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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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2021-12-04      제13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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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갈라디아서 4:12~20 
/ 이재훈 목사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는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종교”라고 이해합니다. 완전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을 못 박으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되어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 옛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게 될 때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임해서 새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절정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생명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해서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모방이 아니라 재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태어난 새 생명이 자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믿음 생활의 본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한 이유는 그들이 거짓 교훈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교훈이 아니라 모세의 형상, 율법이 이루어지는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템플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일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그러한 수준의 희곡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들어온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가운데 들어오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같은 작품을 동일하게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믿음 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해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데 필요한 어머니의 고통과 부모의 수고가 요구되듯이, 우리 안에 잉태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잉태되는데 누군가의 헌신, 수고, 고난이 필요합니다. 그 생명이 잉태되는데 반드시 해산의 수고가 필요하고, 그 생명이 자라나는데도 해산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생명을 낳는 고통뿐만이 아니라 그 생명이 자라는데 필요한 수고까지를 포함해서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 자녀들이여,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다시 여러분을 해산하는 고통을 겪습니다”(19절). 
복음은 언제나 해산의 고통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영혼이 복음을 듣는 성도들을 부모의 마음으로 중보기도하고, 때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강퍅함, 불순종을 인내와 사랑으로 품을 때 놀랍게도 복음이 그들 가운데 생명으로 역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는 언제나 반대가 있었고, 불신이 있었고, 때로는 대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과 함께 전해지는 생명의 역사는 끊임없이 새 생명을 낳았고, 그 생명이 자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만들었습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따뜻한 사랑의 언어로 호소했습니다. 19절에서 “내 자녀들이여”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 중에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으로 낳았다”는 표현은 나오지만, “자녀들이여”라는 표현은 처음 등장합니다. 12절에서는 “형제들이여”라는 단어를 씁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형제 혹은 자녀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품고 사랑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12절에서 15절까지 복음이 처음 갈라디아에 전해질 때 그들과 나누었던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회상시키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갈라디아에 복음이 전에 전해졌는지를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내가 처음에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육체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육체의 연약함이 여러분에게 시험거리가 될 만한 것이었는데도 여러분은 비웃거나 멸시하지 않았고 도리어 나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환영해 주었습니다”(13~14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여행할 때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병이었느냐가 아니라 이 질병이 매우 고통스러웠고, 이 질병이 때로는 시험거리가 되고, 멸시하고, 배척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의 연약함이 방해 거리가 아니라 통로가 되어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사도행전 역사를 보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표적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도 바울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질병을 고치기도 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도 바울의 질병은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 번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고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음으로써 그를 연약함 가운데 처하게 하고, 그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복음이 능력있게 전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더 온전하게 나타나는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이 갈라디아입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전하는 복음에 사람들이 더 귀 기울였습니다. 시험거리가 될만하고, 멸시하고, 무시할수도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저의 이 강함을 보십시오. 저의 강함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과 지극히 연약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여러분, 저의 약함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는 이 약함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합니다”라고 전하는 사람의 소식 중에서 어느 소식에 더 귀를 기울일까요? 사도 바울은 후자였습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는 질병을 안고 갈라디아에 머물렀을 때 그를 보는 많은 불신자들이 오히려 그를 환대하고 천사처럼, 예수님을 맞이하듯 사랑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삶 속에서도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신 것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일본에서 러브소나타, CGNTV, 두란노서원 사역에 열심을 내셨습니다. 걸어서 단에 오르기도 힘든 상태일 때도 있었습니다. 서서 설교하지 못하고 앉아서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대상은 불신자들입니다. 믿는 성도들이야 “목사님이 건강이 안 좋으신데도 설교하려고 하시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저렇게 건강이 안 좋으신데 왜 저러실까?”라고 무시하고 배척하고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많은 믿지 않는 분들이 왜 예수를 믿게 되었냐면 건강이 좋지 않은 연약함 가운데 있는 분이 목숨을 걸고 나와서 호소하는 메시지에 더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본 목사님들이 지금까지도 러브소나타 사역에 열심히 참여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목숨 걸고 일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역하던 하용조 목사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국의 성도들 이상으로 슬퍼하고 진심으로 추모하며 도시 곳곳에서 추도예배를 드리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일본인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신 것이 우리 때문인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다른 사람 같으면 건강을 돌보는 데 최우선순위를 두었을 텐데 연약함 가운데 사역하신 것에 대하여 빚진 마음이 있다.” 
빚진 마음을 가진 일본의 목회자들이 지금도 러브소나타 전도집회를 도시마다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능력을 보이시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통 가운데 있어서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것 같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역사는 연약함을 통해서 더 능력있게 나타났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온누리교회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많이 아파서 그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많이 아파서 꼭 해야 할 것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고통 속에서 건강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늘 준비하며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사셨기 때문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전적으로 마음을 기울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온누리교회 성장과 성숙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이 하용조 목사님 육체의 연약함을 사용하셨듯이 여러분 가운데 육체의 연약함이 있습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시험거리가 될 만한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성공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 바울을 통해 나타났고, 하용조 목사님을 통해 나타났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그런데 여러분의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만약할 수만 있었더라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15절). 
연약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바라보지 않고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해서 여러분의 원수가 됐습니까?”(16절). 
진실을 말하는 것이 때로 원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 아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원수가 될까 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압니다. “누군가 원수가 되고 싶은가? 진실을 말해 줘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원수가 됩니다. 사탄은 그것을 이용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진실을 말해 주는 사람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미워하게 만듭니다. 담을 쌓게 만듭니다. 사탄이 교묘하게 그것을 이용합니다. 진실이 우리를 얼마나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지 않고 상한 감정으로 받아들여서 거부하게 만들고, 관계를 깨뜨리고, 원수처럼 만듭니다. 스스로 복을 차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전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화목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실을 전할 때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고, 사탄은 그것을 이용해서 갈등으로 유발합니다. 미국에 한참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짓 영이 침투하고, 거짓된 교훈을 받아들이는 이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갈등이 교회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면 옳은 것이고, 나를 지지해주지 않으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보면 정말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따져서 몰아갑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 줘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엡 4:15).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방법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진실을 말하면 원수가 될까 봐 사랑으로만 끝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랑은 오염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연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의 마음 없이 정죄의 마음, 판단과 복수의 마음으로 진실을 말합니다. 진실은 진실이되 사랑이 없는 진실이기 때문에 역사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분쟁 일어나면 확연하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사랑파와 진리파입니다. 한쪽은 사랑으로 덮자고 하고, 한쪽은 진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자고 합니다. 양쪽 말을 들으면 다 맞습니다. 그러나 둘 다 틀린 것은 한쪽은 진리를 버렸고, 한쪽은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므로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사랑 가운데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함으로 원수가 된다는 것은 이간질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해산의 고통이 따른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을 이간하고자 함입니다. 이는 오직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17절). 
여러분, 열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 열심 속에 이기심이 있는지,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인지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것인지. 그 열심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형상을 심어주려고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자라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에는 해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죄를 끊는 고통이요, 모든 이에게 죄를 떠나도록 하는 고통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가 죄와 붙어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몰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그 고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고통이요,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고통이기에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죄를 떠나 거룩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서로를 세워줘야 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해 주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이루어지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사도 바울처럼 해산의 고통을 다 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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