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참된 회개(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주일강단

주일강단-참된 회개(2) 자기 십자가를 지라 

 2019-09-08      제12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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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개(2)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마 16:24~25 
이재훈 목사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노력으로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중보자로서 하시는 일은 죄인 된 인간들에게 회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구원의 중보자로 일하고 계시고, 이 땅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회개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죄인 된 인간 안에 참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우리 안에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고, 십자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놀랍게도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제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참된 회개를 경험한 사람이요, 참된 회개의 사람은 참된 믿음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다’”(24~25절).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고, 의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 참된 회개를 통해 거룩한 성화의 구원을 이뤄가는 성도들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참된 회개란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네 자신을 수용하고 충족시키라”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네 자신을 개발시켜라”고 말합니다. 쾌락주의는 “네 자신을 즐기라”, 금욕주의는 “네 자신을 억제하라”, 인본주의는 “네 자신을 신뢰하라. 네 자신 안에 무엇이 있든지 자신을 자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자아를 더 세련되게 혹은 더 멋지게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인간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같은 문장에 나옵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뒤의 단어가 앞 단어를 설명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십자가를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시어머니를 자신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시댁 식구들, 속 썩이는 남편이나 자녀, 하기 힘든 일, 원치 않는 의무, 나를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짐을 자신의 십자가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원치 않는 짐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자아를 죽이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악의 뿌리, 하나님에 대한 반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억울함과 고통, 시련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아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란 자기 부인이요,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 자아를 죽이라고 할까요? 인간이 빠져있는 곤경과 위기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의 위기는 스스로 주인 행세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모든 죄의 뿌리에는 악이 있고, 악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고, 교만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격적인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의 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자아의 순종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것이 악의 뿌리요, 그 악으로부터 수많은 죄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아기를 보면 얼마나 순진하고 사랑스럽습니까? 그런데 키워보면 그런데 이 아이가 엄청난 반역자라는 것을 부모가 먼저 압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기저귀를 뗄 때까지 몇 번 정도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지 계산해 본 적이 있습니다. 평균 12,000번을 갈아야 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무릎을 꿇고 기저귀를 갈아줘도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반역의 기질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타락한 인간은 교육을 잘 시키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항복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철이 든다’고 하는 것은 꺾이는 것입니다. 자아가 꺾이고, 항복하는 경험을 한 사람을 우리는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전적으로 항복하는 경험을 회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로 익숙해진 자기만족, 자기 의, 자기 의지, 자아에 만족되어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왔던 반역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되돌아갈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자아의 죽음이요, 자기 부인입니다. 
 
 
신앙의 중심 ‘십자가’
 
 
그런데 문제는 항복할 것이 많고, 항복해야만 하는 악한 인간 안에 항복하지 못하게 하는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악할수록 더 회개해야 하는데, 악한 사람일수록 회개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가져다주는 악함이 우리를 회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약해서가 아닙니다. 악해서입니다. 왜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회개할까봐. 회개하면 자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아왔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니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은혜 받는 자리에 안 갑니까? 하나님께서 진짜 임하실까봐. 우리의 악함은 교묘합니다. 은혜 받는 자리,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자리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악함이 우리의 회개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C.S.루이스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부를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결정과 판단 능력을 우리에게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육체적 성질도 하나님의 이미지 안에 있는 것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도 하나님이 관계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참된 회개, 자아의 죽음인데 하나님께서 죽음을 넣어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본질과 다른 것은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기에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 되신 하나님이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된 회개를 통해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적인 설명으로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어떻게 참된 회개를 일으키는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회개를 경험할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는 순간 놀랍게도 우리 삶은 참된 회개를 잃어버립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늘 우리가 바라봐야 할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옛 사람의 죽음과 자아의 죽음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일어나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 죽음은 죄에 대한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을 모든 인간의 옛 사람의 죽음으로 인정하고 간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믿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쏟아 부으심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심판받은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심으로 인류를 다시 살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A.B.심슨 목사님은 성령님을 가리켜 “우리를 그리스도의 무덤에 함께 장사지내는 위대한 장의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데리고 갑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우리들이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옛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이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죄와 율법, 옛 사람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옛 사람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선언,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 날마다 삶 속에서 참된 회개를 이뤄갈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번째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옛 사람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고, 동시적인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순차적인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에 참여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을 우리가 경험할 때 자아가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의 자아는 여전히 복음에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죽음까지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강제로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선택해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다”(25절).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심으로 육신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 태어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베들레헴에서 나약한 육신의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두 번째는 무덤에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따라가지 않으면 그 생명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
 
 
예수님께도 자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아를 온전히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끊임없이 십자가 지기를 거부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우리가 사랑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달갑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큐티할 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시작했는데 퇴근하고 집에 오면 십자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디선가 십자가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의 죽음을 요구할 때 나는 죽을 수 없다며 십자가를 내던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있는데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십자가를 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 십자가에는 못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바퀴 달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 십자가의 못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삶에서 우리를 못처럼 찌르는 모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순종하는 것이 못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못입니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못입니다. 자기가 볼 때는 옳아 보여도 모두를 위해 자기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찌르는 못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려고 할 때 아픕니다. 내 자아가 부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거부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새로운 자아와 순종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어드릴 때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회개를 평생 경험합니다. 한 번 회개하고 예수님 믿을 때 회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초신자들이 배워야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전 생애에 걸쳐서 참된 회개를 이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옛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삶이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에서 순종하는 자로, 참된 회개를 이루어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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