입니다. 가나, 일본, 인도네시아 교회가 한국과 비교해서 연약해 보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동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화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배우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배우고 성장하십시오. 주제강의3 글로벌 선교 협력 / 유병국 선교사(WEC) 지금 우리 눈앞에 마지막 남은 선교지들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어떤 곳보다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복음에 저항하고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꾼과 전략적인 연합이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서구 교회가 심각한 선교사 인력 감소를 겪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선교단체 WEC의 통계를 보면, 서구 선교사 수가 불과 10여 년 만에 70%가량 줄었고,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도 50%가량 감소했습니다. 특히 한국에 장로교를 처음 전한 선교사들을 배출했던 &lsquo;미국 북장로교 선교회&rsquo;마저 올해 3월 말 문을 닫았습니다. 남아 있던 선교사 57명 중에서 54명이 사역을 지속할 수 없게 된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한국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2010년 3만 명에 가까웠던 한국 선교사가 현재 2만 1천여 명으로 8천 명가량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히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만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들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베트남은 공산국가이지만 3천여 개 교회가 있고, 200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전체 국민 70%, 케냐는 1,800만 명이 개신교인입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에도 2,500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에 하나님이 세워 놓은 일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WEC가 이 지역에서 선발한 선교사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고 헌신적이며, 이미 다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현지에 바로 적용되는 효율적인 인력입니다. 그런데 현지 교회의 경제적 여건상 월 200불에서 400불 정도의 적은 선교비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많지만 경제력이 부족한 곳이 있는 반면, 한국이나 서구 교회는 경제력은 있지만, 보낼 일꾼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생산 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lsquo;글로벌 경영&rsquo;을 하듯이, 선교 역시 &lsquo;글로벌 선교 협력&rsquo;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WEC와 같은 선교단체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선교사를 선발하고 훈련해서 파송하고, 한국이나 서구 교회가 이들에게 부족한 선교비를 지원한다면 어떨까요? 국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글로벌 선교 협력입니다. 어떤 나라의 일꾼이든 힘을 모아 마지막 남은 선교지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저녁집회 3 선교사역 완성(Finishing the task) &lt;마태복음&gt; 24장 14절 / 이재환 선교사(컴미션) 저는 하용조 목사님과의 만남을 평생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비전, 사랑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lsquo;2천1만 비전&rsquo;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비전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 현장에 계신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을 보면 감개무량합니다. 제가 영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lsquo;Finished Task&rsquo;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교라는 과업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선교를 빨리 끝내라니,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서양 사람들이 선교에 대한 굉장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는 끝내야 하는 사역입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끝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끝내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끝내야 할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ldquo;&hellip;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rdquo;(마 28:1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교회는 이 사명을 반대하거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 사명을 이루는 데 게을러서도 안 되고, 그만두어서도 안 됩니다.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명령이요,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과 교회가 현실의 기준을 잣대로 &lsquo;선교를 할 수 있다, 없다&rsquo;를 판단합니다. 현실은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보내는 능력을 주시든지, 가는 용기를 주시든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ldquo;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rdquo;(마 24:14). 여러분,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이유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죽어서 가는 천국입니까? 아니면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올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저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lsquo;킹덤 빌더&rsquo;라고 믿습니다. 온누리교회가 한 번 더 하용조 목사님이 가르치신 선교의 비전과 열정을 가지고 선교의 자리로 나아간다면, 저는 21세기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믿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게 하는 일에 우리가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2025-10-25  제1561호

  •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10월 22일(수) &#39;교회, 문화로 퍼져가다!&#39; 주제강의 4 교회, 문화의 변혁자 /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목표 철학 다섯 번째는 &lsquo;그리스도의 문화를 심는 교회&rsquo;입니다. 故 하용조 목사님이왜 이 항목을 넣으셨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온 세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하고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보면, 교리적인 문제를 더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의 중심,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문화적인 요소입니다. 문화는 어떤 시대의 예술적인 영역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지난 세기 서구 문화의 중심에는 분명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사회에는 문화는 남았지만, 복음의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한때 교회가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교회가 창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문화에 순응하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문화의 관계는 기독교 역사 내내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주의자와 율법주의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실 복음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형성된 문화를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니버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lsquo;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Christ against Culture)입니다. 이는 세속 문화는 악한 것이므로 교회는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관습, 제도 모든 것을 거부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 삶만 강조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일치(Christ of Culture)입니다. 모든 문화에는 복음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영지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위의 문화(Christ above Culture)입니다. 그리스도의 문화는 세상 문화보다 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입장이 이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입니다. 