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화) ‘교회, 복음으로 서다!’
주제강의 1
교회, 복음 중심의 공동체
/ 이재훈 위임목사
<로마서> 1장 1~4절 말씀은 복음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정의입니다. 복음의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육신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사실 없이는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들의 죄,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문을 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창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됩니다.
복음 중심의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로 펼쳐진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영역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복음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우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택함 받은, 복음이 맡겨진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복음 중심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적 기초와 신학적 비전, 사역의 형태를 모두 교정하고 형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중심의 공동체가 되려는 것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교회는 종교화되고, 나의 노력에 근거하며, 두려움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나 복음 중심의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섬깁니다. 복음 중심 교회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둘째,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종교적 다원주의’와 ‘문화적 다원주의’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종교적 다원주의를 조심하고, 경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에 이르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보다 의심을 선호하게 하고, 과학을 우상처럼 따르게 합니다.
셋째, 공로주의입니다. 공로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로를 생각하는 순간 나중 된 자가 되며, 복음 중심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제강의 2
세상이 왜 이런가요?
/ 이인용 장로
작년 독일의 ‘성별 자기 결정법’ 발효, 우리나라 대법원의 ‘동성 동반자 건강보험 피부양자등록’ 판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950달러 이하 절도 경범죄 규정 완화’ 등의 결정은 ‘인권 옹호’, ‘차별 금지’, ‘평등 원칙’, ‘약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말들로 이상한 법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사상가들은 진리와 선을 물었으나 인간의 삶은 불평등과 차별이 공공연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기초해서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공산사회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불과 70여 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제도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유산은 오늘날 인본주의, 인권 담론, 젠더 혁명을 포함한 정체성 정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의 배경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인 ‘불평등’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사상가들은 사회적‧문화적 불평등, 성에 따른 불평등도 주목하며 ‘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와 제도의 억압과 차별의 구조가 숨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를 성별, 인종, 지역, 환경,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부딪히는 현장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란 계급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의 인정과 충돌을 조율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포스트 막시즘’ 즉, 현재의 ‘정체성 정치’가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러 기준이 있고, 이 기준은 안과 밖을 가르며, 기준 안에서 기준의 밖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억압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논리에 따라 ‘기준이 문제이고, 이 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준을 세우는 토대는 ‘진리’입니다. 선, 도덕, 윤리 등의 기준들은 진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전제는 기준의 토대가 되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멀리하는 것은 이 진리를 갖고 있으면 기준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상대성’이며, 지금 우리가 사는 탈진실의 시대입니다. 탈진실의 시대에는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판단이 기준입니다. 요즘 대학이나 기업 등에서 사용하는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와 같은 기조 역시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부인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절대 진리이시고, 절대 선입니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 감정, 영원을 희구하는 마음,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어주셨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인간이 인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다양성’이라 말하며, 그것을 포용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면 그것을 혐오 발언이라고 처벌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5)이시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적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제강의 3
세계관과 복음
/ 류현모 교수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신념의 포괄적인 틀’을 말합니다. 세계관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영양분을 흡수해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 세계관은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 믿음과 가치관이 생기고, 그 가치관에 근거해서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행동은 일정한 패턴이 생기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인격을 형성합니다. 결국, 인격의 근저에는 ‘우리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냐’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지고 살아온 세계관에 대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입견이 되기 쉽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세계관은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뉘며, 기독교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 신앙은 성경 내용에 기반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바탕은 성경 지식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아주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와 등장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는 ‘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죄와는 타협하지 않으시기에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한 민족을 선택해서 제사장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완성’은 구원받은 나는 어디로 가냐는 것입니다. 죄의 사슬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가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 효과’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메타 내러티브로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들을 여기에 적용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법칙을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상황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선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준 삼아야 합니다. 세계관 공부는 ‘세상의 공격을 성경 속에서 어떤 답을 찾아서 대응할 것인가’입니다. 영적 전쟁의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대응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고대에는 인간이 피고석에 와 있고,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심판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피고석에 서 있고, 인간이 재판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피고석에 계신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저녁집회 1
온전한 복음
<에베소서> 2장 8~10절
/ 홍정길 원로목사(남서울은혜교회)
온누리교회의 특징은 ‘온전한 복음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가장 노력하는 교회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본문을 정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이 땅에 오셔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대로 믿으면 내 죄는 옮겨지고,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믿음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저는 서서평 선교사와 관련된 신앙의 배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외할머니가 서서평 선교사의 제자였고, 어머니는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일학교 출신입니다. 어릴 적 거룩한 성경 인물 같은 믿음의 어른들을 많이 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고, 그 참혹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끔찍한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닫았습니다. 대학은 예수 안 믿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철학과를 택했고, 예수 믿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친구 꼬임에 넘어가 수양관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기도하는 청년들의 얼굴에 주님이 주신 평화가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지금 이곳에 주님이 계시면 제가 예수님 믿게 해주십시오”라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제가 울면서 어릴 때부터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마음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빛이 따뜻하게 저를 안아주시며 “정길아, 너 내게 너무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음성에 엎드렸고,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외롭거나 힘들 때, 기쁠 때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그 자리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신 그 놀라운 은혜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살 인생에 대해 주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 믿게 한 것은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온전한 복음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귀한 축복을 놓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늘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고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온누리교회는 선한 일을 알면 참지 못하는 교회이고, 열심히 선한 일을 끝까지 좇아가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명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귀한 온전한 복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로서 온전한 복음으로 살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