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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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2024-05-04      제14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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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사도행전 8:26~40
/ 이재훈 위임목사 
 
한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에는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일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지만, 뜻밖의 사람을 통해서도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면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복음을 듣고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만남이 그러 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을 때 놀라운 표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가운데 성령님이 그를 광야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빌립이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관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뜻밖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선한 열심,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 체험하는
‘단순한 순종’ 
 
“그때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26절).
사실 이해하기 힘든 지시입니다. 빌립이 이미 사마리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많은 역사가 나타나고 있었는데,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떠나서 사람을 만나기 힘든 광야의 길을 가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듣고 빌립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빌립은 따지지 않고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빌립이 보여준 단순한 순종이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를 체험하게 합니다. 현재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에 단순히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님이 빌립에게 “네가 광야 길로 가면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몇 시경에 누군가가 어느 방향에서 오게 될 것이다”라고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면 아마 순종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하나님이 빌립에게 주신 말씀은 “광야의 길로 가라”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두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라는 이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앞에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말씀해 주시면 순종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지하철 노선표를 보듯이 이 역 다음에는 무슨 역이 있고, 종착역이 어느 역인지를 알 수 있도록, 노선표를 보듯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려 주시면 그때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단순히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단순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이 곧 다음 스텝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미리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아니하시고, 다음 걸음만 알려 주시는 것일까요? 그 다음에 어떤 열매나 성공이 있으면 우리가 미리 교만해지기가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으면 미리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걸음의 단순한 순종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단순히 순종할 때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빌립의 만남
 
하나님이 빌립을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고 했습니다. ‘남쪽으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이 내용이 ‘일어나 정오쯤 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번역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은 정오에는 태양이 남쪽에서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 시간입니까? 바로 그 시간에 거기에 가야 하나님의 택하고 부르시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일찍 가거나 더 늦게 간다면 만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의 타이밍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단순히 순종할 때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빌립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광야 길을 지나가고 있는 에티오피아 관리 한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순종해야 합니다.
빌립이 순종해서 광야 길에서 만난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고위 관리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가 아닙니다. 당시 이집트 남쪽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수단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에티오피아로 불리는 나라는 당시 ‘아비시니아’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성경의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와 아비시니아 사이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구약에서는 ‘구스’라고 불렸는데, 모세의 아내가 구스 사람이었습니다. 함족이 살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간다게’는 이름이 아니라 호칭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도 호칭입니다. 로마의 ‘시이저’도 호칭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같은 호칭입니다. 간다게는 당시 여왕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왕은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어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사를 맡아보지 않았고, 세상일은 어머니, 여왕이 맡아 보았는데 그 여왕을 ‘간다게’라고 불렀습니다. 간다게의 국고를 맡았다는 것은 오늘날 재무부장관 같은 책임자입니다. 그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실력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여겨 볼 내용이 있습니다. 27절입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7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근처에 있는 나라 정부 관리가 왜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러 옵니까? 당시에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질서 속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백성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 민족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영향을 받아서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처럼 되기를 원해서 개종한 이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완전한 개종은 아니었지만, 절기에도 참여하고, 율법을 배우고, 영향을 받고 있었던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이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고,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갔었던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러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종교적 열심은 단순히 절기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학자들이 읽던 두루마리를 구입해서 마차에서 읽을 정도로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 근처에서 예루살렘까지 마차로 여행하며 절기에 참여하는 종교적 열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구약을 읽을 수 있는 사본을 구해서 스스로 읽을 정도였습니다. 놀라운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이 사람에게 빌립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야한다! 
 
빌립이 광야 길로 갔을 때 성령님이 “저 마차로 가까이 다가가거라”고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빌립이 그 마차에 있는 에티오피아 관리를 만났고,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그 사람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소?”라고 말하며 빌립에게 자기 마차에 타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언어적 능력이 부족해서 성경의 내용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날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어떤 학위 과정을 해야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학위 과정을 하고, 신학을 공부해도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수십 번, 수백 번 읽어도 깨닫고 알지 못합니다. 단지 종교적 열심이 영적인 눈을 열게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노예 제도를 폐지한 윌리엄 윌버포스가 자신의 친구인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를 교회에 초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피트에게 당시 유명한 설교자 로버트 세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하려고 데려갔습니다.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고, 복음을 잘 전하고, 지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윌버포스가 크게 기대했습니다. 자신의 친구이자 수상이 로버트 세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무엇인가 깨닫게 되리라 크게 기대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월버포스가 질문했을 때 윌리엄 피트 수상이 그에게 한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한 마디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무리 지적으로 열린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야합니다. 
 
단순한 순종의 명령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전하기!
 
에티오피아의 관리에게는 종교적 열심이 있었지만,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무슨 뜻이고 내용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에티오피아의 관리가 읽고 있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8절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입니다. 
“그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갔고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며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해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빼앗겼으니 누가 이 세대의 악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32~33절).
이 구절에서 시작해서 빌립이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단순한 순종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관리가 읽은 말씀은 명백하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했지만, 이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인지 몰랐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구절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가 어린 양처럼 도살장에 끌려가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전했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읽어도 깨닫지 못했고, 열리지 않았던 에티오피아 관리의 눈이 예수님을 들음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여는 열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여는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예수님에 관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4).
‘모세의 율법’은 토라,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글’은 선지서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구분으로 말하면, 역사서도 선지서의 글에 포함됩니다. 그 다음 <시편>은 시가서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를 말할 때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과 <시편> 세 구분으로 말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고, 예수님의 오심과 고난,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모든 문화적 내용까지 예수님을 풍유적으로 말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큰 흐름에서 직접적으로 예언한 것도 있고, 간접적으로 예언한 것도 있지만, ‘모든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볼 때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화적,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전할 때,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소명,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오늘 우리가 단순하게 순종해야 할 소명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규칙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담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들은 에티오피아 관리가 스스로 세례받기를 원했습니다.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려 물로 내려갔습니다.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두 사람만의 세례식이었지만, 성령님의 감동과 역사가 나타나는 세례식이었습니다. 
빌립과 에티오피아인을 비교해 보면 세상적으로 차이가 많았습니다. 빌립은 평범한 유대인이었지만, 에티오피아인은 한 나라의 장관이었습니다.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집트 문명이 최고의 문명이었습니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도 강대국이었고, 선진국이었습니다. 오히려 유대가 후진국이었습니다. 후진국의 평범한 한 시민이 당시 강대국의 한 장관에게 사회와 문화, 지적인 것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전했을 때 그가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복음 증거는 어떤 사회적, 문화적 차이도 뛰어 넘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부족해도 세상의 지식이 가득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체험한 빌립과 같은 이들이 성령님께 단순히 순종하며 예수님을 전할 때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하심에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구원 받는 놀라운 <사도행전>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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