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1일(화) ‘교회, 복음으로 서다!’

10월 21일(화) ‘교회, 복음으로 서다!’   주제강의 1 교회, 복음 중심의 공동체 / 이재훈 위임목사   <로마서> 1장 1~4절 말씀은 복음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정의입니다. 복음의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육신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사실 없이는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들의 죄,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문을 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창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됩니다.  복음 중심의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부활로 펼쳐진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영역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복음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우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택함 받은, 복음이 맡겨진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복음 중심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적 기초와 신학적 비전, 사역의 형태를 모두 교정하고 형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중심의 공동체가 되려는 것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교회는 종교화되고, 나의 노력에 근거하며, 두려움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나 복음 중심의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섬깁니다. 복음 중심 교회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둘째,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종교적 다원주의’와 ‘문화적 다원주의’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종교적 다원주의를 조심하고, 경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에 이르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보다 의심을 선호하게 하고, 과학을 우상처럼 따르게 합니다.  셋째, 공로주의입니다. 공로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로를 생각하는 순간 나중 된 자가 되며, 복음 중심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제강의 2 세상이 왜 이런가요? / 이인용 장로    작년 독일의 ‘성별 자기 결정법’ 발효, 우리나라 대법원의 ‘동성 동반자 건강보험 피부양자등록’ 판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950달러 이하 절도 경범죄 규정 완화’ 등의 결정은 ‘인권 옹호’, ‘차별 금지’, ‘평등 원칙’, ‘약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말들로 이상한 법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사상가들은 진리와 선을 물었으나 인간의 삶은 불평등과 차별이 공공연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기초해서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공산사회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불과 70여 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제도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유산은 오늘날 인본주의, 인권 담론, 젠더 혁명을 포함한 정체성 정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의 배경은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인 ‘불평등’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사상가들은 사회적&#8231;문화적 불평등, 성에 따른 불평등도 주목하며 ‘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와 제도의 억압과 차별의 구조가 숨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를 성별, 인종, 지역, 환경,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부딪히는 현장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란 계급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의 인정과 충돌을 조율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포스트 막시즘’ 즉, 현재의 ‘정체성 정치’가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러 기준이 있고, 이 기준은 안과 밖을 가르며, 기준 안에서 기준의 밖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억압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논리에 따라 ‘기준이 문제이고, 이 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준을 세우는 토대는 ‘진리’입니다. 선, 도덕, 윤리 등의 기준들은 진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기준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전제는 기준의 토대가 되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멀리하는 것은 이 진리를 갖고 있으면 기준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상대성’이며, 지금 우리가 사는 탈진실의 시대입니다. 탈진실의 시대에는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판단이 기준입니다. 요즘 대학이나 기업 등에서 사용하는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와 같은 기조 역시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부인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절대 진리이시고, 절대 선입니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 감정, 영원을 희구하는 마음,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어주셨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인간이 인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다양성’이라 말하며, 그것을 포용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면 그것을 혐오 발언이라고 처벌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5)이시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적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제강의 3 세계관과 복음 / 류현모 교수   세계관이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신념의 포괄적인 틀’을 말합니다. 세계관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영양분을 흡수해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 세계관은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 믿음과 가치관이 생기고, 그 가치관에 근거해서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행동은 일정한 패턴이 생기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인격을 형성합니다. 결국, 인격의 근저에는 ‘우리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냐’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지고 살아온 세계관에 대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입견이 되기 쉽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세계관은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뉘며, 기독교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 신앙은 성경 내용에 기반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바탕은 성경 지식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아주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와 등장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는 ‘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죄와는 타협하지 않으시기에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한 민족을 선택해서 제사장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완성’은 구원받은 나는 어디로 가냐는 것입니다. 죄의 사슬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가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 효과’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메타 내러티브로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들을 여기에 적용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법칙을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상황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선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준 삼아야 합니다. 