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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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2024-04-20      제14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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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사도행전 7:54~8:3
/ 이재훈 위임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과연 나의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귀중한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우리 모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생명을 내걸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시대와 상황에 있었던 성도들 가운데 기쁘게 예수님을 믿는 삶을 선택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이 자연적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 시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어떤 고난과 핍박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순교의 도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수하지 못하고, 때로 허영과 위선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앙을 신앙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인도해 주고,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문을 열어 준 것은 순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았고, 동시에 교회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모습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의 모습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순교란 위대한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 에서 믿음의 선택을 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 앞에 담대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데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당한 이유는 예수님이 고소당한 이유와 동일합니다.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성전을 모독했다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등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정죄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역사를 관통하는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으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줄기가 구약 역사의 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당신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그 예수님을 죽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다윗에서 그친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분노하며 중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계속 들었다면 이어졌을 텐데 설교가 중지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과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이었기에 더는 그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음을 설교했습니다. <시편> 66편을 인용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율법을 성취하시며 오신 예수님을 당신들이 못 박아 죽였다”고 진실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진실을 왜곡했고, 거짓 선동을 일으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은 살기 위해 진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역사의 주인이시고, 중심이시며, 심판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여러분의 조상처럼 계속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는 당신들도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1~53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영적 상태를 담대하게 지적했고, 예수님을 죽인 죄를 드러냈습니다. 진실을 증거하는 일에 담대했던 예수님처럼, 모든 불법 재판과 심문 앞에서 담대하고 진실을 증거하셨던 예수님처럼, 스데반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모습
 
둘째, 분노하는 이들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분노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54절).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분노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으로 충만했고, 악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해서 그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오른 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광경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6절).
스데반은 자신의 용기로 이 상황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 본문에서는 ‘서 계셨다’고 하고,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초대교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할 때는 심판자이심을 의미하고, 서 계신다고 말할 때는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곧 스데반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보셨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과 기쁨,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을 향하여 이를 갈고, 분노하며, 죽이려 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자신을 위해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믿음의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셋째,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59~60절).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드린 두 개의 기도와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스데반의 기도는 동일하게 복수의 기도가 아니라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동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충만했기에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기도와 자신을 돌로 치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동일하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용서의 기도가 일으킨 변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는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함께 못 박힌 한 편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원래 양편에 있는 모든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편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함께 조롱했던 이에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반복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던 강도들에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당하면서도 용서하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 기도를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깨달아지고, 믿어졌기에 함께 죽어가는 죄수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함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한 한편의 강도를 구원했다면, 스데반의 기도는 어떤 열매를 낳았을까요? 곧바로 누군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힌트가 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변화될 거라는 힌트가 나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절). 
이 사울은 바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 사울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이고,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쓴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 나타납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니라 스데반 죽음의 협력자, 나아가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돌을 든 자들이 바울 앞에 자신의 옷을 벗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들은 그가 어떤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전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바울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 스데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에 맞는 장면, 그 순간에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을 누가를 통해 표현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고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상태였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그 출발을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자신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참여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스데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기에 그 무리 책임자로 있었던 사울을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역사하신 은혜를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통해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넣도록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금도 이 땅에 회심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이들의 중보기도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회심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바울이 변화된 것처럼, 바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된 것처럼 계속 중보의 기도, 특히 용서의 기도는 복음의 역사가 능력 있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 
핍박 신호탄이자 복음 퍼지는 영적 폭탄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주어진 핍박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머무르고,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둘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셨고, 흩어짐은 곧 복음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 흩어져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 여러 국가를 다니며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매달린 십자가의 두 끝이 가로로 땅속에 파묻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에 의하여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는가?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빌립, 마태, 마가, 누가, 맛디아, 도마 등도 순교했습니다. 요한만 밧모섬에 갇힌 채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여정에 포함되어 더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며 잔인하게 박해했습니다. 그 이후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A.D. 107년 순교를 당했는데, 그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일곱 개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유명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그분은 살고자 애쓰지 않고 도리어 순교하기를 사모했습니다. 자신을 구해달라는 기도의 부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부탁이었습니다. 그 편지 일부 내용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 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나는 고난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언젠가 자유스럽게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오. 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 할 하나님의 밀알이라오.” 
거룩한 확신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담대함만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핍박의 신호탄이었지만, 동시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는 영적 폭탄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가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진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이 아닌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핍박한 원수까지 용서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스데반처럼 예수님 닮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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