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2025-10-25      제1561호

공유하기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주제강의 4
교회, 문화의 변혁자 

/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목표 철학 다섯 번째는 ‘그리스도의 문화를 심는 교회’입니다. 故 하용조 목사님이왜 이 항목을 넣으셨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온 세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하고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보면, 교리적인 문제를 더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의 중심,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문화적인 요소입니다.   
문화는 어떤 시대의 예술적인 영역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지난 세기 서구 문화의 중심에는 분명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사회에는 문화는 남았지만, 복음의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한때 교회가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교회가 창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문화에 순응하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문화의 관계는 기독교 역사 내내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주의자와 율법주의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실 복음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형성된 문화를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니버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Christ against Culture)입니다. 이는 세속 문화는 악한 것이므로 교회는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관습, 제도 모든 것을 거부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 삶만 강조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일치(Christ of Culture)입니다. 모든 문화에는 복음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영지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위의 문화(Christ above Culture)입니다. 그리스도의 문화는 세상 문화보다 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입장이 이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입니다. 양쪽이 긴장 관계에 있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충돌된다는 마틴 루터의 입장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입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문화 영역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문화 변혁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번성해 가득함으로 다스리라’는 통치를 통해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8).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초대 교회는 세상 문화를 먼저 바꾸겠다고 하지 않고, 공동체 자체가 세상 문화와 다르게 변화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의 동반자, 추종자가 아니라 선구자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회가 문화의 변혁자가 되려면 기관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어야 합니다. 급진적 사회 변화를 변혁의 기회로 봐야 합니다. AI를 중심으로 기술 혁명이 일어나는 지금이 문화 변혁의 기회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더하는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변화시켜 가기를,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5
AI시대와 교회

/김경훈 집사
 
글쓰기, 고객 상담, 코딩 자료 분석, 이미지 생성과 편집, 광고, 자율주행 등 AI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우리를 돕거나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 ‘속도의 유혹’입니다. AI는 클릭 한 번이면 많은 것을 해줍니다. 그런데 그 속도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랑과 절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AI에 맡기고, 어떤 것을 직접 할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행사 이름을 정하거나, 포스터 제작 등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한 기도문, 설교문, 간증문을 성령님 없이 AI만 가지고 작성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의 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처럼,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아 사역에 AI를 사용한다면 성령님이 선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둘째, ‘신뢰의 기준’입니다. AI의 답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데이터의 산물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적이지 않은 자료가 많기에 AI가 이것들을 학습한다면 잘못된 답을 낼 위험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적인 콘텐츠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AI시대일수록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성경 통독, 성경공부모임 등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삶 속에 깊이 심고, 말씀을 기준으로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관계의 경제성’입니다. AI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사람보다 AI와 관계 맺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과 감정의 비용이 들지만, AI는 내가 원할 때만 만나고 언제든 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연인, 멘토, 상담사, 심지어 목회자 역할까지 AI에게 기대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공동체성과 가정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 안에서 자라도록 지으셨습니다. 교회는 함께 먹고 마시며, 얼굴을 마주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지속해야 합니다. AI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선교의 접점도 줄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AI가 줄 수 없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인내와 회개, 교제를 어떻게 선교에 접목할지 고민해야 하고, 전도의 접점을 확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넷째, ‘죄의 확장’입니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교만도 함께 확대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7). 우리는 기술이 성공하면 교만해지고, 실패하면 불안해집니다. 창조주를 떠났던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중 하나인 AI조차 두려워합니다. 결국, AI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인간의 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I시대 교회는 죄의 현실을 더욱 직시하고, 세상에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기술 속에서도 모든 죄에서 우리를 끊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님과 함께 AI를 성경적으로 활용하고, AI로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를 기도합니다.
 
주제강의 6
폭력, 고통, 두려움의 세계 문화 속의 선교

/ 크리스토퍼 라이트 박사(Christopher Wright)
 
선지자 하박국은 역사적으로 끔찍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시대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의와 거짓, 폭력과 전쟁이 난무했습니다. <하박국>을 통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섯 가지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보는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께 “제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합니까?”(합 1:2~4)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나라들을 잘 살펴보아라. 나는 네가 싫어하거나 믿지 못할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합 1: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일으켜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주권을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구원의 믿음을 넘어 순종과 신뢰로 성장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며,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이 세계의 난무하는 폭력의 문화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탄식과 저항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악에 저항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고 탄식하며 항의했습니다. 우리 역시 불의, 거짓, 고통을 영속시키는 자들을 대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강력한 탄식의 목소리가 필요함을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땅의 우상숭배, 피조세계의 파괴, 불의와 죄악, 고난에 대한 거룩한 항의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 사명 이야기 속에서 소망을 얻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깊이 알 때 세상의 거짓된 대안들을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절망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 여호와는 내 힘이십니다”(합 3:19)라고 고백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 행동하며 달려나갔습니다. 그의 사명은 우상숭배와 불의를 폭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분별력, 믿음, 기도, 그리고 말씀과 행위 속에서 전인적인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섭고, 폭력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세상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의 사명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저녁집회 2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창세기> 49장 22절
/ 이동원 원로목사(지구촌교회)
 
하용조 목사님을 떠올릴 때마다 <창세기> 49장 22절, 요셉과 그 자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과 온누리교회의 역사는 이 말씀과 닮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온누리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며, 한국 교회의 공동 숙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요셉을 ‘풍성한 열매 맺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일생은 형제들의 따돌림, 노예 생활, 억울한 감옥 생활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의 인생이 열매 맺는 일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 역시 질병과 싸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온누리교회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수많은 영적 자손을 거느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넘어 일본, 대만,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 미국에까지 그 축복의 열매를 나누며 영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었다’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이 담을 넘는 수단이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교회의 담을 넘어 다른 곳까지 심어지려면 문화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문화 속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분별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선한 문화의 변혁자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책임을 감당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그냥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이웃들에게 복이 되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 감옥, 애굽까지 모두 ‘요셉 때문에’ 복을 누렸습니다. 요셉이 복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성’입니다. 바로가 요셉에 대해 말했듯이, 그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내면에 존재하던 맑은 영성의 샘에서 애굽 땅을 적시는 은혜를 퍼 올렸습니다.
요셉이 은혜를 따라 살면서 남긴 중요한 흔적은 ‘인격적 열매’입니다. 요셉이야말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삶에서 맺었던 사람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아홉 가지 측면을 가진 단일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향한 사랑, 역경 속의 기쁨, 구덩이와 감옥 속에서 오래 참음, 형제들을 용서한 자비, 변함없는 충성 등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인생을 통해 맺고 있었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고급진 문화를 만들어 내기를 축복합니다.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546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