세계관 공부는 ‘세상의 공격을 성경 속에서 어떤 답을 찾아서 대응할 것인가’입니다. 영적 전쟁의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대응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고대에는 인간이 피고석에 와 있고,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심판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피고석에 서 있고, 인간이 재판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피고석에 계신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저녁집회 1 온전한 복음 <에베소서> 2장 8~10절 / 홍정길 원로목사(남서울은혜교회)   온누리교회의 특징은 ‘온전한 복음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가장 노력하는 교회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본문을 정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이 땅에 오셔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대로 믿으면 내 죄는 옮겨지고,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믿음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저는 서서평 선교사와 관련된 신앙의 배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외할머니가 서서평 선교사의 제자였고, 어머니는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일학교 출신입니다. 어릴 적 거룩한 성경 인물 같은 믿음의 어른들을 많이 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고, 그 참혹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끔찍한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닫았습니다. 대학은 예수 안 믿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철학과를 택했고, 예수 믿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친구 꼬임에 넘어가 수양관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기도하는 청년들의 얼굴에 주님이 주신 평화가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지금 이곳에 주님이 계시면 제가 예수님 믿게 해주십시오”라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제가 울면서 어릴 때부터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마음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빛이 따뜻하게 저를 안아주시며 “정길아, 너 내게 너무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음성에 엎드렸고,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외롭거나 힘들 때, 기쁠 때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그 자리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신 그 놀라운 은혜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살 인생에 대해 주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 믿게 한 것은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온전한 복음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귀한 축복을 놓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늘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고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온누리교회는 선한 일을 알면 참지 못하는 교회이고, 열심히 선한 일을 끝까지 좇아가는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명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귀한 온전한 복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복음을 먼저 받은 자로서 온전한 복음으로 살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2025-10-25      제1561호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10월 22일(수) '교회, 문화로 퍼져가다!'   주제강의 4 교회, 문화의 변혁자  /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목표 철학 다섯 번째는 ‘그리스도의 문화를 심는 교회’입니다. 故 하용조 목사님이왜 이 항목을 넣으셨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온 세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하고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보면, 교리적인 문제를 더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의 중심,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문화적인 요소입니다.    문화는 어떤 시대의 예술적인 영역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지난 세기 서구 문화의 중심에는 분명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사회에는 문화는 남았지만, 복음의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한때 교회가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교회가 창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문화에 순응하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문화의 관계는 기독교 역사 내내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주의자와 율법주의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한 것도 사실 복음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형성된 문화를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 니버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Christ against Culture)입니다. 이는 세속 문화는 악한 것이므로 교회는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관습, 제도 모든 것을 거부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 삶만 강조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일치(Christ of Culture)입니다. 모든 문화에는 복음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영지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위의 문화(Christ above Culture)입니다. 그리스도의 문화는 세상 문화보다 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입장이 이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Christ and Culture in Paradox)입니다. 양쪽이 긴장 관계에 있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충돌된다는 마틴 루터의 입장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입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문화 영역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문화 변혁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번성해 가득함으로 다스리라’는 통치를 통해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8).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초대 교회는 세상 문화를 먼저 바꾸겠다고 하지 않고, 공동체 자체가 세상 문화와 다르게 변화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의 동반자, 추종자가 아니라 선구자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회가 문화의 변혁자가 되려면 기관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어야 합니다. 급진적 사회 변화를 변혁의 기회로 봐야 합니다. AI를 중심으로 기술 혁명이 일어나는 지금이 문화 변혁의 기회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더하는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변화시켜 가기를,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5 AI시대와 교회 /김경훈 집사   글쓰기, 고객 상담, 코딩 자료 분석, 이미지 생성과 편집, 광고, 자율주행 등 AI는 이미 여러 영역에서 우리를 돕거나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 ‘속도의 유혹’입니다. AI는 클릭 한 번이면 많은 것을 해줍니다. 