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을 위한 전쟁
<여호수아> 1:10~18
/이재훈 위임목사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그 땅을 정복하는 여정에 두 가지 성격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선물로 주시는 땅인 동시에 그 백성들이 발로 밟아야 하는 땅, 곧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 땅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모습,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있기만 해도 주시는 선물이 넘쳐나는데, 그 선물을 스스로 거부하는 인생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승리의 법칙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고, 순종의 책임과 인격적인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는 것이고, 그 땅에 사는 민족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공의로운, 거룩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는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육신의 혈통을 따라 그 땅을 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포함된 이들이라 할지라도 가나안 땅에서 범죄를 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가나안 민족들이 받았던 진노와 심판을 동일하게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하고 담대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이는 주야로 율법책을 묵상하며 기록한 대로 행하는 담대함, 백성들의 수많은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과 인도하심, 하나님의 질서에 먼저 순종하는 담대함을 의미합니다.
기쁘게 순종하고,
하나님 주신 소명의 특징
“‘그리하여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지휘관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진영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명령하라. 너희 양식을 준비하라. 이제부터 3일 안에 너희가 여기에서 요단강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 차지할 것이다’”(10~11절).
여호수아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실행했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명령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뜻에 순종할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때로 지연은 그 자체로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또 “양식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광야시대에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들어갈 땅에서는 스스로 일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특히 르우벤 지파, 갓지파, 므낫세 반지파에게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32장에 기록된 내용을 가리킵니다. 요단강 건너편을 먼저 정복할 때 므낫세 반지파, 르우벤, 갓 지파는 가축이 많았습니다. 가축 떼를 데리고 요단강을 건널 수 없기에 모세에게 “우리 지파들은 요단을 건너지 않고 여기에 정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대신 아내와 자녀들과 가축들은 여기에 있지만,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건너가서 그 땅을 정복할 때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해서 모세가 허락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지파들에게 “약속을 이제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6~18절).
그들에게 인상적인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기쁘게 순종합니다. 어떤 조건, 한계를 제시하지 않고 여호수아에게 전폭적으로 순종하겠다고 헌신의 서약을 합니다. 자신들의 권익에만 관심을 가졌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모세에게 했던 말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 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일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의구심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하나 됨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고백으로 서약하는 것입니다.
둘째, 백성들이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하나님께도 들었고, 백성들에게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회중들을 통해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백성들의 부르심이 연결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과 회중으로부터의 부르심이 하나 되어서 여호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귀한 출발이 되었습니다.
안식과 의미 그리고 누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고 이 땅을 너희에게 허락하셨다’라고 명령한 것을 기억하라”(13절).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신 것처럼 너희 형제들에게도 안식을 주실 때까지,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차지할 때까지 너희가 도와야 한다. 너희는 그 후에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강 건너편, 곧 해 돋는 쪽으로 돌아가 너희 땅을 상속할 것이다”(15절).
여호수아가 ‘안식’이라는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집행되는 전쟁인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안식을 주는 전쟁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여기서 안식은 지리적 안식과 물리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더는 광야를 방황하지 않고, 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원수들 가운데 하나도 그들에게 맞서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원수들을 그들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수 21:44).
첫 번 째 안식은 이제 그들과 맞설 수 없고, 원수들의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물리적인 안식입니다. 두 번 째 안식은 그보다 깊은 의미입니다. 물리적인 위협이 없지만 그것 자체가 안식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임재 가운데 누리는 평안의 안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실 때 누리는 축복이 바로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가운데 누리는 평화, 기쁨, 행복이 안식입니다. 두 번째 의미의 안식을 <히브리서>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까? 불순종한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입니까?”(히 3:18).
“그런데 믿는 우리들은 그 안식에 들어갑니다”(히 4:3).
이는 하나님이 ‘내가 진노해 맹세한 것처럼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믿고 순종한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갔지만, 불신한 이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안식을 설명할 때 ‘사바트’라는 단어로 번역된 ‘사바티스모스’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시간적인 구별의 안식입니다. 제7일을 구별하고, 시간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비하며 누리는 안식입니다. 멈춤으로써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시간을 떼어 구별하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구별함으로써 누리는 안식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는 딱 한 구절만 빼고 장소적 의미의 안식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어 ‘매누하’라는 단어로 설명하는데, 시간 중심과 공간 중심으로 나누어서 안식을 설명합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안식을 얻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공간적인 의미의 안식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안식,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는 세 종류의 안식을 연결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질서 완성으로서의 안식입니다.
“어디엔가 제7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분의 모든 일을 쉬셨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히 4:4~5).
하나님의 창조가 제7일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도 하나님 창조의 일부이며,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도에서는 첫 번째였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이 누리시는 그 안식을 인간과 더불어 모든 만물과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 안식을 인간이 깨트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얻는 안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가난한 땅을 차지함으로 얻는 안식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른 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히 4:8~9).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진정한 안식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가난한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을 얻는 전쟁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보여주는 모형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면서 남아있는 진정한 안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안식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염려를 예수님께 맡기고 그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의미합니다. 이 안식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들처럼 우리도 복음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무익했던 것은 그들이 들은 말씀과 믿음을 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히 4:2).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우리의 믿음을 더하면 됩니다, 그 믿음은 순종을 의미하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고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형통하리라”는 말씀에서 ‘형통’이 안식이라는 맥락의 의미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얽매는 죄악의 사슬과 세상의 위협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안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은 안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싸우는 영적 전쟁 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 안식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담대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안식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안식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만이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안식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