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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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2019-12-22      제12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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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살전 5:16~24

/이재훈 목사

 

사람들은 미래 예측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점성술을 의지하면서까지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합니다.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정확한 미래에 대한 교과서는 성경뿐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루어졌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이끄셨고, 이끌고 계시며, 어떻게 마무리 하실 지를 분명히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역사에 끝이 있을 것이고, 그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가 마지막이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제자들이 재림의 때가 언제일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이니 나 자신도 모르며 너희의 알 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알려주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도 홍수 심판의 때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노아의 위대한 점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언제 홍수가 시작될지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예비하는 순종을 한 것입니다. 만약 홍수가 언제 시작될지 알려주었다면 사람들이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가는 그날까지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악한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올 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 전에는 대충하다가 주인이 오기 전에 잘 준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오느냐보다 맡겨진 소명에 충실한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상관없는 것이 충성된 청지기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역사의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코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거룩’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다 흠이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23절).
어떤 모임에서 요구하는 복장이 있습니다. 그 복장을 지켜 주는 것이 그 모임에 대한 예의입니다. 또한 어떤 기관과 단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규율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규율을 잘 지켜야 구성원으로써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대비하는 교회, 주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의 코드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삶의 규율’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이 거룩한 규율의 공통점은 상황이 변할 수 없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악하더라도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있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흠이 없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거룩한 삶의 코드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코드 ‘내면의 거룩’

 

첫 번째 코드는 내면의 거룩입니다. 우리 내면에 항상 변치 않고 있어야 할 거룩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16~18절).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상태입니다. 내 마음속에 기쁨이 있는지, 기도가 있는지, 감사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만일 내 마음속에 거룩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한다면 무엇을 선택하든지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나의 내면이 거룩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고, 기도가 있고, 감사가 있다면 그 선택은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해 보면 이 기쁨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향해 갖는 기쁨입니다. 유대 사회의 결혼식은 적어도 며칠 동안 예식을 합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신랑이 약속을 정하지 않고 갑자기 오는 이유는 기쁨을 배가시키려는 문화입니다. 그런데 기다렸던 신랑이 나타났는데 신부에게 전혀 기쁨이 없거나 우울한 표정, 어두운 표정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던 신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부가 기다렸던 신랑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또한 그 신랑도 그 신부를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는 우리를 향하여 임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기쁨의 만남이어야 하고, 그 만남의 기쁨이 우리 삶에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심지어 고난 속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이는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 여러분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 4:13).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기쁨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심할수록 기쁨은 더 증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해석해 보면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임재를 날마다 교제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만남의 기쁨을 앞당겨서 성령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기도로 해석이 됩니다. 감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내면의 거룩에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나의 필요를 구하고 도움을 얻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출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응답을 받는 기적 체험의 믿음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일본 나가노 현에 사는 미즈노 겐조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뇌성마비로 전신이 마비되고 언어능력을 상실한 분입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이웃에 살던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이 약속되어 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믿음의 체험을 통해 예전에는 몰랐던 기쁨과 감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쓴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입니다. 

 

병으로 쓰러졌던 그 때에는
눈물이 흐르고 슬펐지만
영의 아픔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친구에게 외면당하던 그 때에는
밤에 잠들지 못할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 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실수했던 그 때에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모든 것을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바뀌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 내면에 거룩, 기쁨, 기도, 감사가 가득 차 있을 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의 거룩과 분별의 거룩

 