그런데 그 속도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랑과 절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AI에 맡기고, 어떤 것을 직접 할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행사 이름을 정하거나, 포스터 제작 등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위한 기도문, 설교문, 간증문을 성령님 없이 AI만 가지고 작성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의 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처럼,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아 사역에 AI를 사용한다면 성령님이 선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둘째, ‘신뢰의 기준’입니다. AI의 답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데이터의 산물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적이지 않은 자료가 많기에 AI가 이것들을 학습한다면 잘못된 답을 낼 위험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적인 콘텐츠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AI시대일수록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성경 통독, 성경공부모임 등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삶 속에 깊이 심고, 말씀을 기준으로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관계의 경제성’입니다. AI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사람보다 AI와 관계 맺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과 감정의 비용이 들지만, AI는 내가 원할 때만 만나고 언제든 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연인, 멘토, 상담사, 심지어 목회자 역할까지 AI에게 기대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공동체성과 가정의 공동체성에 심각한 위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 안에서 자라도록 지으셨습니다. 교회는 함께 먹고 마시며, 얼굴을 마주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지속해야 합니다. AI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선교의 접점도 줄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AI가 줄 수 없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인내와 회개, 교제를 어떻게 선교에 접목할지 고민해야 하고, 전도의 접점을 확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넷째, ‘죄의 확장’입니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교만도 함께 확대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7). 우리는 기술이 성공하면 교만해지고, 실패하면 불안해집니다. 창조주를 떠났던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중 하나인 AI조차 두려워합니다. 결국, AI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인간의 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I시대 교회는 죄의 현실을 더욱 직시하고, 세상에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기술 속에서도 모든 죄에서 우리를 끊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님과 함께 AI를 성경적으로 활용하고, AI로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를 기도합니다.   주제강의 6 폭력, 고통, 두려움의 세계 문화 속의 선교 / 크리스토퍼 라이트 박사(Christopher Wright)   선지자 하박국은 역사적으로 끔찍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시대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의와 거짓, 폭력과 전쟁이 난무했습니다. <하박국>을 통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섯 가지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보는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께 “제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합니까?”(합 1:2~4)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나라들을 잘 살펴보아라. 나는 네가 싫어하거나 믿지 못할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합 1:5)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일으켜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주권을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구원의 믿음을 넘어 순종과 신뢰로 성장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며,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이 세계의 난무하는 폭력의 문화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탄식과 저항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악에 저항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고 탄식하며 항의했습니다. 우리 역시 불의, 거짓, 고통을 영속시키는 자들을 대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강력한 탄식의 목소리가 필요함을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땅의 우상숭배, 피조세계의 파괴, 불의와 죄악, 고난에 대한 거룩한 항의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성경을 너무 모르고 등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 사명 이야기 속에서 소망을 얻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깊이 알 때 세상의 거짓된 대안들을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절망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 여호와는 내 힘이십니다”(합 3:19)라고 고백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 행동하며 달려나갔습니다. 그의 사명은 우상숭배와 불의를 폭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분별력, 믿음, 기도, 그리고 말씀과 행위 속에서 전인적인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섭고, 폭력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세상은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의 사명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저녁집회 2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창세기> 49장 22절 / 이동원 원로목사(지구촌교회)   하용조 목사님을 떠올릴 때마다 <창세기> 49장 22절, 요셉과 그 자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과 온누리교회의 역사는 이 말씀과 닮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온누리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며, 한국 교회의 공동 숙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요셉을 ‘풍성한 열매 맺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일생은 형제들의 따돌림, 노예 생활, 억울한 감옥 생활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의 인생이 열매 맺는 일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일생 역시 질병과 싸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온누리교회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수많은 영적 자손을 거느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넘어 일본, 대만,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 미국에까지 그 축복의 열매를 나누며 영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었다’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이 담을 넘는 수단이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교회의 담을 넘어 다른 곳까지 심어지려면 문화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문화 속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분별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선한 문화의 변혁자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책임을 감당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그냥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이웃들에게 복이 되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 감옥, 애굽까지 모두 ‘요셉 때문에’ 복을 누렸습니다. 요셉이 복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성’입니다. 바로가 요셉에 대해 말했듯이, 그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내면에 존재하던 맑은 영성의 샘에서 애굽 땅을 적시는 은혜를 퍼 올렸습니다. 요셉이 은혜를 따라 살면서 남긴 중요한 흔적은 ‘인격적 열매’입니다. 요셉이야말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삶에서 맺었던 사람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아홉 가지 측면을 가진 단일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향한 사랑, 역경 속의 기쁨, 구덩이와 감옥 속에서 오래 참음, 형제들을 용서한 자비, 변함없는 충성 등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인생을 통해 맺고 있었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고급진 문화를 만들어 내기를 축복합니다.

