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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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소식

 2020-01-12      제12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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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소식

왕하 7:3~11
/ 이재훈 목사

 

우리가 듣는 뉴스는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듣고 전해야 하는 뉴스입니다.  누구나 의무로서 지켜야 하는 것을 알리는 뉴스입니다. 둘째, 듣고 전할 수밖에 없는 뉴스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진실이기 때문에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뛰어넘어 전할 수밖에 없는  뉴스입니다. 셋째, 듣고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뉴스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전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무거운 책임이 돌아오는 뉴스입니다. 예를 들어 건물에 화재가 난 것을 가장 먼저 알고도 건물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아서 생명을 잃는다면 무거운 책임이 돌아가는 뉴스입니다. 병사가 전쟁 중에 적이 쳐들어온 것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는 뉴스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전해야 하는 뉴스가 있고, 전할 수밖에 없는 뉴스가 있고,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수도 있는 뉴스가 있습니다. 복음은 전해야 하는 뉴스입니까? 전할 수밖에 없는 뉴스입니까? 아니면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뉴스입니까? 역사적으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전하지 않으면 무거운 책임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 4:20).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게는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사도 바울은 베드로와 요한보다 한 차원 깊은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는 다른 사도들에게서 나타나지 않는 복음의 깊고, 체계적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복음을 더 깊이 깨달았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남다른 복음의 계시와 비밀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더 깊이 깨달았다면, 복음의 은혜를 깊이 누렸다면, 복음을 깊이 알면 알수록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뛰어넘어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삶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만큼 복음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한다면 복음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알고, 복음의 은혜 가운데 거하고, 사도 바울처럼 삼층천을 보았고, 하늘의 계시를 보았고, 깊은 복음의 계시를 깨닫는 체험을 했다면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더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전해진 복음은 어떻게 증거되었습니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복음, 전하지 않으면 내게 무거운 책임이 돌아올 것 같이 여겨지는 복음이 전해졌을 때, 복음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과 확신으로 전해졌습니다. 

 

무한연쇄 하나님 나라 성장방식

 

“이는 우리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가운데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어떤 사람이 됐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살전 1:5).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라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확신은 물이 컵에 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복음이 들려졌을 때 확신으로 임하는 것은 물이 컵에 차고 넘치듯이 복음이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복음이 그들에게 충격으로 임했고, 복음을 모든 대륙에 전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시작돼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8절).
복음을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이 그들의 마음에 흘러넘쳐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들려진다’는 것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졌을 때 복음의 확성기가 되어서 온 유럽에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항복방송이 우리나라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이 우리나라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이 우리나라의 광복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입니다. 정부가 해설방송을 하지 않았어도,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8월 16일 아침 사람들이 급하게 만든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 ‘축해방’ 등 각양각색의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불과 하루 만에 그 기쁜 소식이 전달되고 또 전달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전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 같은 기쁨의 소식이었기 때문에 불과 하루 만에 거리로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은 어떤 소식입니까? 복음이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소식,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소식, 우리에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 되었다는 소식, 어떤 고난 속에 있더라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소식이 어떤 소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까? 전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머무는 소식입니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입니까? 아니면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은 소식입니까?
마케팅 방법 중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네트워크 마케팅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상품을 소비해 본 소비자가 그 상품의 우수성에 감동해서 자발적으로 그 상품의 소개자나 판매자로 전환되어 많은 사람에게 그 상품을 소개하면서 판매가 넓어지는 무한연쇄 소개판매방식입니다. 이를 복음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전해지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은 무한연쇄 하나님 나라의 성장방식이 전도와 선교 아닙니까? 마케팅의 원리를 이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기업 활동과 돈을 버는 원리 속에서도 올바른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좋으면 말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좋으면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으면 목숨을 걸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정보를 자신만 알고 누리고 있었다면 벌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은 나에게 어떤 소식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깨달은 감동이 나에게 어떤 소식인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은 나에게 어떤 소식인가’입니다. 전해야만 하는 소식입니까?, 전할 수밖에 없는 소식입니까?,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소식입니까? 나에게 복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새겨보는 주일이 바로 선교헌신주일입니다.
구약에서 복음이 가져오는 전파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사마리아성이 아람 군대에 의하여 죽음의 도시가 되어 있었던 때입니다.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서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습니다. 성은 고립되었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울 능력도 없고, 성안에서 버틸 능력도 없었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문 밖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성안에서 나오는 부수적인 음식이나 구제품으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기근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그들에게 무엇이 주어졌겠습니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성문 앞에 있던 나병환자 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무엇이든지 해보자. 성안에 들어간다 해도 기근이 심하니 죽을 것이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을 것이 뻔하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아람군대에 가서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주면 살 것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아람진영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모습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람군대 진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직전에 하나님께서 전차소리, 말발굽소리 등 거대한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착각했습니다. 거대한 지원군이 온 줄로 착각하고 목숨을 건지려고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아람군대 진영에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급하게 도망한 나머지 물건과 음식을 그대로 두고 갔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천막에 들어가 우선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값진 보화와 옷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나병환자들이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병 환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자코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날이 밝을 때까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바로 가서 왕궁에 이 소식을 알리자’”(9절).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놀라운 상황이 가져오는 기쁨과 좋은 소식을 자신들만 알고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의하여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모두에게 생명이 되고,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자신들만 알고 있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좋은 소식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과격해 보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새해 첫 주는 선교주일로 지키며, 나병환자들의 깨어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소식인지를 다시 깨닫기를 원합니다. 깨어남과 변화가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에 대한 경험과 반응 그리고 원리

 

나병환자들이 경험한 좋은 소식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복음에 대한 경험과 반응과 그 원리가 동일합니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사마리아성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죄에 갇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와 세상에 갇혀 죽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모두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죄와 세상에 갇혀 죽음 앞에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모습입니다.   
둘째,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죽음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셋째, 나병환자들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누리는 체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를 누리는 체험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깨달았을 때 기쁨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 기쁨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성취가 아닙니다. 나의 발견이 아닙니다. 나의 분별력이 아닙니다. 오직 값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셨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누리고 있는 기쁨입니다.
넷째, 나병환자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의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은 양심이 깨어앙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깨어나게 할 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은 정도로 여기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를 하지 않으면 벌하신다고 협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나에게 얼마나 크고 기쁜 소식인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나에게 너무나 좋은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전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사마리아성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이 누굽니까? 최초의 복음을 체험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왕도 아니요, 군대도 아니요, 힘 있는 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었던 연약한 나병환자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소식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쓰임 받는 사람들은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지만 용기 있게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첫 번째 증거하도록 선택을 받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사회적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에게 가장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은혜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누구나 복음의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부담감만 있다면, 복음이 주는 축복을 알면서도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의 깨어남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람진영에 군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도 소식을 전하지 않는 사람과 같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서 영혼을 구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할 뿐이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우리가 듣고 체험한 복음을 힘써 전하며,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뿐입니다.   
“시온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아, 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아, 두려워하지 말고 힘껏 외쳐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사 10:9).
온누리교회가 전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은 심정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두려워하지 않고 좋은 소식을 힘껏 외치는 선교사역이 힘 있게 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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