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어린아이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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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어린아이의 하나님

 2024-05-11      제14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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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하나님

마 18:1~6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종종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교훈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유대인 사회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린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지만, 당시에는 어른들에게 종속된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산력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방해물이나 혹은 무익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어린아이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서 여러 곳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을 어린아이들에게도 적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부정적인 측면, 곧 자기중심적인 모습, 연약함, 경험이 부족함, 그래서 보는 시야가 좁은 것들을 가리켜 교훈한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긍정적인 측면, 성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잃어버리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의심 없는 믿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하나님’이십니다. 
첫째, 어린아이의 ‘의심 없는 믿음’을 닮아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3절).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그리고 모든 약속과 말씀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그 믿음은 의심 없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백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형성됩니다. 어떤 사회든 아주 어릴 때 교육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 하나님 말씀을 의심 없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녀들은 평생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의심이 없어서 믿음이 곧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믿음과 확신이 분리됩니다. 믿긴 믿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믿음이 곧 확신입니다.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 믿는다는 것 자체가 곧 확신입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을 모태로 일어났습니다. 교회 조직이 흠 없고 무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오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억압적인 권위를 따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사람들에게 의심 없는 믿음을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1789년 프랑스 혁명입니다. 개개인이 주체로 나서서 자유를 선포하고, 권리를 주장하면서 비판적인 이성이 급격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하고 의심 없는 믿음 대신 비판적인 이성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의심 없는 믿음을 버리고, 비판적인 이성을 통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불안의 문제, 아픔의 문제, 고난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신학자들도 이 흐름에 휩쓸렸습니다. 여러분, 의심은 영적인 질병입니다. 비정상적입니다. 의심이란 나누진 마음입니다. 두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는 언제나 의심할 때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요동치는 이유는 의심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오직 의심 없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의심으로 인하여 자기를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누군가가 선물을 주면 의심 없이 기뻐하며 받아들입니다. 선물을 준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합니다. 의심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의존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하여 의심 없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의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요구하는 것이 의존입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욥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마음을 토로합니다. 욥이 어린아이 같고,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한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을 의심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신조를 갖고 살아야 합니까?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가 이것을 대조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신자는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배욕 없는 섬김
 
둘째, ‘지배욕 없는 섬김’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4절).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이라는 말씀을 때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맥락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로 종종 다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것이 권력욕, 지배욕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끊임없는 지배욕이 갈등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될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린아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입니다. 학령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유아 정도의 연령입니다. 그 연령의 아이들은 아직 비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차별해서 자신을 높이려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권력에 낯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의도 자체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자기를 낮추는 상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왕은 섬기는 종입니다. 그에게 소유된 백성을 위해서 일하는 큰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자가 되려면 지배욕이 아닌 섬김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돼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 한다”(막 9:35). 
이 말씀은 사회에서 성공의 법칙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가 되신 분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섬김의 종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면, 그분처럼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기 원한다면, 지배욕이 아닌 섬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
 
셋째,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을 닮아야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막 9:37). 
예수님이 자신과 어린아이를 동일시하셨고, 더 나아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 어린아이를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이 약하기 때문에 돌봄 대상으로 여기며 잘 보살피라고 교육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을 영접 하는 것’이라는 말씀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차원의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접’이라고 할 때는 내 안에 없는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주요, 내가 왕이 되었던 인생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자,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순한 믿음, 의심 없는 믿음, 지배욕이 아닌 섬김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녀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어린아이다움은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닮게 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셨기에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복잡했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헌신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언제나 허리를 먼저 숙이십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헌신하십니다. 피조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낮아지고, 겸손하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는 메시지는 오직 성경에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어린아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속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C.S.루이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스코틀랜드의 설교자 조지 맥도널드의 설교 중에 이 문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다움은 사람다움의 가장 심오한 핵심이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어린아이다우신분이시다. 어린아이다움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하나님만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온전히, 단순히, 겸손하게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아이다움을 영접해야 합니다. 의심 없는 믿음, 지배욕이 아닌 섬김,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어린아이다움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영접하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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