 2025-10-25      제1561호

[온누리축제] [온누리사역축제(OMC)] 10월 23일(수) ‘교회, 선교로 꽃피우다’

10월 23일(목) ‘교회, 선교로 꽃피우다’   주제강의 7 교회, 선교의 촉매제 / 이재훈 위임목사   모든 교회는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가 이에 해당합니다. 교회가 선교적 소명을 잃으면 두 번째 유형, ‘현상 유지에 급급한 교회(Maintenance Curch)’가 됩니다. 생존을 위해 존재하고, 소명을 잃어버린 자신만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역사가 오래될수록 세 번째 유형인 ‘박물관 같은 교회(Museum curch)’가 됩니다. 교회 존재 자체가 박물관처럼 되버리고, 모든 의사결정이 과거에 머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헌신, 도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헌신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물관 같은 교회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선교가 교회의 심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지만 양식을 먹고 호흡만 한다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선교가 영혼의 운동입니다. 교회를 있게 한 것은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선교하시는 게 아니라, 그분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기능이 필요합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로 부르셨습니다. 정기적인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배 자체로만 존재하면 소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둘째, ‘제자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셋째 ‘공동체’입니다. 과거의 목회 패러다임에서 목회자의 주요 일과는 ‘심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방, 즉 공동체의 만남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을 촉진하고 형성시키는 교회를 가리켜 우리는 ‘선교적 교회’라고 말합니다. 선교에 헌신한 교회는 예배, 제자 훈련, 공동체가 살아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의 촉매’라는 것은 세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와 선교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독생자와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둘째, 교회의 선교는 세상에 복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존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모험하는 공동체입니다. 생존이 교회의 최고 목표가 되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이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계속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주제강의 8 변화에 잘 대응하는 선교 / 넬슨 제닝스 박사(GMLF 이사장)   그동안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새로운 상황과 도전, 변화에 잘 적응해서 선교를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이 그를 이집트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이집트 사람처럼 변해갔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가 이집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바로의 왕가에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위대한 아내를 맞이했고, 위대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신약의 베드로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성령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변화를 경험하며 적응했고, 그 속에서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우리도 변화 속에서 씨름하며 기도하고, 적응하며 성장하고, 배웁니다. 온누리교회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지속해 왔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중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온누리교회는 그 변화에 반응해서 이 땅에 온 중국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중국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1990년 중반부터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온누리교회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변화한 환경에서 함께 기도하고 적응하며 선교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야 할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온누리교회가 대형교회로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온누리교회는 대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아갔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 써가자는 ‘Acts29 비전’은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누리교회만이 <사도행전>을 이어간다’는 외부의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교만과 안주함’의 도전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경제는 안정적이고,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이 자만과 안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계속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유지한 채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다양한 민족의 교회와의 동역’입니다. 다양한 민족의 교회와 함께 사역하는 것은 도전입니다. 가나, 일본, 인도네시아 교회가 한국과 비교해서 연약해 보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동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화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배우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배우고 성장하십시오. 주제강의3 글로벌 선교 협력 / 유병국 선교사(WEC)   지금 우리 눈앞에 마지막 남은 선교지들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어떤 곳보다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복음에 저항하고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꾼과 전략적인 연합이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서구 교회가 심각한 선교사 인력 감소를 겪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선교단체 WEC의 통계를 보면, 서구 선교사 수가 불과 10여 년 만에 70%가량 줄었고,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도 50%가량 감소했습니다. 특히 한국에 장로교를 처음 전한 선교사들을 배출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마저 올해 3월 말 문을 닫았습니다. 남아 있던 선교사 57명 중에서 54명이 사역을 지속할 수 없게 된 충격적인 상황입니다. 한국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2010년 3만 명에 가까웠던 한국 선교사가 현재 2만 1천여 명으로 8천 명가량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히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만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들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베트남은 공산국가이지만 3천여 개 교회가 있고, 200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전체 국민 70%, 케냐는 1,800만 명이 개신교인입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에도 2,500만 명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에 하나님이 세워 놓은 일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WEC가 이 지역에서 선발한 선교사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고 헌신적이며, 이미 다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현지에 바로 적용되는 효율적인 인력입니다. 그런데  현지 교회의 경제적 여건상 월 200불에서 400불 정도의 적은 선교비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많지만 경제력이 부족한 곳이 있는 반면, 한국이나 서구 교회는 경제력은 있지만, 보낼 일꾼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생산 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글로벌 경영’을 하듯이, 선교 역시 ‘글로벌 선교 협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WEC와 같은 선교단체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선교사를 선발하고 훈련해서 파송하고, 한국이나 서구 교회가 이들에게 부족한 선교비를 지원한다면 어떨까요? 국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글로벌 선교 협력입니다. 어떤 나라의 일꾼이든 힘을 모아 마지막 남은 선교지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저녁집회 3 선교사역 완성(Finishing the task) <마태복음> 24장 14절 / 이재환 선교사(컴미션) 저는 하용조 목사님과의 만남을 평생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비전, 사랑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2천1만 비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비전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 현장에 계신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을 보면 감개무량합니다. 제가 영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Finished Task’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교라는 과업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선교를 빨리 끝내라니,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서양 사람들이 선교에 대한 굉장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는 끝내야 하는 사역입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끝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끝내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끝내야 할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교회는 이 사명을 반대하거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 사명을 이루는 데 게을러서도 안 되고, 그만두어서도 안 됩니다.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명령이요,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과 교회가 현실의 기준을 잣대로 ‘선교를 할 수 있다, 없다’를 판단합니다. 현실은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보내는 능력을 주시든지, 가는 용기를 주시든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여러분,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이유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죽어서 가는 천국입니까? 아니면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올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저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킹덤 빌더’라고 믿습니다.  온누리교회가 한 번 더 하용조 목사님이 가르치신 선교의 비전과 열정을 가지고 선교의 자리로 나아간다면, 저는 21세기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믿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게 하는 일에 우리가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2025-10-25      제1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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