양쪽이 긴장 관계에 있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충돌된다는 마틴 루터의 입장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입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문화 영역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lsquo;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문화 변혁자&rsquo;로 창조하셨습니다. &lsquo;번성해 가득함으로 다스리라&rsquo;는 통치를 통해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8).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초대 교회는 세상 문화를 먼저 바꾸겠다고 하지 않고, 공동체 자체가 세상 문화와 다르게 변화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의 동반자, 추종자가 아니라 선구자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회가 문화의 변혁자가 되려면 기관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어야 합니다. 급진적 사회 변화를 변혁의 기회로 봐야 합니다. AI를 중심으로 기술 혁명이 일어나는 지금이 문화 변혁의 기회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더하는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변화시켜 가기를,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5 AI시대와 교회 /김경훈 집사 글쓰기, 고객 상담, 코딩 자료 분석, 이미지 생성과 편집, 광고, 자율주행 등 AI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우리를 돕거나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 &lsquo;속도의 유혹&rsquo;입니다. AI는 클릭 한 번이면 많은 것을 해줍니다. 그런데 그 속도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랑과 절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AI에 맡기고, 어떤 것을 직접 할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행사 이름을 정하거나, 포스터 제작 등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한 기도문, 설교문, 간증문을 성령님 없이 AI만 가지고 작성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의 말처럼 될 수 있습니다. &lt;고린도전서&gt; 13장 1~3절 말씀처럼,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아 사역에 AI를 사용한다면 성령님이 선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둘째, &lsquo;신뢰의 기준&rsquo;입니다. AI의 답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데이터의 산물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적이지 않은 자료가 많기에 AI가 이것들을 학습한다면 잘못된 답을 낼 위험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적인 콘텐츠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AI시대일수록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성경 통독, 성경공부모임 등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삶 속에 깊이 심고, 말씀을 기준으로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lsquo;관계의 경제성&rsquo;입니다. AI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사람보다 AI와 관계 맺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과 감정의 비용이 들지만, AI는 내가 원할 때만 만나고 언제든 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연인, 멘토, 상담사, 심지어 목회자 역할까지 AI에게 기대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공동체성과 가정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 안에서 자라도록 지으셨습니다. 교회는 함께 먹고 마시며, 얼굴을 마주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지속해야 합니다. AI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선교의 접점도 줄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AI가 줄 수 없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인내와 회개, 교제를 어떻게 선교에 접목할지 고민해야 하고, 전도의 접점을 확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넷째, &lsquo;죄의 확장&rsquo;입니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교만도 함께 확대합니다. 하나님은 &ldquo;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7). 우리는 기술이 성공하면 교만해지고, 실패하면 불안해집니다. 창조주를 떠났던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중 하나인 AI조차 두려워합니다. 결국, AI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인간의 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I시대 교회는 죄의 현실을 더욱 직시하고, 세상에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기술 속에서도 모든 죄에서 우리를 끊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님과 함께 AI를 성경적으로 활용하고, AI로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를 기도합니다. 주제강의 6 폭력, 고통, 두려움의 세계 문화 속의 선교 / 크리스토퍼 라이트 박사(Christopher Wright) 선지자 하박국은 역사적으로 끔찍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시대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의와 거짓, 폭력과 전쟁이 난무했습니다. &lt;하박국&gt;을 통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섯 가지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lsquo;하나님의 일하심을 찾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보는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께 &ldquo;제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합니까?&rdquo;(합 1:2~4)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ldquo;다른 나라들을 잘 살펴보아라. 나는 네가 싫어하거나 믿지 못할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rdquo;(합 1: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일으켜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주권을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lsquo;믿음으로 사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ldquo;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dquo;(합 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구원의 믿음을 넘어 순종과 신뢰로 성장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며,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이 세계의 난무하는 폭력의 문화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lsquo;탄식과 저항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악에 저항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고 탄식하며 항의했습니다. 우리 역시 불의, 거짓, 고통을 영속시키는 자들을 대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강력한 탄식의 목소리가 필요함을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땅의 우상숭배, 피조세계의 파괴, 불의와 죄악, 고난에 대한 거룩한 항의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lsquo;하나님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 사명 이야기 속에서 소망을 얻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깊이 알 때 세상의 거짓된 대안들을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lsquo;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rsquo;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절망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ldquo;주 여호와는 내 힘이십니다&rdquo;(합 3:19)라고 고백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 행동하며 달려나갔습니다. 