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죽도록 돌에 맞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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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죽도록 돌에 맞고도 

 2024-07-13      제15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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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돌에 맞고도 

<사도행전> 14:8~20
/ 이재훈 위임 목사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고난을 마땅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마땅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여덟 번째 복이 임한 것입니다.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마 5:11~12).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복입니다. 세상은 아무런 핍박과 고난이 없는 것을 복이라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기쁘게 감당하며,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복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는 이유를 ‘시기심’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로 인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을 중단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 했습니다”(행 13:52).
그들은 모욕과 핍박 속에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이요, 복음의 능력이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이라는 지역으로 옮겨서 사역합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쪽으로 약 180km 떨어진 고산 지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현재는 튀르키예의 ‘콘야’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튀르키예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이고니온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 회당을 찾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유대인의 회당에서 핍박을 받았다면, 다음 도시에서는 유대인을 찾지 않을 법도 한데 그들은 또다시 유대인 회당을 먼저 방문합니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을 깨닫는다면, 그들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된다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더 능력 있게 전파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 동일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선교적 확산성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방 지역에 있는 유대 회당에는 이방인들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은 어느 정도 준비된 이들이기에 복음 전파에도 효과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
 
“이고니온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수의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됐습니다. 그러나 믿기를 마다하는 유대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 형제들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 했습니다”(1~2절). 
이고니온에서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동시에 유대인들의 반발과 핍박도 일어났습니다.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복음을 들었는데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믿는 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부하고 대적하며 심지어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교롭게 믿는 사람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핍박하고 내ㅤㅉㅗㅈ고, 심지어 죽이려는 이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먼저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야 할 이들이 더 완악한 마음으로 복음을 대적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를 의지해 담대히 말씀을 전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주의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3절).
첫째,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속히 떠나려는 게 아니라 가능한 오래 머무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둘째,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담대함은 순수함과 체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수함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이들과 하나님이 표적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험을 또다시 맞이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루스드라에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인지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말씀을 듣는 청중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남달리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남달리 귀 기울여 듣는 그 사람 안에 구원을 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선포했습니다. “당신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남달리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남달리 사모하며, 말씀이 나를 사로잡는 것 같은 체험이 바로 성령님이 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수천 명이 있어도 남달리 귀를 기울이는 사람과 남달리 거부하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지식과 달리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는 귀가 열리는 것이 성령님 역사의 시작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임할 때 치유와 회복도 일어납니다. 마음과 정신의 회복이 일어나고, 때로는 육신의 치유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달리 귀 기울여 듣는 한 장애인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자신들이 믿고 있던 신들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이 전설로 믿고 있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온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오해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
 
“사람들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말로 소리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도시 밖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은 황소들과 화환들을 성문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11~13절). 
그들은 전설이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지만, 신이 사람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역사적 사건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생각하고 떠받들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우리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며 우상숭배를 막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는 담대하게 자신을 내던지며 복음을 전하던 이들이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들 속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의 잘못된 원인은 이 한 가지 원칙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을 사람들이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십계명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노동력이 필요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외로워서 동반자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결핍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봉사, 예배, 찬양이 하나님 되심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때문에 하나님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충해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무신론자가 되어도 하나님 되심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전히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십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원하는 대로 될 때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이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사람들이여, 왜 이런 행동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14~15절).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면 옷을 찢으며 분노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떠받들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옷을 찢어야 할 순간은 스스로를 떠받드는 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행동을 말릴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에서의 설교와 
루스드라에서의 설교
 
<사도행전> 15~17절을 보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와 루스드라에서의 설교를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본 비디시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구약 역사를 요약하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고,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회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역사를 아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유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회중에 맞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스드라는 회당이 아닙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구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왜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증거해야 하는지가 여기에 나옵니다.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에게는 성경을 인용할 수 있지만, 성경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매우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G.K 체스터턴이라는 분이 쓴 <영원한 사람>(The Everlasting Ma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진화론이 막 등장하기 시작할 때 쓴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오래된 구석기 시대의 동굴에 들어가 보면 벽화가 있습니다. 사슴도 있고 동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도 그림을 그립니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뿐입니다. 고대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고, 현대 사람은 못 그립니까? 아닙니다. 현대에도 석기 시대 사람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있고, 고대인이라도 그림의 은사가 있으면 잘 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석기 시대 사람도 사람이고, 이 시대 사람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진화론을 무너뜨렸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고, 유일하심을 보여주며,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 단계로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으로부터 시작하고,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된 인간에게 이르러서 셋째, 진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른다. 그래서 루스드라에서는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비디시아 안디옥에서는 구약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대상에 따라 다른 설교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는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상에 따라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탁월함으로 사역 주도권이 바나바아게서 바울에게로 자연스럽게 이동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는 바나바보다 바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바나바가 사역의 주도권을 바울에게 넘겨주고 “당신이 앞서 가라. 내가 뒤따라가겠다”는 성숙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믿음의 문이 열렸는지 보고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기적과 변증, 전도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있던 반대자들이 따라와서 바울을 모함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 사람은 잘못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고, 여러 모함과 음모로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가 맞아 죽을 만큼 돌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진리를 전하면 그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은 옳은 지도자를 싫어하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지도자를 좋아합니다.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지도자를 도리어 인정하지 않고, 자신처럼 어둡게 살아가는 지도자를 내치지 않습니다. 자신 속에 있는 어둠을 감추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지도자가 세워지면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 어둠에 가까운 지도자를 지지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올바른 진리를 전했지만, 그들을 돌로 쳤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돌을 던져서 시체인줄 알고 밖으로 끌어내 버렸습니다. 바울이 그때 살아난 것은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돌을 맞고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입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존하신 것입니다. 죽도록 돌에 맞고도 바울은 다시 일어나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훗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사건을 언급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고후 11:24~25).
바울의 많은 고난 중에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역지를 ‘더베’라는 곳으로 옮깁니다. 더베에서는 핍박이 없었고, 오랫동안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얻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사역을 중단했다면 더베에서의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파송을 받은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빨리갈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지름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사역했던 지역들을 다시 방문하는 코스를 잡습니다. 죽을 고생을 했으면 빨리 돌아가고 싶었을 텐데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서 간 이유는 그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한 뒤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믿음에 머물러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21~22절). 
많은 새신자를 믿음 위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 그 힘들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고, 장로와 리더십, 성도들을 세운 것입니다. 그 뒤에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2년에 걸친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친 것입니다. 시리아 안디옥에 돌아와서 이른바 ‘선교보고’를 하는데 그 내용이 은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서 교회 신자들을 모으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 보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27~28절). 
보고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이고,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입니다. 그들이 죽도록 고생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믿음의 문이 열렸는지를 보고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고생한 이야기는 먼 훗날 바울이 죽음을 앞둔 때 <디모데후서>에서 말합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핍박과 고난을 함께 겪었다. 그러한 핍박을 내가 겪었으나 주께서 이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핍박을 당할 것이다”(딤후 3:11~12). 
바울과 바나바는 죽도록 돌에 맞고도 다시 일어나 기뻐하며 소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복, 고난과 핍박도 기뻐하며, 이길 수 있는 복을 누리게 합니다. 어떤 핍박과 죽음조차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귀한 삶을 본받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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