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러브소나타]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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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소나타]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2024-05-18      제14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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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  
 
“교회를 지켜주소서. 일본을 구원해 주소서. 세계에 평화를 허락하소서.”
이 기도는 평생을 전도자로 살았던 어느 남자의 유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이자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이웃사랑을 실천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에서 1888년 7월 10일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아버지와 게이샤(술자리 흥을 돋우는 직업을 가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부유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이듬해 1월 죽었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된 가가와 도요히코는 아버지의 본부인(미치)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양모의 학대와 의붓형제들과 친구들의 놀림, 온갖 천대를 받으며 지냈다. 외로웠던 소년 가가와 도요히코는 혼자 숲과 들판, 창고 등에 숨어 종일 책을 읽곤 했다. 그때의 경험이 외로움과 상실, 혐오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공감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중학생 시절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가타야마학교에서 만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찰스 로건 선교사에게 예수의 생애를 배웠고, 마이어스 선교사 부부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자라면서 받은 사랑이라곤 부모 생전 짧게 받은 게 전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외국인 선교사들은 제2의 부모 같은 존재였다. 선교사들에게 신앙과 지식, 가정과 가족의 의미, 감정의 교감, 이웃사랑 등을 깊이 배운 그가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학비를 대주던 숙부에게 도쿄제국대학 입학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도쿄의 장로교계 대학 메이지가쿠인대학 고등부 신학예과에 입학했다.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했다. 신학, 문학, 철학, 자연과학, 역사, 농학, 예술 등 여러 분야 책을 빠짐없이 읽었다. 그를 가르친 라이샤워 박사는 “메이지가쿠인대학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신학예과를 졸업한 가가와 도요히코가 1907년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고베신학교(후의 고베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고베에서 사역하면서 목회자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치현 오카자키교회와 도요하시일본기독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며 전도자로서 성장했다. 그때부터 대중집회와 거리 전도에 시간을 쏟으며 전도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학교 2학년 때 결핵에 걸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어느 날 깊은 산골에서 가네자와교회 나가오 목사를 만났다. 그 만남이 가가와 도요히코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는 가가와 도요히코를 나가오 목사가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나가오 목사의 자비로운 성품을 보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는 빈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고아, 학대, 천대받았던 경험, 중학교와 메이지가쿠인대학에서의 영적, 지적, 사회적 각성 그리고 고베신학교 시절 전도자 경험과 사선(死線)을 넘나들게 만든 병고가 그를 모든 경험이 뛰어난 전도자이자 헌신자로 만들어 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1909년 병고로 인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베의 빈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를 얻어 방화범, 도박중독자, 알코올중독자, 매독에 걸린 거지 등과 함께 살았다. 굴뚝 청소하면서 번 푼돈을 빈민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눠주고, 자신의 옷도 벗어줬다. 불량배들의 싸움을 중재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를 주었다. 자신의 집에 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국어와 산수를 가르쳤고, 초상집에서는 시신을 씻고 장례를 집전했다. 주일에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가가와 도요히코가 1914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유학했다. 미국의 슬럼가와 노동 운동에서 시사를 얻어 1917년 귀국한 그는 고베 빈민가로 다시 돌아가 전도와 노동 운동을 펼친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노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농민 협동조합, 보통 선거권 운동 등 사회운동을 펼치며 일본의 사회 회복과 변화를 주도했다. 그는 <사선을 넘어>, <새벽이 오기 전에>, <한 알의 밀>, <빈민 심리 연구>, <우애의 경제학> 등 수많은 저서도 남겼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10억 엔의 인세 소득을 사회운동을 위해 모두 기부하기도 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문학가, 학자, 저술가, 빈민운동가,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로서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일평생 자신이 전도자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는 1960년 별세할 때까지 빈민촌에서 헌신적으로 전도하며 이웃들을 돌봤다. 일본의 변화와 회복을 꿈꾸며 빈민촌에서 평생을 바쳤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들은 기생들이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만큼 그를 통해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분명 평생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었다. 

가가와 기념관(Kagawa Memorial Center)
주소: 5 Chome-2 20 Azumadori, Chuo Ward, Kobe, Hyogo 651-0076
홈페이지: core100.net

특파원 보고, 효고의 기독교
 
고베개혁신학교
 
평소 일본에 대한 내 생각은 긍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생각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역사적 사건들 뿐만아니라 현재에도 일부에서의 차별적 시선과 이념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러브소나타 효고에 참석하게 되었다. 권사님들과 함께 러브소나타와 일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가 지속되며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채워주셨다. 그 사랑의 마음을 안고 효고에 왔다.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가 방문한 곳은 ‘고베개혁신학교’였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교정이 우리를 반겼다. 고베개혁신학교는 1947년 4월 일본 기독개혁파교회에 의해 개교했다. 요시다 타카시 교장 외 4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고, 강사 16명이 강의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강사보다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11명이 전부였고 올해는 신입생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 기독교인이 너무 적다 보니 신학교에도 학생이 많이 없다. 어느 권사님은 “크고 멋진 고베개혁신학교의 건물과 대비되는 작은 인원이지만, 그만큼 신학교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절실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빙고온누리교회 권사회에서 선물과 찬양 특순 등을 준비했다. 선물은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와 물품들로 꾸러미를 만들었다. 찬양은 ‘GOD Bless You’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준비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받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감사가 밀려왔다. 특순 시간이 감동이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일본어로 부르고, ‘GOD Bless You’를 한국어로 부르는데, 고베개혁신학교 학생들이 같은 찬양을 화답가로 준비해 왔다. 화답가를 한국어로 준비해 와서 마지막 찬양은 서로를 축복하며 합창했다. 
고베개혁신학교의 비전은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교사, 사상과 품행이 방정해서 모든 것에 강하게 맞설 수 있는 부끄러울 것 없는 목자, 박해와 유혹, 빈곤에 굴하지 않고 겸허히 기도로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 학교의 비전처럼 많은 젊은이가 교사와 목자, 전도자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고베개혁신학교를 통해서 일본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다음세대가 더 많이 양성되기를 소망한다.
/ 김지희 권사(서빙고 권사회장)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
 
나는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비즈니스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일본은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러브소나타 참석을 위해 방문한 일본은 조금 특별했다. 사업적 시선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측면에서 일본을 바라보고 싶었다. 
함께 러브소나타에 참석한 영종온누리교회 성도들과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방문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는 1950년 2월 16일 ‘히가시나다신아이기독교회’로 개척했다. 당시 미국에서 온 한 선교사님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세워져서 선교센터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은 청각장애인들을 섬기는 사역도 하고 있다.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교회가 무척 깨끗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크리스천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일본인들의 영혼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감동이 있었다. 한 성도님이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하고 불편할 텐데 열심히 수어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일본은 종교가 많고, 다양한 신을 섬기는 나라다.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만, 영적으로 갈급하고 메말라 있다. 이 나라에서 전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미카게신아이그리스도교회를 포함한 일본 교회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공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러브소나타가 일본 교회에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갈급함을 느끼는 한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 김화동 성도(영종온누리교회)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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