그의 사명은 우상숭배와 불의를 폭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분별력, 믿음, 기도, 그리고 말씀과 행위 속에서 전인적인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섭고, 폭력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세상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의 사명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저녁집회 2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lt;창세기&gt; 49장 22절 / 이동원 원로목사(지구촌교회) 하용조 목사님을 떠올릴 때마다 &lt;창세기&gt; 49장 22절, 요셉과 그 자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과 온누리교회의 역사는 이 말씀과 닮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온누리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며, 한국 교회의 공동 숙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요셉을 &lsquo;풍성한 열매 맺는 가지&rsquo;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일생은 형제들의 따돌림, 노예 생활, 억울한 감옥 생활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의 인생이 열매 맺는 일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 역시 질병과 싸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온누리교회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수많은 영적 자손을 거느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넘어 일본, 대만,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 미국에까지 그 축복의 열매를 나누며 영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요셉의 가지가 &lsquo;담을 넘었다&rsquo;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이 담을 넘는 수단이 &lsquo;문화&rsquo;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교회의 담을 넘어 다른 곳까지 심어지려면 문화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문화 속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분별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선한 문화의 변혁자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책임을 감당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그냥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lsquo;샘 곁의 무성한 가지&rsquo;였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이웃들에게 복이 되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 감옥, 애굽까지 모두 &lsquo;요셉 때문에&rsquo; 복을 누렸습니다. 요셉이 복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lsquo;영성&rsquo;입니다. 바로가 요셉에 대해 말했듯이, 그는 &lsquo;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rsquo;이었습니다. 요셉의 내면에 존재하던 맑은 영성의 샘에서 애굽 땅을 적시는 은혜를 퍼 올렸습니다. 요셉이 은혜를 따라 살면서 남긴 중요한 흔적은 &lsquo;인격적 열매&rsquo;입니다. 요셉이야말로 &lt;갈라디아서&gt;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삶에서 맺었던 사람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아홉 가지 측면을 가진 단일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향한 사랑, 역경 속의 기쁨, 구덩이와 감옥 속에서 오래 참음, 형제들을 용서한 자비, 변함없는 충성 등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인생을 통해 맺고 있었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고급진 문화를 만들어 내기를 축복합니다.

     2025-10-25  제1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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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1일(화) ‘교회, 복음으로 서다!’ 10월 21일(화) &lsquo;교회, 복음으로 서다!&rsquo; 주제강의 1 교회, 복음 중심의 공동체 / 이재훈 위임목사 &lt;로마서&gt; 1장 1~4절 말씀은 복음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정의입니다. 복음의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육신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사실 없이는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들의 죄,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문을 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창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됩니다. 복음 중심의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로 펼쳐진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영역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복음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우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택함 받은, 복음이 맡겨진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lsquo;복음 중심 공동체&rsquo;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적 기초와 신학적 비전, 사역의 형태를 모두 교정하고 형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중심의 공동체가 되려는 것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교회는 종교화되고, 나의 노력에 근거하며, 두려움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나 복음 중심의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섬깁니다. 복음 중심 교회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둘째,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lsquo;종교적 다원주의&rsquo;와 &lsquo;문화적 다원주의&rsquo;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종교적 다원주의를 조심하고, 경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에 이르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보다 의심을 선호하게 하고, 과학을 우상처럼 따르게 합니다. 셋째, 공로주의입니다. 공로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로를 생각하는 순간 나중 된 자가 되며, 복음 중심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제강의 2 세상이 왜 이런가요? / 이인용 장로 작년 독일의 &lsquo;성별 자기 결정법&rsquo; 발효, 우리나라 대법원의 &lsquo;동성 동반자 건강보험 피부양자등록&rsquo; 판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lsquo;950달러 이하 절도 경범죄 규정 완화&rsquo; 등의 결정은 &lsquo;인권 옹호&rsquo;, &lsquo;차별 금지&rsquo;, &lsquo;평등 원칙&rsquo;, &lsquo;약자 보호&rsquo;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말들로 이상한 법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사상가들은 진리와 선을 물었으나 인간의 삶은 불평등과 차별이 공공연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기초해서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공산사회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불과 70여 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제도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유산은 오늘날 인본주의, 인권 담론, 젠더 혁명을 포함한 정체성 정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의 배경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인 &lsquo;불평등&rsquo;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사상가들은 사회적&amp;#8231;문화적 불평등, 성에 따른 불평등도 주목하며 &lsquo;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와 제도의 억압과 차별의 구조가 숨어 있다&rsquo;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를 성별, 인종, 지역, 환경,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부딪히는 현장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란 계급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의 인정과 충돌을 조율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lsquo;포스트 막시즘&rsquo; 즉, 현재의 &lsquo;정체성 정치&rsquo;가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러 기준이 있고, 이 기준은 안과 밖을 가르며, 기준 안에서 기준의 밖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억압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논리에 따라 &lsquo;기준이 문제이고, 이 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rsquo;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준을 세우는 토대는 &lsquo;진리&rsquo;입니다. 선, 도덕, 윤리 등의 기준들은 진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lsquo;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rsquo;는 전제는 기준의 토대가 되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멀리하는 것은 이 진리를 갖고 있으면 기준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lsquo;진리의 상대성&rsquo;이며, 지금 우리가 사는 탈진실의 시대입니다. 