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 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2)

주일강단

주일 강단 - 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2)

 2021-11-27      제1371호

공유하기

주일강단
 
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2) 
 
갈라디아서 4:1~11
/ 이재훈 목사 
 
믿음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임하지 않으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죄의 세력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끊임없이 저지합니다. 타락의 본질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의 본질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믿음을 져버린 것이 불순종으로 나타나고, 불순종이 우리 삶을 타락으로 이끕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믿으려 해도 올바로 믿지 못합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어떤 능력과 축복이 나타나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방해하고 저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일과 동시에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파괴되고, 존재하지 않는 믿음을 일으켜주시는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주셔도 인간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각자에게 축복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믿음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인간 안에 믿음을 만들어 주시고, 믿음을 자라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음을 만들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택하신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이요, 또 다른 하나는 율법입니다. 약속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인지, 얼마나 신실하신지, 우리가 왜 그분을 믿어야 하는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대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믿고 의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태도, 교만, 악함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2000년 역사를 요약하면서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약속의 의미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의미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성취되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모세를 통해 준 율법보다 430년 전에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모세의 율법이 폐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유효합니다. 그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준 율법은 그 약속을 보완하고, 그 약속을 빛나게 하고, 그 약속이 약속되게 하고, 우리가 그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때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정확하게 역사하심으로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주신 시점과 그 약속들 이루어 가는 모든 때를 완벽하신 능력과 섭리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주신 시점과 율법이 마무리되는 정확한 때를 맞춰서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율법이 더이상 필요 없게 되는 때가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입니다. 이제는 믿음의 때가 왔고. 은혜의 때가 왔습니다. 율법의 일시적인 기능은 끝나는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모든 율법의 기능이 끝났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차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완전한 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시는 그때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의 때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완벽하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크게 세 가지로 그때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에 의해서 평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그 지역을 평정하기 전까지는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고, 내륙에서는 내전과 강도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법으로 통치하면서 치안이 잘되는 안전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이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행할 수 있는 도로를 곳곳에 깔았습니다. 왜 도로가 만들어졌을까요? 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겼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데 그 길이 필요했고, 평화와 안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다녔던 지역은 로마제국의 길로 연결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서 헬라어가 모든 로마제국에 통용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조차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이 나왔습니다. 헬라어를 아는 모든 사람이 구약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몰라도 구약의 모든 역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는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성경 지식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영적, 정신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갈망했고, 당시 로마제국 사람들에게 범신론이 팽배했기 때문에 마음이 허무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들도 급증했습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하며 소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찼다고 했습니다. 이제 구원의 때, 은혜의 때, 믿음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비유를 많이 들었습니다. 율법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시대에 있었던 여러 예화를 드는데 4장에서는 또 다른 예를 듭니다. 어린 상속자를 예로 듭니다. 큰 재산을 물려받게 된 어린 상속자가 있었는데 너무 어려서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상속자로서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행사할 수 없는 시기를 둔 것입니다. 후견인 혹은 재산관리인을 두어서 상속받은 자녀를 훈련하고, 감독하고,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실제 로마제국에서는 15세까지는 보호자의 아래에 두고, 25세까지는 후견인이 반드시 있어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후견인이나 재산관리인의 통제 아래 존재해야 했습니다. 어린 자녀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을 때의 위험과 재산을 귀하게 사용할 줄을 모르는 등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기간 어린 상속자는 겸손을 다지고, 합당한 상속자가 되는 훈련을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한 때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최종 단계가 아니라 중간 단계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통로로써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포로가 되고, 율법 아래 계속 있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율법을 주신 모든 때가 이루어지는 때에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4~5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아들을 ‘한 여자에게 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피조물 된 인간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에게서 난 그분이 사단의 머리를 부수고 승리하시는 사단을 이기고 악에서 승리하시는 승리자가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아담의 혈통과 다른 두 번째 아담입니다. 전혀 새로운 인간, 죄인이 아닌 의인입니다.  그분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이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율법 아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그에 대해 전혀 권리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인간에게는 율법의 효과가 있고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율법이 할 일이 없습니다. 흠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율법의 선생이 아니라 율법 아래 순종하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 목적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들을 구속하고, 하나님의 자녀 됨의 명분을 선물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무에 달린 사람마다 저주를 받았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갈 3:13).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저주를 받아 우리가 담당해야 할 모든 값을 치르기 위해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으신 분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피조 된 인간은 죄를 범해서 율법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아들이 모든 피조물 된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율법 아래 섰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되시고, 율법 아래 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5절).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자녀 됨의 신분을 허락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타락한 피조물을 구속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 되시고, 율법 아래 나셔서 십자가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들이면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상속자입니다”(6~7절). 
4절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6절에서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자녀의 명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 밖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 모두 자녀 됨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과 은혜를 이 땅에서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우리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확증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합니다“(롬 8:16).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증거입니다.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 확신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확신하는데 왜 연옥이 있고 면죄부를 삽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확증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확신에 대해서 도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했습니다. ‘아바 아버지’는 사실 유일하신 아들 예수님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이 부르짖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사단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죄로 인하여 실패하고 죄를 지을 때 “너는 죄인이야. 너는 소망이 없어. 너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 죄인이야”라면서 고소하고 “너는 멸망을 받아야 한다. 너는 절망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부르짖는 사단의 부르짖음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은 틀린 말로 우리를 공격하기보다 맞는 말로 공격합니다. 율법 앞에 맞는 말입니다. 사단은 율법을 가지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중간 단계로 우리 죄를 드러내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약속으로 향하게 하는데, 사단은 거기서 머무르게 하고 그것을 종착점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다시 들어가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것은 무력하고 천박한 것이라 비판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사단의 부르짖음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르짖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축복과 은혜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너희들이 엄청난 약속과 은혜가 주어졌는데 어찌하여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느냐? 어찌하여 자신의 행위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어찌하여 세상의 초보적인 것들로 돌아가려고 하느냐?”고 안타깝게 호소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 돌아온 탕자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보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더러운 옷을 벗기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며 환영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저는 아버지 아들로 여김이 합당치 않으니 저를 종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부정하는 불신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행하신 용서와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온전한 아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죄 밖에 없는 아들을 가장 좋은 아들처럼 여겨주셨는데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아시는 그 사랑에 확신이 없을 때 자꾸 우상을 만들고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들은 이제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랑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고, 자녀 되게 하시고,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아들의 영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더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을 누리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1,046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