두 번째 코드는 ‘능력의 거룩’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19~20절).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정작 우리 스스로가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성령님의 통로가 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나의 판단, 지식, 경험, 고집, 불순종 등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캔달(R.T.Kendall) 목사님이 쓴 책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비둘기의 능력, 성령님의 임재의 능력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비둘기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캔달 목사님은 두 가지 비둘기를 비교하십니다. 하나는 공원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입니다. 이 비둘기를 ‘피전(pigeon)’이라고 하는데, 텃새가 강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해서 서로 먹으려고 하고, 여러 마리와 짝을 짓고, 지저분해도 잘 적응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비둘기는 좋은 비둘기가 아닙니다. 이와 다른 종류의 비둘기가 있는데 ‘도브(dove)’입니다. 도브 중에서 ‘터틀 도브’라는 비둘기가 있는데 오직 한 마리와 짝을 맺고, 매우 평화롭고, 먹이를 아무리 던져도 잘 오지 않습니다. 매우 평화롭고, 조금만 갈등이 있어도 떠나고, 매우 온유하고 부드럽습니다. 사람들이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그 온유하고 평화롭고 고요한 터틀 도브는 주변이 맞춰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떠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예민하십니다. 성령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고 인자하십니다. 어떤 원한이나 두려움이나 앙심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 마음이 분노, 원한, 두려움, 의심, 미움, 질투하면 성령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능력의 통로를 우리 스스로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열심, 고집, 경험, 지식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예민하신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능력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예언을 멸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예언적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말씀 그 자체가 예언의 능력이 있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의 능력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성령의 예민하고, 섬세하신 능력을 우리가 아직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능력, 경험, 목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능력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 코드는 분별의 거룩입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고 선한 것을 취하십시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피하십시오”(21~22절).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는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되 어떤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악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다면 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판단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이라는 것은 헬라어 ‘도키마조’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금과 은을 제련하는 용광로에 넣어서 진위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금보다 은이 더 귀했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전에는 은이 더 가치가 높았습니다. 솔로몬 이후에는 금과 은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나와”라고 하는데 은이 먼저 등장합니다. 은을 더 가치 있게 여긴 것은 금보다 제련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100% 순수한 은을 제련하는 게 훨씬 힘듭니다. 제련이 힘들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금과 은을 완전히 제련할 때 작은 찌꺼기도 남아있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 속에도 아주 작은 찌꺼기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흠이 없는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은이 잘 제련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 은을 녹인 물이 거울처럼 100% 투명해야 합니다. 시편 말씀처럼 우리 영혼을 은을 제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련이 언제 끝나는 것일까요? 우리 모습 속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거울처럼 나타날 때 비로소 제련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산업재해 사례분석을 통해 하나의 법칙을 주장했습니다. 어떤 큰 산업재해나 사망자가 나오는 재해가 발생했을 때 그 이면에는 29번의 같은 원인의 경상자가 있고, 그 29명의 이면에는 300명의 잠재적인 부상자들이 있다는 법칙입니다. 큰 사고는 우연히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건의 사고 이면에는 사소해 보이는 경미한 사고들이 29건 혹은 300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1:29:300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하인리히 법칙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에게 큰 사고가 생겼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수백 건의 사소해 보이는 악을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섬세하게 분별해서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함으로 우리 영혼을 계속 제련해가지 못했을 때 결국 큰 사고가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온전하게 거룩하게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작은 악이라도 틈타지 못하도록 만들어가는 분별의 거룩이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성도들 삶의 중요한 코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향해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분께서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합니다”(요일 2~3).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자신을 정결하게 합니다. 또 그 사람 안에 있는 소망은 그분을 만날 때 그분과 같이 변화될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분이 있습니다. 10대 시절 다이빙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수십 년을 고통 속에 살았는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망가진 몸이 그분과 같이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그를 다시 일으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불구가 된 이 몸 어딘가에는 앞으로 내가 변화될 모습을 담은 씨앗이 숨어있습니다. 근위축증으로 쓸모없어진 다리를 찬란하게 부활한 몸에 있을 다리와 비교해 보십시오. 현재 마비 상태는 비교할 수 없는 변화될 나를 얼마나 더 멋진 존재로 변화시켜 주실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도 거울 같은 것이 있다면 그 거울을 통해 보는 내 모습은 틀림없이 나의 것입니다. 훨씬 더 밝고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모습일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진 사람이 기쁨으로 감사하고, 능력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의 코드를 지키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거룩한 삶의 코드를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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