탈진실의 시대에는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판단이 기준입니다. 요즘 대학이나 기업 등에서 사용하는 &lsquo;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rsquo;와 같은 기조 역시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의 &lsquo;절대 진리&rsquo;를 부인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절대 진리이시고, 절대 선입니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 감정, 영원을 희구하는 마음,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어주셨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인간이 인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lsquo;다양성&rsquo;이라 말하며, 그것을 포용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면 그것을 혐오 발언이라고 처벌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은 &rdquo;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rdquo;(요한 14:5)이시며, &ldquo;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rdquo;(요한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적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제강의 3 세계관과 복음 / 류현모 교수 세계관이란 &lsquo;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신념의 포괄적인 틀&rsquo;을 말합니다. 세계관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영양분을 흡수해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 세계관은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 믿음과 가치관이 생기고, 그 가치관에 근거해서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행동은 일정한 패턴이 생기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인격을 형성합니다. 결국, 인격의 근저에는 &lsquo;우리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냐&rsquo;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지고 살아온 세계관에 대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입견이 되기 쉽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세계관은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뉘며, 기독교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 신앙은 성경 내용에 기반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바탕은 성경 지식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아주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와 등장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는 &lsquo;창조-타락-구속-완성&rsquo;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죄와는 타협하지 않으시기에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한 민족을 선택해서 제사장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lsquo;완성&rsquo;은 구원받은 나는 어디로 가냐는 것입니다. 죄의 사슬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가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lsquo;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 효과&rsquo;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메타 내러티브로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들을 여기에 적용해야 합니다. &ldquo;진리가 무엇이냐?&rdquo;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ldquo;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rdquo;(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법칙을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상황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선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준 삼아야 합니다. 세계관 공부는 &lsquo;세상의 공격을 성경 속에서 어떤 답을 찾아서 대응할 것인가&rsquo;입니다. 영적 전쟁의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대응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고대에는 인간이 피고석에 와 있고,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심판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피고석에 서 있고, 인간이 재판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피고석에 계신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저녁집회 1 온전한 복음 &lt;에베소서&gt; 2장 8~10절 / 홍정길 원로목사(남서울은혜교회) 온누리교회의 특징은 &lsquo;온전한 복음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가장 노력하는 교회 중 하나&rsquo;입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본문을 정했습니다. &ldquo;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rdquo;(엡 2:8). 우리는 하나님께 &lsquo;믿음으로 얻는 구원&rsquo;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lsquo;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이 땅에 오셔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rsquo;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대로 믿으면 내 죄는 옮겨지고,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믿음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저는 서서평 선교사와 관련된 신앙의 배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외할머니가 서서평 선교사의 제자였고, 어머니는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일학교 출신입니다. 어릴 적 거룩한 성경 인물 같은 믿음의 어른들을 많이 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고, 그 참혹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끔찍한 현장을 보면서 &lsquo;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이렇지 않을 것&rsquo;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닫았습니다. 대학은 예수 안 믿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철학과를 택했고, 예수 믿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친구 꼬임에 넘어가 수양관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기도하는 청년들의 얼굴에 주님이 주신 평화가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ldquo;지금 이곳에 주님이 계시면 제가 예수님 믿게 해주십시오&rdquo;라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제가 울면서 어릴 때부터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마음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빛이 따뜻하게 저를 안아주시며 &ldquo;정길아, 너 내게 너무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rdquo;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음성에 엎드렸고,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외롭거나 힘들 때, 기쁠 때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그 자리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신 그 놀라운 은혜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살 인생에 대해 주께서 &ldquo;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았다&rdquo;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 믿게 한 것은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온전한 복음은 &lsquo;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rsquo;는 귀한 축복을 놓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늘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고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온누리교회는 선한 일을 알면 참지 못하는 교회이고, 열심히 선한 일을 끝까지 좇아가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명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귀한 온전한 복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로서 온전한 복음으로 살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2025-10-25  제1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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